[성령강림] 성령께서 깨닫게 하시는 것들
본문
만물의 영장인 사람이라 할지라도, 여러 가지 면에서 얼마나 나약하고 답답한지 모른다. 마귀는 우리를 더욱 현명하게 해 줄 것을 약속하고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게 했지만, 사실은 그 결과로 인간은 지적 능력이 현저히 저하되고 말았던 것을 기억하자. 엄청난 양의 뇌세포가 있지만, 대부분 그 중에서 15%도 제대로 써먹지 못한다고 한다.
일전에 기독공보에 보니까, 네팔이라는 나라에 대해서 소개한 글이 있었다. 그 나라는 아직도 짐승의 피를 뿌리며 자신들의 죄를 사해달라고 빈다. 사람이 죽어도 크게 슬퍼하지 않는다. 환생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가난해서 장작을 넉넉하게 사지 못해서 시체가 다 타지 않았는데, 갠지스 강물에 버려진다. 얼마 떨어지지 않는 곳에서는 그 물로 목욕을 한다. 성수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 물로 아낙들은 밥도 하고 빨래도 한단다. 세계에서 가장 못사는 나라 10개국에 들어있고, 문맹율 80%, 평균수명 46세, 그나마 42%가 15세 이하인 미개한 나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민들은 행복하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으니, 가난과 무지를 부끄럽게 여기지도 않는 나라이다.
네팔 사람들이 아무리 발버둥 쳐도 빠져 나올 수 없는 것이 있다. 그것은 곧 힌두교 세계관이다. 세계적으로도 힌두교와 불교국가가 가장 열악한 환경을 가지고 있다. 왜일까 그것은 힌두교가 기본적으로 운명론을 믿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이 자신을 마귀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한다.
마귀는 무식한 영이다. 마귀는 사람들이 깨닫는 것을 지극히 싫어한다. 깨닫게 되면 더 이상 마귀를 섬기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마귀는 거짓의 영이다.
-마귀는 살인의 영이다.
-마귀는 가난의 영이다.
그러나 성령은 그렇지 않다. 성령은 진리의 영이시다. 성령이 오시면 우리는 깨닫게 되고, 갈팡 질팡하던 삶은 제 길을 찾는다.
성령은 사랑의 영이시다. 성령이 임하면 영혼을 사랑하게 되고, 의미없던 인생에 의미가 있게 되고, 참으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된다.
성령은 부요케 하시는 영이시다. 성령은 삶을 풍요롭게 하신다. 이해의 폭을 넓히신다. 경제적인 폭을 넓히신다. 지경을 넓히신다. 영향력을 넓히신다. 이것이 진정한 풍요이다. 어떤 사람은 돈은 많이 벌지는 몰라도 틀에 박힌 삶을 살아야 한다. 얼마나 답답할 것인가 성령은 우리를 경제적인 억압에서 해방시키신다.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 성령이 오셔서 깨닫게 해 주시는 것 세가지에 대해서 말씀해 주셨다.
본론:
1. 죄를 깨닫게 하심(9)
세상에는 깨달음의 종류도 많다. 맨처음 아기들은 엄마를 깨닫는다. 그 다음에는 엄마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많이 있음을 깨닫는다. 그 다음에는 친구를 깨닫는다. 친구를 깨닫고 나면 친구가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그 다음에는 공부를 깨닫는다. 모르는 것을 하나 하나 알게 되면서 공부에 빠지게 된다. 그렇하면서 세상을 깨우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은 공부한 사람을 요구한다. 공부하지 않고는 세상을 깨우칠 수 없기 때문이다.
세상 사람들은 여기에서 깨우침이 그칠지 모르나 아직도 깨달아야 할 것은 많다.
먼저 우리는 죄를 깨달아야 한다. 이 세상에는 죄가 많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다음에 죄는 많지만, 죄를 짓지 않고 살려고 하는 자들도 많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인생이나 삶에 대해서 진지하고 깊게 생각하려는 사람이라면 저마다 이 죄의 문제를 놓고 고민한다. 그리고 죄를 짓지 않고 살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오늘 예수님은 죄에 대해서 우리에게 큰 깨우침을 주시고 계신다. 어느 누구도 죄에 대해서 이렇게 충격적인 선언을 한 적이 없다. 이 선언은 네가 바로 죄인이라는 그런 종류의 충격이 아니다. 무엇이 죄인가에 대한 선언이다. 무엇이 죄인가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을 아들을 믿지 않는 것이 죄라고 선언하신다. 다시 말해서 불신앙이 곧 죄라는 것이다.
우리는 생명을 담보로 했던 친구의 우정에 관한 이야기를 잘 안다. 어떤 사형수에게 친구가 있었는데, 이 친구는 사형수를 죽기전에 어머니를 뵙고 오게 하려고 대신 감옥에 갖혔다가, 사형당하는 직전에 사형수가 돌아왔다는 이야기 그래서 두사람의 우정에 감탄한 임금이 두 사람 모두를 풀어 주었다는 이야기 말이다.
여기에 질문이 하나있다. 만약 이 친구가 사형수를 풀어주기 직전에 생각이 바뀌어서 대신 감옥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했다면 이 친구에게 죄가 있을까 없을까 만약 있다면 어떤 죄일까
분명히 사형에 해당되는 죄는 사형수가 졌다. 그러므로 이 친구에게는 형법상 아무런 죄가 없다. 그러나 그 친구는 사형수를 믿지 못한 죄가 있다. 우리는 이런 죄를 배신이라 한다. 만약 사형수가 형장에 끝까지 나타나지 않았다면 그는 사형에 해당되는 죄 위에다 배신의 죄를 더 짓는 격이 된다.
그러므로 배신의 죄는 사형에 해당되는 죄보다 더 심각한 죄가 아닐 수 없다. 이것은 원수를 죽이는 죄보다도 더 큰 죄인 것이다. 이 친구는 비록 살인을 저지른 사형수라도 친구를 배신하는 파렴치는 아니라는 확신이 있었기에 친구를 대신해서 감옥에 갖힌 것이다.
세상에는 그러므로 두가지 종류의 죄가 있다. 분명한 형법상 저지른 죄가 있고, 천륜을 어기는 죄가 있다. 예수를 믿지 않은 유대인들은 바로 천륜을 어기는 죄를 지은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친구이시다. 사형수를 대신한 친구도 엄청난 친구이지만, 예수님은 더 나아가서 아예 대신 사형을 언도 받고, 형장에서 사형을 당하신 분이시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것을 잘 알고 있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한두번 말씀하신 것이 아니었다. 수천년을 두고 지속적으로 말씀 하셨고, 예수님 자신도 여러차례 말씀하셨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믿지 않았다.
선악과를 따 먹은 죄보다 더 큰 죄가 있다. 살인을 한 죄보다도 더 큰 죄가 있다. 그것은 천륜을 배신한 죄이다.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시다. 우리의 주인이시다.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를 극진히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땅에 보내셔서 우리의 죄를 대신 담당하시도록 하셨다. 그리고는 우리에게 다만 그를 믿으라 하셨다. 믿으면 죄가 사해진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미 죄가 다 사해 졌다는 것을 믿으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지 않는 것은 바로 이 천륜을 어기는 죄가 되는 것이다. 배신행위라는 것이다.
-당시 유대인들은 율법을 지켜야 죄를 범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성령께서 오셔서 예수를 믿지 않는 것이 가장 큰 죄임을 깨닫게 해 주신다는 말씀이다.
-정말로 성령께서 임하셔서 베드로가 담대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이야기 할 때 이스라엘 사람들은 비로소 자신들의 배신행위를 깨닫고, 크게 회개하여 교회를 이루었던 것이다.
-뭐가 진짜 죄인가 예수를 믿지 않는 것이 죄이다.
2. 의를 깨닫게 하심(10)
-당시에 유대인들은 올바른 행위를 통해서 여호와 하나님앞에 의를 쌓는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앞 다투어 제사를 드리기에 여념이 없었다. 성경에 있지도 않는 여러 가지 율법들을 손수 제작해서 지나치게 율법을 지키면서 스스로 이렇게 철저히 율법을 지키는 자신을 대견 스럽게 여기고, 의롭게 여겼던 것이다. 그렇게 더 소중한 율법정신은 망각하고 율법의 문자적이고 형식적인 면에 치중하다 보니 우습지도 않는 광경이 펼쳐진다.
타이타닉 영화에서 보면 두 주인공 연인이 간신히 물 속에서 빠져 나와서 살기 위해서 3등칸을 빠져 나가기 위해서 기물을 파손하는 행위를 하게 되는데, 어떤 선원이 붸아 오면서 당장에 그 기물을 원위치 시키지 않으면 고발 조치 하겠다고 핏대를 올리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때 두 사람이 동시에, '닥쳐'라고 소리를 지른다. 그 선원도 율법 정신에는 눈이 멀었고, 그저 규칙을 준수하는데 만 정신이 없었던 것이다. 그 선원의 상관이 규율을 얼마나 강조했으면 그런 현상이 벌어질까
예수님 당시에도 예수님이 안식일에 병을 고치신다고, 제자들이 밀밭 사이로 지나가다가 밀을 까 부른다고 얼마나 시비를 걸었던가
율법정신의 핵심은 여호와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이다. 이 두가지가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고 예수님이 선언 하셨다. 그런데 이 두가지 사랑은 사실 색깔이 다르고 냄새도 다른 그런 두 종류의 사랑은 아니다. 여호와 하나님 사랑도 이웃 사랑도 사랑인 것이다.
딱딱할 것 같은 율법이지만, 그 속에는 따뜻한 사랑이 숨어있는 것이다.
오늘 10절의 말씀은 대단히 비약적이다. 마치 암호코드를 제자들에게 제시하는 듯한 느낌이다. 예수님이 아버지께로 가시는 것이 의임을 깨닫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다.
운율 때문일까 예수님은 간단하게 '아버지께로 가시는 것'을 의로 표현 하셨다. 아버지께로 가셨다는 표현 속에는 아버지께로부터 오셨다는 표현이 숨어있다. 또 오셔서 십자가를 지셨고, 죽음과 음부에 내려 가셨으며, 제3일에 부활 하신다는 내용까지 포함되어 있다. 그래야 아버지께로 가신다는 말씀이 완성된다. 예수님으로서는 하루라도 빨리 이 사명을 마치고 본래 있었던 보좌 우편으로 복귀 하시기를 소망하시는 말씀인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하시는 것이야말로 참된 의를 이루는 것임을 보이고자 하신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이러한 일련의 일들을 통해서 이루시고 싶으신 것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인 것이다. 이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표현 방정식인 것이다.
3. 심판을 깨닫게 하심(11)
심판이 이미 실행 되었음.
심판이 더디다고 생각하며 죄를 짓지 말아야 할 것.
특히 택함을 받은 우리는 심판이 즉각적임을 깨달아야 한다.
일전에 기독공보에 보니까, 네팔이라는 나라에 대해서 소개한 글이 있었다. 그 나라는 아직도 짐승의 피를 뿌리며 자신들의 죄를 사해달라고 빈다. 사람이 죽어도 크게 슬퍼하지 않는다. 환생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가난해서 장작을 넉넉하게 사지 못해서 시체가 다 타지 않았는데, 갠지스 강물에 버려진다. 얼마 떨어지지 않는 곳에서는 그 물로 목욕을 한다. 성수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 물로 아낙들은 밥도 하고 빨래도 한단다. 세계에서 가장 못사는 나라 10개국에 들어있고, 문맹율 80%, 평균수명 46세, 그나마 42%가 15세 이하인 미개한 나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민들은 행복하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으니, 가난과 무지를 부끄럽게 여기지도 않는 나라이다.
네팔 사람들이 아무리 발버둥 쳐도 빠져 나올 수 없는 것이 있다. 그것은 곧 힌두교 세계관이다. 세계적으로도 힌두교와 불교국가가 가장 열악한 환경을 가지고 있다. 왜일까 그것은 힌두교가 기본적으로 운명론을 믿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이 자신을 마귀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한다.
마귀는 무식한 영이다. 마귀는 사람들이 깨닫는 것을 지극히 싫어한다. 깨닫게 되면 더 이상 마귀를 섬기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마귀는 거짓의 영이다.
-마귀는 살인의 영이다.
-마귀는 가난의 영이다.
그러나 성령은 그렇지 않다. 성령은 진리의 영이시다. 성령이 오시면 우리는 깨닫게 되고, 갈팡 질팡하던 삶은 제 길을 찾는다.
성령은 사랑의 영이시다. 성령이 임하면 영혼을 사랑하게 되고, 의미없던 인생에 의미가 있게 되고, 참으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된다.
성령은 부요케 하시는 영이시다. 성령은 삶을 풍요롭게 하신다. 이해의 폭을 넓히신다. 경제적인 폭을 넓히신다. 지경을 넓히신다. 영향력을 넓히신다. 이것이 진정한 풍요이다. 어떤 사람은 돈은 많이 벌지는 몰라도 틀에 박힌 삶을 살아야 한다. 얼마나 답답할 것인가 성령은 우리를 경제적인 억압에서 해방시키신다.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 성령이 오셔서 깨닫게 해 주시는 것 세가지에 대해서 말씀해 주셨다.
본론:
1. 죄를 깨닫게 하심(9)
세상에는 깨달음의 종류도 많다. 맨처음 아기들은 엄마를 깨닫는다. 그 다음에는 엄마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많이 있음을 깨닫는다. 그 다음에는 친구를 깨닫는다. 친구를 깨닫고 나면 친구가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그 다음에는 공부를 깨닫는다. 모르는 것을 하나 하나 알게 되면서 공부에 빠지게 된다. 그렇하면서 세상을 깨우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은 공부한 사람을 요구한다. 공부하지 않고는 세상을 깨우칠 수 없기 때문이다.
세상 사람들은 여기에서 깨우침이 그칠지 모르나 아직도 깨달아야 할 것은 많다.
먼저 우리는 죄를 깨달아야 한다. 이 세상에는 죄가 많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다음에 죄는 많지만, 죄를 짓지 않고 살려고 하는 자들도 많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인생이나 삶에 대해서 진지하고 깊게 생각하려는 사람이라면 저마다 이 죄의 문제를 놓고 고민한다. 그리고 죄를 짓지 않고 살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오늘 예수님은 죄에 대해서 우리에게 큰 깨우침을 주시고 계신다. 어느 누구도 죄에 대해서 이렇게 충격적인 선언을 한 적이 없다. 이 선언은 네가 바로 죄인이라는 그런 종류의 충격이 아니다. 무엇이 죄인가에 대한 선언이다. 무엇이 죄인가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을 아들을 믿지 않는 것이 죄라고 선언하신다. 다시 말해서 불신앙이 곧 죄라는 것이다.
우리는 생명을 담보로 했던 친구의 우정에 관한 이야기를 잘 안다. 어떤 사형수에게 친구가 있었는데, 이 친구는 사형수를 죽기전에 어머니를 뵙고 오게 하려고 대신 감옥에 갖혔다가, 사형당하는 직전에 사형수가 돌아왔다는 이야기 그래서 두사람의 우정에 감탄한 임금이 두 사람 모두를 풀어 주었다는 이야기 말이다.
여기에 질문이 하나있다. 만약 이 친구가 사형수를 풀어주기 직전에 생각이 바뀌어서 대신 감옥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했다면 이 친구에게 죄가 있을까 없을까 만약 있다면 어떤 죄일까
분명히 사형에 해당되는 죄는 사형수가 졌다. 그러므로 이 친구에게는 형법상 아무런 죄가 없다. 그러나 그 친구는 사형수를 믿지 못한 죄가 있다. 우리는 이런 죄를 배신이라 한다. 만약 사형수가 형장에 끝까지 나타나지 않았다면 그는 사형에 해당되는 죄 위에다 배신의 죄를 더 짓는 격이 된다.
그러므로 배신의 죄는 사형에 해당되는 죄보다 더 심각한 죄가 아닐 수 없다. 이것은 원수를 죽이는 죄보다도 더 큰 죄인 것이다. 이 친구는 비록 살인을 저지른 사형수라도 친구를 배신하는 파렴치는 아니라는 확신이 있었기에 친구를 대신해서 감옥에 갖힌 것이다.
세상에는 그러므로 두가지 종류의 죄가 있다. 분명한 형법상 저지른 죄가 있고, 천륜을 어기는 죄가 있다. 예수를 믿지 않은 유대인들은 바로 천륜을 어기는 죄를 지은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친구이시다. 사형수를 대신한 친구도 엄청난 친구이지만, 예수님은 더 나아가서 아예 대신 사형을 언도 받고, 형장에서 사형을 당하신 분이시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것을 잘 알고 있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한두번 말씀하신 것이 아니었다. 수천년을 두고 지속적으로 말씀 하셨고, 예수님 자신도 여러차례 말씀하셨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믿지 않았다.
선악과를 따 먹은 죄보다 더 큰 죄가 있다. 살인을 한 죄보다도 더 큰 죄가 있다. 그것은 천륜을 배신한 죄이다.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시다. 우리의 주인이시다.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를 극진히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땅에 보내셔서 우리의 죄를 대신 담당하시도록 하셨다. 그리고는 우리에게 다만 그를 믿으라 하셨다. 믿으면 죄가 사해진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미 죄가 다 사해 졌다는 것을 믿으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지 않는 것은 바로 이 천륜을 어기는 죄가 되는 것이다. 배신행위라는 것이다.
-당시 유대인들은 율법을 지켜야 죄를 범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성령께서 오셔서 예수를 믿지 않는 것이 가장 큰 죄임을 깨닫게 해 주신다는 말씀이다.
-정말로 성령께서 임하셔서 베드로가 담대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이야기 할 때 이스라엘 사람들은 비로소 자신들의 배신행위를 깨닫고, 크게 회개하여 교회를 이루었던 것이다.
-뭐가 진짜 죄인가 예수를 믿지 않는 것이 죄이다.
2. 의를 깨닫게 하심(10)
-당시에 유대인들은 올바른 행위를 통해서 여호와 하나님앞에 의를 쌓는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앞 다투어 제사를 드리기에 여념이 없었다. 성경에 있지도 않는 여러 가지 율법들을 손수 제작해서 지나치게 율법을 지키면서 스스로 이렇게 철저히 율법을 지키는 자신을 대견 스럽게 여기고, 의롭게 여겼던 것이다. 그렇게 더 소중한 율법정신은 망각하고 율법의 문자적이고 형식적인 면에 치중하다 보니 우습지도 않는 광경이 펼쳐진다.
타이타닉 영화에서 보면 두 주인공 연인이 간신히 물 속에서 빠져 나와서 살기 위해서 3등칸을 빠져 나가기 위해서 기물을 파손하는 행위를 하게 되는데, 어떤 선원이 붸아 오면서 당장에 그 기물을 원위치 시키지 않으면 고발 조치 하겠다고 핏대를 올리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때 두 사람이 동시에, '닥쳐'라고 소리를 지른다. 그 선원도 율법 정신에는 눈이 멀었고, 그저 규칙을 준수하는데 만 정신이 없었던 것이다. 그 선원의 상관이 규율을 얼마나 강조했으면 그런 현상이 벌어질까
예수님 당시에도 예수님이 안식일에 병을 고치신다고, 제자들이 밀밭 사이로 지나가다가 밀을 까 부른다고 얼마나 시비를 걸었던가
율법정신의 핵심은 여호와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이다. 이 두가지가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고 예수님이 선언 하셨다. 그런데 이 두가지 사랑은 사실 색깔이 다르고 냄새도 다른 그런 두 종류의 사랑은 아니다. 여호와 하나님 사랑도 이웃 사랑도 사랑인 것이다.
딱딱할 것 같은 율법이지만, 그 속에는 따뜻한 사랑이 숨어있는 것이다.
오늘 10절의 말씀은 대단히 비약적이다. 마치 암호코드를 제자들에게 제시하는 듯한 느낌이다. 예수님이 아버지께로 가시는 것이 의임을 깨닫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다.
운율 때문일까 예수님은 간단하게 '아버지께로 가시는 것'을 의로 표현 하셨다. 아버지께로 가셨다는 표현 속에는 아버지께로부터 오셨다는 표현이 숨어있다. 또 오셔서 십자가를 지셨고, 죽음과 음부에 내려 가셨으며, 제3일에 부활 하신다는 내용까지 포함되어 있다. 그래야 아버지께로 가신다는 말씀이 완성된다. 예수님으로서는 하루라도 빨리 이 사명을 마치고 본래 있었던 보좌 우편으로 복귀 하시기를 소망하시는 말씀인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하시는 것이야말로 참된 의를 이루는 것임을 보이고자 하신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이러한 일련의 일들을 통해서 이루시고 싶으신 것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인 것이다. 이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표현 방정식인 것이다.
3. 심판을 깨닫게 하심(11)
심판이 이미 실행 되었음.
심판이 더디다고 생각하며 죄를 짓지 말아야 할 것.
특히 택함을 받은 우리는 심판이 즉각적임을 깨달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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