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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 성령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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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가장 큰 사건이 둘이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 탄생이고 또 하나는 성령강림입니다. 신구약 성경을 보면 예수님 탄생이 주제로 되어 있습니다. 그만큼 예수님의 탄생은 굉장한 사건입니다. 그리고 예수님 승천 후에 이 땅에 성령이 강림한 사건도 놀라운 사건입니다. 신약교회가 탄생된 것도 이 성령강림으로 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 땅에 성령을 보내신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이 땅에 있는 모든 신앙인들로 하여금 힘있게 살고, 은혜롭게 살게 하시기 위해서 입니다. 그래서 우리 신앙인들은 모두 이 성령에 힘입어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그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성령은 이렇게 우리 신앙인들에게 도움을 주시는 영입니다. 성령이 우리들에게 도움을 주시는 내용이 대체적으로 몇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기억나게 하시는 축복” 입니다.
이것은 대단한 축복입니다. 사람은 기억에 한계가 있습니다. 듣고 보고서도 곧 잊어버립니다. 그래서 들은 것을 오래 기억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은 축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지난주간에 들은 설교를 오늘 기억하고 계신 분들이 얼마 없을 것입니다. 대부분은 곧 잊어버립니다. 그것은 우리 설교자들을 위해서는 여간 고마운 일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적당히 잊어 주시는 것도 굉장히 도움이 됩니다. 그렇지만 잊어버리지 말아야 할 것을 잊어버린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읽은 본문을 보면 그런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했습니다. 본문을 보면 “때가 되면 내가 기억나게 하리라”(4)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이
미 들어서 잊어버린 것 같은 말씀들도 필요한 시간이 되고 적용되어야 할 환경이 되면 성령이 그때마다 생각나게 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굉장한 축복입니다.
여러분들은 그런 기억이 있을 것입니다. 다 잊어버린 줄 알았는데 어느 날 그 옛날인가 옛날에 들었던 말씀이 순간적으로 기억나는 것을 체험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주 어려운 환경에서 괴로워하고 있는데 순간 스쳐 가는 성경 말씀이 선명하게 떠오를 때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것도 그 상황에 아주 적합한 성경말씀이 떠 오를 때 얼마나 신기한 일입니까. 그것이 바로 성령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또 누가복음 12:11절을 보면 “사람들이 권세자 앞에 너희를 끌고 갈 때 너희는 두려워 말라 내가 마땅히 그 앞에서 할 말을 가르쳐 주리라” 했습니다. 이 말은 환란의 자리에 처할 때도 걱정 말라는 말입니다. 그 순간에도 적절한 대답할 말을 기억나게 해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이것이 성령이 우리들을 도우시는 구체적인 축복입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은 이 땅에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우리들이 너무나 무능하고 미약하기 때문에 그 힘에 의해서 살아가라는 뜻입니다. 이같은 감화가 여러분들에게 있으시기를 기원합니다.
또 “유익하게 하시는 축복“ 입니다.
성령은 우리들에게 모든 일을 유익하게 하시는 영입니다. 사탄은 처음에는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고, 기쁨을 주고, 성공을 주는 것 같아도 마지막에는 반드시 그 결과가 부덕으로 끝나게 합니다. 그런데 성령의 역사는 그 결과가 반드시 유익으로 나타나게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 신앙인들은 매사를 긍정적으로 해석하고 기다리고 살아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령의 역사는 오늘 현재를 볼 때는 비관스러운 일들도 그 결과는 반드시 합동해서 유익하게 하시는 영이시기 때문입니다(롬8:28).
본문 7절을 보면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13절에 보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고,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게 하시리라“ 고 했습니다. 그리고 시편 48:14절을 보면 ”여호와 하나님은 영영히 우리 여호와 하나님이시니 우리를 죽을 때까지 인도하시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성령은 우리들의 모든 일, 이를테면 오늘의 일, 내일의 일, 장래의 일, 심지어는 우리의 운명까지도 맡아서 인도하시는 영이십니다. 그래서 성령은 우리의 든든한 배경이고 빽이고 보호자이십니다.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아브라함 링컨(Abraham Lincoln)이 노예해방을 위해서 남북전쟁을 했습니다. 그 전쟁은 7년 동안이나 계속되었는데 하도 피해가 많으니까 참모들이 말하기를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편에 계시면 참 좋겠습니다“ 하고 말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남북양쪽 모두가 기독교인들이었기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이 어느 편에 계시느냐에 따라서 승자가 결정된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때 링컨이 대답하기를 ”나는 여호와 하나님이 내 편에 계시느냐가 걱정되는 것이 아니고 내가 정말 여호와 하나님 편에 서 있는가가 염려된다“ 고 했다고 합니다.
정말 염려되는 것은 내가 여호와 하나님 편에 서 있는가가 문제지 여호와 하나님은 내편을 떠나시질 않습니다. 그 여호와 하나님의 영은 우리를 버리시는 영이 아니십니다. 한번 약속된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는 내가 버리고 내가 그 곁을 떠나서 문제가 되는 것이지 그분이 나를 먼저 떠나는 법은 없습니다.
그래서 신앙인은 성령 안에서 살아갈 때만이 가장 힘있게 삶을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우리들에게 정말 행복한 순간이 있다면 그것은 성령 안에 깊숙이 들어와서 살아가는 때입니다. 그리고 그 성령에게 우리의 모든 것을 맡겨 놓고 살아갈 때가 가장 행복한 때입니다. 그러면 성령은 매사를 당신의 은혜를 따라서 우리를 적절하게 인도해 주십니다. 그것이 바로 신앙인의 삶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니체(F W. Nietzsche)라는 사람은 지나치게 자아(自我)에 충실했던 사람입니다. 자기 자신에게 너무나 충실하다 보니까 누구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신은 죽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생은 자신만이 책임질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런 니체와 정반대로 아주 대조적인 사람이 하나 있는데 그 사람이 파스칼(Blaise Pascal)이라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니체와는 정반대로 아주 경건한 신앙인이었습니다. 사람이 이 세상에서 사랑할만한 대상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뿐이고 미워할 존재는 자기 자신뿐이라고 했습니다.
이 두 사람은 양극입니다. 얼마나 대조적입니까. 하나는 신을 철저하게 부정을 했고 또 하나는 신을 철저하게 신뢰해서 인생 전체를 그 신께 맡기고 살아가는 신앙인이었습니다. 이 두 사람이 마지막에 도달한 지점을 보면 한사람은 허무철학을 만들어 놓고 그 허무 속에서 살아가다가 자살해서 죽어 버렸고, 또 한 사람은 팡세(Les Pensees)라는 수상록을 만들어서 많은 사람들에게 일대 소망을 안겨 주고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렇게 성령은 사람으로 하여금 매사를 소망적으로 인도해 주십니다. 성령의 생각은 모두 전진적이고 소망적이고 미래 적입니다. 그래서 성령은 때로 우리들이 생각지도 못한 생각을 주시기도 하고, 또 새 길을 열어 주시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새 길을 만들어 주시기도 하십니다. 그러니까 성령은 우리들이 전혀 생각지도 못한 방법으로 우리를 인도해 주시는 영이십니다. 그런가 하면 또 어떤 때는 우리들의 짧은 생각으로 계획하고 시도하는 일들을 앞에서 가로막으실 때도 있습니다. 내가 옳다고 인정하고 걸어가는 앞길을 가로 막을 실 때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성령의 유익하게 하시는 인도입니다.
알렉산더 대왕이 유럽을 정복하고 자신만만하게 개선해서 집에 돌아왔습니다. 그때 집에서 기르던 원숭이가 재롱 떠는 것을 어루만지다가 그만 손가락을 물렸습니다. 그리고는 그것이 원인이 되어 말라리아 병에 걸려 24시간 내에 죽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워털루 전쟁 때 나폴레옹은 곳곳에 비밀스럽게 대포를 설치해 놓고는 승리를 장담했습니다. 그런데 그 밤에 느닷없이 비가 내려서 대포를 장전한 발사대들이 모두 진흙탕 속에 빠져버리는 바람에 그만 전쟁에서 대패하고 말았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모두 이렇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원숭이 한 마리로, 소나기 한차례로 역사의 방향을 일순간에 바꾸어 놓으십니다. 그리고 인간의 거창한 계획이나 호언장담했던 말들을 무력하게 만들어 놓으십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여호와 하나님의 은총이 없으면 내 뜻대로 세상을 살아갈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행복한 순간이 있다면 그것은 성령 안에 깊숙이 들어가서 살아가는 때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그 성령은 당신의 선하신 뜻대로 우리를 책임지시고 인도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은 이 땅에 성령을 보내 주셨습니다.
세 번째는 ”모든 것의 기준이 되어주시는 축복“입니다.
본문 16:8을 보면 그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성령은 모든 것의 기준이 되십니다. 그리고는 책망하십니다. 사람이 죄를 짓게 되면 우선 성령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아픔을 주십니다. 그래서 사람으로 하여금 고민하게 하고 번뇌하게 만들어 놓습니다.
옛날 헤롯 대왕은 동생의 아내를 뺏어서 아내를 삼았다고 책망하던 세례요한의 목을 베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말하는 어머니와 두 아들의 목도 베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헤롯은 저녁때 산책길에서 가랑잎이 움직이는 소리만 들어도 소스라치게 놀라서 칼을 뽑아들었다고 합니다. 사람이 그렇게 죄를 지으면 나약해집니다. 그래서 가랑잎 소리에도 놀라게 됩니다. 그것은 성령이 마음속에서 하나의 기준이 되어 주기 때문입니다. 그 기준에서 이탈을 하게되면 사람이 그렇게 불안해지고 나약해지는 것입니다.
또 사람은 죄를 짓게 되면 공범의식이라는 것이 생깁니다. 그래서 죄인은 자기 같은 죄인을 반가와 합니다. 좋은 면 보다 나쁜 면일 수록 자기 같은 죄인을 더 반가와 합니다. 예배 때 보면 늦는 분들이 있습니다. 늦게 들어오게 될 때는 참 마음이 미안합니다. 그래서 죄송한 마음으로 살그머니 들어와서 뒷좌석에 앉습니다.
그러다가 자기 보다 더 늦은 사람이 오게 되면 참 마음이 반갑습니다. 그때는 마음이 한결 가벼워집니다. 그런데 늦게 온 분이 장로님일 때는 더 반갑습니다. 그 때는 굉장히 위로가 됩니다. 이것이 공범의식입니다. 어두움은 어두움을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이렇게 모든 것의 기준이 되어주시기 때문에 때로 사람들의 마음에 아픔을 주기도 하고 경고를 주기도 합니다.
사도행전 3:14절을 보면 그 유명한 베드로의 설교가 나옵니다. 거기 보면 베드로가 유대인들을 향해서 설교하기를 ”너희들이 예수를 죽였지만 여호와 하나님이 그를 부활시키셨다“하고 강렬하게 설교를 합니다. 그러니까 거기 모여있던 유대인들이 양심에 찔림을 받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찌할꼬“하고 고민하면서 회개를 하는데 그날 회개하고 개종한 사람이 3천명이나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 역사가 바로 성령의 역사입니다.
그때 역사 하시던 성령은 오늘도 똑같이 우리들에게 오셔서 지금 역사하고 계십니다. 때로 찔리는 마음으로 역사 하시고, 때로는 아픈 마음으로 역사 하시고, 또 때로는 아주 만족스런 마음으로도 역사를 하십니다. 왜 그러냐 하면 성령은 모든 것의 기준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 기준에 넘을 때는 기쁨으로 역사 하시고, 그 기준에 미달될 때는 아픔으로 역사를 하십니다. 이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네 번째는 ”자유하게 하시는 축복“입니다.
본문 13절을 보면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라“ 이 말씀은 모든 신앙인들로 하여금 자유케 하시리라는 말씀입니다. 이 세상에서 진정한 자유는 신앙에서 오는 자유입니다. 성령이 주는 자유는 무한한 자유입니다. 그리고 그 자유는 어떤 환경에 처하든 흔들리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그런 그림을 보셨을 것입니다. 머리가 하얀 할아버지 한분이 뚝배기 커피 잔에 커피를 타 놓고 빵 한 조각 놓고 기도하는 모습입니다. 그분이 고아의 아버지라고 일컬어지는 조지 뮬러(George Mueller)라는 사람입니다. 얼마나 은혜로움과 만족함이 거기에 있습니까. 성령이 주시는 만족함과 자유함은 그런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참 자유한 사람입니다. 보리밥 한 그릇을 앞에 놓고서 그렇게 기도하며 감사한 마음으로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참 자유한 사람입니다. 이 자유함이 바로 성령이 주시는 자유입니다.
또 이런 자유함도 있습니다. 1963년 8월 28일 미국의 마틴 루터 킹 목사가 20만명의 흑인 군중들을 이끌고 워싱턴 행진을 했습니다. 그때는 한참 흑백문제로 온 나라가 갈등을 겪고 있을 때입니다. 그때 백인들이 흑인들을 극도로 무시하고 경멸했을 때입니다. 흑인들도 그런 백인들을 향해서 폭력을 쓰고 방화하고 살인하고 하던 갈등의 시대였습니다. 그때 킹 목사는 20만명의 흑인 군중들을 이끌고 워싱턴 시가지를 행진하면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우리에게도 자유는 있다, 우리에게 그런 자유를 주신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께 우리는 감사한다, 우리를 향해서 폭력을 쓰는 자에게 우리가 할 일은 어디까지나 폭력이 아닌 사랑이다, 우리는 오직 이런 때에 우리의 행동으로 백인들은 우리를 미워하지만 우리는 백인들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자“ 그렇게 외치면서 시가지를 행진했습니다.
얼마나 자유한 사람입니까. 얼마나 멋진 정신입니까. 이 힘이 바로 성령이 주시는 힘입니다. 성령은 이렇게 사람으로 하여금 자유하게 하십니다. 이렇게 진정 자유한 사람은 남을 미워하지 않고 증오하지 않고 폭력을 쓰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런 자유함의 외침을 듣고서 정작 화가난 사람들은 백인들이었습니다. 그래서 킹 목사는 얼마 후에 어느 백인의 총탄에 맞아서 죽지 않습니까.
우리는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살아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 삶이 가장 힘이 있고, 능력이 주어지고, 참 자유함이 주어지는 삶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 땅에 성령을 보내주신 것입니다. 이 성령이 지금도 여러분들 가슴속에서 평안을 심고, 자유를 부여하시고, 강력하게 역사 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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