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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 성령이 하시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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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를 곧 잘 하는 학생들에게 어떤 과목이 제일 어렵고, 어떤 과목이 제일 쉬우냐라고 물으면 뭐라고 대답할 것 같습니까 아마도 십중팔구는 '국어가 어렵고, 수학이 쉽다' 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국어가 어려운 이유는 어떤 짜여진 공식에 문제를 대입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책을 많이 읽고 독해력을 키워나가야 하는데 이것은 단기간에 어떤 소귀의 성과를 거두어 들일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자연히 어려울 수 밖에 없습니다. 반면에 수학이 쉬운 이유는 이미 누군가가 발견해 놓은 공식에 문제를 대입할 수 있는 능력만 키우면 되니까 수학이 국어보다 훨씬 쉽게 생각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어느날 제자들에게 이런 질문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더냐' 그때 베드로가 말했습니다. '더러는 세례요한, 더러는 엘리야, 더러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더냐'라고 물었습니다. 그때 시몬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사실 예수님의 첫 번째 질문에 대답하는 것은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 알고 있기 때문에 그 사실을 그대로 말씀드리면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두 번째 질문에는 대답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너는 나를 누구라 하더냐'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어떤 공식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대답한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물론 베드로는 정답을 얘기했습니다. 그러나 만약 그 자리에 제가 있었다면 아마도 머리를 긁적 긁적거리며 어떻게 대답해야할지 몰라 우물쭈물 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신앙과 믿음이라는 것이 수학공식같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예를 들어 믿지 않는 남편에게 '예수 믿어야 구원받고 천국간다'라는 말을 했을 때 믿지 않는다면 수학공식에 대입하듯 뭔가에 대입하여 꼼짝하지 못하도록 증명해 보일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면 더 이상 이유나 핑계를 대지 못할 것이 아닙니까 또 태신자를 작정해 가면서 수개월동안 그들을 위해 기도하면서 온갖 아양이라는 아양은 다 떨어가며 "제발 부탁이니까 한번만이라도 교회가자"라고 사정할 이유가 없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우리신앙생활에 어려움입니다. 나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앞에 설득당해도 다른 사람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열심히 예수를 믿어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설명을 했더니 '얘기 다 했으면 밥이나 먹으러 가자'고 말하면서 '나는 그런데 도무지 취미가 없다'라고 말해 버릴 때 얼마나 허망한 것을 느끼게 됩니까 '다 자기 나름대로 인생을 사는 것이지 내게 믿어라 말아라 강요하지 마라'고 말할 때 얼마나 허탈합니까 도대체 믿음생활을 취미로 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도대체 나름대로 인생을 살아서 얼마나 행복해 질 수 있단 말입니까 믿는 우리들이 보기엔 정말 갑갑한 노릇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얘기를 들을 때 '그래 어디 네 마음대로 한번 살아봐라'라며 포기해 버리고 싶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그만둘 수는 없는 것이 아닙니까 왜냐하면 신앙은 눈에 보이지 않는 전쟁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믿는 것으로 다른 사람을 억누르고 그들을 굴복시키지 않는다면 나는 지금 패배하고 있으며 결국 이런 식으로 계속해서 나가다가는 내가 가지고 있는 믿음마저 무용지물이 될 수밖에 없어질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공식으로 증명해 보일 수 있는 것도 아닌데 그 일을 감당할 수 있단 말입니까 공식보다 더 강력한 능력이 아니면 그들로 하여금 복음을 인정하고 무릎을 꿇게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의미에서 본다면 그리스도인은 틀에 짜여진 공식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능력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힘은 믿는 자들의 수가 많아지고 그 사회에서 어떤 유력한 신분을 유지하면서 영향력을 행사하는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것을 배워 풍성한 지식을 바탕으로 논리적인 사고를 가지는데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인의 힘은 성령께서 임하셔서 그와 함께 생각하시고 그와 함께 호흡하시고 그와 함께 생활하시면서 그와 함께 말씀하시는데 있습니다.
오늘 본문 7절 말씀을 보면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자신이 떠나는 것이 제자들에게 유익이라고 하셨습니다. 참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주님이 지금까지 제자들에게 해를 끼친적이 있는 것도 아닌데 왜 떠나는 것이 제자들에게 유익하다는 말씀일까요
제가 자랄 때 저희집에 손님들이 참 많이 오셨습니다. 그 당시 경제적으로 넉넉하게 살았던 까닭도 있고 저희 어머니나 할머님이 손님 접대하는 것을 참 좋아하셨기 때문에 시골에서 친척이 올라오시면 심한 경우 거의 한달간 집에 머물러 계신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손님이 저희 집에 머무는 것이 싫었습니다. 첫째는 그분들과 함께 방을 쓰면서 담배 연기를 들여 마실 수 밖에 없었기 때문에 싫었고, 어린 마음에 시골분들이 잘 알지도 못하시면서 이것 저것 간섭하는 것 같아서 싫었습니다. 더구나 그렇게 오랫동안 머물러 계신 친척분들 중에는 촌수가 불명확한 분들도 계셨습니다.
그러니까 사돈의 팔촌정도되는 먼 친척분들, 아니 친척이라고 말하기엔 너무도 먼 관계의 분들이 그렇게 눌러 앉아서 한달씩 계시는 것이 얼마나 싫었는지 모릅니다. 어린나이에 보아도 우리집에 별로 유익도 없을 뿐 아니라 여러사람을 불편하게 하는 듯 보였습니다. 한번은 먼 친척되시는 분이 제 또래의 아이를 데리고 오셨는데 그 아이가 저희 집에 있던 감나무에 올라가서 홍시란 홍시는 죄다 따서 먹어버렸습니다. 그 사건이 있은 후, 한동안 그 아이를 아예 시골 촌뜨기라고 무시하며 같이 놀아주지도 않았던 적이 있었습니다.
오늘 주님이 참 이상한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그런데 주님이 제자들과 함께 계셨을 때 제자들에게 유익이 되면 되었지 손해 될 것은 없었습니다. 물론 유대의 지도자들이 예수를 미워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 일로 인해 그들이 불편을 겪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제자들에게 어떤 직접적인 위해(危害)가 가해진 적은 없습니다. 오히려 많은 무리들이 따라다니는 동안 그들은 예수님에 의해서 건설된 메시야 왕국을 꿈꾸며 지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신이 그들의 곁을 떠나는 것이 유익이라고 하셨습니다. 왜 그들 곁을 떠나는 것이 그들에게 유익이 되는 것일까요 그 이유에 대해서도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왜 보혜사가 오셔야 그들에게 더 유익이 되는 것일까요 지금까지 예수님이 그들과 함께 하셨던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말일까요 물론 그런 말은 아닙니다. 사실 주님이 이 땅에 오셔서 감당하셔야 했던 사역은 죽어가는 자들을 구원하는 사역입니다. 그 일을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십니다. 이제 주께서 그들을 떠나고 나면 성령께서 그들에게 하실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죽으심의 의미를 바르게 깨닫고 새롭게 거듭나는 은혜를 체험하는 것입니다.
그분이 우리로 하여금 여호와 하나님의 깊은 진리를 깨닫게 하시고 우리안에 있는 깊은 불신을 치료하시며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십니다. 이 세상에 성령님외에는 아무도 사람의 인격이나 기질이나 인간성을 바꿀 수 없습니다. 우리들은 죄로 인해 모두 파괴된 인격을 가지고 있고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우리들을 치료하실 수 있는 분이 성령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지 아니하시면 성부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무에게도 성령을 주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습니다. 성령이 오시지 않으면 인간의 완악한 마음을 바꿀 수 없습니다. 훈련을 통해 인격의 성숙은 어느 정도 가져올 수 있을지 몰라도 근본적인 변화는 없습니다. 오래전에 목사님들의 설교에 등장하는 고전이 하나 있습니다. 어느 스님이 겨울이 다 지나간 끝 머리에 강을 건너게 되었는데 강을 보니까 아직 얼어있는 상태입니다. 돌아갈 수 있는 길도 없고 하는 수 없이 강을 건너긴 건너는데 왠지 불안합니다. 그래서 목탁을 두드리셔 나무 관세음 보살을 외우며 지나갑니다.
그런데 중간쯤 지나갈 무렵에 얼음이 찡- 하고 갈라지는 소리가 들립니다. 더 크게 '나무관세음 보살'을 외칩니다. 그런데 몇발짝을 더 띄는데 이번엔 '쩡' 하는 소리가 들립니다. 그 소리와 동시에 놀란 가슴 슬어담든 '나무 관세음보살'을 외쳤습니다. 그러다가 다시 몇 발짝을 띄는데 이번엔 앞에서 얼음 조각이 쩍- 하고 갈라집니다. 그때 이 스님이 뭐라고 했겠습니까 '아이구 여호와 하나님!'하더랍니다.
언젠가 저희집에 있는 금붕어 얘기를 한 것으로 기억이 납니다. 최근엔 물을 잘 갈아주지 않았습니다. 어찌나 생명력이 강한지 왠만한 오염된 물에서는 조금도 요동하는 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저도 꾀가 생겼습니다. 물을 갈아줘야 하지만 갈아주기가 귀찮아서 그냥 오염된 물에 그냥 수돗물을 받아서 부어줍니다. 그러면 약간은 정제된 듯해 보입니다. 그리고 한동안 금붕어도 힘차게 움직이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신선한 물이 아닙니다. 그냥 오염된 것에 비해 신선한 물이 좀 더 많아서 신선하게 보이는 것 뿐입니다.
마찬가지로 훈련을 통해 자기를 절제하고 정제하는 일이 어느정도 가능할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근본의 변화는 없습니다. 그 근본변화는 오직 성령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그런데 오직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셨을 때,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분을 보내주십니다. 그래서 믿는 우리들에게 중요한 것은 '우리가 매 순간을 얼마나 그분의 능력을 의지하며 사느냐'하는 것입니다. '내가 얼마나 오랫동안 믿었느냐'가 나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얼마나 오랫동안 기독교 교육을 받고 자랐느냐'로 내가 변하는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매 순간마다 성령을 의지하여 그분의 능력에 붙들림바 될 때 우리가 변한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이 '내가 그를 너희에게 보내겠다'라고 하신 말씀은 한번만 보내고 말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그를 지속적으로 보내시겠다는 뜻입니다. 왜 지속적으로 보내시겠다는 것일까요 최근에 저는 다시 운동장을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처음 다이어트를 하고 난 뒤 어떤 분이 요요현상에 대해 염려하는 글을 저에게 보내셨습니다. 그때 저는 한마디로 잘라서 말했습니다. '나의 사전에 요요현상이란 없다'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한 일년가까이 운동을 제대로 하지 못했더니다시 살이 찌기 시작했습니다. 최근에 몸무게가 5키로그램 정도가 늘어나면서 몸이 둔해졌습니다. 바지 사이즈도 늘어나 버렸습니다. 지난번 체육대회를 마치고 며칠동안 온 몸이 쑤시고 아파서 혼이 났습니다. 그래서 위기의식을 느껴 다시 운동장을 달리게 된 것입니다. 지속적이지 못할 때 우리는 언제든지 예전으로 돌아가 버릴 수 있습니다. 왜 주님께서 성령을 지속적으로 보내시겠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일까요 그 성령의 능력에 지속적으로 붙들려 있지 않으면 우리는 언제든지 성령과 상관없던 옛 모습으로 돌아 가버릴 가능성이 많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의 마음은 완악한 본성으로 가득차 있어서 잠시 숨을 고르는 순간에 자기를 의지하게 되고 또 교만하게 되어서 자기를 특별한 위치에 올려놓게 됩니다. 그때부터 사람들은 자기 힘으로 살게 됩니다. 그런데 내 힘으로 사는 생활은 믿지 않는 사람들의 삶의 모습입니다. 힘이 있는 것 같지만 힘이 없습니다. 예를 들어 세상적인 지식을 의지해서 산다고 한번 가정해 봅시다. 세상에서 똑똑하다는 말을 듣고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똑똑함이 자신의 전 생애의 행복을 보장해 주느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내 힘으로 사는 삶을 통해서는 결코 능력있는 삶을 살 수 없습니다. 반면에 우리가 주를 의지하고 내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나의 삶을 온전히 그리스도께 맡길 때 성령님은 마치 주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는 것 이상의 능력으로 우리의 삶을 이끌어주십니다. 그런데 세상사람들은 우리를 보면서 비웃을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예수 믿는다고 하더니 고작 그렇게 밖에는 못 사냐"라든지 "예수 믿으면 뭔가 남 보다 나아야 할 것이 아니냐 그런데 예수 믿고 더 힘들어 보이는데 누가 예수를 믿겠느냐" 이런 말을 할 때, 이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난감할 때가 있습니다.
지금 제자들의 경우를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제자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습니다. 그분께 온전히 자기의 생애를 맡기며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런데 복음 때문에 제자들이 핍박받고 심문당할 위기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보면 이런 제자들의 모습을 보면서 얼마나 비웃겠습니까 '재산도 버리고 집안식구도 모른척 하면서 따라다니더니 꼴 좋다'라고 말하지 않겠습니까 이런 사람들을 도대체 어떻게 설득해야 하며 제자들이 살아온 생애가 결코 헛된 생애가 아니라 더 능력있는 삶이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증명해 보일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이 예수를 믿고 난 다음에 뭔가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자랑할 것이 있고 예수를 믿는 것이 믿지 않는 것보다 얼마나 복된 일인가를 얘기해야 하는데 내 생활을 보면 별로 나아진 것도 없고, 그래서 할말을 잃어버린 채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사람들이 예수 믿는 사람을 이길 수 없는 근본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이들이 무시할 수 없는 것이 이들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성령의 책망입니다. 성령은 믿는 자들을 통하여 이 세상 사람들을 책망하십니다. 8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이 세상에 오신 성령님은 믿는 자들안에서 이들의 입을 통하여 그들을 판단하고 이들의 신앙을 비웃는 모든 사람들을 책망하십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책망한다'는 말의 뜻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위엄있게 꾸짖어서 감히 거역하거나 대항하지 못하게 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만약 그렇다면 모든 사람들이 복음을 들을 때 즉각적으로 반응을 보이며 순종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럴 수 있습니다. 하지만 복음을 듣는 자들은 제자들이 하는 말에서 어떤 힘을 느끼게 됩니다. 무엇인가 무시할 수 없는 힘이 이들의 말 속에 들어 있습니다. 언젠가 예수님께서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하고 그물을 거두고 있는 베드로에게 '깊은 곳으로 가서 그물을 내려라'고 하셨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그 말 한마디에 완전히 압도당하고 맙니다. 자기는 갈릴리 바다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입니다. 누구보다 바다의 상태를 잘 알고 고기떼의 흐름을 잘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 자신이 그 밤에 한 마리도 못 잡고 그물을 거두어 들이고 있는데 느닷없이 나타난 한 사람이 '깊은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라'했으니 얼마나 우스운 일입니까 조금전까지 베드로도 깊은 곳에서 그물을 내렸을텐데, 그래서 한 마리도 잡을 수 없었는데 깊은데로 가서 그물을 내리라고 하니 이게 도대체 말이됩니까 그런데 베드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깊은데로 가서 그물을 내렸습니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아마 그 분의 말에 담겨있는 알 수 없는 힘을 느꼈기 때문일 것입니다.
거역할래야 거역할 수 없는 위엄과 권위의 말 앞에 아무런 반항이나 거부감을 나타내 보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말대로 깊은데로 가 그물을 내려 그물이 찢어질정도로 많은 고기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제자들의 말 속에는 무엇인가 무시할 수 없는 힘이 그 말 속에 들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저 웃고 넘기기 위한 말들을 좋아합니까 설교도 재미가 없으면 마음의 문을 닫아 버리는 시대를 우리가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제자들의 말 속에는 감히 무시할 수 없는 어떤 진실이 들어 있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결코 이 말을 편안하게 들을 수는 없습니다. 그 말에 복종하든지 아니면 이들이 더 이상 그런 말을 하지 못하도록 그들의 입을 틀어막아 버리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여러분! 성령이 하시는 말씀안에는 무시할 수 없는 진실의 힘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가장 큰 무기는 진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속이거나 변명하지 않습니다. 거짓을 말하지 않습니다. 아무것도 과장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그런이유 때문에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비웃고 조롱할는지 모릅니다. '세상 물정 몰라도 한창 모른다, 어떻게 그런식으로 세상살아가는지 모르겠다'라는 투의 말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비아냥거림속에서도 웃을 수 있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진실만이 가지는 힘 때문에 그렇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앞에 현장에서 간음하던 여인을 잡아왔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예수님은 그들에게 먼저 죄없는 자가 돌을 들어 이 여자를 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한마디의 말씀은 자기 양심을 속이고 있는 유대인들을 책망하기 시작했습니다. 마치 엄청난 폭풍과 같이 그들의 양심을 파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도저히 그 자리에서 돌을 들어 그녀에게 던질 수 없게 되어 하나 둘씩 그 자리를 떠나갔습니다.
복음이 무엇입니까 복음이란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어떤 방법이 아닙니다. 그것을 가지고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은 여호와 하나님의 거룩한 영이 믿는 자의 진실한 증거를 통하여 이 세상을 책망하는 말씀입니다. 그 안에는 위엄이 있고 그 안에 감히 무시할 수 없는 권위가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복음은 언제나 우리들에게 둘 중의 하나를 택하도록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 증거를 받아들여 회개하며 그분께 나아가든지 아니면 더 이상 그런 말을 하지 못하도록 그런 말하는 자들을 끌고가서 때리고 잡아 가두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그런데 복음은 믿는다고 말하는 우리들에게도 둘 중의 하나를 요구합니다. 정말 진실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살든지 아니면 세상을 향해 나가든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라고 말합니다. 신앙과 믿음 때문에 세상사람들에게 때로는 욕을 먹고 때로는 미움을 당하든지 아니면 전혀 신앙적이지 않는 삶을 살면서 세상과 연락하든지 둘 중의 하나를 택하도록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책망은 듣고 싶지 않고, 그렇다고 해서 책망을 못 들은 척 할 수 도 없고 그래서 우리들은 어쩡쩡한 자세를 취합니다. 일어 서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앉아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런데 그런 자세가 얼마나 힘듭니까 한번 실험해 보시기 바랍니다. 의자없이 무릎을 굽혀 반쯤 일어선 자세를 취해 보시기 바랍니다. 얼마나 힘이 드는가를 말입니다.
아마 그런 자세를 취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성령은 계속 책망하실 것입니다. 일어서든지 앉든지 하라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성령께서 이 세상에 대해 가장 먼저 책망하시는 것은 무엇에 대해서입니까 그것은 '죄'에 대해서입니다. 불행하게도 이 세상은 '죄'가 무엇인지 모르고 살아갑니다. 도대체 '죄'가 무엇입니까 '죄'란 인간이 여호와 하나님을 모르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을 모른다는 것은 지식적으로 그분의 존재를 모른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분이 모든 삶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여기에 대해 성령이 책망하시는데 9절에 보면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라고 했습니다. 왜 예수님은 사람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죄다 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자신을 믿지 않는 것이 죄다라고 하신 것일까요 여호와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고 했을 때 대부분 여호와 하나님의 존재를 믿지 않는다는 얘기가 되고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는 말은 여호와 하나님의 주권을 믿지 않는다는 말이 되기 때문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말씀은 그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받아들이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존재는 믿지만 그분의 자신들의 삶에 간섭하시는 것은 싫어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도 여호와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내 삶에 간섭하시도록 나를 그분께 맡기지는 않습니다. 내 삶은 내가 조정해야되지 그분에 의해 간섭받는 것은 싫어합니다.
성령께서 사람들에게 하시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네가 소유하고 있고 네가 누리고 있는 삶이 모두 다 너의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모든 것을 여호와 하나님께 돌려 드리기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것이며 여호와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되어야 한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 주인이 되셔야 합니다.
'죄'라는 것을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죄'란 다른 사람에게 나쁜 짓을 하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삶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간섭을 배제하는 것이 죄입니다. 나의 삶을 내 마음대로 살려고 하는 것이 죄입니다. 사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행복하게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행복'이라는 말을 얼마나 많이 합니까 '행복한 교회' '행복한 가정' '행복한 나라' 그런데 행복을 강조하면 할수록 우리 마음 한 구석에서 어떤 말을 합니까 '나는 행복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행복을 그렇게 많이 말했는데 행복을 느낄 수 없습니다. 사랑을 그렇게 많이 말했는데 사랑을 느낄 수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모든 행복의 시작은 행복의 근원이 되시는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그 여호와 하나님을 배제하고 인간적인 노력으로 행복을 추구하고 사랑을 하려고 하니 한쪽 구석엔 행복하지 않다는 생각이 찾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축복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만일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태도가 바뀌기만 한다면 우리는 모든 것을 다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많은 사람들이 이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10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무슨 말입니까 여호와 하나님께서 유일하게 의롭다고 인정하시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밖에 없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는 완전하게 여호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여호와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셨습니다. 이것이 여호와 하나님앞에서 의로운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순종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주께 온전한 순종으로 나아갑니까 아마 순종하지 않을 때 제일 괴로운 사람도 역시 본인입니다. 성령께서 왜 순종하지 않느냐고 책망하십니다. 성령께서 왜 여호와 하나님의 뜻에 따르지 않느냐고 말씀하십니다. 그때 참 괴롭습니다. 그런데 순종은 미루면 결국 하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만약 성령께서 지금 나에게 어떤 일에 대해 순종할 것을 말씀하시는데 내일하겠다며 미루게 되면 그 일을 할 수 있습니까 결국 하지 않게 됩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가 자꾸 미루는 것입니까 이유야 여러 가지겠지만 아직도 우리의 믿음이 주를 온전히 신뢰하는 믿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번 주님께 우리를 맡겨봅시다. 저를 포함해서 장로님들 권사님들, 집사님들 아니 모든 주의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주께 우리 인생을 전적으로 한번 맡겨봅시다. 어떻게 내 인생을 이끌어주시고 역사하실 것인지 목도합시다.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삶이 가장 아름다운 삶이기 때문입니다. 원제까지 성령께서 의에 대해 책망하는 그 책망만 듣고 사시겠습니까
이제 마지막으로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 무엇이라고 본문은 말씀하고 있습니까 11절에 보면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니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 임금'은 누굽니까 그는 마귀입니다. 마귀는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이미 심판을 받았습니다. 마귀는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이미 그 힘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진리가 비취는 곳마다 마귀는 패배하고 물러가게 되어 있습니다.
마귀가 어떤 존재입니까 모든 인간의 생각과 삶을 지배하던 자였습니다. 지금 강릉에선 민속축제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누군가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만약 강릉에서 벌어지는 민속축제에 복음이 심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완전히 귀신들의 축제다'라고 말입니다. 사실이 그렇습니다. 우리가 민속이라는 이름으로 행하는 것들중에 많은 부분이 귀신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샤마니즘적인 요소와 귀신문화가 사람들의 생각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믿는 우리들이 놀랍게도 세상 사람들의 가치관을 따라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런 축제들이 복음을 열정적으로 전할 기회로 삼기 보다는 그저 그 문화를 즐기는 것으로 만족하려는 생각들이 많습니다.
이 시대의 가치관이 무엇입니까 어떻게 하면 세상에서 행복하게 사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 행복의 파랑새를 잡기 위해 동분서주합니다. 여기에 함정이 있습니다. 행복을 추구하다가 여호와 하나님을 잃어버리게 하는 고도의 계산된 사탄의 계략이 숨어 있습니다. 여러분! 행복을 추구하다가 여호와 하나님을 잃어버리면 우리는 모든 것을 잃어버립니다. 행복은 내가 무언가를 해서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과의 바른관계속에서 저절로 찾아오는 것이 행복입니다.
여러분!
절대로 속으시면 안됩니다. 중요한 것은 하루 하루 나의 삶속에서 여호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그분께 나를 맡기는 생애입니다. 그것을 놓치면서 찾고자 하는 행복은 잡히지 않는 파랑새를 쫓는 것고 같습니다. 사탄은 이미 심판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우리안에 계시는 성령님과 더불어 사는 것만 남아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복음은 그렇게 가벼운 것이 아닙니다. 복음은 싸구려가 아닙니다. 복음은 아무렇게나 취급해도 되는 보잘 것 없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은 능력입니다. 죽은 자도 살리는 능력입니다. 그 능력의 역사가 성령을 통해서 나타납니다. 그런데 아직도 가치관을 바꾸는데 주저가 되십니까 아직도 인생의 목표를 수정하는데 머뭇거림이 있으십니까
오늘 성령이 저와 여러분들에게 하시는 말씀에 귀를 기울이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에 즉각적으로 순종함으로 복음의 능력을 나타내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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