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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 성령으로 말미암는 신앙

본문

오늘 본문은 무슨 내용인지 선뜻 감이 잡히지 않습니다.
하여간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성령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성령이 와서 우리를 가르쳐줄 것이라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요16:12)
예수님으로부터 이런 얘기를 들을 당시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라다닌 지 이미 3년이나 지난 때였습니다.
요즘말로 교회에 등록한지 3년이 지났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예수님과 생활 자체를 같이 한 기간이 3년이라는 얘기입니다.
교회에서 수련회의 중요성을 강조할 때 흔히 하는 얘기가 있습니다.
1년 52주 내내 한 번도 안 빼먹고 출석해도 교회에서 보내는 시간은 고작 52시간 안팎입니다.
하지만 수련회는 그렇지 않습니다.
수련회에서 보내는 2박3일을 시간으로 따지면 1년 동안 예배드린 시간보다 더 많은 시간입니다.
실제로 신앙이 성장하는 폭을 보아도 그렇습니다.
예수를 인격적으로 만나고, 성령을 체험하고,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죄인 된 자기의 모습을 깨닫고, 그런 자기를 사랑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고, 이전보다 더 신앙 생활을 제대로 해야 하겠다고 결심하는 일은 일상적인 예배를 통해서보다 수련회 기간을 통해서 훨씬 더 잘 일어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과 공생애 3년을 같이 보냈다는 얘기는 예수 믿은지 3년 지났다는 얘기와 비할 바가 아닙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참 어렵습니다.
주일날 늦잠을 못 자서 어렵고, 재미없는 성경을 억지로 읽는 것이 어렵고, 없는 살림에 헌금하는 것이 어렵고, 가뜩이나 바쁜데 교회 봉사하는 것이 어렵고, 자기가 믿는 것도 쑥스러운데 남에게 전도하는 것이 어렵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우리의 자연스런 본성이 여호와 하나님과 반대쪽이어서 어렵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어떤 사람입니까
그들은 배와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좇은 사람들입니다.
3년 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예수님이 병자를 고치는 것도 보았고, 귀신을 쫓아내는 것도 보았습니다.
예수님이 풍랑을 잔잔하게 하는 것도 보았고, 보리떡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는 것도 보았습니다.
아마 제자들은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에 대해서 자기들은 충분히 배웠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말씀은 그게 아닙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이 “그만하면 되었다. 더 이상 배울 것이 없으니 이제 그만 하산하여라. ”가 아니라 “너희들 수준으로는 별 수 없다. 너희들은 아직 얘기해봐야 못 알아듣는다. ”입니다.
“너희들은 아직 멀었다. 그런 너희를 성령께서 가르칠 것이다. 성령이 너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할 것이고, 또 나의 영광이 어떤 것인지 알게 해줄 것이다. ”라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요컨대 예수를 믿는 것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 성령을 통하여 배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가라사대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가로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가라사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이에 제자들을 경계하사 자기가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라(마16:13-20)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는 베드로의 신앙 고백은 신앙 고백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신앙 고백입니다.
베드로의 그런 신앙 고백이 예수님을 무척이나 기쁘시게 했습니다.
그 얘기를 들은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아주 극찬하셨습니다.
성경에서 베드로는 상당히 덜렁거리는 제자로 나옵니다.
성경에 베드로가 칭찬을 듣는 대목이 딱 한 번 나오는데 이때가 바로 그렇습니다.
가뜩이나 나서기를 좋아하는 베드로가 늘 사고만 치다가 모처럼 한 건 했으니 무척이나 신이 났을 것입니다.
하지만 베드로가 들은 칭찬이 마냥 칭찬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십자가를 질 것이라는 예수님을 만류했다가 예수님으로부터 사단이라는 호된 꾸중을 듣기 때문입니다.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에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여호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마16:21-23)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라고 칭찬을 할 때는 언제고,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꾸짖을 때는 언제입니까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께서 이랬다, 저랬다 변덕을 부리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얘기를 하는 예수님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런 얘기를 듣는 베드로에게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대체 베드로의 어떤 점이 문제입니까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했을 때, 예수님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가 그런 멋있는 신앙 고백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베드로가 남달리 똑똑했기 때문이 아니고 여호와 하나님이 그것을 알게 하셨기 때문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십자가를 지겠다는 예수님을 만류할 때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때는 예수님께서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여호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가 신앙 고백을 한 것은 여호와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십자가를 지겠다는 예수님을 만류한 것은 여호와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자기 생각이었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라는 칭찬을 듣느냐,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라는 꾸중을 듣느냐 하는 문제가 여호와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얘기를 했느냐, 자기 생각을 얘기했느냐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베드로가 십자가를 지겠다는 예수님을 만류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 반기를 들려고 그런 얘기를 한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 생각에는 그것이 예수님을 위한 열심이었습니다.
자기네 선생님이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고난을 받다가 죽겠다는데, 제자 된 입장에서 어떻게 그냥 두고 볼 수 있습니까
자기네 선생님은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신 메시야로 이 땅에 오신 분인데 메시야한테 그런 일이 생긴다는 것은 말도 안 됩니다.
자기 목에 칼이 들어오는 한이 있어도 그런 일 만큼은 막아야 합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류하는 대목이 우리말 성경에는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마16:22)”라고 되어 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라고 했으니까 마치 베드로가 예수님한테 간절하게 말씀드린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만 그렇지 않습니다.
이 부분을 헬라어로 보면 베드로가 예수님을 ‘에피티마오’ 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 ‘에피티마오’라는 단어는 예수님께서 바람과 바다를 꾸짖어 잔잔하게 하실 때 사용되었고 또 귀신을 꾸짖어 쫓아낼 때도 사용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풍랑을 꾸짖어 잔잔하게 하시고 또 귀신을 꾸짖어 쫓아내시던 것처럼 베드로도 십자가를 지셔야 하겠다는 예수님을 꾸짖었다는 뜻입니다.
그것도 뭐라고 꾸짖었느냐 하면, 그 꾸짖은 내용이 재미있습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이 부분도 “……주여 그리 마옵소서”라고 되어 있는데, 이 내용도 본래 쓰여진 의미를 살려서 번역하면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가 당신에게 함께 하기를 바랍니다”라는 뜻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가 있기만 하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뒤집으면 그런 고난을 겪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라는 뜻이 됩니다.
“주님, 왜 그렇게 믿음 없는 얘기를 하십니까 믿음을 가지십시오. 믿음만 있으면 그런 일이 왜 일어납니까”라는 뜻입니다.
그러면서 다시 “……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라고 했는데, 이 부분도 “내가 기필코 주님께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라고 해야 본래 의미에 더 가깝습니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이제 십자가를 져야 한다고 말씀하시는데 베드로는 마치 자기가 예수님으로 하여금 고난을 받지 못하게 막아야 할 사명이 있는 사람처럼 예수님을 꾸짖기까지 하시면서 예수님을 만류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여호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라고 꾸짖으셨습니다.
베드로가 방금 전만 해도 천국 열쇠를 손에 쥐고서 하늘 문을 마음대로 열고 닫을 수 있었는데 잠깐 사이에 사단이 되어버렸습니다.
대체 이런 일이 왜 일어났습니까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한 것은 전적으로 여호와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로 알게 된 메시야를 섬기는 방법은 여전히 인간적이고 세속적이었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우리는 전부 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해서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까
간혹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키는 이단 집단에 사회 지도층 인사가 끼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교수나 의사 등 배울 만큼 배우고 알 만큼 아는 사람들이 전혀 황당한 교리에 사로잡혀 있는 것을 보면 의아하기만 합니다.
하지만 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은 이성이나 지성에 속한 영역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남보다 똑똑해서 예수를 믿은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말귀를 못 알아들었는데 우리는 말귀를 알아들었기 때문에 예수가 구세주인 것을 깨달아서 예수를 믿고 있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를 믿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를 믿은 다음에 신앙 생활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다릅니다.
그때부터는 본격적으로 자기의 의지와 정서가 개입되게 됩니다.
자기가 무엇을 어떻게 할지를 자기가 결정하게 됩니다.
예수를 믿는 것이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를 믿게 되기는 했는데, 우리의 기본적인 정서와 논리는 여전히 여호와 하나님 반대쪽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노라고 하면서도 자기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에 대해서는 늘 여호와 하나님 반대쪽으로 가는 경향이 있습니다.
베드로의 경우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일찍이 배와 그물을 다 버려두고 예수님을 좇은 사람입니다.
자기 한 목숨을 바쳐서라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는 것은 막겠다고 나설 만큼 예수님을 위해서 헌신적이었던 사람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넘치는 열심을 기뻐하지 않으시고 도리어 책망하셨습니다.
만일 베드로가 얘기한 내용 - “주여 그리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 이 베드로가 얘기한 그대로 이루어진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그렇게 되면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믿는 기독교는 대체 어떻게 되는 겁니까
우리가 예수를 그런 식으로 믿을 수 있습니다.
자기 딴에는 잘한답시고 하는 일인데 그 일이 주님께 도움 되기는 고사하고 전혀 엉뚱한 일일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성령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성령이 아니고는 우리가 도저히 진리로 인도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아니고는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사모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지난 2002년에 우리 나라에서 가장 인기 있었던 사람을 꼽으라면 단연 히딩크를 꼽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오죽했으면 히딩크를 대통령으로 뽑자는 얘기까지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때까지 우리 나라는 월드컵 본선에 5회 진출했다고는 하지만 단 1승도 올리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16강 진출에 진출하는 것이 지상 최대의 과제였습니다.
그런데 16강 정도가 아니라 무려 4강을 차지했습니다.
우리만 놀란 것이 아니라 세계가 다 놀랐습니다.
그런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은 물론 홈그라운드라는 이점도 있었습니다만 감독이 히딩크였다는 사실을 빼놓을 수 없을 것입니다.
감독이 차지하는 비중이 그만큼 높습니다.
똑같은 선수로 구성된 팀이라도 누가 감독이냐에 따라서 그 팀의 색깔이 달라집니다.
축구, 야구, 배구, 농구, 탁구, 씨름, 권투, 수영 등 감독이나 코치가 없는 운동 종목은 없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100m 달리기나 마라톤에도 코치가 있다는 사실이 저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축구나 야구 같은 종목에는 당연히 감독이 있어야 합니다.
전술도 개발해야 하고, 상대방의 전력에 따라서 작전을 변경하기도 해야 합니다.
선수 개개인의 특성에 따라서 훈련도 달리해야 합니다.
하지만 달리기는 그런 것이 필요 없지 않습니까
무조건 빨리 뛰기만 하면 되는데 감독이 왜 필요합니까
물론 달리기 종목에는 정말로 감독이 필요 없는 것이 아니라 감독이 필요 없다고 하는 제 생각이 잘못된 것입니다.
제가 달리기에 대해서 워낙 아는 것이 없으니까 그런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그저 밋밋하게 달리기만 하는 육상 종목도 무조건 자기 생각대로 달리면 되는 것이 아니라 감독의 지도를 받아야 한다면 우리가 예수를 믿는 문제는 어느 만큼 지도를 받아야 하겠습니까
사람은 본래 죄인입니다.
우리 중에 이 얘기에 대해서 거부감을 갖는 사람은 없습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은 본래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그런데 그 얘기가 갖는 심각성은 모르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에 구원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그것만이 아닙니다.
우리의 논리와 사고도 죄로 오염되어 있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합니다.
도둑은 도둑질할 생각만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저 집이 빈집일까, 아닐까” “저 집에는 현금이나 귀금속이 얼마나 있을까”라는 생각을 늘 합니다.
특별히 그런 생각을 하려고 노력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생각이 자기도 모르게 자연스럽게 나옵니다.
몸에 배어있는 것이 그런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죄인이라는 얘기가 바로 그런 얘기입니다.
도둑이 도둑질할 생각만 하는 것처럼 우리가 생각하는 모든 것이 죄에 속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성령의 간섭을 받아야 합니다.
자기에게서 나오는 자연스런 생각대로 하면 그것은 보나마나 베드로와 같은 생각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는 이래야 한다” “예수를 믿으면 이래야 한다”고 하는데, 성경은 언제나 그것을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방해하는 것이라고 지적합니다.
예수를 믿으면 사람이 변해야 한다는 얘기를 합니다.
대체 어떻게 변하라는 얘기입니까
기도를 하지 않던 사람이 기도하는 사람으로 변하고, 성경을 읽지 않던 사람이 성경을 읽는 사람으로 변하고, 봉사를 하지 않던 사람이 봉사하는 사람으로 변하고, 전도하지 않던 사람이 전도하는 사람으로 변하라는 얘기입니까
물론 그런 변화도 포함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피상적인 변화에 불과합니다.
그 정도로는 모자랍니다.
무엇보다도 그 사람의 인격이 변해야 합니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하는 것이 옳다”는 가치 기준 자체가 변해야 합니다.
우리 스스로의 능력으로는 안 됩니다.
바로 그 일을 위해서 성령께서 오십니다.
본성상 죄인인 우리로서는 도저히 그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은 것이 성령으로 말미암았으면 성령으로 인하여 예수를 믿는 것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은 다음에 어떻게 살 것이냐 하는 문제 역시 성령으로 말미암아야 합니다.
이렇게 따지면 신앙 생활이란 곧 성령의 간섭 아래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기가 자기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의 간섭에 자기 자신을 맡기는 것이 신앙 생활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모두는 성령님의 간섭과 지배를 받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혹시 제 얘기에 모순이 있습니까
“신앙 생활이란 성령님의 간섭에 자신을 맡기는 것이다, 성령님의 간섭대로 하는 것이 신앙 생활이다. ”라는 얘기에 대해서 이의를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한 가지 질문을 드리는 것으로 이 설교 말씀을 마칠까 합니다.
만약에 지금 이 시간부터 성령님께서 더 이상 여러분의 삶에 간섭하지 않는다면 여러분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여러분이 정말로 성령님의 간섭 아래 살아가고 있다면 성령님이 여러분에게 간섭할 때와 간섭하지 않을 때가 달라야 합니다.
그래서 묻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더 이상 여러분에게 간섭하지 않는다면 여러분에게는 어떤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혹시 성령님이 여러분에게 간섭하지 않아도 지금까지와 아무런 차이가 없지는 않겠습니까
만일 그렇다면 여러분은 신앙 생활을 잘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감독 없이 축구를 하는 축구 선수와 같고 감독 없이 야구를 하는 야구 선수와 같습니다.
자기들 나름대로 열심히 뛰어다니기는 하는데 실력은 늘지 않습니다.
그런 자리에서 돌이켜야 합니다.
사람이 본성상 죄인인 것을 알았으면 “나는 예수 믿는다, 그래서 이제 구원얻었다. ”로 끝날 것이 아니라 실제 살아가는 문제에 있어서도 자기가 자기를 주장하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우리의 생각은 언제나 죄를 근거로 하기 때문입니다.
오직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잠잠히 순종하는 것으로만 우리의 남은 날이 채워져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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