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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 신앙 기초로서의 성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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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잠잠한 것 같습니다만 한동안 한국 교회에 성령 운동 열풍이 불었던 적이 있습니다.
골목마다 ‘성령 충만 부흥성회’라는 현수막이 내걸렸고, 방언을 못하는 사람은 신앙 열심이 없는 사람으로 간주하는 경향도 있었습니다.
그런 얘기를 하는 사람들의 말을 빌리면 성령을 받으면 방언을 하게 마련이기 때문에 방언을 못한다는 얘기는 아직 성령을 못 받은 증거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제가 참석했던 어떤 부흥회에서는 강사가 회중들에게 “아직도 방언을 못하는 사람이 있느냐”고 묻기도 했습니다.
방언을 하는 사람은 고급 신자인 반면 방언을 하지 못하는 신자는 다소 저급한 신자라는 선입견이 있는 얘기였습니다.
말도 아주 멋있게 합니다.
“구약 시대는 성부 여호와 하나님의 시대였고 신약 시대는 성자 예수님의 시대였다. 지금은 성령의 시대다. 성령의 시대를 살고 있으면서 성령을 못 받으면 어떻게 하느냐”라고 하면 맞는 말 같습니다.
그래서 부흥회만 하면 사람들은 성령을 받기 위해서 애를 썼습니다.
찬송가를 불러도 부흥회 전용 찬송가가 따로 있었습니다.
‘인애하신 구세주여’나 ‘지금까지 지내온 것’ 같은 것은 부르지 않습니다.
‘은혜가 풍성한 여호와 하나님은’ ‘불길 같은 성신여’ 같은 찬송을 박수를 치면서 최대한 빠르게 부릅니다.
또 불을 꺼서 통성 기도를 하라고 하면 ‘주여 삼창’을 하고는 바락바락 악을 쓰면서 기도를 했습니다.
마치 여호와 하나님이 누구 목소리가 제일 큰지, 누가 제일 열심히 기도하는지를 보고서 그 점수에 따라서 방언의 은사도 주시고 신유의 은사도 주시는 듯한 착각이 들만큼 전부 다 열심을 부렸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보혜사가 바로 성령인데, 예수님께서는 조금 다른 말씀을 하십니다.
성령은 우리가 받으려고 기를 쓰고 노력해야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벌써 이 세상에 왔다고 합니다.
‘주여 삼창’하면서 목이 터지게 통성 기도하고 박수를 치면서 찬양을 해야 우리에게 오지 않고 이미 이 세상에 계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예수님이 가셔야 보혜사가 오기 때문에 예수님이 가시는 것이 우리에게 유익이라는 사실과 다른 하나는 성령이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이 세상을 책망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이 가셔야 우리에게 유익이라는 말씀이 납득이 되십니까
성령이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과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 중에서 하나를 택하라고 하면 어느 쪽을 택하시겠습니까
우리 생각에는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은데 예수님 말씀은 그게 아닙니다.
예수님 생각과 우리 생각이 서로 다르면 당연히 예수님 생각이 옳고 우리 생각이 틀렸을 것입니다.
이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령이 우리와 함께 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일백 이십년이 되리라 하시니라(창6:1-3)
노아 홍수 직전의 상황입니다.
당시 사람들의 죄악상을 본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신(성령)을 거두어 가셨습니다.
본래 여호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인간이 그 즈음에는 고깃덩어리에 불과할 정도로 철저하게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당시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시고는 “저들은 한낱 육체에 불과하다. 고깃덩어리에 불과한 저들과 나의 신이 함께 할 수는 없다. 내가 앞으로는 영원히 저들에게 성령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라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에 오면 얘기가 달라집니다.
오순절 마가 다락방에 성령이 임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보혜사가 그때 임한 것입니다.
오순절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행2:1-4)
오순절날 마가의 다락방에 성령이 임하였다는 사실은 “아, 그렇구나” 하고, 피상적으로 넘어갈 수 있는 사건이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노아 홍수 직전에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않으리라’라고 하시면서 성령을 거두어 가셨는데, 그때 거두어 가신 성령이 임한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에는 그에 상응하는 이유가 있어야 합니다.
철없는 어린애들은 자기 마음 내키는 대로 주었다, 뺏었다 변덕을 부릴 수 있지만 전지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성령을 거두어 가신 이유는 이 세상에 관영한 죄악 때문이었는데, 성령이 다시 임했다는 얘기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성령을 거두어 가신 일이 원인 무효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즉 죄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때는 성령이 거할 수 없을 만큼 더러웠는데 지금은 성령이 거할 수 있을 만큼 깨끗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여호와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12:3)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예수를 주라고 고백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주라 고백한다는 얘기는 우리 안에 성령이 계시다는 뜻입니다.
또 우리 안에 성령이 계시다는 얘기는 우리가 더 이상 여호와 하나님 앞에 죄인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죄가 해결되지 않으면 성령이 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죄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얘기를 뒤집어서 생각하면 이 세상은 심판을 받았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대학에서 합격자 발표를 하는 경우를 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집 애가 고등학생이 된 후 성적이 점점 떨어졌습니다.
보다 못한 집에서 애가 고3이 되니까 외출 금지령을 내렸습니다.
학교에 갔다 오면 일체의 바깥출입을 통제하고 공부만 하게 했습니다.
그러다가 대학에서 합격자 발표를 하자, 외출 금지령을 철회했습니다.
대학에 합격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대학에서 합격자 발표만 하면 모든 학생들이 전부 합격하는 것은 아닙니다.
합격자를 발표했다는 얘기를 뒤집으면 불합격자도 공개되었다는 뜻입니다.
고3 때도 외출 금지령을 내렸는데 대학에 떨어져서 재수를 하게 되면 그 다음에는 무슨 일이 있겠습니까
어쩌면 그때부터는 방문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할지도 모릅니다.
대학에서 합격자 발표를 한다는 얘기는 어떤 학생에게는 대학 입학 자격이 주어져서 예비 대학생이 된다는 뜻입니다만 어떤 학생에게는 패배감과 슬픔을 주는 소식이 되기도 합니다.
성령이 온다는 얘기가 바로 그렇습니다.
예수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모든 죄를 말갛게 도말하시고 구원을 허락하셨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예수 밖에 있는 이 세상에 대해서는 심판이 예비되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구원 얻은 천국 백성이라는 사실을 무엇으로 알 수 있습니까
주일이면 이렇게 모여서 예배를 드린다는 사실로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생각에는 교회 와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 뭐 그리 대단한 일인가 싶을 수 있지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구원 얻지 못한 사람에게는 죽었다 깨도 하기 싫은 것이 교회 나오는 일입니다.
학생 때 제일 하기 싫은 일이 무엇입니까
당연히 공부입니다.
하지만 공부보다 더 싫은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예수 믿지 않는 학생에게 교회 가자는 얘기를 해보십시오.
“야! 너, 주일에 뭐하냐”
“왜”
“같이 교회 가자. ”
“안돼. ”
“왜”
“바빠. ”
“뭐 하는데”
“공부해야 해. ”
이런 식의 대화가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학생 때 제일 하기 싫은 것이 공부인데, 예수를 믿지 않는 학생에게는 그 공부마저도 교회 안 나가는 핑계가 됩니다.
여러분은 재미없는 영화를 돈 내고 보라면 보시겠습니까
아마 그런 영화는 돈을 줄 테니까 봐달라고 해도 싫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매주 헌금 내면서 설교를 들으러 오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아무리 재미없는 영화도 설교를 듣는 것보다는 훨씬 낫습니다.
그런 설교를 매주 돈 내고 듣는 것은 무슨 경우입니까
물론 교회에서 하는 헌금은 설교를 듣는 값이 아닙니다만 이를테면 그렇다는 말씀입니다.
설교는 설교 본래의 뜻보다 변형된 뜻으로 더 자주 쓰입니다.
“야, 듣기 싫으니까 설교 좀 그만해라” “너, 나에게 설교하는 거냐” “우리 엄마는 한 번 설교 시작하면 한 시간이다. ” 등등의 말이 그렇습니다.
원래는 예배 시간에 선포되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켜서 설교라고 합니다만, 실제로는 ‘듣기 싫은 잔소리’라는 뜻으로 더 많이 쓰입니다.
그런데 교인들은 그런 설교를 듣기 위해서 매주 모입니다.
설교를 들을 때마다 은혜를 받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와서 졸다 가거나 “이 설교가 언제 끝나나……” 하는 마음으로 시계만 보다가 갑니다.
그러면서 다음 주에 또 옵니다.
그렇데 지겹게 앉아 있다 갔으면 다음 주에는 안 와야 하는데 다음 주에 또 옵니다.
이 세상에서는 도무지 설명할 수 없는 일이 교회에서는 매주 일어납니다.
그 이유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어린아이들을 생각해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애들은 잠을 자도 엄마 품에 안겨서 자는 것을 좋아합니다.
본래 자세는 밑바닥에 닿는 표면적이 넓을수록 편한 법입니다.
서있는 것보다 앉아있는 것이 편하고, 앉아있는 것보다 누워있는 것이 편합니다.
그렇게 따지면 다른 사람 품에 안긴 것은 그리 편한 자세가 아닙니다.
그런데도 기를 쓰고 엄마 품에 안겨서 자려고 합니다.
자세가 편한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그렇게 해야 마음이 편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바로 그렇습니다.
우리는 집에서 편안하게 누워 자는 것보다는 설령 졸다 가는 한이 있더라도, 어쨌든 교회에 와야 마음이 편한 사람들입니다.
예배를 빼먹으면 옆에서 누가 뭐라고 하지 않아도 자기 혼자 마음이 찔립니다.
우리의 신분과 소속이 바뀌었다는 단적인 증거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에게만 해당되는 내용입니다.
세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성령께서 이 세상에 오시면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요16:8-9)
성령께서는 죄에 대하여 세상을 심판하십니다.
세상이 예수를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것이 왜 죄인지에 대해서 세상은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것이 죄라고 지적합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것이 죄라는 얘기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앙갚음을 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암으로 죽어가는 어떤 사람이 있다고 하십시다.
도무지 치료가 불가능합니다.
하루하루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었는데 마침 특효약이 발명되었습니다.
그 약만 먹으면 살 수 있다면서 의사가 그 약을 처방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환자가 고집을 부려서 그 약을 먹지 않더니 결국 죽었습니다.
이런 경우에 그 환자가 죽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본래 죽을병에 걸려 있어서 죽은 것입니다만 약을 안 먹었기 때문에 죽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닙니다.
예수를 믿지 않은 것이 죄란 얘기가 바로 그렇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죄로 인하여 멸망 받을 수 없는 이 세상에 구원 얻을 방도로 예수를 보내셨는데, 그 예수를 믿지 않았으니 당연히 예수를 믿지 않은 것이 죄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사실을 놓고 성경은, 성령께서 죄에 대하여 이 세상을 책망한다고 얘기합니다.
또 의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십니다.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요16:10)
의는 옳고 그른 기준을 얘기합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을 틀렸다고 하여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고발한 죄목이 무엇이었습니까
예수님 스스로 여호와 하나님과 자기를 동등하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 입장에서는 도무지 그냥 듣고 넘어갈 수 없는 말이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 다음에 어떻게 되었습니까
예수님의 시신이 무덤에서 썩은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셨습니다.
유대인들 생각에 예수님은 영원토록 저주를 받아 지옥 형벌을 받는 것이 마땅한데, 예수님은 지금 천국에 계십니다.
그러면 누가 틀렸다는 얘기입니까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행4:11)
건축자들이 집을 짓는데, 돌멩이 하나를 보고서는 쓸모없다고 하여 버렸습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건축자들이 버린 돌을 오히려 집 모퉁이의 머릿돌(집을 짓는데 기준이 되는 돌)을 삼았습니다.
그러면 그 돌을 버린 건축자들의 수준이 어떻다는 얘기입니까
담을 쌓는데 필요한 돌을 버려도 수준이 의심스러운데 집 모퉁이의 머릿돌로 쓰일 만한 돌을 분별하지 못하고 버렸으니 돌팔이도 이만저만한 돌팔이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거룩한 것에 대한 인간의 안목이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어떤 것이 옳고 어떤 것이 그른지를 분별하지 못합니다.
오죽하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일 만큼 거룩한 것에 대해서는 무지합니다.
성령님께서 그것을 책망하십니다.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니라(요16:11)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릴 적에 예수님에게 사형 판결을 내렸던 사람은 세상 임금이었습니다.
이런 경우에 세상 임금이 아무리 잘못했다고 해도 세상 임금과 여호와 하나님의 힘이 서로 비슷하다면 논란의 여지가 생길 수 있습니다.
힘으로 우기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세상 임금이 이미 심판을 받았습니다.
그러면 세상 임금보다 힘이 약한 다른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이런 사실을 놓고 성경은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라고 얘기합니다.
요컨대 우리의 신앙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여호와 하나님의 심판 앞에 놓여 있구나. 우리만 여호와 하나님께서 택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이로구나. ”라는 인식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부분이 다분히 잘못되어 있습니다.
자기에게 문제가 생길 때마다 “여호와 하나님, 제가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이면 이 문제를 해결해 주십시오. ”라고 하는 것이 우리의 기도입니다.
자기가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실을 기초로 해서 신앙 생활을 쌓아나가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살다가 자기 욕심이 걸릴 때마다 자기에게 있는 신앙을 근거로 내세워서 기초를 확인하려고 합니다.
성령님께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신다고 하니까 우리와는 전혀 관계없는 얘기 같습니까
우리에게는 과연 거기에 걸리는 부분이 없습니까
우리의 삶 속에서 예수를 믿지 못하는 부분이 있으면 성령님께서 그 부분을 책망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옳고 그른 것을 제대로 분별하지 못하고 자기 생각이 무조건 옳다고 고집부리는 부분에 대하여 성령님께서 우리를 책망하실 것입니다.
이 세상 임금도 이미 심판을 받았는데 한사코 이 세상에서 자기 욕심을 이루려고 하는 우리의 버릇에 대해서 또한 우리를 책망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런 내용을 우리 신앙의 기초로 삼아야 합니다.
“아, 그렇구나! 이 세상이 틀렸구나. 이 세상은 틀렸고 오직 주님만이 옳구나. ”가 우리 신앙의 기초입니다.
“여호와 하나님, 이 문제를 해결해 주시면 제가 앞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잘 섬기겠습니다. 하지만 해결해 주시지 않으면 저도 별 수 없습니다. ”는 신앙도 아니고 기도도 아닙니다.
우리 신앙이 별로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우선 기초를 확인하고 그 위에 신앙을 쌓아야 하는데 우리는 마땅히 우리 신앙의 기초가 되어야 할 내용을 오히려 자기 욕심을 위한 흥정거리로밖에 갖고 있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골치 아픈 사람이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처음에는 믿지 않겠다고 우겨서 골치를 아프게 하다가, 믿기 시작한 다음에는 자기 딴에는 열심을 부린답시고 무조건 자기가 옳다고 우겨서 골치 아프게 합니다.
옆에서 그것을 지적하면 이번에는 “좋다, 그럼 난 가만히 있겠다. ” 하고, 아무것도 안 하고 나자빠져서 골치 아프게 만듭니다.
참으로 신기한 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런 사람들을 데리고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켜나가더라는 사실입니다.
우리 인생이 우리에게 있지 않다는 단적인 증거입니다.
우리 인생은 복될 수밖에 없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미련함을 넉넉히 덮고도 남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우리 안에 내주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주님을 주님이라 고백하게 하시고 우리를 진리와 영생으로 인도하시는 성령님의 은총을 찬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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