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강림] 성령과 그리스도
본문
부부가 다투면 제일 먼저 나타나는 현상이 무엇입니까 말하지 않는 것입니다. 물론 부부의 성격상 약간의 차이가 있기는 하겠지만 대개는 더 이상 대화를 하지 않습니다. 만약 다투지 않고 정상적인 상태라면 서로의 신상에 일어난 일들에 관해 서로 얘기를 하게 될 것입니다. 한번은 저희집 딸아이가 자기에게 일어났던 일을 장황하게 저에게 설명을 했습니다. 같은 반 아이중에 한명이 자기를 괴롭히는데 그날 따라 유난히도 귀찮게 하고 괴롭혀서 힘들었다는 얘기였습니다.
그런데 저는 '걔가 너를 무척 좋아하는 모양이구나! 대개 남자들이 여자를 괴롭히는 것은 관심이 있다는 증거야'라고 말하고는 그냥 넘어가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얘기를 저녁 먹는 시간까지 제 아내에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저녁식탁에 둘러앉아서 그 얘기가 또 나왔습니다. 딸아이는 당연히 엄마가 알고 있는 줄 알고 얘기를 했습니다. 하지만 제 아내는 아이의 입을 통해 처음 듣게 되었습니다. 제가 얘기를 하지 않았으니까요
그렇다고 해서 제가 아내와 다투었기 때문에 그 얘기를 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그저 교회일로 인해 바쁘게 다니다보니 그날 저녁식탁에 앉을 때까지 얘기할 기회가 없었던 것 뿐입니다. 그런데 아이는 어떤 생각을 합니까 아빠에게 얘기했으니 엄마도 당연히 알고 있으리라는 것입니다. 사실이 그렇습니다. 정상적인 가정이라면 아빠와 엄마를 둘로 분리해서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빠에게 얘기했다면 그 얘기는 당연히 엄마가 알게 되어 있습니다. 또 아이들이 용돈이 필요한 경우 이것은 아버지에게 받아야 하고 저것은 엄마에게 받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물론 일차적으로는 엄마에게 용돈을 달라고 요구합니다. 그런데 엄마가 '지금 돈이 없으니 아빠에게 달라고 해라'라고 말했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러면 아빠가 아이에게 용돈을 줄 것입니다. 그런데 아이가 이렇게 생각하는 경우가 있을까요
나는 엄마에게 용돈을 달라고 했는데 아빠가 주셨으니까 저녁에 다시 엄마에게 용돈달라고 해야지 라고 말입니다. 엄마가 준 것과 아빠가 준 것이 별게의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엄마에게 받든 아빠에게 받든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에게 받을 것인가 아니면 어머니에게 받을 것인가를 가지고 고민을 하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결국은 다 똑 같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신앙생활은 그런 것 같지 않습니다. 만약 누군가가 여러분에게 이렇게 질문을 한다고 가정을 해봅시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예수님이 중요합니까 성령님이 중요합니까' 그런 질문을 받게 되었을 때 예수님에 대해 그리고 성령님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지 못하는 분이 아니라면 모두가 '예수님도 중요하고 성령님도 중요합니다. '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 말은 결코 틀린 말이 아닙니다. 정답입니다. 예수님도 중요하고 성령님도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여호와 하나님은 삼위의 여호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실제 우리의 신앙생활을 들여다보면 우리는 지극히 '그리스도 중심적'인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그리스도 중심적인 신앙생활이란 '주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위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라는 사실을 아는 것으로 그친 까닭에 구체적인 삶속에서 성령을 의지하는 모습이 없다는 말입니다. 즉 우리는 예수를 믿을 때나 믿지 않을 때나 여전히 자기 머리와 자기 방법대로 살고 있다는 뜻입니다.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기 위해 기도하려고 애를 쓴다거나 내 방법이 아닌 여호와 하나님의 방법대로 살기 위해 성령을 전폭적으로 의지하려고 애를 쓰는 모습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언제나 우리는 '예수 믿는다고 하더니 말만 많고 행동이 없다'라는 말을 듣게 됩니다.
예수 믿는다고 하더니 뭔가 나아진 것이 아무것도 없고 오히려 더 자기 중심적인 삶을 산다라는 말을 듣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내가 내 자신을 생각해 보아도 그렇게 여겨질 때가 많습니다. 예수를 믿고 난 뒤에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내 생활이 언제나 그리스도 중심적인 삶인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불안하고 염려가 되고 근심이 떠나가지 않습니다.
주일이 되면 교회에 와서 하루종일 봉사하고, 모든 것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면 거의 초죽음이 될 정도로 그렇게 사역을 했는데 여전히 뭔가 부족하고 빠진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는 그런 경우가 많지 않습니까 오직 십자가를 붙들고 사는데도 불구하고 때로는 지치고 힘들어서 '도대체 신앙생활이 뭔가'라는 의문이 내 마음 한가운데서 일어나는 경우를 발견하지 않습니까 오늘 살펴보게 될 말씀을 중심으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그리스도 중심적인 신앙에 치우쳐 있다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반면에 성령 중심적인 사람은 어떻습니까 아무런 체험없이 교회만 왔다갔다 하는 사람을 보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저렇게 신앙생활하려면 도대체 무엇 때문에 신앙생활하는지 모르겠다라고 생각합니다. 책상에 앉아서 성경공부한다고 무슨 능력있는 삶을 사느냐 제자훈련한다고 제자가 되느냐라고 말합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들에게 가르치고 있는 것은 한쪽에 치우쳐 있는 신앙에 대한 경계입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우리의 신앙생활에 성령과 그리스도는 결코 분리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어느 한분만을 의지하는 신앙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반드시 매 순간 순간마다 성령을 의지해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의 능력을 구하는 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구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는다고 하면서 매 순간 주님이 주시는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지 않고 자기 기분이나 자기 의지로 사는 것은 불신앙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에 대한 그리스도의 뜻이 성경에 분명히 나타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떠나 새로운 어떤 신비로운 체험을 추구한다면 그것도 불신앙입니다. 그런의미에서 오늘 우리의 문제가 무엇인가를 점검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문제도 이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습니다. 대개의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죽으심을 믿습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지 않습니다. 대속의 죽으심을 믿는 것은 믿는 것이고 자신의 생활은 언제나 습관적이며 반복된 과거의 삶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늘 우리에게 주시는 성령을 의지해서 살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신앙생활에 살아서 꿈틀거리는 생명력을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늘 지쳐있고, 조그마한 일에 짜증을 내게 되고, 매우 기계적인 반응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지난주에 광고드린대로 오늘 태신자를 1차로 작정하는 시간을 갖습니다. 그런데 이런 시간을 가지면 마땅히 쓸 사람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지쳐 있는데 무슨 전도냐는 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분들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믿지 않는 것도 아닌데 반응이 언제나 이런식이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믿는 것은 믿는 것이고 생명력있는 역동적인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이유가 어디에 있느냐 하면 우리가 그리스도 중심적인 생활을 하고 있는 반면에 성령을 의지하려는 모습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 신앙의 첫 출발점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우리는 더 풍성한 은혜를 체험하고 능력을 얻기 위해 더욱 더 성령을 의지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모르는 것이 너무도 많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 한 10년 이상하면 모든 것을 아는 것처럼 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분들은 교회생활을 아는 것이지 신앙생활을 아는 것이 아닙니다. 어려운 일이 닥쳤을 때 어떻게 성령을 의지하고 극복하는지에 대해서 알지 못합니다. 시험이 찾아왔을 때 어떻게 성령의 음성을 듣고 그 말씀에 따라 행동해야 할 것인지를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12절에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 무슨 말입니까 사실 제자들은 삼년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진리를 배운 자들입니다. 옛말에 서당개 삼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했는데 이만하면 이제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이제 너희도 배울만큼 배웠으니 하산해라'라고 말씀하실만도 한데 아직도 너희가 알아야 할 것이 많은데 너희가 그것을 감당치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물론 진리에 관해 삼년동안 배웠다고 해서 완전히 터득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삼년동안 따라다니면서 함께 먹고 자며 배웠다면 어느 정도 그 진리를 소화해낼만한 수준에는 이르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주님은 제자들이 너무도 많은 것을 모르고 있으며 더 많이 배울 필요가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뿐만아니라 더 많이 배워야 할 진리에 대해선 이제 예수님 자신이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오실 성령께서 그들에게 가르쳐 주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13절에 보면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라고 했습니다. 왜 예수님께서 계속해서 가르쳐 주지 않으시고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분이 그들을 모든 진리가운데로 인도하신다고 하셨을까요 여기서 '모든 진리'란 '완성된 진리'를 말합니다. 그 완성된 진리는 주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뒤 부활하시고 그들의 곁을 떠나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성부여호와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셔서 그로 하여금 예수님의 모든 사역에 대한 진리를 깨닫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들이 삼년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많은 가르침을 받고 수 많은 기적들을 체험했다할지라도 그것으로 모든 것이 다 되었다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기초에 불과한 것이고 더 풍성한 진리의 가르침을 얻기 위해서는 성령의 도우심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사실을 그들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제가 중학교를 졸업에 누가 강요한 것은 아니지만 학생들 사이에 거의 불문율처럼 여겨진 코스가 있었습니다. 연합고사를 치루고 난 뒤 고등하교 입학하기까지 약 3개월동안 영어는 '기본종합영어', 수학은 문과를 택할 경우 '수1 정석', 이과를 택하는 학생은 '수Ⅱ정석'이라는 과목을 학원에서 필히 수강하는 일입니다.
그 당시 '기본종합영어'라는 과목은 고등학교에 입학하는 학생들에게는 기본적이고도 기초적으로 공부해 두어야 할 내용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과목을 방학기간동안 공부하고 고등학교에 입학했더니 그보다 한단계 업그레이드 된 '성문종합영어'라는 책으로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성문종합영어'는 '기본종합영어'보다 문장이 훨씬 더 길고 단어도 고급단어들이 많이 나오고 독해능력을 더 많이 요구하는 책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성문종합영어만 마스터해도 대학 가는데는 별로 어려움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고등학교 입합하기 전엔 기본종합영어로 공부를 했지만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대학을 진학하기 위해선 성문종합영어로 공부를 해야만 했었습니다. 어떤면에서 볼 때 주님께서 지금까지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것은 가장 기본적이며 기초적인 것에 불과했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삼년동안 자신을 따라다녔던 제자들이 그 수준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된다는 말씀입니다. 장래를 생각하면 더 많은 것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면 제자들이 지금까지 배운 가장 기본적인 진리는 도대체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님이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이것 하나만큼은 더 이상 흔들릴 수 없도록 그들의 마음 깊은 곳에 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그분의 인격과 그분이 행하신 일들을 볼 때 비록 육신을 입었지만 분명히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서이며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를 회복하기 위해서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의 핵심은 죄사함과 구원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나라였습니다. 그것을 위해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위에서 죽어야 한다는 사실과 사흘만에 부활하셔서 모든 믿는 자들에게 성령을 부으실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이처럼 제자들이 삼년동안 배운 것은 여호와 하나님 나라의 진리에 있어서 가장 기초적이고도 가장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예수님의 표현대로라면 이것이 진리의 모든 것은 아닙니다. 제자들이 더 많이 배우고 더 많이 깨달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앞으로 이 구원을 어떻게 이루어 가느냐'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어떻게 교회를 세우실 것이며 또 교회안에서 믿는 자들을 어떻게 양육하며, 믿는 자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며, 최종적으로 우리의 구원이 어떻게 이루어지느냐'하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13절 끝부분에 보면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고 했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는 요지는 이것입니다. '너희가 비록 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알았다고는 하나 그것만으로 모든 것이 다 된 것은 아니다, 너희가 그 사실을 알기 때문에 더욱 더 성령의 깨우침과 성령의 능력주심이 필요하다'라는 말이었습니다.
왜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제자들에게 하시는 것일까요 예수가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인 것과 온 인류의 구원자라는 사실을 아는 것으로 그치지 말고 이제는 성령안에서 성령의 능력으로 그 사실을 증거하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능력있게 사는 것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들에게 이 말씀을 한번 적용해봅시다. 여러분 저나 여러분이 알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입니다. 예수님께서 내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진리를 깨닫는 가장 기초적인 출발점이며 신앙의 기본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가 십자가의 죽음을 믿기 때문에 더 이상 성령을 의지할 필요없이 우리 생각과 마음대로 살아도 된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정말 성령의 깨닫게 하심과 성령의 힘 주심에 따라서 살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삶은 이미 우리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우리의 많은 계획과 생각들로 인해 여호와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합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초보의 수군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언제나 기본적인 진리에 머물러 있고 더 이상 나아가려 하지 않습니다.
어떤 분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예수 믿고 천국가면 되는 것이지 더 이상 뭐가 필요하냐'고 말입니다. 맞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 초보적인 수준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를 믿고 사는데도 불구하고 세상을 사는 동안 언제나 불만족스럽게 삽니다. 그저 불평과 불만속에서 하루 하루의 삶에 환멸을 느끼며 살아갈 뿐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닙니다. 우리는 천국을 바라보면서 이 땅에 사는 동안 기진맥진한 상태에서 살다가 주님이 부르시는 날 모든 육신의 장막을 벗어버리고 떠나가는 그런 인생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사는 동안에도 능력있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하루 하루 삶을 통하여 잃어버린 여호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고 죄로 인해 파괴된 이 세상을 이끌어가야 할 책임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라크의 도시들이 전쟁으로 인해 마구 파괴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파괴된 도시의 모습이 싫어서 그 도시를 떠나버렸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그 파괴된 도시로 돌아와서 그 도시를 재건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물론 지금도 여전히 전쟁의 기운으로 불안하고 완전히 복구가 된 것은 아니지만 얼마있지 않으면 폭격을 받기 전보다 훨씬 더 훌륭한 도시가 건설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 대해 불평하고 짜증내는 수준으로 살게 하다가 어느 날 우리를 데려가시려는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이 세상에서 기가막힌 새로운 건축가로 사용하고자 하십니다. 물론 이 세상은 죄 때문에 완전히 재건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세상에서 무엇인가 아름답고 가치있는 창조를 하기 위하여 부름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 구원을 믿을 뿐 아니라 앞으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 구원을 교회중심으로 어떻게 이루실 것인지를 생각하며 내가 매일 매일 폐허같은 이 세상에서 어떻게하면 새로운 건축가의 자세로 일하게 될 것인지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예수의 십자가를 믿는 것으로 모든 것이 충분하고 이제부터 내가 힘써야 할 것은 어떻게 하면 돈을 잘 벌고 어떻게 하면 다른 사람들처럼 편하게 사느냐 하는데 있다면 그리스도는 헛되이 죽으신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책상에 앉아 있는 신앙이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은 이론을 섭득하는 신앙이 아닙니다. 조그마한 문제앞에 여지없이 무너지는 나약한 신앙이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은 이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역동적인 것이며 살아서 움직이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저와 여러분의 모습 속에서 역동성을 발견할 수 있느냐를 진지하게 물어보아야 합니다. 왜 역동성을 발견할 수 없습니까 왜 예수가 어떤 분인지도 알고 그 분과 더불어 생활하려는 자세도 되어 있는데 살아서 움직이는 신앙이 되지 못해 언제나 우리 자신에 대해 실망해야만 합니까
그것은 현재 자신의 신앙에 안주해서 성령을 의지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약 성령을 의지하고자 하는 노력이 없다면 나이를 먹고 학년이 올라감에도 불구하고 자라기를 거부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주님의 십자가를 믿는 우리에게 성령의 깨닫게 하심과 힘 주심이 꼭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그 성령에 대해 어떻게 말씀합니까
14절에 보면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고 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성령은 그리스도께서 이미 이루어 놓으신 구원을 우리에게 적용시키는 것을 하신다는 말입니다. 사실 성령께서 깨닫게 해 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알 수 없습니다. 설령 그리스도가 죽으신 것에 대해 알 수는 있다 할지라도 그가 무엇 때문에 죽었는지 알 수 없고 더구나 죽었다가 다시 부활하시고 어떤 지위를 가지게 되셨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하시는 일은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일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그가 누구신지 알고 믿게 하십니다. 그는 목수의 아들이 아니라 영원한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합니다. 뿐만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이루어 놓으신 구원은 우리가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그 어려움으로부터 건져내주고 우리가 질병으로 고통당할 때 그 질병으로부터 우리를 고쳐주고 우리가 마음이 상해 있을 때 그 마음을 위로 해 주시는 정도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영원한 여호와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건지시는 것을 말합니다.
물론 우리가 예수를 믿고 있지만 아직도 내가 구원받은 사실에 대해 잘 실감을 못하며 살아갑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벗어났다고 했는데 언제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진노하셨는지 그것조차도 잘 모릅니다. 사람이 화가 나면 표정에서부터 알 수 있습니다. 뭔가 만족스럽지 못하고 뭔가 화가 나는 일이 있을 때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만약 여호와 하나님의 표정을 우리가 보았다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진노하셨다라는 사실을 알수 있겠지만 그것도 아니니 여호와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벗어났다는 말은 더 더욱 실감하기가 어렵습니다. 더구나 우리 눈에 지옥이 펼쳐져 보이는 것도 아니니 느끼지 못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우리와 똑 같은 수 많은 사람들이 여호와 하나님앞에 죄 용서를 받지 못해서 그 무서운 지옥에 떨어지는 것을 보며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능력을 실감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의미에서 본다면 우리가 지은 죄 때문에 번민하고 괴로워하는 것은 미리 이 세상에서 지옥을 약간 맛보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또 본문은 성령에 대해 뭐라고 말씀합니까 15절에 보면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것이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리라 하였노라"고 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성령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모든 은혜는 바로 주님의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시고 하늘에 올리우셔서 떠나신다고 해서 그리스도의 모든 시대가 끝난 것은 아닙니다. 이제 모든 것을 성령이 맡아서 따라 일하시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이 세상에 계실 때처럼 여전히 모든 것을 여전히 주님이 주관하시고 주님께서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워주시는데 그것을 성령을 통하여 하신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의 삶이 능력있는 삶이 되기 위해 성령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다면 주님의 이름을 부르시기 바랍니다. 나의 삶속에서 나의 모든 고집과 불신을 몰아내고 주님께서 내 삶을 채우시도록 간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성령님께서 하늘의 모든 지혜와 능력으로 내 안을 채우시며 나를 힘있게 붙들어 주실 것입니다.
오늘 성경이 우리들에게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습관적이고 힘없는 신앙은 병든 신앙이고 미숙한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을 믿고 삽니다. 그러나 이 세상을 십자가를 가지고 이겨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를 붙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넘어집니까 예수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믿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조그마한 문제 때문에 시험들고 낙심합니까 십자가가 능력이 없어서 입니까 십자가만으로는 부족하기 때문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성령이 나를 진리가운데도 인도하시는 은혜를 친히 우리가 체험해야 합니다. 그것이 없으면 우리는 늘 넘어지고, 늘 시험 들고, 늘 미숙한 신앙의 자리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진실로 십자가를 믿는다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불러야 합니다. 그분이 거기서 내려오셔서 나의 모든 삶을 주장하시도록 겸손하게 물러서야 합니다.
우리는 이미 구원에 대한 기본적인 진리를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시작에 불과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루 하루를 성령님이 주시는 깨달음과 능력으로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는 도대체 파괴된 이 세상에서 왜 살아야 하는지를 모르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교회를 통하여 이루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놀라운 뜻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계획의 중심은 교회입니다.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중심으로 자신의 삶을 다시 편성하고 그 일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지혜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이 시간 후에 우리는 태신자를 정하는 시간을 갖게 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계획 속에 누가 들어가 있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가 알 수 없다하더라도 태신자를 작정하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은 그리스도인의 능력있는 삶 중에 하나라는 사실입니다.
그냥 주일에 한번 예배드리는 것으로 만족하는 삶을 사시겠습니까 아니면 역동적으로 살아 움직이는 신앙의 소유자가 되시겠습니까 이제 여러분의 결단만이 남았습니다. 책상에 앉아 있는 신앙에서 벗어나 활동하고 움직이는 신앙의 소유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우리가 성령을 의지할 때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오늘도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저는 '걔가 너를 무척 좋아하는 모양이구나! 대개 남자들이 여자를 괴롭히는 것은 관심이 있다는 증거야'라고 말하고는 그냥 넘어가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얘기를 저녁 먹는 시간까지 제 아내에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저녁식탁에 둘러앉아서 그 얘기가 또 나왔습니다. 딸아이는 당연히 엄마가 알고 있는 줄 알고 얘기를 했습니다. 하지만 제 아내는 아이의 입을 통해 처음 듣게 되었습니다. 제가 얘기를 하지 않았으니까요
그렇다고 해서 제가 아내와 다투었기 때문에 그 얘기를 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그저 교회일로 인해 바쁘게 다니다보니 그날 저녁식탁에 앉을 때까지 얘기할 기회가 없었던 것 뿐입니다. 그런데 아이는 어떤 생각을 합니까 아빠에게 얘기했으니 엄마도 당연히 알고 있으리라는 것입니다. 사실이 그렇습니다. 정상적인 가정이라면 아빠와 엄마를 둘로 분리해서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빠에게 얘기했다면 그 얘기는 당연히 엄마가 알게 되어 있습니다. 또 아이들이 용돈이 필요한 경우 이것은 아버지에게 받아야 하고 저것은 엄마에게 받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물론 일차적으로는 엄마에게 용돈을 달라고 요구합니다. 그런데 엄마가 '지금 돈이 없으니 아빠에게 달라고 해라'라고 말했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러면 아빠가 아이에게 용돈을 줄 것입니다. 그런데 아이가 이렇게 생각하는 경우가 있을까요
나는 엄마에게 용돈을 달라고 했는데 아빠가 주셨으니까 저녁에 다시 엄마에게 용돈달라고 해야지 라고 말입니다. 엄마가 준 것과 아빠가 준 것이 별게의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엄마에게 받든 아빠에게 받든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에게 받을 것인가 아니면 어머니에게 받을 것인가를 가지고 고민을 하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결국은 다 똑 같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신앙생활은 그런 것 같지 않습니다. 만약 누군가가 여러분에게 이렇게 질문을 한다고 가정을 해봅시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예수님이 중요합니까 성령님이 중요합니까' 그런 질문을 받게 되었을 때 예수님에 대해 그리고 성령님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지 못하는 분이 아니라면 모두가 '예수님도 중요하고 성령님도 중요합니다. '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 말은 결코 틀린 말이 아닙니다. 정답입니다. 예수님도 중요하고 성령님도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여호와 하나님은 삼위의 여호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실제 우리의 신앙생활을 들여다보면 우리는 지극히 '그리스도 중심적'인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그리스도 중심적인 신앙생활이란 '주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위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라는 사실을 아는 것으로 그친 까닭에 구체적인 삶속에서 성령을 의지하는 모습이 없다는 말입니다. 즉 우리는 예수를 믿을 때나 믿지 않을 때나 여전히 자기 머리와 자기 방법대로 살고 있다는 뜻입니다.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기 위해 기도하려고 애를 쓴다거나 내 방법이 아닌 여호와 하나님의 방법대로 살기 위해 성령을 전폭적으로 의지하려고 애를 쓰는 모습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언제나 우리는 '예수 믿는다고 하더니 말만 많고 행동이 없다'라는 말을 듣게 됩니다.
예수 믿는다고 하더니 뭔가 나아진 것이 아무것도 없고 오히려 더 자기 중심적인 삶을 산다라는 말을 듣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내가 내 자신을 생각해 보아도 그렇게 여겨질 때가 많습니다. 예수를 믿고 난 뒤에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내 생활이 언제나 그리스도 중심적인 삶인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불안하고 염려가 되고 근심이 떠나가지 않습니다.
주일이 되면 교회에 와서 하루종일 봉사하고, 모든 것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면 거의 초죽음이 될 정도로 그렇게 사역을 했는데 여전히 뭔가 부족하고 빠진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는 그런 경우가 많지 않습니까 오직 십자가를 붙들고 사는데도 불구하고 때로는 지치고 힘들어서 '도대체 신앙생활이 뭔가'라는 의문이 내 마음 한가운데서 일어나는 경우를 발견하지 않습니까 오늘 살펴보게 될 말씀을 중심으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그리스도 중심적인 신앙에 치우쳐 있다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반면에 성령 중심적인 사람은 어떻습니까 아무런 체험없이 교회만 왔다갔다 하는 사람을 보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저렇게 신앙생활하려면 도대체 무엇 때문에 신앙생활하는지 모르겠다라고 생각합니다. 책상에 앉아서 성경공부한다고 무슨 능력있는 삶을 사느냐 제자훈련한다고 제자가 되느냐라고 말합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들에게 가르치고 있는 것은 한쪽에 치우쳐 있는 신앙에 대한 경계입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우리의 신앙생활에 성령과 그리스도는 결코 분리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어느 한분만을 의지하는 신앙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반드시 매 순간 순간마다 성령을 의지해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의 능력을 구하는 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구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는다고 하면서 매 순간 주님이 주시는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지 않고 자기 기분이나 자기 의지로 사는 것은 불신앙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에 대한 그리스도의 뜻이 성경에 분명히 나타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떠나 새로운 어떤 신비로운 체험을 추구한다면 그것도 불신앙입니다. 그런의미에서 오늘 우리의 문제가 무엇인가를 점검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문제도 이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습니다. 대개의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죽으심을 믿습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지 않습니다. 대속의 죽으심을 믿는 것은 믿는 것이고 자신의 생활은 언제나 습관적이며 반복된 과거의 삶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늘 우리에게 주시는 성령을 의지해서 살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신앙생활에 살아서 꿈틀거리는 생명력을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늘 지쳐있고, 조그마한 일에 짜증을 내게 되고, 매우 기계적인 반응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지난주에 광고드린대로 오늘 태신자를 1차로 작정하는 시간을 갖습니다. 그런데 이런 시간을 가지면 마땅히 쓸 사람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지쳐 있는데 무슨 전도냐는 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분들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믿지 않는 것도 아닌데 반응이 언제나 이런식이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믿는 것은 믿는 것이고 생명력있는 역동적인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이유가 어디에 있느냐 하면 우리가 그리스도 중심적인 생활을 하고 있는 반면에 성령을 의지하려는 모습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 신앙의 첫 출발점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우리는 더 풍성한 은혜를 체험하고 능력을 얻기 위해 더욱 더 성령을 의지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모르는 것이 너무도 많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 한 10년 이상하면 모든 것을 아는 것처럼 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분들은 교회생활을 아는 것이지 신앙생활을 아는 것이 아닙니다. 어려운 일이 닥쳤을 때 어떻게 성령을 의지하고 극복하는지에 대해서 알지 못합니다. 시험이 찾아왔을 때 어떻게 성령의 음성을 듣고 그 말씀에 따라 행동해야 할 것인지를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12절에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 무슨 말입니까 사실 제자들은 삼년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진리를 배운 자들입니다. 옛말에 서당개 삼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했는데 이만하면 이제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이제 너희도 배울만큼 배웠으니 하산해라'라고 말씀하실만도 한데 아직도 너희가 알아야 할 것이 많은데 너희가 그것을 감당치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물론 진리에 관해 삼년동안 배웠다고 해서 완전히 터득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삼년동안 따라다니면서 함께 먹고 자며 배웠다면 어느 정도 그 진리를 소화해낼만한 수준에는 이르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주님은 제자들이 너무도 많은 것을 모르고 있으며 더 많이 배울 필요가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뿐만아니라 더 많이 배워야 할 진리에 대해선 이제 예수님 자신이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오실 성령께서 그들에게 가르쳐 주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13절에 보면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라고 했습니다. 왜 예수님께서 계속해서 가르쳐 주지 않으시고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분이 그들을 모든 진리가운데로 인도하신다고 하셨을까요 여기서 '모든 진리'란 '완성된 진리'를 말합니다. 그 완성된 진리는 주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뒤 부활하시고 그들의 곁을 떠나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성부여호와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셔서 그로 하여금 예수님의 모든 사역에 대한 진리를 깨닫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들이 삼년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많은 가르침을 받고 수 많은 기적들을 체험했다할지라도 그것으로 모든 것이 다 되었다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기초에 불과한 것이고 더 풍성한 진리의 가르침을 얻기 위해서는 성령의 도우심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사실을 그들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제가 중학교를 졸업에 누가 강요한 것은 아니지만 학생들 사이에 거의 불문율처럼 여겨진 코스가 있었습니다. 연합고사를 치루고 난 뒤 고등하교 입학하기까지 약 3개월동안 영어는 '기본종합영어', 수학은 문과를 택할 경우 '수1 정석', 이과를 택하는 학생은 '수Ⅱ정석'이라는 과목을 학원에서 필히 수강하는 일입니다.
그 당시 '기본종합영어'라는 과목은 고등학교에 입학하는 학생들에게는 기본적이고도 기초적으로 공부해 두어야 할 내용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과목을 방학기간동안 공부하고 고등학교에 입학했더니 그보다 한단계 업그레이드 된 '성문종합영어'라는 책으로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성문종합영어'는 '기본종합영어'보다 문장이 훨씬 더 길고 단어도 고급단어들이 많이 나오고 독해능력을 더 많이 요구하는 책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성문종합영어만 마스터해도 대학 가는데는 별로 어려움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고등학교 입합하기 전엔 기본종합영어로 공부를 했지만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대학을 진학하기 위해선 성문종합영어로 공부를 해야만 했었습니다. 어떤면에서 볼 때 주님께서 지금까지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것은 가장 기본적이며 기초적인 것에 불과했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삼년동안 자신을 따라다녔던 제자들이 그 수준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된다는 말씀입니다. 장래를 생각하면 더 많은 것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면 제자들이 지금까지 배운 가장 기본적인 진리는 도대체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님이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이것 하나만큼은 더 이상 흔들릴 수 없도록 그들의 마음 깊은 곳에 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그분의 인격과 그분이 행하신 일들을 볼 때 비록 육신을 입었지만 분명히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서이며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를 회복하기 위해서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의 핵심은 죄사함과 구원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나라였습니다. 그것을 위해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위에서 죽어야 한다는 사실과 사흘만에 부활하셔서 모든 믿는 자들에게 성령을 부으실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이처럼 제자들이 삼년동안 배운 것은 여호와 하나님 나라의 진리에 있어서 가장 기초적이고도 가장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예수님의 표현대로라면 이것이 진리의 모든 것은 아닙니다. 제자들이 더 많이 배우고 더 많이 깨달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앞으로 이 구원을 어떻게 이루어 가느냐'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어떻게 교회를 세우실 것이며 또 교회안에서 믿는 자들을 어떻게 양육하며, 믿는 자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며, 최종적으로 우리의 구원이 어떻게 이루어지느냐'하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13절 끝부분에 보면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고 했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는 요지는 이것입니다. '너희가 비록 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알았다고는 하나 그것만으로 모든 것이 다 된 것은 아니다, 너희가 그 사실을 알기 때문에 더욱 더 성령의 깨우침과 성령의 능력주심이 필요하다'라는 말이었습니다.
왜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제자들에게 하시는 것일까요 예수가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인 것과 온 인류의 구원자라는 사실을 아는 것으로 그치지 말고 이제는 성령안에서 성령의 능력으로 그 사실을 증거하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능력있게 사는 것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들에게 이 말씀을 한번 적용해봅시다. 여러분 저나 여러분이 알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입니다. 예수님께서 내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진리를 깨닫는 가장 기초적인 출발점이며 신앙의 기본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가 십자가의 죽음을 믿기 때문에 더 이상 성령을 의지할 필요없이 우리 생각과 마음대로 살아도 된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정말 성령의 깨닫게 하심과 성령의 힘 주심에 따라서 살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삶은 이미 우리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우리의 많은 계획과 생각들로 인해 여호와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합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초보의 수군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언제나 기본적인 진리에 머물러 있고 더 이상 나아가려 하지 않습니다.
어떤 분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예수 믿고 천국가면 되는 것이지 더 이상 뭐가 필요하냐'고 말입니다. 맞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 초보적인 수준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를 믿고 사는데도 불구하고 세상을 사는 동안 언제나 불만족스럽게 삽니다. 그저 불평과 불만속에서 하루 하루의 삶에 환멸을 느끼며 살아갈 뿐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닙니다. 우리는 천국을 바라보면서 이 땅에 사는 동안 기진맥진한 상태에서 살다가 주님이 부르시는 날 모든 육신의 장막을 벗어버리고 떠나가는 그런 인생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사는 동안에도 능력있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하루 하루 삶을 통하여 잃어버린 여호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고 죄로 인해 파괴된 이 세상을 이끌어가야 할 책임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라크의 도시들이 전쟁으로 인해 마구 파괴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파괴된 도시의 모습이 싫어서 그 도시를 떠나버렸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그 파괴된 도시로 돌아와서 그 도시를 재건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물론 지금도 여전히 전쟁의 기운으로 불안하고 완전히 복구가 된 것은 아니지만 얼마있지 않으면 폭격을 받기 전보다 훨씬 더 훌륭한 도시가 건설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 대해 불평하고 짜증내는 수준으로 살게 하다가 어느 날 우리를 데려가시려는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이 세상에서 기가막힌 새로운 건축가로 사용하고자 하십니다. 물론 이 세상은 죄 때문에 완전히 재건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세상에서 무엇인가 아름답고 가치있는 창조를 하기 위하여 부름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 구원을 믿을 뿐 아니라 앞으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 구원을 교회중심으로 어떻게 이루실 것인지를 생각하며 내가 매일 매일 폐허같은 이 세상에서 어떻게하면 새로운 건축가의 자세로 일하게 될 것인지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예수의 십자가를 믿는 것으로 모든 것이 충분하고 이제부터 내가 힘써야 할 것은 어떻게 하면 돈을 잘 벌고 어떻게 하면 다른 사람들처럼 편하게 사느냐 하는데 있다면 그리스도는 헛되이 죽으신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책상에 앉아 있는 신앙이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은 이론을 섭득하는 신앙이 아닙니다. 조그마한 문제앞에 여지없이 무너지는 나약한 신앙이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은 이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역동적인 것이며 살아서 움직이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저와 여러분의 모습 속에서 역동성을 발견할 수 있느냐를 진지하게 물어보아야 합니다. 왜 역동성을 발견할 수 없습니까 왜 예수가 어떤 분인지도 알고 그 분과 더불어 생활하려는 자세도 되어 있는데 살아서 움직이는 신앙이 되지 못해 언제나 우리 자신에 대해 실망해야만 합니까
그것은 현재 자신의 신앙에 안주해서 성령을 의지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약 성령을 의지하고자 하는 노력이 없다면 나이를 먹고 학년이 올라감에도 불구하고 자라기를 거부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주님의 십자가를 믿는 우리에게 성령의 깨닫게 하심과 힘 주심이 꼭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그 성령에 대해 어떻게 말씀합니까
14절에 보면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고 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성령은 그리스도께서 이미 이루어 놓으신 구원을 우리에게 적용시키는 것을 하신다는 말입니다. 사실 성령께서 깨닫게 해 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알 수 없습니다. 설령 그리스도가 죽으신 것에 대해 알 수는 있다 할지라도 그가 무엇 때문에 죽었는지 알 수 없고 더구나 죽었다가 다시 부활하시고 어떤 지위를 가지게 되셨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하시는 일은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일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그가 누구신지 알고 믿게 하십니다. 그는 목수의 아들이 아니라 영원한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합니다. 뿐만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이루어 놓으신 구원은 우리가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그 어려움으로부터 건져내주고 우리가 질병으로 고통당할 때 그 질병으로부터 우리를 고쳐주고 우리가 마음이 상해 있을 때 그 마음을 위로 해 주시는 정도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영원한 여호와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건지시는 것을 말합니다.
물론 우리가 예수를 믿고 있지만 아직도 내가 구원받은 사실에 대해 잘 실감을 못하며 살아갑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벗어났다고 했는데 언제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진노하셨는지 그것조차도 잘 모릅니다. 사람이 화가 나면 표정에서부터 알 수 있습니다. 뭔가 만족스럽지 못하고 뭔가 화가 나는 일이 있을 때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만약 여호와 하나님의 표정을 우리가 보았다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진노하셨다라는 사실을 알수 있겠지만 그것도 아니니 여호와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벗어났다는 말은 더 더욱 실감하기가 어렵습니다. 더구나 우리 눈에 지옥이 펼쳐져 보이는 것도 아니니 느끼지 못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우리와 똑 같은 수 많은 사람들이 여호와 하나님앞에 죄 용서를 받지 못해서 그 무서운 지옥에 떨어지는 것을 보며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능력을 실감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의미에서 본다면 우리가 지은 죄 때문에 번민하고 괴로워하는 것은 미리 이 세상에서 지옥을 약간 맛보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또 본문은 성령에 대해 뭐라고 말씀합니까 15절에 보면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것이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리라 하였노라"고 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성령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모든 은혜는 바로 주님의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시고 하늘에 올리우셔서 떠나신다고 해서 그리스도의 모든 시대가 끝난 것은 아닙니다. 이제 모든 것을 성령이 맡아서 따라 일하시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이 세상에 계실 때처럼 여전히 모든 것을 여전히 주님이 주관하시고 주님께서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워주시는데 그것을 성령을 통하여 하신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의 삶이 능력있는 삶이 되기 위해 성령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다면 주님의 이름을 부르시기 바랍니다. 나의 삶속에서 나의 모든 고집과 불신을 몰아내고 주님께서 내 삶을 채우시도록 간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성령님께서 하늘의 모든 지혜와 능력으로 내 안을 채우시며 나를 힘있게 붙들어 주실 것입니다.
오늘 성경이 우리들에게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습관적이고 힘없는 신앙은 병든 신앙이고 미숙한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을 믿고 삽니다. 그러나 이 세상을 십자가를 가지고 이겨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를 붙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넘어집니까 예수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믿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조그마한 문제 때문에 시험들고 낙심합니까 십자가가 능력이 없어서 입니까 십자가만으로는 부족하기 때문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성령이 나를 진리가운데도 인도하시는 은혜를 친히 우리가 체험해야 합니다. 그것이 없으면 우리는 늘 넘어지고, 늘 시험 들고, 늘 미숙한 신앙의 자리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진실로 십자가를 믿는다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불러야 합니다. 그분이 거기서 내려오셔서 나의 모든 삶을 주장하시도록 겸손하게 물러서야 합니다.
우리는 이미 구원에 대한 기본적인 진리를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시작에 불과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루 하루를 성령님이 주시는 깨달음과 능력으로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는 도대체 파괴된 이 세상에서 왜 살아야 하는지를 모르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교회를 통하여 이루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놀라운 뜻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계획의 중심은 교회입니다.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중심으로 자신의 삶을 다시 편성하고 그 일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지혜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이 시간 후에 우리는 태신자를 정하는 시간을 갖게 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계획 속에 누가 들어가 있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가 알 수 없다하더라도 태신자를 작정하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은 그리스도인의 능력있는 삶 중에 하나라는 사실입니다.
그냥 주일에 한번 예배드리는 것으로 만족하는 삶을 사시겠습니까 아니면 역동적으로 살아 움직이는 신앙의 소유자가 되시겠습니까 이제 여러분의 결단만이 남았습니다. 책상에 앉아 있는 신앙에서 벗어나 활동하고 움직이는 신앙의 소유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우리가 성령을 의지할 때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오늘도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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