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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 사순절의 열매

본문

중국 은나라 때 ‘백이’라는 고상한 분이 살았습니다. 백이가 처음에는 정치로 어지러운 세상을 바로 잡아보려고 벼슬도 해봤지만 부패된 사람들 속에 있다가는 자기까지도 타락할 것 같아서 다 때려치우고 조용히 시골에 묻혀 자기를 수양하면서 지냈습니다. 어느 날, 시냇가를 지나던 백이가 무슨 생각이 났는지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엎드려 그 시냇물에다 귀를 씻었습니다. 씻고 또 씻고, 마침 그때 초라한 농부 한 사람이 황소를 끌고 나와서 아래쪽에서 물을 먹이려다가 백이의 모양을 보고 이상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니 씻으려면 얼굴 전체를 씻어야지 귀만 씻고 있는 게 이상했습니다.
그래서 말을 건넸습니다. ‘여보시오. 아니 얼굴은 씻지 않고 왜 그 귀만 그렇게 씻는 거요’ ‘그럴 까닭이 있소이다’ ‘그럴 까닭이라니 무슨 까닭이요’ ‘더러운 말을 들었기 때문에 이 더러워진 귀만 씻는 거요’. 농부도 지지 않고 물고 늘어졌습니다. ‘그래 그 더러운 말이란 게 어던 말이요’. 하도 묻는 바람에 백이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습니다. ‘아니 글쎄 이 나라 왕이 나보고 벼슬자리에 앉아달라고 사정하지 뭡니까 이 더러운 세상에서 그처럼 더러운 말이 도 어디 있습니까’ 백이의 말을 듣고 난 농부가 급히 황소를 끌고 윗물로 올라가서 물을 먹였습니다. 이번에는 백이가 이상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니, 여보슈, 왜 아래에서 물을 먹이려다가 급히 위로 올라가서 먹이는 겁니까’ 농부가 손을 내저으면서 대답했습니다. ‘여보슈, 그 더러운 귀를 씻은 물을 어떻게 내 소에게 먹입니까’. 백이보다 한 수 더 뜬 사람이었습니다. 나중에 서로 인사하고 보니 그 사람은 숙제라는 사람으로 역시 어지러운 세상이 싫어서 은둔해서 살고 있는 선비였습니다. 그 후 두 사람은 뜻이 맞아서 수양산 깊은 골짜기로 들어가서 죽을 때까지 나물과 고사리만 뜯어먹으면서 살았습니다. 그 나라 임금이 이 두 사람에게 출사해서 나라를 바로 다스려달라고 아무리 사정을 해도 그 산 속에서 나오지 않았습니다. 임금은 산 속에 불을 지르면 나오겠지 하고 불을 질렀지만 그래도 나오지 않고 그냥 불에 타 죽고 말았답니다. 참으로 훌륭하지 않습니까 그 백이와 숙제의 죽음이 얼마나 거룩합니까 그렇죠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구약 레위기 11장에서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도 제자들을 위해서 기도하시기를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그랬습니다. 바울 사도는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자’(고후7:1)고 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벧전1:15)고 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 기독교의 거룩함은 백이와 숙제의 거룩한 것하고는 전혀 다릅니다. 백이와 숙제의 거룩함은 더러운 세상을 피해 깊은 산 속에 숨어서 자신들의 깨끗함을 지키는 것이지만, 성경이 말씀하시는 거룩함은 더러운 세상 속에 함께 살면서 여호와 하나님의 사람임을 나타내라는 겁니다. 숨어버리라는 게 아니라 세상 속에서 믿는 사람의 표를 나타내라는 말씀입니다. 물론 더러운 세상 속에 함께 있으면 나도 더러워질 수도 있습니다. 아니 십 중 팔구 더러워집니다.
그래서 세상의 성현들은 ‘백로야 까마귀 싸우는 곳에 가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보고 세상 속에 있으라고 하십니다. 그 세상 속에서 믿는 사람의 표를 내라고 말씀하십니다. 믿음의 티를 내는 게 성경적 거룩함입니다. 누구에게 믿음의 표를 냅니까 하나는 여호와 하나님께 그 티를 내고 다른 하나는 세상 사람들에게 그 티를 내야 합니다. 예수님 안에서 믿음이 더욱 깊어지는 게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거룩해지는 것이고 사람들에게 믿는 사람의 모습을 나타내 보이는 겁니다. 바로 이것이 세상에서의 거룩해지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거룩해지고 세상 사람들에게 거룩함을 보여주는 게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요 성도의 길인 줄 믿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그 길을 여호와 하나님을 아는 것과 진리로 거룩해 지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지금 우리는 사순절을 지키며 주님을 따르고 있습니다. 금년 사순절에는 여러분 모두에게서 예수 믿는 티가 물씬 나는 거룩의 열매가 주렁주렁 달리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요한복음 17장은 십자가에 달리시기 직전 제자들을 위한 주님의 기도 내용입니다. 이제 유월절이 되면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습니다. 사람들에게 붙들려 죽임을 당하시지만 예수님은 그렇게 죽으시려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유월절 어린양 제물이 되시려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어린양 제물이 되셔야 세상 사람들의 죄가 씻겨지고, 사해지고, 그래서 구원됩니다. 구약시대 불 뱀에 물린 자들이 장대 위에 달린 놋 뱀을 바라보고 살아난 것처럼 이제 예수님이 달리신 십자가를 바라보는 자는 누구든지 구원됩니다. 그 믿음으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는 자는 죽어도 다시 살고, 영원히 살게 하시려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신 이 목적을 이루시면 본래의 하늘 보좌로 돌아가십니다. 십자가에 달려 피 흘려 세상 사람들에게 구원의 빛을 주시고 그리고 본래의 모습, 여호와 하나님의 자리로 돌아가십니다. 그러면 제자들만 이 세상에 남게 됩니다. 그런데 이 제자들이 아직 여호와 하나님을 완전히 알지 못하고 자기들과 함께 3년 동안 계셨던 예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쉬운 말로 말씀드리면 믿음이 깊지가 못합니다. 3년 동안 예수님과 함께 있었고 예수님에게 가르침을 받았고 예수님의 능력을 직접 두 눈으로 봤지만 다른 세상 사람들하고 구별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기도하십니다. 저들을 구별시켜 달라고 말입니다.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1. 영생의 의미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 믿는 최대의 목적은 영생입니다. 천국 가는 게 목적인데 그 천국에는 죽음이 없잖습니까 그래서 영생이 됩니다. 이 믿음은 성령이 임해야 깨닫게 됩니다. 성령께서 영생을 믿게 해 주십니다. 이제 예수님은 이 세상을 떠나십니다. 제자들을 남겨두고 떠나십니다. 제자들을 통해서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그 제자들의 믿음이 아직 여호와 하나님도 잘 모르고 예수님도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아직 영생의 단계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3절 말씀으로 기도하셨습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여호와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여러분, 영생이 뭡니까 예수님은 영생의 의미를 한 마디로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아는 것이 바로 영생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아는 것이 영생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예수 믿으면 영생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 믿으면 영생인 것을 믿습니까 정말 확실히 믿습니까 어떤 분은 지금 여러분들이 아멘 할 때, 속으로 그것을 어떻게 믿어 그럴 겁니다. ‘그러면서도 다 죽는데 무슨 영생이야’ 그럴 겁니다. 그렇습니다. 옳습니다. 영생을 외쳤던 베드로도 요한도 바울 사도도 죽었습니다. 저도 죽을 것이고 여러분들도 죽을 겁니다. 그런데도 저는 지금 ‘영생을 믿습니다’ 외치고 여러분들은 모두 아멘, 아멘! 하십니다. 아멘 못하는 분들은 영생의 의미를 아직 깨닫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여러분, 영생은 우리가 영원토록 사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무슨 수로 죽지 않고 영원히 삽니까 절데 우리는 영원히 살지 못합니다. 우리가 영원히 사는 게 아니고,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를 영원히 살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게 그 말이라고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예수를 믿으면서도 영생에 대해서는 쓴 웃음을 짓는 사람이 많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영원토록 살아계신 분이라고 고백을 하면서도 우리의 영생에 대해서는 믿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나느냐 하면 영생의 의미를 모르니까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영생을 시간 속에서 영원히 사는 것으로 생각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시간의 개념에서는 영생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시간은 시작이 있고 끝이 있기 때문입니다. 영생의 뭐냐 그것은 시간 속에서 영원히 사는 게 아니고, 여호와 하나님 안에서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 안에는 시간이 없습니다. 시작도 없고 끝도 없습니다.
3절에서 예수님이 그 영생의 개념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영생은 여호와 하나님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기 이 ‘안다’는 말은 히브리말로 ‘야다’입니다. 지식으로 안다는 게 아닙니다. 머리로 ‘아 그래’ 그런 게 아닙니다. 경험으로 아는 겁니다. 가슴으로 아는 겁니다. 겪어서 아는 것이니까 손톱만큼의 의심도 있을 수 없습니다. 확실히 압니다. 아내가 남편을 알고 남편이 아내를 아는 게 야다 입니다. 오래 함께 살면서 서로를 압니다. 잘 압니다. 틀림없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알고 예수님을 아는 데 어떻게 아느냐 이렇게 ‘야다’로 아는 것, 여러분, 이걸 믿음이라고 합니다. 믿음은 여호와 하나님을 머리로 아는 게 아니고 가슴으로 아는 것입니다. 이 가슴 속에 여호와 하나님이 가득하면 할수록 믿음이 깊어지는 겁니다. 이 가슴 속에 여호와 하나님이 가득할 때 비로소 마음을 다해서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고 목숨을 걸고 주님을 따를 수 있는 줄 믿습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여호와 하나님이 이 가슴에 가득하면 여호와 하나님과 내가 합일이 되는 게 아닙니까 주님이 내 안에 충만하면 내가 주님 안에 있는 겁니다. 예수님이 여호와 하나님과 하나가 된 것처럼, 내가 여호와 하나님과 저절로 하나가 됩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 아닙니까 그래서 나도 여러분도 다 영원한 삶, 영생을 누릴 수 있는 줄 믿습니다!
2. 16절, 17절을 읽습니다.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 하였삽나이다.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우리 교회는 일 년에 두 차례씩 세례의식을 거행합니다. 이 세례 의식은 대단히 중요한 겁니다. 여러분, 세례 받음으로서 신분이 바뀝니다. 지금까지는 이 세상에 속했던 신분이 세례를 받음으로서 여호와 하나님 나라에 속하는 신분으로 바뀝니다. 그러나 여러분, 여전히 세상 속에 살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로 신분이 바뀌는 순간 뿅-하고 천국으로 가버리면 아무런 문제가 될 것이 없을 텐데, 신분이 바뀌었는데도 계속 이 세상에서 살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하십니다.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 하였삽나이다’. 제자들은 이제 예수의 사람이 됐습니다. 그러나 세상 속에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호와 하나님 나라 백성들입니다. 구별이 돼야 하지 않겠습니까 세상 속에 살고 있지만 세상 사람들하고는 다르지 않습니까 그러니 구별하여 주옵소서 하는 기도입니다.
무엇으로 구별해 달라고 하셨습니까 생김새를 다르게 해달라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옷을 다르게 입혀달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진리로 구별시켜 달라고 하셨습니다. 진리는 ‘참 된 것’입니다. 참 되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다 참되지 못합니다. 아무도 참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가 된 이 제자들을 참 되게 해서 세상 사람들하고 구별시켜 달라고 하셨습니다. 진리는 참 된 것이고 그 참 된 것은, 다른 게 아니고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것이 진리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사람은 진품입니다. 진품이 세상 것들 속에 섞여 있습니다. 그렇다고 진품이 구별이 되지 않으면 되겠습니까 구별되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여기서 ‘거룩하다’는 히브리말 ‘코데스’나 헬라말 ‘하기아조’는 우리가 생각하는 거룩하다는 의미하고 다릅니다. 우리는 거룩하다고 하면 함부로 접근할 수 없을 만큼의 성스럽고 위대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물론 속된 것하고 구별되니까 성스럽고, 더러운 것하고 구별되니까 깨끗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서 말씀하시는 거룩함은 그런 의미보다도 구별되는 것, 특히 분리된 삶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여러분들이 이 세상 속에서 살지만 그래도 구별된 생활을 하게 해 달라고 여호와 하나님께 지금 기도하고 계십니다. 세상과 분리된 삶, 산 속에서 숨어서 사는 것을 말씀하는 게 아닙니다. 이 세상 속에서 살되 삶의 질이 세상 사람들 하고는 달라야 한다 이 말씀입니다. 절대 거창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수도사가 되라는 것도 아니고, 고행자가 되라는 것도 아닙니다. 단지 시간관과 물질관에서 구별되라는 겁니다. 일요일을 예로 들어 볼까요 세상 사람들에게 있어서 일요일은 쉬는 날입니다. 그래서 집에서 자기도 하고 놀라가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있어서 일요일은 주일입니다. 주님의 날입니다. 엿새 동안은 나를 위해 살았지만 이 날 하루는 주님을 예배하고 주님께 헌신하면서 삽니다. 이게 시간의 구별입니다. 이게 거룩하게 사는 거 아닙니까 물질관도 그렇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내가 번 것은 다 내 것이다’고 생각합니다. 내 것이니까 내 맘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내가 이 만큼 번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래서 감사 헌금을 하는 것이고, 교회를 통해서 선교도 하고 구제도 하 수 있도록 소득의 1/10, 십일조 헌금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별된 삶이요 거룩한 삶인 줄 믿습니다!

3. 말씀의 적용
여러분, 여러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들입니다. 비록 이 세상에 살고 있지만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세상 사람들하고 함께 살고 있지만 세상 사람들하고는 다른 존재들입니다. 섞여 있다고 해서 다 같은 존재가 아닙니다. 지금 여러분들은 구원받지 못할 자들하고 함께 살지만, 그러나 여러분들은 이미 구원받은 분들임을 믿습니다! 여러분들은 그리스도 예수의 지체들입니다. 얼마나 귀중한 존재들입니까 여러분들에게는 ‘알렐데이아’라는 표가 찍혔습니다. 이 ‘알렐다이아’가 바로 진리입니다. 여러분들의 브랜드는 ‘진리’입니다. 진리표 인간, 인간이면 다 인간 아니잖습니까 세 상적 인간과 영적인 인간. 요즘은 사이버 인간도 생겼습니다. 아무리 섞여 있다고 할지라도 영적인 인간에게는 진리표가 찍혀있습니다. 진품 중에 진품입니다. 얼마나 소중합니까 여러분, 우리는 천국 백성입니다. 영생이 약속된 존재들입니다. 진품 중에 진품입니다. 내가 진품이라는 것을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나 예수 믿는 사람이요! 나를 보시오. 나 예수 믿어요!
여러분, 이미 천국 백성인 됐는데도 전혀 천국 백성처럼 살지 못하면 결국 세상 것 속에 섞인 채 사라지고 말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이 진품 표가 지워지고 있는 분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 속에 섞여서 도무지 구별이 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이 하신 기도는 다른 게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 속에 섞여서 도무지 표가 나지 않는 우리를 표가 나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여호와 하나님, 저들에게서 예수 믿는 표가 나게 하옵소서’ 저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가슴이 뜨끔했습니다. 그리고 무릎을 꿇었습니다. ‘오 주여, 이 죄인을 용서하옵소서. 믿는 사람답지 못한 것을 용서 하옵소서, 목사 티를 내지 못한 것을 용서 하옵소서’.
4. 맺는 말
지금 우리는 예수님을 따라갑니다. 매년 사순절이 되면 예수님을 따라가다가 중간에서 그만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금년에도 지난 3월 5일부터 우리는 사순절을 지키면서 예수님을 따라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가시는 길은 아주 험한 길입니다. 결코 쉬운 길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 자기를 부인하라는 말씀은 너 자신을 너 스스로 죽이라는 말씀입니다. 내가 나를 죽이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여러분들은 아실 겁니다. 특히 우리는 세상 체면에 찌들어 살아왔습니다. 체면 때문에 진실하지 못했습니다. 체면 때문에 말씀을 들으면서도 큰 소리로 아멘을 못할 수도 있습니다. 체면 때문에 찬송할 때 손뼉도 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체면 때문에 교회에 올 때 성경 찬송 떳떳하게 들고 오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여러분, 그 체면을 죽이는 게 나를 죽이는 겁니다. 그게 나를 부인하는 겁니다. 여호와 하나님 앞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 아바 아버지, 아빠입니다. 아바 앞에서 자식은 언제나 어린애가 돼야 합니다. 어린애는 체면을 모릅니다. 그냥 좋으면 깡충깡충, 배고프면 달라고 조르고, 싫으면 싫다고 발버둥칩니다. 아바는 그런 자식이 그냥 좋습니다. 여러분,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어린애가 되는 게 구별되는 것이고 거룩입니다. 사람들 앞에서 나를 낮추는 게 바로 거룩입니다. 그것이 우리 주님을 따르는 것이요 예수 믿는 티를 내는 게 거룩인 줄 믿습니다! 그러나 그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얼마나 무겁고 힘들겠습니까 그래서 십자가를 지라는 겁니다. 여러분, 이제 마지막 여정입니다. 고개만 넘으면 됩니다, 지금 우리는 주님과 함께 골고다 언덕을 올라갑니다. 마지막 언덕, 골고다 언덕, 이제 거기서 내 육신의 겉 사람을 십자가에 달 죽이면 내 속 사람이 우리 주님과 함께 다시 살아나 영생할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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