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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 십자가의 시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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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순절 기간에 들어서 있고요 다음 주간은 고난주간입니다. 아마 시편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고난의 시편, 수난의 시편이 바로 시편 22편입니다. 신학자들은 시편 22편을 십자가의 시편 이렇게 부르기도 합니다. 오늘 시편 22편 앞에 보시면 ‘다윗의 시, 영장으로 아얠렛시야할에 맞춘 노래’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본래 아얠렛시야할 노래는 새벽의 암사슴 이런 뜻을 갖고 있습니다. 새벽의 암사슴. 왜 새벽의 암사슴이라는 표제가 붙여졌는지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종교 개혁자인 마틴 루터는 사냥꾼들이 고대 사슴 사냥을 할 때는 이른 새벽에 사슴을 사냥했다고 합니다. 새벽에 사슴이 많이 자다가 미처 깨어나지도 않고, 특별히 늦잠 자는 사람들은 새벽에 어벙벙하다가 사냥꾼들에게 잡힌다. 그래서 그 때를 노려서 사냥꾼들이 새벽에 사슴을 사냥 많이 했다고 합니다. 그 새벽에 기습당한 사슴의 고난, 그 사슴의 고난을 비유한 것이다. 인생의 장에서 어느 날 갑자기 우리에게 덮쳐온 고난, 그러나 이 고난 속에서 마침내 구원을 바라본 그 소망을 동시에 노래하고 있는 시편이다. 그래서 이러한 표현을 붙였을 것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내용을 들여다 보겠습니다마는 이 시편은 인생의 범상한 고난을 가르친 것이 아니라 특별히 이것은 메시야의 고난,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가르치고 있는 대표적인 시편으로 불리워집니다.
우리가 신약성경을 보시면 예수님에 대한 가장 탁월한 비유 가운데 하나가 예수님을 목자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근데 3가지, 예수님의 목자상에 관해서 3가지 비유가 등장해요. 선한 목자, 그 다음에 큰 목자, 목자장. 근데 그 이미지가 다르게 나타납니다. 우선 요한복음 10장에 보시면 요한복음 10장 11절에 나는 선한 목자다. 나는 양들을 위해서 목숨을 버린다. 이 선한 목자라는 것은 다른 말로 말하면 고난받는 목자에요.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선하신 주님이 몸소 희생을 당하고 고난을 당하셨다. 참 좋으신 분이시다. 그래 나는 선한 목자다, 나는 양들을 위해서 목숨을 버린다. 양들을 위해서 목숨을 버릴 만큼 우리를 위해 대신 고난받으신 메시야 상이 바로 이 선한 목자에 나타나 있습니다. 그러나 또 신약성경에 보시면 히브리서 13장 20절에는 예수님을 큰 목자라고 부르고 있어요. 그레이트 셰퍼드(great shepherd), 아주 큰 목자. 히브리서 13장 20절에 보시면 그는 큰 목자이어서 우리를 사망에서 건져내시고 인생의 길을 계속 인도해 주시는 목자, 위대한 목자. 인생의 모든 난관과 시련을 뚫고 우리를 향해서 목표를 향해 갈 수 있도록 우리를 앞서 인도해 주시는 위대한 목자, 큰 목자. 인도하는 목자. 그 다음 그런가 하면 베드로전서 5장 4절에서 사도 베드로는 예수님을 우리의 목자장이라고 부릅니다. 치프 셰퍼드(chief shepherd) 해서 목자장.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면류관을 우리에게 주신다. 상급을 주시는 목자, 영광 가운데 나타나신 목자. 영광 가운데 나타나는 목자. 그래 예수님에 대해 세 가지 목자상이 나와요. 고난받는 목자, 인도하시는 목자, 영광 받으실 목자.
근데 아주 흥미로운 것은 왜 이것을 얘기하느냐 하면 우리가 시편 22편을 오늘밤에 묵상하고 다음 시간까지 두 시간에 걸쳐서 시편 22편을 좀 공부하려고 하는데요 시편 22편 다음은 몇 편입니까 잘 아시네요. 어떻게 그걸 아십니까 시편 22편 다음에는 23편. 23편 다음에는 뭘까요 놀랍습니다. 그걸 다 아시다니. 그런데 그 시편 22편이 뭐냐 하면 바로 고난받는 목자상, 고난받는 메시야. 그런가 하면 시편 23편은 인도하는 목자, 큰 목자.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우리를 인도해 주시는 목자, 영광의 집에, 아버지 집에 도달할 때까지 인도해주시는 목자. 시편 24편은 영광 가운데 나타나시고 영광 가운데 우리에게 오실 목자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나란히 22, 23, 24 이렇게 묘사되어 있어요. 근데 오늘 시편 22편은 바로 고난받는 목자, 고난받는 메시야, 고난받는 예수그리스도의 상을 우리에게 아주 절묘한 그리고 두렵도록 정확한 필치로 묘사하고 있는 유명한 고난의 시편입니다. 신학자들은 우선 이것을 기록한 사람이 다윗인데 이 저자가 다윗이라면 다윗의 생애 가운데서 어떤 부분의 경험과 시편 22편의 내용이 일치하느냐를 놓고 논란을 벌입니다. 그러니까 이 시편 22편 같은 다윗의 고백이 다윗의 어떤 생애의 경험을 근거로 해서 이 시편이 고백되었느냐 이 말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시편을 연구하는 학자들 사이에 논란이 벌어집니다. 혹시 다윗이 어떤 질병을 앓으면서, 병을 앓고 무서운 병 가운데서 건짐을 받으면서 이 시편을 기록한 것이 아닐까 라는 그런 추정이 있습니다. 그러나 신학자들은 마침내 결론을 맺기를 그것은 아닐 것이다. 왜냐 하면 시편 22편은 단순한 질병에 대한 체험을 노래하고 있는 시편이 아니다. 정확하게 들여다보면 이것은 형벌에 대한 엑스큐션, 형벌에 대한 묘사다. 형벌도 그냥 형벌이 아니라 이것은 십자가의 형벌에 대한 예언이다. 그런데 십자가 형벌, 소위 크루시픽션(crucifixion)이라는 십자가의 형벌이라는 것은 다윗 시대에는 없었어요. 십자가 형벌은 비로소 로마 시대에 와서 제정된 형벌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다윗의 어떤 경험하고는 일치하지 않아요. 다윗이 어떤 자신의 경험을 근거로 해서 말한 시편이 아니다 이겁니다.
그러면 다윗의 경험과 상관이 없다면 시편 22편은 뭘 말하고 있는 것이냐 이것은 순수하게 예언적인 시편이다. 완전히 예언적인 측면에서만 말하고 경험을 근거로 반추된 시편이 아니라 이것은 완전히 퓨얼리(purely), 아주 순수하게 예언적인 시편이다. 무엇에 대한 예언 십자가에 대한. 십자가에서 고난받으실 메시야에 대한 예언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다윗을 예언자, 혹은 선지자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다윗은 단순히 왕이었을 뿐만 아니라 다윗은 또한 그런 의미에서 선지자였던 사람이다. 선지자는 자기 경험과 상관없이 미래를 예언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지요. 그런 의미에서 다윗은 선지자다. 그런데 아주 흥미로운 것은 사도행전 2장 30절을 보시면, 찾아보세요. 우리가 29절부터 보시면, '형제들아 내가 조상 다윗에 대하여 담대히 말할 수 있노니다윗이 죽어 장사되어 그 묘가 오늘까지 우리 중에 있도다' 그런데 30절 다 같이 읽습니다. 시작. '그는 선지자라 여호와 하나님이 이미 맹세하사 그 자손 중에서 한 사람을 그 위에 앉게 하리라 하심을 알고' 31절, '미리 보았다. ' 그는 선지자다. 이 다윗을 우리가 보통 왕으로만 생각하지요. 킹 데이빗, 왕 다윗. 그러나 오늘 여기 사도행전에는 다윗의 또한 역할 가운데 하나가 뭐였다 선지자다. 선지자는 앞일을 보고 말하는 사람. 근데 다윗이 특별히 무엇에 관한 선지자였습니까 여기 사도행전 2장 31절에 ‘미리 보았다. ’ 뭘 봤어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해서, 죽음에 대해서.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을 예언한 선지자다 이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시편 22편은 예언적 시편이다. 무엇에 관한 예언이다 십자가에 관한 예언이다 이 말입니다. 다윗이 그 오래 전 세월에 살았던 다윗이 장차 있을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사건을 이토록 정확하게 놀랍게 묘사하며 예언할 수 있다니 우리는 이 시편 하나만을 공부하면서 우리는 성경의 성경됨, 성경이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그 경외감을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자, 근데 특별히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에 있어서도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후 십자가 고난을 다시 두 파트로 나눌 수가 있어요. 금요일날 다음 주가 이제 고난 주간인데 보통 예수님이 무슨 요일날 십자가에 달리셨다고 우리가 알고 있습니까 금요일이에요. 그래서 금요일을 성금요일 이렇게 부르지요. 몇 시쯤 아침 9시에요. 아침 9시에 십자가에 매달렸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몇 시까지 오후 3시까지. 오전 9시부터 오후 3시까지. 그런데 그 십자가에 매달린 시간을 다시 둘로 나눌 수 있다면 9시부터 12시까지, 그때가십자가의 전반부 고난이에요. 근데 12시를 기점으로 어떤 사건이 일어납니까 12시가 딱 되었을 때 어둠이 덮습니다. 온 하늘과 땅을 캄캄한 어둠의 장막이 덮어 버립니다. 그리고 그 어두움이 임하면서 예수님의 입에서 나왔던 첫마디 부르짖음이, 물론 가상 칠언이 있지만은 그러나 12시 이후에 첫 번째 부르짖음이 뭐에요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그러니까 그때부터 시작해서 12시부터 3시 사이에 체험을 묘사한 것이 바로 시편 22편이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그 뜻이 뭡니까 나의 여호와 하나님, 나의 여호와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근데 그것이 정확하게 어디서 인용된 것입니까 시편 22편 1절. 자, 다시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내 여호와 하나님이여, 내 여호와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옵시며 내 신음하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그 다음에 어떤 말씀을 하셨어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또 엘리 엘리 하신 다음에 또 ‘내가 목마르다’ 그러셨습니다. 내가 목마르다. 자, 내가 목마르다라는 말은 어디에서 인용이 되었을까요 그것도 시편에서 인용이 되었는데 학자들은 아마도, 그러니까 예수님이 시편을 많이 읽으셨어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평소에도 시편을 알고 있었다 그 말이죠. 그리고 그분의 생애가 정확하게 시편을, 시편 중에서도 예언적 시편들을 그분의 마지막 십자가의 고난이 성취하고 있다는 것을 아셨고 또 그것을 성취하신 것입니다. 자, 내가 목마르다. 시편 69편 한 번 찾아보세요. 시편 69편 21절 다 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저희가 쓸개를 나의 식물로 주며 갈할 때에 초로 마시웠사오니’ 예, 예수님이 내가 목마르다고 말씀하시니까 이 시편의 예언처럼 거기 섰던 사람들이 예수님의 그 목마른 입술을 축여주셨고 그래서 목마름을 해갈하시는 장면이 나오는데 바로 이와 같은 시편에 대한 성취였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다음에 어떤 말씀을 하셨습니까 그 다음에 아까 말한 다 이루었다. 그건 어디서 나왔냐 다시 시편 22편으로 돌아오세요. 시편 22편의 맨 마지막 절을 보겠습니다. 시편 22편 31절 시작. ‘와서 그 공의를 장차 날 백성에게 전함이여 주께서 이를 행하셨다 할 것이로다’ 네. 우리말 번역에는, 또 영어 번역에도 주께서 이를 행하셨다, ‘주께서’ 라는 주어가 강조된 것처럼 들려집니다. 그런데 히브리 원문으로 읽어보시면 주어가 없어요. 내가 히브리 원문을 그대로 직역을 하면 이 마지막 31절이 어떻게 직역이 되느냐 하면 이루어졌다 이 말이에요. 이루어졌다. 그래서 시편 22편에, 이 고난의 시편, 이 수난의 시편이 무슨 말로 끝납니까 이루어졌다, 다 이루었다. 이루어졌다는 말로 끝나요. 그래서 정확하게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 특별히 십자가의 마지막 3시간의 고난의 현장, 예언의 성취로서의 고난의 현장이 바로 이 시편을 배경으로 한, 그 중에서도 특별히 시편 22편을 배경으로 한 것이다.
근데 우리는 시편 22편을 다시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가 있습니다. 1절부터 21절까지가 고난이에요. 그러나 22절 이하는 승리입니다. 그 고난을 승리하신 모습이 기록됩니다. 우리가 다음 시간에는 그 승리에 대해서 같이 묵상하고 또 공부하겠습니다마는 오늘은 수난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런데 1절부터 21절은 우리가 히브리어로 쭉 읽어보면 아주 뚜렷하게 여섯 섹션으로 갈라져요, 나누어져 있어요. 여섯 부분으로 나누어집니다. 자, 첫 번째 부분은 1절부터 2절. 이게 첫 번째 부분이에요. 두 번째 부분, 3절부터 5절까지. 세 번째 부분, 6절부터 8절까지. 네 번째 부분, 9절부터 11절까지. 다섯 번째 부분, 12절부터 18절까지. 그리고 여섯 번째 부분이 19절부터 21절까지 이렇게 여섯 개의 섹션으로 이 시편 22편 1절부터 21절 사이를 다시 여섯 섹션으로 구별되어 있습니다. 나누어져 있습니다. 히브리어로 읽으면 아주 뚜렷하게 나누어져 있습니다. 자, 근데 여섯 섹션이 뭐냐 그 중에서 첫 번째 섹션, 세 번째 섹션, 다섯 번째 섹션은 고난에 대한 것입니다. 자신의 고난에 대한 거. 자신이 고난받고 있는 그 심정을 묘사한 말이에요. 자신의 고난에 대한 묘사입니다. 그런가 하면 두 번째 섹션, 네 번째 섹션, 여섯 번째 섹션, 그러니까 이게 크로스로 되어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1, 3, 5 그 사이에 끼어드는 것이 뭡니까 2, 4, 6 이렇게 되어 있는데 2, 4, 6섹션은 그 고난에 대한 응답으로서의 기도입니다. 고난의 심정을 묘사하고 그 다음에는 기도하고 그 다음에 고난받는 심정을 묘사하고 그 다음에 기도하고 또 그 다음에 고난받는 심정을 묘사하고 그 다음에 뭡니까 기도하고. 이렇게 아주 정교한 묘사로 되어 있어요. 아주 정교한 묘사로 되어 있습니다.
자, 우선 첫 번째 섹션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 첫 번째 섹션은 그리스도의 고난에서의 절규, 고난 중에서의 절규. 십자가 고난의 절정에서의 절규. 1절부터 2절까지. 우리 같이 읽겠습니다. 다시 한 번 시작. ‘내 여호와 하나님이여, 내 여호와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옵시며 내 신음하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내 여호와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치 아니하오나 응답지 아니하시나이다’ 고난의 절정에서의 절규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이것은 아버지 여호와 하나님에 의한 버림받으심입니다. 아버지 여호와 하나님에 의한 버림받으심. 왜 성자 여호와 하나님이, 아들 여호와 하나님이 아버지 여호와 하나님에 의해서 버림을 받으셔야만 했었습니까 그걸 우리가 다시 십자가의 사건으로 다시 조명해 보면 자, 예수님이 왜 십자가에 달리시사 거기에서 아버지 여호와 하나님에 의해서 버림을 받으셨을까요 자신의 죄 때문은 아니지요.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우리의 죄, 인류의 죄를 그가 대신 담당하시고 그리고 그가 죄를 대신 담당하시고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순간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조차 그 죄에서부터 고개를 돌리신 거예요. 근데 이것은 엄격히 말하면 아들에 대한 외면이 아닙니다. 아들에 대한 외면이 아니라 아들이 짊어지고 있는 죄에 대한 외면이었어요. 거룩하신 여호와 하나님은 죄를 용납할 수 없어 하십니다. 죄를 그대로 차마 볼 수 없어 하십니다. 그렇게 거룩하신 여호와 하나님, 죄를 볼 수도 없어 하시는 거룩하신 여호와 하나님.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짊어졌다는 말을 가장 실감 있게 말하면 이렇게 표현할 수가 있어요. 그가 마치 죄를 범한 사람처럼 되어. 신약성경은 그가 죄를 알지도 못하신 분이라고 묘사합니다. 죄를 알지도 못하시던 그분이 마치 죄를 범한 사람처럼 되어 그 죄도 뭐냐 하면 전 인류가 범한 그 무서운 범죄를 그가 다 범한 사람처럼 되어. 인류의 죄가 그에게 지워져 있습니다. 그 순간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 거룩하신 여호와 하나님이 그 인류의 죄를 짊어지고 있는 아들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십자가에 달려있는 그분을 바라보는 순간, 여러분들이 아주 더러운 것을 볼 때 얼굴을 피할 수 밖에 없는 것처럼 여호와 하나님이 순간적으로 아들에게서 고개를 돌리셨습니다. 그리고 아들 여호와 하나님과 아버지 여호와 하나님 사이에 영원 전부터 계속되어 왔던 교제가, 순간적으로 교제가 끊어지는 순간입니다. 단절되는 순간이에요. 그 순간의 비명, 부르짖음.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여호와 하나님, 나의 여호와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 그 절규, 바로 그 십자가상의 고난의 절규를 여기서 이미 시편의 예언을 통해서 우리는 미리 볼 수가 있습니다.
자, 이제 기도입니다. 이제 어떤 기도를 하느냐 3절부터 5절까지 이 고난의 심정을 짊어지고 시편 기자가 어떤 기도를 하는가, 3절부터 5절까지 같이 읽습니다. 시작.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거하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니이다 우리 열조가 주께 의뢰하였고 의뢰하였으므로 저희를 건지셨나이다 저희가 주께 부르짖어 구원을 얻고 주께 의뢰하여 수치를 당치 아니하였나이다’ 이 기도 부문만은 과거에 뿌리를 박고 있습니다. 과거로부터의 회상이라고 할 수가 있어요. 과거로부터 회상은 뭐냐 하면 과거에 시편 기자가 경험한 여호와 하나님, 어떤 여호와 하나님이냐 하면 한 마디로 말하면 그 여호와 하나님은 구원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이에요. 구원하시는 여호와 하나님. 의지하면 구원하시는 여호와 하나님. 4절에 ‘우리 열조가 주께 의뢰하였고 의뢰하였으므로 저희를 건지셨나이다’ 우리 과거의 우리의 선배들이, 조상들이 의뢰하고 의뢰할 때, 주님은 뭐예요 우리를, 우리 조상들을 건져주시지 않았습니까 저희가 주께 부르짖어 구원을 얻고 주께 의뢰하여 수치를 당치 아니하였나이다. 이 말씀이 왜 여기 나오냐 하면 과거에 그렇게 고난 중에 부르짖었을 때 구원하신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면 지금 이 순간 버림을 받고 있다고 할지라도 여호와 하나님, 구원하시지 않겠습니까 라는 십자가상의 주님의 마음을 대표하고 있는 기도가 바로 이 기도다 이 말입니다.
자, 이제 세 번째 섹션으로 넘어갑니다. 세 번째 섹션은 한 마디로 말하면 십자가에서 조롱받으심에 대한 묘사입니다. 6절부터 8절까지가 되겠습니다. 같이 읽습니다. 시작.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훼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 나를 보는 자는 다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이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저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걸, 저를 기뻐하시니 건지실걸 하나이다’ 십자가에서 그분이 받으신 조롱, 조롱 받으심에 대한 묘사다. 이 부분이 어떻게 됐습니까 문자 그대로 성취되었죠 단어 하나 틀림없이 문자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 여러분이 깜짝 놀랄만한 성취를 여러분 자신의 눈으로 한 번 확인해 보세요. 마태복음 27장 39절부터 보겠습니다. 39절부터 44절까지 같이 읽을까요 다같이 시작.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가로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하여 가로되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저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 저가 여호와 하나님을 신뢰하니 여호와 하나님이 저를 기뻐하시면 이제 구원하실지라 제 말이 나는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 하며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 특별히 43절 같은 부분은 문자 그대로의 성취이지요. 저가 여호와 하나님을 신뢰하니 여호와 하나님이 저를 기뻐하시면 이제 구원하실걸. 정확하게 시편에 그 십자가에서 받으실 그분의 조롱에 대한 묘사의 문자적 성취를 여기서 확인해 볼 수가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조롱 받으시는 메시야. 6절부터 8절까지 이게 세 번째 섹션이에요.
그 다음에 이제 네 번째 섹션, 네 번째 섹션이 다시 기도부분입니다. 그런데 항상 그분 메시야 자신이 고난받으시는 심경을 묘사할 때는 ‘나는’ 이런 표현이 나왔지요. 그렇지요 무슨 말인지 아세요 6절이 어떤 말로 시작됐습니까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그분의 심경이 십자가에서 사람들한테 모욕 받고 조롱 받을 때 자기의 마음의 상태가, 심경의 상태가 뭐 같다고요 나는 사람도 아니다. 벌레같이 사람들과 백성들의 조롱거리가 되고 있다. ‘나를 보는 자는 다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이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저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걸, 저를 기뻐하시니 건지실걸 하나이다’ 자신의 심정, 고난받으시는, 조롱 받으시는 메시야의 심정. 자, 이제 그 조롱을 받으시면서 그분의 마음 속에 있었던 기도를 나타내 주고있는 이 시편의 기도. 9절부터 11절까지가 네 번째 섹션입니다. 9절부터 11절까지 같이 읽습니다. 시작. ‘오직 주께서 나를 모태에서 나오게 하시고 내 모친의 젖을 먹을 때에 의지하게 하셨나이다 내가 날 때부터 주께 맡긴바 되었고 모태에서 나올 때부터 주는 내 여호와 하나님이 되셨사오니 나를 멀리하지 마옵소서 환난이 가깝고 도울 자 없나이다’ 이건 기도에요. 근데 한 마디로 말하면 이것은 그분의 생애 전체를 통한 여호와 하나님의 성실성을 회상하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내 인생 전체에 대해서 역사하고 있는 여호와 하나님의 성실성. 우리가 그 여호와 하나님의 성실성을 믿는다면 감히 이렇게 기도할 수가 있다. 자, 여호와 하나님의 나를 향한 여호와 하나님의 성실하신 역사가 언제부터 시작되었습니까 모태에서부터. 내가 어머니 모태에 있을 때부터, 거기서부터 주님이 나를 조직하셨다며요 나라는 인간을 하나의 생명체로 어머니 모태에 있을 때부터 나를 오거나이즈(organize) 하시고 조직하신 그 놀라우신 여호와 하나님. 또 내가 날 때부터 주께 맡긴바 되었고 모태에서 나올 때부터 주는 내 여호와 하나님이 되셨사오니 나를 멀리하지 마옵소서 환난이 가깝고 도울 자 없나이다. 지금 내가 나를 도와줄 사람이 없이 내가 버림받는 자리에서 내가 있사오나 주님 모태에서부터 나를 계획을 가지고 조직하셨고 그리고 나의 일생을 통해서 인도하시자 여기까지 오게 하셨다면 여호와 하나님, 저 버리시지 않는 거지요 버림받으시는 자리에서 바로 이 성실성을 붙들고 기도하실 메시야의 심정을 대변하고 있는 기도가 바로 이 부분이라 이 말입니다.
자, 그 다음에 다섯 번째 섹션, 다섯 번째 섹션은 이제 12절부터 18절까지입니다. 이 부분은 12절부터 18절까지 십자가상의 육체적 고통의 묘사입니다. 예수께서 받으시는 육체적 고통의 묘사, 그것이 12절부터 18절까지가 되겠습니다. 자 12절부터 18절까지 교독하겠습니다. 시작. ‘많은 황소가 나를 에워싸며 바산의 힘센 소들이 나를 둘렀으며 내게 그 입을 벌림이 찢고 부르짖는 사자 같으니이다 나는 물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내 마음은 촛밀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내 혀가 잇틀에 붙었나이다 주께서 또 나를 사망의 진토에 두셨나이다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내가 내 모든 뼈를 셀 수 있나이다 저희가 나를 주목하여 보고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뽑나이다’ 이 육체적 고통의 묘사가 얼마나 정확한가 보세요. 얼마나 리얼한가를 한 번 자세히 관찰해 보세요. 거의 십자가의 고난에 의한 문자적 묘사들이 등장합니다. 그가 받으실 고통에 대한 거의 문자적인 묘사, 육체적인 묘사들이. 우선 14절을 잘 보시면 거기 뼈가 나오지요. 뼈가 어그러진다. 십자가상에서 그가 육체적으로 경험하시는 고통에 대한 이 리얼한 묘사를 보세요. 뼈가 어그러진다 또 14절에 마음이 나와요. 근데 이 마음은 심장으로 번역해도 괜찮습니다. 하트라는 말이, 영어에 하트라는 말이 심장으로 묘사해도 괜찮아요. 근데 심장은 촛밀 같아서 속에서 녹았어요. 그 뼈가 어그러질 때 그 심장도 파열하면서 그가 경험하시는 그 깊은 고통에 대한 묘사입니다. 그런가 하면 15절에는 그 진액이 소모되는 모습을 묘사한 것입니다. 어떤 묘사가 나와요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같이 되 버리고 말았다. 내 모든 에너지가 다 소모되는 그 순간의 고통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지요. 또 내 혀가 잇틀에 붙었나이다. 이 목이 마른 극도의 갈증 상태를 묘사하는 리얼한 묘사를 보세요. 내 혀가 잇틀에 붙어 버렸나이다. 그런가 하면 16절, 이 16절은 아주 더 리얼합니다. 16절에 무슨 묘사가 나오냐 하면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눌러, 그 다음에 뭐예요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다윗 시대에 이런 고통이 없었어요. 이런 형벌이 없었습니다. 이것은 로마 시대에 십자가 형벌이 나온 다음에 비로소 생기기 시작한 형벌임에도 불구하고 이미 그 오래 전 그 다윗을 통해서 예언된 형벌에 대한 생생한 묘사를 보세요. 무얼 찔렀다고요 수족, 손과 발을 찔렀나이다. 양손, 양 발에 그가 그 찔림 받으실 고통에 대한 얼마나 리얼한 묘사입니까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그런가 하면 17절에는 그가 십자가에서 받으신 반나의 수치감정. 그가 옷을 벗기움을 당하시면서 그가 받으신 수치의 감정들이 여기 묘사되고 있지 않습니까 내가 내 모든 뼈를 셀 수가 있나이다. 저희가 나를 주목하여 보고. 얼마나 문자적인 묘사에요 그런가 하면 18절 이것도 문자 그대로 묘사된 것이지요.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 문자 그대로 이루어졌어요. 성취되었어요. 그런가 하면 또 이 부분, 이 섹션 안에는 고통을 가하는 자들에 대한 상징적 묘사들이 등장합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고 조롱하는 군중들. 또 십자가에 못박은 로마의 병정들. 또 그를 향해 야유를 퍼붓고 있었던 그 당시의 종교인들. 거기 고통을 가하는 자들의 묘사가 어떤 이미지로 등장합니까 짐승들이 등장해요. 뭐에요 황소 같다. 이건 좋은 의미가 아니에요. 아주 나쁜 의미에서 막 성질난, 성깔난 황소들을 상상해 보세요. 황소가 에워싼다. 바산의 힘센 소, 바산이라 하면 북쪽에 비교적 목축을 넓게 할 수 있는 초원지대인데 거기 가면 소들이 제 세상 만났다고 뛰어 다녀요. 마음대로 뛰어 다니면서 길길이 날뛰는 소들의 모습처럼, 또 13절에는 어떤 이미지가 나와요 사자처럼. 입을 벌리고 부르짖고 있는, 먹을 것을 탐하고 있는 사자의 이미지가 등장합니다. 또 어떤 묘사가 등장합니까 개들이 등장해요. 16절에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입을 벌리고 짖고 있는 개들의 묘사, 그렇게 악한 무리가 나를 향하고 에워싸고 있는 모습이 묘사됩니다. 또 어떤 묘사 한 가지 묘사가 더 나와요. 21절에 보시면 들소. 들소들에 대한 묘사가 나와요. 들에 있는 소처럼, 훈련되지 않은 날뛰는 들소처럼. 황소처럼, 사자처럼, 개처럼, 사나운 들소처럼 길길이 날뛰면서 메시야를 향해서 포요하고 그를 향해서 고통을 가하고 있는 이 악랄한 인생들의 모습이 그림처럼 아주 그래픽하게 등장하고 있는 모습들을 보십시오.
자, 마지막 여섯 번째 섹션은 이제 기도 섹션입니다. 다시 기도의 섹션으로 돌아갑니다. 19절부터 21절까지입니다. 다 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여호와여, 멀리하지 마옵소서 나의 힘이시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 내 영혼을 칼에서 건지시며 내 유일한 것을 개의 세력에서 구하소서 나를 사자 입에서 구하소서 주께서 내게 응락하시고 들소 뿔에서 구원하셨나이다’ 부르짖을 수 밖에 없는 대상, 자기를 버리신 대상이라 할지라도 그 여호와를 향해서 도움을 호소할 수 밖에 없었던 메시야. 나를 구해 주소서. 사자의 입에서 구하소서. 그랬더니 마지막에 마침내 어떻게 하셨다고요 주께서 내게 응낙하시고 들소의 뿔에서 나를 어떻게요 구원하셨나이다. 십자가의 고통에서 그를 다시 구해주실 자비로운 여호와에 대한 확신을 갖고 드려지는 마지막 기도, 그리고 그 여호와 하나님의 임재를 통해서 마침내 회복될 여호와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소망이 오늘 이 부분에서 묘사되고 있습니다.
자, 이렇게 해서 고난에 대한 묘사가 21절까지 딱 끝나요. 그리고 22절로 넘어가면 이 시의 톤이 완전히 뒤바뀌고 맙니다. 더 이상 어둠이 아니에요. 우울함이 아닙니다. 이 시가 갑자기 고난의 장에서 새로운 스타일의 모습으로 시의 분위기가 아주 역전을 해 버립니다. 자, 22절 보면 어떻게 바뀝니까 다 같이 시작. ‘내가 주의 이름을 형제에게 선포하고 회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갑자기 막 찬송으로 변해요. 다시 말하면 십자가의 수난이 뭐예요 승리의 찬양으로, 부활의 승리로 뒤바뀌고 있는 아주 영광스러운 묘사예요. 자, 이 승리의 진상은 뭘까요 이 승리가 담고 있는 영광스러운 그 영광의 내용은, 콘텐츠는 도대체 무엇일까요 다음 시간에 계속할께요.
그러나 우리가결론을 하나 맺을 것은 뭐냐 하면 여기서, 그 승리의 내일을, 그 아침을 기대한다면, 그 찬양을 기대한다면 우리는 모두 메시야가 그러하셨듯 뭐를 통과해야 한다 십자가의 밤을, 수난의 밤을 통과해야 한다는 교훈입니다. 십자가가 없이 면류관은 없습니다. 따라서 하십시다. “십자가가 없이 면류관은 없다. ” 사람들은 모두가 다 면류관을 원합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원하지 않아요. 그러나 고난의 십자가가 없이는 부활의 새벽을 기다릴 수가 없습니다. 고난을 견디는 기도가 없이는 승리의 찬양은 주어지지 않습니다. 여러분, 승리의 찬양을 부르는 인생을 원하십니까 그 찬양이 진정한 영광의 찬양, 깊이를 담고 있는 찬양이 되기 위해서는 고난을 이겨야 돼요. 고난을 극복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고난의 심연을 아는 자, 고난의 깊이를 아는 자 그리고 고난을 해치고 나온 자여야만 진정한 찬미를 부를 수가 있는 줄 믿습니다. 그래서 오늘 진정한 내일의 찬양을 위해서 주께서 오늘 여러분과 저희 인생에도 고난을 허용하셨다면 이 고난을 승리하는 자가 되시기를 기도하십시요. 그리고 마침내 찬양 부르실 그날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는 마침내 우리 입술에 승리의 찬양을 주실 것입니다. 그 찬양의 날을 기대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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