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절] 하나님의 아픔
본문
지난 수요일부터 사순절이 시작되었습니다. 사순절이란 재의 수요일에서 부활절까지의 주일을 제외한 40일 동안을 말합니다.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영광에 참여하기 위해서 금식 또는 금욕적 생활로 죄를 더욱 깊이 자각하고 통회하며 그리스도가 당하신 고난과 죽음에 동참하는 기간을 말합니다. 사순절이란 영어의 Lent는 '이른 봄'이라는 라틴어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유대인의 봄 축제인 유월절 전후에 행해졌기 때문입니다. 부활절을 준비하며 예비하기 위해 금식일을 지킨 것은 초대교회 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재의 수요일'때부터 40일간을 부활절 준비 기간으로 잡은 것은 교황 그레고리때부터입니다. 이 기간을 40일로 잡은 것은 성경에서의 40이란 숫자가 가진 상징적인 의미와 구약의 예언자들과 예수님 자신의 40일 동안의 금식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 4는 완전 수에 속합니다. 세상은 동서남북의 네 방향이며, 에덴동산의 강물들 역시 네 줄기입니다. 4의 배수인 40 역시 가장 신성한 수로서 여호와 하나님의 완전수라고 불리웠습니다. 노아 때의 40일간의 홍수, 이스라엘의 광야 방랑의 40년, 다윗과 솔로몬의 재임 40년 등은 40이란 숫자가 여호와 하나님의 뜻에 의해 발생된 어떤 일을 완성시킬 수 있는 가장 완벽한 시간을 의미합니다. 더구나 사순절은 모세와 엘리야, 그리고 예수님 자신의 40일 간의 금식에 의해 분명히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40이란 숫자가 인간의 생존 또는 인내의 측면에서 상당히 오랜 기간을 가리키는 어림수로 사용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순절은 그리스도의 부활의 영광에 참여하기 위해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그들 자신이 죄로 인해 겪으신 그리스도의 고난을 통회하는 일에 있어서 적절하다고 간주된 기간입니다. 중세의 크리스천들에 의하면 사순절은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인 모든 성도들이 '연중 40일간의 묵상과 기도의 시기'라고 불렀습니다. 일상 생활의 모든 업무를 피하여 한적한 곳에서 장시간 동안 조용히 자신을 살피며 기도하는 것을 통해서 노아의 홍수로 인한 세계와 노아 자신의 변화처럼 40일 동안 참회와 속죄를 통해서 생활 전체의 혁신을 촉구하며, 또한 모세와 엘리야처럼 여호와 하나님과 만나기 위한 합당한 준비를 하며, 광야에서의 예수님처럼 중대한 사건, 곧 공생애의 시간을 앞두고 여호와 하나님의 뜻과 지시하심을 받기 위한 성결의 기간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사순절은 축제를 금하고 자선을 베풀고 평소보다 더 많이 종교적 행사에 참여함으로써 회개의 절기가 되기 위하여 예배에 있어서 변화를 주기도 합니다. 사순절 기간 동안의 강단 색깔은 회개를 상징한다고 하는 의미에서 보라색을 사용하게 됩니다. 사순절 기간 동안에 금식 또는 금욕을 하게 되는데, 현대에 와서는 금식이 많이 완화되었고 금식 자체보다는 희생과 봉사행위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자기가 가장 즐기는 음식 중 어느 하나를 금하기도 합니다. 40일 동안 모든 정성을 이웃에게 나누어 주며 묵상과 기도에 힘씀으로써 부활의 영광을 맛보기 위한 준비기간으로 삼는 것이 사순절이 갖는 본래의 의미인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사순절 기간을 특별히 금년에는 잘 보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부활절을 맞이할 때는 한 차원 높은 신앙인으로 거듭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인생은 그 하루도 편할 날이 없다고들 말합니다. 계속되는 생존 경쟁, 질병,교통사고 등이 우리와 우리의 이웃을 괴롭히고 있습니다.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고통을 받을 때 우리는 눈물을 흘립니다. 그 때 우리의 생각은 뒤죽 박죽이 되고 우리들은 마치 상처 입은 새처럼 비틀거립니다. 그리고 나서 우리는 묻습니다. 왜, 내가 이와 같은 고통을 당해야 하는가 자녀를 교통사고로 잃은 부모들이 비통함 가운데서 울부짖듯이 외치는 이 소리, '주여, 왜'는 듣는 우리들 역시 여호와 하나님의 살아 계심에 대한 의문을 갖게 하기도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계신다면 이 세상은 왜 이리 불의하고 공평치 못한 것일까 여호와 하나님이 계신다면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고통 속에서 죽어가는가
누구든지 많은 고통을 받게 되면 욥과 같은 독백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욥 3:3의 말씀입니다. "나의 난 날이 멸망하였었더라면, 사내아이를 배었다 하던 그 밤도 그러 하였었더라면". 무거운 고통의 손아귀 아래 있게 될 때 우리는 삶의 이유를 알지 못하고 삶을 희망없는 불행으로 저주하기도 합니다. 삶 자체가 우리에게는 지긋지긋한 속박이고 우리를 옴짝 달싹 못하게 하는 멍에인 것 같이 느껴집니다. 아무리 보아도 우리에게 닥친 재앙, 고통이 당연한 만큼 큰 죄악을 짓지 않았다는 사실이 우리로 하여금 더욱 더 절망하게 하는 요소가 됩니다. 즉 우리의 죄악으로 인한 당연히 치루어야 할 고통이 아니라는 사실은 여호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회의에로 나아가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리 욥과 같이 따져보고 생각해 본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고통이 어디 에서부터 비롯되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악의 그 근원은 아직도 신비이기 때문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악을 허락하시지만 이는 그것을 더욱 큰 선으로 바꾸어 놓으시기 위함이다"라는 성 어거스틴의 말처럼 여호와 하나님은 어떤 사람이나 어떤 일이 우리에게 상처를 줄 때 악을 선으로, 고통으로 인한 울부짖음을 기도로, 슬픔을 은혜로 바꾸어 놓으십니다. 우리가 뜻하지 않은 일로 고통을 당하게 되면 우리는 즉각적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가 또 다시 우리에게 임할 것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온갖 재산을 잃고 자기의 생명보다 귀중한 자녀들을 모두 잃었으며, 더군다나 몸에는 더러운 질병까지 생겨나서 사랑하는 아내까지도 서슴없이 여호와 하나님을 욕하고 죽는 것이 더 낫다고 속삭이는 이런 현실 속에서 그 자신의 무죄를 믿고 있는 욥에게 하루하루의 삶은 바로 지옥이었을 것입니다. 어느 누구의 위로도 그 마음을 즐겁게 하지 못했습니다. 자기의 생명에 대한 저주는 바로 모든 생명의 창조주이신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자신을 불태울 듯이 덤벼드는 고통 속에서 욥이 경험한 것은 바로 여호와 하나님께 관한 지식입니다. 욥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욥 42:5입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 여기에는 진정 새로운 것이 있었습니다. 고통의 경험이 전에 없었던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가져다 주었습니다. 이 고통은 절대자에 대한 지식입니다. 전에는 남에게서, 또는 성경에서 들었던 여호와 하나님을 이제는 내 자신이 내 눈으로 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고통은 우리를 사물의 표면을 지나서 그 내면 속에 감취어져 있던 여호와 하나님의 신비 속으로 들어 가게 합니다. 고통이 없었다면 결코 경험치 못했을 여호와 하나님을 우리는 만나 뵙게 되는 횡재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고통을 통해서 우리는 더욱 성숙되고 영적인 사람으로 바뀌어질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평화롭고 순조로울 때에, 우리는 물질보다 영적인 것에, 신비한 것에 더 관심 하기는 어려운 법입니다. 감각에 붙잡힌 상태로부터 자유로와지는 것은 우리 같은 감각적인 피조물들에게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사람을 살피셔서 그들의 필요를 아시고 또 속생각까지도 아시는 분이십니다. 겉으로 선을 노래하지만, 그러나 가슴 속에서 계속되는 온갖 악을 아시는 분이십니다. 욥은 여호와 하나님이 그를 헤아려 그 자신이 이와같은 고난을 당할 정도로 범죄치 않았음을 아시기를 원했습니다. 또한 사람이 고하지 않고도 그 속에 있는 것을 아시리라고 믿었습니다. 욥은 고통 속에서 인간의 범죄가 여호와 하나님에 대하여 어떠한 해가 되는가를 물었으나 이는 진정한 의문이 아니었음이 21절에서 드러나고 있습니다. 지금 욥은 그 자신이 당하는 고통의 경험 때문에, 그리고 스스로 그 고통이 부당하기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사랑, 그분의 모든 사람에게 바라는 공의가 더 이상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이라고 믿지는 않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 인간이 그가 창조하신 그 형상 그대로 살아가기를 원하셨지 결코 타락하여 그 본성을 왜곡시키는 삶을 살아가는 것을 용납지 않으십니다. 따라서 인간의 죄악은 그 자신과 여호와 하나님을 동시에 괴롭히는 것이며, 이는 그분 자신의 소유인 우리 자신에 대한 여호와 하나님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은 마땅히 우리의 찬양과 영광을 받으실 분이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욥의 죄악과 허물을 사하시지 않기 때문에 그는 죽음을 원하게 되었습니다. 고통의 극심함은 그로 말미암아 삶을 포기하게 만들었습니다. 욥은 이제 주님께서 까닭없이 그를 괴롭히기 위하여 고난을 주려고 부지런히 그를 찾아도 찾지 못할 것인데 이는 이제 그 이상 더 이상의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죽으려 하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욥의 모습은 여호와 하나님께 대하여 직접적인 원망의 말을 하지 않으나, 그러나 생의 포기로 인해서 그가 아직도 여호와 하나님께서 고통으로 말미암아 여호와 하나님 자신에 대한 체험을 주시리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여호와 하나님께 불평하고 그 자신도 알지 못하는 무지한 말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잦은 좌절과 고통에 찬 불평, 그리고 저항은 사람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께로만 향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합니다. 그는 철저히 그의 고난과 여호와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의도를 알기 위하여 씨름하였습니다. 마치 얍복 나루의 야곱이 여호와 하나님과 밤이 맞도록 씨름하였듯이 욥은 그의 남은 생애에 생존을 모두 내어 버리고 오로지 여호와 하나님이 왜 그에게 까닭없는 고난을 보내셨는가를 알기 위해서 씨름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는 고난은 그로 인해 우리가 목숨을 포기한다 하더라도 결코 더 큰 선과 더 큰 유익으로 이어지지 않는 한,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습니다. 욥의 이야기는 까닭없이 우리에게 당하는 모든 고난의 그것이 우리의 눈과 우리의 생각은 비록 아무런 이유없이 주어지는 것처럼 보인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모든 것을 선으로 이끄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한 사랑속에서 주어지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합니다. 따라서 겪게 되는 여호와 하나님의 보내시는 고난은 그것이 어떠한 것이든 우리로 하여금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더욱 더 성숙된 신앙에로 연결되도록 감수해야 합니다. 그 고통은 우리로 하여금 소문으로 들었던 여호와 하나님에 대해서 직접 몸으로 체험해서 알게 되는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지식으로 우리를 인도할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에게 있어서나 사람에게 있어서나 꼭같이 큰 문제가 되는 것은 죄라는 것입니다. 인류의 시조는 죄 때문에 에덴에서 쫓겨났습니다. 노아시대의 사람들은 죄 때문에 유황불에 망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죄 때문에 바벨론으로 잡혀 갔었습니다. 그리하여 구약시대의 선지자들은 죄에서 돌아오라고 외쳤습니다. 신약시대의 사도들은 회개하라고 경고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이 죄를속량해 주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죄만 아니었다면 인간은 이보다 더 좋은 축복 속에 살 수 있었을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도 그렇게 진노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실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죄는 여호와 하나님께나 인간에게나 다 같이 큰 문젯거리였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사람들은 대개 네 가지 질문을 해 옵니다. 그것은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욥의 질문이기도 합니다.
첫째, 인간의 죄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이 진노하시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대신 죽으셨다고 한다면, 그러니까 그를 구주로 믿어야 된다고 하지만 그 죄란 것이 도대체 나 자신과 무슨 관련이 있느냐는 질문입니다. 즉, 나야 무슨 죄가 있느냐는 말입니다. 교도소와는 거리가 멀고 전과자와는 성분이 다른 선량한 내가 죄인이라고 하는 집단 속에 도매금으로 끼어 넘어가기는 억울하지 않느냐는 항의입니다. 일리가 있는 항변입니다. 여기에 대하여 성경은 "죄는 여호와 하나님을 믿지 아니함을 말함이라"고 죄의 정의를 분명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반드시 어떤 범법을 하고 파렴치한 비행을 저질러서만이 아니라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순종치 않는 그것이 바로 큰 죄라는 말입니다. 그러기에 성경에서는 "의인은 한 사람도 없다"고 롬 3:10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나 그 품행의 방정여부를 떠나서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며 믿고 순종하지 않는 한, 죄인됨을 면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그리고 보면 첫째 질문은 스스로 해답이 되는 것입니다.
둘째, 나를 포함한 온 세계인류가 다 죄인이라는 성경의 논고를 그대로 긍정한다고 할지라도 도대체 인간이 죄인되었다는 사실이 여호와 하나님께 무슨 직접적인 관계가 있느냐 하는 질문입니다. 죄인된 인간을 그냥 방치해 두면 될 터인데 이 천한 인간의 죄가 높은 보좌에 계신 여호와 하나님께 무슨 이해관계가 있다고 여호와 하나님은 이처럼 인간의 죄에 대하여 간섭하시거나 상심하시느냐는 것입니다. 전혀 문제시하지 않으면 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성경은 두 가지 해답을 해주고 있습니다.
(1) 여호와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낳은 사랑하는 자녀가 병에 걸렸거나 타락했거나 불행하게 되었을 경우에 그 부모가 이를 방관만 하고 있을 수는 없는 것처럼 창조주이신 여호와 하나님은 그의 피조물인 인간의 죄에 대해서 방관만 하실 수 없는 것입니다.
(2) 여호와 하나님은 거룩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은 죄를 용납하실 수 없으심은 물론이고, 죄를 보실 수 조차 없으십니다. 그러므로 인류의 긴 역사를 통하여 여호와 하나님은 부단히 인간의 죄에 대해서 간섭해 오셨고, 또 앞으로도 간섭하실 것이며 이것은 어쩔 수 없는 여호와 하나님의 생리이십니다. 이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면, 둘째번 질문도 해결될 것입니다.
셋째, 그렇다고 하면 인간들의 죄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과거나 미래를 통하여 두고 두고 상심하시는 것 보다는 그 죄를 일시에 근본적으로 전부 탕감하고 깨끗하게 용서하여 죄라는 기존 사실을 일체 백지로 돌려 보내면 될 것이 아니냐 하는 질문입니다. 과연 여호와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 때문에 그토록 상심이 되실만큼 사랑과 관심을 가지셨다고 하면 왜 일대 용단과 아량을 베풀어 주시지 않고 두고두고 상심만 하시는지 따질만도 합니다. 그러나 죄를 용서하신다는 사실은 식은 죽 먹듯이 그렇게 쉽게 되어질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만일 여호와 하나님께서 죄를 처벌하시지 않으신다면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선과 악을 동일시하심이요, 자신을 거역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여호와 하나님이시기 위해서는 죄를 처벌함이 필연적이라는 것입니다. 마틴루터가 말한대로 여호와 하나님은 어떻게 해서든지 죄인을 용서하시고 구원하시려는 사랑의 여호와 하나님이신 동시에 어떻게 해서든지 죄인을 징계하시고 처벌하시려는 공의의 여호와 하나님이실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여호와 하나님은 여호와 하나님이 선언하신 대로 범죄한 아담 부부를 죽게 하자니 그의 사랑이 허락지 않으셨고, 그렇다고 덮어놓고 용서하자니 그의 공의가 허락지 않으셨을 때 여호와 하나님 안에서 사랑과 공의는 충돌을 겪게 되었으며 여기에 여호와 하나님의 고민이 있었습니다. 이 고민을 해결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으로 등장한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의해서 여호와 하나님의 공의대로 죄는 처벌되고, 또 그의 사랑대로 죄인은 용서되고 구원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인간의 죄를 대신 담당하여 죽게 하시고 그의 공로로 죄인이 탕감을 받는 구원의 길을 열어 놓으셨으니 이것이 곧 십자가를 통한 대속의 진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죄에 대한 여호와 하나님의 진노"인 동시에 또 한편으로는 "죄인에 대한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죽어야 할 죄인이 용서함을 받아 사는 길을 얻게 되었으므로, "예수의 십자가는 죽음의 죽음"이라고 루터는 찬송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는 여호와 하나님의 아픔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이 여호와 하나님의 아픔을 싸매어 들일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곧 예수님의 십자가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아픈 희생을 통하여 대속의 길을 열어 인간의 구원얻는 문을 마련해 놓으셨지만, 인간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외면하고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을 배신함으로서 영원한 고통을 자처한다면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아픔을 무한대로 확대시키고 마는 또 하나의 죄악이 될 것입니다.
끝으로, 왜 하필이면 예수님의 십자가이어야만 되느냐 하는 문제가 제기될 것입니다. 죄라는 것은 단순히 여호와 하나님만의 문제도 아니고 인간만의 문제도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이 죄를 맡아 처리할 수 있는 중보자가 필요한데, 이 중보자에게는 두 가지 자격이 있어야 합니다.
첫째는, 신성이요, 둘째는, 인성입니다. 중보자란 양편에 다 통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천사는 영물이기는 하지만, 육신이 없기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을 위한 중보자가 될 수 없습니다. 공자나 석가는 성현이기는 하지만 인간일 뿐이기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을 위한 중보자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여기에 神으로서 인간 속에 인간이 되어서 오시고 인간이면서 그냥 神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여호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유일한 중보자로 제물이 되실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희생은 아픈 것입니다. 그리고 아픈 희생까지도 사양치 아니한 아픈 사랑이 상대방으로부터 배신을 당하게 될 때 이 아픔은 배가되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은 아픈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피 흐르는 사랑입니다. 우리들의 패역으로 인하여 그 분에게 영원한 아픔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도 귀한 말씀을 생명을 걸고 들으신 여러분, 참으로 우리는 욥의 표현대로 '사람이 무엇이기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토록 관심을 가지시고 분초마다 시험하시는지 그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사람이 무엇입니까 사람은 창조의 중심이자 면류관입니다. 더욱이 성도는 구속의 핵심이자 언약의 본질입니다. 그런즉 사람으로 태어나 구속함 받은 성도는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로까지 영화롭게 된, 참으로 귀하고 보배로운 존재입니다. 따라서 이 사실을 깨달은 시편의 시인은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그를 여호와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라고 시 8:4-5에서 감격스럽게 노래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실인즉 사람은 그토록 소중하며, 더욱이 성도는 그렇게도 중요하기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의 관심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한 순간도 여호와 하나님의 눈이 우리를 떠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은 성도 중의 성도요 보배 중의 보배인 욥의 고통을 모르실리 없으셨습니다. 욥의 몸을 괴롭히는 구더기 한 마리까지도 애타게 보고 계셨습니다. 다만 그 오묘하신 섭리 때문에, 묵묵히 참고 보고 계셨을 뿐입니다. 이 사실을 깨닫고, 오늘날 우리 성도들 역시 욥과 같은 극한 상황에 처한다 할지라도, 결코 여호와 하나님을 떠나서는 안됩니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께 부르짖고 매달림으로써, '여호와 하나님 안에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때가 이르면 어느덧 곤고와 고통의 날은 지나가고, 욥처럼 영육간에 갑절의 축복이 임하는 귀하고 복된 시간이 반드시 찾아오고야 말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최고의 사랑으로 최대의 은총으로 최선의 길과 뜻으로 또 가장 좋은 것으로 예정하시고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이러한 축복을 여러분 모두가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재의 수요일'때부터 40일간을 부활절 준비 기간으로 잡은 것은 교황 그레고리때부터입니다. 이 기간을 40일로 잡은 것은 성경에서의 40이란 숫자가 가진 상징적인 의미와 구약의 예언자들과 예수님 자신의 40일 동안의 금식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 4는 완전 수에 속합니다. 세상은 동서남북의 네 방향이며, 에덴동산의 강물들 역시 네 줄기입니다. 4의 배수인 40 역시 가장 신성한 수로서 여호와 하나님의 완전수라고 불리웠습니다. 노아 때의 40일간의 홍수, 이스라엘의 광야 방랑의 40년, 다윗과 솔로몬의 재임 40년 등은 40이란 숫자가 여호와 하나님의 뜻에 의해 발생된 어떤 일을 완성시킬 수 있는 가장 완벽한 시간을 의미합니다. 더구나 사순절은 모세와 엘리야, 그리고 예수님 자신의 40일 간의 금식에 의해 분명히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40이란 숫자가 인간의 생존 또는 인내의 측면에서 상당히 오랜 기간을 가리키는 어림수로 사용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순절은 그리스도의 부활의 영광에 참여하기 위해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그들 자신이 죄로 인해 겪으신 그리스도의 고난을 통회하는 일에 있어서 적절하다고 간주된 기간입니다. 중세의 크리스천들에 의하면 사순절은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인 모든 성도들이 '연중 40일간의 묵상과 기도의 시기'라고 불렀습니다. 일상 생활의 모든 업무를 피하여 한적한 곳에서 장시간 동안 조용히 자신을 살피며 기도하는 것을 통해서 노아의 홍수로 인한 세계와 노아 자신의 변화처럼 40일 동안 참회와 속죄를 통해서 생활 전체의 혁신을 촉구하며, 또한 모세와 엘리야처럼 여호와 하나님과 만나기 위한 합당한 준비를 하며, 광야에서의 예수님처럼 중대한 사건, 곧 공생애의 시간을 앞두고 여호와 하나님의 뜻과 지시하심을 받기 위한 성결의 기간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사순절은 축제를 금하고 자선을 베풀고 평소보다 더 많이 종교적 행사에 참여함으로써 회개의 절기가 되기 위하여 예배에 있어서 변화를 주기도 합니다. 사순절 기간 동안의 강단 색깔은 회개를 상징한다고 하는 의미에서 보라색을 사용하게 됩니다. 사순절 기간 동안에 금식 또는 금욕을 하게 되는데, 현대에 와서는 금식이 많이 완화되었고 금식 자체보다는 희생과 봉사행위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자기가 가장 즐기는 음식 중 어느 하나를 금하기도 합니다. 40일 동안 모든 정성을 이웃에게 나누어 주며 묵상과 기도에 힘씀으로써 부활의 영광을 맛보기 위한 준비기간으로 삼는 것이 사순절이 갖는 본래의 의미인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사순절 기간을 특별히 금년에는 잘 보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부활절을 맞이할 때는 한 차원 높은 신앙인으로 거듭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인생은 그 하루도 편할 날이 없다고들 말합니다. 계속되는 생존 경쟁, 질병,교통사고 등이 우리와 우리의 이웃을 괴롭히고 있습니다.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고통을 받을 때 우리는 눈물을 흘립니다. 그 때 우리의 생각은 뒤죽 박죽이 되고 우리들은 마치 상처 입은 새처럼 비틀거립니다. 그리고 나서 우리는 묻습니다. 왜, 내가 이와 같은 고통을 당해야 하는가 자녀를 교통사고로 잃은 부모들이 비통함 가운데서 울부짖듯이 외치는 이 소리, '주여, 왜'는 듣는 우리들 역시 여호와 하나님의 살아 계심에 대한 의문을 갖게 하기도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계신다면 이 세상은 왜 이리 불의하고 공평치 못한 것일까 여호와 하나님이 계신다면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고통 속에서 죽어가는가
누구든지 많은 고통을 받게 되면 욥과 같은 독백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욥 3:3의 말씀입니다. "나의 난 날이 멸망하였었더라면, 사내아이를 배었다 하던 그 밤도 그러 하였었더라면". 무거운 고통의 손아귀 아래 있게 될 때 우리는 삶의 이유를 알지 못하고 삶을 희망없는 불행으로 저주하기도 합니다. 삶 자체가 우리에게는 지긋지긋한 속박이고 우리를 옴짝 달싹 못하게 하는 멍에인 것 같이 느껴집니다. 아무리 보아도 우리에게 닥친 재앙, 고통이 당연한 만큼 큰 죄악을 짓지 않았다는 사실이 우리로 하여금 더욱 더 절망하게 하는 요소가 됩니다. 즉 우리의 죄악으로 인한 당연히 치루어야 할 고통이 아니라는 사실은 여호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회의에로 나아가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리 욥과 같이 따져보고 생각해 본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고통이 어디 에서부터 비롯되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악의 그 근원은 아직도 신비이기 때문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악을 허락하시지만 이는 그것을 더욱 큰 선으로 바꾸어 놓으시기 위함이다"라는 성 어거스틴의 말처럼 여호와 하나님은 어떤 사람이나 어떤 일이 우리에게 상처를 줄 때 악을 선으로, 고통으로 인한 울부짖음을 기도로, 슬픔을 은혜로 바꾸어 놓으십니다. 우리가 뜻하지 않은 일로 고통을 당하게 되면 우리는 즉각적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가 또 다시 우리에게 임할 것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온갖 재산을 잃고 자기의 생명보다 귀중한 자녀들을 모두 잃었으며, 더군다나 몸에는 더러운 질병까지 생겨나서 사랑하는 아내까지도 서슴없이 여호와 하나님을 욕하고 죽는 것이 더 낫다고 속삭이는 이런 현실 속에서 그 자신의 무죄를 믿고 있는 욥에게 하루하루의 삶은 바로 지옥이었을 것입니다. 어느 누구의 위로도 그 마음을 즐겁게 하지 못했습니다. 자기의 생명에 대한 저주는 바로 모든 생명의 창조주이신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자신을 불태울 듯이 덤벼드는 고통 속에서 욥이 경험한 것은 바로 여호와 하나님께 관한 지식입니다. 욥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욥 42:5입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 여기에는 진정 새로운 것이 있었습니다. 고통의 경험이 전에 없었던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가져다 주었습니다. 이 고통은 절대자에 대한 지식입니다. 전에는 남에게서, 또는 성경에서 들었던 여호와 하나님을 이제는 내 자신이 내 눈으로 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고통은 우리를 사물의 표면을 지나서 그 내면 속에 감취어져 있던 여호와 하나님의 신비 속으로 들어 가게 합니다. 고통이 없었다면 결코 경험치 못했을 여호와 하나님을 우리는 만나 뵙게 되는 횡재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고통을 통해서 우리는 더욱 성숙되고 영적인 사람으로 바뀌어질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평화롭고 순조로울 때에, 우리는 물질보다 영적인 것에, 신비한 것에 더 관심 하기는 어려운 법입니다. 감각에 붙잡힌 상태로부터 자유로와지는 것은 우리 같은 감각적인 피조물들에게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사람을 살피셔서 그들의 필요를 아시고 또 속생각까지도 아시는 분이십니다. 겉으로 선을 노래하지만, 그러나 가슴 속에서 계속되는 온갖 악을 아시는 분이십니다. 욥은 여호와 하나님이 그를 헤아려 그 자신이 이와같은 고난을 당할 정도로 범죄치 않았음을 아시기를 원했습니다. 또한 사람이 고하지 않고도 그 속에 있는 것을 아시리라고 믿었습니다. 욥은 고통 속에서 인간의 범죄가 여호와 하나님에 대하여 어떠한 해가 되는가를 물었으나 이는 진정한 의문이 아니었음이 21절에서 드러나고 있습니다. 지금 욥은 그 자신이 당하는 고통의 경험 때문에, 그리고 스스로 그 고통이 부당하기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사랑, 그분의 모든 사람에게 바라는 공의가 더 이상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이라고 믿지는 않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 인간이 그가 창조하신 그 형상 그대로 살아가기를 원하셨지 결코 타락하여 그 본성을 왜곡시키는 삶을 살아가는 것을 용납지 않으십니다. 따라서 인간의 죄악은 그 자신과 여호와 하나님을 동시에 괴롭히는 것이며, 이는 그분 자신의 소유인 우리 자신에 대한 여호와 하나님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은 마땅히 우리의 찬양과 영광을 받으실 분이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욥의 죄악과 허물을 사하시지 않기 때문에 그는 죽음을 원하게 되었습니다. 고통의 극심함은 그로 말미암아 삶을 포기하게 만들었습니다. 욥은 이제 주님께서 까닭없이 그를 괴롭히기 위하여 고난을 주려고 부지런히 그를 찾아도 찾지 못할 것인데 이는 이제 그 이상 더 이상의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죽으려 하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욥의 모습은 여호와 하나님께 대하여 직접적인 원망의 말을 하지 않으나, 그러나 생의 포기로 인해서 그가 아직도 여호와 하나님께서 고통으로 말미암아 여호와 하나님 자신에 대한 체험을 주시리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여호와 하나님께 불평하고 그 자신도 알지 못하는 무지한 말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잦은 좌절과 고통에 찬 불평, 그리고 저항은 사람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께로만 향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합니다. 그는 철저히 그의 고난과 여호와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의도를 알기 위하여 씨름하였습니다. 마치 얍복 나루의 야곱이 여호와 하나님과 밤이 맞도록 씨름하였듯이 욥은 그의 남은 생애에 생존을 모두 내어 버리고 오로지 여호와 하나님이 왜 그에게 까닭없는 고난을 보내셨는가를 알기 위해서 씨름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는 고난은 그로 인해 우리가 목숨을 포기한다 하더라도 결코 더 큰 선과 더 큰 유익으로 이어지지 않는 한,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습니다. 욥의 이야기는 까닭없이 우리에게 당하는 모든 고난의 그것이 우리의 눈과 우리의 생각은 비록 아무런 이유없이 주어지는 것처럼 보인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모든 것을 선으로 이끄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한 사랑속에서 주어지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합니다. 따라서 겪게 되는 여호와 하나님의 보내시는 고난은 그것이 어떠한 것이든 우리로 하여금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더욱 더 성숙된 신앙에로 연결되도록 감수해야 합니다. 그 고통은 우리로 하여금 소문으로 들었던 여호와 하나님에 대해서 직접 몸으로 체험해서 알게 되는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지식으로 우리를 인도할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에게 있어서나 사람에게 있어서나 꼭같이 큰 문제가 되는 것은 죄라는 것입니다. 인류의 시조는 죄 때문에 에덴에서 쫓겨났습니다. 노아시대의 사람들은 죄 때문에 유황불에 망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죄 때문에 바벨론으로 잡혀 갔었습니다. 그리하여 구약시대의 선지자들은 죄에서 돌아오라고 외쳤습니다. 신약시대의 사도들은 회개하라고 경고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이 죄를속량해 주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죄만 아니었다면 인간은 이보다 더 좋은 축복 속에 살 수 있었을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도 그렇게 진노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실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죄는 여호와 하나님께나 인간에게나 다 같이 큰 문젯거리였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사람들은 대개 네 가지 질문을 해 옵니다. 그것은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욥의 질문이기도 합니다.
첫째, 인간의 죄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이 진노하시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대신 죽으셨다고 한다면, 그러니까 그를 구주로 믿어야 된다고 하지만 그 죄란 것이 도대체 나 자신과 무슨 관련이 있느냐는 질문입니다. 즉, 나야 무슨 죄가 있느냐는 말입니다. 교도소와는 거리가 멀고 전과자와는 성분이 다른 선량한 내가 죄인이라고 하는 집단 속에 도매금으로 끼어 넘어가기는 억울하지 않느냐는 항의입니다. 일리가 있는 항변입니다. 여기에 대하여 성경은 "죄는 여호와 하나님을 믿지 아니함을 말함이라"고 죄의 정의를 분명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반드시 어떤 범법을 하고 파렴치한 비행을 저질러서만이 아니라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순종치 않는 그것이 바로 큰 죄라는 말입니다. 그러기에 성경에서는 "의인은 한 사람도 없다"고 롬 3:10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나 그 품행의 방정여부를 떠나서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며 믿고 순종하지 않는 한, 죄인됨을 면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그리고 보면 첫째 질문은 스스로 해답이 되는 것입니다.
둘째, 나를 포함한 온 세계인류가 다 죄인이라는 성경의 논고를 그대로 긍정한다고 할지라도 도대체 인간이 죄인되었다는 사실이 여호와 하나님께 무슨 직접적인 관계가 있느냐 하는 질문입니다. 죄인된 인간을 그냥 방치해 두면 될 터인데 이 천한 인간의 죄가 높은 보좌에 계신 여호와 하나님께 무슨 이해관계가 있다고 여호와 하나님은 이처럼 인간의 죄에 대하여 간섭하시거나 상심하시느냐는 것입니다. 전혀 문제시하지 않으면 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성경은 두 가지 해답을 해주고 있습니다.
(1) 여호와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낳은 사랑하는 자녀가 병에 걸렸거나 타락했거나 불행하게 되었을 경우에 그 부모가 이를 방관만 하고 있을 수는 없는 것처럼 창조주이신 여호와 하나님은 그의 피조물인 인간의 죄에 대해서 방관만 하실 수 없는 것입니다.
(2) 여호와 하나님은 거룩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은 죄를 용납하실 수 없으심은 물론이고, 죄를 보실 수 조차 없으십니다. 그러므로 인류의 긴 역사를 통하여 여호와 하나님은 부단히 인간의 죄에 대해서 간섭해 오셨고, 또 앞으로도 간섭하실 것이며 이것은 어쩔 수 없는 여호와 하나님의 생리이십니다. 이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면, 둘째번 질문도 해결될 것입니다.
셋째, 그렇다고 하면 인간들의 죄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과거나 미래를 통하여 두고 두고 상심하시는 것 보다는 그 죄를 일시에 근본적으로 전부 탕감하고 깨끗하게 용서하여 죄라는 기존 사실을 일체 백지로 돌려 보내면 될 것이 아니냐 하는 질문입니다. 과연 여호와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 때문에 그토록 상심이 되실만큼 사랑과 관심을 가지셨다고 하면 왜 일대 용단과 아량을 베풀어 주시지 않고 두고두고 상심만 하시는지 따질만도 합니다. 그러나 죄를 용서하신다는 사실은 식은 죽 먹듯이 그렇게 쉽게 되어질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만일 여호와 하나님께서 죄를 처벌하시지 않으신다면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선과 악을 동일시하심이요, 자신을 거역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여호와 하나님이시기 위해서는 죄를 처벌함이 필연적이라는 것입니다. 마틴루터가 말한대로 여호와 하나님은 어떻게 해서든지 죄인을 용서하시고 구원하시려는 사랑의 여호와 하나님이신 동시에 어떻게 해서든지 죄인을 징계하시고 처벌하시려는 공의의 여호와 하나님이실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여호와 하나님은 여호와 하나님이 선언하신 대로 범죄한 아담 부부를 죽게 하자니 그의 사랑이 허락지 않으셨고, 그렇다고 덮어놓고 용서하자니 그의 공의가 허락지 않으셨을 때 여호와 하나님 안에서 사랑과 공의는 충돌을 겪게 되었으며 여기에 여호와 하나님의 고민이 있었습니다. 이 고민을 해결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으로 등장한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의해서 여호와 하나님의 공의대로 죄는 처벌되고, 또 그의 사랑대로 죄인은 용서되고 구원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인간의 죄를 대신 담당하여 죽게 하시고 그의 공로로 죄인이 탕감을 받는 구원의 길을 열어 놓으셨으니 이것이 곧 십자가를 통한 대속의 진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죄에 대한 여호와 하나님의 진노"인 동시에 또 한편으로는 "죄인에 대한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죽어야 할 죄인이 용서함을 받아 사는 길을 얻게 되었으므로, "예수의 십자가는 죽음의 죽음"이라고 루터는 찬송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는 여호와 하나님의 아픔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이 여호와 하나님의 아픔을 싸매어 들일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곧 예수님의 십자가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아픈 희생을 통하여 대속의 길을 열어 인간의 구원얻는 문을 마련해 놓으셨지만, 인간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외면하고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을 배신함으로서 영원한 고통을 자처한다면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아픔을 무한대로 확대시키고 마는 또 하나의 죄악이 될 것입니다.
끝으로, 왜 하필이면 예수님의 십자가이어야만 되느냐 하는 문제가 제기될 것입니다. 죄라는 것은 단순히 여호와 하나님만의 문제도 아니고 인간만의 문제도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이 죄를 맡아 처리할 수 있는 중보자가 필요한데, 이 중보자에게는 두 가지 자격이 있어야 합니다.
첫째는, 신성이요, 둘째는, 인성입니다. 중보자란 양편에 다 통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천사는 영물이기는 하지만, 육신이 없기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을 위한 중보자가 될 수 없습니다. 공자나 석가는 성현이기는 하지만 인간일 뿐이기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을 위한 중보자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여기에 神으로서 인간 속에 인간이 되어서 오시고 인간이면서 그냥 神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여호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유일한 중보자로 제물이 되실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희생은 아픈 것입니다. 그리고 아픈 희생까지도 사양치 아니한 아픈 사랑이 상대방으로부터 배신을 당하게 될 때 이 아픔은 배가되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은 아픈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피 흐르는 사랑입니다. 우리들의 패역으로 인하여 그 분에게 영원한 아픔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도 귀한 말씀을 생명을 걸고 들으신 여러분, 참으로 우리는 욥의 표현대로 '사람이 무엇이기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토록 관심을 가지시고 분초마다 시험하시는지 그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사람이 무엇입니까 사람은 창조의 중심이자 면류관입니다. 더욱이 성도는 구속의 핵심이자 언약의 본질입니다. 그런즉 사람으로 태어나 구속함 받은 성도는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로까지 영화롭게 된, 참으로 귀하고 보배로운 존재입니다. 따라서 이 사실을 깨달은 시편의 시인은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그를 여호와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라고 시 8:4-5에서 감격스럽게 노래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실인즉 사람은 그토록 소중하며, 더욱이 성도는 그렇게도 중요하기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의 관심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한 순간도 여호와 하나님의 눈이 우리를 떠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은 성도 중의 성도요 보배 중의 보배인 욥의 고통을 모르실리 없으셨습니다. 욥의 몸을 괴롭히는 구더기 한 마리까지도 애타게 보고 계셨습니다. 다만 그 오묘하신 섭리 때문에, 묵묵히 참고 보고 계셨을 뿐입니다. 이 사실을 깨닫고, 오늘날 우리 성도들 역시 욥과 같은 극한 상황에 처한다 할지라도, 결코 여호와 하나님을 떠나서는 안됩니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께 부르짖고 매달림으로써, '여호와 하나님 안에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때가 이르면 어느덧 곤고와 고통의 날은 지나가고, 욥처럼 영육간에 갑절의 축복이 임하는 귀하고 복된 시간이 반드시 찾아오고야 말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최고의 사랑으로 최대의 은총으로 최선의 길과 뜻으로 또 가장 좋은 것으로 예정하시고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이러한 축복을 여러분 모두가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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