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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위일체] 삼위일체의 신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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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금요일 우리 기도원에서 5월 철야기도회가 있었습니다. 구름 한 점 없는 초여름밤 하늘에 동그랗게 떠 있는 달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모릅니다. 게다가 한없이 펼쳐져 있는 하늘에 쏟아질 듯 반짝이는 별들은 하늘의 신비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오늘은 삼위일체 기념 주일입니다. 삼위일체 여호와 하나님을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 이 교리를 고백하게 된 것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세계 개신교회가 교리를 기념하여 지키는 주일은 삼위일체 주일밖에 없습니다. 우리 장로교회가 전통적으로 믿어오는 신앙고백은 사도신경, 니케아신조, 제2 스위스 신앙고백, 벨직 신앙고백,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등입니다. 이것을 요약 정리해서 우리 장로교회의 12신조를 만들었습니다. 그렇기에 삼위일체 주일의 의미는 여호와 하나님을 바로 알고, 바로 믿는데 있습니다.
이 모든 신앙고백의 근간이 되는 가장 기초적인 신앙고백은 바로 사도신경입니다. 사도신경에는 8가지 내용의 고백이 나옵니다. 첫째는 천지를 만드신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성부), 둘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성자), 셋째는 성령을 믿사오며(성령), 넷째는 거룩한 공회(교회), 다섯째는 성도의 교통(교제), 여섯째는 죄사함(속죄), 일곱째는 몸이 다시 사는 것(부활), 그리고 마지막 여덟째는 영원히 사는 것(영생)입니다.
그런데 아쉽게도 이 고백에 몇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먼저는 성부, 성자, 성령을 믿는다면서도 삼위의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다는 말이 생략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치 세() 신(神)을 믿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번역의 문제입니다. 이 사도신경은 고백인데 마치 기도문처럼 번역해서, 또 기도문처럼 암송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영문에는 “I believe in God… I believe in Jesus Christ... I believe in the Holy Spirit... ”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는 “나는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믿습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나는 성령을 믿습니다... ”로 기도문이 아니라 분명히 신앙고백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노회에서는 이번 84회 총회에 이 사도신경을 새롭게 번역하자는 제안을 헌의해 놓고 있습니다.
우리는 초대교회부터 지금까지 성부 여호와 하나님, 성자 여호와 하나님, 성령 여호와 하나님을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삼위일체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물론 성경에는 삼위일체라는 말이 없습니다. 하지만 이 말을 가장 먼저 사용한 사람은 초대교회의 교부(敎父)인 터툴리안입니다. 그는 주후 160년경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에서 태어났습니다. 철학과 법학 그리고 로마에서 신학을 공부한 후 고향 카르타고로 돌아가 장로로서 교회에서 봉사했습니다. 평생 그는 두 가지 일에 몰두했는데 하나는 이단사상을 척결하고 정통 신학을 확립하여 예수님을 바로 믿게 하는 일이요 또 다른 하나는 교회가 제도화 되기보다는 생명있는 교회가 되어 사회와 역사에 영향을 끼칠 수 있도록 하는 일이었습니다.
터툴리안은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과 스스로 성육신하심으로 구원의 질서를 확립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께서 삼위적 신관을 완성했다고 믿었습니다. 동시에 이 세 가지 사건이 여호와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 일어난 일이라면 오직 한 분 여호와 하나님만이 있을 뿐이라고 하여 삼위일체를 나타냈습니다. 특히 창조 사역에서도 성부 여호와 하나님은 명령하시고, 성자 그리스도는 복종하시며, 이를 깨닫게 하시는 이는 성령이시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부족했던 삼위일체의 신학적 확립은 이후 어거스틴을 거쳐 칼뱅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오늘 우리가 믿고 고백하는 삼위일체 여호와 하나님으로 견고하게 설 수 있었습니다. 이로서 여호와 하나님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 이 삼위께서 언제나 함께 역사하시는 한 분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는 교리가 확고하게 서게 된 것입니다.
삼위일체는 여호와 하나님의 영역에 속하는 신비한 교리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도 우리는 그 신비로운 삼위일체 교리를 부분적으로나마 볼 수 있습니다. 본문은 예수님께서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께 드리는 기도입니다. 이를 어떤 이는 “대제사장의 기도”라고도 합니다. 이 기도에는 여호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되심을 말씀하시면서 이처럼 우리 성도들 역시 예수님 안에서 여호와 하나님과 하나가 될 것과 성도와 성도가 하나될 것을 간구하는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I. 삼위일체의 신비는 사랑입니다
21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라고 하셨습니다. 서로 구분되면서도 사랑으로 완전한 일치를 이루고 계시는 것입니다. 삼위일체 교리는 사랑이 없다면 깨달을 수 없습니다. 사랑을 지성으로나 이성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처럼 삼위일체의 신비도 인간의 지성이나 이성으로 설명하기는 불가능합니다. 어거스틴은 삼위일체 교리의 설명을 위해서 무척 애를 썼습니다. 하지만 아버지가 아들 안에 있고, 아들이 아버지 안에 있다는 이 말씀은 성령이 하나되게 하시는 사랑 없이는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특히 동양적 사고 방식으로는 더욱 이해가 어려운 것입니다. 오직 사랑으로만 하나가 되고, 일치가 되고, 연합이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 “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2절)... ”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따라서 사람이 여호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곧 사람이 사랑의 존재로 창조되었다는 말씀일 것입니다. 사랑이 없다면 우리가 무엇을 가지고 있든지 무엇을 이루어 놓았든지 무엇을 누리며 살든지 결국 아무 것도 아닙니다. 이 세상에 드러나는 모든 악하고 부정하고 나쁜 일들의 뿌리는 바로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문제 해결의 열쇠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의 영원하고 결정적인 문제인 죄의 문제도 사랑으로 해결하신 것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으로 인간의 사망 문제를 해결하신 것입니다. 사랑이 모든 문제의 열쇠입니다. 행복한 삶을 원하신다면, 건강하고 아름다운 삶을 원하신다면, 좋은 교회, 성장하는 든든한 교회가 되기를 원하신다면 먼저 사랑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사랑에 투자하고, 사랑에 헌신해야 합니다. 사랑을 위해 노력하고, 사랑을 위해 도해야 합니다. 우리 속담에 “부뚜막에 있는 소금도 집어넣어야 짜다. ”는 말이 있습니다. 사랑도 전달되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사랑은 사랑 받는 사람이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모든 사랑의 원칙입니다. 삼위일체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의 증거는 사랑으로 하나됨을 이루는 삶입니다.

2. 삼위일체의 신비는 창조적 능력입니다
 첫째는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하는 능력입니다.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된 것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이다(22절)... ”라고 주님은 기도하셨습니다. 또 “내게 주신 영광을 저희로 보게 하여... (24절)”라고도 하셨습니다. 삼위일체의 신비로운 합일을 믿는 성도들에게도 같은 영광이 주어질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영광의 내용은 미래 천국에서 받을 성도의 영광이요, 예수님을 믿음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영광이요, 예수님이 여호와 하나님과 하나가 된 것같이 믿는 성도가 예수님과 영적으로 하나가 되어 예수님이 누리는 영광을 함께 받는다는 해석이 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되는 능력입니다. 인간을 새로운 세계로 인도하는 창조적 능력입니다. 변화의 능력입니다.
 둘째는 믿음의 능력입니다.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21절)” 사랑의 열매는 믿음입니다. 행복은 믿음의 꽃입니다. 사랑이 없는 곳에는 믿음도 없고, 믿음이 없는 곳에는 행복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런 곳에 행복이 설 자리는 없습니다.
앙리 누웬이 쓴 “사랑의 내적 음성(The Inner Voice of Love)”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읽은 영성(靈性) 일지(日誌)입니다. 자신의 경험을 짧게 기록한 자기 고백서와 같은 책입니다. 누웬은 세계적 명문대인 예일과 하바드의 교수로 20여년간 재직하다가 장애인들의 세상 속으로 들어가 그들과 함께 살면서 봉사하던 중 인생의 절망적인 밑바닥을 경험하게 됩니다. 거기에 빠져서 자기 자신도 한때는 절망 가운데 헤메게 되었는데 이때 느끼고 체험한 것들을 모은 것이 바로 이 책입니다. 여기에서 그는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 그 사랑을 경험할 때에만 믿음이 생기고, 이렇게 생겨난 믿음은 위대한 힘을 가지고 자신의 인생을 이끌어갔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믿음은 또 하나의 신비입니다. 삼위일체 여호와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보내주시는 힘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고 고백하였던 것입니다. 믿음의 능력을 가지고 천국의 신비를 경험하시길 바랍니다.

3. 삼위일체의 신비는 영원한 소망입니다
 첫째는 여호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심을 바로 알게 합니다. 먼저는 여호와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을 알게 합니다. “의로우신 아버지여, 세상이 아버지를 알지 못해도 나는 아버지를 알았삽고, 저희도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줄 알았삽나이다...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저희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 아버지를 아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과 속성과 계획을 알고 천국을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인류 최대의 희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삼위일체 신비는 우리로 하여금 여호와 하나님에 대하여, 천국에 대하여 알게 하십니다.
 둘째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인류의 생명의 빛이심을 알게 합니다. 조이스 럽이라는 저술가가 한 영성(靈性) 세미나에 참석했습니다. 이 세미나에는 창문이나 문틈을 완전히 막아서 빛이 조금도 들어오지 못하도록 만든 방 안에 있게 하는 훈련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밝은 대낮이었지만 방 안에 형광등을 켠 후 문틈까지 구석 구석을 테이프로 봉했습니다. 그리고는 마지막으로 형광등까지 껐습니다. 아주 깜깜할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처럼 완벽하게 막아 놓았어도 어디에선가 태양빛이 흘러 들어오는 것이었습니다. 세상은 죄와 죽음으로 완전한 흑암의 세상입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은 어느 틈새에서든지 생명의 빛을 비추어 주십니다. 세상 사람들은 참 빛을 찾아 헤메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보내신 생명의 빛이십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세례 요한은 이 빛에 대하여 증거하러 왔다... ”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참 빛이십니다.
 셋째는 영원한 처소에 대한 희망을 알게 합니다.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나의 영광을 저희도 보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24절). ”
오늘은 삼위일체 교리를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우리는 정통적인 신앙에 기초하여 성부 여호와 하나님, 성자 여호와 하나님, 성령 여호와 하나님의 삼위일체를 고백합니다. 이 고백은 우리 신앙의 조화 즉 신앙의 균형을 교훈하고도 있습니다. 지나친 경건을 강조하는 성부적인 신앙, 지나친 희생과 헌신만을 강조하는 성자적 신앙, 지나친 은혜와 축복만을 강조하는 성령적 신앙도 모두 바람직하지는 않습니다. 조화있고 균형있는 삼위일체적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이 시대와 사회를 책임지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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