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위일체] 신앙의 삼위일체
본문
눈을 감고 밤길을 걸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만약 별 생각 없이 막 걷는다면 그 사람은 이쪽 저쪽을 왔다 갔다 하면서 앞으로 나갈 것입니다. 그러나 얼마 후에 그는 방향을 잃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그 밤에 자기는 꼭 똑바로 걸어가야 되겠다고 생각하고 걷는다면 그 사람은 왔다갔다하지는 않을지 몰라도 완만하게 삐뚜로 걸어가게 될 것입니다. 결국 어떤 생각을 가지고 걷든지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은 그들이 가야할 목적지로부터 점점 더 빗나갈 뿐이라고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은 보지 않고 길을 가기 때문이요, 보이지 않는 길을 가기 때문입니다. 인생의 길은 눈에 보이는 길이 아닙니다. 인생의 길을 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래서 우왕좌왕 하는 게 인생이요, 공연히 삐뚜로 나가게 되는 게 인생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는 똑바로 걸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눈을 뜨게 되면 자기가 어디로 왔는지를 알게 되면서 기가 막혀 할 것입니다.
사람이 돌을 전후로 걷기 시작하면서 자기가 살아온 시간만큼, 걷고 산다고 할 수 있습니다. 눈감고도 걸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똑바로 걷는다고 하는 문제는 다른 것입니다. 힘있게 걷는 것, 우와 하게 걷는 것, 자신 있게 걷는 것, 다 좋습니다. 그러나 올바른 방향으로 걷는 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우리가 언젠가 교회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고, 주님을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신앙 인이 되고, 성도의 삶을 살아갑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우리는 눈을 감고 걷는 자와 같이 우왕좌왕 하면서도 잘 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공연히, 완만하게 옆으로 빗나가고 있는데, 내가 바르게 간다고 하는 의지를 가졌기 때문에 바르게 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신앙의 각질이요, 형식적인 신앙 인이 되는 것입니다. 설령 이렇게 메마른 표현이 안 어울리는 펄펄 끊는 신앙의 모습이 있다 할지라도, 자기 열심에 도취되거나, 헛된 공명심일수도 있습니다.
초대 교회의 아름다우면서도 뜨거웠던 신앙, 자신의 모든 지위를 버리고 순교를 하면서도 예수를 믿었던 로마의 성도들, 그렇게 해서 이룬 신앙의 자유는 시간이 지나면서 공연히 빗나가는 모습을 나타냈습니다. 중세에 이르렀을 때, 그 신앙의 모습은 마땅히 가야 하는 모습과 너무나 멀리 떨어지게 된 것입니다. 존 위클리프를 비롯해서 존 휴스, 시에나의 버나드등 수많은 개혁자들이 목숨을 건 항쟁이 있었으며 마침내 1517년 10월 31일 지금부터 484년 전 마르틴 루터의 95 개항의 공개토록 제목은 종교개혁의 불을 붙인 것입니다. 이것은 감았던 눈을 뜨거나, 가렸던 수건을 벗겨내는 것만큼이나 엄청나 사실의 발견이었습니다. 그래서 단 2주만에 독일이, 4주만에 전 유럽에서 종교 개혁의 불길이 타오르게 된 것입니다. 오늘은 바로 그 개역의 의미가 퇴색되지 않도록 다시 마음에 새기고, 뿐만 아니라 진정한 의미의 발견이란 이 시간에도 끊임없이 내 신앙의 각질을 벗겨내고, 형식적인 종교인의 모습을 벗어나서 생명력 있고, 기쁨과 소망이 충만한 성도의 길을 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종교 개혁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을 어떻게 하자는 것인가 하는 것을 살펴보면서 오늘 우리의 신앙도 이에 맞춘다면 역시 개혁적인 신앙 인으로 오늘을 살아가고 있다고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종교 개혁은 무엇보다 먼저-,
1. 오직 성경이라는 것입니다.
중세 교회가 가장 크게 빗나간 것은 신앙의 토대를 오직 성경에 두지 않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성경과 동등한 권위를 가지는 규범들이, 유전들이 많아졌습니다. 뿐만 아니라 어떤 종교회의나 교황의 칙령이나 포고도 성경과 같은 권위를 가질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성경의 권위를 교회 즉, 종교회의가 부여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누가 인정함으로 그 권위가 인정되는 것이 아니고, 성경은 그 자체로써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으로 권위가 있으며, 그 어떤 것도 이와 같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과 동등 된 권위를 가지고, 성도의 신앙과 행위의 규범을 우리에게 줄 수는 없습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모든 탈무드의 글들이 성경과 같아야 하고, 모든 교황의 칙령이 말씀과 같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럴 수 없는 것입니다.
독일의 루터나, 프랑스의 칼뱅, 즈빙글리와 멜랑히톤등의 성경관은 오직 성경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성경만이 유일한 신앙과 행위의 법칙이라고 믿었습니다. 개혁주의 신앙의 성경 관은 오직 성경만이 살아 계신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고백하고 믿는 신앙입니다. 딤후3 :16 의 말씀과 같이 " 모든 성경은 여호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 성경 66권을 여호와 하나님 자신의 말씀으로 믿는 것, 이것이 성경의 계시성을 믿는 것입니다. 로마서 15장 4절 "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안위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라 " 성경이 선지자와 사도들에 의해서 기록되고 그 시대의 사람뿐만이 아니라 특히 오늘 우리를 위하여 기록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것, 이것이 성경의 영원성을 믿는 것입니다. 성경이 기록될 때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되었다는 믿는 것이 성경의 영감성, 성경이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으로 정확무오한 심판의 기준이 된다고 하는 성경의 무오성, 성경의 권위는 그 자체에 있고, 성경의 해석도 성경이 성경을 해석하고 있는 성경의 권위성, 우리가 오직 성경으로 를 부르짖는 것은, 바로 이렇게 성경의 계시성을 비롯해서, 영감성, 영원성, 무오성, 권위성 모든 것을 믿는 것입니다.
성경은 잘 쓰여진 인간의 어떤 교훈 집이나, 어떤 이들이 말하는 것처럼, 이스라엘의 역사책이 아닙니다. 잘 쓰여진 감동적인 소설책도 아닙니다. 살아있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며, 우리 신앙과 삶의 절대적인 기준입니다. 올바른 신앙은 늘 성경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노력가운데 세워질 수 있습니다. 때때로 교회의 어떤 정책이 성경보다 우위에 있고, 교회를 오래 다닌 사람이나 교역자의 말이 성경보다 앞서있을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신앙을 부단히 성경으로부터 점검해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진정한 의미를 따라서 살도록 해야 합니다. 교회와 성도가 함께 공연히 삐뚜로 나갈 수 있습니다. 눈을 뜨듯이 말씀을 바로 보아야 합니다.
2. 오직 은혜라는 것입니다.
이미 베드로가 베드로 전서 2장 9절에서 "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라 "고 하면서 우리 모두가 여호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만인이 제사장인 것을 선포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우리의 특권이 중세 교회에 가려졌습니다. 너무나 많은 장벽이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을 막았습니다. 우리에게 다른 자격이 있어야 하는 것처럼 말했습니다. 오직 은혜로 말미암는 것을 마치 아닌 것처럼 말했습니다. 선행이 있어야 하는 것처럼 말했습니다. 누구를 통해야만 하는 것처럼 말했습니다. 사죄의 권한을 가진 대리자가 가로막고, 성경을 읽고 해석할 수 있는 특권자가 가로막고, 이런 저런 이유로 인해서 많은 성도들은 오직 종교의 관습만을 물려받게 되었고, 기쁨과 환희가 있는 성도의 삶이 아니라 무거운 짐과 지켜야할 의무만 점점 늘어났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율법을 온전히 행할 수도 없거니와 선행은 결코 구원의 조건이 될 수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과 같이 "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여호와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 그렇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은혜주신 것입니다. 자랑치 못하게 함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무슨 교회를 하나 지어야 한다거나, 성지 순례를 해야 한다거나, 혹은 십자군 전쟁에 참여해야 한다거나 하는 것은 모두 어림없는 말들입니다. 면죄부가 무엇입니까 지옥에 있는 사람을 끌어올리는 것입니다. 만약 종교개혁 없이 조금만 더 흘렀으면 아마 천국의 황금 맨션도 분양되었을 것입니다.
은혜는 깨닫는 진리이기보다는 느껴야 하는 진리인 것 같습니다. 인간은 자꾸 자신의 작은 선행에 매달리려고 합니다. 하지만, 인간의 선행에 감동해서 하나니은 인생을 구원하시지 않았습니다. 오직 우리가 다 측량할 수 없는 은혜, 너무 커서 은혜가 은혜인줄 모를 만큼 큰 은혜, 그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가 구원의 자녀가 된 것이며, 그 은혜에 의탁되어서 오늘도 우리가 신앙 인으로 설 수 있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자칫 우리는 은혜를 미루어 놓고, 행위를 강요하는 신앙의 형태를 요구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교묘하게 빗나가는 것입니다. 되는 대로 살아야 한다고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가 흘러 넘쳐서 순종이 되는 삶, 은혜가 흘러 넘쳐서 감사가 마르지 않는 삶, 은혜가 넘쳐서 사랑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삶, 우리의 삶은 그런 삶이 되어야 합니다. 오직 은혜, 그 은혜로 살아야 합니다.
3. 오직 믿음이어야 합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것은 루터의 개혁 표어였습니다. " 복음에는 여호와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 로마서 1장 17절의 말씀, "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여호와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 히브리서 11장 6절 말씀, " 믿음이 없어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미음에 견고하여져서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이것을 저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 " 로마서 4장 20 -22절 말씀, 오직 믿음이 우리의 사고이며, 삶의 방식이고, 미래의 소망입니다.
오늘 본문 에베소서 2장 8-9절의 말씀과 로마서 1장 17절의 말씀을 한번 대조해서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 할 때 그 은혜는 무엇을 가르칩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그리스도로부터 우리에게 들려진 구원의 복된 소식입니다. " 복음에는 여호와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 할 때의 복음은 무엇을 가르칩니까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신 여호와 하나님의 그 은혜를 말하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고 했습니다. 어디에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그러므로 우리가 그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여호와 하나님께 이르게 되나니 오직 의인은, 즉 믿음의 사람은 예수 안에, 그와 함께 산다는 말씀입니다. 에베소서의 말씀에서 구원은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기에 아무도 자랑치 못한다고 하는 것도 오직 예수 외에 구원을 얻을 만한 천하에 다른 이름을 주신 일이 없기에 오직 예수로만 구원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예수를 우리가 만들거나 추대한 것이 아니고 여호와 하나님이 자신의 독생자를 주신 것 그것이 은혜이고, 그것을 믿는 믿음이 우리의 신앙의 핵입니다.
세상에 모든 것이 살아가는 방식이 있을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들은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보시기에는 이 시대가 믿음을 잃어간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이번 주도 아이들이 바캉스를 맞았습니다. 아마 무슨 바캉스인지 이름은 알아도 그 의미를 아는 사람은 점점 없어져갈 것입니다. 벌써 부활절 바캉스는 봄방학으로, 성탄절 바캉스는 겨울 바캉스로, 투쌩 바캉스는 가을 바캉스가 될 것입니다. 나라 전체가, 시대 전체가 믿음을 잃어 가는 시대를 맞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살려고 하지 않고, 이성으로 과학으로 합리성으로, 논리적으로, 계산적으로, 감각적으로 살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우리는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내가 죄 없는 의인이라는 것이 아니라 구별된 백성이기에 의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이 시대에, 똑똑한 사람, 돈 많은 사람, 배경 좋은 사람보다 믿음의 사람을 찾으십니다. 오직 믿음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종교 개혁의 명제가 오직 성경, 오직 은혜, 오직 믿음이었다면 이것은 바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신앙의 명제이기도 한 것입니다. 시대의 흐름에 녹슬지 않고, 또 병들지 않고 건강하며, 늘 푸르른 생명력을 갖는 신앙 인에게는 이 성경과 은혜와 믿음이 신앙의 삼위일체가 되어야 합니다. 이 세 가지가 늘 우리의 신앙을 일깨운다면, 개혁신앙의 후손답게 이 시대를 살아가는 것이리라 생각합니다. 다시 한번 종교 개혁주일을 맞이하면서 여러분의 신앙이 새로워 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사람이 돌을 전후로 걷기 시작하면서 자기가 살아온 시간만큼, 걷고 산다고 할 수 있습니다. 눈감고도 걸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똑바로 걷는다고 하는 문제는 다른 것입니다. 힘있게 걷는 것, 우와 하게 걷는 것, 자신 있게 걷는 것, 다 좋습니다. 그러나 올바른 방향으로 걷는 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우리가 언젠가 교회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고, 주님을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신앙 인이 되고, 성도의 삶을 살아갑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우리는 눈을 감고 걷는 자와 같이 우왕좌왕 하면서도 잘 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공연히, 완만하게 옆으로 빗나가고 있는데, 내가 바르게 간다고 하는 의지를 가졌기 때문에 바르게 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신앙의 각질이요, 형식적인 신앙 인이 되는 것입니다. 설령 이렇게 메마른 표현이 안 어울리는 펄펄 끊는 신앙의 모습이 있다 할지라도, 자기 열심에 도취되거나, 헛된 공명심일수도 있습니다.
초대 교회의 아름다우면서도 뜨거웠던 신앙, 자신의 모든 지위를 버리고 순교를 하면서도 예수를 믿었던 로마의 성도들, 그렇게 해서 이룬 신앙의 자유는 시간이 지나면서 공연히 빗나가는 모습을 나타냈습니다. 중세에 이르렀을 때, 그 신앙의 모습은 마땅히 가야 하는 모습과 너무나 멀리 떨어지게 된 것입니다. 존 위클리프를 비롯해서 존 휴스, 시에나의 버나드등 수많은 개혁자들이 목숨을 건 항쟁이 있었으며 마침내 1517년 10월 31일 지금부터 484년 전 마르틴 루터의 95 개항의 공개토록 제목은 종교개혁의 불을 붙인 것입니다. 이것은 감았던 눈을 뜨거나, 가렸던 수건을 벗겨내는 것만큼이나 엄청나 사실의 발견이었습니다. 그래서 단 2주만에 독일이, 4주만에 전 유럽에서 종교 개혁의 불길이 타오르게 된 것입니다. 오늘은 바로 그 개역의 의미가 퇴색되지 않도록 다시 마음에 새기고, 뿐만 아니라 진정한 의미의 발견이란 이 시간에도 끊임없이 내 신앙의 각질을 벗겨내고, 형식적인 종교인의 모습을 벗어나서 생명력 있고, 기쁨과 소망이 충만한 성도의 길을 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종교 개혁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을 어떻게 하자는 것인가 하는 것을 살펴보면서 오늘 우리의 신앙도 이에 맞춘다면 역시 개혁적인 신앙 인으로 오늘을 살아가고 있다고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종교 개혁은 무엇보다 먼저-,
1. 오직 성경이라는 것입니다.
중세 교회가 가장 크게 빗나간 것은 신앙의 토대를 오직 성경에 두지 않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성경과 동등한 권위를 가지는 규범들이, 유전들이 많아졌습니다. 뿐만 아니라 어떤 종교회의나 교황의 칙령이나 포고도 성경과 같은 권위를 가질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성경의 권위를 교회 즉, 종교회의가 부여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누가 인정함으로 그 권위가 인정되는 것이 아니고, 성경은 그 자체로써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으로 권위가 있으며, 그 어떤 것도 이와 같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과 동등 된 권위를 가지고, 성도의 신앙과 행위의 규범을 우리에게 줄 수는 없습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모든 탈무드의 글들이 성경과 같아야 하고, 모든 교황의 칙령이 말씀과 같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럴 수 없는 것입니다.
독일의 루터나, 프랑스의 칼뱅, 즈빙글리와 멜랑히톤등의 성경관은 오직 성경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성경만이 유일한 신앙과 행위의 법칙이라고 믿었습니다. 개혁주의 신앙의 성경 관은 오직 성경만이 살아 계신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고백하고 믿는 신앙입니다. 딤후3 :16 의 말씀과 같이 " 모든 성경은 여호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 성경 66권을 여호와 하나님 자신의 말씀으로 믿는 것, 이것이 성경의 계시성을 믿는 것입니다. 로마서 15장 4절 "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안위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라 " 성경이 선지자와 사도들에 의해서 기록되고 그 시대의 사람뿐만이 아니라 특히 오늘 우리를 위하여 기록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것, 이것이 성경의 영원성을 믿는 것입니다. 성경이 기록될 때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되었다는 믿는 것이 성경의 영감성, 성경이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으로 정확무오한 심판의 기준이 된다고 하는 성경의 무오성, 성경의 권위는 그 자체에 있고, 성경의 해석도 성경이 성경을 해석하고 있는 성경의 권위성, 우리가 오직 성경으로 를 부르짖는 것은, 바로 이렇게 성경의 계시성을 비롯해서, 영감성, 영원성, 무오성, 권위성 모든 것을 믿는 것입니다.
성경은 잘 쓰여진 인간의 어떤 교훈 집이나, 어떤 이들이 말하는 것처럼, 이스라엘의 역사책이 아닙니다. 잘 쓰여진 감동적인 소설책도 아닙니다. 살아있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며, 우리 신앙과 삶의 절대적인 기준입니다. 올바른 신앙은 늘 성경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노력가운데 세워질 수 있습니다. 때때로 교회의 어떤 정책이 성경보다 우위에 있고, 교회를 오래 다닌 사람이나 교역자의 말이 성경보다 앞서있을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신앙을 부단히 성경으로부터 점검해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진정한 의미를 따라서 살도록 해야 합니다. 교회와 성도가 함께 공연히 삐뚜로 나갈 수 있습니다. 눈을 뜨듯이 말씀을 바로 보아야 합니다.
2. 오직 은혜라는 것입니다.
이미 베드로가 베드로 전서 2장 9절에서 "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라 "고 하면서 우리 모두가 여호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만인이 제사장인 것을 선포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우리의 특권이 중세 교회에 가려졌습니다. 너무나 많은 장벽이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을 막았습니다. 우리에게 다른 자격이 있어야 하는 것처럼 말했습니다. 오직 은혜로 말미암는 것을 마치 아닌 것처럼 말했습니다. 선행이 있어야 하는 것처럼 말했습니다. 누구를 통해야만 하는 것처럼 말했습니다. 사죄의 권한을 가진 대리자가 가로막고, 성경을 읽고 해석할 수 있는 특권자가 가로막고, 이런 저런 이유로 인해서 많은 성도들은 오직 종교의 관습만을 물려받게 되었고, 기쁨과 환희가 있는 성도의 삶이 아니라 무거운 짐과 지켜야할 의무만 점점 늘어났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율법을 온전히 행할 수도 없거니와 선행은 결코 구원의 조건이 될 수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과 같이 "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여호와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 그렇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은혜주신 것입니다. 자랑치 못하게 함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무슨 교회를 하나 지어야 한다거나, 성지 순례를 해야 한다거나, 혹은 십자군 전쟁에 참여해야 한다거나 하는 것은 모두 어림없는 말들입니다. 면죄부가 무엇입니까 지옥에 있는 사람을 끌어올리는 것입니다. 만약 종교개혁 없이 조금만 더 흘렀으면 아마 천국의 황금 맨션도 분양되었을 것입니다.
은혜는 깨닫는 진리이기보다는 느껴야 하는 진리인 것 같습니다. 인간은 자꾸 자신의 작은 선행에 매달리려고 합니다. 하지만, 인간의 선행에 감동해서 하나니은 인생을 구원하시지 않았습니다. 오직 우리가 다 측량할 수 없는 은혜, 너무 커서 은혜가 은혜인줄 모를 만큼 큰 은혜, 그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가 구원의 자녀가 된 것이며, 그 은혜에 의탁되어서 오늘도 우리가 신앙 인으로 설 수 있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자칫 우리는 은혜를 미루어 놓고, 행위를 강요하는 신앙의 형태를 요구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교묘하게 빗나가는 것입니다. 되는 대로 살아야 한다고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가 흘러 넘쳐서 순종이 되는 삶, 은혜가 흘러 넘쳐서 감사가 마르지 않는 삶, 은혜가 넘쳐서 사랑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삶, 우리의 삶은 그런 삶이 되어야 합니다. 오직 은혜, 그 은혜로 살아야 합니다.
3. 오직 믿음이어야 합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것은 루터의 개혁 표어였습니다. " 복음에는 여호와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 로마서 1장 17절의 말씀, "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여호와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 히브리서 11장 6절 말씀, " 믿음이 없어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미음에 견고하여져서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이것을 저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 " 로마서 4장 20 -22절 말씀, 오직 믿음이 우리의 사고이며, 삶의 방식이고, 미래의 소망입니다.
오늘 본문 에베소서 2장 8-9절의 말씀과 로마서 1장 17절의 말씀을 한번 대조해서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 할 때 그 은혜는 무엇을 가르칩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그리스도로부터 우리에게 들려진 구원의 복된 소식입니다. " 복음에는 여호와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 할 때의 복음은 무엇을 가르칩니까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신 여호와 하나님의 그 은혜를 말하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고 했습니다. 어디에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그러므로 우리가 그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여호와 하나님께 이르게 되나니 오직 의인은, 즉 믿음의 사람은 예수 안에, 그와 함께 산다는 말씀입니다. 에베소서의 말씀에서 구원은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기에 아무도 자랑치 못한다고 하는 것도 오직 예수 외에 구원을 얻을 만한 천하에 다른 이름을 주신 일이 없기에 오직 예수로만 구원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예수를 우리가 만들거나 추대한 것이 아니고 여호와 하나님이 자신의 독생자를 주신 것 그것이 은혜이고, 그것을 믿는 믿음이 우리의 신앙의 핵입니다.
세상에 모든 것이 살아가는 방식이 있을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들은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보시기에는 이 시대가 믿음을 잃어간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이번 주도 아이들이 바캉스를 맞았습니다. 아마 무슨 바캉스인지 이름은 알아도 그 의미를 아는 사람은 점점 없어져갈 것입니다. 벌써 부활절 바캉스는 봄방학으로, 성탄절 바캉스는 겨울 바캉스로, 투쌩 바캉스는 가을 바캉스가 될 것입니다. 나라 전체가, 시대 전체가 믿음을 잃어 가는 시대를 맞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살려고 하지 않고, 이성으로 과학으로 합리성으로, 논리적으로, 계산적으로, 감각적으로 살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우리는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내가 죄 없는 의인이라는 것이 아니라 구별된 백성이기에 의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이 시대에, 똑똑한 사람, 돈 많은 사람, 배경 좋은 사람보다 믿음의 사람을 찾으십니다. 오직 믿음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종교 개혁의 명제가 오직 성경, 오직 은혜, 오직 믿음이었다면 이것은 바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신앙의 명제이기도 한 것입니다. 시대의 흐름에 녹슬지 않고, 또 병들지 않고 건강하며, 늘 푸르른 생명력을 갖는 신앙 인에게는 이 성경과 은혜와 믿음이 신앙의 삼위일체가 되어야 합니다. 이 세 가지가 늘 우리의 신앙을 일깨운다면, 개혁신앙의 후손답게 이 시대를 살아가는 것이리라 생각합니다. 다시 한번 종교 개혁주일을 맞이하면서 여러분의 신앙이 새로워 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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