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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 가시 면류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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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히며 가시관을 엮어 그 머리에 씌우고 갈대를 그 오른손에 들리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희롱하여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 그에게 침 뱉고 갈대를 빼앗아 그의 머리를 치더라”(28-30)
사순절 다섯째주일입니다. 다음주일은 종려주일이고 한 주간 동안을 고난주간으로 지킨 후에 부활주일을 맞이하게 됩니다. 사순절 절기를 보내면서 우리를 위해서 고난당하신 주님께 감사드리면서, 주님의 고난을 생각하며 온 교우가 한 덩어리가 되어 교회를 섬기겠다는 다짐이 새롭게 이루어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시간에는 예수님이 가시 면류관을 쓰시고 고난당하신 것을 중심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로마 군병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그의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혔습니다. 가시관을 엮어 그 머리에 씌우고, 갈대를 그 오른손에 들려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희롱하며 침을 뱉고 갈대를 빼앗아 그의 머리를 때리면서 끌고 갔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자칭 왕이라 생각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만들어 놓고 조롱한 것입니다.
무지한 그들이 주님의 머리에 관을 씌웠지만 그것은 그들이 그리스도를 왕으로 인정해서 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손에 갈대를 드렸지만 그것은 진정한 왕권을 인정하는 상아로 만든 홀이 아니라 갈대로 만든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때리고, 벗기고, 희롱하고, 끌고 가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파렴치범에게 가하는 형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을 위해서 파렴치범 취급을 받으셨습니다.
이러한 모습을 머릿속에 그려보면 예수님께서는 당해서는 안 될 온갖 굴욕과 멸시와 천대를 다 받으셨음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은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로서 금면류관을 쓰셔야 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희롱과 수치를 당하셔야 할 분이 아닙니다. 더구나 주님에게 침을 뱉고 매를 때리는 일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이러한 수모를 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31절에 보면 이처럼 “희롱을 다 한 후에 홍포를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혀 십자가에 못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고 하였습니다. 주님께서는 참을 수 없는 수모를 당하신 후에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주님이 왜 가시 면류관을 쓰셨습니까 왜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셨습니까 바로 나 때문입니다. 우리들 모두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확실히 깨달아야 합니다. 주님께 죄송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진심으로 감사드려야 합니다.
이 세상에는 대신할 수 있는 것이 있고 대신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심부름이나 일은 다른 사람이 대신해서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먹는 것, 쉬는 것, 결혼하는 것, 죽는 것은 대신할 수 없습니다. 특히 고통과 관계된 인생문제일수록 대신하기가 어렵습니다. 자식을 대신해서 부모가 아플 수 없습니다. 남편을 대신해서 아내가 죽을 수도 없습니다.
더욱이 죄의 문제는 누구도 대신할 수가 없습니다. 자신이 지은 죄 값은 자신이 치러야 합니다. 성경은 “죄 값은 사망이라”(롬6:23) 하였습니다. 그러면 우리를 사망으로 이끌어가는 이 죄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습니까
성경에는 대속의 방법에 대하여 말씀해 주셨습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짐승을 잡아 속죄의 제사를 드림으로 지은 죄를 사함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매년 반복되는 제사이기 때문에 불완전한 방법입니다.
신약성경을 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단번에 우리의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이 예수님을 믿으면 죄사함을 받고 구원받는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요3:16, 행16:31, 엡2:8)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대속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질고와 슬픔과 죄를 대신하기 위하여 찔리고, 상처받고, 매를 맞고, 희롱을 받으시고 마침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입니다. (사53:4-6) 그래서 우리가 죄의 용서를 받고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쓰신 가시 면류관은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먼저 가시 면류관은 희롱을 의미합니다. 마라톤 선수가 우승하면 월계수로 만든 승리의 면류관을 머리에 쓰게 됩니다. 이것은 영광의 면류관입니다. 주님은 이 세상을 구원하시려고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 전에 가시 면류관을 쓰셨습니다. 우리 주님에게 가시 면류관을 쓰도록 한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것은 상상도 못할 멸시요, 굴욕이요, 조롱이었습니다.
또한 가시 면류관은 고통을 의미합니다. 가시로 만든 면류관을 쓰신 그의 머리는 상처를 입게 되고 많은 피를 흘려야 했습니다. 얼굴이 창백해지고 피로 얼룩졌으며 퉁퉁 부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주님의 모습을 생각하면 머리와 마음이 아프고 피로해지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온전히 우리 때문에 이러한 고통을 당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고통을 무엇으로 표현할 수가 있겠습니까 미켈란젤로나 라파엘도 이 고통스러운 장면을 그리라고 하면 아마 포기하고 물러설 것입니다. 천사장이라도 우리의 죄 때문에 수욕 당하시는 주님의 슬픔을 다 노래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고난은 귀로 들으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우리 마음 깊은 곳에서 명상해야 합니다. 뜨거운 사랑의 눈으로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는 말할 수 없는 아픔과 희롱을 우리들을 위해서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때에 스스로를 구원하기 위하여 하늘의 열두 천사를 동원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의 불꽃같은 눈초리로 단숨에 로마 병정들을 없애 버릴 수도 있었습니다. 침묵하시던 그의 입술에서 한 마디만 발하시면 빌라도의 궁전을 송두리째 흔들어 버릴 수도 있는 능력이 있는 분이었습니다. 주님께서 마음만 먹으시면 우유부단한 통치자와 악당들을 산 채로 땅 속에 매장시킬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희롱과 고통을 끝까지 참고 당하셨습니다.
이러한 주님의 인내하시는 모습은 무지한 군병들에게까지도 감동을 주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본문을 기록한 마태는 주님이 가시관을 쓰시고 고통 당하시던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목격자가 있었습니다. 마태는 이러한 목격자들을 통해서 생생한 증언을 듣고 이 장면을 기록한 것입니다. 그 사람은 “이는 진실로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54)라고 말한 백부장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가 누구인가 하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분명한 것은 이 사건의 내용이 목격자에 의해서 전해졌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 가시로 만든 면류관을 씌우는 것은 옛날 로마 군병들만 저지르는 잘못이 아닙니다. 오늘날에도 바로 우리가 주님께 가시로 만든 면류관을 씌울 수가 있습니다. 주님의 뜻을 부인하는 모든 사람들이 바로 이러한 죄를 범하고 있습니다. 자기의 지혜를 자랑하는 사람들이 주님의 인격과 교리에 대해서 회의적인 태도를 취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주님의 머리에 가시 면류관을 만들어 씌우는 사람들입니다. 복음을 제대로 믿지 못하는 사람들도 이런 부류에 해당하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을 위해서 제대로 일하지 않고 성도 섬기는 일에 열심을 다하지 못하면 주님 머리에 가시관을 씌우는 사람입니다.
만일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바로 알았다면 가시 면류관 대신에 진주보다 더 값진 존경과 사랑의 금강석으로 만든 왕관을 씌워 드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예수님을 잘 몰랐기 때문에 가시로 면류관을 만들어 예수님께 씌우고 그것을 잘한 일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우리의 삶에서 예수님을 주님과 왕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우리의 불경건한 거짓 고백을 추궁 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면 그분만을 섬겨야 합니다. 그리스도가 왕이시라면 그분께 절대 복종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왕이라는 사실을 믿지 않으면 아무 면류관도 씌우려 하지 말아야 합니다. 거짓된 존경심과 명목상의 충성이라는 구실로 또 다시 주님을 욕되게 해서는 안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가시로 만든 면류관을 쓰신 예수님을 통회의 눈물 없이는 바라 볼 수 가 없습니다. 그분의 모습은 주님의 일을 하다가 당하는 수치가 아무리 크다 할지라도 낙심하지 않고 견딜 수 있는 큰 용기를 우리들에게 불어넣어 줍니다. 우리가 어떠한 어려움을 당할 때, 견디기가 힘든 일을 겪을 때 가시 면류관을 쓰신 주님을 바라보면 모든 불만과 고민을 해결할 수 있습니다. 주님이 당하신 고난과 수치는 우리와 비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에게도 속상하고 자존심이 상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가시관을 쓰신 주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어려운 일을 당할 때마다 벗기고, 때리고, 희롱하고 끌고 가도 말이 없으셨던 주님, 홍포를 입히고 가시관을 머리에 씌워도 침묵하시던 주님, 침 뱉고 조롱해도 초연하시던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들에게는 또한 많은 상처가 있습니다. 주님이 쓰신 가시 면류관은 우리의 불평도, 근심도, 허영도, 욕심도, 불만도 모두 치료해 주십니다. 우리들이 이 가시 면류관을 잘 쓰면 마지막엔 영광의 면류관이 기다립니다. 우리 몫의 가시관을 잘 써서 마지막에 의의 면류관, 생명의 면류관, 영광의 면류관을 쓰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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