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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 예수를 부인한 베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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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목요일, 함께 신학교에서 공부했던 목사님의 사모님이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고 급히 대구로 내려갔습니다. 아직 젊으신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여호와 하나님께 부름을 받았다는 사실에 대해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좋을지 함께 공부했던 목사님들과 그 밤에 많은 얘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그 곳에 모인 목사님들 중에는 신학교를 졸업하고 처음 만나는 분들도 계셨습니다. 그러니까 벌써 10년이란 세월이 훌쩍 지나갔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분들의 이름을 모두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제게 특별히 사람들의 이름을 잘 외우는 은사가 있는 것도 아닌데 어쨌든 그 날 그곳에 오신 분들의 이름은 모두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몇 몇 분들은 저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셨습니다. 아마 제가 신학교 다니던 시절에 별 볼일 없는 사람이었던 모양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은 별 볼일 있는 사람이니 알아달라는 말은 아닙니다. 사실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으니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 모릅니다. 하지만 신학교 다니던 시절 전혀 친분관계가 없었던 것도 아닌데 10년이란 세월 때문에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 조금은 서운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저도 같이 잊어버렸다면 몰라도 저는 분명히 그분들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위를 돌아보면 이보다 더 심한 경우가 있습니다. 즉 어제까지만 해도 죽고 못산다고 하던 사람들이 하루밤 사이에 돌변해서 서로를 모른다고 말하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사랑합니다' '당신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습니다' '당신 없는 세상은 앙꼬 없는 진빵이요, 오아시스 없는 사막입니다'라고 말하더니 하루밤 사이에 돌변해서 '죽이네 살리네'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이런 경우는 쌍방간의 문제일 것입니다. 그러나 일방적으로 거절당하거나 부인되어지는 경우라면 그것은 정말 견디기 어려운 일이 될 것입니다. 그것도 오랜 시간동안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바로 어제까지 죽고 못산다 하던 사람이 하루밤 사이에 돌변해 '모른다' '당신이 도대체 누구냐'라고 일방적으로 선언한다면 그 말을 듣는 상대방의 심정이 어떠하겠습니까
오늘 본문이 이와같은 경우입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당신 없이는 못삽니다. ' '절대 당신을 버릴 수 없습니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당신을 따라가겠습니다'라고 말했던 한 사람이 하루밤사이에 '모릅니다' '알지 못합니다' '나는 그를 저주합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가 누굽니까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입니다. 먼저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69절에 "베드로가 바깥뜰에 앉았더니 한 비자가 나아와 가로되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라고 했습니다. 지금 베드로는 대제사장 가야바의 집 뜰에 앉아 있습니다. 그때 한 비자로부터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지 않았느냐'하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여기서부터 주님에 대한 베드로의 부인이 시작됩니다. 사실 우리는 지금까지 베드로가 주님을 멀찍이 좇았다는 것으로 인해 비난을 했습니다. 물론 베드로의 행동은 분명 옳지 않았습니다. 왜 비겁하게 예수님을 멀찍이 좇은 것입니까 좀더 바짝 좇을 수는 없었을까요 자신의 말에 책임있는 행동을 하기가 그렇게 어려웠던 것일까요 예수님의 수제자라면 수제자다운 면모를 보여주는 것이 마땅하지 않습니까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서 베드로의 실수는 예수님을 멀찍이 좇은데 있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어떤 분은 베드로가 바깥뜰에 앉은 것이 문제였다고 말씀하시는 분도 있습니다. 물론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즉 그곳에 들어가 앉지 않았더라면 그런 실수를 범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충분히 일리 있는 말입니다. 그러나 근본적인 문제는 그분을 좇은 것, 그 자체에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베드로도 차라리 다른 제자들처럼 도망가는 것이 훨씬 나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이미 베드로에게 예수님을 부인할 것이라고 경고하셨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목자를 치면 양이 흩어지리라"는 스가랴서의 말씀을 인용해서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르지 않게 될 것임을 분명히 말씀하신 바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베드로가 주님을 좇았던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다른 제자들은 주님의 말씀대로 흩어져 버렸는데 굳이 주님을 따라간 이유가 무엇일까요 어쩌면 베드로의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었던 교만한 마음 때문은 아닐런지요 그래도 자신은 뭔가 조금이라도 다르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 때문에 멀찍이나마 주를 따라간 것이 아닐까요
그래서 주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베드로에게 이런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라'고 당부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깨어 기도하기는커녕 잠들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결국 유혹을 떨쳐버리지 못한 채 가지 말아야 할 장소에 가서 자신의 인생에 가장 치욕적인 실수를 범하고 맙니다. 그가 깨어 기도했더라면 그런 교만한 유혹에 빠지지 않았을 것인데 그는 시험에 빠졌고 그 시험을 이겨내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주님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들에게도 베드로와 같은 교만한 마음이 있습니다. 자신은 뭔가 조금이라도 다르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에 가지 말아야 할 곳에, 혹은 하지 말아야 할 것에 발을 내 딛는 경우가 있습니다. "신앙생활 꼭 그렇게 할 필요가 있나 적당하게 술 한잔 마셔도 취하지 않으면 되는 거지"라든가 "술좌석에 가도 음료수만 마시면 되는 거지, 굳이 나 한사람 때문에 분위기를 깰 필요가 있나"라든가 "노래방가서 찬송가나 복음송 부르면 될 것 아닌가"하는 내용들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아직도 저에게 풀리지 않는 하나의 미스터리입니다.
찬송가나 복음송 부를 것 같으면 무엇 때문에 노래방에 갑니까 돈 내고 그곳에 가서 부를 이유가 무엇입니까 분위기 때문이라구요 찬송가 부르고, 복음송 부르는데 교회보다 더 좋은 분위기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렇다고 앞으로 노래방가서 찬송가 대신에 유행가를 부르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그런 생각이나 행동이 나로 하여금 베드로와 같은 실수로 이어지게 하는 작은 도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베드로는 주님의 말씀과는 상관없이 자신의 믿음과 능력을 확신하여 끝까지 주께 충성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가지 말아야 할 곳에 가고 말았습니다. 차라리 도망을 쳤더라면 나았을 것을 자신의 어설픈 인간적 고집과 교만이 결국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치욕적인 오점을 남기고 말았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자신의 스승인 예수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여호와 하나님이 아들이시니이다'라는 고백을 부끄럽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우리 자신의 믿음을 너무 과신해서는 안됩니다. "이런 것쯤이야 믿음으로 충분히 극복할 수 있어"라고 자신을 과신하면 안됩니다. 그래도 나는 남보다 조금 더 나을 것이라는 교만한 생각을 가져서도 안됩니다. 우리가 의지할 것은 오직 주의 말씀뿐입니다. 인간적인 생각과 과신은 나를 더욱 궁지로 몰아갈 뿐입니다. 인간적인 충성이 성공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설령 주위사람들에게 성공한 듯 보여질는지는 모르겠지만 결국은 실패로 돌아가고 맙니다. 그러므로 그런 것을 과신할 것이 아니라 주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자세가 우리들에게 필요합니다.
베드로에게 있어서 문제는 단순히 멀찍이 좇았다는데 있지 않았습니다. 뜰에 앉았다는데 있는 것도 아닙니다. 더 중요한 것은 그가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멀찍이 따라가고 있다면 그것은 비겁한 행동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 속에 섞여 있으면 신앙의 위기를 맞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에 앞서 근본적인 문제는 주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에 있습니다.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다"는 비자의 말에 대해 베드로의 대답은 무엇이었습니까 70절에 "베드로가 모든 사람 앞에서 부인하여 가로되 나는 네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겠노라 하며"라고 했습니다. 비자의 질문은 어떤 확실한 증거를 가졌다거나 베드로를 고발하기 위해 던지는 질문이라기 보다는 지나가는 말로 한 듯 보여집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지나가는 듯한 질문에 대해서도 몹시 당황하는 빛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급기야 모든 사람 앞에서 주를 부인하고 말았습니다.
언젠가 서머나 교회의 감독이었던 폴리갑에 대해 말씀을 드린 적이 있었습니다. 폴리갑은 '예수를 부인하면 살려주겠다'고 말하는 말에 '내 평생 주님은 나를 한번도 실망시키신 일이 없는데 어찌하여 내가 주를 부인할 수 있겠느냐'라고 말하며 장엄하게 화형을 당했습니다. 그런가하면 가깝게는 주기철 목사님이나 손양원 목사님 같은 분들은 모두 심한 고문을 받으시다가 순교를 당하셨습니다.
차라리 베드로가 견딜 수 없는 고문을 당하다가 어쩔 수 없이 주를 부인했다거나, 순교 당할 만한 위급한 상황에서 예수를 부인했더라면 그래도 동정이라도 받을 수 있었을텐데 지금은 그런 상황도 아닙니다. 비자가 지나가는 말로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베드로는 당황을 해서 주를 부인하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인간적인 열심이나 충성이 얼마나 무력한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입니다.
이 당시 베드로가 예수의 제자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얼마나 되었을까요 더구나 지금 대제사장 가야바의 집에 모인 사람들은 예수를 죽이려는 사람들인데 예수에 대해 모든 것을 파악하고 있지 않았겠습니까 그렇다면 예수를 따르던 무리가 누구며, 몇 명의 제자를 거느리고 있고, 그 정도는 이미 파악되고도 남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베드로가 '예수를 모른다'할 때 그 말을 믿을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베드로는 빤히 들여다보이는 거짓말을 하고 말았습니다. 차라리 가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을, 다른 제자들처럼 도망을 갔으면 좋았을 것을, 인간적인 열심 때문에, 자신의 교만한 생각 때문에 멀찍이나마 주를 따라갔다가 너무도 연약하게 무너지는 베드로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무기력한 모습은 한번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또다시 그에게 질문이 던져집니다.
71절에 "앞문까지 나아가니다른 비자가 저를 보고 거기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되 이 사람은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매"라고 했습니다. 아마 베드로는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한 자신이 부끄럽게 여겨졌을 것입니다. 그래서 황급히 그 자리를 빠져나가는데 또 다시 말합니다. '이 사람은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다'라고 말입니다. 예수와 함께 있었다는 사실에 대해 한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들었습니다. 만약 여러분에게 누군가가 '너 예수 믿는 사람이지'라고 말한다면 여러분들은 어떤 생각을 하십니까
교회신문과 홈페이지 열린 마당에 제가 운동하는 얘기를 계속 싣고 있습니다. 이미 읽으셨겠지만 한번은 운동장에서 어떤 분이 저에게 '아저씨'라고 불렀습니다. 저는 신학교 재학시절부터 지금까지 '아저씨'라는 호칭을 들어본 일이 별로 없습니다. 신학생 시절엔 언제나 '전도사님'으로 불려졌고, 목사가 되어서는 항상 '목사님'으로 불려졌습니다. 그런데 운동 중에 어떤 분이 저에게 '아저씨'라고 해서 저는 저 아닌 다른 사람이 뒤에 따라오는 줄 알고 뒤를 돌아본 일이 있습니다. 저는 '아저씨'라는 호칭에 별로 익숙해 있지 못합니다.
그런데 제가 제일 기분이 좋을 때가 언제인지 아십니까 저를 한번도 본 적이 없는 분이 처음 저를 보면서 하시는 말씀이 '혹 목사님 아니십니까' 라고 말할 때입니다. 목사를 목사로 봐주는 것이 뭐 그리 기쁜 일이냐 라고 반문 하실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저를 목사로 제대로 봐주는 것보다 즐겁고 신나는 일은 없습니다. 만약 누군가가 여러분에게 '당신 예수 믿는 사람이지'라고 말한다면 여러분은 어떤 생각을 하십니까 "앗! 들켰구나"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나를 제대로 알아주는구나"하는 생각이 드십니까
요즘은 그런 말을 들어본 적이 없지만 과거엔 예수 믿는 사람을 향해 '예수쟁이'라는 말을 많이 했습니다. 해석을 하면 '예수에 미친 사람'이란 뜻이기도 합니다. '예수에 미친 사람' 얼마나 듣기 좋습니까 영광스러운 별명이 아닙니까 만약 여러분에게 '너 예수쟁이지'라고 말한다면 영광스럽게 생각하시겠습니까 아니면 버럭 화를 내시겠습니까 아니면 창피해서 그 자리를 피해버리시겠습니까 예수 믿는 사람이면 당연히 예수 믿는 냄새가 나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것을 거부한다면 문제가 있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아주 작은 문제지만 밖에서 식사시간에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이 종 종 있습니다. 직장에서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을 드러내기 싫어하여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혹 여기에 있는 분들 중에 제 말에 찔림이 있는 분들이 있으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분들에게는 문제가 있습니다. 어떤 문제입니까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에 대해 떳떳하게 생각하지 못하는 문제입니다. 아니 영적으로 단단히 병에 걸려 있다는 점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일 것을 나타내는 것은 자랑스러운 일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거부하거나 자랑스럽게 생각하지 못한다면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이 자리에서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인 것을 자랑하고 계십니까 아니면 사람들이 내가 예수 믿는 것을 알게 될까봐 조마조마 하십니까 만약 조마조마하다면 그 이유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혹 내가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 떳떳치 못한 행동을 하고 있기 때문은 아닙니까 예수 믿는다고 말하면서 내가 본을 보이지 못하는 까닭에 다른 사람들이 알게 될까봐 조마조마하지는 않습니까
지금 베드로가 그렇습니다. 두 번씩이나 '너 예수쟁이지'라고 물었는데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 영광스러운 이름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6장 17절에서 말하기를 "내가 내 몸에 그리스도의 흔적을 가졌노라'고 말한바 있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그리스도의 흔적이 있다는 사실을 대단히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어떠합니까 그 영광스러운 이름을 거절하고 있습니다.
그 옛날 다윗은 골리앗 앞에서도 여호와의 이름을 자랑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주의 이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내 인생 앞을 가로막고 있는 거대한 골리앗 때문인가요 아니면 여호와의 이름이 너무 가볍게 여겨지기 때문인가요 베드로는 이 영광스러운 이름을 거절했습니다. 72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베드로가 맹세하고 또 부인하여 가로되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더라"
이번엔 아예 맹세까지 하면서 예수를 알지 못한다고 부인합니다. 왜 맹세까지 합니까 '아니라'는 것을 강력하게 주장하기 위해서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에 대한 그의 호칭이 무엇입니까 '그 사람'입니다.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고 대답했습니다. 마치 예수님을 지나가다 길거리에서 한 두번 마주친 적이 있는 아주 낯선 사람정도로 취급하고 있습니다. 조금 전, 주를 위해 칼을 빼드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던 그가 이제 와서 주님을 이렇게 낯선 사람 취급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런데 마가복음에 의하면 베드로가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주님을 세 번 부인할 것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첫 번째 닭 울음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첫 번째 부인한 직후에 있었을 것이고, 이 닭 울음은 그에게 보내는 경고의 메시지였을 것입니다. 다시 말씀을 드려 베드로는 첫 번째 닭 울음소리를 들었을 때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여 그 자리를 떠나야만 했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첫 번째 닭 울음을 듣고도 그곳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 이후 두 번째 주님을 부인하는가 싶더니 급기야 세 번째로 주를 부인하게 만드는 위기가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왜 베드로는 첫 번째 닭 울음소리를 듣고도 미처 그곳을 떠날 생각을 하지 못한 것일까요 아마 그는 아직도 주의 말씀보다는 자신의 의를 드러내고 싶은 생각이 더 많이 있었는지 모릅니다. 이 순간만 잘 넘기면 좋은 결과가 찾아오겠지 하는 기대감이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것도 아니면 아직도 뭔가 지켜 볼 것이 남아 있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어쨌든 이 모든 것은 다 잘못되었습니다. 왜요 처음부터 이곳은 베드로가 올 자리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이 흩어질 것을 말씀하셨는데 그는 주님의 말씀과는 상관없이 지금 여기에 와 있고 그 결과 두 번씩이나 주를 부인하는 실수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정말 내가 있어야 할 자리에 있어야 하고, 내가 가야할 자리에 가야지, 있지 말아야 할 곳에 있는다든지, 있어야 할 곳에 없다면 그것은 모두에게 더 큰 어려움을 가져다 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왜 그런 분별이 우리들에게는 없는 것일까요 어쩌면 우리가 주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일을 소홀히 하고 있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어쩌면 주께서 말씀하실 때 진지하게 듣지 못하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참 그렇습니다. 자신의 고집이 앞서는 한 주님의 경고를 들을 수 없습니다. 주님의 경고를 듣지 못하면 우리가 있어야 할 곳에 있지 못합니다. 있지 말아야 할 곳에 머물러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첫 번째 경고를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은 듯 합니다. 그리고 73절에 "조금 후에 곁에 섰던 사람들이 나아와 베드로에게 이르되 너도 진실로 그 당이라 네 말소리가 너를 표명한다 하거늘"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네 말이 너를 표명한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가만히 말의 억양을 들어보니 너도 갈릴리 출신이 틀림이 없지 않느냐 하는 말입니다.
사실 억양이나 사투리 하나만으로 어떻게 예수와 같은 당이라고 규정지을 수 있겠습니까 물론 확률 상으로 볼 때 약간의 도움은 될 수 있을는지 몰라도 그것만으로 같은 당이라고 규정을 짓는다는 것은 모순이 있습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그 말 때문에 더욱 악해져 버립니다. 그래서 74절에 답변하기를 "저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가로되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하니 닭이 곧 울더라"고 했습니다. 이번엔 주님에 대해 저주까지 하며 맹세를 했습니다.
자신은 그 사람을 알지 못한다고 말입니다. 베드로의 세 번째 부인은 주님을 저주하며 맹세하는 것이었습니다. 왜 베드로가 저주했습니까 자신을 좀 더 확실하게 변호하고 싶어서일 것입니다. 누가 그렇게 하라고 시킨 적도 없습니다. 저주하면 믿어주겠다고 말한 적도 없습니다. 단지 그들은 "네 말소리가 너를 표명한다"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주님을 저주하면서까지 맹세합니다. 요즘말로 하면 베드로가 한마디로 '오버'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순간 어디선가 닭 우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닭 울음소리는 베드로에게 예수님의 말씀을 상기시켜 주었습니다. 만일 베드로가 처음부터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여 순종했더라면 그는 결코 주님을 부인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누가복음을 22장 61절을 보면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라고 했습니다.
닭이 우는 순간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쳐다보셨습니다. 그 순간 예수님의 눈과 베드로의 눈이 마주쳤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눈빛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평안과 사랑으로 가득찬 눈빛이었습니다. 저주까지 하며 맹세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주님은 베드로를 원망하고 있거나 책망하는 눈빛이 아니었습니다. 그때 주께서 지난밤 자신을 향해 하셨던 말씀이 생각나서 마음이 찢어질 듯 아팠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그 사실로 인해 심히 통곡하였습니다.
75절에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고 했습니다. 모든 것이 무너지는 순간이었습니다. 인간적인 노력으로 자신을 변호해 보려고 했던 것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 알게되는 순간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서 결코 자신이 보호함을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이 확인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심히 통콕했습니다. 억울해서가 아닙니다. 열심히 쌓아온 탑이 무너졌기 때문이 아닙니다. 자신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인간적인 열심으로 인해 일그러진 자신의 초라한 모습을 이제서야 보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때 베드로가 뭐라고 소리치며 통곡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주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나를 떠나소서'라고 하지 않았겠습니까 '주여 내가 말씀을 붙들지 아니하고 내 인간적인 열심으로 나를 나타내려고 했습니다. 내가 죄인입니다'라고 하지 않았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주님 앞에 우리 자신의 모습이 발견되어지고 있습니까 말씀을 들을 때 그 말씀 앞에서 나의 모습을 조명해 보고 계십니까 아니면 지난주에도, 이번 주에도 항상 듣는 말씀이려니 하시면서 무감각하게 지나쳐 버리십니까 주의 말씀이 들려질 때 가슴을 치며 통곡하는 모습이 있으십니까 돌이켜 베드로의 모습을 지켜보고 계셨던 주님이 오늘 저와 여러분의 모습을 지켜보고 계십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은 주님의 눈빛을 어떤 심정으로 바라보고 있습니까
돌이켜 우리를 바라보고 계시는 주님 앞에서 '모른다'고 말씀하시겠습니까 '상관하지 않겠다'라고 말씀하시겠습니까 '아무 생각도 없다'라고 말씀하시겠습니까 여러분을 지켜보는 주님의 눈빛 앞에 여러분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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