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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 용서의 절기가 되게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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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사순절 기간을 통해서 용서의 절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개인간에 이웃간에도 국가간에도 서로 용서가 되는 그런 절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심은 자신이 죄가 있어서가 아니고 인류의 죄를 대신 지시기 위해서 지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서 인류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서 예수님이 대신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자력으로 자기 자신의 죄를 용서받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기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십자가를 지게 하시고 인간들의 죄를 전폭적으로 용서하신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특별 사면령을 내리셔서 용서를 받은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말씀을 드린다면 복음의 내용이 용서입니다. 십자가의 의미도 용서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뜻도 용서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기독교에서는 용서를 빼고 나면 남는 것이 없다고 말하는 신학자도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용서를 빼고 나면 십자가의 의미도 없습니다. 기독교는 자기의 죄를 자력으로 해결할 수 없는 나약하고 무능력한 인간에게 용서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를 파괴한 인간은 지옥가야 하고 저주를 받아야 마땅하지만 여호와 하나님은 용서의 계획을 세우시고 실천하신 것이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셔서 십자가를 지시고 죽게 하시고 3일만에 부활하게 하신 것입니다. 강단에서는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을 믿는 자에게 여호와 하나님이 죄를 용서해 주셨다는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힘있게 전하는 장소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생명이요,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용서에 대한 교훈을 예수님이 직접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예수님이 설명하신 것이 아니고 베드로의 질문에 응답 형식으로 말씀 하셨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까"하고 베드로가 예수님께 질문을 드렸습니다. 여기서 '그때' 라는 말은 15절 이하의 말씀을 말합니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네 가지 단계로 처리하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첫째 단계는 혼자서 처리하라. 이 말씀은 은밀하게 가서 이야기하라는 말입니다.
 둘째 단계는 한 두명 가서 권면하라. 이 말씀은 여러 사람의 의견을 존중하라는 의미입니다.
 셋째 단계는 교회가 권면하라. 이 말씀은 교회의 권위로 권면하라는 말입니다.
넷째 단계는 그래도 안 들으면 이방인이나 세리같이 여기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런 용서에 대한 교훈을 하고 있을 때에 베드로가 질문을 했습니다. "주님, 내 형제가 범죄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리이까" 그때 예수님은 "일곱번 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에게 묻습니다. "아직도 여러분들은 용서하지 못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가족들 중에서 용서하지 못하고 이 자리에 나오신 분이 있습니까" "이웃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도 아직도 용서하지 못하고 그 마음을 끌어안고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여러분 조용히 한 번 생각해 보세요. 만일에 여러분들에게 죄를 범한 사람이 있다고 하면 몇 번이나 용서해 줄 수 있습니까 여러분들은 지금까지 몇 번이나 용서해 주었습니까
오늘 이 시간에는 용서에 대한 교훈을 생각하면서 사순절 기간 동안 우리 서로 은혜가 되기를 바랍니다. 금번 사순절 기간동안에 용서하지 못했던 부분들을 모두 다 용서하는 기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유대인의 용서의 정도 율법에는 3번만 용서를 하고 끝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율법을 가르치는 '랍비'라고 하는 선생들은 '자기 이웃에게 용서를 구하되 3번을 넘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어떤 랍비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한 번의 과실은 용서를 받을 수 있다. 두 번의 과실도 용서를 받을 수 있다. 세 번의 과실도 용서를 받을 수 있다. 그러나 네 번째는 용서되지 아니한다. " 또 어떤 랍비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서너 가지 죄를 범한 유대인을 책망하셨습니다.
세 번까지는 용서하시고 네 번째는 책망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사람이 여호와 하나님보다 더 관대할 수 없으니 용서는 세 번이 한계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예수님에게 말하기를 "형제가 내게 범죄 하면 일곱 번까지 용서해 주면 되겠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베드로는 일곱 번이라고 하는 숫자이지만, 예수님의 용서는 숫자를 넘어서 습관화시키신 것입니다. 용서하는 것이 습관화가 되어서 의례히 용서할 수 있도록 하라는 말입니다.
한가지 사실을 490번까지 용서하다보면 아마 그 사건이 기억조차도 나지 아니할 것입니다. 490번까지만 용서하고 그 다음은 용서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라 490번까지 용서를 하다보면 모든 일이 다 해결되어 버릴 것입니다. 그러니 용서를 습관화하라는 말입니다. 베드로의 일곱 번의 용서와 예수님께서 용서하라고 하신 말씀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음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위가 좋지 못한 사람이 의사 선생님들을 찾아가면 밥을 50번씩 씹으라고 한답니다. 어떤 심리학자는 "화가 나거든 100을 세어보라"고 말합니다. 세다보면 화가 없어집니다. 정말 100을 다 세기전에 화가 없어질 것입니다. 예수님의 용서의 정도는 끝까지 하라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4단계 용서도 그 단계를 거치는 동안에 스스로 문제가 해결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교회가 권면하게 되면 용서하게 된다는 말씀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왜 이렇게 우리가 용서하면서 살아야 되는지 몇 가지 이유를 생각하면서 금번 사순절 기간을 통해서 용서하면서 사는 축복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1) 내가 용서를 받았기에 나도 용서해야 합니다. 성도는 죄에 대한 용서를 받은 의인입니다. 어느 임금의 신하가 임금에게 1만 달란트(이 금액은 30억이 넘는 돈입니다) 빚을 지고 있었습니다. 어떤 일정 기간에 빚을 갚지 않으니까 임금이 그 신하를 불러다가 "너의 몸과 처와 자녀와 가진 재산을 다 팔아서 이 빚을 갚으라"고 엄명을 했습니다. 신하가 "임금님, 제가 이 빚을 꼭 갚겠습니다. 조금만 더 참아 주십시오" 하고 사정을 했습니다.
임금이 그 신하가 너무 불쌍해서 "그래 그러면 내가 네 빚을 탕감해 주마"하고 빚을 탕감해 주었습니다. 그 신하가 감격된 상태로 나가다가 자기에게 100데나리온(200만원 정도)의 빚을 진 동관을 만났습니다. 이 신하는 그 사람의 빚을 탕감해 주지 못하고 목을 잡고 강요하다가 빚을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이 이야기가 임금님의 귀에까지 전해졌습니다. 그래서 그 신하를 불러다가 "이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다 탕감해 주었는데 네가 그 사람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하고 그 빚을 탕감해 준 것을 취소했습니다. 그리고 빚을 다 갚기까지 옥에 가두었다고 하는 말씀이 본문에 나와 있습니다.
용서를 받은 사람은 용서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여호와 하나님 앞에 용서를 받을 수 없는 죄인들이었는데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우리 대신 죄를 짊어지게 하시고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었습니다. 우리가 용서받은 사람들이니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해 주어야 한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만약에 내가 용서할 줄 모른다고 하면 내가 받아야 할 용서도 취소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주기도문에 보면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나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주님께서도 내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하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한 번밖에 용서를 하지 않았으면 여호와 하나님도 나를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하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께로부터 큰 죄를 용서받았으니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해 줄 줄 알아야 합니다.
2) 용서를 받아야 하니까 용서해야 합니다. 우리는 원죄는 용서받았으나 자범죄는 용서를 받지 못했습니다. 원죄라고 하는 것은 아담과 하와로부터 내려오는 죄를 말합니다. 원죄는 예수를 믿음으로 용서받았습니다. 그러나 살면서 짓는 죄는 아직도 용서를 못 받았습니다. 아직도 용서받아야 될 일들이 참 많습니다. 그런데 내가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주님도 나의 죄를 용서하지 않을 것 아닙니까 여호와 하나님께 용서를 많이 받아야 할 사람이니 나도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해 줄 줄 알아야 합니다. 육신은 음식을 먹어야 건강해 집니다. 혼은 사랑을 먹어야 건강해 집니다. 영은 용서를 먹어야 깨끗해집니다. 원죄가 일만 달란트라고 하면 자범죄는 수십만 달란트가 됩니다. 우리가 용서를 받아야 되는 사람들이기에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해야 합니다.
3) 용서하는 자가 용서를 받는 자보다 축복이 되기 때문에 용서해야 합니다. 용서하지 않으면 가장 큰 피해를 보는 사람은 본인입니다. 남에게 검은 것을 묻히려는 사람은 자기가 먼저 검은 것을 묻혀야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용서하지 못하고 사는 심령은 항상 매임을 받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동네 아이들에게 매를 맞던 아이가 묘안을 냈습니다. 궁리 끝에 자기 몸에 다이너마이트를 감았습니다. 자기를 때리면 터져서 모두가 박살나게 말입니다. 이 소리를 어디서 들었는지 동네아이들이 무서워서 피합니다. 여기서 동네 아이들이 손해겠습니까 다이너마이트를 감고 다니는 아이가 손해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용서하지 못하고 사는 사람은 늘 고통과 불안을 안고 살아야 합니다. 가장 큰 피해를 보는 사람은 본인입니다. 낙타와 사자가 소를 서로 가지겠다고 싸웠습니다. 낙타는 소뿔을 잡고, 사자는 소꼬리를 잡고 서로 "이 소는 내가 먹어야 한다"고 싸웁니다. 그 사이에 여우는 소젖을 여유롭게 빨아먹고 있었습니다. 싸우면 서로가 피해를 입게 됩니다. 용서하지 못하면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이 피해를 입게 됩니다. 금번 사순절을 기해서 지금까지 용서하지 못한 사람이 있다고 하면 용서해야 합니다. 그래야 여러분들 마음에 평안이 옵니다. 그것이 주님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입니다.
요셉은 종살이하면서도 형들을 한 번도 원망을 하지 않았습니다. 감옥에 가서도 보디발의 아내에게 원한을 품지도 않았습니다. 결국에는 국무총리가 되었습니다. 그래도 형들이나 보디발의 아내에게 죄를 묻지 아니하고 용서를 했습니다. 요셉은 자기에게 해를 끼친 모든 사람을 다 용서했습니다. 그랬더니 요셉이 축복을 받았습니다. 형들이나 보디발이나 보디발의 아내가 복을 받았다고 하는 이야기는 없습니다마는 용서를 했던 요셉이 복을 받은 이야기는 천지창조 이야기보다 더 길게 나온다고 하는 사실을 성경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원수를 갚는 자보다 용서해 주는 자가 축복을 받는다고 하는 이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용서하지 못해서 서로 피해 입을 뿐만 아니라 애매한 사람까지 피해를 입는 수가 많습니다. 금번 사순절을 기해서 우리 모두 용서하는 축복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용서를 못하면 악순환이 계속이 됩니다.
우리 정치하는 사람들 위대하지요. 자원이 없는 이 나라를 선진국 대열까지 끌어올리는데 얼마나 수고를 했습니까 국민들도 열심히 살았지만 정치하시는 분들도 참 열심히 했지요. 그런데 한가지 흠이 있다면 용서를 못해요. 용서하지 못하면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도 손해를 입지만 용서받지 못하는 사람도 손해를 입고 그 사이에 끼여있는 사람도 다 피해를 입게 됩니다.
우리는 누가 잘했든 잘못했든 간에 서로 화해하고 용서하는 것이 기독교의 진리요, 사순절을 당한 이때에 꼭 이루어 나가야 될 진리의 말씀입니다. 성도들의 삶 속에 용서가 이루어지시기를 축원합니다. 용서하는 사람은 축복을 받게 됩니다. 용서하는 사람은 영광을 얻게 됩니다. 용서하는 사람은 많은 사람들에게 칭찬과 존경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결국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은 사람들에게 저주를 받게 됩니다.
4) 용서해야 주님의 심정을 알게 됩니다. 사랑해야 사랑을 배우게 되고, 용서해야 용서의 가치를 알게 됩니다. 결혼해서 아이를 낳아보아야 부모의 심정을 알게 됩니다. 용서해 봐야 주님의 심정을 알게 되고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됩니다.
독일의 라멘스 부르크 수용소에 있던 고리덴붐 여사의 이야기입니다. 그가 수용소에서 온갖 학대를 많이 받았습니다. 그는 여자로서 많은 남성들 앞에 발가벗기우고 매를 맞았습니다. 그리고 침뱉음을 받았습니다. 또 그녀의 언니는 수용소에서 생활하다가 독일 사람들에게 맞아 죽었습니다. 얼마나 치욕적인 일입니까 그러나 전쟁은 영원한 것은 없지 않습니까 전쟁이 끝이 나고 사회가 평안해졌습니다. 고리덴붐 여사는 전쟁 후에 독일인들에게 용서의 복음을 전합니다. "내가 이렇게 어려움을 당하고 치욕을 당했지만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우리 모두 용서하십시다.
" 그러니까 독일 사람들이 은혜를 받습니다. 고리덴붐 여사가 가서 설교를 하면 독일 사람들 모두 다 회개하고 여호와 하나님께로 돌아옵니다. 설교를 마치고 강단에서 내려가서 성도들의 손을 잡으면서 "우리 서로 화해합시다" "우리 서로 용서합시다" "우리 서로 평화를 누립시다"하면 그 많은 사람들이 열광을 합니다. 그러면서 악수를 하고 가는데 어느 한 남자가 손을 내밉니다. 그때에 그 남자를 보는 순간에 고리덴붐 여사의 얼굴이 깜깜해졌습니다. 그 사람이 누군가 하니 자기를 발가벗겨놓고 갖은 학대를 가하면서 매를 치던 사람이었습니다. 자기 언니를 수용소에서 죽이던 사람이었던 바로 그였습니다.
그 사람이 자기에게 화해하자고 손을 내밉니다. 그때 자기에게 했던 일이 슬쩍 지나가면서 치가 떨립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 나는 이 사람 용서할 수 없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면 용서할 수 없으니 용서할 수 있는 은혜를 주십시오"하고 마음으로 기도합니다. 그러면서 그 사람의 얼굴을 바라볼 수가 없어서 손을 슬그머니 내밀어 그 사람 손을 잡는 순간에 고리덴붐에게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시는 위로와 능력을 힘입게 되었다고 간증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그 남자의 손을 잡는 순간 하늘의 사랑이 자기 가슴속에 파고드는 것을 느꼈다고 말했습니다. 그 남자의 손을 잡는 순간에 처음으로 십자가의 사랑을 깨닫게 되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용서해 본 사람만이 십자가의 사랑을 깨닫게 되고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됩니다.
유대인의 용서의 정도는 세 번입니다. 베드로의 용서의 정도는 일곱 번입니다. 예수님은 일흔번씩 일곱 번이라고 490번씩 용서하라고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모두 다 용서하십시다. 용서하는 일이 여러분들 마음에 평안을 가져옵니다. 용서하는 자만이 제 위치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용서하는 자만이 자유와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용서하기 위해서는 세 가지 원칙이 있습니다.
 첫째는 이해해야 합니다. 인간의 행위에는 언제나 이유가 있습니다. 남을 탓하기 전에 그 사람을 이해하려고 하면 용서가 쉬워집니다.
 둘째는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용서할 수 있는 인간은 위대하지만 잊을 수 있는 인간은 숭고하다고 브릿제스는 말했습니다.
 세번째로는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아가페 사랑은 상대편이 자기에게 어떤 일을 해도 오직 상대방의 최대의 이익 외에는 아무 것도 구하지 않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금번 사순절을 기해서 지금까지 용서하지 못하고 내 마음속에 아직도 분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하면 그 마음을 다 풀어서 용서하시고 화해하시고 평화를 이루는 그런 사순절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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