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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 아담의 죄와 예수의 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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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사순절 첫 번째 주일입니다. 지난 수요일 성회의 수요일로부터 사순절이 시작되었습니다. 우리는 매년 은혜스럽게 사순절과 부활절을 보냈지만, 신앙은 여전히 제자리를 맴돌고 있습니다. 이런 현상은 우리에게 뼈아픈 죄의식이 없기 때문이요, 예수님의 은혜에 대한 감격들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왜 예수님을 믿느냐고 물어보면 그저 막연한 대답입니다. 생생하고, 살아있는 신앙을 소유하지 못한 것을 보게 됩니다.
여러분, 왜 예수를 믿고 있습니까 그냥 믿어두는 것입니까 우리에게 죄의식이 없기 때문에, 무엇이 죄이고, 그 죄의 결과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모르기 때문에 생생한 신앙을 가지지 못하고 있습니다.
저는 우리 교우들에게 죄의식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지 참으로 망설여집니다. 우리 성도들이 자신이 죄인이라는 인식을 어느 정도나 가지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죄라는 것이 윤리적으로 조금 잘못된 것이지, 그 정도라면 괜찮은 편이지, 적당한 범죄도 살아가는 한 방편이라고 주장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에게 죄의식이 없습니다.
지난주간 화요일 아침이었습니다. 교회사무실에서 책을 읽고 있었는데 아침 7시 경에 전화가 들어왔습니다. 교회 안에는 저 한 사람뿐이기에 교회대표전화로 걸려오는 전화를 당겨 받았습니다. 젊은 여성의 목소리인데, 영주교회냐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자기는 교회 선교원의 노란 승합차를 접촉사고를 일으켜 옆부분을 긁어놓았으며, 자기의 전화번호를 남겨놓았는데 보셨느냐는 것입니다. 지금 전화 받는 제가 영주교회의 담임목사인데, 제가 잘 모르는 이야기요, 우리 직원들이 보고 알았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래도 혹 모르니 지금 전화 거는 분의 연락처를 주시고 성함을 불러달라고 하였더니, 순순히 전화번호와 이름을 말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렇게 확인 전화 주셔서 감사드린다고 하면서, 교회가 자주 이용하는 자동차 공업사에 가서 상태를 보고 아주 저렴하게 고치라고 하겠고, 사고를 내신 분에게 경제적인 부담이 적게 가도록 고치고 결과를 알려주겠다고 하면서 정말 이렇게 전화 주셔서 감사하고 전화를 주신 용기에 감사한다고 했습니다.
저는 혼자 생각하기를 오늘날에도 저런 사람이 다 있나 할 정도로 귀하게 보았습니다. 내가 잘못하였으니, 원상대로 고쳐주겠다고 하는 사람, 정직하게 내가 그랬다고 하는 사람, 내 잘못이니 내가 책임을 지겠다고 말하는 그런 사람을 찾아보기가 정말 힘든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분도 전화번호를 써놓거나, 전화를 거는데 망설였을지도 모릅니다. 그냥 가버리면 그만이 아닌가 그런 정도 가지고 무슨 사고라고 전화번호를 남기고 그러느냐고 할 수도 있습니다. 전화를 걸 때에 걸까, 말까 망설임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긴 것입니다. 죄를 죄로 인정하고 나쁜 것으로 보려고 한 것은 그의 영혼이 승리한 것입니다.
죄의식이란 결국은 자신과의 싸움입니다. 그의 양심은 죄라고 하는데, 또 다른 자아는 그 정도는 살아가는 수단이라고 합리화하려고 합니다. 죄는 살아계신 여호와 하나님을 떠나 사는 것이 죄입니다. 우리 여호와 하나님에 대하여 감사한 마음을 가지지 않는 데서 죄가 싹트기 시작합니다. 우리에게 성령,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지 않으면 죄를 죄로 볼 수 없는 영안이 어두워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타락한 인간은 죄 문제를 말할 때마다 얼굴이 어두워집니다. 그런 죄의 책임을 떠넘기는 것으로 죄인이라고 정의하게 됩니다. 죄 문제를 말하면서 그 죄의 책임은 세상 형편으로 돌리고, 부모에게 돌리고 형제에게 돌리고, 아내에게 돌리고, 더 나아가 뱀에게 돌리고, 더 올라가면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에게 돌리고 마는 것을 봅니다. 이렇게 그 책임을 떠넘기고 전가시키려고 하는 것 그 자체가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성경을 읽어가다 보면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3:10)라는 말씀을 읽거나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롬3:24)라는 말씀을 보면 가슴을 치는 것이 아니라, 내심 안심하고 걱정이 좀 놓이게 되는 것을 느낍니다. 저는 이런 심정을 묘한 안심이라고 생각해보았습니다. 나만 죄인인가, 모두 다 죄인인데, 이 정도로 가지고 무슨 죄라고 그래, 뭐 살인하기를 하였는가, 남의 아내를 탐내기를 하였는가 남의 집의 담을 넘어가기를 하였는가 이 정도면 양심적으로 사는 것이라고 스스로 만족하려고 합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라는 말씀에서 묘한 안위를 얻고 있습니다. 의인이 없음을 오히려 감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 안에 있으면 죄의식이 활발하고 민감한데, 여호와 하나님을 떠나 있으면 세상의 유혹으로 인하여 심령이 어두워지고 영성이 둔해져서 죄를 죄로 알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사람들의 마음을 파악하였습니다. "또한 그들이 마음에 여호와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롬1:28)라고 했습니다.
우리 인생이 이 세상에 나서 칠팔십 년 살다가 떠나고 있습니다. 평생을 살면서 완전히 해결하지 못하고 미완성인 채 가야 하는 문제가 있다면 죄의 문제요, 죄와의 싸움입니다. 우리에게 인생의 난제들이 많은데 그 중에 가장 본질적인 문제는 죄를 어떻게 해결하느냐, 일평생에 지은 죄를 어떻게 해결하고 여호와 하나님 앞에 가야 할 것입니까
왜 사람은 죄를 짓고 있습니까 죽음은 어디서 왔습니까 왜 예수를 믿어야만 구원받을 수 있습니까 오늘은 이 절박한 문제를 해결하는 시간이 되어야겠습니다. 이러한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는 철학의 지혜로도 풀지 못합니다. 정치가의 안목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경제적인 부요함이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죄와 죄의 용서라는 주제를 다루는 말씀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잘 연구하다보면 여호와 하나님은 이래서 예수님을 주셨으며, 우리들이 예수님을 믿어야만 구원받을 수 있음을 알게 됩니다. 우리에게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 있으며, 우리를 구원하시는 진리가 있고, 오늘 나에게 주시는 말씀이 있어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게 되었습니다.
사도바울은 위대한 신학자요, 신앙인이었습니다. 그는 여호와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를 설명하는데, 아담 안에 있는 우리와 이제 새롭게 예수님 안에 들어간 우리를 가지고 비교하면서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아담과 예수님을 비교하면서 아담 안에서 범죄 타락한 인간과, 예수님 안에서 죄의 용서를 받은 인간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이 고민하였고, 이러한 사실을 발견하고 그 놀라우신 은총을 설명해주신 것으로 인하여 감사해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종교적인 천재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앞서 살아간 성도들이 고민하였기에 우리는 지금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돌아가셨는데, 과연 예수님을 믿으면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충분한 제사가 되고, 여호와 하나님을 만족시키고,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우리의 모든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느냐 하는 걱정이요, 고민이었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은 고민합니다. 유대인들은 이 문제로 더욱 고민하고 있습니다. 과연 예수님의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사건으로 전 인류를 구원하는데 좀 부족하냐, 아니면 충분한가 하는 것입니다. 그동안 사람이 지은 죄를 용서받기 위하여 수천 수만의 제물을 드려왔고, 지금도 드려야 하고, 앞으로도 드려야 되는데, 과연 우리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건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용서를 가져올 수 있느냐 하는 것을 고민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공로가 어느 정도기에 온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도대체 누구이시기에 여호와 하나님이 예수의 죽음을 보시고 진노를 푸시고 공의롭게 여기시고 만족하셨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시작하신 구원의 복음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생각하시고 예비하시다가 당신의 아들을 이 땅에 내려 보내주셨기에 만족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어떤 선한 사람이 죽었어도 그것은 그 사람에게 해당되는 것이지만, 여호와 하나님은 오고 오는 세대의 모든 제사를 단번으로 끝내기로 하셨습니다.
한번의 죄를 용서받으려면 한 마리의 양이나 소를 잡아드려야 합니다. 또 다시 같은 죄를 범하면 한 마리의 양이나 소를 잡아드려야 하는데, 이러한 제사는 일생에 수 없이 반복되고 계속되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단번에 드리셨습니다. 단번이라고 하면 두 번도 필요 없는 한번을 말합니다. 단번이란 두 번도 필요 없는 오직 한번, 단칼이란 두 번 칠 것도 없는 오직 한번에 끝낸다는 것입니다.
히9:12에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고 하셨습니다. 히10:12에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여호와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라고 하셨습니다. 한번 드림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신 제사입니다.
바울은 주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는 이신칭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칭함을 받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것은 아담이 불순종하여 범죄하므로 우리에게도 죄가 들어오고, 죄를 물려받았고, 사망이 들어온 것처럼 이제는 같은 방법으로 아담은 불순종하였지만, 예수님은 순종하시므로, 죄가 없으신 주님으로 인하여 주님의 의로우심이 우리에게도 전가된다는 것입니다. 아담의 불순종으로 사망이 주어진 것처럼 예수님이 순종하시므로 생명이 우리 안에 들어왔습니다. 예수님은 제2의 아담으로 구원을 이루신 새로운 시작이십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한 사람 아담과 또 한 사람 예수님을 대비하여 비교하면서 죄와 구원의 관계를 설명하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시 아담 안에 있는 인간과 예수 안에 있는 인간을 비교하면서 죄와 사망, 의와 생명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진리가 있습니다.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한다고 하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한 진리의 말씀입니다. 진리의 말씀을 내 것으로 만들면 인생을 방황하지 않습니다. 모든 두려움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 우리 예수님 안에 거하면 모든 두려움에서 해방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참된 자유를 주시는 진리의 말씀, 로마서에서 강조하고 있는 복음을 잘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십자가의 도리를 굳게 잡을 수 있습니다.
12절입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여기서 사망이라고 함은 육체적인 죽음과 여호와 하나님과의 단절, 지옥의 형벌 곧 영원한 죽음을 다 포함하는 사망입니다.
사도바울은 인간에게 죄가 들어온 경로를 설명하면서 죄의 결과로 사망 곧 죽음이 들어왔으며, 아담만이 아니라, 아담 이후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모든 사람에게 죽음이 들어왔다고 하셨습니다.
여기 본문의 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아담입니다. 아담은 피조물 중에 영장, 만물의 영장이지만 피조물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피조물인 인간에게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이 하나의 금령을 주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에덴 동산을 만들고 당신이 지으신 사람을 그 동산에 두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그 동산에 각종 열매 맺는 나무를 두시고 보시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열매 맺는 나무를 자라게 하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첫 사람 아담을 데려다 에덴 동산에 두시면서 그 곳을 맡아 돌보게 하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창2:16-17)고 하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이런 금령을 주신 것은 우리 인간에게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는 피조물인 것을 항상 기억하라고 주신 말씀이요, 인간에게 진정으로 복되게 하시려고 주신 말씀이었습니다. 우리는 인간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할 수 없는 일들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해야 하는 일과 해서는 절대로 안 되는 금령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아담은 여호와 하나님의 거룩하신 명령, 준엄하신 말씀을 어겨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었습니다. 아담의 아내 하와가 뱀의 유혹을 받아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보았는데 먹음직하기도 하였고, 보암직도 하였고, 사람을 슬기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하였습니다. 사람이 죄를 짓는데, 모두다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탐스러워서 죄를 짓습니다.
사도 요한은 이 문제를 가지고 이렇게 해석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마십시오. 누가 세상을 사랑하면 그 사람 속에 하늘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 없습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 곧 육체의 욕망과 눈의 욕망과 세상 살림에 대한 자랑은 모두 하늘 아버지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도 사라지고 이 세상의 욕망도 사라지지만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 "(요일2:15-17)라고 하셨습니다.
죄는 몇 가지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죄의 유전성입니다. 이것을 원죄라고 합니다. 죄는 전염성이 있습니다. 파급되고 확산되고, 유행됩니다. 죄는 영향력이 있어 파급되고 확산되고, 유행처럼 번져갑니다. 사람은 의를 행하는 것은 어려워도 죄를 짓는 것은 가르쳐주지 않아도 쉽게 배우고 따라하게 됩니다. 죄는 지배성이 있습니다. 왕노릇한다는 말입니다. 죄는 한 사람을 쉽게 정복하고 그의 중심에 앉아 왕노릇하게 됩니다. 처음에는 참으로 벌벌 떨면서 죄를 지어도 다음에는 그렇게 떨지를 않습니다. 사람이 죄를 다스려야 사람이지, 죄의 종이 되어버리면 죄가 하자는 대로 합니다.
아담이 범죄하였는데, 그의 아들들 중에 살인자가 나옵니다. 가인이 동생 아벨을 돌로 쳐죽였습니다. 죄악이 너무나 관영하여 노아 시대에 홍수 심판이 있었습니다. 홍수 후에 인류는 여호와 하나님에게 도전하려고 바벨탑을 쌓았습니다. 죄는 그냥 두어도 더욱 자라고 심화되어 갑니다.
원죄를 인정해야 합니다. 죄를 지어서 죄인이 아니고, 죄인이기에 죄를 지었습니다. 사도바울은 선언하기를 "허물과 죄로 죽었다"(엡2:1)고 했으며, 우리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들"(엡2:3)이라고 하셨습니다.
한 사람 아담이 죄를 지었으며, 그 결과 아담에게 사망이 들어온 것처럼 아담의 후손인 우리도 범죄 하였고, 우리에게도 죽음이 들어왔습니다. 우리는 아담이 지은 죄로 인하여 부패한 죄성을 유전적으로 물려받았습니다. 아담이 죄를 지었을 때 우리도 그 안에서 죄를 지었습니다. 아담이 지은 죄를 우리도 지었고, 아담이 받은 벌을 우리도 받았고, 아담 안에 우리도 그 안에 있었습니다. 아담 하와의 자녀들은 죄가 유전되었고, 죽음도 유전되었습니다.
아담은 우리의 대표자입니다. 우리 인간이 죄인이라는 것은 악을 행하고 악을 행하지 않는 문제 이전의 문제입니다. 숙명적으로 죄인입니다. 죄를 지어서 죄인이 아니라,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지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원죄라고 합니다. 이 원죄라는 것을 받아들이기란 참으로 어렵습니다. 현대인들에게 원죄를 설명하기가 어렵지만 사실입니다.
저는 성(成)씨입니다. 본이 하나이다 보니 어디 가서 성씨를 만나도 반갑고, 신문이나 TV에서 성씨 소리만 하여도 귀가 번쩍입니다. 그런데 성씨 중에 못된 국회의원이 있었는데, 여고생을 꾀어 탈선한 사건이 대대적으로 보도된 적이 있었습니다. 얼굴을 들지 못하겠어요. 한참 영적으로 예민한 시절이었는데,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그는 성씨의 대표자입니다. 역시 아담은 우리 인류의 대표자입니다. 대표자가 범죄하므로 모두다 범죄하였습니다. 대표자가 패함으로 우리 모두 다 패하고 말았습니다.
첫 번째의 아담과 두 번째 아담이신 예수님을 비교하면서 아담이 죄와 사망의 시작이었다고 하면 예수님은 죄와 사망의 마침이요, 공의와 생명의 시작이 되십니다. 아담은 다시 오실 제2의 아담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 되었습니다. 신학에 모형학(Typology)이라는 분야가 있습니다. 모형, 예표라는 말로 쓰는데, 그림자라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예표로 마치 그림자 같이 희미하여 완전하지는 않지만 모형을 보여주었는데, 신약에 와서 완전한 실체가 드러났다는 것입니다. 구약의 유명한 사람들도 모형적인 인물이 있고, 유명한 사건이나 성막 같은 것들이 모형이 되고 있습니다.
이제 예수님 안에서 우리에게 정죄함이 없고, 사망이 떠나가고,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는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아담과 같은데, 아담보다도 더욱 나쁜 범죄자인데, 여호와 하나님은 세상에 사랑할 사람이 나밖에 없는 것처럼 사랑해주시고 찾아와 주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의 주님으로 선물하셨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1:12)라고 하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보시는 죄는 단지 믿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요한16:9에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라고 하셨습니다. 박절하지만,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이요, 믿지 않으면 이미 정해진 심판의 자리로 그냥 걸어가는 것입니다. 사망입니다.
18-19절은 오늘의 말씀을 요약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고 하셨습니다. 불순종한 한 사람은 아담이요, 사망에 이른 많은 사람에는 나도 포함되어 있었으나, 순종하신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우리는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입니다. 전에는 죄가 왕노릇하였는데, 이제는 나의 주님이 내 안에 사시면서 나의 주인이 되셨습니다.
히10:19에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라고 했습니다. 담력이란 두려움 없이 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엡3:12에서 "우리가 그 안에서-예수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 여호와 하나님께 나아감을 얻느니라"고 했습니다. 나의 죄를 다 담당해주신 우리 주님을 모시고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 앞에 당당히 나아가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이 이 세상에서 죄의 종노릇하는데,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헌신하는 자녀로서 살아가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구원의 확신을 가지기를 바랍니다. 능력 있는 자녀, 헌신하는 자녀, 칭찬 받는 자녀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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