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절] 주님이 오신 목적
본문
우리가 사순절을 맞이해서 주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과 내용들을 다시 한번 살펴봄으로서 믿음과 삶을 다시 한번 점검하는 귀한 시간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우선 본문말씀은 예수께서 회당에 들어가서 이사야의 글을 읽으면서 주님이 이 땅에 오신목적을 성취하실 자라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먼저는 가난한자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이 땅에 왔다고 합니다. 이 가난함의 전통을 따지자면 바벨론 포로기 부터 설명을 해야 합니다.
학개나 스가랴, 스룹바벨같은 선지자들에 의해서 이스라엘백성들이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되어 고국으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이들을 통해서 이스라엘 재건의 역사를 일으킵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은 가난했습니다. 그들이 가진 것이 없어서 가난했지만 그 가난이 그냥 가난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심령이 가난한 것으로, 다시 이야기하면 여호와 하나님을 재산으로 삼고 그들은 힘을 다해 성전을 재건했습니다.
그들이 성전을 건축한 것은 재산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자녀들이 이웃나라에 종으로 팔러가서 고생을 하고 힘들게 사는 저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찾을 때 성전을 통해서 회복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의미도 있었습니다. 물론 성전 재건은 이스라엘백성들에게 하나의 정체성을 갖게 하고 성전중심으로 단결하며 민족성을 강화하기 위해서도 있지만 여호와 하나님중심으로 회복하기 위한 노력이 성전건축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지금 다른 나라에서 가난하게 살고 있는 자녀들과 형제들이 속히 돌아와 회복되기를 원하는 귀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가난함의 전통을 아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 앞에 온 모든 가난한자를 향해 복음이 전파되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만난 가난한 사람들은 이스라엘백성들 가운데 특히 가난한 사람 들이였습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실 때 찾아왔든 사람들이 소위 ‘아니아나고’라고 호칭하는 정말 가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사역하실 때 광야에서 만난 사람들도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심령이 곤고 사람 들이였으며 구원의 문제에 허덕이는 사람들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을 보더라도 그녀는 가난했습니다. 오죽가난하면 남편 다섯을 거쳐 갔겠습니까 그리고 사마리아여인은 갈급한 심령 이였으며 구원을 사모하는 여인이었습니다. 사마리아여인은 주님을 만나고 둘 다 해결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앉은뱅이, 소경 마디메오, 가나안 여인, 중풍병자 이런 자들은 실질적으로도 가난한 자들 이였고 심령이 갈급한 자들 이였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부자도 만났습니다. 삭게오, 백부장 등도 만났습니다. 만은 이들 역시 심령이 가난한 자였고 구원에 갈급한 사람 들이였습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는 가난한자에게 복음을 전하려 오셨습니다. 이 가난은 육신의 가난과 더불어 심령이 가난한 사람들을 모두 포함합니다. ‘하루비’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이 단어는 애굽에서도 천민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은 이런 천민 들이였습니다. 그리고 더불어 예수님을 기다리는 가난한 마음의 뜻도 내포되어있습니다.
본문에서는 사렙다 과부와 나아만 장군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사렙다 과부는 얼마나 가난한 여인인지 모릅니다. 정말 ‘하루비’였습니다. 남편이 없이 사는 그것도 가뭄으로 고통당하는 이 여인을 한 예로 들었고, 그리고 나아만 장군을 예로 들었습니다. 나아만 장군은 아람군대장관으로서 서열 2위의 위치에 있는 기족이요 부자요 권력자입니다. 그런데 이 나아만도 가난한 사람이라는 것이지요. 문둥병에 걸러 죽음을 앞두고 있는 이 사람이야 말로 정말가난한 자가 아닙니까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는 죽음을 보고 있고 문둥병으로 수모를 격어야 되는 이 사람이 가난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로 가난에서 해방된 사람들이지요.
이스라엘성전이 재건되어 가난한자들에게 소망이 되고 감격과 기대가 된 것처럼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성전이 되어 가난한자에게 소망과 비전과 꿈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누구나 오라,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네게로 오라 네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신 것은 예수님이라 말로 그들에게 가난에서 축복을, 질병에서 건강을, 고통에서 해방을, 피곤에서 쉼을 주실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은 포로 된 삶에 대해 굉장히 익숙합니다. 조금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하루비’라는 단어에서도 알 수 있듯이 애굽에서 종살이 할 때 천민의 대접을 받으면서 종살이를 했습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구원한 것처럼, 바벨론 포로 때 스룹바벨이 그들을 인도해 낸 것처럼 예수그리스도께서 죄에서 포로 된 이스라엘백성들을 인도해 내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결국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켜주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이지요. 여기서 포로 된 자는 자신이 포로가 아니라 정치적으로 인용하고 이해해야합니다. 예수님당시 헤롯의 이스라엘왕은 유대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남아티공화국 즉 사우디 공화국 사람 이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들 민족이 섬겼든 우상을 가져오게 되고 이스라엘나라에 대한 주인의식도 없을 뿐만 아니라 백성들에게 굉장히 포악한 존재였습니다. 자식들까지 서슴없이 죽이는 그런 사람 이였지요. 이런 왕의 압제 하에 로마로부터 속국으로 있으면서 이스라엘민족을 압제하고, 핍박하고, 폭력을 가하는 이런 정치적 배경에서 포로된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메시야관은 정치적인 포로의 해방을 의미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입성할 때 호산나 찬양을 하며 대대적인 환영을 한 것도 드디어 여호와 하나님이 약속한 메시야가 와서 로마로부터 해방시켜 주실 것 이라는 기대치가 굉장했던 것을 반영해주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환영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가롯유다도 그는 열심당 이였고 예수의 제자가 되려고 예수를 찾아왔을 때 이미 그는 예수님을 통해 로마로부터 독립을 쟁취할 것이라는 소망을 가지고 제자 가된 인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누구보다도 기대가 큰 사람 이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했으면서도 아무 일을 안 한 것입니다. 그냥 시간을 보내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판 것이지요. 그것도 아주 뜨뜻하고 당당하게 이런 일을 행했습니다. 그런데 결국 이런 것이 아니구나하는 것을 깨닫고 자살을 했지요.
사실 예수님은 구약의 이 말씀을 펼치면서 이제 포로된 자를 새롭게 해방시켜주시겠다고 합니다. 이사야9장6절 ‘이는 한 아이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그 정사와 평강의 더 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구약의 의미를 되새겨본다면 예수그리스도를 전투자 영웅 지배자로 표현했습니다. 그러니까 포로에서 해방시켜야할 장군의 의미가 드러나야 되는데 예수그리스도는 반대의 모습입니다. 샌들을 신고 난무한 옷을 입고 연약하며 볼품이 없는 그런 모습입니다. 결국 예수그리스도의 모습과 배경은 이스라엘백성에게는 소망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바리새인들이나 이스라엘지도자와 백성들은 예수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영적인 포로 자들, 미움에 눌린 자들, 죄로 고통당하는 자들 병든 자 모두가 포로된 자들입니다. 마치 전투적인 장군의 모습으로, 나라를 통치하는 임금의 모습으로 지상에 와서 사람을 해방시키기 위해 영적인 실체를 명령하여 ‘나가라’고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왕입니다. 장군입니다. 이런 행위는 결국 영적인 전쟁을 의미하는 것이고 마귀를 멸하는 행위입니다. 그러니까 육적인 독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자유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적인 실체를 나가라고 명령하는 사역을 꾸준히 하신 것이지요. 그러므로 주님의 지상에서의 사역은 귀신을 향해서 강력한 선언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사역이 마귀를 없이하는 사역 이였습니다.
현대인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의식주 해결도 아니요 성공과 실패의 문제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마음입니다. 그런데 이 마음이 빼앗겨서 사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사무엘상 15장20절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나는 왕과 함께 돌아가지 아니하리니 이는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 왕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음이니 이다’그다음에 16장 23절 ‘여호와 하나님이 부린 악신이 사울에게 이를 때에 다윗이 수금을 취하여 손으로 탄즉 사울이 상쾌하여 낫고 악신은 그에게서 떠나더라. 여기서 말씀을 보면 사울이 마음에 여호와 하나님을 버렸습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이 사울을 버리게 됩니다. 그와 동시에 악신이 찾아왔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떠난 삶은 결국 마귀의 밥이 될 수밖에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전서5장 8절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삼킬 자를 찾는다는 것은 공격할 자를 찾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공격대상이 누구나 하는 것인데 마태복음 12장 43-45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하고 이에 가로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비고 소제되고 수리되었거늘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이 말씀은 주님이 이 땅에 오셔서 귀신을 쫓아내었습니다. 그러면 그 빈 집에 주님을 모셔야 되는데 주님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상태의 삶이 마귀에게 공격을 당하는 표적이라 이 말입니다. 지금 이 악한 세대가 이처럼 마귀의 공격대상이라는 것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마음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만들었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을 영접해야 평안이 있는 것입니다. ‘내가 평안을 끼치려 왔노라’다시 말하면 포로된 너희 마음을 해방시켜 내가평안을 주겠다는 의지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마음에 예수님을 주인으로 영접하지 않음으로 인해서,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않음으로 인해서 마귀의 공격대상이 되고 마귀에게 붙들려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집을 잘 지어놓아도 그 집에 사람이 살지 않으면 별의 별것이 다 찾아옵니다. 들쥐가 찾아오지요, 사람들이 빈집에서 자기도하고 오물도 남기기도하고 벌레나 산짐승들이 들락날락 그리기도하고 그래서 집은 순식간에 폐허가 되고 맙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마음이 비여있으면 더러운 것들이 찾아오게 마련입니다. 로마서 1장 28‘또한 저희가 마음에 여호와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여호와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버려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그러니까 마음에 여호와 하나님이 없는 삶이 이런 삶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사로잡힌 자입니다. 다시 말하면 마귀에 완전히 포로된 자를 의미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를 싫어하는 자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버려두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여호와 하나님의 품을 떠나서 공허하게 살지만 그러나 그냥 내버려두었습니다. 여기서 내버려 두다는 뜻은 인연을 끊는다는 말인데 그러니까 마귀가 빈 마음에 주인이 되어서 완전히 마음을 사로잡는 것입니다.
이런 더러운 죄인 된 삶의 포로에서 해방되는 길은 여호와 하나님말씀을 마음에 믿고 의로 행하는 삶입니다.
세 번째 눌린 자를 해방시켜 주신다고 했습니다. 눌린 자란 마음이 상한 자를 의미합니다. 과거에 차사고로 지금 육체를 제대로 쓸 수없다면 과거가 지금 현재를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돼지고기를 먹고 식중독이 걸린 사람들은 얼마 안 되어서 싱싱한 돼지고기를 먹어도 식중독에 걸릴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런 것을 두고 눌렀다고 하는 것이지요. 과거의 흔적 때문에 지금 눌려서 사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아동학대로 인해 권위자에게 제대로 말한 마디 하지 못하고 눌려서 사는 사람들, 어릴 때 상처로 지금 정신분열증으로 눌려 고통당하는 사람들, 남편으로부터 시어머니로부터 억압받아 눌려있는 사람들, 자녀를 향해, 부모님을 향해 늘 죄책감으로 눌려서 살아가는 사람, 염려와 걱정에 눌려서 사는 사람 등등 우리주위에 이런 마음이 상한 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눌린 자는 깊이 파고들면 마귀의 지배 하에 나타난 현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눌린 자를 해방시키기 위해 예수님이 오셨단 말입니다. 중독자들이 해마다 늘어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마약중독자를 생각해 봅시다. 본인은 이 중독에서 빠져나와야 산다는 것을 압니다. 그런데 나올 수 없는 것이지요. 왜 입니까 눌려 있기 때문입니다. 커피를 좀 줄여야하는데 이것이 내 마음대로 안 됩니다. 마셔야 마음이 놓이고 기분이 좋습니다. 이것은 눌려있기 때문에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어서 나타나는 현상이지요. 술 중독도 마찬가지입니다. 술 마시면 죽는다는 것 알면서도 술이 들어가야 자신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데 이것이 문제입니다. 완전히 눌려있기 때문이지요. 목이 타면 물을 찾듯이 술을 찾게 됩니다. 물을 마셔야 목이 마르지 않는 것처럼 술을 마셔야 해소가 되는 것, 이것이 바로 눌려있는 것입니다.
이런 차원에서 볼 때 내가 이것을 안 하면 잠이 안 오고 내가 일주일에 한두 번 이것을 안 하면 마음이 불안하고 하는 것이 왜 그러냐하면 영적으로 눌려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눌림의 해방은 주님을 믿고 그 분 말씀대로 사는 길 밖에 없습니다.
네 번째 은혜의 해를 전파하기 위해서 오셨다고 말합니다. 은혜의 해는 율법에서 희년을 말하는데 모든 노예가 계약과 종속적인 관계에서 해방되는 해가 있습니다. 땅이나 노예나 7년이 되면 풀어주는데 이 7년이 7년이 되는 해 즉, 49년의 다음해인 50년이 되는 해를 대 희년이라 하여 모든 종을 다 풀어 줍니다. 빚도 다 탕감되고 묶였던 것이 다 풀어집니다. 이 날은 완전한 해방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이 은혜를 전파한다는 것은 희년의 때를 몰고 온다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이 희년을 선포하기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모든 이를 해방시키기 위해서, 종을 해방시키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런 차원에서 지금이 은혜의 해입니다. 희년은 즐겁고 기쁜 날이지요. 그러니까 주님이 우리의 기쁨이요 감격이요 생명이요 해답인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은혜의 때를 선포하셨습니다. 묶여있는 죄의 사슬이 우리를 얼마나 괴롭혀왔습니까 어두움에서 갈 길을 찾지 못하여 유리하고 방황하며 앞이 캄캄한 경우를 수 없이 당하면서 살았습니다. 지금 나에게 짊어진 무거운 짐은 얼마나 무거운지 지치고 쓰러질 때가 많습니다. 이런 우리의 삶 속에서 은혜의 때를 선포했습니다. 이 은혜를 사모하시기를 소망합니다.
지금 주님 안에 자유가 있고 은혜가 있음을 분명히 보십시오. 돈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유가 주님이 없는 가운데 자유를 찾으려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주님이 없는 가운데 자유는 그것이 자유가 아닙니다. 죄에 얽매이는 허송세월을 보내는 것이요 헛된 삶입니다. 불행이도 우리가 언제 이 사실을 아느냐하면 시간을 다 보낸 후에 안다는 사실이지요. 고린도 후서6:2 ‘가라사대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지금이 그 때입니다. 은혜 받을 때에 방황하지 마십시오. 이사야53장 6‘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갈 길로 갔거늘’그랬습니다. 양이 목적 없이 아무 길로 가는 것처럼 우리의 본성이 이렇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자장되신 주님이 우리를 푸른 초장으로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 것이지요. 이것이 은혜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오늘 하루 예배가 중요하고 오늘 하루 말씀을 먹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요.
이사야 49장 8절 ‘여호와께서 또 가라사대 은혜의 때에 내가 네게 응답하였고 구원의 날에 내가 너를 도왔도다. 내가 장차 너를 보호하여 너로 백성의 언약을 삼으며 나라를 일으켜 그들로 그 황무하였던 땅을 기업으로 상속케 하리라 내가 잡혀 있는 자에게 이르기를 나오라 하며 흑암에 있는 자에게 나타나라 하리라’그 다음에 히브리서2:14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이는 실로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 ’지금 이사야 49장 말씀이나 히브리서 2장 말씀이 연결되어 설명되어지고 있는 장면입니다. 여기서 말씀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잡아 주기위해서 즉, 포로된 자, 눌린 자, 억압받는 자 들을 구원을 위해서 이 땅에 왔다고 말합니다. 그 다음에 마귀를 멸하기 위해서 이 땅에 왔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아브라함의 자손을 구원하기위해서요, 마귀를 멸하기 위해서라는 것이지요. 그러면 아브라함의 자손이 누구입니까 바로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입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마귀를 멸하십니다.
그러데 우리 쪽에서는 구원을 얻는 것이 중요하지요.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 쪽에서는 마귀를 멸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왜냐하면 사실 이 사탄이 루시엘이였습니다. 그런데 이 루시엘이 천상의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늘나라에서 쫓겨나 이 땅에 갇혔을 때는 루시퍼의 사탄으로 온 것이지요. 이 사탄이 이 세상에 사는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들을 자기 백성으로 삼았습니다.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어떤 자존심문제입니다. 여호와 하나님 입장에서는 하늘나라를 파괴하려고한 자입니다. 군대의 1/3을 이끌고 공중권세 잡은 자되어 여호와 하나님과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을 갈라놓았습니다. 이것은 어쩌면 여호와 하나님의 자존심문제라 이 말입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은 아브라함의 자손 즉, 우리를 위해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지상에 오셨습니다. 그러니까 이 두 가지 목적 때문에 오신 것 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그리스도께서 살아있는 동안 아브라함의 자손을 위해 예수님이 보혜사가 되어 주십니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부활하시여 하늘나라로 올라간 후에는 또 다른 보혜사를 보내주셨는데 즉, 다른 보혜사 성령이 모든 것을 해결해 주시는 것입니다. 성령은 모든 것을 가져다줍니다. 성령은 우리 옆에서 소리를 지르며 도우주십니다. 상담의 역할도 하고 유모역할도 하고 친구역할도 하시며 더불어 우리를 강하게 만들어 주십니다. 지금 성령이 예수님의 뜻을 따라 우리를 붙들어 주십니다.
예수님이 지상에 오실 때 사실 천군천사가 이 땅에 투입되었습니다. 예수그리스도가 여호와 하나님의 군대를 이끌고 이 세상에 침투했습니다. 열두 영 이상의 천사를 부릴 수 있습니다. 십사만 사천을 거느리고, 그러니까 이 십사만 사천은 완전한 숫자를 의미합니다. 이 군대를 거느리고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요한복음으로 따지자면 어두움에서 빛이 온 것입니다. 이것은 엄청난 변화이지요. 극에서 극으로의 변화인 것입니다. 빛이 이 세상에 오자마자 어두움은 박살난 것입니다. 이것은 완전한 변화입니다. 그러므로 이 지상에 예수님이 탄생했다는 것은 이제 여호와 하나님이 이 세상을 개입한다는 뜻이며 하늘나라의 군대가 이미 와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땅에 탄생한 이후부터 하늘나라가 이 땅에서 확장된 것입니다. 사실 여호와 하나님 이외에 마귀에게 명령할 힘을 가진 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성자여호와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와서 하늘의 권세로 명령하는 것입니다. 온전한 인간의 모습으로 명령합니다. 그리고 그 명령에 마귀는 굴복하고 말지요. 그와 더불어 동일하게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얻은 우리가 감히 마귀에게 명령할 수 있는 특권을 얻게 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님이 이미 승리하신 그 권세로 명령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권세는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버린 권세입니다. 우리는 이제 예수님이 하신 그 엄청난 권세를 가지고 세상에서 악한 영들과 싸울 수 있는 자격을 얻은 것입니다. 이제 완전히 삶을 바꾸어 놓은 것이지요. 이제 우리는 죄에서 속박당하지 않습니다. 죄에서 사함을 받을 수 있는 은혜를 이미 얻은 것입니다.
사망의 그늘에 앉아 있는 자들에게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의 침투가 시작된 것입니다. 이 여호와 하나님 나라의 침투는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권세로 계속 진행되고 있습니다. 어두움에 사로잡혀있는 사람들에게 하늘나라를 계속 침투시켜야합니다. 우리는 지금 하늘나라의 침투로 인해 평안을 소유할 수 있고 권능을 가지고 능력을 행하는 존재로 이미 서 있습니다.
이 하늘나라의 침투는 귀신이 물러가고 병이 고쳐지고 심령이 변화는 이런 역사가 일어납니다. 이것은 빛으로 어두움이 물러갔다는 증거입니다. 상한 마음에 빛으로 평안을 주님이 선포하십니다. 평강이 있을지어다. 이 말은 그 나라의 완전한 회복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제 교화와 가정과 직장이 하늘나라의 침투로 인해 계속 이기고 있습니다. 우리는 홀로 있지 않습니다. 하늘나라가 있습니다. 소망이 있습니다. 고향이 있습니다. 영원한 나라의 삶이 보장되어 있습니다. 하늘나라가 이미 우리마음에 임하니 하늘나라가 침투했으니 어두움은 물려갈 것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우리가 성전입니다. 우리가 그의 나라입니다. 우리가 가는 곳 마다 여호와 하나님나라가 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빛으로 살아야합니다.
학개나 스가랴, 스룹바벨같은 선지자들에 의해서 이스라엘백성들이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되어 고국으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이들을 통해서 이스라엘 재건의 역사를 일으킵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은 가난했습니다. 그들이 가진 것이 없어서 가난했지만 그 가난이 그냥 가난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심령이 가난한 것으로, 다시 이야기하면 여호와 하나님을 재산으로 삼고 그들은 힘을 다해 성전을 재건했습니다.
그들이 성전을 건축한 것은 재산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자녀들이 이웃나라에 종으로 팔러가서 고생을 하고 힘들게 사는 저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찾을 때 성전을 통해서 회복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의미도 있었습니다. 물론 성전 재건은 이스라엘백성들에게 하나의 정체성을 갖게 하고 성전중심으로 단결하며 민족성을 강화하기 위해서도 있지만 여호와 하나님중심으로 회복하기 위한 노력이 성전건축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지금 다른 나라에서 가난하게 살고 있는 자녀들과 형제들이 속히 돌아와 회복되기를 원하는 귀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가난함의 전통을 아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 앞에 온 모든 가난한자를 향해 복음이 전파되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만난 가난한 사람들은 이스라엘백성들 가운데 특히 가난한 사람 들이였습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실 때 찾아왔든 사람들이 소위 ‘아니아나고’라고 호칭하는 정말 가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사역하실 때 광야에서 만난 사람들도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심령이 곤고 사람 들이였으며 구원의 문제에 허덕이는 사람들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을 보더라도 그녀는 가난했습니다. 오죽가난하면 남편 다섯을 거쳐 갔겠습니까 그리고 사마리아여인은 갈급한 심령 이였으며 구원을 사모하는 여인이었습니다. 사마리아여인은 주님을 만나고 둘 다 해결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앉은뱅이, 소경 마디메오, 가나안 여인, 중풍병자 이런 자들은 실질적으로도 가난한 자들 이였고 심령이 갈급한 자들 이였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부자도 만났습니다. 삭게오, 백부장 등도 만났습니다. 만은 이들 역시 심령이 가난한 자였고 구원에 갈급한 사람 들이였습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는 가난한자에게 복음을 전하려 오셨습니다. 이 가난은 육신의 가난과 더불어 심령이 가난한 사람들을 모두 포함합니다. ‘하루비’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이 단어는 애굽에서도 천민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은 이런 천민 들이였습니다. 그리고 더불어 예수님을 기다리는 가난한 마음의 뜻도 내포되어있습니다.
본문에서는 사렙다 과부와 나아만 장군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사렙다 과부는 얼마나 가난한 여인인지 모릅니다. 정말 ‘하루비’였습니다. 남편이 없이 사는 그것도 가뭄으로 고통당하는 이 여인을 한 예로 들었고, 그리고 나아만 장군을 예로 들었습니다. 나아만 장군은 아람군대장관으로서 서열 2위의 위치에 있는 기족이요 부자요 권력자입니다. 그런데 이 나아만도 가난한 사람이라는 것이지요. 문둥병에 걸러 죽음을 앞두고 있는 이 사람이야 말로 정말가난한 자가 아닙니까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는 죽음을 보고 있고 문둥병으로 수모를 격어야 되는 이 사람이 가난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로 가난에서 해방된 사람들이지요.
이스라엘성전이 재건되어 가난한자들에게 소망이 되고 감격과 기대가 된 것처럼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성전이 되어 가난한자에게 소망과 비전과 꿈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누구나 오라,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네게로 오라 네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신 것은 예수님이라 말로 그들에게 가난에서 축복을, 질병에서 건강을, 고통에서 해방을, 피곤에서 쉼을 주실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은 포로 된 삶에 대해 굉장히 익숙합니다. 조금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하루비’라는 단어에서도 알 수 있듯이 애굽에서 종살이 할 때 천민의 대접을 받으면서 종살이를 했습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구원한 것처럼, 바벨론 포로 때 스룹바벨이 그들을 인도해 낸 것처럼 예수그리스도께서 죄에서 포로 된 이스라엘백성들을 인도해 내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결국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켜주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이지요. 여기서 포로 된 자는 자신이 포로가 아니라 정치적으로 인용하고 이해해야합니다. 예수님당시 헤롯의 이스라엘왕은 유대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남아티공화국 즉 사우디 공화국 사람 이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들 민족이 섬겼든 우상을 가져오게 되고 이스라엘나라에 대한 주인의식도 없을 뿐만 아니라 백성들에게 굉장히 포악한 존재였습니다. 자식들까지 서슴없이 죽이는 그런 사람 이였지요. 이런 왕의 압제 하에 로마로부터 속국으로 있으면서 이스라엘민족을 압제하고, 핍박하고, 폭력을 가하는 이런 정치적 배경에서 포로된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메시야관은 정치적인 포로의 해방을 의미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입성할 때 호산나 찬양을 하며 대대적인 환영을 한 것도 드디어 여호와 하나님이 약속한 메시야가 와서 로마로부터 해방시켜 주실 것 이라는 기대치가 굉장했던 것을 반영해주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환영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가롯유다도 그는 열심당 이였고 예수의 제자가 되려고 예수를 찾아왔을 때 이미 그는 예수님을 통해 로마로부터 독립을 쟁취할 것이라는 소망을 가지고 제자 가된 인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누구보다도 기대가 큰 사람 이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했으면서도 아무 일을 안 한 것입니다. 그냥 시간을 보내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판 것이지요. 그것도 아주 뜨뜻하고 당당하게 이런 일을 행했습니다. 그런데 결국 이런 것이 아니구나하는 것을 깨닫고 자살을 했지요.
사실 예수님은 구약의 이 말씀을 펼치면서 이제 포로된 자를 새롭게 해방시켜주시겠다고 합니다. 이사야9장6절 ‘이는 한 아이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그 정사와 평강의 더 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구약의 의미를 되새겨본다면 예수그리스도를 전투자 영웅 지배자로 표현했습니다. 그러니까 포로에서 해방시켜야할 장군의 의미가 드러나야 되는데 예수그리스도는 반대의 모습입니다. 샌들을 신고 난무한 옷을 입고 연약하며 볼품이 없는 그런 모습입니다. 결국 예수그리스도의 모습과 배경은 이스라엘백성에게는 소망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바리새인들이나 이스라엘지도자와 백성들은 예수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영적인 포로 자들, 미움에 눌린 자들, 죄로 고통당하는 자들 병든 자 모두가 포로된 자들입니다. 마치 전투적인 장군의 모습으로, 나라를 통치하는 임금의 모습으로 지상에 와서 사람을 해방시키기 위해 영적인 실체를 명령하여 ‘나가라’고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왕입니다. 장군입니다. 이런 행위는 결국 영적인 전쟁을 의미하는 것이고 마귀를 멸하는 행위입니다. 그러니까 육적인 독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자유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적인 실체를 나가라고 명령하는 사역을 꾸준히 하신 것이지요. 그러므로 주님의 지상에서의 사역은 귀신을 향해서 강력한 선언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사역이 마귀를 없이하는 사역 이였습니다.
현대인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의식주 해결도 아니요 성공과 실패의 문제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마음입니다. 그런데 이 마음이 빼앗겨서 사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사무엘상 15장20절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나는 왕과 함께 돌아가지 아니하리니 이는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 왕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음이니 이다’그다음에 16장 23절 ‘여호와 하나님이 부린 악신이 사울에게 이를 때에 다윗이 수금을 취하여 손으로 탄즉 사울이 상쾌하여 낫고 악신은 그에게서 떠나더라. 여기서 말씀을 보면 사울이 마음에 여호와 하나님을 버렸습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이 사울을 버리게 됩니다. 그와 동시에 악신이 찾아왔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떠난 삶은 결국 마귀의 밥이 될 수밖에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전서5장 8절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삼킬 자를 찾는다는 것은 공격할 자를 찾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공격대상이 누구나 하는 것인데 마태복음 12장 43-45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하고 이에 가로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비고 소제되고 수리되었거늘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이 말씀은 주님이 이 땅에 오셔서 귀신을 쫓아내었습니다. 그러면 그 빈 집에 주님을 모셔야 되는데 주님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상태의 삶이 마귀에게 공격을 당하는 표적이라 이 말입니다. 지금 이 악한 세대가 이처럼 마귀의 공격대상이라는 것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마음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만들었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을 영접해야 평안이 있는 것입니다. ‘내가 평안을 끼치려 왔노라’다시 말하면 포로된 너희 마음을 해방시켜 내가평안을 주겠다는 의지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마음에 예수님을 주인으로 영접하지 않음으로 인해서,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않음으로 인해서 마귀의 공격대상이 되고 마귀에게 붙들려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집을 잘 지어놓아도 그 집에 사람이 살지 않으면 별의 별것이 다 찾아옵니다. 들쥐가 찾아오지요, 사람들이 빈집에서 자기도하고 오물도 남기기도하고 벌레나 산짐승들이 들락날락 그리기도하고 그래서 집은 순식간에 폐허가 되고 맙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마음이 비여있으면 더러운 것들이 찾아오게 마련입니다. 로마서 1장 28‘또한 저희가 마음에 여호와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여호와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버려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그러니까 마음에 여호와 하나님이 없는 삶이 이런 삶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사로잡힌 자입니다. 다시 말하면 마귀에 완전히 포로된 자를 의미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를 싫어하는 자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버려두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여호와 하나님의 품을 떠나서 공허하게 살지만 그러나 그냥 내버려두었습니다. 여기서 내버려 두다는 뜻은 인연을 끊는다는 말인데 그러니까 마귀가 빈 마음에 주인이 되어서 완전히 마음을 사로잡는 것입니다.
이런 더러운 죄인 된 삶의 포로에서 해방되는 길은 여호와 하나님말씀을 마음에 믿고 의로 행하는 삶입니다.
세 번째 눌린 자를 해방시켜 주신다고 했습니다. 눌린 자란 마음이 상한 자를 의미합니다. 과거에 차사고로 지금 육체를 제대로 쓸 수없다면 과거가 지금 현재를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돼지고기를 먹고 식중독이 걸린 사람들은 얼마 안 되어서 싱싱한 돼지고기를 먹어도 식중독에 걸릴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런 것을 두고 눌렀다고 하는 것이지요. 과거의 흔적 때문에 지금 눌려서 사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아동학대로 인해 권위자에게 제대로 말한 마디 하지 못하고 눌려서 사는 사람들, 어릴 때 상처로 지금 정신분열증으로 눌려 고통당하는 사람들, 남편으로부터 시어머니로부터 억압받아 눌려있는 사람들, 자녀를 향해, 부모님을 향해 늘 죄책감으로 눌려서 살아가는 사람, 염려와 걱정에 눌려서 사는 사람 등등 우리주위에 이런 마음이 상한 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눌린 자는 깊이 파고들면 마귀의 지배 하에 나타난 현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눌린 자를 해방시키기 위해 예수님이 오셨단 말입니다. 중독자들이 해마다 늘어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마약중독자를 생각해 봅시다. 본인은 이 중독에서 빠져나와야 산다는 것을 압니다. 그런데 나올 수 없는 것이지요. 왜 입니까 눌려 있기 때문입니다. 커피를 좀 줄여야하는데 이것이 내 마음대로 안 됩니다. 마셔야 마음이 놓이고 기분이 좋습니다. 이것은 눌려있기 때문에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어서 나타나는 현상이지요. 술 중독도 마찬가지입니다. 술 마시면 죽는다는 것 알면서도 술이 들어가야 자신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데 이것이 문제입니다. 완전히 눌려있기 때문이지요. 목이 타면 물을 찾듯이 술을 찾게 됩니다. 물을 마셔야 목이 마르지 않는 것처럼 술을 마셔야 해소가 되는 것, 이것이 바로 눌려있는 것입니다.
이런 차원에서 볼 때 내가 이것을 안 하면 잠이 안 오고 내가 일주일에 한두 번 이것을 안 하면 마음이 불안하고 하는 것이 왜 그러냐하면 영적으로 눌려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눌림의 해방은 주님을 믿고 그 분 말씀대로 사는 길 밖에 없습니다.
네 번째 은혜의 해를 전파하기 위해서 오셨다고 말합니다. 은혜의 해는 율법에서 희년을 말하는데 모든 노예가 계약과 종속적인 관계에서 해방되는 해가 있습니다. 땅이나 노예나 7년이 되면 풀어주는데 이 7년이 7년이 되는 해 즉, 49년의 다음해인 50년이 되는 해를 대 희년이라 하여 모든 종을 다 풀어 줍니다. 빚도 다 탕감되고 묶였던 것이 다 풀어집니다. 이 날은 완전한 해방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이 은혜를 전파한다는 것은 희년의 때를 몰고 온다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이 희년을 선포하기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모든 이를 해방시키기 위해서, 종을 해방시키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런 차원에서 지금이 은혜의 해입니다. 희년은 즐겁고 기쁜 날이지요. 그러니까 주님이 우리의 기쁨이요 감격이요 생명이요 해답인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은혜의 때를 선포하셨습니다. 묶여있는 죄의 사슬이 우리를 얼마나 괴롭혀왔습니까 어두움에서 갈 길을 찾지 못하여 유리하고 방황하며 앞이 캄캄한 경우를 수 없이 당하면서 살았습니다. 지금 나에게 짊어진 무거운 짐은 얼마나 무거운지 지치고 쓰러질 때가 많습니다. 이런 우리의 삶 속에서 은혜의 때를 선포했습니다. 이 은혜를 사모하시기를 소망합니다.
지금 주님 안에 자유가 있고 은혜가 있음을 분명히 보십시오. 돈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유가 주님이 없는 가운데 자유를 찾으려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주님이 없는 가운데 자유는 그것이 자유가 아닙니다. 죄에 얽매이는 허송세월을 보내는 것이요 헛된 삶입니다. 불행이도 우리가 언제 이 사실을 아느냐하면 시간을 다 보낸 후에 안다는 사실이지요. 고린도 후서6:2 ‘가라사대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지금이 그 때입니다. 은혜 받을 때에 방황하지 마십시오. 이사야53장 6‘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갈 길로 갔거늘’그랬습니다. 양이 목적 없이 아무 길로 가는 것처럼 우리의 본성이 이렇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자장되신 주님이 우리를 푸른 초장으로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 것이지요. 이것이 은혜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오늘 하루 예배가 중요하고 오늘 하루 말씀을 먹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요.
이사야 49장 8절 ‘여호와께서 또 가라사대 은혜의 때에 내가 네게 응답하였고 구원의 날에 내가 너를 도왔도다. 내가 장차 너를 보호하여 너로 백성의 언약을 삼으며 나라를 일으켜 그들로 그 황무하였던 땅을 기업으로 상속케 하리라 내가 잡혀 있는 자에게 이르기를 나오라 하며 흑암에 있는 자에게 나타나라 하리라’그 다음에 히브리서2:14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이는 실로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 ’지금 이사야 49장 말씀이나 히브리서 2장 말씀이 연결되어 설명되어지고 있는 장면입니다. 여기서 말씀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잡아 주기위해서 즉, 포로된 자, 눌린 자, 억압받는 자 들을 구원을 위해서 이 땅에 왔다고 말합니다. 그 다음에 마귀를 멸하기 위해서 이 땅에 왔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아브라함의 자손을 구원하기위해서요, 마귀를 멸하기 위해서라는 것이지요. 그러면 아브라함의 자손이 누구입니까 바로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입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마귀를 멸하십니다.
그러데 우리 쪽에서는 구원을 얻는 것이 중요하지요.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 쪽에서는 마귀를 멸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왜냐하면 사실 이 사탄이 루시엘이였습니다. 그런데 이 루시엘이 천상의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늘나라에서 쫓겨나 이 땅에 갇혔을 때는 루시퍼의 사탄으로 온 것이지요. 이 사탄이 이 세상에 사는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들을 자기 백성으로 삼았습니다.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어떤 자존심문제입니다. 여호와 하나님 입장에서는 하늘나라를 파괴하려고한 자입니다. 군대의 1/3을 이끌고 공중권세 잡은 자되어 여호와 하나님과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을 갈라놓았습니다. 이것은 어쩌면 여호와 하나님의 자존심문제라 이 말입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은 아브라함의 자손 즉, 우리를 위해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지상에 오셨습니다. 그러니까 이 두 가지 목적 때문에 오신 것 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그리스도께서 살아있는 동안 아브라함의 자손을 위해 예수님이 보혜사가 되어 주십니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부활하시여 하늘나라로 올라간 후에는 또 다른 보혜사를 보내주셨는데 즉, 다른 보혜사 성령이 모든 것을 해결해 주시는 것입니다. 성령은 모든 것을 가져다줍니다. 성령은 우리 옆에서 소리를 지르며 도우주십니다. 상담의 역할도 하고 유모역할도 하고 친구역할도 하시며 더불어 우리를 강하게 만들어 주십니다. 지금 성령이 예수님의 뜻을 따라 우리를 붙들어 주십니다.
예수님이 지상에 오실 때 사실 천군천사가 이 땅에 투입되었습니다. 예수그리스도가 여호와 하나님의 군대를 이끌고 이 세상에 침투했습니다. 열두 영 이상의 천사를 부릴 수 있습니다. 십사만 사천을 거느리고, 그러니까 이 십사만 사천은 완전한 숫자를 의미합니다. 이 군대를 거느리고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요한복음으로 따지자면 어두움에서 빛이 온 것입니다. 이것은 엄청난 변화이지요. 극에서 극으로의 변화인 것입니다. 빛이 이 세상에 오자마자 어두움은 박살난 것입니다. 이것은 완전한 변화입니다. 그러므로 이 지상에 예수님이 탄생했다는 것은 이제 여호와 하나님이 이 세상을 개입한다는 뜻이며 하늘나라의 군대가 이미 와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땅에 탄생한 이후부터 하늘나라가 이 땅에서 확장된 것입니다. 사실 여호와 하나님 이외에 마귀에게 명령할 힘을 가진 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성자여호와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와서 하늘의 권세로 명령하는 것입니다. 온전한 인간의 모습으로 명령합니다. 그리고 그 명령에 마귀는 굴복하고 말지요. 그와 더불어 동일하게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얻은 우리가 감히 마귀에게 명령할 수 있는 특권을 얻게 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님이 이미 승리하신 그 권세로 명령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권세는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버린 권세입니다. 우리는 이제 예수님이 하신 그 엄청난 권세를 가지고 세상에서 악한 영들과 싸울 수 있는 자격을 얻은 것입니다. 이제 완전히 삶을 바꾸어 놓은 것이지요. 이제 우리는 죄에서 속박당하지 않습니다. 죄에서 사함을 받을 수 있는 은혜를 이미 얻은 것입니다.
사망의 그늘에 앉아 있는 자들에게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의 침투가 시작된 것입니다. 이 여호와 하나님 나라의 침투는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권세로 계속 진행되고 있습니다. 어두움에 사로잡혀있는 사람들에게 하늘나라를 계속 침투시켜야합니다. 우리는 지금 하늘나라의 침투로 인해 평안을 소유할 수 있고 권능을 가지고 능력을 행하는 존재로 이미 서 있습니다.
이 하늘나라의 침투는 귀신이 물러가고 병이 고쳐지고 심령이 변화는 이런 역사가 일어납니다. 이것은 빛으로 어두움이 물러갔다는 증거입니다. 상한 마음에 빛으로 평안을 주님이 선포하십니다. 평강이 있을지어다. 이 말은 그 나라의 완전한 회복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제 교화와 가정과 직장이 하늘나라의 침투로 인해 계속 이기고 있습니다. 우리는 홀로 있지 않습니다. 하늘나라가 있습니다. 소망이 있습니다. 고향이 있습니다. 영원한 나라의 삶이 보장되어 있습니다. 하늘나라가 이미 우리마음에 임하니 하늘나라가 침투했으니 어두움은 물려갈 것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우리가 성전입니다. 우리가 그의 나라입니다. 우리가 가는 곳 마다 여호와 하나님나라가 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빛으로 살아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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