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절] 첫 사람과 둘째 사람
본문
인류의 첫 사람 아담은 시험에 진 사람이고 인류의 둘째 사람으로 대표되는 예수님은 시험에 이긴 사람입니다. 시험에 짐에서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시험을 이김에서 죄가 극복되었습니다. 이 시간 첫 사람의 시험에서의 실패와 둘째 사람의 시험에서의 승리의 두 면을 살펴봄에서 사순절의 절기를 뜻 있게 사는 지혜를 얻고자 합니다.
시험한다는 것은 잘하는가 못하는가 시켜보는 것입니다. 시험을 보게하는 쪽에서는 시험을 치는 사람들이 잘하여 합격하기를 바라는 경우도 있겠고 반대로 잘못하여 실격하기를 바라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시험의 목적을 서너 가지로 요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첫 번째는 사람의 인내와 능력을 알아보기 위하여 시험을 치게 합니다. 그 사람의 됨됨이와 자질 등을 테스트하는 것입니다. 대학입시나 기능 시험 등이 예가 됩니다.
때로 인간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경우를 구약에서 보는데 유대인들이 광야에서 목이 마르고 배가 고플 때 여호와 하나님을 시험하였다고 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기적의 능력을 테스트한 것입니다. 지금도 여호와 하나님이 초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분인가 시험하는 교인들이 있습니다. 사람을 상대하여 선한 마음으로 시험을 하는 것은 좋으나 여호와 하나님을 상대로 하여 시험하는 일은 절대로 허락되지 않습니다.
둘째로 인간의 진심을 떠보기 위한 경우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말로나 형식적인 무엇 가지고는 안되고 그 충성심을 구체적으로 실천해 보이도록 하는 시험입니다.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을 바치라는 여호와 하나님의 시험에 그 아들에게 장작을 지워서 모리아산 까지 갔고 단을 쌓고 그 아들을 잡아죽이려고 칼을 들었던 것입니다. 그 순간 여호와 하나님의 시험에 합격하여 아들은 살았습니다.
세 번째 종류의 시험은 상대방을 파멸시키려는 의도를 가진 시험입니다. 이것은 사탄이 하와를 시험하고 아담을 시험하고 욥을 시험한 경우와 같습니다. 상대방을 악에 빠지게 하여 멸망하도록 하는 시험입니다. 야고보서 1장 13절에: “여호와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이 때의 시험은 악한 시험입니다.
상대방을 파괴시키려는 의도를 가진 시험을 여호와 하나님이 절대로 아니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을 시험하셔서 축복하셨던 그런 시험은 종종 하십니다. 오늘 마태복음 본문에 나오는 예수님을 시험하는 사탄의 시험은 바로 이 악독한 의도의 시험입니다. 예수님의 복음사역 처음부터 박살내려는 의도가 숨겨져 있는 시험이었습니다.
창세기 본문에서는 인류 역사 시초에 사탄이 아담을 시험했고 마태복음에서 인류구원의 역사 첫 출발점에서 메시아 예수를 사탄이 시험하였습니다. 사탄은 세상과 인류가 잘되는 것을 보지 못합니다. 악의 세력이 선의 세력을 그 출발부터 방해하고 있음을 봅니다. 역사 초기부터 사탄의 세력이 같이하고 있음을 성경은 알려줍니다. 그리고 실제로 이 땅에 악한 열매들이 계속 열고 있는 것을 보아서 사탄의 역사는 계속 활동하고 있음을 압니다. 사람을 죽이는 살인과 전쟁, 이웃을 괴롭히고 착취하는 악한 세력들이 이 세상에 현존하고 있음을 봅니다. 사탄의 권세는 실로 대단합니다. 매우 두려운 존재입니다. 하와와 아담을 유혹하여 타락시키고 심지어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에게까지 접근하여 시험한 것을 보면 그 집요함과 완악함은 상상을 불허합니다. 실로 우리 모두는 사탄의 시험, 우리를 멸망시키려는 그 의도적 시험에 경계에 경계를 더하여야 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유혹에 넘어간 이유는 욕심 때문이었습니다. 첫 사람들은 에덴동산에서 유일하게 금지된 선악과를 따서 먹음에서 사탄의 시험에 실패하였습니다. 이 유혹에 넘어간 것은 첫 인간들에게 식욕, 명예욕, 성욕이라는 본능이 주어졌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이 그 시험에 실패했다고 평을 받는 이유는 그들에게 흑과 백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지가 주어져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인간의 본성과 자유의지의 부여에 관한 신학적이고 철학적인 논쟁은 끝이 없습니다만 간단히결론만을 말한다면 여호와 하나님이 인간을 지으시되 기계로 만든 것이 아니고 스스로 알아서 선택하도록 인격체로 지었다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다는 성경의 진술이 바로 그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유의지를 주셨다는 것은 흑과 백, 선과 악이 이미 존재했다는 말입니다. 사탄이 창조 처음부터 존재한 것입니다. 사탄이 존재하고 악이 존재한 세상이기에 자유의지가 주어진 것입니다. 선만 존재하는 세계라면 자유의지는 필요치 않았을 것입니다. 악과 선이 존재하기에 자유의지가 필요하고 따라서 인간의 책임성이 주어집니다. 자유의지가 주어지지 않았다면 인간에게는 아무런 책임이 없습니다. 죄가 성립이 되는 것은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자유의지는 흑과 백이 존재한 세상에 인간이 던져졌다는 증거입니다. 이런 세계이기에 인간이 존재하기 위하여 최소한의 욕구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하와가 사탄의 유혹을 받은 것은 선악과를 보면서 욕심이 발동했기 때문입니다. 창3: 6절에 하와가 “먹음직하고 보암직도 하고 탐스럽기도 한 나무” 라고 생각한 대목에서 하와의 욕심이 발동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녀의 욕심이 도를 넘어서고 있는데 있습니다. 구약의 원어로 죄란 화살이 목표를 넘어가거나 미치지 못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와와 아담은 욕심의 도를 넘고 있습니다. 첫째는 식욕, 물욕에 대한 도를 넘어서고 있습니다. 둘째는 교만과 오만의 죄를 짓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함에서 스스로 여호와 하나님의 자리에 올라서는 죄를 범하였습니다. 사탄이 유혹한 말이 “이 선악과를 따먹으면 눈이 밝아 여호와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안다” 였었는데 하와는 이 말에 완전히 유혹되어 사탄의 시험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인간들은 묘하여 돈과 명예와 성, 이 세 가지를 함께 소유하려고 합니다. 첫 아담의 죄가 이것을 보여줍니다. 바로 이것을 신학이 원죄라고 설명합니다. 모든 인간들이 원죄를 타고난다고 신학은 설명합니다. 첫 사람의 이름이 아담인데 고유명사이기에 앞서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모든 인간은 이 땅에 태어나면서 위의 세 가지 욕심을 다 타고납니다. 원죄의 인간입니다. 하지만 여호와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이 책임적인 자유의지를 가지고 세 가지 욕심을 여호와 하나님의 뜻에 맞게 조절하면서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지 말고 한 번 주어진 삶은 멋지게 살도록 요청하고 있습니다.
이 강력한 교훈을 예수님이 광야에서 몸으로 보여주었습니다. 사탄의 시험에서 친히 승리함에서 둘째 아담의 참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예수님이 사탄에게 받은 시험 역시 아담이 받은 것과 같습니다. 첫 번째 시험이 물욕, 식욕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아담에게는 선악과 시험이었는데 예수님에게는 떡의 시험이었습니다. 40일간을 광야에서 금식하면서 기도하였던 그에게 돌로 떡을 만들어 먹으라는 시험은 첫 사람에 비하면 몇 십 배 더 어려운 시험이었습니다. 사람이 먹지 않고 최대로 40일은 견뎌낸다고 합니다. 처음 며칠간은 배가 몹시 고파서 참기가 매우 어렵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한 주간 정도 지나면서부터는 물만 마시면서 40일간을 견디면서 기도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40일 금식이 끝난 후가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때 음식을 보면 먹고싶어서 장이 속된 말로 환장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허겁지겁 음식을 입에 넣는 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장이 고장나서 죽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내가 듣기로도 몇 분의 목사들이 40일 금식기도하고 죽었습니다. 40일간 굶어서 죽는 것이 아니고 금식 후에 음식조절을 잘못하여 죽는것입니다. 그러니 40일간을 굶으신 예수님 앞에 나타나서 떡을 만들어 먹으라고 하는 사탄의 시험은 너무나 큰 유혹이었습니다.
“만약 네가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면”이라는 사탄의 시험 전제 조건도 묘한 것입니다. 실로 예수님은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이것을 잘 아는 사탄은 그것을 역이용하고 있습니다. 상대방을 격동시키는 방법도 너무나 잘 알고 있던 사탄이었습니다. 격동하여 홧김에 비 본래적인 일을 하도록 하는 교묘한 사탄의 수법이기도 합니다. 물을 포도주로 만들 수 있었던 예수님이시니 마음만 먹으면 돌로 떡을 만드는 것은 간단합니다. 하지만 사탄의 악한 시험을 아셨기에 예수님은 격동하지 않고 조용하게 신명기 8: 3절을 인용하시면서 대처하였습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고 여호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 이 말씀 한방으로 사탄을 다운시켰습니다.
하지만 사탄은 다시 일어나서 더 무섭게 덤벼들었습니다. 과연 사탄은 끈질겼습니다. 두 번째 시험은 더 심층적이었습니다. 사탄은 예수님을 성으로 데리고 가서 성전의 꼭대기에 세우고는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면 여기서 뛰어 내려라. 천사가 너를 도와 발이 돌에 부디치지 않게 손으로 받들어 주어 죽지 않고 살게 할 것이다. ” 이 시험에는 사탄이 시편 91편 11, 12절을 인용하였습니다. 첫 시험 때 예수님의 성경인용에서 실패한 것을 알았던 사탄은 이번에 선수를 쳐서 먼저 성경을 인용하였습니다. 실로 사탄은 여호와 하나님도 잘 알고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도 잘 알았고 성경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말씀의 적용이 잘못되었습니다. 악용이었습니다. 적 그리스도도 진리를 압니다. 하지만 진리를 거꾸로 이용하여 악을 만드는데 사용하곤 합니다. 이에 예수님은 신명기 6장 16절을 인용하셔서 반박하였습니다. “주
너의 여호와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라고 책망하심에서 두 번째의 시험에서 승리하였습니다
이 두 번째 시험은 종교인들이 쉽게 빠지는 시험인데 교권과 기적에 대한 잘못된 믿음 때문에 생기는 유혹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성전은 이스라엘 전체를 다스리는 권력과 부의 핵심이었습니다. 성전을 맡아 관리하는 자들이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하여 권력과 부를 얻기 위하여 갖가지 부정과 불의를 성전 안에서 저질렀습니다. 이들은 경건을 일종의 세속적인 욕망을 위하여 이용하였습니다. 겉으로는 가장 거룩한 신앙인 행세를 하였지만 내용적으로는 종교의 교권과 여호와 하나님의 기적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편의를 도모하고 세속적인 욕망을 채웠던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기적을 통하여 치유의 은총이 일어나면 그것을 자기네들의 물질적인 이익을 추구하고는 방편으로 이용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요즈음의 예를 들면 급박 종말론자들이 그런 시험에 넘어간 대표적인 사람들입니다. 종말과 기적을 이용하여 육적인 이득을 추구하는 자들입니다. 요즈음 몇 몇 대 교회들의 분란을 보면 그 목회자들이 사탄의 유혹에 넘어간 것이 분명합니다. 교회 안에서의 여호와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을 목회자들의 개인적인 이익을 위하여 이용하다가 문제가 발생한 것입니다. 지금도 교회 공동체 안에는 여호와 하나님의 신비적인 기적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것을 성전 맡은 자들이 악용하고 오용하는 데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이 거부한 시험은 기적 자체가 아니라 그 기적을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이나 공동체의 선을 위해서 쓰는 것이 아니고 반대로 목회자 자신의 세속적인 유익을 위한 유혹입니다. 예수님의 두 번째 시험의 승리는 기복적 신앙심에 대한 거부입니다. 믿는 성도들이 쉽게 빠지는 시험 이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시험의 숭리는 우리들에게 큰 교훈을 줍니다.
세 번째로 사탄은 아주 높은 산으로 예수님을 이끌고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
광을 다 보여주고는, 자기에게 엎드려 절하면 그 모든 영광을 주겠다고 했습니다. 세상의 권세와 영광은 인간에게 대단한 매력을 갖고 있습니다. 한 번 세상의 권력을 쥐었던 사람은 그것을 놓기가 쉽지 않다고 합니다. 그래서 정권을 탈취하고 그 정권을 계속 유지하려고 수단과 방법을 다 합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권력을 차지하려고 합니다. 별 하나를 더 달기 위하여, 무궁화 하나를 더 달기 위하여 기천만원, 수억의 돈을 아깝지 않게 뇌물로 바치는 것은 권력과 그 영광이 너무나 좋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인간들 거의 모두가 빠지는 마지막 시험 앞에 서게 된 것입니다. 순식간에 만국을 한 눈에 보았고 그 만국의 권세를 보았고 그 영광의 대단함을 확인한 직후에 “이 모든 권세와 영광을 절만 하면 다 주겠다”는 사탄의 시험을 물리친다는 것은 정말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주 너의 여호와 하나님만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라는 성경 말씀을 인용하면서 간단하게 승리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사탄아 물러가라” 라고 마지막 일격을 가하여 사탄을 물리쳤습니다.
정말로 힘들고 어려운 시험을 승리하신 것입니다.
첫 사람 아담처럼 살 것인가 아니면 둘 째 사람 예수님처럼 살것인가 우리 모두는 이 결단 앞에 늘 서 있습니다. 사탄의 시험에 넘어갈 것인가 아니면 그것을 단호하게 거부할 것인가 결단하시기 바랍니다. 첫 사람 아담과 하와처럼 살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둘 째 사람이 우리에게 오신 것입니다. 그의 지상에서의 고난의 흔적들은 사탄의 시험을 극복하기 위한 과정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사순절 절기에 성도 여러분들이 추구하여야 할 삶의 방향을 제시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처럼 사탄의 유혹을 단호하게 물리치면서 멋진 삶을 살아가십시다.
시험한다는 것은 잘하는가 못하는가 시켜보는 것입니다. 시험을 보게하는 쪽에서는 시험을 치는 사람들이 잘하여 합격하기를 바라는 경우도 있겠고 반대로 잘못하여 실격하기를 바라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시험의 목적을 서너 가지로 요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첫 번째는 사람의 인내와 능력을 알아보기 위하여 시험을 치게 합니다. 그 사람의 됨됨이와 자질 등을 테스트하는 것입니다. 대학입시나 기능 시험 등이 예가 됩니다.
때로 인간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경우를 구약에서 보는데 유대인들이 광야에서 목이 마르고 배가 고플 때 여호와 하나님을 시험하였다고 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기적의 능력을 테스트한 것입니다. 지금도 여호와 하나님이 초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분인가 시험하는 교인들이 있습니다. 사람을 상대하여 선한 마음으로 시험을 하는 것은 좋으나 여호와 하나님을 상대로 하여 시험하는 일은 절대로 허락되지 않습니다.
둘째로 인간의 진심을 떠보기 위한 경우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말로나 형식적인 무엇 가지고는 안되고 그 충성심을 구체적으로 실천해 보이도록 하는 시험입니다.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을 바치라는 여호와 하나님의 시험에 그 아들에게 장작을 지워서 모리아산 까지 갔고 단을 쌓고 그 아들을 잡아죽이려고 칼을 들었던 것입니다. 그 순간 여호와 하나님의 시험에 합격하여 아들은 살았습니다.
세 번째 종류의 시험은 상대방을 파멸시키려는 의도를 가진 시험입니다. 이것은 사탄이 하와를 시험하고 아담을 시험하고 욥을 시험한 경우와 같습니다. 상대방을 악에 빠지게 하여 멸망하도록 하는 시험입니다. 야고보서 1장 13절에: “여호와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이 때의 시험은 악한 시험입니다.
상대방을 파괴시키려는 의도를 가진 시험을 여호와 하나님이 절대로 아니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을 시험하셔서 축복하셨던 그런 시험은 종종 하십니다. 오늘 마태복음 본문에 나오는 예수님을 시험하는 사탄의 시험은 바로 이 악독한 의도의 시험입니다. 예수님의 복음사역 처음부터 박살내려는 의도가 숨겨져 있는 시험이었습니다.
창세기 본문에서는 인류 역사 시초에 사탄이 아담을 시험했고 마태복음에서 인류구원의 역사 첫 출발점에서 메시아 예수를 사탄이 시험하였습니다. 사탄은 세상과 인류가 잘되는 것을 보지 못합니다. 악의 세력이 선의 세력을 그 출발부터 방해하고 있음을 봅니다. 역사 초기부터 사탄의 세력이 같이하고 있음을 성경은 알려줍니다. 그리고 실제로 이 땅에 악한 열매들이 계속 열고 있는 것을 보아서 사탄의 역사는 계속 활동하고 있음을 압니다. 사람을 죽이는 살인과 전쟁, 이웃을 괴롭히고 착취하는 악한 세력들이 이 세상에 현존하고 있음을 봅니다. 사탄의 권세는 실로 대단합니다. 매우 두려운 존재입니다. 하와와 아담을 유혹하여 타락시키고 심지어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에게까지 접근하여 시험한 것을 보면 그 집요함과 완악함은 상상을 불허합니다. 실로 우리 모두는 사탄의 시험, 우리를 멸망시키려는 그 의도적 시험에 경계에 경계를 더하여야 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유혹에 넘어간 이유는 욕심 때문이었습니다. 첫 사람들은 에덴동산에서 유일하게 금지된 선악과를 따서 먹음에서 사탄의 시험에 실패하였습니다. 이 유혹에 넘어간 것은 첫 인간들에게 식욕, 명예욕, 성욕이라는 본능이 주어졌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이 그 시험에 실패했다고 평을 받는 이유는 그들에게 흑과 백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지가 주어져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인간의 본성과 자유의지의 부여에 관한 신학적이고 철학적인 논쟁은 끝이 없습니다만 간단히결론만을 말한다면 여호와 하나님이 인간을 지으시되 기계로 만든 것이 아니고 스스로 알아서 선택하도록 인격체로 지었다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다는 성경의 진술이 바로 그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유의지를 주셨다는 것은 흑과 백, 선과 악이 이미 존재했다는 말입니다. 사탄이 창조 처음부터 존재한 것입니다. 사탄이 존재하고 악이 존재한 세상이기에 자유의지가 주어진 것입니다. 선만 존재하는 세계라면 자유의지는 필요치 않았을 것입니다. 악과 선이 존재하기에 자유의지가 필요하고 따라서 인간의 책임성이 주어집니다. 자유의지가 주어지지 않았다면 인간에게는 아무런 책임이 없습니다. 죄가 성립이 되는 것은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자유의지는 흑과 백이 존재한 세상에 인간이 던져졌다는 증거입니다. 이런 세계이기에 인간이 존재하기 위하여 최소한의 욕구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하와가 사탄의 유혹을 받은 것은 선악과를 보면서 욕심이 발동했기 때문입니다. 창3: 6절에 하와가 “먹음직하고 보암직도 하고 탐스럽기도 한 나무” 라고 생각한 대목에서 하와의 욕심이 발동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녀의 욕심이 도를 넘어서고 있는데 있습니다. 구약의 원어로 죄란 화살이 목표를 넘어가거나 미치지 못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와와 아담은 욕심의 도를 넘고 있습니다. 첫째는 식욕, 물욕에 대한 도를 넘어서고 있습니다. 둘째는 교만과 오만의 죄를 짓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함에서 스스로 여호와 하나님의 자리에 올라서는 죄를 범하였습니다. 사탄이 유혹한 말이 “이 선악과를 따먹으면 눈이 밝아 여호와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안다” 였었는데 하와는 이 말에 완전히 유혹되어 사탄의 시험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인간들은 묘하여 돈과 명예와 성, 이 세 가지를 함께 소유하려고 합니다. 첫 아담의 죄가 이것을 보여줍니다. 바로 이것을 신학이 원죄라고 설명합니다. 모든 인간들이 원죄를 타고난다고 신학은 설명합니다. 첫 사람의 이름이 아담인데 고유명사이기에 앞서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모든 인간은 이 땅에 태어나면서 위의 세 가지 욕심을 다 타고납니다. 원죄의 인간입니다. 하지만 여호와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이 책임적인 자유의지를 가지고 세 가지 욕심을 여호와 하나님의 뜻에 맞게 조절하면서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지 말고 한 번 주어진 삶은 멋지게 살도록 요청하고 있습니다.
이 강력한 교훈을 예수님이 광야에서 몸으로 보여주었습니다. 사탄의 시험에서 친히 승리함에서 둘째 아담의 참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예수님이 사탄에게 받은 시험 역시 아담이 받은 것과 같습니다. 첫 번째 시험이 물욕, 식욕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아담에게는 선악과 시험이었는데 예수님에게는 떡의 시험이었습니다. 40일간을 광야에서 금식하면서 기도하였던 그에게 돌로 떡을 만들어 먹으라는 시험은 첫 사람에 비하면 몇 십 배 더 어려운 시험이었습니다. 사람이 먹지 않고 최대로 40일은 견뎌낸다고 합니다. 처음 며칠간은 배가 몹시 고파서 참기가 매우 어렵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한 주간 정도 지나면서부터는 물만 마시면서 40일간을 견디면서 기도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40일 금식이 끝난 후가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때 음식을 보면 먹고싶어서 장이 속된 말로 환장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허겁지겁 음식을 입에 넣는 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장이 고장나서 죽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내가 듣기로도 몇 분의 목사들이 40일 금식기도하고 죽었습니다. 40일간 굶어서 죽는 것이 아니고 금식 후에 음식조절을 잘못하여 죽는것입니다. 그러니 40일간을 굶으신 예수님 앞에 나타나서 떡을 만들어 먹으라고 하는 사탄의 시험은 너무나 큰 유혹이었습니다.
“만약 네가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면”이라는 사탄의 시험 전제 조건도 묘한 것입니다. 실로 예수님은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이것을 잘 아는 사탄은 그것을 역이용하고 있습니다. 상대방을 격동시키는 방법도 너무나 잘 알고 있던 사탄이었습니다. 격동하여 홧김에 비 본래적인 일을 하도록 하는 교묘한 사탄의 수법이기도 합니다. 물을 포도주로 만들 수 있었던 예수님이시니 마음만 먹으면 돌로 떡을 만드는 것은 간단합니다. 하지만 사탄의 악한 시험을 아셨기에 예수님은 격동하지 않고 조용하게 신명기 8: 3절을 인용하시면서 대처하였습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고 여호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 이 말씀 한방으로 사탄을 다운시켰습니다.
하지만 사탄은 다시 일어나서 더 무섭게 덤벼들었습니다. 과연 사탄은 끈질겼습니다. 두 번째 시험은 더 심층적이었습니다. 사탄은 예수님을 성으로 데리고 가서 성전의 꼭대기에 세우고는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면 여기서 뛰어 내려라. 천사가 너를 도와 발이 돌에 부디치지 않게 손으로 받들어 주어 죽지 않고 살게 할 것이다. ” 이 시험에는 사탄이 시편 91편 11, 12절을 인용하였습니다. 첫 시험 때 예수님의 성경인용에서 실패한 것을 알았던 사탄은 이번에 선수를 쳐서 먼저 성경을 인용하였습니다. 실로 사탄은 여호와 하나님도 잘 알고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도 잘 알았고 성경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말씀의 적용이 잘못되었습니다. 악용이었습니다. 적 그리스도도 진리를 압니다. 하지만 진리를 거꾸로 이용하여 악을 만드는데 사용하곤 합니다. 이에 예수님은 신명기 6장 16절을 인용하셔서 반박하였습니다. “주
너의 여호와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라고 책망하심에서 두 번째의 시험에서 승리하였습니다
이 두 번째 시험은 종교인들이 쉽게 빠지는 시험인데 교권과 기적에 대한 잘못된 믿음 때문에 생기는 유혹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성전은 이스라엘 전체를 다스리는 권력과 부의 핵심이었습니다. 성전을 맡아 관리하는 자들이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하여 권력과 부를 얻기 위하여 갖가지 부정과 불의를 성전 안에서 저질렀습니다. 이들은 경건을 일종의 세속적인 욕망을 위하여 이용하였습니다. 겉으로는 가장 거룩한 신앙인 행세를 하였지만 내용적으로는 종교의 교권과 여호와 하나님의 기적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편의를 도모하고 세속적인 욕망을 채웠던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기적을 통하여 치유의 은총이 일어나면 그것을 자기네들의 물질적인 이익을 추구하고는 방편으로 이용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요즈음의 예를 들면 급박 종말론자들이 그런 시험에 넘어간 대표적인 사람들입니다. 종말과 기적을 이용하여 육적인 이득을 추구하는 자들입니다. 요즈음 몇 몇 대 교회들의 분란을 보면 그 목회자들이 사탄의 유혹에 넘어간 것이 분명합니다. 교회 안에서의 여호와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을 목회자들의 개인적인 이익을 위하여 이용하다가 문제가 발생한 것입니다. 지금도 교회 공동체 안에는 여호와 하나님의 신비적인 기적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것을 성전 맡은 자들이 악용하고 오용하는 데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이 거부한 시험은 기적 자체가 아니라 그 기적을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이나 공동체의 선을 위해서 쓰는 것이 아니고 반대로 목회자 자신의 세속적인 유익을 위한 유혹입니다. 예수님의 두 번째 시험의 승리는 기복적 신앙심에 대한 거부입니다. 믿는 성도들이 쉽게 빠지는 시험 이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시험의 숭리는 우리들에게 큰 교훈을 줍니다.
세 번째로 사탄은 아주 높은 산으로 예수님을 이끌고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
광을 다 보여주고는, 자기에게 엎드려 절하면 그 모든 영광을 주겠다고 했습니다. 세상의 권세와 영광은 인간에게 대단한 매력을 갖고 있습니다. 한 번 세상의 권력을 쥐었던 사람은 그것을 놓기가 쉽지 않다고 합니다. 그래서 정권을 탈취하고 그 정권을 계속 유지하려고 수단과 방법을 다 합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권력을 차지하려고 합니다. 별 하나를 더 달기 위하여, 무궁화 하나를 더 달기 위하여 기천만원, 수억의 돈을 아깝지 않게 뇌물로 바치는 것은 권력과 그 영광이 너무나 좋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인간들 거의 모두가 빠지는 마지막 시험 앞에 서게 된 것입니다. 순식간에 만국을 한 눈에 보았고 그 만국의 권세를 보았고 그 영광의 대단함을 확인한 직후에 “이 모든 권세와 영광을 절만 하면 다 주겠다”는 사탄의 시험을 물리친다는 것은 정말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주 너의 여호와 하나님만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라는 성경 말씀을 인용하면서 간단하게 승리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사탄아 물러가라” 라고 마지막 일격을 가하여 사탄을 물리쳤습니다.
정말로 힘들고 어려운 시험을 승리하신 것입니다.
첫 사람 아담처럼 살 것인가 아니면 둘 째 사람 예수님처럼 살것인가 우리 모두는 이 결단 앞에 늘 서 있습니다. 사탄의 시험에 넘어갈 것인가 아니면 그것을 단호하게 거부할 것인가 결단하시기 바랍니다. 첫 사람 아담과 하와처럼 살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둘 째 사람이 우리에게 오신 것입니다. 그의 지상에서의 고난의 흔적들은 사탄의 시험을 극복하기 위한 과정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사순절 절기에 성도 여러분들이 추구하여야 할 삶의 방향을 제시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처럼 사탄의 유혹을 단호하게 물리치면서 멋진 삶을 살아가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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