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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 사순절에 갖는 신앙 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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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IMF라든지 또는 요즘 경제사정의 어려움,기업의 구조조정 또 여러 가지를 얘기하면서 소위성공하는기업,또는 성공적인 마게팅,이런얘기들을 많이 하고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하면 성공한다"라고 하는 성공학 이야기들이 우리들에게 많이 화자가 되고있습니다. 이런 얘기가운데서 어떻게 하면 성공할수있겠는가! 기본적으로 든든한 조직이 있어야 성공할 수 있다. 그런 든든한 조직을 위해서는 다섯가지 S가 필요하다.
즉 hard five S이렇게 말합니다. 아주 든든한 다섯가지 에스가 있어야한다는것입니다.
 첫째는 Style(스타일). 어떤스타일인가
 두번째는 Skill. 기술을 말하는것입니다. 그리고
 세번째는 Structure. 구조가 어떤것인가 네번째는 System. 이제 어떤 체재를 가지고 나아가느냐 그리고 다섯번째는 Strategy.
전략! 이렇게 다섯가지 에스가 있어야 이것이 잘 조화된 어떤조직이나 기업, 사업이 성공할 수 있다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이런 어떤 체재나 조직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이 있는데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은 흐름을 볼줄 알아야한다. 과연 지금 어떤 흐름이 흘러가고 있는가 그 흐름가운데 두가지 흐름을 대표적으로 얘기하게 되는데 하나는 흔히말하는 시대적 조류, 이 시대적은 흐름이 어떠한 흐름으로 흘러가고 있는냐 그리고 두 번째는 사람의 마음을 읽는, 사람의 마음이 지금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냐 하는 것을 볼수있어야한다고 하는것입니다. 지금 이말을 조금 가볍게 표현하자면 "분위가 파악이다". 할수있을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것을 가지고 있다하더라도 그것이 맞는 분위기 속에서 더 잘 될 수있다고 하는것입니다.
예를 든다면 여러분 가운데에는 낚시를 좋아하시는 분이 계시죠 그러면 낚시를 하기위해서는 좋은 낚시대가있어야하고 낚시바늘이있어야하고 미끼가 있어야하고 또 낚시하러 갈때에 입는옷이 있어야합니다. 이런 여러 가지가 준비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제 중요한것이무엇이겠습니까 과연 물이 어떤때에 낚시를 하는가 어디에 고기가 많이 모여드는가 어떤시간에 고기가 많이 입지를 하는가 이 물에흐름, 낚시를 할 수 있는 흐름을 볼수있어야 성공한다고 하는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사순절 기간, 주님의 고난에 대한 말씀을 함께 나누고있는데 예수님과 제자들사이에 아주 답답한게 있습니다. 이게 뭘까 3년 동안을 동거동락을 했습니다. 같이먹고 같이자고 한솥에 밥을 먹었습니다. 그냥 왔다갔다 하면서 일주일에 한번만나고 한달에 한번만난 것이 아니라 삼년동안을 한솥에 밥을 먹었는데 지금 이제자들은 예수님이 어떤생각을 하고 계시는지, 예수님의 삶의 흐름을 그분위기를 파악하고 있지못한다는것입니다. 답답한것입니다. 안타까운것입니다.
우리가 그런얘기를 하죠 아-왜 맥을 못쓰나 왜 맥을 못쓰겠습니까 맥을 못잡았으니 맥을 못쓰죠 맥을 제대로 잡으면 맥을 쓰지않겠습니까 지금 제자들이 예수님앞에서 맥을 쓰지못하고 있어요. 왜요 예수님의 삶의 흐름을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읽지못하고 있기 때문에 그러는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는 고난과 십자가와 죽음과 부활을 말씀하시지만은 제자들은 누가 크냐 좌편이냐 우편이냐 이런 얘기를 하고있습니다. 잘 깨닿지를 못합니다. 알아듣지를못합니다. 그러나 어째든 이 예수님과 제자에 공동체는 최후에 만찬까지 왔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식사를 이땅에서 했습니다. 그리고 찬송을 부르고 감람산 갯세마네 동산 까지 오게되었습니다. 우리가 오늘 그래서 너무나 잘아는 이 갯세마네 동산의 말씀을 함께 읽게 된것입니다. 여기서 다시한번 예수그리스도의 상황을 들여다보십시다. 예수님이 친히 말씀하십니다. 33절에서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실쌔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사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지금 예수님의 입장이 말 그대로 이런 입장이라는것입니다.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시며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
이 일로 인해서 주님이 땀을 흘리시면서 피를 흘리시면서 기도하신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선생님의 마음을, 이삶의 흐름을 제자들은 모르고 있었다고 하는것입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촉구하십니다! 부탁하십니다!
"깨어있어라 깨어있어 기도하라 시험에 들지않게 깨어있으라" 그러나 그들은 깨어있지를 못합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깨어있으라고 하신 말씀이 무엇이겠습니까 깨어있으라고 했는데 깨어있지못하고 자고있습니다. 주님이 무엇 때문에 깨어있으라고 말씀하시는것일까 하는 내용입니다. 그것은 말그대로 정신을 좀 차리라는것이죠.. 좀 각성하라! 이제는 철이 들어야하지않겠느냐! 이제는 뭐 좀 알아야되지않겠느냐! 주님이 정말로 제자들에게 있어서 이 길이 무슨길인지, 이 자리가 어떤자리인지, 주님이 따르는 것이 무엇인지, 십자가를 드는 것이 무엇인지,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 무엇인지, 섬기는자가되고, 종이 되고, 작은자가되고, 개선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좀 깨달아되지않겠느냐! 그래서 깨어있으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로써 갈길을 깨달고 삶의 가치를 깨달고 역사의 흐름을 깨달고 좀 보라는것입니다. 제자들은 이를 보지못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깨어있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속에서 주님께서 보다도 구체적으로 깨어있으라고 하는 것은 무슨의미가 있을까요 시험이 있으니 조심하라는것입니다. 깨어있기는 깨어있어야하는데 시험이있다! 38절에 보십시오. "시험에 들지않게 깨어있어 기도하라 "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식사를 하시던중에
"너희들이 나를 버리리라. 흩어지리라. 배반하리라. 나를 팔사람이있다. " 이게 무슨얘기이겠습니까 제자들에게 이이상의 시험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우리가 선생님을 팔다니 배반하다니 우리가 선생님을 버리다니 당치도 않은 일입니다!" 그러나 이일은 시시각각으로 제자들앞에 몰려오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시험에 있게되는 것을 알게됩니다. 그래서 "시험에 들지않게 깨어있어야된다"
여러분 오늘 이 말씀속에서 우리가 시험이라고 하는 의미를 조금 더 다른 각도에서 생각해보십시다. 시험은 우리는 어려운 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문제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핍박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이 시험이 되는것일까요 그것은 인생에 있어서 어떤 분기점이 주어질 때 그것이 시험이 될 수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미혹이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 제자들에게 있어서는 분기점이 왔습니다. 미혹의 기점에 있게되었습니다. 선택의 분기점에 있게되었습니다. 위기의 분기점에 있게되었습니다. 이 분기점이 이들에게 시험이 되는 것입니다. 미혹이 됩니다. 믿음을 버릴것인가, 안버릴 것인가, 따를것인가, 도망을 갈것인가, 시험이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깨어 있어야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의 경고입니다. 깨우침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무시했습니다. 결국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제자들은 다 시험에 들었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을 배반하고 버리고 도망가게 되었습니다.
타이타닉 이라는 영화를 보셨죠 타이타닉 이라는 거대한 배가 가라앉았습니다. 그냥 가라앉았습니까 기록에 보면 타이타닉호가 항해를 시작할 때 그에게 전문이 왔습니다. "아무래도 심상치않다. 조심해라! 빙하가 내려온다 조심해라! 빙산이 내려오고 있다 조심해라!" 여러 차례 무선으로 계속해서 경고했지만 선장을 비롯한 배에 있는 사람들은 코웃음을 쳤습니다. " 아 이만한 배이면 이 정도는 뭐가 무섭겠느냐!" 그러나 타이타닉호는 빙산에 부딪쳤고 그리고 가라앉게 되었습니다. 전해지는 이야기 가운데에는 그 배를 만드신 분이 죽을 때에 자기가 가지고 있었던 구명 보트와 구명 복을 다른사람에게 주었다고 합니다. "아닙니다. 사장님이 이것을 쓰셔야죠! 그리고 사십시오!" 아니라고 "자네가 써야하네" 그러면서 그 구명복을 주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내가 튼튼한 배를 만들지 못한 대가로 내가 죽어야하네. " 그리고 구명복을 다른사람에게 주고 죽었다는 그런얘기도 전해지기도 합니다. 일단은 무슨말이겠습니까 분명히 위기가 있습니다. 위험이 있습니다. 실화가 왔습니다. 이제는 분기점이 되었습니다. 이 분기점에서 잘못 선택하면 시험에 ,빠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깨어있으라! 깨어있으라고 하는 것은 시험에 들지 않게하기 위해서 깨어있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속에서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좀 더 가까이 주시는 말씀은 기도에 깨어있으라는 것입니다. 아주 구체적인 것입니다. 주님이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기도해달라! 시험에 들지 않게 기도하라!" 기도에 깨어 있어야만히 모든 것에 승리가 되는것입니다. 여기서 기도에 깨어있다고 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주님처럼기도할 때 우리도 기도에 깨어있다고 하는것입니다. "내가 기도하겠다. 너희도 기도하라" 그러면 제자들은 주님처럼 기도해야 하지않겠습니까 오늘 우리가 기도에 깨어있다고 하는 것은 내가 그냥 기도 한다고 기도에 깨어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 처럼 기도해야 그게 기도에 바르게 깨어있다고 하는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주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대로 기도하셨습니다. 여러분 성경을 보십시오 36절에 "가라사대 아바 아버지여.. " 우리가 기도에 깨어있다고 할 때 기도에 깨어있는 믿음은 "아바 아버지여"를 제대로 하는것입니다. 에수님께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아바 아버지여" 말씀하십니다. 여기 아바라고 하는 말은 아랍어를 그대로 여기 인용해서 쓴것입니다. 그 말은 우리식으로 발음하면은 "아빠" 라고 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 말은 그대로 아빠라고 하는것입니다. 정말 아빠라고 하는것입니다. 어린아이가 아버지를 부를 때 "아빠" 이렇게 부르죠! 물론 아버지라고 부를 수도 있죠! 그래서 예수님은 아빠라고 부르셨습니다. 당시 바르새인과 제사장들은 감히 생각하지도 못했던 그런 개념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부르셨습니다. 나와 가장 가까이 계신 아버지, 가장 친근한 부름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에 깨어있다고 하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과 가장 가깝게 가장 친근한 아름다운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기도에 깨어있다고 하는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과 내가 좋은 관계를 이루지 못하면 그것은 기도에 깨어있는 것이 아닙니다. 좋은 관계가아니면 아버지를 부를 수 없는 것입니다. 좋은 관계이여만이 좋게 부를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빠"이렇게 부르는 것입니다. 그다음에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아버지에 원대로 하옵소서.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주님은 기도를 가르쳐 주신대로 기도하셨습니다.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이것은 주님께서 가능한 것입니다. "옮겨주세요!" 여기서 우리는 가장 인간적인 기도를 봅니다. 가장 연약한 기도를 봅니다. 가장 간절한 기도를 봅니다. 그런데 "내 원대로 하지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 여기서 우리는 가장 여호와 하나님적인 기도를 봅니다. 가장 간절한 기도를 봅니다. 가장 강력한 기도를 보게 되는것입니다. 주님은 갯세마네동산에서 가장 인간적인 기도를 드리시며 가장 여호와 하나님적인 기도를 드리셨다는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 나의 원대로 하지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 세 번씩이나 간구했습니다. 세 번씩!! 그런데 생각해보십시오. 주님께서 아버지의 원대로 기도하셨는데 상황이 바뀌지않았습니다. 상태가 좋아지지않았습니다. 슬픔은 그대로 있습니다. 놀라움은 그대로있습니다. 고민도 그대로 있습니다. 죽음도 그대로 있습니다. 배반도 그대로 있습니다. 있으나 " 아버지의 원대로.. " 나의 상황이 조금도 바뀌지 않았지만 "아버지의 원대로.. " 이렇게 기도하는 것이 참으로 기도에 깨어있는 모습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 말씀속에서 정말 기도에 깨어있다는 것이 무슨 말인가 그것은 기도의 결단을 명료하게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기도의 결단을 명료히 해야합니다. 진정으로 깨어있는 것은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는것만이 아니고 기도속에 있는 결단을 빨리 분명하게 그것을 결단해서 그리로 향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 기도에 성취하는것입니다. 이것이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가치적으로, 승리하는것입니다. 지금 예수님도 분기점에 계십니다. 두 사이에 계십니다 내 뜻이냐 여호와 하나님의 뜻이냐 나의 잔이냐 여호와 하나님의 잔이냐 지옥이냐 천당이냐 여호와 하나님의 일이냐 사람의 일이냐 그런데 주님은 아번지의 일! 아버지의 뜻! 아버지의 구원! 아버지의 집!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의 생명! 이것을 선택하십니다. 이것을 선택하시고 머뭇거리지 아니하시고 그 길로 나아가십니다. 42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여러분 42절에 이렇게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예수님을 파는 자가 가까이 왔습니다. 예수님을 잡을 자가 가까이 왔습니다. 검과 몽치가 가까이왔습니다. 로마의 군인들이 가까이 왔습니다. 이 말씀을 상식적으로 해석하면 이렇게 해야 됩니다. "얘들아 빨리 일어나자 그리고 도망가자" 그래야 맞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주님은 도망가는 것이 아니라 "그 길로 나아가자. 나를 파는자가 가까이 온다" 물러서는 것이아니라 "그리고 가자"
이런 해석을 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갯세마네 동산이 무엇인가 갯세마네동산과 골고다의 두 고난의 장소가 있는데 갯세마네 동산 여기야 말로 마음적 십자가 정신적 십자가를 지는 곳이었다. " 예수님의 이미 마음에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여기 갯세마네동산에서 지셨습니다. 거기서 승리하셨기 때문에 골고다의 육체적 십자가를 질수있었었다는것입니다. 갯세마네동산의 승리가 골고다의 승리요 십자가의 승리가 되었다는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의 실패는 마음의 실패 정신의 실패 영적인 실패는 곧 육체적으로도 실패하는것입니다. 육체적으로 실패하는사람은 예외없이 하나같이 그 정신이 그 마음이 그 영이 부패되어있습니다! 썩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육체적으로도 실패하는것입니다. 주님은 거기서 실패하지않으셨습니다. 어떻게 해서 실패하지않으셨을까요 결단을 명료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좋다! 나아가겠다! 십자가가를 지겠다! 이 잔을 마시겠습니다!" 이 결단을 분명히 하고 그 길로 나아가셨기 때문에 실패하지 않으셨다는것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에게 부탁하시는것입니다. "깨어있으라"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깨어있지 못했습니다. 여러분 제자들이 깨어있지 못한 모습을 힌번 보십시다. 37절 " 돌아오사 제자들의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시몬아 자는 네가 한시 동안도 깨어있을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39절 다시나아가 동일한 말씀으로 기도하셨죠 40절 "다시오사 보신즉 저희가 자니.. "42절 "
 세번째 오사 저희에게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그만이다.. " "자느냐 한시 동안도 깨어있지 못하냐" 마지막에 주님이 하시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이제는 자고 쉬라 그만이다" 우리가 이 말씀을 그냥 우리의 말대로 해석하면 " 이제는 자주 자고 쉬고 맘 편하게 먹어라!" 이렇게 얘기할수도 있을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런 말씀이 아니라는 것을 생각해야합니다. "시몬아 한시 동안도 깨어있을수없느냐" 또 말씀하시죠.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구나" 그리고 드디어 말씀하십니다. "자고 쉬라 그만이다" 이 말을 헬라어에서 영어로 번역한 성경에서 이렇게 표편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에게 훨씬 더 이해가 되기 쉽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자고 쉬라"가 자고 쉬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주님이 이렇게 말씀 하시는것입니다.
"Are you still sleeping and resting" "아직도 자고 쉬느냐 아직도 자느냐" 그 말씀입니다.
"한시 동안도 깨어있지 못하느냐 깨어서 기도하라 맘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구나 또 자는구나 자느냐 아직도 자느냐 더 자야겠느냐 얼마나 쉬어야하겠느냐 이제는 그만이다" 이제는 정말 자고 쉴만한 시간도 없는것입니다. 아직도 자야겠습니까 아직도 우리들이 쉬어야하겠습니까 얼마나 우리가 더 쉬어야합니까 더 이상 바랄수도 없고 재촉할수도 없고 이제는 드디어 끝이 오는 구나 잡을 자들이 오는구나 주님이 안타까우면서 통곡하시면서 "이제는 자고 쉬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할말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제자들에게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일어나라 함께가자" 아니 이것들을 데리고 가서 어떻게 하시겠다는 것입니까 뭘 이런 것들을 데리고 갑니까 저같으면 안데리고 갈것같습니다. 그런데 주님을 말씀하십니다. "일어나라 함께가자" 기도도 못하고 깨어있지도 못하고 게으르고 선생님으 마음도 알아주지도 못하는 이 무지한것들에게 주님은 그래도 뭐라고 말씀하시냐면 "그래도 함께 가자" 생각해 보십시다. 지금까지 제자들이 선생님과 함께 했습니까 주님과 함께 했습니까 주님의 마음과 함께 했습니까 주님의 뜻과 함께 했습니까 주님의 기도에 함께 했습니까 주님의 십자가의 길에 함께 했습니까 전혀 함께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엉뚱한 생각을 했어요 저 잘난 생각만 했어요 함께 하지 못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이 함께가자는 것입니다. 여기 주님의 마음이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들에게 원하십니다. 우리들에게 바라십니다. 같이 가자고.. "내가 고민이 있지만 같이 가자, 슬픔이 있지만 같이 가자, 내가 죽게 되었지만 같이 가자" 이것이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 약하고 이 허물많고 이 부족한 우리들에게 그래도 주님은
"같이 가자" 이제 공은 우리에게 당겨졌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대답할 차례입니다. 이제는 제자들이 대답할 차례입니다. "그렇습니까 가겠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대답해야합니다. 여러분 주님과 함께 간다고 하는 우리의 결단이 무엇이겠습니까
제가 언젠가도 말씀드린 기억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설교를 준비하다가 이 말씀이 생각나서 여러분에게 이말씀을 드립니다. 예수님에게 예수님어머니인 마리아를 우리는 잘알죠. 로마 교회에서는 성모 마리아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님을 낳으신 분, 우리 구주의 어머니 마리아 얼핏생각하면 위대한 분이요 성모입니다 . 이런 특권과 축복이 어디있습니까 그러나 한쪽으로 생각해 보세요. 이런 고통과 고독과 외로움이 어디있겠습니까 이걸 미리 알아보고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였습니다. 어린예수를 품고있는 마리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마음을 칼로 찌르듯하리라" 예수님이 서른살에 집을 나가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나라를 위해 출가했다는것입니다. 그리고 삼년동안 집에 제때 들어 오신적이 있었겠습니까 집에 들어갈 여가가 없었죠. 어머니 마리아는 먼발치에서 늘 예수님만을 바라보고 그냥 지냈어요! 사람들이 욕하면 욕하는대로 칭찬하면 칭찬하는대로 그렇게 지냈어요 아들을 바라보면서 외롭게 지냈어요. 그렇게 늙어 갔어요 그게 마리아의 일생이예요 사람들이 답답해서 그랬는지 안타까워서 그랬는지 한번은 예수님과 예수님의 형제들에게 이렇게 말했어요 "선생님 여기 어머니하고 형제들이 왔습니다. " 그런데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하셨죠 "내 어머니 내 형제가 누구냐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자들은 내 어머니요 내 형제다" 인간적으로 생각해보면 이게 얼마나 안타깝고 가슴아픈일입니까 이렇게 3년 이라는 시간이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이게 왠일입니까 선생님이 잡혔다는, 예수님이 잡혔습니다 마리아는 여호와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당신의 아들이 아니고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십자가를 진다고 하는 사실을 알았지마는 그러나 마음으로 얼마나 걱정이 되겠습니까 잡혔습니다. 매를 맞는다고 합니다. 재판을 받는다고 합니다. 이제 어떻게 되는가 그런데 사형언도를 받았다고 합니다. 아들이 사형언도를 받아서 집에서 안타깝게 쩔쩔매고 있는데 예수님의 제자요한이 헐레벌떡 뛰어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이 마리아가 "요한아, 어떻게 된거냐" 그랬더니 요한이 통곡을 하는것입니다. "왜 우냐" "죄송합니다. 어머니 저도 예수님을 배반하고 도망온것입니다" "뭐야 주님을 배반하고 도망오다니"
"저 만이 아니라 다 버리고 도망갔습니다" "베드로두 도망갔니"
" 예. 베드로도 도망갔습니다. " "아니 어떻게 베드로까지 도망을갔냐"
" 다 도망갔습니다" " 그래 지금 어떻게 됐니" "주님은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로 올라가고 계십니다"
"그럼 거기 누가있니" "아무도 없습니다"
"아무도없다니... " 마리아는 일어났습니다. 요한에게 말했습니다.
"울지마라, 눈물을 닦아라! 그리고 가자. " "어디로 갑니까"
"십자가 있는대로 가야지 . 아들이 있는곳으로 가야지. 주님이 계신곳으로 가야지. "
그리고 군중을 헤치고, 군대를 헤치고, 사람들을 해치고, 어렵게 어럽게 골고다의 언덕에 오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영화나 이런 것을 보면 가깝게 나타나겠지만 사실은 군중들 틈 바구니 속에서 마리아는 주님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당신의 아들이 십자가에 손과 발에 못이 박힌체 달려있었습니다. 거기서 피가 뚝뚝 떨어지고 붉은 피가 땀을 적시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바라보는 어머니를 생각해 보십시오. 뭘하겠습니까 마리아는 혼자 마음으로 이렇게 얘기했다고 합니다 "주님, 또 한편으로는 얼마나 고통스러우십니까 그러나 지금 제가와있습니다. 이 애미가 여기 와있습니다. 만일 주님이 내가 여기있는 것을 아신다면 힘이 되시겠습니까 내가 여기 와있는 것을 주님이 아시는지 모르시는지 그러나 만일 내가 여기와있다는 사실을 주님이 아시면 그게 주님께 좀 힘이 되겠습니까 힘이 될겁니다. " 그런데 바람결에 주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어머니 보세요. 아들입니다. "
"아 알고계셨구나. 내가 여기와있는 것을 알고 계셨구나. 그러면 나도 주님의 말씀속에 주님을 알고있지...... "
마리아와 예수님은 아무것도 한일이없습니다. 할 힘이없습니다. 할 기회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 고통속에 그 피흘림속에 분명한 것은 예수와 마리아 두사람은 함께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랑이 무엇입니까 사랑은 함께하는것입니다. 사랑은 돈이아닙니다. 건물이아닙니다. 사랑은 감정이 아닙니다. 사랑은 함께하고 있는것입니다. 고통속에서 아무것도 할 일이없다고하는 그 때에도 분명하게 사랑은 함께할수있다는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하길 원하는 마음 바로 그것입니다. 주님은 그것을 원하고계십니다 그래서 나와함께 가자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이 마음으로 저는 시귀하나를 소개해주면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어떤분이 자기의 신앙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오늘은 가장 깊고 낮은 목소리로 당신을 부르게 하소서
배신의 죄를 슬피울던 베드로의 절절한 통곡처럼 나도 당신앞에 겸허하게 어두움으로 업드리게 하옵소서
당신을 닮지않고는 감히 사랑한다고 뽐내지않게 하소서
빛이신 당신과 함께 잠들어 당신과 함께 깨어나 한점 눈부신 어두움이되게 하소서"
우리는 비록 약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기도하지 못했습니다. 깨어있지못했습니다. 그러나 다시 주님의 말씀을 들으며 주님께 기도하며 주님의 마음을 이해하면서 주님과 함께 해야됩니다. 우리가 약했어도 잠들어있어서도 우리가 기도하지 못했어도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일어나라 나와함께 가자. " 다른 말씀이 아닙니다. "나와함께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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