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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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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 28일(수)부터 금년도 사순절이 시작되었습니다만 우리 교회는 내일 새벽부터 2주간 사순절 특별새벽기도회를 가집니다. 사순절은 부활주일을 앞둔 40일간을 말하는데 이 시작하는 날을 성회 수요일이라고 합니다. 성회란 거룩한 재라는 뜻입니다. 성회 수요일은 회개의 밤인데 종려나무 가지를 태운 재로 얼굴에 십자가를 긋고 회개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사순절은 사순, 즉 40이라는 수에서 비롯된 말입니다. 40일이란 수는 예수님께서 40일간 금식하신 날의 수이며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주님의 시체가 무덤 속에 계셨던 40시간, 모세가 시내산에서 40일 금식했으며 엘리야도 40일간 금식한 날수입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을 떠나 광야에서 40년간 배회한 기간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성경에서 40이라는 수는 큰 뜻을 가집니다.
사순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을 묵상하면서 보내는 기간입니다.
우리 신앙의 핵심은 고난과 십자가와 부활로 연관되어집니다. 그러므로 사순절 기간에는 대체로 금식을 통하여 주님의 고난에 참여하려고 했습니다. 4세기경부터는 사순절 기간에 하루 한끼만 식사를 하는 금식기간으로 삼았으며 한끼 식사도 육식을 금했습니다. 사순절 기간은 주님의 고난을 생각하며 그 고난에 참여하려는 신앙적 결단은 매우 귀한 일이며 그 고난에 참여함으로 교만을 꺽고 겸손한 믿음을 가지게 되며 고난을 통한 더 성숙한 믿음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번 사순절을 묵상하며 기도하는 가운데 사순절 절기는 고난 이상의 의미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단순히 금식이나 절제를 통한 고난을 겪는 것이 사순절의 깊은 뜻이 아니라 사순절은 죽음의 절기라고 하는 것이 제 마음에 다가 왔습니다.
예수님은 금식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고난을 당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은 분명합니다. 주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섬기러 오셨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오늘도 사도신경으로 우리의 신앙을 고백했습니다만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습니다. 주님은 죽으시기 위하여 세상에 오셨습니다. 주님의 죽음을 통하여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면 죽음이 무엇이며 죽음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 어떻습니까 우리가 죽겠다든지, 죽고 싶다든지 하는 말은 쉽게 하지만 죽는다는 것이 쉬운 것이 아닙니다. 죽음은 다른 세계를 의미합니다. 이 세상을 떠난다는 뜻입니다. 죽음은 이 세상을 떠나 저 세계로 가는 것을 말합니다. 모든 종교가 죽은 후의 세계를 추구합니다. 그러면서도 죽음을 싫어합니다. 그것은 인간의 불행, 허무의 종착역이 죽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죽은 후에 다른 세상, 즉 더 좋은 낙원에 간다고 믿지만 사람들은 죽음을 싫어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죽은 후에 천당에 갈 것을 확신하고 사모합니다. 그리고 그 곳에는 눈물이 없고 슬픔이 없으며 즐거움만 있다고 찬송을 부르며 위로를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죽음은 싫어합니다. 죽는 것은 두렵고 싫습니다. 죽은 후의 세계는 약속일 뿐이요 현실적으로 받아 들이기는 힘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중학교에 다니던 때에 이웃집에 믿음이 좋은 할머님이 계셨습니다. 그당시 80세가 넘으신 할머니신데 저를 무척 사랑해 주셨습니다. 할머니 곁에 가서 말동무가 되어 주고 함께 있으면 가끔 하시는 말씀이 "나는 빨리 죽어야 하는데", "빨리 죽어야 천당에 갈텐데" 했습니다. 그러면서 먹고 죽는 약을 좀 구해 달라고 말씀했습니다. 어느 날 저는 삐콤 몇 알을 봉지에 싸서 할머니께 갖다 드리며 이것을 두알씩 세번만 드시면 죽는다고 했습니다. 그 약 봉지를 빨리 받아 들고서는 야단을 치셨던 기억이 납니다.
더 좋은 세상이 죽은 후에 있다고 믿으면서도 죽음 자체는 싫어하고 두려워 하는 것이 모든 사람의 마음입니다. 기독교는 죽은 후의 천국을 보장하지만 현세에서의 천국을 체험하며 사는 것을 강조합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약속하신 천국은 사후에 가는 영혼의 천국만을 말씀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서 새로운세계를 누리는 천국을 소유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죽은 후의 천국은 약속이요 이 세상에서 천국을 앞당겨 사는 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뜻입니다.
죽음이 어떤 것이며 죽은 후 천국의 삶이 어떤 것입니까
여호와 하나님은 최초의 사람 아담을 에덴 동산에 살게 했습니다. 그를 에덴에 살게 한 것은 낙원에 살도록 한 것입니다. 에덴이란 뜻이 낙원, 즐거움, 기쁨의 의미로 행복의 동산을 말합니다. 그러나 아담은 행복하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사랑할 대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아담을 깊이 잠들게 했습니다. 그가 잠든 후 갈비뼈를 취하여 하와를 만들어 아담이 사랑할 대상으로 삼게 하였습니다. 여기서 아담의 행복한 삶이 시작되었고 여호와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좋았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했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합니다. 성경에는 죽음을 잔다고 하는 말씀과 같이 쓰고 있습니다. 아담은 낙원인 에덴에 있었으나 행복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깊은 잠, 즉 죽음 이후에 진정한 에덴에 살게 되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아담을 죽게 하신 후 새 세계를 열어 주셨습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가 죽으심으로 그 후에 우리에게 주신 새 생명과 새로운 세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죽는 것은 어떤 것이며, 그 안에서 사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서 430년간 노예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불쌍히 여기시고 바로에게 모세를 보내시어 민족을 해방시키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나 바로의 마음은 강팍하여지고 더욱 악해졌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신비한 은혜를 주셨으니 어린 양을 잡아 문설주에 바르고 집안에 있도록 했습니다. 그날밤 애굽 전역에 장자가 죽는 심판이 임했습니다.
그러나 양의 피를 바른 이스라엘의 집은 안전하게 보호를 받았습니다. 이스라엘이 보호를 받은 것은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발랐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집은 다른 세상이었습니다. 죽음의 밤에 구원을 받아 애굽을 탈출했습니다. 헬라어로 출애굽을 엑소더스(Exodus)라고 하는데 별세, 죽음이라는 뜻과 같습니다. 이 말은 출애굽은 죽음이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할 때 이미 그들은 죽은 것입니다. 어린 양이 피를 흘려 죽었는데 그 어린 양의 죽음은 이스라엘의 죽음을 대신한 것입니다. 어린 양이 죽지 않아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르지 않았더라면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의 장자처럼 다 멸망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지금 여기 살아있음은 어린 양이 죽었기 때문입니다.
어린 양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입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우리의 죽음을 대신한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2:20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라고 했습니다. 나는 그때 죽었다는 뜻입니다.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나는 죽고 이제 내 안에 오직 그리스도만 사신다는 뜻입니다. 계속하여 말씀하시기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내가 육체로 살고 있지만 저 천국의 삶을 사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았다는 확신을 갖게 합니다.
십자가의 죽음은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삶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수십만 명의 이스라엘 백성을 살리기 위해 양이 죽었던 것같이 수많은 인생을 살리시기 위하여 주님이 죽으셨습니다. 주께서 죽으심으로 우리가 살게 되었습니다. 십자가의 죽음 후에 부활이 있었습니다. 죽음이 없었으면 부활도 없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힐때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습니다. 예수님은 이 은혜를 주시려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귀중한 두가지 말씀을 하십니다. 하나는 마 16:24인데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은 죽음을 의미합니다. 죽어야 주님을 따를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죽어야 제자가 되고, 죽어야 성도가 됩니다.
또 하나의 말씀은 요 12: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고 했습니다. 죽어야 많은 열매, 즉 새 생명을 가진다는 말입니다. 예수를 믿고 변화되면 다 된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달라지는 것, 착하게 되는 것, 잘 참는 것, 그것으로는 안됩니다. 죽어야 합니다. 땅에 떨어져 죽어야 합니다.
입으로는 교회를 말하고 예수를 말하며 성경을 말하지만 마음은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찾고 있다면 죽지 않은 증거입니다. 사도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했습니다. 진정 존경받는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사람입니다. 참된 명예를 가진 사람은 자기의 욕망을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입니다. 진실로 잘 믿는 사람은 자기가 완전히 죽은 사람입니다. 내 의지와 생각이 살아있다면 아직도 멀었습니다.
우리의 기도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필요한 것을 채워달라는 요구의 기도와 우리 자신이 완전히 죽는 죽음의 기도입니다. 요구하는 기도는 자기 뜻을 이루고 죽음의 기도는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이룹니다. 우리는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는 죽음의 기도가 있어야 합니다. 이 기도는 생명을 살립니다. 이런 기도는 영성이 강건해집니다. 이런 기도는 천국의 삶을 살게 합니다.
우리의 봉사도 달라져야 합니다. 나 자신의 기쁨과 다른 사람의 만족을 위한 봉사보다는, 여호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봉사가 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봉사는 완전히 자기가 죽어야 가능합니다. 내가 죽지 않고는 진정한 섬김이 될 수 없습니다. 예배는 내가 죽는 것, 예배의 원리는 제사입니다. 제사가 성립되는 것은 제물이 죽어야 합니다. 내가 죽을 때 진정한 예배를 드리고 그 예배를 통하여 여호와 하나님을 만납니다. 자아가 완전히 죽은 교역자가 있는 교회는 은혜로운 교회가 될 것입니다. 철저히 죽은 장로님, 권사님, 집사님이 세움을 받아 교회를 받들 때 그 교회는 사랑이 넘치고 화평이 넘치는 천국이 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런 고백을 하십시다.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빌 1:21)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죽음에 참예하는 사순절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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