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절] 십자가를 지신 예수
본문
사순절의 시작일은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로부터 사순절이 주일을 뺀 40일 동안 이어오다가 종려주일과 고난주간을 거쳐 부활절을 맞는다. 교회의 전통은 사순절의 시작일 즉 재의 수요일에는 머리에 재를 뒤집어쓰고 자신의 잘못을 고백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참회와 성찰과 경건 생활에 들어가게 된다. 주의 고난에 동참하지 않는 기쁨은 없고, 죽음 없는 부활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에 부활을 맞기에 앞서 고난의 의미를 성찰한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은 기독교 신학의 매우 중요한 테마일 뿐만 아니라 기독교적 실존의 의미를 제시하는 기본주제이다. 예수께서 받으신 고난의 사건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을 말하면서 동시에 이해하기 어려운 신비이다.
우리를 기쁨과 기대에 들뜨게 했던 그의 삶과 사역이 이제는 우리가 받아들일 수 없는 폭력적인 죽음 곧 십자가 처형이라는 사건에 내던져지게 되었기 때문에 제자들은 이를 이해할 수 없었으며 거부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우리가 성탄의 사건을 처음부터 주의 깊게 읽어본다면 그러한 예표들을 발견할 수 있다. 예컨대 시므온은 마리아에게 이 아기는 비방을 받는 표징으로 세우심을 받았다고 또한 칼이 당신의 마음을 꿰뚫을 것이라고 말한다(눅2:34~35). 이와 더불어 이사야 53장 전체는 이 주제를 위하여 의미를 던져준다.
이 고난은 갑자기 찾아온 것이 아니고 여호와 하나님의 깊은 뜻을 통하여 예비되고 있었던 사건이다. 마가복음에 보면 예수께서 세 차례 걸쳐 이를 예고하고 계심을 보고하고 있다(막 8:31~38, 9:30~32, 10:32~34). 예수께서 이 길을 선택하셨을 때 그와 가까이 지내던 이들에게서조차 이해하지 못하였다.
복음서들 가운데서 예수의 고난을 전면에 부각시키고 있는 책은 마가복음이며 그 요체를 증거하고 있는 부분 중 그 핵심이 오늘의 본문(막8:27~33)이다. 예수께서 고난 받으신 핵심은 어디에 있는가 본문은 그것을 대속 즉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함이요 우리로 하여금 여호와 하나님과 화해에 이르도록 하는 것이었다. 구약에서도 희생제물을 통한 속죄의 예를 볼 수 있지만 예수의 사역에서 중심적인 것은 십자가의 의미이다. 십자가 사건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사죄에 대한 선포의 핵심을 총괄적으로 말해 주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그가 믿는 도리를 '십자가의 말씀'이라고 함에 우리는 유의한다(고전1:18). 예수께서 십자가에 처형되었을 때 그것은 교회와 국가의 종교적 정치적인 사건으로 처리되었지만 이 사건이야말로 예수께서 자기의 목숨을 온 세상을 위한 희생의 제물로 내놓으실 수 있도록 하였다. 희생과 화해의 문제는 신약의 공관복음서에서 생생하게 묘사되고 있듯이 최후의 만찬을 나누실 때에 결정적으로 나타나 보이신다. 화해의 복음은 인간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전제하고 있다.
그러한 죄인 됨은 우리가 진실한 삶의 원천이신 여호와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졌으며 이로 인해서 사람들은 서로가 서로에게서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서 멀어졌음을 말해준다. 그런데 이 멀어짐을 우리는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가 그것은 인간 스스로의 힘과 노력으로가 아니고 여호와 하나님이 위로부터 '거져 주시는' 대속의 은혜로 말미암을 뿐이다. 예수의 고난 받으심과 십자가 사건이란 바로 그러한 은혜를 총괄적으로 증거 하는 것이다. 마가는 예수의 십자가를 그리스도인이 따라야 할 삶의 모델로 이해했음을 전제한다. 예수의 고난을 통해 공동체를 교훈 하는 의도로서 우리가 삶의 현장에서 고난을 당할 때 베드로처럼 비겁하게 예수를 부인하지 말고, 예수처럼 담대하게 화해의 고백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그 화해의 고백은 예수의 십자가 사건 즉 의로운 역사를 만들고 보다 자유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하여 노력하는 인간 속에서 찾아야 한다. 정의와 자유, 구조와 역사의 창조를 위해 오늘의 불의 속에서 고난을 감당하려는 인간의 노력 속에서 예수의 십자가 사건의 의미를 찾아야 한다. 마가는 예수의 십자가상의 처형을 정치적 처형으로 부각시키지 않는다. 예수를 죽인 것은 로마의 총독 빌라도가 아니라 당시 유대의 종교지도자라고 하는 점을 부각시킨다. 비록 예수가 로마식 사형을 받았지만 그 극형의 이유는 정치적 반란이 아니라 종교적인 신성모독이라고 밝힌다. 종교지도층에 대한 예수의 보다 근본적인 규탄은 인간보다 종교제도를 신성시한 당시의 부조리를 겨냥한 것이다.
예수는 여러 가지 무거운 짐을 지고 고생하는 민중들에게 그 짐을 가볍게 해 주려고 하였다. 짐진 자들로 하여금 편히 쉬게 해주겠다는 기쁜 메시지 곧 복음을 전파하셨다. 부자유로부터 해방, 불평등으로부터 해방, 경제적 수탈에서 해방, 정치적 구조에서 해방, 정신적, 육체적 고통과 번민에서부터 해방을 선포하신 것이다. 보다 정의로운 공동체의 형성을 위해 십자가를 지라는 예수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본문을 다시 당시현장에서 간추림 한다면, 하루는 예수가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을 지나가게 되었다. 갑자기 그는 그 자신에 대한 세상 여론을 알아보고 싶었다. "세상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더냐" 제자들에게 물으신다. 대단히 사회적인 질문이다. 제자들은 여러 가지로 여론을 들려준다. 갑자기 예수는 제자들을 보고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라고 물으신다. 매사에 덤비기 좋아하는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대답한다. 여기 예수의 평가는 흥미롭다.
베드로가 대답을 한 것은 그의 혈육 때문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힘 때문이라고 하신다. 즉 베드로의 육적인 관심은 예수가 세상에서 영광스러운 자리에 올라갈 때 한자리를 갖는 일이다. 비단 베드로뿐만 아니라 예수의 모든 제자들이 혈육을 동시에 가지고 예수를 따라 다녔다. 예수가 배를 채워주니까 예수가 잔칫집에서 포도주를 만들어 주니까 예수가 병을 고쳐주니까 예수가 기적을 행하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예수가 왕이 될 터이니까 그래서 많은 무리와 제자들이 그가 가는 곳마다 그를 열심히 따라 다녔다.
이것들은 인간 욕구충족에 만족한 기대들이었다. 비로소 예수는 자기가 걸어가야 할 고난의 길을 제자들에게 열어 보이신다.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림바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저희에게 가르치시되"하시니 이 놀라운 가르침에 대한 베드로의 반응은 바로 지금까지 예수를 따르던 심사를 들어내 보인다. 육적인 축복을 안겨다 주는 분으로 믿고 그를 따랐던 무리들의 대표적인 반응이었다. 오늘의 한국 교인들의 반응은 이와 다른가 생각해 본다. 이러한 기복적인 반응에 대한 예수의 응답은 바로 분노이었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는 꾸지람이었다.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에 예수를 광야에서 유혹했던 그 사탄의 모습을 베드로의 속에서 발견하고 육신의 복과 욕구충족을 얻기 위해 예수를 따르고 믿는 그 마음을 사탄의 마음으로 규정한 점을 예의 주의하여 경고 처리해야 한다. 그렇다면 예수는 왜 고난의 길을 가야 하는가 왜 기독교는 고난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가 생각해 보는 사순절이 되었다. 예수의 고난은 이기적 고난이 아니라 인격적 완성을 위해 수도하려는 그러한 고난이 아니다. 극기를 위한 수신적 자기 훈련이 아니다.
그는 수탈 당한 민중을 보고 깔보고 억누르고 있는 지배집단과 인간을 부당하게 비뚤어지게 만드는 사탄의 기존 세력에 의해 고난을 당할 수밖에 없기에 고난을 당한 것이다. 역사를 어둡게 하고 사회를 부패시키고 인간의 전체성을 파괴하는 위선자, 지배자들에게 용기 있게 대결했기에 그들에 의해 고난을 당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당시의 위선자들, 지배자들, 그리고 수탈자들이 판치고 있던 예루살렘에 내려가 고난을 당하고 죽을 수밖에 없음을 고백한 것이다.
그러므로 어두운 역사의 주역들이 시퍼렇게 살아 있어서 인간을 어두움 속으로 몰아넣고 부패한 구조의 주역들이 날뛰고 있어서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인 민중을 상처 입히는 한 예수와 그를 믿는 사람들은 고난을 당할 수밖에 없다. 어느 역사 속에서나 그 곳에 예루살렘이 있고 그 예루살렘에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있는 한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은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의 길을 가지 않을 수 없다.
여호와 하나님의 뜻과 여호와 하나님의 의는 예루살렘과 그 주역들이 있는 한 이 땅에서 이루어지기 어렵다. 여호와 하나님 나라의 도래(到來)를 그들이 먼저 방해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진실로 기도하는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예루살렘파와 대결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의 고난은 의로운 여호와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위한 적극적인 의미를 지닌 고난이다.
기독교가 의로운 역사를 엮어 가는 전위의 역할을 해야 하는 이유를 깨닫게 한다. 여호와 하나님의 뜻과 여호와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서 이루기 위해서는 자기를 부정하는 자기 속으로부터의 아픔을 안을 뿐만 아니라 밖으로 지워지는 가혹한 십자가형의 아픔을 온 몸으로 맞으면서 오늘도 고난과 죽음에의 길을 걸어가야 한다. 그러나 분명히 골고다의 길이 허무한 죽음으로 끝나는 길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그 길 끝에는 반드시 죽음을 이긴 삶이 있다. 그 길 막바지에는 죽음을 내쫓는 부활이 있다.
그러기에 예수는 예루살렘의 주역들에게 고난을 당하고 죽임을 당하나 사흘 후에 살아나실 것을 의식화되지 못했던 제자들에게 미리 알려 주신 본문이다.
그리스도인은 예수가 간 길을 걸어가는 사람이다. 그러기에 그는 예수가 당한 수모와 고난과 핍박과 죽음을 피하려 해서는 안된다. 예수의 그 아픔을 함께 아파하고 예수의 그 고난을 함께 짊어져야 하고 예수의 그 죽음을 즐겁게 죽어야 하고 그리고 예수의 그 부활을 온 존재로 맞이해야 한다.
예수의 인간적인 모습은 십자가의 고난에 나타난다. 기독교 신앙은 여호와 하나님의 가장 본질적인 모습이 십자가의 고난에 숨겨져 있다. 여호와 하나님이 인간을 위하여 죽음의 고난을 당한다. 높으신 여호와 하나님이 자기를 십자가의 모욕과 고통으로 낮추신다. 그는 자기를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제한시킨다. 그러므로 십자가가 가장 철저한 여호와 하나님의 자기 계시이다. 흔히 우리는 십자가의 고난을 인간 예수만이 당한 것으로 생각한다. 만일 그렇게 믿는다면 그것은 보편적인 구원의 사건이 아닐 것이다.
그것은 목수였던 한 인간의 순교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십자가 고난은 단지 한 인간 예수의 사건이 아니라 성령을 통한 삼위일체 여호와 하나님의 사건이다. 예수 안에서 인간이 되신 여호와 하나님은 인간이 당해야 할 고난을 대신 당한다. 당시 유대인의 사회에서 로마와 결합하여 백성들을 수탈하고 억압하였던 그 사람들이 서야할 자리에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 대신 선다. 인간의 눈으로 볼 때 그것은 억울한 죽음이었으나 여호와 하나님에게 있어서 그것은 자발적 순종의 행위요 여호와 하나님의 예정에 따라 일어난 구원의 사건이었다.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여호와 하나님은 사랑을 완성하며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를 일으키신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의보다 '더 나은 의'가 여호와 하나님 자신의 고난을 통하여 실현된다. 십자가 사건은 '민중의 고난의 현장'인 동시에 '더 나은 의'가 이루어짐으로서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가 새롭게 시작하는 구원의 사건이다. 그것은 새로운 창조의 사건이다. 이 새로운 창조는 여호와 하나님 자신의 고난을 통하여 시작한다. 자신이 고난을 당하면서 인간의 세계 속에 새로운 창조 곧 죄악으로부터의 해방, 죄악의 결과인 증오, 불의, 억압, 착취로부터 정의와 사랑, 자유와 평등이 다스리는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를 향한 해방을 일으킨다.
오늘의 신학에 있어서 '여호와 하나님이 어디에 계신가'하는 문제는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소위 보수적인 교회와 신학자들은 여호와 하나님은 개인의 심령과 교회 안에 계신다고 주장하면서 세계의 현실적인 문제들과 상황에 대하여 무관심한 입장을 취한다. 그 반면에 진보적인 교회와 신학자들은 '여호와 하나님은 교회 안에 계신다'는 주장에 대하여 매우 회의적인 시선을 보내면서 여호와 하나님은 세속 안에 가난한 사람들 안에 계신다고 주장한다. 성서의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 인간과는 전혀 다른 분이시지만 유아독존하지 않고 역사 안에 계시면서 이 역사를 '새 하늘과 새 땅'을 향하여 이끌어 가신다.
여호와 하나님이 하늘에 계신다는 것은 하늘 공간에 계신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의 미래에 계시면서 성령의 능력 가운데서 역사의 현재 속으로 오시고 이 역사를 이끌어 가신다는 것을 뜻한다. 물론 여호와 하나님은 그를 믿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계신다. 그러나 그의 계신 곳은 사람의 마음이나 심령에 제한되지 않는다. 온 우주가 여호와 하나님의 것이오 따라서 온 우주가 여호와 하나님의 처소가 되어야 한다. 기독교는 여호와 하나님의 계신 곳을 개인의 심령으로 제한시켜서는 안 된다.
기독교는 눈을 들어 이 역사를 보아야 한다. 죄와 불의와 억압과 착취와 죽음과 신음으로 가득한 이 역사 안에 계신 여호와 하나님을 보아야 하며 그의 신음 소리를 들어야 한다. 이 역사를 메시아의 구원받은 미래를 향하여 끌고 나가고자 하는 여호와 하나님의 뜻에 복종해야 한다. 오늘과 같은 세계의 비인간화, 가치관 전도의 상황 속에서 사회구조의 변화 없이 어떻게 구원할 수 있을까
역사의 예수가 소외당하였고 억눌리며 비참함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가운데에 계셨다면 지금도 예수는 성령을 통하여 이러한 사람들 가운데 계실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은 예수가 계신 그곳에 계신다. 따라서 여호와 하나님은 예수의 뒤를 따르는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들' 안에 계시는 동시에 소외당하였고 가난하고 비참함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안에 계신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예수의 십자가는 교회와 신학에 대한 규범이다. 교회의 모든 실천과 이론은 언제나 다시금 그의 십자가로 돌아가서 자기의 정체성을 확인해야 하고 자기를 수정해야 한다. 십자가를 지신 예수는 말씀하신다. "사탄아! 물러가라"는 준엄한 말씀과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말씀 앞에 사순절의 자리를 두어야 한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은 기독교 신학의 매우 중요한 테마일 뿐만 아니라 기독교적 실존의 의미를 제시하는 기본주제이다. 예수께서 받으신 고난의 사건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을 말하면서 동시에 이해하기 어려운 신비이다.
우리를 기쁨과 기대에 들뜨게 했던 그의 삶과 사역이 이제는 우리가 받아들일 수 없는 폭력적인 죽음 곧 십자가 처형이라는 사건에 내던져지게 되었기 때문에 제자들은 이를 이해할 수 없었으며 거부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우리가 성탄의 사건을 처음부터 주의 깊게 읽어본다면 그러한 예표들을 발견할 수 있다. 예컨대 시므온은 마리아에게 이 아기는 비방을 받는 표징으로 세우심을 받았다고 또한 칼이 당신의 마음을 꿰뚫을 것이라고 말한다(눅2:34~35). 이와 더불어 이사야 53장 전체는 이 주제를 위하여 의미를 던져준다.
이 고난은 갑자기 찾아온 것이 아니고 여호와 하나님의 깊은 뜻을 통하여 예비되고 있었던 사건이다. 마가복음에 보면 예수께서 세 차례 걸쳐 이를 예고하고 계심을 보고하고 있다(막 8:31~38, 9:30~32, 10:32~34). 예수께서 이 길을 선택하셨을 때 그와 가까이 지내던 이들에게서조차 이해하지 못하였다.
복음서들 가운데서 예수의 고난을 전면에 부각시키고 있는 책은 마가복음이며 그 요체를 증거하고 있는 부분 중 그 핵심이 오늘의 본문(막8:27~33)이다. 예수께서 고난 받으신 핵심은 어디에 있는가 본문은 그것을 대속 즉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함이요 우리로 하여금 여호와 하나님과 화해에 이르도록 하는 것이었다. 구약에서도 희생제물을 통한 속죄의 예를 볼 수 있지만 예수의 사역에서 중심적인 것은 십자가의 의미이다. 십자가 사건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사죄에 대한 선포의 핵심을 총괄적으로 말해 주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그가 믿는 도리를 '십자가의 말씀'이라고 함에 우리는 유의한다(고전1:18). 예수께서 십자가에 처형되었을 때 그것은 교회와 국가의 종교적 정치적인 사건으로 처리되었지만 이 사건이야말로 예수께서 자기의 목숨을 온 세상을 위한 희생의 제물로 내놓으실 수 있도록 하였다. 희생과 화해의 문제는 신약의 공관복음서에서 생생하게 묘사되고 있듯이 최후의 만찬을 나누실 때에 결정적으로 나타나 보이신다. 화해의 복음은 인간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전제하고 있다.
그러한 죄인 됨은 우리가 진실한 삶의 원천이신 여호와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졌으며 이로 인해서 사람들은 서로가 서로에게서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서 멀어졌음을 말해준다. 그런데 이 멀어짐을 우리는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가 그것은 인간 스스로의 힘과 노력으로가 아니고 여호와 하나님이 위로부터 '거져 주시는' 대속의 은혜로 말미암을 뿐이다. 예수의 고난 받으심과 십자가 사건이란 바로 그러한 은혜를 총괄적으로 증거 하는 것이다. 마가는 예수의 십자가를 그리스도인이 따라야 할 삶의 모델로 이해했음을 전제한다. 예수의 고난을 통해 공동체를 교훈 하는 의도로서 우리가 삶의 현장에서 고난을 당할 때 베드로처럼 비겁하게 예수를 부인하지 말고, 예수처럼 담대하게 화해의 고백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그 화해의 고백은 예수의 십자가 사건 즉 의로운 역사를 만들고 보다 자유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하여 노력하는 인간 속에서 찾아야 한다. 정의와 자유, 구조와 역사의 창조를 위해 오늘의 불의 속에서 고난을 감당하려는 인간의 노력 속에서 예수의 십자가 사건의 의미를 찾아야 한다. 마가는 예수의 십자가상의 처형을 정치적 처형으로 부각시키지 않는다. 예수를 죽인 것은 로마의 총독 빌라도가 아니라 당시 유대의 종교지도자라고 하는 점을 부각시킨다. 비록 예수가 로마식 사형을 받았지만 그 극형의 이유는 정치적 반란이 아니라 종교적인 신성모독이라고 밝힌다. 종교지도층에 대한 예수의 보다 근본적인 규탄은 인간보다 종교제도를 신성시한 당시의 부조리를 겨냥한 것이다.
예수는 여러 가지 무거운 짐을 지고 고생하는 민중들에게 그 짐을 가볍게 해 주려고 하였다. 짐진 자들로 하여금 편히 쉬게 해주겠다는 기쁜 메시지 곧 복음을 전파하셨다. 부자유로부터 해방, 불평등으로부터 해방, 경제적 수탈에서 해방, 정치적 구조에서 해방, 정신적, 육체적 고통과 번민에서부터 해방을 선포하신 것이다. 보다 정의로운 공동체의 형성을 위해 십자가를 지라는 예수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본문을 다시 당시현장에서 간추림 한다면, 하루는 예수가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을 지나가게 되었다. 갑자기 그는 그 자신에 대한 세상 여론을 알아보고 싶었다. "세상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더냐" 제자들에게 물으신다. 대단히 사회적인 질문이다. 제자들은 여러 가지로 여론을 들려준다. 갑자기 예수는 제자들을 보고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라고 물으신다. 매사에 덤비기 좋아하는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대답한다. 여기 예수의 평가는 흥미롭다.
베드로가 대답을 한 것은 그의 혈육 때문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힘 때문이라고 하신다. 즉 베드로의 육적인 관심은 예수가 세상에서 영광스러운 자리에 올라갈 때 한자리를 갖는 일이다. 비단 베드로뿐만 아니라 예수의 모든 제자들이 혈육을 동시에 가지고 예수를 따라 다녔다. 예수가 배를 채워주니까 예수가 잔칫집에서 포도주를 만들어 주니까 예수가 병을 고쳐주니까 예수가 기적을 행하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예수가 왕이 될 터이니까 그래서 많은 무리와 제자들이 그가 가는 곳마다 그를 열심히 따라 다녔다.
이것들은 인간 욕구충족에 만족한 기대들이었다. 비로소 예수는 자기가 걸어가야 할 고난의 길을 제자들에게 열어 보이신다.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림바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저희에게 가르치시되"하시니 이 놀라운 가르침에 대한 베드로의 반응은 바로 지금까지 예수를 따르던 심사를 들어내 보인다. 육적인 축복을 안겨다 주는 분으로 믿고 그를 따랐던 무리들의 대표적인 반응이었다. 오늘의 한국 교인들의 반응은 이와 다른가 생각해 본다. 이러한 기복적인 반응에 대한 예수의 응답은 바로 분노이었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는 꾸지람이었다.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에 예수를 광야에서 유혹했던 그 사탄의 모습을 베드로의 속에서 발견하고 육신의 복과 욕구충족을 얻기 위해 예수를 따르고 믿는 그 마음을 사탄의 마음으로 규정한 점을 예의 주의하여 경고 처리해야 한다. 그렇다면 예수는 왜 고난의 길을 가야 하는가 왜 기독교는 고난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가 생각해 보는 사순절이 되었다. 예수의 고난은 이기적 고난이 아니라 인격적 완성을 위해 수도하려는 그러한 고난이 아니다. 극기를 위한 수신적 자기 훈련이 아니다.
그는 수탈 당한 민중을 보고 깔보고 억누르고 있는 지배집단과 인간을 부당하게 비뚤어지게 만드는 사탄의 기존 세력에 의해 고난을 당할 수밖에 없기에 고난을 당한 것이다. 역사를 어둡게 하고 사회를 부패시키고 인간의 전체성을 파괴하는 위선자, 지배자들에게 용기 있게 대결했기에 그들에 의해 고난을 당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당시의 위선자들, 지배자들, 그리고 수탈자들이 판치고 있던 예루살렘에 내려가 고난을 당하고 죽을 수밖에 없음을 고백한 것이다.
그러므로 어두운 역사의 주역들이 시퍼렇게 살아 있어서 인간을 어두움 속으로 몰아넣고 부패한 구조의 주역들이 날뛰고 있어서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인 민중을 상처 입히는 한 예수와 그를 믿는 사람들은 고난을 당할 수밖에 없다. 어느 역사 속에서나 그 곳에 예루살렘이 있고 그 예루살렘에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있는 한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은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의 길을 가지 않을 수 없다.
여호와 하나님의 뜻과 여호와 하나님의 의는 예루살렘과 그 주역들이 있는 한 이 땅에서 이루어지기 어렵다. 여호와 하나님 나라의 도래(到來)를 그들이 먼저 방해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진실로 기도하는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예루살렘파와 대결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의 고난은 의로운 여호와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위한 적극적인 의미를 지닌 고난이다.
기독교가 의로운 역사를 엮어 가는 전위의 역할을 해야 하는 이유를 깨닫게 한다. 여호와 하나님의 뜻과 여호와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서 이루기 위해서는 자기를 부정하는 자기 속으로부터의 아픔을 안을 뿐만 아니라 밖으로 지워지는 가혹한 십자가형의 아픔을 온 몸으로 맞으면서 오늘도 고난과 죽음에의 길을 걸어가야 한다. 그러나 분명히 골고다의 길이 허무한 죽음으로 끝나는 길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그 길 끝에는 반드시 죽음을 이긴 삶이 있다. 그 길 막바지에는 죽음을 내쫓는 부활이 있다.
그러기에 예수는 예루살렘의 주역들에게 고난을 당하고 죽임을 당하나 사흘 후에 살아나실 것을 의식화되지 못했던 제자들에게 미리 알려 주신 본문이다.
그리스도인은 예수가 간 길을 걸어가는 사람이다. 그러기에 그는 예수가 당한 수모와 고난과 핍박과 죽음을 피하려 해서는 안된다. 예수의 그 아픔을 함께 아파하고 예수의 그 고난을 함께 짊어져야 하고 예수의 그 죽음을 즐겁게 죽어야 하고 그리고 예수의 그 부활을 온 존재로 맞이해야 한다.
예수의 인간적인 모습은 십자가의 고난에 나타난다. 기독교 신앙은 여호와 하나님의 가장 본질적인 모습이 십자가의 고난에 숨겨져 있다. 여호와 하나님이 인간을 위하여 죽음의 고난을 당한다. 높으신 여호와 하나님이 자기를 십자가의 모욕과 고통으로 낮추신다. 그는 자기를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제한시킨다. 그러므로 십자가가 가장 철저한 여호와 하나님의 자기 계시이다. 흔히 우리는 십자가의 고난을 인간 예수만이 당한 것으로 생각한다. 만일 그렇게 믿는다면 그것은 보편적인 구원의 사건이 아닐 것이다.
그것은 목수였던 한 인간의 순교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십자가 고난은 단지 한 인간 예수의 사건이 아니라 성령을 통한 삼위일체 여호와 하나님의 사건이다. 예수 안에서 인간이 되신 여호와 하나님은 인간이 당해야 할 고난을 대신 당한다. 당시 유대인의 사회에서 로마와 결합하여 백성들을 수탈하고 억압하였던 그 사람들이 서야할 자리에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 대신 선다. 인간의 눈으로 볼 때 그것은 억울한 죽음이었으나 여호와 하나님에게 있어서 그것은 자발적 순종의 행위요 여호와 하나님의 예정에 따라 일어난 구원의 사건이었다.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여호와 하나님은 사랑을 완성하며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를 일으키신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의보다 '더 나은 의'가 여호와 하나님 자신의 고난을 통하여 실현된다. 십자가 사건은 '민중의 고난의 현장'인 동시에 '더 나은 의'가 이루어짐으로서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가 새롭게 시작하는 구원의 사건이다. 그것은 새로운 창조의 사건이다. 이 새로운 창조는 여호와 하나님 자신의 고난을 통하여 시작한다. 자신이 고난을 당하면서 인간의 세계 속에 새로운 창조 곧 죄악으로부터의 해방, 죄악의 결과인 증오, 불의, 억압, 착취로부터 정의와 사랑, 자유와 평등이 다스리는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를 향한 해방을 일으킨다.
오늘의 신학에 있어서 '여호와 하나님이 어디에 계신가'하는 문제는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소위 보수적인 교회와 신학자들은 여호와 하나님은 개인의 심령과 교회 안에 계신다고 주장하면서 세계의 현실적인 문제들과 상황에 대하여 무관심한 입장을 취한다. 그 반면에 진보적인 교회와 신학자들은 '여호와 하나님은 교회 안에 계신다'는 주장에 대하여 매우 회의적인 시선을 보내면서 여호와 하나님은 세속 안에 가난한 사람들 안에 계신다고 주장한다. 성서의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 인간과는 전혀 다른 분이시지만 유아독존하지 않고 역사 안에 계시면서 이 역사를 '새 하늘과 새 땅'을 향하여 이끌어 가신다.
여호와 하나님이 하늘에 계신다는 것은 하늘 공간에 계신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의 미래에 계시면서 성령의 능력 가운데서 역사의 현재 속으로 오시고 이 역사를 이끌어 가신다는 것을 뜻한다. 물론 여호와 하나님은 그를 믿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계신다. 그러나 그의 계신 곳은 사람의 마음이나 심령에 제한되지 않는다. 온 우주가 여호와 하나님의 것이오 따라서 온 우주가 여호와 하나님의 처소가 되어야 한다. 기독교는 여호와 하나님의 계신 곳을 개인의 심령으로 제한시켜서는 안 된다.
기독교는 눈을 들어 이 역사를 보아야 한다. 죄와 불의와 억압과 착취와 죽음과 신음으로 가득한 이 역사 안에 계신 여호와 하나님을 보아야 하며 그의 신음 소리를 들어야 한다. 이 역사를 메시아의 구원받은 미래를 향하여 끌고 나가고자 하는 여호와 하나님의 뜻에 복종해야 한다. 오늘과 같은 세계의 비인간화, 가치관 전도의 상황 속에서 사회구조의 변화 없이 어떻게 구원할 수 있을까
역사의 예수가 소외당하였고 억눌리며 비참함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가운데에 계셨다면 지금도 예수는 성령을 통하여 이러한 사람들 가운데 계실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은 예수가 계신 그곳에 계신다. 따라서 여호와 하나님은 예수의 뒤를 따르는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들' 안에 계시는 동시에 소외당하였고 가난하고 비참함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안에 계신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예수의 십자가는 교회와 신학에 대한 규범이다. 교회의 모든 실천과 이론은 언제나 다시금 그의 십자가로 돌아가서 자기의 정체성을 확인해야 하고 자기를 수정해야 한다. 십자가를 지신 예수는 말씀하신다. "사탄아! 물러가라"는 준엄한 말씀과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말씀 앞에 사순절의 자리를 두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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