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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 십자가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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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사순절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우리를 위해 고난받으시고 돌아가신 예수님의 십자가를 명상하는 절기입니다.
이번 사순절! 새 천년들어 처음맞는 뜻깊은 절기입니다. 첫 단추를 잘껴야 하듯이, 첫 번째로 맞는 절기를 잘 맞이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해야 새 천년에 우리의 신앙, 우리의 영적 생활이 바르게 영위되어야 할 것입니다.
과연, 이 절기를 어떻게 맞이해야 잘 맞이 하는 것일까요
대답은 매우 간단합니다. 그리고 아주 분명합니다. 십자가의 신앙으로 무장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사랑하고 그 십자가의 길을 따르기로 결단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셨습니까
오늘 우리교회 문제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가장 절실한 문제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오늘 내 신앙의 가장 중대한 문제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그것은, 십자가의 신앙 아닐까요. 십자가를 저버린 교회, 십자가를 포기한 성도들, 십자가 없는 내 신앙 말입니다.
바로 여기에, 오늘의 성도들과 교회와 우리의 문제가 있고, 위기가 있고, 불행이 있습니다. 진실로 십자가를 저버린 교회는 교회가 아닙니다.
십자가를 포기한 성도는 성도가 아닙니다.
그 교회는 생명이 없는 죽은 교회입니다.
썩고 병들고 부패한 교회입니다. 희망이 없는 교회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예요.
십자가의 길을 포기한 신앙은 생명이 없습니다. 죽은 신앙입니다. 썩었습니다. 병들었습니다. 부패한 신앙입니다. 나약하고 무능해서 아무쪽도 쓸모가 없는 희망없는 신앙입니다.
솔직히 우리의 신앙! 좀 잘못되어 있습니다.
너무 세속적이고, 너무 기복적인 신앙에 빠져있습니다. 본질에서 떠나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을 잃어 버렸습니다. 신앙의 초점을 여호와 하나님께 두지 않고, 자기의 세속적인 욕망에 두는 것입니다. 신령한 은혜와 복을 사모하고 구하지 아니하고, 육신적이고 세속적인 복을 사모하고 구하는 바로 그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신앙에서 언제나 십자가가 뒷전으로 밀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의 내용을 잃어 버렸습니다. 빈 껍질만 지니고 살아 갑니다. 수박 겉 핥기식의 예수만 믿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그 신앙이 성장 할 수가 없습니다.
성숙될 수가 없습니다.
믿음의 능력이 나 올 수가 없습니다.
문제는 십자가 없는 신앙의 문제입니다.
십자가의 길을 포기한 이 신앙생활의 문제입니다.
본문의 내용이 바로 그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십자가의 신앙으로 무장시키고자 이 말씀을 쓰신것입니다. 한 번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불러 모으시고 물으십니다. "사람들이 나더러 누구라 하더냐"
제자들은 자기가 들은대로 각각 대답을 하지요. '예, 더러는 세례요한이라합니다. 또, 더러는 엘리아라고합니다. 더러는 예레미아 같은 선지자중의 하나라고 합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다시 물으십니다. 매우 중대한 질문이었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이 때 베드로가 선뜻 대답을 합니다. "주는 그리스도 시요, 살아계신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정말 완벽한 대답이었습니다. 훌륭한 고백이었습니다. 수제자다운 대답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이 고백을 들은 예수님, 만족하셔서 큰 소리로 말씀하십니다. "바요나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네 아버지 시니라" 그리고 그에게 복된 이름을 지어 주십니다.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 그 뿐 아닙니다. 그에게 어청난 영광과 특권도 주셨습니다. 내가 천국의 열쇠를 네게 주리니 내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 매일것이요,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이 얼마나 엄청난 축복입니까. 그렇기에 그는 그 순간 기쁘고 황홀했을 것입니다. 제자들의 신앙을 테스트 해 본 예수님은 이만하면 이제 할 말을 할 수 있겠다고 생각하신것 같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을 조용히 불러 놓고 말씀하십니다. 당신의 십자가의 죽음을 예고 하십니다.
31절말씀입니다.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되어 죽음을 당하고, 사흘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저희에게 가르쳐 주되 드러내놓고 이 말씀을 하시니 조금 있으면 십자가에 못박혀 죽기위해서 십자가의 길을 가게 될 것을 말씀하십니다. 처음으로 제자들에게 알리시는 말씀이었습니다. 이 떄 베드로가 펄쩍뛰면서 예수님을 붙들고 간합니다. "주여, 그리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님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바로 그 순간이었습니다. 예수는 베드로를 향해서 아주 무섭게 질책을 하십니다.
"사탄아, 내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여호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도다"
세상에 이런 날벼락이 어디있어요. 조금전까지도 반석같은 믿음의 사람이라고 칭찬하신 예수님께서 어째서 한 순간에 "사탄아, 네뒤로 물러가라" 책망하신것입니까. 언제는 천국열쇠를 내게 주겠다고 말씀하신 주님께서 어째서 돌변해서 사탄이라고 부르신단 말입니까. 도대체 이런일이 어이 있을 수 있으며, 왜 이래야 되는 것입니까. 과연 베드로 무슨 사연이 있습니까. 베드로가 무슨 잘못을 저지른것 입니까. 과연 베드로 무슨 사연이 있습니까 베드로가 무슨 잘못을 저지른것 입니까. 혹시 예수님께서 이랬다 저랬다 하시는 이상한 분은 아실까요.
정말 그렇지 않다면 무엇때문입니까, 무슨 사연때문입니까.
사연은 딱 하나입니다. 십자가의 신앙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길을 싫어하고 외면하는 것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본문은 34절에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그러므로 베드로의 신앙문제는 십자가 문제였습니다.
십자가를 거부한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서 매우 중요한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인간은 무한한 가능성이 있는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성자와 사탄사이를 오르내리는 가능성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여기 베드로처럼 한 순간 성자도 될 수 있고, 한 순간 사탄도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우리안에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종종 무서운 착각에 빠져 삽니다. 자신의 신앙은 타락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만하면, 내 신앙 형편없는 단계로까지 내려가지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매우 어리석고 위험한 착각입니다.
변화 무쌍한게 우리의 신앙입니다. 자칫 방심하면 여기 베드로처럼 한 순간 성자가 사탄으로 돌변하고 둔갑할 수 가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꼭 이것을 잊지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어느 한 순간도 방심해선 안됩니다. 삼가 조심해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이 십자가의 신앙입니다. 십자가의 신앙으로 무장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날마다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이 십자가의 신앙 부제로 인해서 베드로는 영적으로 실패했습니다.
가룟유다는 예수를 팔아 넘겼습니다. 여러분 우리 한 번 가룟유다를 생각해보십시다. 그는 분명 예수님의 제자였습니다. 제자들도 아주 탁월한 제자였습니다. 지식도 있었습니다. 지혜도 있었습니다. 신뢰성도 있는것 같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 그에게 돈 궤를 맡기셨습니다. 회계업무를 맡긴자입니다. 그런데 어찌했습니까 한 순간에 돌변했습니다. 스승예수를 원수들에게 팔아넘기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의 제자이기를 포기하고 오히려 사탄의 앞잡이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 얼마나 무서운 신앙의 변절입니까 어떻게 이토록 형편없이 살아 갈 수가 있단 말입니까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십자가 없는 신앙이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두려워 했기 때문입니다. 가룟유다가 예수님의 제자 되기로 결심하고 따랐을때에 그는 기대 했을것입니다. 예수께서 이 나라 왕이 되시면, 무언가 한 몫보리라고 속마음을 먹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뜻 밖입니다. 이 번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면 왕이 되기는 커녕 오히려 고난과 핍박받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 때 가룟유댜의 기대와 소망은 산산히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실망하고 분노합니다. 이제껏 예수를 따른 결과가 고작 이것이란 말인가, 불안과 두려움을 느낍니다.
예수님 십자가에 죽게되면 그의 제자인 우리또한 편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 화를 면치 못 할 것이다. 그래서 그는, 그 영리한 유다는 머리를 굴려댔습니다.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어떻게하면 닥쳐올 화도 면하고 본전도 뺄것인가, 그 동안 예수를 위해서 투자한 것이 얼마인데 이대로 끝낼 수 없지 않은가, 생각합니다. 생각한 끝에 그가 결단한 것이 예수를 원수들에게 팔아 넘기기로 한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는 예수님과 다른 제자들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고 있을때에 대 제사장에게 달려 갔습니다. 가서 예수의 몸값을 흥정합니다. 내가 우리의 스승예수를 당신들에게 넘겨줄테니 얼마 줄것입니까. 대 제사장 말합니다. "은30개 주리라" 은 30개는 당시 노예 한 사람의 몸 값입니다. 가룟유다는 스승예수를 노예 한사람의 몸값받고 팔아 넘겼습니다. 과연 스승을 판 그 은30개, 그에게 무슨 의미와 가치가 있었습니까. 그는 자기의 행위에 대해서 당장 후회합니다. 그리고 그 돈을 들고 그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시 돌려줄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 불의한 돈을 그 대제사장이 받을 이유가 없습니다. 이 때 유다는 그 돈을 성소에 내어 던지고 그길로 목메어 죽고 맙니다. 사도행전 1장을 보면요, 그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합니다. " 이사람이 불의의 삯으로 밭을사고, 후에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 나온지라, 이 일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게되어 본 방언에 그 밭을 이르되 아겔다마라하니 이는 피밭이라는 뜻이라" 얼마나 불행한 인생 부끄러운 죽음입니까, 단테 신곡에 보면은 지옥의 맨 밑창에 두 사람의 배신자가 잘려서 고통당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는 시이저를 죽인 부르타스이고, 또 하나는 스승예수를 판 가룟유다라고 했습니다. 과연 무엇 때문입니까. 과연 무엇때문에 가룟유다의 삶이 그토록 비참했습니까. 가룟유다의 죽음이 그토록 비참했습니까.
과연 무엇이 천추만대에 불명예를 그에게 남겨주게 된 것입니까
이유는 너무도 분명 간단합니다. 십자가 없는 신앙이었습니다. 베드로보다도 요한보다도 훨씬 더 사랑받고 훌륭한 제자가 되었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여러분, 성경과 교회사를 보십시요. 모든 믿음의 사람들이 다 그러했습니다. 한결같이 십자가의 길을 걸은 사람들 이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위해서 복음을 위해서, 그리고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십자가를 자청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모세를 보세요. 그는 애굽왕국에서 얼마든지 부귀와 영화를 부리며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여호와 하나님과 민족을 위해서 십자가를 자청합니다. 믿음으로 모세는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여호와 하나님과 백성들을 위해서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날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했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해서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도 더 큰 재물로 여겼습니다. 그렇기에 또한 어찌 되었습니까. 위대한 여호와 하나님의 사람, 위대한 민족의 지도자가 되지 않았습니까
그 이름 천추만대에 빛났습니다. 지금도 유대 사람은 모세라면 껌뻑죽습니다. 여호와 하나님 다음으로 존경하고 숭상하는 일이 바로 모세입니다.
사도바울 또한 그러합니다. 그들 역시 세상적으로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베냐민지파의 사람이고, 가말리아 문하생이고, 로마의 시민권자이고, 그리고 산헤드린 공회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다시말해서, 세상 좋은 조건들 다 구비했습니다. 부귀와 영화, 권세와 공명이 줄줄이 그를 따라 다녔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서 이 모든 것 배설물처럼 여기고 이 십자가의 길을 선택합니다. 주님의 십자가에 동참하고 주님의 뒤를 따릅니다. 그의 일생 십자가의 생애를 살아 갔습니다. 그렇기에 여호와 하나님은 그를 들어서 이방의 사도로 삼으시고 세계선교의 불길을 일으켰습니다. 그를 축복하셔서 세상에서 주님 가장 많이 닮은 성화된 삶을 살게 했습니다. 성프랜시스, 다이엔 슈바이쳐, 또는 리빙스턴 같은 사람이 또한 그런 이물이었습니다. 그들이 그런 인물이 된 건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삶이었습니다. 십자가의 길에서 얻어진 필연이었습니다. 그들은 그 누구보다도 자기를 부인했습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좇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서양속담에 No 크로스, No 크라운 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십자가 없는 곳에는 영광 또한 없다는 것입니다. 틀림없습니다. 십자가 없는 곳에 세상 영광은 몰라도 신령한 영광, 그리스도의 영광은 없습니다. 성도의 모든 영광은 오직 십자가의 길에서만 주어집니다. 십자가의 길을 떠나서는 성도의 영광이란 있을 수가 없습니다. 보다 확실하게 말해 둡니다. 십자가의 길을 가지 않는 자는 결코 성도일 수가 없습니다.
성도란, 십자가의 길을 가는 사람입니다.
십자가 밖에서는 성도의 자격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보문에서 주님이 분명히 말씀합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본문에 나타난 베드로의 모습을 다시 한 번 주목합시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려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신다고 하셨을 떄 베드로가 왜 "그리마옵소서" 하고 예수님을 붙들고 간했을가요. 오늘의 본문 문맥으로 봐서 이유가 분명합니다. 십자가 없이 신앙 생활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베드로는 주님께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주님, 당신은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이 아니십니까, 그런데 어찌해서 고통의 십자가를 꼭 지시려고 합니까.
제발 그리하지 마시고, 다른길로 성부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이루십시요.
그리고 또 저희도 그렇습니다. 이제는 저희도 주님 때문에 고생하는 것 더 이상은 싫습니다.
그동안 고생으로 충분합니다. 이제는 고생없이 주님을 따르고 싶습니다. 좀 더 편하게 제자노릇을 하고 싶습니다. 제발 십자가의 길으 포기하십시요. 그 때 예수님은 뭐라고 말슴 하십니까 "네 말이 옳다. 네 마음 이해한다" 고 하셨습니까 아닙니다. 아주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 자로다 네가 여호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이것을 보면 베드로의 신앙은 건성이었습니다. 그 동안 예수를 믿고 따른다고 했지만 건성으로 믿고 따랐습니다. 진정한 십자가 지고 따른게 아닙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따른게 아닙니다. 물론 한 때, 베드로도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 배도 버리고, 직장도 버리고, 가족도 친구도 버렸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버리지 못한 것이 있습니다. 자기 자신 이었습니다. 아직도 자기를 버리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마침내 그 중요한 순간에 사탄에게 넘어가고 만 것입니다. 주님을 배반하고 만 것입니다. 대 제사장의 뜰에서 한 기자의 질문에 나는 예수가 누군지 모른다고 부인하고 말았습니다. 십자가 없는 신앙입니다. 자기를 부인하지 못하는 신앙입니다. 이게 얼마나 나약하고 비참한 것인지 모릅니다. 그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사탄에게 내어준 신앙입니다. 그러나 다행입니다. 베드로의 신앙은 여기서 끝나지 않지요. 십자가의 신앙으로 새롭게 거듭납니다. 주님 부인한 그 새벽 닭의 울음소리를 듣고 통곡하며 회개합니다. 오순절 성령체험을 통해서 십자가의 신앙으로 굳게 무장합니다. 드디어 그는 십자가의 길을 힘차게 달렸습니다. 순교의 각오를 가지고 예수살렘으로, 로마로 달려가서 예수의 복음을 전파합니다. 마침내 그는 로마에서 원수들에게 붙잡혀서 처형당합니다. 물론, 예수님의 십자가가형에 처형당합니다. 그는 처형당하는 순간 사형집행고나에게 호소합니다. "제발, 제발 이 십자가는 우리 주님께서 처형당한 십자가입니다. 나 어찌 주님처럼 처형되리요. 나를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아 주십시오" 그리고, 담대하게 찬송하며 그 십자가를 매고서 순교의 영광을 누렸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반석같은 믿음의 사람이었고, 천국열쇠를 받기에 충분한 사람이었습니다. 십자가의 신앙이 이토록 귀합니다. 십자가의 길이 이토록 위대한 삶입니다. 그렇기에 오늘도 사탄은 성도를 유혹하는데 쓰는 말 다섯가지가 있습니다.

 첫번째는, 누구도 다 하는일인데 왜 너만 별나게 구느냐, 너도 한 번 해보라는 것입니다.

 두번째는, 이정도야 어떠냐 주저말고 부담없이 해보라는 것입니다.

 세번째는 이번 한번만 하라, 딱 한 번만 해보라고 말합니다.
네번째는 아직도 시간은 얼마든지 있다. 서두르지 말고, 오늘 그만두고 내일 하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다섯번째 사탄의 말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무얼 그리 야단스럽게 믿느냐, 어렵게 믿느냐, 편안히 적당적당히 믿어보라고 말합니다. 무슨뜻입니까 십자가 없는 예수를 믿으라고 말합니다. 십자가를 지지않는 신앙생활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같이 사탄의 소리를 들을때에 단호하게 거절해야 합니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여호와 하나님의 의를 생각지 아니하고 사람의 의를 생각하는 도다. 그러면서, 오늘 이 시간이 매우 중요합니다.
이 번
 첫번째 사순절인 오늘 우리가 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십자가의 신앙으로 결단해야 합니다. 나를 부인하고 십자가지고 주를 따르는 결단이 오늘아침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럿셀이라는 목사는, 이 십자가의 사랑을 순교자적인 사랑으로 바꾸어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루마니아 공산 치하에서 신앙때문에 반평생을 감옥에서 보냈습니다. 그래서, 그는 살아있는 순교자로 불리움을 당합니다. 그는 이런말을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순교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주님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순교이고, 또 하나는 삶을 바치는 순교라 했습니다.
진짜순교는 목숨을 바치는 순교보다 삶을 바치는 순교가 더 중하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목숨을 바치는 순교보다 삶을 바치는 순교가 더 중하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목숨을 바치는 순교보다 삶을 바치는 순교가 더 어렵고 귀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살아있는 순교가 무엇일까요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의 십자가지고 주를 따르는 그것입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갈보리산 십자가위에 달리신 주님의 모습 바로 그것이 살아있는 순교자의 모습니다. 이 아침에 우리모두 갈보리산으로 달려갑시다.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의 그 모습을 한 번 닮아 봅시다. 거기에서 십자가의 삶을 배웁시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사랑과 용서의 삶입니다. 당신을 무고히 십자가에 못박고 침뱉고 희롱하는 원수까지도 사랑하고 용서하는 것입니다.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소서 자기하는 것을 알지 못합이니이다. " 기도하시는 주님의 그 모습 말입니다. 도무지 사랑할 수 없는 자를 사랑합니다. 용서할 수 없는 자를 용서하는 절대적인 사랑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이 사랑을 부탁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하는것 같이 너희도 이 같이 사랑하라"하셨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십자가지는 사랑이고, 살아있는 순교자의 모습입니다.
지금 여러분은 이 사랑을 하고 있나요
혹, 용서하지 못 할 사람있습니까
그렇다면 이 시간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갈보리산 십자가위에서 피 뚝뚝흘리면서 내 죄를 용서하시는 그 주님을 바라 보십시오. 그리고, 이 십자가의 사랑과 용서를 우리의 것으로 삼으십시오. 이 십자가의 사랑과 용서만이 우리가 진정으로 행복한 비결입니다. 오늘의 위기를 극복하고 문제를 푸는 열쇠입니다. 이 땅에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고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것입니다. 또한, 온유와 겸손의 삶입니다. 다시 갈보리산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원수들의 조롱과 욕설에도 조용히 침묵하시는 주님의 모습이 어떤 모습입니까 온유와 겸손의 모습 아닙니까 우리가 실천할 십자가의 삶이란 바로 이것입니다. 오늘 우리가운데 미움이 어디있으며, 다툼이 어디서 오는 것 입니까. 온유와 겸손 문제 아닙니까. 서로 시기하고 정복하려는 마음, 서로 잘났다고 떠들어대는 바로 이 마음때문 아닙니까, 조금만 온유하고 겸손했더라면 백사만사가 잘 될것을 그 원수놈의 교만때문에 문제가 더 심각해지지 않습니까. 그래서 서로 불행하지 않습니까, 오늘 우리사회, 우리교회 무엇이 문제입니까. 지도자들이 서로 살았고 교만한 태도때문에 문제 아닙니까. 그러면서 우리는 오늘 이나라의 훌륭한 지도자였던 고당 조만식선생님, 그 장로님에게서 꼭 배워야 합니다. 그토록 명성있는 민족의 지도자 이면서도 한 없이 온유하고 겸손한 그분입니다. 어린 아이들 앞에서도 허리를 굽혀 절을 했습니다. 자기의 제자를 자기앞에 모시고 섬겼습니다. 교회에서는 언제나 화장실청소, 신발당번만 도맡아서 하셨습니다.
그러기에 당시 평양시민들이 그 분 보기위해서 교회로 모여들었습니다.
그 분의 겸손에 감동되어서 예수 믿었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이 그 분을 추대해서 민족의 지도자로 모셨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 사회에 이런 지도자들이 필요합니다. 오늘 우리교회에 이런 인물들을 필요로 합니다. 또한 십자가위의 에수님의 모습은 전적인 희생과 봉사의 모습입니다. 세상죄를 위해서 그분은 십자가를 내어 주셨습니다. 인류의 구원을 위해서 피흘리신 바로 주님이 그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삶이란 다른게 아닙니다. 할 수 있는데로 남을 섬기고 주는 것입니다. 이것없이 우리의 삶에 기쁨도 보람도 없습니다.
이 땅위에 평화도 화해도 없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근원적인 위기와 문제가 있다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극도의 이기주의 입니다. 서로 지배하고 빼앗으려고합니다. 남을 섬기고 주는데 인색합니다. 이 같은 이기주의 극복이 시급합니다. 과연 이것을 위해서 누가 앞장 설 것입니까. 이 일을 어떻게 불신자들에게 맡길것입니까 아닙니다. 우리가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분들보다 더 많은것을 받았고, 더 많이 가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뭘 많이 그리받았고 가졌습니까 생각해보십시오. 이 세상에 우리보다 많이 받고 가진자 있습니까 지금 우리에게는 구원과 영생이 있습니다.
천국에 기쁨과 소망이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와 천국시민의 자격이 있습니다.
날마다 여호와 하나님 모시고 은혜안에 살고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많이 받은자입니다. 가진자입니다. 그러므로 주어야 합니다. 줄 수 있습니다. 주는 것은 받은자로서의 특권이고, 영광입니다. 받으려고만 하고 줄줄모르는 사람은 결코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가장 불쌍하고 치사한 인간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십자가의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에두시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성부여호와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해요. "아버지여, 할 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옵소서" 그리고 예수님은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십자가를 지십니다. 거기서,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이루십니다. 인류를 위해 구원을 완성하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습니다. 자, 그렇다면 우리는 대답해야 합니다.
깨끗한 신앙양심가지고 정확하게 대답해야 합니다. 그 동안 우리는 얼마나 참고 견디면서 여호와 하나님의 뜻에 복종했나요. 매사에 내뜻보다 여호와 하나님의 뜻에 살려고 소원했습니까
여호와 하나님의 뜻은 아랑곳하지않고, 내 뜻대로만 할려고 안달부리지 않았어요
언제나 여호와 하나님의 뜻은 차선이고, 내뜻이 우선이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결코 그것 믿는게 아닙니다.
믿어도 헛 믿는것입니다. 철저하게 반성하고 회개할 일입니다. 그리고, 이 사순절기를 통해서 용감하게 결단해야 합니다. 삶의 일대 개혁을 일으켜야 합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를 따르는 십자가의 삶의 결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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