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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 빛의 자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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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가 사순절 4번째 주일입니다.
특히 이런 특별한 절기를 맞이하여
예수님의 고난을 묵상하며 기도하는 여러 믿음의 성도 님들을 보며
저는 참으로 많은 은혜를 받습니다.
사순절을 통해 나를 대신해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의 사랑과
십자가상 위에서 당하신 그 고통을 생각하면서
금식하시는 성도 님을 저는 압니다.
나 개인의 어떤 특별한 기도제목을 놓고
금식하며 기도하는 성도 님들을 보면 참 그 믿음이 부럽습니다.
그러나 어떤 특정한 개인적 사연 없이
나를 위해 고난받으신 주님을 묵상하다가
터져 나오는 감사를 억제 못해
함께 그 고통에 참례하고자 하는 성도님의 금식이
저에게는 얼마나 큰 은혜가 되며, 큰 감동이 되는지 모릅니다.
해마다 맞이하는 사순절이지만
금년 사순절이 더욱 마음속에 깊은 여운으로 다가와
작정하고 새벽마다 여호와 하나님 앞에 새벽 버스를 타고 나와 기도하는
성도 님을 통해 저는 또 많은 은혜를 받습니다.
믿음이란 이렇게 자신의 마음을
온전히 여호와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어떤 이론이나, 어떤 상식을 가지고 믿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 앞에 내 모든 것을 내 놓으며
여호와 하나님 앞에 내 모든 것을 드리며
아니 여호와 하나님 앞에 내 몸 전체를 드리는 것이 믿음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지옥으로 떠내려가는 하찮은 존재였습니다.
썩은 구정물위를 떠내려가는 더러운 쓰레기에 불과했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죄 때문입니다.
땅이 저주를 받아 구정물을 내며
여호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우리가 죄를 범해 쓰레기처럼 타락했습니다.
우리는 어둠 속에 있음으로서 여호와 하나님의 빛을 보지 못하고
빛이 없으매 여호와 하나님의 길을 찾아
어둡고 더러운 죽음의 길에서 빠져 나올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시어
하나뿐인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시어 우리의 죄를 대신해
비참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빛을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빛이 오매 우리는 사는 길을 찾을 수 있고
빛 가운데 있으매 더 이상 엉겅퀴 가시밭 속을 헤매지 않고
반듯한 영생의 길을 가게된 것입니다.
죄란 이렇게 무서운 것이요,
우리를 영원한 죽음의 길로 끌고 가는 원흉입니다.
죄란 윤리성이나 도덕성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죄란 마치 천사의 얼굴이나, 천사의 모습으로 우리를 찾아옵니다.
성경에서는 더 이상 비참할수없을 만큼 "죄"에 대하여 처참하게 기술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곧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 처참한 꼴을 당하시며 죽어야 하는 것이 죄입니다.
여호와 하나님마저 십자가위에서 피 흘리시며, 찍기 시며
죽어야 할 것이 "죄"라면
여러분! 저나 여러분에게는 무슨 다른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여호와 하나님까지 죽을 수밖에 없는 이 엄청난 죄 속에 있는 우리를
여호와 하나님은 외면치 않으시고, 우리를 살리시려 대신 달리신 것이
십자가 사건이요,
저나 여러분 때문에 달리신 주님의 그 고난을 묵상하며 감사하며
우리의 믿음을 다시 점검하며 결단하는 절기로 주신 것이 사순절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십자가의 더 할 수 없는 사랑으로 구원받은
우리 믿는 자의 최고의 목표와 기준은 무엇입니까
본문 10절에 나오는
"주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행해야 한다고 성경은 지적합니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여러분도 기뻐하셔야 하고
주님이 좋아하시는 것을 여러분도 좋아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는, 저와 여러분의 가장 큰 목표요/기준이요/핵심이요/내용입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11절
"어둠의 일에 참례하지 마라 그리고 돌이켜 책망하라" 하십니다.
마태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세상의 빛이요,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냥 빛이나, 그냥 소금이 아니라
세상의 빛이요, 세상에 소금이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나가 세상을 만날 때에
세상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따라가기 위해 만나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그들의 좋아하는 것이나,
그들이 기뻐하는 것을 함께 기뻐하고 좋아함으로 해서
세상 사람들을 따라가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원하는 것이나 좋아하는 것이나 기뻐하는 그 모든 것들이
어둠의 일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책망해야 하며
이런 풍조가 최소한 교회 내로 들어오는 것을 막아야하는 원칙과 함께
책망하는 교회 풍토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10여년전쯤 유행처럼 교회에 불어닥친 세상물결이 있었습니다.
연합교회를 중심으로 유행한 주말 빙고게임 이였습니다.
금요일 저녁과 토요일 하루를 교회 친교실에서 빙고게임을 했습니다.
시작의 동기는 간단합니다.
믿지않는 사람이 교회를 찾아오지 않고
열심히 전도하는 사람도 없으니
지금도 마찬가지 이지만 당시 유행하던 빙고게임을 교회에 유치함으로
믿지않는 사람들을 교회로 인도하여
전도하는 전도의 장으로 만들자는 아이디어 였습니다.
그러나 어떤 결과가 나왔습니까
교회 친교 실은 담배꽁초로 넘쳐나고
온 교회는 담배 니코친 냄새로 진동했습니다.
세상의 약삭빠른 상술을 교회에 유입해
교회를 부흥시키고자 얼마나 많은 시도가 있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의 섬김의 사역이
이익이나 유익을 최상의 목표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세상풍토와 결합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이와 같은 세상풍조가 교회 내로 들어오는 것을
막아야 하고 책망해야 합니다.
책망이란 비난하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이 죄를 지었소! 당신이 잘못했소!"
이렇게 나무라는 것을 책망이라 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정죄하는 것을 책망이라 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판단하고 심판하는 것을 책망이라 하지 않습니다.
책망이란
현재 어떤 사람이 처해 있는 지금 잘못된 상황만 보지 않고
앞과 뒤를 다 보여주어
가고자 하는 방향이나,
자기가 하고자 하는 일이 무엇인지
밝히 보여주는 것을 "책망"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책망이란
빛이 없어 어둡기 때문에 방향을 찾지 못하고,
자기 일을 하려고 해도, 어두움 때문에 할 수 없는 사람에게
빛을 비추어 밝히 보여주는 것을 책망이라 하며
이렇게 빛을 비춰주는 사람을 책망하는 사람이라 칭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책망에는 배려가 있고, 참음이 있으며,
사랑하는 마음이 늘 함께 하는 것입니다.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본문 8절의 말씀입니다.
어둠에서 빛으로 나왔으니 이제는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빛의 자녀란 어떤 사람입니까
주님의 마음을 가진 사람을 말합니다.
악인의 죄를 대신해 죽으심으로 저들을 사랑하신
주님의 사랑을 가진 사람이 빛의 자녀입니다.
그리고 이런 주님의 마음/ 주님의 사랑을 가진 빛의 자녀라면
반드시 빛의 열매가 맺어 집니다.
왜냐하면 빛의 자녀란
그의 열매를 보고 빛의 자녀인줄을 알수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빛의 열매란 어떤 것입니까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의로움과/진실함에 있느니라" 9절의 말씀입니다.
첫 번째가 "착함"이라는 것으로 인한 열매입니다.
착함이란 나를 기준으로 판단하는 것이 아닙니다.
착함이란 사람들을 기준 하여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옳은 것을 좋아하고 옳지 않은 것을 미워하는 것이 아닙니다.
착함이란 여호와 하나님의 기준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모든 사람들을 은혜와/자비와/긍휼과/사랑으로 다스리시는
그 기준으로 대하는 마음을 말합니다.
착함이란 내 쪽에서 사람을 판단하거나/분별하거나/나누지 않는 것을
성경이 말씀하는 착함이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심판에 이르지 않게 하기 위하여
회개할 것을 요구하고 계시며
그 기회를 지금도 주고 계신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과수원에 과일나무가 3년이나 열매를 맺지않자
과수원 주인이 모든 과일나무를 베어버리라 과수원지기에게 말합니다.
땅만 차지하고 아무 과실도 맺지 못하니 베어버리고
다른 작물을 심어 수확하라는 것입니다.
이에 과수지기가 주인에게 간청합니다.
주인이여! 일년만 더 참아주시면
내가 거름주고 가지를 치며 잘 가꾸어 과실을 맺게 하겠습니다.
만일 내년에도 과실을 맺지못하면 그때 베어 내소서!
우리의 착함도 이런 여호와 하나님의 기준이 되어야 하며
이런 착함이 저와 여러분, 모든 믿는 성도 님들의 착함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착함이 빛의 자녀가 되는 빛의 열매를 맺게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의로움"입니다.
이 의로움 역시 "인간의 의로움"이 아닌 진리에 의한 "의로움"입니다.
다시 말하면 "의로움"이란 "진리"라는 것입니다.
은혜와/자비와/사랑을 베풀며 화목케 하는 것을
의로움에서도 기준 삼아야 합니다.
만약 어떤 것이 은혜를 베푸는 일에나
자비를 베푸는 일이나, 사랑을 베푸는 일에 방해가 된다면
이 모든 방해되는 일로부터 자유로와 지는 것의 의로움입니다.
어느 고속버스회사 직원들이 모여 회의를 했습니다.
도로 곳곳에 설치되어 있는 '무인 속도 감시 카메라'에 번번히 찍혀
벌금을 무는 일이 많아지자 그 대책을 세우기 위해 모인 것입니다.
감시카메라에 걸리지 않는 다양한 경험과 방법과 대책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돈이 좀 들더라도 버스 안에 감지기를 설치하자는 둥,
반대편에 오는 차에서 손짓으로 위치를 알려주자는 둥
그러나 어느 방법도 근본적인 대책은 되지 못했습니다.
어떤 한사람이 말했습니다.
"절대로 무인속도감시카메라에 찍히지 않는 확실한 방법이 있습니다. "
다들 긴장을 하며 그게 뭘까 침을 꼴깍 삼키며
어서 빨리 말해보라며 재촉을 했습니다.
"그것은, 규정속도를 지키면 됩니다. !"
내가 옳은 일, 여호와 하나님의 참된 일에 참례하는 자유가 있다면
또한 옳지 않은 일, 부당한 일을 거부하는 자유 또한 있다는 의로움입니다.
우리가 때로 여호와 하나님의 진리마저도,
이것을 나의 기준에 맞추어 사용한다면
그것은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무서운 흉기로 변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의 의로움은 늘
은혜와/ 자비와/ 사랑을 베풀며, 화목케 하는 것으로
우리의 기준이 되어야 참다운 의로움으로서
빛의 열매를 맺게되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진실함입니다.
진실함이란 겉과 속이 다르지 않은 것을 말합니다.
포도를 파는 상인의 진실함이란
겉에 올려놓은 포도의 크기나 신선함이
맨 밑바닥에 보이지 않는
포도의 크기나 신선함과 같은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며 행해지는 겉의 모습이 아니라
우리 마음 안에 있는 속마음이 열매를 맺는 것을
우리는 빛의 열매라 부르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겉으로 웃으면서
속으로는 얼마든지 남을 저주할 수 있는 악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것을 우리도 좋아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참되시기에 우리도 참되며
여호와 하나님이 의로우심으로 우리도 의로우며
여호와 하나님이 용서하심으로 우리도 용서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이러함으로 우리에게서 나타나는 열매도 이렇습니다.
따라서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란
8-9절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우리는 모두 빛의 자녀들입니다.
그리고 빛의 자녀라면 빛의 열매를 맺어야하며
빛이란 어둠에 있는 어두움을 우리에게 보여줌으로
신앙생활을 분별하며 스스로 살펴서
신앙상의 문제들을 하나도 어김없이 틀림없게 만들어 나가라는
저와 여러분에게 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어두움에서 잠자는 자들은 죽은 자들을 말함이요
깨어 일어나는 자들이란 빛을 받아 영생하는 자들을 말합니다.
교회 성도여러분!
여러분은 빛의 비추임을 받은 빛의 자녀들이요,
또한 빛의 자녀란 어둠을 밝히 비춰 볼 수 있는 자들을 말합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빛으로 비춰진 어두움 속에서 무엇을 보셨습니까
초기 아프리카 선교사 한 분이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처음 아프리카 내륙에 있는 외지로 들어가 보니
풀로 엮어 만든 움집 같은 마을 뒤로
호수라기 보다는, 조금 큰 웅덩이 같은 못이 있었습니다.
선교사가 정말 놀란 것은
마을사람들이 그 물을 식수로 사용하면서도
그물에 빨래를 하고,
그물에 오물을 씻고
그물에 배설을 하더라는 것입니다.
이런 더러운 물을 식수롤 사용함으로 해서
그 마을 사람들의 평균연령이 30도 못돼 일찍 죽지만
아무도 이런 일에 대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것을 보는 자들이요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아는 자들입니다.
우리가 잠잠할 수 없는 이유요
우리가 외면할 수 없는 까닭입니다.
요즈음 나오는 모든 광고들을 한번 살펴보십시오.
시도 때도 없이 벌거벗은 여자들이 모델로 나옵니다.
자동차 광고에도, 컴퓨터 광고에도, 냉장고 광고에도 나옵니다.
자동차 광고하고 벗은 여자하고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자동차나 냉장고나 컴퓨터하곤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그러나 광고는 끊임없이 이런 선정적인 것으로 사람들을 유혹합니다.
아프리카 외지의 사람들이
웅덩이 물에 용변을 보고, 또한 그 물을 식수로 쓰는 것과
어쩌면 그렇게 똑같은 어두움에 사는지
우리는 놀라야 하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 다시 한번 저나 여러분은 빛의 자녀라는 것을 명심하시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으로 인하여
세상의 빛이 되고, 세상의 소금이 되어
우리의 옳은 모습을 보임으로서
저들의 잘못이 무엇인지 깨닥게 되는 그 생명에 대한 일에
주님의 사랑으로 충성된 주님의 제자들이 다 되어야 하겠습니다.
빛의 자녀는
빛의 자녀된 그것 하나로
우리는 아무것도 부러울 것이 없습니다.
초가면 어떻고 움막이면 어떻습니까
몸이 좀 약하면 어떻고 강하면 어떻습니까
좀 돈이 많으면 어떻고 적으면 어떻습니까
어떻한 환경, 어떠한 조건 속에서도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 하나 때문에
모든 것을 소유한, 그래서 늘 풍성한
그런 믿음이 우리에게는 있지 않습니까
이 믿음 안에서
정말 이 땅의 삶을 즐기며, 감사하며, 기쁨으로 사는
복된 삶을 살다가 또한 천국에서 영원히 복락을 누리는
저와 모든 교회 성도 님들 다 되시기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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