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절] 고난을 함께하는 공동체
본문
오늘은 사순절 세 번째 주일입니다. 사순절은 주후 2세기부터 시작돼 오늘날까지 교회가 중요하게 지키는 교회력 중의 하나입니다. 이 절기는 광야에서 사십일 동안 금식하고, 기도하고, 들짐승 속에서 살고 유혹을 받던 예수님과 함께 고난을 같이 하자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에 부활절을 기대하면서 사순절을 의미없이 보낸다면 부활절의 의미를 바로 알 수는 없는 것입니다.
부활이란 바로 요단강에서 세례 받고, 광야에서 금식과 시험받고 수 많은 고난을 거쳐서 십자가에 죽은 바로 그 장소에서 일어난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부활이란 한 높은 산꼭대기라고 비유한다면 그 산꼭대기로 올라가는 험한 길과 같아서 그 길을 피해 가지고는 정상으로 갈 수 없는 것과도 같은 이유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사순절 동안은 특별히 광야의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모든 신도들이 고난을 함께 하는 공동체가 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성서는 "여호와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랑은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고통을 당하는 사람을 보고 외면하지 못하는 구체적인 사랑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구약본문을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넓은 우주 가운데 이집트에서 매맞고 배고프고 억압당하고 고생하는 그 사람들을 주목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모세를 불러서 "내가 저 백성들이 억압과 고통을 당하며 울부짖는 소리를 듣고 있을 수 없으니 네가 가서 그들을 해방시켜라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해방시키셨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와 여호수와의 인도를 받아 가나안 본토까지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돌아온 이후 그들의 국토는 둘로 나누어졌고, 앗시리아와 바빌론의 포로로 잡혀가는 연속된 고난의 악순환 속에서 고통받게 되었습니다. 이런 때에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모세와 같은 대리인을 시키시지 않고 여호와 하나님 당신이 직접 성육신 하셔서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그리스도 사건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예배하고 있지만 만일 이곳이 우리에게 예수와 함께 하는 고난의 광야가 아니라면 그리스도를 예배하는 장소는 아닌 것입니다.
저는 지금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해서 말하고 있지만 그것은 결국 사랑에 관한 것입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고난을 그냥 보고 지나지 못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오셔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다른 방법을 취하지 않고 인간이 받을 수 있는 모든 고난을 직접 받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스스로 광야로 나가셔서 그곳에서 금식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고난의 극치로서 십자가에 죽음을 당하시고 마침내는 무덤 속에 들어가셨던 것입니다.
우리 사도신경에 중요한 것이 빠져있습니다. 일본어나 영어에는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장사한지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 살아나시고"가 아니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무덤에 들어가시고 지옥으로 내려가셨다가 부활했다"라고 되어있습니다. 예수님은 지옥으로까지 내려간 것입니다. 이 말씀은 베드로전서에 있습니다. 지옥이란 고난의 극단적인 곳으로 직접 내려간 것입니다. 들어가서 거기서 다 받아버림으로 이 모든 것을 이기셨던 것입니다. 지옥의 문을 완전히 여셨고 죽음을 버리시고 부활의 생명을 가져오신 것입니다. 고난 속에서도 참된 사랑 때문에 기쁨과 행복을 느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고난을 거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로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참된 부활의 생명 그 속에 우리가 살면 이 세상에 살아있는 동안에는 주님이 가신 고난의 길을 함께 걸어야 하는 것이 너무도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열심히 믿는다고 하지만 정말로 참된 생활을 하고 있는가 하는 것은 생각해봐야할 문제입니다. 빌립보서에 기록된 바울의 말을 똑바로 들어두시길 바랍니다. "나는 눈물을 흘리며 여러분에게 호소합니다. 여러분 제발 십자가의 원수로 살지 말아주십시요 나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함께 참여할 뿐만 아니라 그분의 죽으신 모양대로 죽기를 원하고 그래야 함으로써 죽은 자의 부활에 이르는 것입니다. "
이것이 바울의 우리를 향한 간곡한 호소입니다. 오늘 마태복음서에 나온 부자의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부자에게 "네 소유를 팔아서 가난하고 굶주린 자에게 모두 주고 나를 따르라 그러면 영생을 얻을 것이다"라고 하시자 그 젊은이가 근심하여 떠나갔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람을 보면서 이런 말씀을 합니다. "낙타가 바늘 귀로 지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 보다 쉬울 것이다. " 지금의 상태로는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들으면서 우리는 나자신의 얘기는 아닌가 혹은 내 교회나 내가 사는 이 사회는 아닌가하는 물음을 스스로에게 해봐야 될 것입니다.
도대체 부자란 무엇입니까 복음서에 예수님이 부자에 대해서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입니다. 문밖에서 굶주리고 있는 사람을 밖에다 두고 집안에서 자기만 음식을 먹고 있는 그 사람이 바로 부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매일 먹는 음식이 니코라스 베르자이에프의 말에 따르면 굶주린 사람들을 생각지 않고 혼자 음식을 먹을 때 그것은 바로 썩어질 물질이 되지만 내가 가지고 있는 음식을 굶주린 사람과 나눠 먹을 때 그 음식은 영적인 것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절대적으로 진리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의 우리는 실제로 광야에서 예수님과 함께 고난을 받기 위하여 우리 사회에서 무엇을 봐야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요즘 일본에 대해서 글을 썼던 베네딕트라는 사람의 말이 절실히 생각납니다. 그는 동양문화는 참으로 훌륭한 문화지만 부끄러움은 있어도 죄책감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후회는 해도 회개할 줄은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분의 지적이 바로 우리를 두고 말한 얘기 같습니다. 멀리 있는 것을 말하지 않더라도 몇 킬로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 굶어죽고 있는 우리 동포가 있습니다. 내가 들은 바에 의하면 이미 굶어죽어 있는 사람이 30%가 되고 굶어죽어가는 사람이 20%가 되고 있다고 합니다.
북한 주민의 과반수가 그렇게 죽어가고 있는 상태이고 이런 상황은 앞으로 계속될 것이라고 합니다. 이런 현실이 우리 앞에 있습니다. 또한 우리 남한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세계 열한번째 부자나라라고 우쭐대고 OECD에도 들고 WTO에도 들어서 세계중심의 국가에 들었다고 떠들어대더니 거짓의 보자기를 벗겨놓고 보니까 우리현실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러나 제가 가장 슬프게 생각하는 것은 죄책감이 없다는 것입니다. 회개를 안합니다. 누가 이렇게 만들었습니까 정치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만든 겁니다.
지금 국민들은 정신차려야 되겠다며 애들 돐반지까지 빼내고 박봉에 시달리는 노동자들은 물가는 올라가는데 임금은 15% 감해가며 이 고통을 극복해내려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만든 사람들이, 그런 정치를 한 사람들이 그리고 그런 정권과 결탁하여 큰 부호가 된 사람들이 회개를 하지 않은데 그 위기가 있습니다. 여기에서 노사정타협이라는 참 놀라울 정도로 큰 일을 해냈습니다만 정작 노동자들은 지켜나가고 있는데 재벌들이 지키지 않고 있습니다. 하루 만명씩 직장에서 쫓겨나간다하지만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영세기업까지 하다가 망한 사람도 아주 많습니다. 올해까지 실업자가 삼백만명이 넘는다고 하는데 그 많은 실업자들의 눈에 이 나라가 어떻게 보이겠습니까 노사정을 하는데 왜 우리만 이 고통을 겪고 있어야만 되는가 왜 재벌들은 같이 고통을 분담하지 않는가 왜 정치하는 사람들은 저렇게 반성도 하지 않는가 하는 것에 대한 불만이 분노로 바뀔 때 그것을 어떻게 할 것입니까 사오백만명의 사람들이 더 이상 이럴 수는 없다고 해서 일어설 때 어떻게 할 것입니까
북한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개도 나갈 구멍이 없으면 돌아서서 문다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지금 다 저렇게 죽어가는데 우리는 버리는 음식찌거기만 8조원이 나오는 이 나라가 결국에 고난을 함께 나누지 않으면 마지막에 취할 길이 무엇이겠습니까 모든 건 다 없어졌는데 그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것은 무기입니다. 그럼 그 무기를 가지고 어떻게 하리라 상상이 됩니까 그것은 우리 민족 전체가 심판을 받는 날이 될 것입니다.
정말 어려움과 고통을 나눠 살 줄 모르고 남들까지 다 굶주리고 해놓고 자기의 잘못은 하나도 뉘우치지 못하는 것이 이 나라에 어떤 비극을 가져올지 모르는 것이 이 나라의 현실입니다. 이번 사순절의 기간은 이웃의 사랑을 실천하는 교회의 생활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남은 사순절 기간을 어떻게 지킬 것인가 구체적으로 고민하시는 계기가 되시길 바랍니다. 그럴 때 진실로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내 몸으로 체험하고 그리스도의 고난의 뜻이 무엇인가를 내 삶속에서 깨닫게 되고 영원한 생명과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와 부활에 참여하게되는 은총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부활이란 바로 요단강에서 세례 받고, 광야에서 금식과 시험받고 수 많은 고난을 거쳐서 십자가에 죽은 바로 그 장소에서 일어난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부활이란 한 높은 산꼭대기라고 비유한다면 그 산꼭대기로 올라가는 험한 길과 같아서 그 길을 피해 가지고는 정상으로 갈 수 없는 것과도 같은 이유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사순절 동안은 특별히 광야의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모든 신도들이 고난을 함께 하는 공동체가 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성서는 "여호와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랑은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고통을 당하는 사람을 보고 외면하지 못하는 구체적인 사랑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구약본문을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넓은 우주 가운데 이집트에서 매맞고 배고프고 억압당하고 고생하는 그 사람들을 주목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모세를 불러서 "내가 저 백성들이 억압과 고통을 당하며 울부짖는 소리를 듣고 있을 수 없으니 네가 가서 그들을 해방시켜라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해방시키셨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와 여호수와의 인도를 받아 가나안 본토까지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돌아온 이후 그들의 국토는 둘로 나누어졌고, 앗시리아와 바빌론의 포로로 잡혀가는 연속된 고난의 악순환 속에서 고통받게 되었습니다. 이런 때에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모세와 같은 대리인을 시키시지 않고 여호와 하나님 당신이 직접 성육신 하셔서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그리스도 사건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예배하고 있지만 만일 이곳이 우리에게 예수와 함께 하는 고난의 광야가 아니라면 그리스도를 예배하는 장소는 아닌 것입니다.
저는 지금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해서 말하고 있지만 그것은 결국 사랑에 관한 것입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고난을 그냥 보고 지나지 못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오셔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다른 방법을 취하지 않고 인간이 받을 수 있는 모든 고난을 직접 받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스스로 광야로 나가셔서 그곳에서 금식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고난의 극치로서 십자가에 죽음을 당하시고 마침내는 무덤 속에 들어가셨던 것입니다.
우리 사도신경에 중요한 것이 빠져있습니다. 일본어나 영어에는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장사한지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 살아나시고"가 아니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무덤에 들어가시고 지옥으로 내려가셨다가 부활했다"라고 되어있습니다. 예수님은 지옥으로까지 내려간 것입니다. 이 말씀은 베드로전서에 있습니다. 지옥이란 고난의 극단적인 곳으로 직접 내려간 것입니다. 들어가서 거기서 다 받아버림으로 이 모든 것을 이기셨던 것입니다. 지옥의 문을 완전히 여셨고 죽음을 버리시고 부활의 생명을 가져오신 것입니다. 고난 속에서도 참된 사랑 때문에 기쁨과 행복을 느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고난을 거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로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참된 부활의 생명 그 속에 우리가 살면 이 세상에 살아있는 동안에는 주님이 가신 고난의 길을 함께 걸어야 하는 것이 너무도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열심히 믿는다고 하지만 정말로 참된 생활을 하고 있는가 하는 것은 생각해봐야할 문제입니다. 빌립보서에 기록된 바울의 말을 똑바로 들어두시길 바랍니다. "나는 눈물을 흘리며 여러분에게 호소합니다. 여러분 제발 십자가의 원수로 살지 말아주십시요 나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함께 참여할 뿐만 아니라 그분의 죽으신 모양대로 죽기를 원하고 그래야 함으로써 죽은 자의 부활에 이르는 것입니다. "
이것이 바울의 우리를 향한 간곡한 호소입니다. 오늘 마태복음서에 나온 부자의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부자에게 "네 소유를 팔아서 가난하고 굶주린 자에게 모두 주고 나를 따르라 그러면 영생을 얻을 것이다"라고 하시자 그 젊은이가 근심하여 떠나갔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람을 보면서 이런 말씀을 합니다. "낙타가 바늘 귀로 지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 보다 쉬울 것이다. " 지금의 상태로는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들으면서 우리는 나자신의 얘기는 아닌가 혹은 내 교회나 내가 사는 이 사회는 아닌가하는 물음을 스스로에게 해봐야 될 것입니다.
도대체 부자란 무엇입니까 복음서에 예수님이 부자에 대해서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입니다. 문밖에서 굶주리고 있는 사람을 밖에다 두고 집안에서 자기만 음식을 먹고 있는 그 사람이 바로 부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매일 먹는 음식이 니코라스 베르자이에프의 말에 따르면 굶주린 사람들을 생각지 않고 혼자 음식을 먹을 때 그것은 바로 썩어질 물질이 되지만 내가 가지고 있는 음식을 굶주린 사람과 나눠 먹을 때 그 음식은 영적인 것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절대적으로 진리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의 우리는 실제로 광야에서 예수님과 함께 고난을 받기 위하여 우리 사회에서 무엇을 봐야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요즘 일본에 대해서 글을 썼던 베네딕트라는 사람의 말이 절실히 생각납니다. 그는 동양문화는 참으로 훌륭한 문화지만 부끄러움은 있어도 죄책감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후회는 해도 회개할 줄은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분의 지적이 바로 우리를 두고 말한 얘기 같습니다. 멀리 있는 것을 말하지 않더라도 몇 킬로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 굶어죽고 있는 우리 동포가 있습니다. 내가 들은 바에 의하면 이미 굶어죽어 있는 사람이 30%가 되고 굶어죽어가는 사람이 20%가 되고 있다고 합니다.
북한 주민의 과반수가 그렇게 죽어가고 있는 상태이고 이런 상황은 앞으로 계속될 것이라고 합니다. 이런 현실이 우리 앞에 있습니다. 또한 우리 남한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세계 열한번째 부자나라라고 우쭐대고 OECD에도 들고 WTO에도 들어서 세계중심의 국가에 들었다고 떠들어대더니 거짓의 보자기를 벗겨놓고 보니까 우리현실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러나 제가 가장 슬프게 생각하는 것은 죄책감이 없다는 것입니다. 회개를 안합니다. 누가 이렇게 만들었습니까 정치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만든 겁니다.
지금 국민들은 정신차려야 되겠다며 애들 돐반지까지 빼내고 박봉에 시달리는 노동자들은 물가는 올라가는데 임금은 15% 감해가며 이 고통을 극복해내려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만든 사람들이, 그런 정치를 한 사람들이 그리고 그런 정권과 결탁하여 큰 부호가 된 사람들이 회개를 하지 않은데 그 위기가 있습니다. 여기에서 노사정타협이라는 참 놀라울 정도로 큰 일을 해냈습니다만 정작 노동자들은 지켜나가고 있는데 재벌들이 지키지 않고 있습니다. 하루 만명씩 직장에서 쫓겨나간다하지만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영세기업까지 하다가 망한 사람도 아주 많습니다. 올해까지 실업자가 삼백만명이 넘는다고 하는데 그 많은 실업자들의 눈에 이 나라가 어떻게 보이겠습니까 노사정을 하는데 왜 우리만 이 고통을 겪고 있어야만 되는가 왜 재벌들은 같이 고통을 분담하지 않는가 왜 정치하는 사람들은 저렇게 반성도 하지 않는가 하는 것에 대한 불만이 분노로 바뀔 때 그것을 어떻게 할 것입니까 사오백만명의 사람들이 더 이상 이럴 수는 없다고 해서 일어설 때 어떻게 할 것입니까
북한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개도 나갈 구멍이 없으면 돌아서서 문다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지금 다 저렇게 죽어가는데 우리는 버리는 음식찌거기만 8조원이 나오는 이 나라가 결국에 고난을 함께 나누지 않으면 마지막에 취할 길이 무엇이겠습니까 모든 건 다 없어졌는데 그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것은 무기입니다. 그럼 그 무기를 가지고 어떻게 하리라 상상이 됩니까 그것은 우리 민족 전체가 심판을 받는 날이 될 것입니다.
정말 어려움과 고통을 나눠 살 줄 모르고 남들까지 다 굶주리고 해놓고 자기의 잘못은 하나도 뉘우치지 못하는 것이 이 나라에 어떤 비극을 가져올지 모르는 것이 이 나라의 현실입니다. 이번 사순절의 기간은 이웃의 사랑을 실천하는 교회의 생활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남은 사순절 기간을 어떻게 지킬 것인가 구체적으로 고민하시는 계기가 되시길 바랍니다. 그럴 때 진실로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내 몸으로 체험하고 그리스도의 고난의 뜻이 무엇인가를 내 삶속에서 깨닫게 되고 영원한 생명과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와 부활에 참여하게되는 은총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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