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절] 애매히 당하는 고난
본문
우리 주님의 고난 당하심을 묵상하며 그 뜻을 새기는 사순절 기간 중 20일이 지나고 있습니다. 이제 후반 20일 기간 동안에 우리 교회는 제 15차 새벽 기도학교를 열게 됩니다.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의 날들과 그 아픔을 생각하면서 20일간 일찍 깨어 새벽에 나와 온 교회가 기도한다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기도를 반드시 들어주실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고난당하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특별히 오늘날처럼 경제 변동이 심한 때에는 열심히 일하던 직장에서 하루 아침에 거리로 밀려 나가야 하는 가장들의 고통을 생각하게 됩니다. 20년을 한결같이 집과 직장을 오가는 것 밖에 모르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출근할 수 없게 되자 몇 날이고 부근을 배회하다가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서성이는 한 남자는 말하기를 "생계도 걱정이지만 그것보다 더 큰 고통은 뿌리뽑힌 내 인생의 초라한 모습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또 있습니다. 나날이 악화되어 가는 폐광지역의 경기를 살리기 위해 문을 연 강원도 정 선군 카지노 타운이 개장 5개월이 넘어가면서 연일 도박꾼들이 몰려와 호경기를 맞는 반면에 토착민들에게는 생존권을 위협하는 위험한 도박장이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카지노 영업의 특수로 외지인 들이 몰려오면서 땅값이 3배 이상 폭등하고 전세값도 덩달아 올라서 영세상인들과 탄광인부들은 삶의 터전을 잃고 그곳을 떠나고 있습니다. 이 곳 고한 성당의 이우갑 신부는 이렇게 말합니다.
"카지노가 남긴 메시지는 돈 없고 가난한 주님은 이 곳을 떠나라는 단 한마디"라고 합니다.
세상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이처럼 애매히 고난을 당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끊이지 않고 이어져 왔습니다. 인류의 문명이 발달하면 세상이 밝아져서 억울하게 고난당하는 사람들이 사라지리라고 하는 기대는 물거품이 되고, 오히려 더 늘어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갈릴리 지역에는 부자들이 고리 대금에 의하여 땅을 읽어 버린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예수님이 가시는 곳마다 사람들이 몰려왔는데, 이는 삶의 터전을 잃고 헤 매이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뜻도 됩니다. 예수께서는 이들을 보시고 목자없는 양떼들을 보는 것 같아서 심히 민망히 여기셨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뿌리뽑힌 무리들의 고통을 몸소 자신의 고통으로 느끼셨던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애매하게 고난당하는 사람들에게 위로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여호와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 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셨느니라"(벧전 2:19-21).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그 슬픔을 참으라고 하십니다. 참을 수 없는 것을
참으라는 뜻입니다. 불가능한 요청입니다. 억울하게 당하는 고난을 참으라는 말은 생각하기에 따라서 불의를 용납하고, 불의에 순응하라는 말로 들립니다. 그래서 유명한 프레데리히 니체는 이러한 기독교를 '노예의지'라고 맹열 하게 비난했습니다.
지금 세상의 흐름은 한결같이 '참지 말라'고 하는 방향으로 갑니다. 그래서 세상은 지금 참지 못하는 사람들의 아우성소리로 가득 찼습니다. 참지 말고 싸워라. 싸워서 이겨야 살아 남는다. 이것이 생존경쟁의 정당한 논리입니다. 그러나 모두가 다 나서서 싸우면 어떻게 됩니까 싸움이 시작되면
반드시 이겨야 합니다.
싸움에는 적이 있게 마련인데, 내가 이기면 내가 살고, 내가 지면 나는 죽는다는 것이 싸움의 기본 원리입니다. 그래서 이겨야 하니까 이기기 위해서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게 됩니다.
싸우는 동안에는 모두 상대방에게 치명적인 손실을 주어야 하기 때문에, 선한자와 악한자의 구별이 모호해 집니다.
전쟁과 싸움에는 언제나 도덕성이 사라집니다.
과거에는 '의로운 전쟁'이라는 개념이 있었으나 이제는 '의로운 전쟁'이란 없습니다. 전쟁을 하면 피차간에 너무나 많은 사람이 죽고 엄청난 손실을 가져옵니다. 싸우다 보면 분노가 확대되고, 분노가 폭발하면 물불을 가리지 않게 되어 상대와 자기 자신을 함께 파멸시키게 됩니다.
과연 인간이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참을 수 있습니까 베드로 사도는 본문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참을 수 있다고 하십니다. 그것은 매우 아름다운 일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죄를 짓고 악을 행하다가 고난과 징벌을
받게 되는 것은 조금도 아름답지 않다 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아름답다는 말을 무슨 뜻입니까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도 세상에 죄악이 관 영한 것을 괴로워하고 계신다는 것을 생각한다는 말입니다. 노아시대에 여호와 하나님은 세상에 죄가 가득한 것을 보시고 매우 슬퍼하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 보시기에 노아 외에는 모두가 악을 행하고 죄를 물먹듯이 먹었습니다.
죄악 세상에 사는 노아는 매우 고통스러웠으나 여호와 하나님을 생각하고 참았습니다. 억울해도 참고, 애매히 고난 당하고 조롱을 당해도 참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생각한다 함은 여호와 하나님의 고통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우리 같이 벌써 멸망시킬 자들도 참고 인내하십니다.
하루가 천년같이 천년이 하루 같이 참고 기다리십니다. 이는 한 사람이라도 더 주께 돌아오시기를 기다리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참고 기다리시는 것은 바로 고통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참는 것을 소극적 태도라고 비난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도 참으시는데 우리가 왜 참지 못하겠습니까
오히려 여호와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는 것이 더욱 적극적인 태도입니다. 왜냐하면 악한자가 노리는 것은 선한자가 분노하여 참지 못하고 악한 싸움에 말려드는 것이 그들의 원하는 바이기 때문입니다. 나만 생각해서는 도저히 참을 수 없으나 여호와 하나님을 생각하여 참을 수 있습니다.
교회를 생각하여 참을 수 있습니다. 진리를 위하여, 참된 가치를 위하여 참을 수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참을 뿐 아니라 오히려 선을 행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오른편 뺨을 때리거든 왼편까지 돌려 대라는 주님의 교훈입니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라고 하신 말씀도 거기에 연관됩니다. 예수님은 고난을 당하시되 애매히 당하시었습니다.
본문 22-23절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저는 죄를 범 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 사도 없으시며,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 예수님의 고난이야 말로 죄없이 당하신 고난입니다. 억울하게 당하신 고난, 애매히 당하신 고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없으신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분은 죄를 지으시기는커녕 그분의 삶은 오직 인생들을 사랑하신 것 뿐입니다. 병자를 고치시고 가난한자를 먹이셨습니다. 귀신을 쫓아내어 정신을 바르게 하였습니다. 그분의 하신 일이 선이 아닌 것이 없건만, 그는 강도가 받는 십자가 형을 선고 받으시고, 매 맞고, 침 뱉음을 당하고, 조롱을 당하시었습니다.
이것이 우리 주님께서 보여 주신 본이라고 본문 21절에서 말씀합니다.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 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셨느니라" 애매히 억울하게 고난을 당해도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참으심으로 본을 보이시고,
우리에게도 그렇게 따라오도록 하셨다는 것입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애매히 당한 고난은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우리 인간들이 표면상으로는 억울하고 애매하여도, 내면으로 보면 죄없는 이가 어디에
있습니까 인간은 모두 세상의 모든 불의와 죄악의 공범자들입니다.
우리 속에 추악한 생각이 있어서, 세상에 추악한 성범죄가 넘쳐 나는 것입니다. 우리 속에 아직도 탐욕이 있어서, 세상에 사기 횡령강도가 판을 치는 것입니다. 우리 속에 아직도 원한과 분노가 있어서 세상에 조직 폭력배와 칼부림과 보복이 악순환되는 것입니다.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을 던지라"고 하셨더니 모두가 돌을 던져 버리고 가 버렸습니다.
이는 죄없는 자 없다는 뜻입니다. 부자만 죄가 있는 것이 아니고, 가난한 자도 죄가 있습니다. 기성세대만 탐욕으로 죄에 빠진 것이 아니고, 청소년들도 죄에 물들어 있습니다. 어느계층, 어느 연령층을 막론하고 애매하다고, 억울하다고 할 수 있는 자가 없습니다. 모두가 다 죄인입니다. 형벌받다 마땅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본문은 24-25절에서 말씀합니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 었 나니,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예수님시대의 한의사가 십자가에 못 박힌다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지 다음과 같이 서술했습니다.
"땅 위에 놓인 십자가 위에 지친 죄인이 눕혀집니다. 군병은 손목 안쪽의 오목한 곳을 찾아서 연철로 만든 무거운 못으로 손목을 뚫고 목판에 깊숙이 못을 박습니다. 반대편에도 그렇게 합니다...........
십자가는 제 위치에 세워집니다. 왼발은 오른 발 위에 올려지고 양 발이 늘어진 상태에서 오목한 부위에 한 개의 쇠못이 양 발을 관통합니다.......... 죄인의 손목에 박힌 못의 무게가 늘어지면서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 손가락으로 타오르고, 뇌를 터질 지경으로 만듭니다. 죄인은 몸을 비틀고 타는 듯한 고통을 뼈 사이에서 느낍니다.
공기는 폐로 주입되지만 내쉴 수는 없습니다. 죄인은 약간의 공기를
마시려고 사력을 다합니다. 참기 어려운 고통으로 일시적인 질식 상태가 반복됩니다".
계속되는 그 의사의 글을 더 이상 계속 옮길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주님이 당하신 십자가의 고난입니다. 우리가 무슨 고난을 당한다고 해서 감히 주님의 고난에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이 당하신 고난은 바로 내가 지은 죄를 대신 하신 것입니다. "친히 우리의 죄를 담당하셨으니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하 신대로입니다. 우리가 지금 이 악한 시대에서 이 만큼이라도 얼굴을 들고 다니는 것은 주께서 우리 죄를 대신 담당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이상 세상에서 애매히 고난 당한다는 말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마땅히 형벌 받아야 할 죄인들이며 공범들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죄없으신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로서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신 일을 생각하면, 그로 인하여 우리가 용서받고 치유를 받았다면, 우리가 잠시 받는 고난을 가지고 왈가왈부하면서 참지 못할 일이 어디에 있습니까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입었나니" 그렇습니다. 주님의 고난은 우리를 대 속하신 속 량의 제물입니다. 우리가 당하는 고난은 직접적으로 우리의 죄값이 아니라 하여도 아무의 죄도 대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리스도인들이 죄없이 애매하게 고난을 받고도 그 슬픔을 참고 살아가면, 세상에 그것은 빛이 되고, 소금이 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의 희생과 눈물과 인내를 보시고 이 땅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친히 이 땅을 고쳐 주실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세상에는 애매한 고난이 많습니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완전히 억울한 고난은 인생에게 없습니다. 모두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만이 애매히 고난당하신 분입니다.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습니다. 이 사실을 확실히 하고 나서 우리가 받는 고난을 참으면 여호와 하나님이 "아름답다"고 인정하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인정하시면 반드시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와 치유의 역사가 이 땅에 함께 하실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에는 고난당하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특별히 오늘날처럼 경제 변동이 심한 때에는 열심히 일하던 직장에서 하루 아침에 거리로 밀려 나가야 하는 가장들의 고통을 생각하게 됩니다. 20년을 한결같이 집과 직장을 오가는 것 밖에 모르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출근할 수 없게 되자 몇 날이고 부근을 배회하다가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서성이는 한 남자는 말하기를 "생계도 걱정이지만 그것보다 더 큰 고통은 뿌리뽑힌 내 인생의 초라한 모습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또 있습니다. 나날이 악화되어 가는 폐광지역의 경기를 살리기 위해 문을 연 강원도 정 선군 카지노 타운이 개장 5개월이 넘어가면서 연일 도박꾼들이 몰려와 호경기를 맞는 반면에 토착민들에게는 생존권을 위협하는 위험한 도박장이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카지노 영업의 특수로 외지인 들이 몰려오면서 땅값이 3배 이상 폭등하고 전세값도 덩달아 올라서 영세상인들과 탄광인부들은 삶의 터전을 잃고 그곳을 떠나고 있습니다. 이 곳 고한 성당의 이우갑 신부는 이렇게 말합니다.
"카지노가 남긴 메시지는 돈 없고 가난한 주님은 이 곳을 떠나라는 단 한마디"라고 합니다.
세상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이처럼 애매히 고난을 당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끊이지 않고 이어져 왔습니다. 인류의 문명이 발달하면 세상이 밝아져서 억울하게 고난당하는 사람들이 사라지리라고 하는 기대는 물거품이 되고, 오히려 더 늘어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갈릴리 지역에는 부자들이 고리 대금에 의하여 땅을 읽어 버린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예수님이 가시는 곳마다 사람들이 몰려왔는데, 이는 삶의 터전을 잃고 헤 매이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뜻도 됩니다. 예수께서는 이들을 보시고 목자없는 양떼들을 보는 것 같아서 심히 민망히 여기셨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뿌리뽑힌 무리들의 고통을 몸소 자신의 고통으로 느끼셨던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애매하게 고난당하는 사람들에게 위로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여호와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 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셨느니라"(벧전 2:19-21).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그 슬픔을 참으라고 하십니다. 참을 수 없는 것을
참으라는 뜻입니다. 불가능한 요청입니다. 억울하게 당하는 고난을 참으라는 말은 생각하기에 따라서 불의를 용납하고, 불의에 순응하라는 말로 들립니다. 그래서 유명한 프레데리히 니체는 이러한 기독교를 '노예의지'라고 맹열 하게 비난했습니다.
지금 세상의 흐름은 한결같이 '참지 말라'고 하는 방향으로 갑니다. 그래서 세상은 지금 참지 못하는 사람들의 아우성소리로 가득 찼습니다. 참지 말고 싸워라. 싸워서 이겨야 살아 남는다. 이것이 생존경쟁의 정당한 논리입니다. 그러나 모두가 다 나서서 싸우면 어떻게 됩니까 싸움이 시작되면
반드시 이겨야 합니다.
싸움에는 적이 있게 마련인데, 내가 이기면 내가 살고, 내가 지면 나는 죽는다는 것이 싸움의 기본 원리입니다. 그래서 이겨야 하니까 이기기 위해서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게 됩니다.
싸우는 동안에는 모두 상대방에게 치명적인 손실을 주어야 하기 때문에, 선한자와 악한자의 구별이 모호해 집니다.
전쟁과 싸움에는 언제나 도덕성이 사라집니다.
과거에는 '의로운 전쟁'이라는 개념이 있었으나 이제는 '의로운 전쟁'이란 없습니다. 전쟁을 하면 피차간에 너무나 많은 사람이 죽고 엄청난 손실을 가져옵니다. 싸우다 보면 분노가 확대되고, 분노가 폭발하면 물불을 가리지 않게 되어 상대와 자기 자신을 함께 파멸시키게 됩니다.
과연 인간이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참을 수 있습니까 베드로 사도는 본문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참을 수 있다고 하십니다. 그것은 매우 아름다운 일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죄를 짓고 악을 행하다가 고난과 징벌을
받게 되는 것은 조금도 아름답지 않다 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아름답다는 말을 무슨 뜻입니까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도 세상에 죄악이 관 영한 것을 괴로워하고 계신다는 것을 생각한다는 말입니다. 노아시대에 여호와 하나님은 세상에 죄가 가득한 것을 보시고 매우 슬퍼하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 보시기에 노아 외에는 모두가 악을 행하고 죄를 물먹듯이 먹었습니다.
죄악 세상에 사는 노아는 매우 고통스러웠으나 여호와 하나님을 생각하고 참았습니다. 억울해도 참고, 애매히 고난 당하고 조롱을 당해도 참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생각한다 함은 여호와 하나님의 고통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우리 같이 벌써 멸망시킬 자들도 참고 인내하십니다.
하루가 천년같이 천년이 하루 같이 참고 기다리십니다. 이는 한 사람이라도 더 주께 돌아오시기를 기다리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참고 기다리시는 것은 바로 고통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참는 것을 소극적 태도라고 비난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도 참으시는데 우리가 왜 참지 못하겠습니까
오히려 여호와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는 것이 더욱 적극적인 태도입니다. 왜냐하면 악한자가 노리는 것은 선한자가 분노하여 참지 못하고 악한 싸움에 말려드는 것이 그들의 원하는 바이기 때문입니다. 나만 생각해서는 도저히 참을 수 없으나 여호와 하나님을 생각하여 참을 수 있습니다.
교회를 생각하여 참을 수 있습니다. 진리를 위하여, 참된 가치를 위하여 참을 수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참을 뿐 아니라 오히려 선을 행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오른편 뺨을 때리거든 왼편까지 돌려 대라는 주님의 교훈입니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라고 하신 말씀도 거기에 연관됩니다. 예수님은 고난을 당하시되 애매히 당하시었습니다.
본문 22-23절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저는 죄를 범 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 사도 없으시며,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 예수님의 고난이야 말로 죄없이 당하신 고난입니다. 억울하게 당하신 고난, 애매히 당하신 고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없으신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분은 죄를 지으시기는커녕 그분의 삶은 오직 인생들을 사랑하신 것 뿐입니다. 병자를 고치시고 가난한자를 먹이셨습니다. 귀신을 쫓아내어 정신을 바르게 하였습니다. 그분의 하신 일이 선이 아닌 것이 없건만, 그는 강도가 받는 십자가 형을 선고 받으시고, 매 맞고, 침 뱉음을 당하고, 조롱을 당하시었습니다.
이것이 우리 주님께서 보여 주신 본이라고 본문 21절에서 말씀합니다.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 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셨느니라" 애매히 억울하게 고난을 당해도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참으심으로 본을 보이시고,
우리에게도 그렇게 따라오도록 하셨다는 것입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애매히 당한 고난은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우리 인간들이 표면상으로는 억울하고 애매하여도, 내면으로 보면 죄없는 이가 어디에
있습니까 인간은 모두 세상의 모든 불의와 죄악의 공범자들입니다.
우리 속에 추악한 생각이 있어서, 세상에 추악한 성범죄가 넘쳐 나는 것입니다. 우리 속에 아직도 탐욕이 있어서, 세상에 사기 횡령강도가 판을 치는 것입니다. 우리 속에 아직도 원한과 분노가 있어서 세상에 조직 폭력배와 칼부림과 보복이 악순환되는 것입니다.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을 던지라"고 하셨더니 모두가 돌을 던져 버리고 가 버렸습니다.
이는 죄없는 자 없다는 뜻입니다. 부자만 죄가 있는 것이 아니고, 가난한 자도 죄가 있습니다. 기성세대만 탐욕으로 죄에 빠진 것이 아니고, 청소년들도 죄에 물들어 있습니다. 어느계층, 어느 연령층을 막론하고 애매하다고, 억울하다고 할 수 있는 자가 없습니다. 모두가 다 죄인입니다. 형벌받다 마땅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본문은 24-25절에서 말씀합니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 었 나니,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예수님시대의 한의사가 십자가에 못 박힌다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지 다음과 같이 서술했습니다.
"땅 위에 놓인 십자가 위에 지친 죄인이 눕혀집니다. 군병은 손목 안쪽의 오목한 곳을 찾아서 연철로 만든 무거운 못으로 손목을 뚫고 목판에 깊숙이 못을 박습니다. 반대편에도 그렇게 합니다...........
십자가는 제 위치에 세워집니다. 왼발은 오른 발 위에 올려지고 양 발이 늘어진 상태에서 오목한 부위에 한 개의 쇠못이 양 발을 관통합니다.......... 죄인의 손목에 박힌 못의 무게가 늘어지면서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 손가락으로 타오르고, 뇌를 터질 지경으로 만듭니다. 죄인은 몸을 비틀고 타는 듯한 고통을 뼈 사이에서 느낍니다.
공기는 폐로 주입되지만 내쉴 수는 없습니다. 죄인은 약간의 공기를
마시려고 사력을 다합니다. 참기 어려운 고통으로 일시적인 질식 상태가 반복됩니다".
계속되는 그 의사의 글을 더 이상 계속 옮길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주님이 당하신 십자가의 고난입니다. 우리가 무슨 고난을 당한다고 해서 감히 주님의 고난에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이 당하신 고난은 바로 내가 지은 죄를 대신 하신 것입니다. "친히 우리의 죄를 담당하셨으니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하 신대로입니다. 우리가 지금 이 악한 시대에서 이 만큼이라도 얼굴을 들고 다니는 것은 주께서 우리 죄를 대신 담당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이상 세상에서 애매히 고난 당한다는 말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마땅히 형벌 받아야 할 죄인들이며 공범들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죄없으신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로서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신 일을 생각하면, 그로 인하여 우리가 용서받고 치유를 받았다면, 우리가 잠시 받는 고난을 가지고 왈가왈부하면서 참지 못할 일이 어디에 있습니까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입었나니" 그렇습니다. 주님의 고난은 우리를 대 속하신 속 량의 제물입니다. 우리가 당하는 고난은 직접적으로 우리의 죄값이 아니라 하여도 아무의 죄도 대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리스도인들이 죄없이 애매하게 고난을 받고도 그 슬픔을 참고 살아가면, 세상에 그것은 빛이 되고, 소금이 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의 희생과 눈물과 인내를 보시고 이 땅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친히 이 땅을 고쳐 주실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세상에는 애매한 고난이 많습니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완전히 억울한 고난은 인생에게 없습니다. 모두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만이 애매히 고난당하신 분입니다.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습니다. 이 사실을 확실히 하고 나서 우리가 받는 고난을 참으면 여호와 하나님이 "아름답다"고 인정하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인정하시면 반드시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와 치유의 역사가 이 땅에 함께 하실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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