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절] 사순절의 기쁨
본문
오늘은 보통 사람들이 이해하기 힘든.. 아니 이해할 수 없는
그러한 기쁨에 대하여 말씀을 드리려 합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기쁨"하면
"출생의 기쁨" "승진의 기쁨" "합격의 기쁨"이라든지 아니면
"성탄의 기쁨" "부활의 기쁨" 이렇게 해야…. 맞는 표현이라 생각하면서
"사순절의 기쁨이라는 말은 좀 맞지 않는 것 같다.. " 이렇게 생각하는 분들이 더러 계실 줄 압니다.
그러나 제가 오늘 전하고자 하는 중심은 사순절의 핵심이란.. 오늘 말씀처럼...
고난과 죽음을 넘어선 기쁨이.. 사순절(旬節, Lent)의 핵심(核心)이라는 것인데...
이것이 오늘 사순절 첫 번째 주일에 드리고자 하는 요지(要旨)입니다.
이 세상에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기쁨이 있습니다.
울면서 기뻐한다든지.... 맞으면서 기뻐한다든지...
굶으면서 기뻐한다든지.. 죽어가면서 기뻐한다든지...
이런 것들은 참으로 우리가 이해하기 힘든 기쁨들인데..
바로 이와 같은 선상(線上)에.. 사순절의 기쁨이 있다는 것입니다.
청소년들이 자라면서 한번쯤 읽어보는 감동적인 이야기 가운데
쉘 실버스타인(Shell Silverstein)이 지은 아낌없이 주는 나무(Giving Tree, 1964)란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이야기를 설교 서두(序頭)에 잠시 소개하려고 합니다.
옛날에 한 그루의 나무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나무에게는 사랑하는 한 소년이 있었습니다.
그 소년은 매일같이 나무에게로 가서 떨어지는 나뭇잎을 한 잎 두 잎 주워 모았습니다.
그러고는 나뭇잎으로 왕관을 만들어 쓰고는 숲 속의 왕자처럼 흐뭇해 했습니다.
때로는 그 나무의 줄기를 타고 올라가서
나뭇가지에 매달려 그네를 타고 열매도 따먹곤 했습니다.
나무와 소년은 나름대로 숨바꼭질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피곤해지면 나무 그늘 아래에서 낮잠을 자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소년은 그 나무를 무척 사랑했고
나무는 나무대로 소년의 사랑을 받아서인지 무척이나 행복해했습니다.
그러면서 세월은 흘렀습니다.
세월은 흘러 소년은.. 점점 나이가 들기 시작했습니다. 소년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다보니 나무는 홀로 있을 때가 점점 많아졌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소년이 모처럼 나무를 찾아갔을 때 나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얘야, 내 줄기를 타고 기어올라와서 가지에 매달려 놀아...
그네도 타고.. 열매도 따먹고.. 그늘에서 놀며 그렇게 즐겁게 지내... "
"나는 이제 나무에 올라가 놀기에는 많이 커 버렸어.
이젠 어렸을 때완 좀 다르게 물건을 사면서 놀고 싶어.
그래서 돈이 좀 필요한데.. 나무야 나에게 돈 좀 줄 수 없겠니"
"미안하지만, 내겐 돈이 없는걸... 하지만 내겐 나뭇잎과 사과는 있어....
얘야, 내 사과를 따다가 도시에 갖다 팔지 그래
그러면 돈이 생길 게고, 그러면 행복해지지 않겠니.... "
이 말을 들은 소년은... 나무 위로 올라갔습니다.
그리고는 사과를 한 움큼 따 가지고는 가 버렸습니다.
이렇게 모처럼 놀러 왔다가 같이 놀아주지 않고는 사과만 따 가지고 가도
나무는 행복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사과를 따 가지고 간 소년은 오랜 세월이 지나도 돌아오질 않았습니다.
그래서 나무는 한동안 슬펐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소년이 나무에게로 다시 돌아온 것입니다.
그때 나무는 기쁨이 넘쳐 몸을 흔들면서 소년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얘야, 내 줄기를 타고 기어올라와서 가지에 매달려...
그네도 타고 즐겁게 놀아... "
"난 이제, 나무에 올라 그네 타고 놀 만큼 한가하질 않아.
앞으론 결혼도 해야하고, 아기도 가져야 하는데...
그래서 난 집을 먼저 준비해야 되.
나무야, 나에게 집을 좀 줄 수 없겠니"
"난 집을 가지고 있지 않는 걸...
아, 그렇다! 넌 내 가지들을 잘라서 집을 지으면 되겠구나!"
그래서 소년은 그 나무의 가지들을 베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곤 자른 가지들을 집을 지으려고 가지고 갔습니다.
나무는 가지가 다 잘렸지만... 그래도 행복했습니다.
그리고 또 세월이 한참 흘렀습니다.
어느 날 소년이 다시 나무에게 돌아왔을 때
나무는 거의 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 너무 기뻐했습니다.
"얘야, 오랜만이다! 어서 와! 나랑 같이 놀자!"
"나는 놀기에는 너무 지쳤어! 이제 나에겐 배가 필요한데...
나에게 배를 좀 줄 수 없겠니"
"그래 그럼 내 줄기를 잘라서 배를 만들어 보렴.
그러면 너는 그 배를 타고 멀리 갈 수 있을거야. "
그래서 소년은 그 나무의 마지막 남은 몸통을 싹둑 잘랐습니다.
그리고는 배를 만들어 타고 멀리 멀리 떠났습니다.
그러나.. 그래도 나무는 행복했습니다.
그리고 오랜 세월이 지난 뒤.. 소년은 이제 할아버지가 되어
다시 나무에게로 돌아왔습니다.
"얘야, 미안하다. 이제는 너에게 줄 것이 아무 것도 없구나..... 사과도 없고.... "
"이빨이 나빠서 이젠 사과도 먹을 수 없어. " 할아버지가 된 소년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게는 이제 가지도 없으니... 네가 그네를 탈 수도 없고... 어쩌지"
"나뭇가지에 매달려 그네를 타기에는 난 이제.. 너무 늙었어... "
"내게는 줄기마저 없으니... 네가 기어오를 수도 없고... "
"나는 이제 기운도 없어서... 줄기에 기어오를 수도 없어... "
그 때 나무가 한숨쉬며 소년에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미안해! 뭘 너에게 주었으면 좋겠는데...
하지만 내게 남은 것이라곤 이제 아무 것도 없고..
남은 것이란 늙어 버린 나무 밑둥 뿐이라서.. 미안해... "
"그래 괜챦아. 난 이제 아무 것도 필요 없어..
그저 조용히 앉아서 쉴 곳이나 있었으면 좋겠어. 몹시 피곤하거든.... "
"그래 그렇다면.. 자, 앉아 쉬기에는 늙은 나무 밑둥이 그만이지...
이리로 와서 앉아 쉬어.... "
할아버지가 된 소년은 시키는 대로 이제 마지막 남은 나무 밑둥에 걸터 앉았습니다.
그래도 나무는 행복했습니다.
이상(以上)이 아낌없이 주는 나무(Giving Tree, 1964)란 이야기입니다.
어떻습니까 잘 이해가 되십니까
아낌없이 주는 나무... 이파리도 주고.. 열매도 주고.. 가지도 주고.. 줄기도 주고..
이제 마지막 남은 밑둥까지 다 주면서도 행복해 하며 기뻐하는 나무!!...
우리가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이 자기를 아낌없이 주면서도 행복해 하고.. 기뻐하는 분이 누구냐
십자가에 달리신 우리 주님이시며!!
그렇게 자르고 주기 위해.. 자진해서 고난 속에 들어가는 때가.. 사순절이라는 것입니다!!
만인(萬人)의 형제라고 하는 아씨시의 프란치스코(Francesco D'Assisi)는 어느 날
사람에게 있어서 완전한 기쁨이란 무엇이며 어디서 얻을 수 있는가에 대하여
레오(Reo)라는 형제(兄弟)와 진지하게 대화를 나눕니다.
"레오 형제, 어떤 형제가 학식이 있어.. 모르는 것이 없고..
학문과 성경에 능통하고 마음 속의 비밀을 들추어 내는 사람이라고 합시다.
그러나 그래도 그에게 완전한 기쁨은 없는 거지요... "
레오 형제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프란치스코를 바라봅니다. 그때 다시 이렇게 말합니다.
"레오 형제, 어떤 형제가 설교를 너무나 잘 하여 많은 사람들을 회심(悔心)시키고
또 악마도 좇아내며, 심지어 죽은지 나흘이나 된 사람도 살려낸다고 합시다.
그래도 거기에 완전한 기쁨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때 레오 형제는 묻습니다.
"아니 선생님, 그렇다면 완전한 기쁨이란 도대체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우리가 신발이 진흙과 먼지로 더럽혀 진 채로... 성전(聖殿)에 도착해서
성전 문을 두드렸다고 합시다.
그런데 성전 문지기는 우리의 겉모습만 보고는 우리가 부랑자(浮浪者)인줄 알고
성전 안으로 들여보지 않고 좇아 내어 눈과 추위에 버려뒀다고 합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화를 내지 않고.. 그 굴욕을 잘 받아들이고
문지기가 옳은 말을 했다고 수긍하게 된다면... 레오 형제여...
바로 거기에 완전한 기쁨이 있는 법이지요.
그리고 만일 우리가 추위를 이기지 못하여 계속 문을 두드리면서
문지기가 나와서 문 열어주기를 기다리는데
사람이 나오기는 나왔지만 몽둥이를 들고 나와
우리 옷을 붙잡고는 눈 속에다 우리를 쳐박았다고 합시다.
그래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受難)을 생각하며 그 곤욕을 잘 참고 견딘다거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잘 참고 받아들인다면..
레오 형제여.. 바로 거기에 완전한 기쁨이 있는 법이지요"
(Francesco D'Assisiby Cirillo Tescaroli / 성 바오로출판사에서 번역본 출판)
사순절의 상징은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 그리고 가시 면류관입니다.
좀더 분명하게 말하면 수난(受難)과 고통(苦痛)을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가
사순절의 상징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부분은 사순절을 어둡게 생각하고 우울하게 생각하지만
사실 사순절의 본질이나 그 핵심은 어두운 것도 아니고 우울한 것도 아니라!!
밝은 것이며.. 기쁨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속에 참된 희망이 있고 참된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도 바로 이와같은 맥락에서 본다면 이해가 어느 정도 되리라 생각합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함이니라"(요한복음 15:11)
지금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으로 입성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십자가 지시려고... 그래서 십자가 위에서 자신의 몸을 제물로 드리려고
자진해서 착착.. 그리고 침착하게 준비하고 있는 가운데 있습니다.
그러면서 주신 말씀들이 이것입니다.
"나의 하는 것을 네가 이제는 알지 못하나 이 후에는 알리라"(요한복음 13:7)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하여 본을 보였노라"(요한복음 13:14-15)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요한복음 13:21)
"내가 한 조각을 찍어다가 주는 자가 그니라"(요한복음 13:26)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요한복음 13:27)
"지금 인자가 영광을 얻었고 여호와 하나님도 인자를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도다"(요한복음 13:31)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
(요한복음 13:34-35)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요한복음 15:8)
이렇게 쭉... 여러 가지로 말씀하시고 나서 주신 말씀이 오늘의 본문말씀입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함이니라"
자, 그렇다면 이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여야만 하겠습니까
신학자(神學者) 마릴린 거스틴(Marilyn J. Gustin)은 그의 저서
사순절의 기쁨(Choosing Joy for Lent)이란 책에서 잘 말씀하고 있는데
제가 이해한 제 표현대로 한번 소개해 보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 자신이 온 인류의 죄를 위하여 죽으려 하면서도.. 기뻐했으며
그래서 그만이 모든 사람에게 참 기쁨을 나누어 줄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기쁨을 만들어 낼 수 없다.
원래 기쁨이라는 속성(屬性)은 여호와 하나님의 것이며..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로만이 가능하기 때문에
우리는 이 기쁨을 도저히 만들 수 없는 것이다.
그 대신 우리는 다만 그 기쁨을 받아들일 준비만 하면 되는데
그 준비란 그리스도를 향하여 마음을 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착각(錯覺)하는 것 가운데 한가지는
열심히 살기만 하면 기쁨이나 평강도 사람들이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나
사실 이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기쁨이나 평강이란 원래 여호와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실 때 만이 기쁨이나 평강을 가지게 되는 것이지
인간이 노력한다고 해서 기쁨이나 평강을 얻게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특히 기쁨이나 평강은 어떤 상황(狀況)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시기만 하면 그 상황이 어떠하든지
삶의 형편이 어떠하든지 간에
그는 형언할 수 없는 놀라운 기쁨과 평강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이것은 전적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선물이다.
한 수도사가 나무 아래 앉아 있는데 한 사람이 담요를 갖다 놓고는 총총히 사라졌다.
수도사는 머리를 끄떡이며 빙그레 웃었다.
수도사가 이제 그 담요를 집어 막 어깨에 두르려 하는데 한 거지가 와서
그 담요를 잽싸게 채 가지고 갔다.
수도사는 그래도 빙그레 웃었다.
또 한번은 한 여인이 음식을 갖다 놓고 가는걸 보고
머리를 끄덕이며 감사기도를 드리고 있는데 다른 거지가 와서 홀딱 가져가 버렸다.
수도사는 머리를 끄덕이며 그래도 빙그레 웃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다 왔다가 가버리는 것이다.
그것이 인생살이의 본질이다.
사람들은 무엇이든 움켜 쥐려고 한다.
그러나 거기에는 참 만족도 참 기쁨도 없다.
참 만족과 참 기쁨이란 움켜 쥐는데 있지 않다.
그렇다면 어떻게 참 만족과 참 기쁨 참 평강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인가
물론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셔야만 얻을 수 있고.. 들어 갈 수 있고.. 누릴 수 있는 것이지만..
일단 이것을 바라야 하고 구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을 기도(祈禱)라고 한다.
그래서 바른 기도를 통해 그리고 십자가를 바라보며 묵상하는 명상 기도를 통해
우리는 참된 기쁨과 평강, 참된 만족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그곳이 어디인가
그곳은 다른 곳이 아니라 바로 여호와 하나님의 품이다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찬송가 359장 예수가 함께 계시니란 찬송 가사 1절에 보면
예수님이 누구신가 바로 기쁨의 근원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수가 함께 계시니 시험이 오나 겁없네. 기쁨의 근원 되시는 예수를 위해 삽시다"
그런가 하면 이제 설교 후에 함께 부를 찬송인 533장 가사 4절에 보면
이렇게 주시는 기쁨이 어떠한 기쁨인가
'세상의 기쁨'이 아니라 '하늘의 기쁨'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영원한 주님 내 승리의 주 하늘의 기쁨을 주옵소서.
어떠한 고난이 닥쳐와도 만유의 주여 소망되소서"
이제 금년도 사순절(旬節, Lent)은 시작되었습니다.
지난 수요일, 3월 5일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사순절이란 부활절(Easter)을 기다리면서
자신의 신앙 성장을 꾀하는 영적 훈련의 시기로서
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고난 당하신 예수님의 죽음을 묵상하며 기도하는
40일간의 시기입니다.
우리 모두 다 금년 사순절에는 정말 그리스도와 십자가를 깊이 묵상함으로 말미암아!!
참된 기쁨과 평강 그리고 참된 만족을 얻어 여호와 하나님 품에 안기는 놀라운 역사를 경험하는
복된 사순절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끝으로 이러한 사순절에 우리의 기도를 도와주고 수정(修整)해 줄만한 기도인
디트리히트 본 회퍼 목사님의 기도시(祈禱시)를 소개하고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기도하게 하소서
Dietrich Bonhoeffer
오 여호와 하나님, 이른 아침에 주님께 부르짖으오니
나로 기도하게 하시며
오직 주님만 생각하게 하소서
내 안에 어둠이 있으나
주님과 함께라면 빛이 있으며
나는 홀로이나
주님이 나를 홀로 두지 않으시며
내 마음은 연약하나
주님과 함께라면 도움을 얻고
내겐 쉼이 없으나
주님과 함께라면 평안이 있으며
내 안에 고통이 있으나
주님과 함께라면 인내가 있고
나는 주님의 길을 이해하지 못하나
주님은 나의 길을 아시오니
소생시키시어 자유롭게 하옵소서.
주여 오늘 무슨 일이 닥치든지
주님의 이름이 찬양 받으소서.
그러한 기쁨에 대하여 말씀을 드리려 합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기쁨"하면
"출생의 기쁨" "승진의 기쁨" "합격의 기쁨"이라든지 아니면
"성탄의 기쁨" "부활의 기쁨" 이렇게 해야…. 맞는 표현이라 생각하면서
"사순절의 기쁨이라는 말은 좀 맞지 않는 것 같다.. " 이렇게 생각하는 분들이 더러 계실 줄 압니다.
그러나 제가 오늘 전하고자 하는 중심은 사순절의 핵심이란.. 오늘 말씀처럼...
고난과 죽음을 넘어선 기쁨이.. 사순절(旬節, Lent)의 핵심(核心)이라는 것인데...
이것이 오늘 사순절 첫 번째 주일에 드리고자 하는 요지(要旨)입니다.
이 세상에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기쁨이 있습니다.
울면서 기뻐한다든지.... 맞으면서 기뻐한다든지...
굶으면서 기뻐한다든지.. 죽어가면서 기뻐한다든지...
이런 것들은 참으로 우리가 이해하기 힘든 기쁨들인데..
바로 이와 같은 선상(線上)에.. 사순절의 기쁨이 있다는 것입니다.
청소년들이 자라면서 한번쯤 읽어보는 감동적인 이야기 가운데
쉘 실버스타인(Shell Silverstein)이 지은 아낌없이 주는 나무(Giving Tree, 1964)란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이야기를 설교 서두(序頭)에 잠시 소개하려고 합니다.
옛날에 한 그루의 나무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나무에게는 사랑하는 한 소년이 있었습니다.
그 소년은 매일같이 나무에게로 가서 떨어지는 나뭇잎을 한 잎 두 잎 주워 모았습니다.
그러고는 나뭇잎으로 왕관을 만들어 쓰고는 숲 속의 왕자처럼 흐뭇해 했습니다.
때로는 그 나무의 줄기를 타고 올라가서
나뭇가지에 매달려 그네를 타고 열매도 따먹곤 했습니다.
나무와 소년은 나름대로 숨바꼭질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피곤해지면 나무 그늘 아래에서 낮잠을 자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소년은 그 나무를 무척 사랑했고
나무는 나무대로 소년의 사랑을 받아서인지 무척이나 행복해했습니다.
그러면서 세월은 흘렀습니다.
세월은 흘러 소년은.. 점점 나이가 들기 시작했습니다. 소년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다보니 나무는 홀로 있을 때가 점점 많아졌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소년이 모처럼 나무를 찾아갔을 때 나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얘야, 내 줄기를 타고 기어올라와서 가지에 매달려 놀아...
그네도 타고.. 열매도 따먹고.. 그늘에서 놀며 그렇게 즐겁게 지내... "
"나는 이제 나무에 올라가 놀기에는 많이 커 버렸어.
이젠 어렸을 때완 좀 다르게 물건을 사면서 놀고 싶어.
그래서 돈이 좀 필요한데.. 나무야 나에게 돈 좀 줄 수 없겠니"
"미안하지만, 내겐 돈이 없는걸... 하지만 내겐 나뭇잎과 사과는 있어....
얘야, 내 사과를 따다가 도시에 갖다 팔지 그래
그러면 돈이 생길 게고, 그러면 행복해지지 않겠니.... "
이 말을 들은 소년은... 나무 위로 올라갔습니다.
그리고는 사과를 한 움큼 따 가지고는 가 버렸습니다.
이렇게 모처럼 놀러 왔다가 같이 놀아주지 않고는 사과만 따 가지고 가도
나무는 행복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사과를 따 가지고 간 소년은 오랜 세월이 지나도 돌아오질 않았습니다.
그래서 나무는 한동안 슬펐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소년이 나무에게로 다시 돌아온 것입니다.
그때 나무는 기쁨이 넘쳐 몸을 흔들면서 소년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얘야, 내 줄기를 타고 기어올라와서 가지에 매달려...
그네도 타고 즐겁게 놀아... "
"난 이제, 나무에 올라 그네 타고 놀 만큼 한가하질 않아.
앞으론 결혼도 해야하고, 아기도 가져야 하는데...
그래서 난 집을 먼저 준비해야 되.
나무야, 나에게 집을 좀 줄 수 없겠니"
"난 집을 가지고 있지 않는 걸...
아, 그렇다! 넌 내 가지들을 잘라서 집을 지으면 되겠구나!"
그래서 소년은 그 나무의 가지들을 베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곤 자른 가지들을 집을 지으려고 가지고 갔습니다.
나무는 가지가 다 잘렸지만... 그래도 행복했습니다.
그리고 또 세월이 한참 흘렀습니다.
어느 날 소년이 다시 나무에게 돌아왔을 때
나무는 거의 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 너무 기뻐했습니다.
"얘야, 오랜만이다! 어서 와! 나랑 같이 놀자!"
"나는 놀기에는 너무 지쳤어! 이제 나에겐 배가 필요한데...
나에게 배를 좀 줄 수 없겠니"
"그래 그럼 내 줄기를 잘라서 배를 만들어 보렴.
그러면 너는 그 배를 타고 멀리 갈 수 있을거야. "
그래서 소년은 그 나무의 마지막 남은 몸통을 싹둑 잘랐습니다.
그리고는 배를 만들어 타고 멀리 멀리 떠났습니다.
그러나.. 그래도 나무는 행복했습니다.
그리고 오랜 세월이 지난 뒤.. 소년은 이제 할아버지가 되어
다시 나무에게로 돌아왔습니다.
"얘야, 미안하다. 이제는 너에게 줄 것이 아무 것도 없구나..... 사과도 없고.... "
"이빨이 나빠서 이젠 사과도 먹을 수 없어. " 할아버지가 된 소년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게는 이제 가지도 없으니... 네가 그네를 탈 수도 없고... 어쩌지"
"나뭇가지에 매달려 그네를 타기에는 난 이제.. 너무 늙었어... "
"내게는 줄기마저 없으니... 네가 기어오를 수도 없고... "
"나는 이제 기운도 없어서... 줄기에 기어오를 수도 없어... "
그 때 나무가 한숨쉬며 소년에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미안해! 뭘 너에게 주었으면 좋겠는데...
하지만 내게 남은 것이라곤 이제 아무 것도 없고..
남은 것이란 늙어 버린 나무 밑둥 뿐이라서.. 미안해... "
"그래 괜챦아. 난 이제 아무 것도 필요 없어..
그저 조용히 앉아서 쉴 곳이나 있었으면 좋겠어. 몹시 피곤하거든.... "
"그래 그렇다면.. 자, 앉아 쉬기에는 늙은 나무 밑둥이 그만이지...
이리로 와서 앉아 쉬어.... "
할아버지가 된 소년은 시키는 대로 이제 마지막 남은 나무 밑둥에 걸터 앉았습니다.
그래도 나무는 행복했습니다.
이상(以上)이 아낌없이 주는 나무(Giving Tree, 1964)란 이야기입니다.
어떻습니까 잘 이해가 되십니까
아낌없이 주는 나무... 이파리도 주고.. 열매도 주고.. 가지도 주고.. 줄기도 주고..
이제 마지막 남은 밑둥까지 다 주면서도 행복해 하며 기뻐하는 나무!!...
우리가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이 자기를 아낌없이 주면서도 행복해 하고.. 기뻐하는 분이 누구냐
십자가에 달리신 우리 주님이시며!!
그렇게 자르고 주기 위해.. 자진해서 고난 속에 들어가는 때가.. 사순절이라는 것입니다!!
만인(萬人)의 형제라고 하는 아씨시의 프란치스코(Francesco D'Assisi)는 어느 날
사람에게 있어서 완전한 기쁨이란 무엇이며 어디서 얻을 수 있는가에 대하여
레오(Reo)라는 형제(兄弟)와 진지하게 대화를 나눕니다.
"레오 형제, 어떤 형제가 학식이 있어.. 모르는 것이 없고..
학문과 성경에 능통하고 마음 속의 비밀을 들추어 내는 사람이라고 합시다.
그러나 그래도 그에게 완전한 기쁨은 없는 거지요... "
레오 형제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프란치스코를 바라봅니다. 그때 다시 이렇게 말합니다.
"레오 형제, 어떤 형제가 설교를 너무나 잘 하여 많은 사람들을 회심(悔心)시키고
또 악마도 좇아내며, 심지어 죽은지 나흘이나 된 사람도 살려낸다고 합시다.
그래도 거기에 완전한 기쁨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때 레오 형제는 묻습니다.
"아니 선생님, 그렇다면 완전한 기쁨이란 도대체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우리가 신발이 진흙과 먼지로 더럽혀 진 채로... 성전(聖殿)에 도착해서
성전 문을 두드렸다고 합시다.
그런데 성전 문지기는 우리의 겉모습만 보고는 우리가 부랑자(浮浪者)인줄 알고
성전 안으로 들여보지 않고 좇아 내어 눈과 추위에 버려뒀다고 합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화를 내지 않고.. 그 굴욕을 잘 받아들이고
문지기가 옳은 말을 했다고 수긍하게 된다면... 레오 형제여...
바로 거기에 완전한 기쁨이 있는 법이지요.
그리고 만일 우리가 추위를 이기지 못하여 계속 문을 두드리면서
문지기가 나와서 문 열어주기를 기다리는데
사람이 나오기는 나왔지만 몽둥이를 들고 나와
우리 옷을 붙잡고는 눈 속에다 우리를 쳐박았다고 합시다.
그래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受難)을 생각하며 그 곤욕을 잘 참고 견딘다거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잘 참고 받아들인다면..
레오 형제여.. 바로 거기에 완전한 기쁨이 있는 법이지요"
(Francesco D'Assisiby Cirillo Tescaroli / 성 바오로출판사에서 번역본 출판)
사순절의 상징은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 그리고 가시 면류관입니다.
좀더 분명하게 말하면 수난(受難)과 고통(苦痛)을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가
사순절의 상징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부분은 사순절을 어둡게 생각하고 우울하게 생각하지만
사실 사순절의 본질이나 그 핵심은 어두운 것도 아니고 우울한 것도 아니라!!
밝은 것이며.. 기쁨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속에 참된 희망이 있고 참된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도 바로 이와같은 맥락에서 본다면 이해가 어느 정도 되리라 생각합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함이니라"(요한복음 15:11)
지금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으로 입성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십자가 지시려고... 그래서 십자가 위에서 자신의 몸을 제물로 드리려고
자진해서 착착.. 그리고 침착하게 준비하고 있는 가운데 있습니다.
그러면서 주신 말씀들이 이것입니다.
"나의 하는 것을 네가 이제는 알지 못하나 이 후에는 알리라"(요한복음 13:7)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하여 본을 보였노라"(요한복음 13:14-15)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요한복음 13:21)
"내가 한 조각을 찍어다가 주는 자가 그니라"(요한복음 13:26)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요한복음 13:27)
"지금 인자가 영광을 얻었고 여호와 하나님도 인자를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도다"(요한복음 13:31)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
(요한복음 13:34-35)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요한복음 15:8)
이렇게 쭉... 여러 가지로 말씀하시고 나서 주신 말씀이 오늘의 본문말씀입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함이니라"
자, 그렇다면 이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여야만 하겠습니까
신학자(神學者) 마릴린 거스틴(Marilyn J. Gustin)은 그의 저서
사순절의 기쁨(Choosing Joy for Lent)이란 책에서 잘 말씀하고 있는데
제가 이해한 제 표현대로 한번 소개해 보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 자신이 온 인류의 죄를 위하여 죽으려 하면서도.. 기뻐했으며
그래서 그만이 모든 사람에게 참 기쁨을 나누어 줄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기쁨을 만들어 낼 수 없다.
원래 기쁨이라는 속성(屬性)은 여호와 하나님의 것이며..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로만이 가능하기 때문에
우리는 이 기쁨을 도저히 만들 수 없는 것이다.
그 대신 우리는 다만 그 기쁨을 받아들일 준비만 하면 되는데
그 준비란 그리스도를 향하여 마음을 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착각(錯覺)하는 것 가운데 한가지는
열심히 살기만 하면 기쁨이나 평강도 사람들이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나
사실 이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기쁨이나 평강이란 원래 여호와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실 때 만이 기쁨이나 평강을 가지게 되는 것이지
인간이 노력한다고 해서 기쁨이나 평강을 얻게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특히 기쁨이나 평강은 어떤 상황(狀況)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시기만 하면 그 상황이 어떠하든지
삶의 형편이 어떠하든지 간에
그는 형언할 수 없는 놀라운 기쁨과 평강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이것은 전적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선물이다.
한 수도사가 나무 아래 앉아 있는데 한 사람이 담요를 갖다 놓고는 총총히 사라졌다.
수도사는 머리를 끄떡이며 빙그레 웃었다.
수도사가 이제 그 담요를 집어 막 어깨에 두르려 하는데 한 거지가 와서
그 담요를 잽싸게 채 가지고 갔다.
수도사는 그래도 빙그레 웃었다.
또 한번은 한 여인이 음식을 갖다 놓고 가는걸 보고
머리를 끄덕이며 감사기도를 드리고 있는데 다른 거지가 와서 홀딱 가져가 버렸다.
수도사는 머리를 끄덕이며 그래도 빙그레 웃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다 왔다가 가버리는 것이다.
그것이 인생살이의 본질이다.
사람들은 무엇이든 움켜 쥐려고 한다.
그러나 거기에는 참 만족도 참 기쁨도 없다.
참 만족과 참 기쁨이란 움켜 쥐는데 있지 않다.
그렇다면 어떻게 참 만족과 참 기쁨 참 평강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인가
물론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셔야만 얻을 수 있고.. 들어 갈 수 있고.. 누릴 수 있는 것이지만..
일단 이것을 바라야 하고 구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을 기도(祈禱)라고 한다.
그래서 바른 기도를 통해 그리고 십자가를 바라보며 묵상하는 명상 기도를 통해
우리는 참된 기쁨과 평강, 참된 만족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그곳이 어디인가
그곳은 다른 곳이 아니라 바로 여호와 하나님의 품이다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찬송가 359장 예수가 함께 계시니란 찬송 가사 1절에 보면
예수님이 누구신가 바로 기쁨의 근원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수가 함께 계시니 시험이 오나 겁없네. 기쁨의 근원 되시는 예수를 위해 삽시다"
그런가 하면 이제 설교 후에 함께 부를 찬송인 533장 가사 4절에 보면
이렇게 주시는 기쁨이 어떠한 기쁨인가
'세상의 기쁨'이 아니라 '하늘의 기쁨'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영원한 주님 내 승리의 주 하늘의 기쁨을 주옵소서.
어떠한 고난이 닥쳐와도 만유의 주여 소망되소서"
이제 금년도 사순절(旬節, Lent)은 시작되었습니다.
지난 수요일, 3월 5일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사순절이란 부활절(Easter)을 기다리면서
자신의 신앙 성장을 꾀하는 영적 훈련의 시기로서
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고난 당하신 예수님의 죽음을 묵상하며 기도하는
40일간의 시기입니다.
우리 모두 다 금년 사순절에는 정말 그리스도와 십자가를 깊이 묵상함으로 말미암아!!
참된 기쁨과 평강 그리고 참된 만족을 얻어 여호와 하나님 품에 안기는 놀라운 역사를 경험하는
복된 사순절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끝으로 이러한 사순절에 우리의 기도를 도와주고 수정(修整)해 줄만한 기도인
디트리히트 본 회퍼 목사님의 기도시(祈禱시)를 소개하고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기도하게 하소서
Dietrich Bonhoeffer
오 여호와 하나님, 이른 아침에 주님께 부르짖으오니
나로 기도하게 하시며
오직 주님만 생각하게 하소서
내 안에 어둠이 있으나
주님과 함께라면 빛이 있으며
나는 홀로이나
주님이 나를 홀로 두지 않으시며
내 마음은 연약하나
주님과 함께라면 도움을 얻고
내겐 쉼이 없으나
주님과 함께라면 평안이 있으며
내 안에 고통이 있으나
주님과 함께라면 인내가 있고
나는 주님의 길을 이해하지 못하나
주님은 나의 길을 아시오니
소생시키시어 자유롭게 하옵소서.
주여 오늘 무슨 일이 닥치든지
주님의 이름이 찬양 받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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