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절] 사순절에 회복할 일
본문
이번 주일은 사순절 제5주입니다. 예수님께서 고난을 향해 걸어가신 40일을 기념하는 사순절은 부활 이전 40일을 가리키는 기간입니다. 그리고 다음 주일은 사순절 마지막 주일인 종려주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그 목적을 온전히 이루셨던 기간입니다. 우리는 이 복된 사순절 기간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회복하길 원하셨던 몇 가지 주제를 깊이 생각해 보기원합니다.
이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신 일이기도 합니다.
1. 생명주시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회복입니다.
45 마리아에게 와서 예수의 하신 일을 본 많은 유대인이 저를 믿었으나
예수님께서 많은 이적을 행하신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믿음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기를 원하시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생명인데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있어야 이 믿음을 통해 여호와 하나님의 생명이 주어지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많은 이적을 베푸시는 것입니다.
나사로의 장례식에는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많은 사람들에게 믿음을 주기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죽은 자를 살리시는 예수님께 대한 믿음을 갖기 원하셨습니다.
요11:14-15을 함께 읽어봅시다.
이에 예수께서 밝히 이르시되 나사로가 죽었느니라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함이라 그러나 그에게로 가자 하신대
예수님께서는 사랑하는 나사로가 병든 소식을 받고 그에게 달려가지 않으셨습니다.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그 후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유대로 다시 가자 하시니(6-7)
그러나 예수님께서 사랑하는 나사로의 병든 소식을 듣고도 꿈쩍하지 않으신 예수님께서는 죽으신 것을 아시고 기뻐하십니다.
사랑하는 자가 죽었는데 기뻐하시다니 말이 됩니까
나사로의 죽음을 기뻐하신 것이 아니지요. 제자들에게 믿음을 주실 수 있어서 기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기뻐하신 까닭은 목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말씀하십니다.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나사로가 죽을 병에 걸린 것을 알고 계셨던 예수님께서는 나사로가 죽기까지 움직이지 않으셨습니다.
제자들과 세상 사람들에게 믿음을 심어줄 수 있는 기회였기 때문입니다.
15절을 함께 읽어봅시다.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함이라"
제자들이, 사람들이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구주로 믿기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죽은 자를 살리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보기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믿음을 가지고 살다가 죽은 나사로를 살리는 일은 예수님께 있어서 잠든 자를 깨우는 것만큼이나 쉬운 일입니다.
(요11:40)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말이 네가 믿으면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신대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을 때, 와서 예수의 하신 일을 본 많은 유대인이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제자들이 믿었습니다.
이 믿음을 통해서 제자들과 많은 유대인들이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믿음을 통해 영생을 얻게 되었습니다.
믿고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생명을 주시려고 예수님께서 공생애 동안에 행하신 많은 일들로 인하여 여호와 하나님을 믿을 수 있기 원합니다.
생명은 여호와 하나님만 주십니다.
생명은 여호와 하나님께로서만 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서만 생명이 옵니다.
햇볕이 그리운 사람은 음지에 머물면 안됩니다. 햇빛이 비추는 양지로 나가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누리기 원하시는 분은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오시기 바랍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믿는 자에게 은혜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말이 네가 믿으면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신대
오늘 많은 성도들이 세상의 창문을 열어 놓고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창문을 닫아놓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 놀라운 일, 죽은 자를 살리신 일을 행하셨는데도 우리는 문을 열려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 여호와 하나님을 향하여 창문을 여세요. 여호와 하나님을 향해 창문을 여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행하신 많은 일들에 마음 문을 열 때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고, 그 믿음을 통해 생명이 임하십니다. 우리를 도와주시며, 우리를 건져주십니다.
금년 사순절에는 예수님께서 행하신 많은 일들을 묵상하시면서 믿음을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5병 2어의 이적을 묵상하시면서 생명을 주시는 예수님께 대한 믿음을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생명만 있으면 겨울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봄이 오면,
생명이 있는 식물들이 소생하는 것처럼
생명만 있으면
생명이 있는 모든 성도들은 주의 재림의 날에 소생할 것입니다.
살아날 것입니다.
2. 주님과 함께 유하는 삶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그 분요한 가운데서도 제자들과 함께 유하셨습니다.
54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유대인 가운데 드러나게 다니지 아니하시고 여기를 떠나 빈 들 가까운 곳인 에브라임이라는 동네에 가서 제자들과 함께 거기 유하시니라
예수님께서 공생애 기간 중 특별히 사순절 기간에는 분주한 시간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보는 대로입니다.
유대종교지도자들의 음모는 치밀하게 조여오고 있었습니다.
대중들의 필요는 감당하기 힘들만큼 넘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그 무엇보다 제자들과 함께 유하시는 시간을 소중히 여기신 사실을 만나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사랑하는 제자들과 함께 유하는 것을 기뻐하셨습니다.
사순절에 우리가 회복해야 할 일은 바로 주님과 함께 유하는 삶입니다.
철학자 키엘 게골(Kierkegaard, 1813-1855)이 삶의 수준을 세 가지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1 지하실 수준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긴급하게 필요하지 않은 것들을 지하실이나 창고에 쌓아두는 습성들이 있습니다. 여러가지가 잡동사사니가 제멋대로 섞여 쌓일 수 있는 곳이 바로 지하실입니다.
키엘게골은 이런 지하실 수준을 육신과 정욕을 따라 사는 삶에 비유하였습니다.
어제(2007/3/24) 저는 많이 기뻤습니다.
교회 지하실을 과감히 정리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는 창고는 사람들이 귀찮으면 모든 것을 그곳에 쌓아두는 것 같습니다. 그러다 보니, 캐비닛마다 가득 물건이 쌓여 있는데, 오만 잡동사니로 가득합니다.
우리 몇 사람은 지하실을 열심히 정리하였습니다. 쓸만한 옷들은 구세군 구제물품 코너에 가져다주었습니다. 그러나 쓸모가 없어보이는 것은 과감히 쓰레기처럼 담아서 밖에 내놓았습니다. 밖에는 다시 많은 것들이 쌓여 있습니다. 지난 쓰레기 차가 가져가지 않은 것들, 우리 교인들이 수요예배 후, 몇 개씩 가져다 버렸는데도 아직도 많이 남아있었습니다. 거기에 또 쓰레기를 내놓았으니 보통 모습이 흉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밖을 보니, 쓰레기를 치우는 차가 지나갑니다. 쓰레기 버리는 날도 아닌데 쓰레기를 담아 나르는 차가 교회 앞에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조심스럽게 다가가서 저 쓰레기를 그 차에 담아서 버려줄 수 있느냐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렇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영완 유승 형제의 도움을 받아 번게처럼 그 쓰레기를 버렸습니다.
할렐루야! 저의 마음이 날아오르는 것처럼 기뻤습니다. 지하실에서 쓰레기를 치우고 그곳에 쓸모있는 방을 만들어 놓으니 사람들마다 좋아합니다. 여러분, 오늘 친교시간에 아랫층에 내려가신 분들은 마음이 많이 기쁘실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 우리 심령을 지하실처럼 세상 정욕으로 채워버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세상 것들을 과감히 정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상 잡다한 것들로 눈에 보이는 대로 사노라면, 진정한 주님과의 만남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아집을 보물처럼 꼭꼭 싸서 지하실에 쳐박아두고 삽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교만을 보물처럼 꼭꼭 싸서 지하실에 쳐박아두고 삽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자존심을 보물처럼 꼭꼭 싸서 지하실에 쳐박아두고 삽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세상 욕망을 보물처럼 꼭꼭 싸서 지하실에 쳐박아두고 삽니다.
미련 없이 밖에 내놓으십시오. 버리세요. 좀 깨끗이 치우고 우리 주님을 모실 수 있기 바랍니다.
2 거실 수준이 있습니다. 거실은 외부에서 오는 사람을 의식한 공간입니다. 손님이 올 때는 이 거실에 앉아서 차도 마시고, 담소도 나누다 갑니다. 웬만하면 침실이나 지하실을 내려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을 거실 수준으로 하면 안됩니다.
윤리적 단계에 머무는 신앙은 능력이 없습니다. 타인을 의식하는 윤리나 도덕 체면에 좌우되는 믿음으로는 바리새인의 수준을 넘어갈 수 없습니다.
3 침실 수준이 있습니다. 종교적 단계라고 말할 수 있는데요. 그곳에서 침실이 주는 안식과 평안과 열림이 있습니다.
신랑과 신부는 침실에서 꿈을 나눕니다. 대화를 나눕니다. 사랑을 나눕니다.
신랑되신 주님과 모든 좋은 것을 나누며 함께 동거하는 단계입니다.
에녹이 이런 주님과 동행하는 생활을 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많은 사람들이 주님과 함께 유할 시간을 잃고 삽니다.
많은 젊은이들이 컴퓨터와 함께 삽니다.
많은 어른들이 TV와 함께 삽니다.
많은 사람들이 세상 속에 파묻혀 삽니다.
주님과 함께 유하는 삶을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3. 죽기까지 이루신 화목을 지키는 일입니다.
민족과 흩어진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를 여호와 하나님과 그리고 서로 하나가 되게 하시려고 죽으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과 원수된 수가성 여인은 예수님을 만나 여호와 하나님과 화목하고 수가성 사람들과 하나가 되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과 원수로 살던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나 여호와 하나님의 친백성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재산을 가난한 자를 위해 나눔으로 저들과 하나가 되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과 원수로 살던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 여호와 하나님과 화목하고 여호와 하나님 나라의 대사로 이방 백성과 하나로 살았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떠나 청소년기를 이성에 빠져 살던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그것도 만족할 수 없어서 청년기는 마약에 빠져 살다 폐인이 되었습니다.
집에서도 쫓겨나고 결국 폐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한 전도자를 만나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과 화목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동차 정비를 하면서 기쁨으로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화목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여호와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십니다. 이웃과 화목하게 하십니다.
지난 번 우리가 영광의 문의 주인공 엘리엇의 죽음을 영화로 본 적이 있습니다.
그 한 가정의 희생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 부족 전체가 여호와 하나님과 화목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52 또 그 민족만 위할뿐 아니라 흩어진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미리 말함이러라
1. 사랑이 구주를 죽게 했네 왜 날 사랑하나
겸손히 십자가 지시었네 왜 날 사랑하나
후렴 왜 날 사랑하나 왜 날 사랑하나
왜 주님 갈보리 가야했나 왜 날 사랑하나
2. 그 손과 발 날 위해 찢기셨네 왜 날 사랑하나
고난을 당하여 구원했네 왜 날 사랑하나
3. 내 대신 고통을 당하셨네 왜 날 사랑하나
죄용서 받을 수 없었는데 왜 날 사랑하나
우리는 1만 달란트 빚진 자였으나 이제 탕감을 받은 종과 같습니다.
평생을 갚아도 갚을 수 없는 부채를 여호와 하나님께 졌습니다.
누군가 사랑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에로스 사랑은 '무엇때문에(becouse of)' 사랑이고
아가페 사랑은 '그럼에도 불구하고(in spite of)'의 사랑이다라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교회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 동족을!
여호와 하나님과 그리고 서로 화목시키기 위하여 대신 십자가에 돌아가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화목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사순절에 회복해야 할 가장 소중한 주제입니다.
탈무드에 나오는 우화 하나를 나누고 싶습니다.
행복이 어디에 있는가를 깊이 연구한 어린 개가 자기 행복은 꼬리에 있다는결론을 내렸습니다. 강아지는 자기 꼬리를 흔들 때, 사람들의 얼굴에 행복이 깃들이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기 꼬리를 잡기로 결심했습니다. 꼬리만 잡으면 행복할 수 있을테니까요. 그렇지만 개가 자기 꼬리를 잡는다는 것이 쉽습니까 잡힐 듯이 잡힐 듯이 잡히지 않고, 돌고 돌아도 잡히지 않는 것이 꼬리라. 빙글빙글 돌아도 그만큼 빨리 도는 자기 꼬리. 그는 꼬리를 따라 돌고 또 돌다가 결국 제풀에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그 때 늙은 개가 그의 곁을 지나가다가 탈진하여 쓰러져 있는 강아지를 바라보았습니다. 나도 자네처럼 내 꼬리를 잡아 보려고 많이 돌아보았지. 그러다 한 결론에 도달했다네. 내 꼬리를 잡으려고 돌면 돌수록 더 어지럽더라구. 그런데 내가 한 목표를 바라보고 달려가니까 내 꼬리가 나를 따라오더구만.
사실 개의 진정한 행복은 그의 꼬리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인을 따라가면 그곳에 저의 먹이가 있습니다. 주인을 따라가면 그곳에 그의 살 곳이 있습니다. 주인을 따라가면 그곳에 그의 행복이 있습니다. 병이 날 때도 주인을 따라가면 그곳에 낳을 병원이 있습니다. 약이 있어요.
개의 행복은 주인의 뜻에 있습니다. 주인의 뜻을 따르면 행복이 있습니다.
주인이 인도하는 대로 꼬리를 흔들면서 따라가면 그는 죽을 때까지 행복합니다. 무덤에 이르도록 행복할 수 있는 비결! 그것을 개는 알아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행복이 있다고 생각하는 무엇을 잡으려고 달려갑니다. 입에 거품을 물고 달려갑니다. 그런데 죽는 그날까지 달려가도 결론은 뻔합니다. 헛도는 인생이지요.
그런데 만유의 주인이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따라가면 그곳엔 바로 그렇게도 찾아 헤매던 행복이 있습니다. 영생이 있습니다.
오늘 하루를 주님의 인도하심에 맡겨보지 않으시겠습니까
금년 한 해를 주님의 인도하심에 맡겨보지 않으시겠습니까
남을 생애를 주님의 인도하심에 맡겨보지 않으시겠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여호와 하나님과 화목하고 서로간에 화목할 수 있겠습니까
여호와 하나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화목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초점을 여호와 하나님의 화목에 맞춘 인생이 복이 있습니다.
마무리하는 말
어떤 분이 인생을 70으로 잡고 하루 24시간에 맞추어서 계산 해보았습니다.
30세는 오후 1시 25분입니다
35세는 오후 오후2시 59분, 오후 3시가 다 되었어요.
40세는 벌써 오후4시 16분을 넘었습니다.
50이면 오후 7시입니다.
저는 쉰 여섯 살이니 오후 8시가 넘었습니다. 해는 벌써 기울었구요.
60이면 오후 10시니 주무실 시간입니다.
70이면 종이 땡쳤으니 가야할 시간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강한 것이 어머니의 사랑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전쟁이 나니까 그 사랑하는 아기를 업고 나온다는 것이 아기는 간곳없고 베개를 업고 나왔더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인간을 너무 믿으려 하지 맙시다.
이번 사순절에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렇게 주시기 원하시는 생명을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생명이 있으면 그날이 와도 반드시 살아납니다.
이번 사순절에는 여호와 하나님과 함께 유하는 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나의 방에서 세상적인 욕망의 쓰레기, 아집의 쓰레기, 교만의 쓰레기를 다 벗어 버리고 여호와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이번 사순절에는 여호와 하나님과 서로간 화목하는 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여호와 하나님과 화목하고 여호와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목표에 자신을 맞추고 하루하루를 회복해가는 축복을 받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그 목적을 온전히 이루셨던 기간입니다. 우리는 이 복된 사순절 기간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회복하길 원하셨던 몇 가지 주제를 깊이 생각해 보기원합니다.
이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신 일이기도 합니다.
1. 생명주시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회복입니다.
45 마리아에게 와서 예수의 하신 일을 본 많은 유대인이 저를 믿었으나
예수님께서 많은 이적을 행하신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믿음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기를 원하시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생명인데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있어야 이 믿음을 통해 여호와 하나님의 생명이 주어지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많은 이적을 베푸시는 것입니다.
나사로의 장례식에는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많은 사람들에게 믿음을 주기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죽은 자를 살리시는 예수님께 대한 믿음을 갖기 원하셨습니다.
요11:14-15을 함께 읽어봅시다.
이에 예수께서 밝히 이르시되 나사로가 죽었느니라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함이라 그러나 그에게로 가자 하신대
예수님께서는 사랑하는 나사로가 병든 소식을 받고 그에게 달려가지 않으셨습니다.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그 후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유대로 다시 가자 하시니(6-7)
그러나 예수님께서 사랑하는 나사로의 병든 소식을 듣고도 꿈쩍하지 않으신 예수님께서는 죽으신 것을 아시고 기뻐하십니다.
사랑하는 자가 죽었는데 기뻐하시다니 말이 됩니까
나사로의 죽음을 기뻐하신 것이 아니지요. 제자들에게 믿음을 주실 수 있어서 기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기뻐하신 까닭은 목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말씀하십니다.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나사로가 죽을 병에 걸린 것을 알고 계셨던 예수님께서는 나사로가 죽기까지 움직이지 않으셨습니다.
제자들과 세상 사람들에게 믿음을 심어줄 수 있는 기회였기 때문입니다.
15절을 함께 읽어봅시다.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함이라"
제자들이, 사람들이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구주로 믿기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죽은 자를 살리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보기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믿음을 가지고 살다가 죽은 나사로를 살리는 일은 예수님께 있어서 잠든 자를 깨우는 것만큼이나 쉬운 일입니다.
(요11:40)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말이 네가 믿으면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신대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을 때, 와서 예수의 하신 일을 본 많은 유대인이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제자들이 믿었습니다.
이 믿음을 통해서 제자들과 많은 유대인들이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믿음을 통해 영생을 얻게 되었습니다.
믿고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생명을 주시려고 예수님께서 공생애 동안에 행하신 많은 일들로 인하여 여호와 하나님을 믿을 수 있기 원합니다.
생명은 여호와 하나님만 주십니다.
생명은 여호와 하나님께로서만 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서만 생명이 옵니다.
햇볕이 그리운 사람은 음지에 머물면 안됩니다. 햇빛이 비추는 양지로 나가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누리기 원하시는 분은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오시기 바랍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믿는 자에게 은혜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말이 네가 믿으면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신대
오늘 많은 성도들이 세상의 창문을 열어 놓고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창문을 닫아놓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 놀라운 일, 죽은 자를 살리신 일을 행하셨는데도 우리는 문을 열려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 여호와 하나님을 향하여 창문을 여세요. 여호와 하나님을 향해 창문을 여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행하신 많은 일들에 마음 문을 열 때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고, 그 믿음을 통해 생명이 임하십니다. 우리를 도와주시며, 우리를 건져주십니다.
금년 사순절에는 예수님께서 행하신 많은 일들을 묵상하시면서 믿음을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5병 2어의 이적을 묵상하시면서 생명을 주시는 예수님께 대한 믿음을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생명만 있으면 겨울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봄이 오면,
생명이 있는 식물들이 소생하는 것처럼
생명만 있으면
생명이 있는 모든 성도들은 주의 재림의 날에 소생할 것입니다.
살아날 것입니다.
2. 주님과 함께 유하는 삶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그 분요한 가운데서도 제자들과 함께 유하셨습니다.
54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유대인 가운데 드러나게 다니지 아니하시고 여기를 떠나 빈 들 가까운 곳인 에브라임이라는 동네에 가서 제자들과 함께 거기 유하시니라
예수님께서 공생애 기간 중 특별히 사순절 기간에는 분주한 시간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보는 대로입니다.
유대종교지도자들의 음모는 치밀하게 조여오고 있었습니다.
대중들의 필요는 감당하기 힘들만큼 넘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그 무엇보다 제자들과 함께 유하시는 시간을 소중히 여기신 사실을 만나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사랑하는 제자들과 함께 유하는 것을 기뻐하셨습니다.
사순절에 우리가 회복해야 할 일은 바로 주님과 함께 유하는 삶입니다.
철학자 키엘 게골(Kierkegaard, 1813-1855)이 삶의 수준을 세 가지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1 지하실 수준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긴급하게 필요하지 않은 것들을 지하실이나 창고에 쌓아두는 습성들이 있습니다. 여러가지가 잡동사사니가 제멋대로 섞여 쌓일 수 있는 곳이 바로 지하실입니다.
키엘게골은 이런 지하실 수준을 육신과 정욕을 따라 사는 삶에 비유하였습니다.
어제(2007/3/24) 저는 많이 기뻤습니다.
교회 지하실을 과감히 정리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는 창고는 사람들이 귀찮으면 모든 것을 그곳에 쌓아두는 것 같습니다. 그러다 보니, 캐비닛마다 가득 물건이 쌓여 있는데, 오만 잡동사니로 가득합니다.
우리 몇 사람은 지하실을 열심히 정리하였습니다. 쓸만한 옷들은 구세군 구제물품 코너에 가져다주었습니다. 그러나 쓸모가 없어보이는 것은 과감히 쓰레기처럼 담아서 밖에 내놓았습니다. 밖에는 다시 많은 것들이 쌓여 있습니다. 지난 쓰레기 차가 가져가지 않은 것들, 우리 교인들이 수요예배 후, 몇 개씩 가져다 버렸는데도 아직도 많이 남아있었습니다. 거기에 또 쓰레기를 내놓았으니 보통 모습이 흉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밖을 보니, 쓰레기를 치우는 차가 지나갑니다. 쓰레기 버리는 날도 아닌데 쓰레기를 담아 나르는 차가 교회 앞에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조심스럽게 다가가서 저 쓰레기를 그 차에 담아서 버려줄 수 있느냐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렇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영완 유승 형제의 도움을 받아 번게처럼 그 쓰레기를 버렸습니다.
할렐루야! 저의 마음이 날아오르는 것처럼 기뻤습니다. 지하실에서 쓰레기를 치우고 그곳에 쓸모있는 방을 만들어 놓으니 사람들마다 좋아합니다. 여러분, 오늘 친교시간에 아랫층에 내려가신 분들은 마음이 많이 기쁘실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 우리 심령을 지하실처럼 세상 정욕으로 채워버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세상 것들을 과감히 정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상 잡다한 것들로 눈에 보이는 대로 사노라면, 진정한 주님과의 만남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아집을 보물처럼 꼭꼭 싸서 지하실에 쳐박아두고 삽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교만을 보물처럼 꼭꼭 싸서 지하실에 쳐박아두고 삽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자존심을 보물처럼 꼭꼭 싸서 지하실에 쳐박아두고 삽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세상 욕망을 보물처럼 꼭꼭 싸서 지하실에 쳐박아두고 삽니다.
미련 없이 밖에 내놓으십시오. 버리세요. 좀 깨끗이 치우고 우리 주님을 모실 수 있기 바랍니다.
2 거실 수준이 있습니다. 거실은 외부에서 오는 사람을 의식한 공간입니다. 손님이 올 때는 이 거실에 앉아서 차도 마시고, 담소도 나누다 갑니다. 웬만하면 침실이나 지하실을 내려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을 거실 수준으로 하면 안됩니다.
윤리적 단계에 머무는 신앙은 능력이 없습니다. 타인을 의식하는 윤리나 도덕 체면에 좌우되는 믿음으로는 바리새인의 수준을 넘어갈 수 없습니다.
3 침실 수준이 있습니다. 종교적 단계라고 말할 수 있는데요. 그곳에서 침실이 주는 안식과 평안과 열림이 있습니다.
신랑과 신부는 침실에서 꿈을 나눕니다. 대화를 나눕니다. 사랑을 나눕니다.
신랑되신 주님과 모든 좋은 것을 나누며 함께 동거하는 단계입니다.
에녹이 이런 주님과 동행하는 생활을 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많은 사람들이 주님과 함께 유할 시간을 잃고 삽니다.
많은 젊은이들이 컴퓨터와 함께 삽니다.
많은 어른들이 TV와 함께 삽니다.
많은 사람들이 세상 속에 파묻혀 삽니다.
주님과 함께 유하는 삶을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3. 죽기까지 이루신 화목을 지키는 일입니다.
민족과 흩어진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를 여호와 하나님과 그리고 서로 하나가 되게 하시려고 죽으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과 원수된 수가성 여인은 예수님을 만나 여호와 하나님과 화목하고 수가성 사람들과 하나가 되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과 원수로 살던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나 여호와 하나님의 친백성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재산을 가난한 자를 위해 나눔으로 저들과 하나가 되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과 원수로 살던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 여호와 하나님과 화목하고 여호와 하나님 나라의 대사로 이방 백성과 하나로 살았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떠나 청소년기를 이성에 빠져 살던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그것도 만족할 수 없어서 청년기는 마약에 빠져 살다 폐인이 되었습니다.
집에서도 쫓겨나고 결국 폐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한 전도자를 만나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과 화목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동차 정비를 하면서 기쁨으로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화목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여호와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십니다. 이웃과 화목하게 하십니다.
지난 번 우리가 영광의 문의 주인공 엘리엇의 죽음을 영화로 본 적이 있습니다.
그 한 가정의 희생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 부족 전체가 여호와 하나님과 화목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52 또 그 민족만 위할뿐 아니라 흩어진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미리 말함이러라
1. 사랑이 구주를 죽게 했네 왜 날 사랑하나
겸손히 십자가 지시었네 왜 날 사랑하나
후렴 왜 날 사랑하나 왜 날 사랑하나
왜 주님 갈보리 가야했나 왜 날 사랑하나
2. 그 손과 발 날 위해 찢기셨네 왜 날 사랑하나
고난을 당하여 구원했네 왜 날 사랑하나
3. 내 대신 고통을 당하셨네 왜 날 사랑하나
죄용서 받을 수 없었는데 왜 날 사랑하나
우리는 1만 달란트 빚진 자였으나 이제 탕감을 받은 종과 같습니다.
평생을 갚아도 갚을 수 없는 부채를 여호와 하나님께 졌습니다.
누군가 사랑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에로스 사랑은 '무엇때문에(becouse of)' 사랑이고
아가페 사랑은 '그럼에도 불구하고(in spite of)'의 사랑이다라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교회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 동족을!
여호와 하나님과 그리고 서로 화목시키기 위하여 대신 십자가에 돌아가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화목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사순절에 회복해야 할 가장 소중한 주제입니다.
탈무드에 나오는 우화 하나를 나누고 싶습니다.
행복이 어디에 있는가를 깊이 연구한 어린 개가 자기 행복은 꼬리에 있다는결론을 내렸습니다. 강아지는 자기 꼬리를 흔들 때, 사람들의 얼굴에 행복이 깃들이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기 꼬리를 잡기로 결심했습니다. 꼬리만 잡으면 행복할 수 있을테니까요. 그렇지만 개가 자기 꼬리를 잡는다는 것이 쉽습니까 잡힐 듯이 잡힐 듯이 잡히지 않고, 돌고 돌아도 잡히지 않는 것이 꼬리라. 빙글빙글 돌아도 그만큼 빨리 도는 자기 꼬리. 그는 꼬리를 따라 돌고 또 돌다가 결국 제풀에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그 때 늙은 개가 그의 곁을 지나가다가 탈진하여 쓰러져 있는 강아지를 바라보았습니다. 나도 자네처럼 내 꼬리를 잡아 보려고 많이 돌아보았지. 그러다 한 결론에 도달했다네. 내 꼬리를 잡으려고 돌면 돌수록 더 어지럽더라구. 그런데 내가 한 목표를 바라보고 달려가니까 내 꼬리가 나를 따라오더구만.
사실 개의 진정한 행복은 그의 꼬리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인을 따라가면 그곳에 저의 먹이가 있습니다. 주인을 따라가면 그곳에 그의 살 곳이 있습니다. 주인을 따라가면 그곳에 그의 행복이 있습니다. 병이 날 때도 주인을 따라가면 그곳에 낳을 병원이 있습니다. 약이 있어요.
개의 행복은 주인의 뜻에 있습니다. 주인의 뜻을 따르면 행복이 있습니다.
주인이 인도하는 대로 꼬리를 흔들면서 따라가면 그는 죽을 때까지 행복합니다. 무덤에 이르도록 행복할 수 있는 비결! 그것을 개는 알아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행복이 있다고 생각하는 무엇을 잡으려고 달려갑니다. 입에 거품을 물고 달려갑니다. 그런데 죽는 그날까지 달려가도 결론은 뻔합니다. 헛도는 인생이지요.
그런데 만유의 주인이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따라가면 그곳엔 바로 그렇게도 찾아 헤매던 행복이 있습니다. 영생이 있습니다.
오늘 하루를 주님의 인도하심에 맡겨보지 않으시겠습니까
금년 한 해를 주님의 인도하심에 맡겨보지 않으시겠습니까
남을 생애를 주님의 인도하심에 맡겨보지 않으시겠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여호와 하나님과 화목하고 서로간에 화목할 수 있겠습니까
여호와 하나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화목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초점을 여호와 하나님의 화목에 맞춘 인생이 복이 있습니다.
마무리하는 말
어떤 분이 인생을 70으로 잡고 하루 24시간에 맞추어서 계산 해보았습니다.
30세는 오후 1시 25분입니다
35세는 오후 오후2시 59분, 오후 3시가 다 되었어요.
40세는 벌써 오후4시 16분을 넘었습니다.
50이면 오후 7시입니다.
저는 쉰 여섯 살이니 오후 8시가 넘었습니다. 해는 벌써 기울었구요.
60이면 오후 10시니 주무실 시간입니다.
70이면 종이 땡쳤으니 가야할 시간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강한 것이 어머니의 사랑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전쟁이 나니까 그 사랑하는 아기를 업고 나온다는 것이 아기는 간곳없고 베개를 업고 나왔더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인간을 너무 믿으려 하지 맙시다.
이번 사순절에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렇게 주시기 원하시는 생명을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생명이 있으면 그날이 와도 반드시 살아납니다.
이번 사순절에는 여호와 하나님과 함께 유하는 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나의 방에서 세상적인 욕망의 쓰레기, 아집의 쓰레기, 교만의 쓰레기를 다 벗어 버리고 여호와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이번 사순절에는 여호와 하나님과 서로간 화목하는 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여호와 하나님과 화목하고 여호와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목표에 자신을 맞추고 하루하루를 회복해가는 축복을 받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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