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절] 예수님은 누구신가?
본문
성경퀴즈 하나 냅니다. 성경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나무는 무엇일까요 성경에는 포도나무, 감람나무(올리브나무), 무화과나무 등이 자주 나오는데 그 가운데 가장 많이 나오는 나무는 포도나무입니다. 그러면 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동물은 무엇일까요 약대, 즉 낙타가 많이 나오고, 나귀도 자주 나오고, 사자나 여우도 자주 나오고, 염소도 제법 나옵니다만 뭐니 뭐니 해도 성경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동물은 양입니다.
양은 성경에 '어린양'이라는 낱말을 포함해 자그마치 500번 이상이나 나온다고 합니다. 그러면 그 까닭이 있지 않겠습니까 우선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양이라는 가축은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하고 또 친근한 동물입니다. 이스라엘은 일찍이 양을 키우는 유목민이었는데 가나안에 정착해 농사를 짓게 된 다음에도 이스라엘은 양을 키워서 의식주 모두를 해결했기 때문에 너무도 중요한 가축이었던 것이지요.
'의식주' 모두를 양에게서 해결했다는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닙니다. 먼저 이스라엘 사람들은 양가죽이나 양털 실로 옷을 만들었으니 의(依)가 해결된 것이고, 양고기와 양젖이 그들의 일상적인 음식이었으니 식(食)이 해결된 것이고, 마지막으로 양가죽으로는 장막(텐트)을 만들었으니 주(住)까지 해결된 것입니다. 그러니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양이 없는 생활은 상상할 수도 없을 정도로 중요한 존재였던 것이지요.
그런데 양은 이렇게 이스라엘 사람들의 의식주 뿐 아니라 또 다른 이유 때문에 더욱 중요한 존재였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때 가장 중요한 제물로 사용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때 어떤 제물이 사용되었습니까 물론 양 말고도 소나 염소, 비둘기, 고운 밀가루도 사용되었지만 가장 많이 쓰인 희생제물이 바로 양, 그 중에서도 흠 없고 깨끗한 어린양입니다.
어린양 예수
오늘부터 부활절까지 몇 주간 사순절을 보내며 "예수님은 누구신가"라는 주제로 말씀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오늘은 그 첫 번째 시간으로 '어린양 예수'라는 말씀을 나눕니다. 예수님은 누구신가 성경이 말씀하는 예수님은 무엇보다 어린양으로 이 땅에 오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이 '어린양 예수'라는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선 어린양을 제물로 바친 구약의 제사에 대해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구약에 나오는 제사 중에 가장 중요한 제사방법은 '피 제사'입니다. 희생제물로 드리는 짐승의 피를 여호와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 피 제사인데 희생물로 드리는 짐승의 고기와 기름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이 피 제사에서 피가 빠지면 제사가 드려질 수 없었던 것입니다. 성경에서 피 제사가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레위기 17장 11절에 보면 피를 먹는 사람은 무조건 죽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요즈음 건강에 좋다고 사슴피나 다른 짐승의 피를 먹는 사람들이 있다는데 만약 그 사람들이 구약시대에 살았다면 다 죽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피를 먹지 말아야 하는 이유가 바로 그 다음 절에 설명되는데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고 했습니다. 즉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든 생명체의 생명이 피에 있다고 믿었기에 이 피는 먹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께 드려서 우리의 생명을 위해 속죄하는 데 쓰여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제사를 드린 이유는 자신의 죄 때문입니다. 신약시대에 사는 우리는 어떻게 죄 사함을 받느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 죄 사함을 받기 때문에 아주 쉽습니다. 내 죄를 사하시려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됩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아직 오시지 않았던 구약시대에는 죄 사함을 받는 유일한 방법이 양으로 대표되는 흠 없고 깨끗한 제물을 바치고 그 생명이 들어있는 피를 바침으로 내 생명을 대신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쉽게 말해볼까요 죄를 지은 것은 누구입니까 내가 죄를 지은 것이지요 그렇다면 그 죄 때문에 죽어야 할 죄인은 누구입니까 바로 나입니다. 그런데 내가 죽지 않으려니다른 희생제물을 바쳐 대신 죽게 해야 하고, 내 생명 대신 그 희생제물의 생명을 드려 내가 사는 것이 제사라는 말입니다. 내 죄를 대신해 죄 없는 양이 희생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죄 없고 흠 없고 깨끗한 양이 속죄양 되어 피를 흘리고 그 살이 찢어짐으로 내 더러운 죄가 용서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구약의 제사입니다. 이 제사에 흠 없는 어린양이 필요하고 그 피가 흘려져야 하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을 보십시오. '이튿날' 즉 세례 요한이 예수님에 대해 말씀한 바로 그 다음날, 예수님이 자기에게 나아오시는 것을 보고 세례 요한이 뭐라고 말합니까 29절을 보십시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여호와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보고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여호와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불렀습니다. 성경에 예수님에 대해 묘사한 말이 아주 많지만 사실 이보다 예수님을 잘 표현한 말은 없다고 할 정도로 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여호와 하나님의 어린양'이라는 말은 예수님을 너무도 정확하게 묘사한 말입니다.
예수님이 어린양이 되심은…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여호와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한 것은 네 가지의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이 '여호와 하나님의 어린양'이라는 말은 앞서 설명한 대로 예수님이 구약시대에 드려졌던 희생제물인 속죄양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앞에서 희생제물로 양과 그 피가 드려져야 하는 이유가 뭐라고 했습니까 우리의 죄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지은 죄 때문에 우리는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입니다(롬 6:23). 그런데 내가 안 죽으려고, 내 죄를 용서 받기 위해 우리는 흠이 없고 깨끗한 어린양을 잡아 내 죄를 대신 뒤집어씌우고 죽게 했습니다.
그 죄 없는 피를 흘려 내 피를 대신하고 내 죄를 사함 받은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여호와 하나님의 어린양이 되셨다는 말은 바로 예수님이 어린양이 되고 희생제물이 되어 우리 죄를 대신 덮어쓰고 희생하셨다는 뜻이 됩니다. 그런데 구약의 양은 자기 의사와 상관없이 사람이 붙잡아다가 내 대신 죽게 한 것이지만 예수님은 다릅니다. 예수님이 스스로 그렇게 죽으신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스스로 자신의 외아들을 보내어 우리 대신 죄를 뒤집어쓰고 피 흘려 죽게 하신 것입니다. 스스로 말입니다. 왜요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이지요.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를 너무도 사랑하셔서, 예수님이 이 죽을 수밖에 없는 더러운 죄인을 사랑하셔서 기꺼이 스스로 그렇게 희생하고 죽으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살리시고 우리를 더 이상 죽을 죄인이 아닌 의인을 만드시고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를 삼으셨다는 뜻입니다.
둘째, 예수님이 '여호와 하나님의 어린양'이라는 말은 예수님이 유월절의 희생양이 되셨다는 뜻입니다.
구약에서 제사를 드릴 때뿐 아니라 어린양이 또 한 번 남의 죄를 뒤집어쓰고 남 대신 죽은 일이 있었습니다. 바로 유월절 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할 때 여호와 하나님은 바로 왕과 애굽 땅에 열 가지 재앙을 내리십니다. 아홉 번의 무서운 재앙에도 꿈쩍 않던 바로 왕은 열 번째 재앙에서 자신과 모든 애굽 사람의 장자를 쳐서 죽이시는 재앙을 당하자 꼼짝 없이 항복하고 맙니다. 그런데 이 열 번째 재앙이 온 애굽 땅에 내릴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재앙을 피해 갈 수 있었습니다. 그 까닭은 여호와 하나님이 말씀하신대로 흠 없고 일 년 된 수컷 어린양을 잡아 그 피를 집 좌우 문설주와 인방에 발랐기 때문입니다.
'문설주'란 문 양쪽에 세로로 세운 기둥을 뜻하고 '인방'이란 문의 가로로 세운 기둥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은 어린양의 피를 집 문 가로 세로로 모두 바른 것입니다. 그러자 여호와 하나님이 애굽의 모든 장자를 치러 오셨다가 다른 집은 모두 장자들을 죽이셨지만 그 어린양의 피가 발라진 문을 보면 그 집을 넘어가신 것입니다. 그래서 '넘어갔다'는 뜻을 가진 한자인 넘을 유(逾) 자와 넘을 월(越) 자를 써서 '유월절'(Pass Over)이라는 이름이 붙게 된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 예수님도 유월절 어린양이 되셨습니다.
공의의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 죄를 그냥 지나치실 수 없습니다. 우리 죄 때문에 반드시 우리를 벌하고 죽이셨어야만 합니다. 하지만 유월절 어린양 되신 예수님이 그 죄 없으신 피를 흘리심으로 우리를 향한 심판은 우리를 넘어가게 된 것입니다. 어린양 예수님의 보혈의 피는 이런 능력이 있습니다. 모든 죄를 넘어가게 하고, 모든 사망과 죽음이 건너뛰게 하십니다. 모든 불행과 고통이 예수님의 피를 보면 피해가게 됩니다. 이 유월절 어린양의 피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로 왕의 압제에서 벗어나 해방됩니다. 마찬가지로 유월절 어린양 되신 예수님의 보혈로 우리는 마귀 사탄의 압제와 죄의 사슬에서부터 해방되어 참 자유를 누리고 죄의 자녀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로 바뀌게 됩니다.
셋째, 예수님이 '여호와 하나님의 어린양'이라는 말은 예수님이 아사셀이 되셨다는 뜻입니다.
여러분은 '아사셀'이라는 말이 꽤 생소하게 들릴 것입니다. '아사셀'이란 레위기 16장에 나오는 염소 이름입니다. 여기 보면 이스라엘 백성의 제사장인 아론이 염소 두 마리를 취해 성막 문 앞에 둔 후 제비를 뽑습니다. 제비 하나는 여호와 하나님을 위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아사셀을 위한 것인데 여호와를 위한 제비가 뽑힌 염소는 여호와 하나님께 속죄제로 드리고, 아사셀을 위한 제비에 뽑힌 염소는 속죄 염소로 삼아 광야로 몰아내 죽게 했습니다. 그 염소 이름이 바로 '아사셀'입니다.
성경에는 안 나와 있지만 유대인들에게 전해 내려오는 전승에 따르면 이때 대제사장은 광야로 내보낼 그 아사셀 염소의 머리 위에 양손을 얹고 이렇게 고백했다고 합니다. "오, 주여! 주의 백성 이스라엘 집이 잘못을 범하고, 배반함으로 당신 앞에 죄를 지었나이다. 오, 주여! 간절히 비노니 이제 주의 백성이 당신께 지은 모든 허물과 죄악을 이 시간 용서하소서!"라고 말입니다. 아사셀은 이와 같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대신 지고 광야로 쫓겨나 죽은 희생 염소입니다. 따라서 이 아사셀 염소는 인간의 모든 죄를 대신 지고 성문 밖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신 예수님을 뜻하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희생양'이라는 말을 많이 씁니다. 며칠 전 신문을 보니 이런 제목의 기사가 나왔습니다. "아무개, 이번 사건의 희생양이 되다. " 예수님을 안 믿고 성경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까지도 '희생양' 하면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정도가 된 것입니다. 하지만 이 경우는 예수님의 희생과 전혀 다릅니다. 이 사람들은 자기 의사와 전혀 상관없이 희생양이 된 것이지만 예수님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요 죄 없으신 분입니다. 누구를 위해 희생해야 할 어떤 이유도 없는 분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를 위해 희생하고 자기 목숨을 주신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모두가 어쩔 수 없이 희생양이 됩니다. 하지만 우리 주님은 누구도 시키지 않았지만 스스로 희생하셨습니다. 바로 사랑 때문입니다. 이 사랑 때문에 그는 스스로 기꺼이 아사셀의 희생이 되시고 우리 대신 성문 밖으로 쫓겨나 십자가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신 것입니다. 우리 대신 그 수모와 아픔을 당하신 것입니다. 쫓겨날 죄인은 난데, 십자가 지고 가야 할 괴수는 난데 그렇게 대신 죄인이 되고 대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입니다. 다른 어떤 이유도 아닌 바로 사랑 때문입니다.
마지막 네 번째로, 예수님이 '여호와 하나님의 어린양'이 되셨다는 말은 이사야 53장 7절의 도수장으로 끌려가신 어린양이 되셨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사순절 기간에 읽을 성경말씀 중에 가장 대표적인 말씀이 바로 이사야 53장입니다. 이 말씀이 구약에서 예수님을 가장 잘 묘사한 본문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이사야 53장에서 예수님은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으로 나옵니다. 도수장(屠獸場)이란 도축장, 즉 가축을 잡아 죽이는 곳입니다. 그런데 여기 나오는 어린양은 도수장으로 끌려가면서도 아무 말이 없습니다.
미물인 짐승도 자기 죽으러 갈 때는 안다고 합니다. 소나 돼지가 평상시에는 얌전히 있다가 자기가 도수장에 끌려가 죽을 때가 되면 알고 버틴다지요 제가 어렸을 때 집에서 키우던 개가 이러는 것을 보았습니다. 어머니가 개를 개장수에게 팔았습니다. 참 너무하셨지요 그런데 평상시에는 그렇게 얌전하던 개가, 어린 제가 옆구리를 걷어차도 꿈쩍 않던 그 얌전한 녀석이 그 때만은 끝까지 안 끌려가려고 버티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무리 미물인 짐승이라도 죽는 것은 싫은 법입니다. 그래서 버티기도 하고 소리를 지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사야 53장에 나오는 양은 도수장에 죽으러 가면서도 버티기는커녕 어떤 말도 안 합니다. 한 마디 불평조차 없습니다. 이 이사야 53장에 나오는 양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도수장에 끌려가는 양처럼 사람들에게 끌려가 비참한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 분은 여호와 하나님의 뜻에 절대 순종하여 말없이 죽음의 길로 가십니다. 물론 그 분도 완전한 사람이신지라 여느 사람들처럼 죽기가 싫었습니다. 그래서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이 고통의 잔, 이 죽음의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하고 기도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 분은 인간을 넘어서 우리 모든 인간의 죄를 지러 오신 여호와 하나님의 어린양이기에 즉시 이렇게 기도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39). 그리고는 정말 한 마디 말도 없이, 한 마디 불평이나 원망도 없이 묵묵히 도수장으로 끌려가듯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를 오르신 것입니다. 그 분은 내가 죽음으로 남을 살리고, 내가 희생함으로 남을 섬긴 분이었던 것입니다.
어린양의 사랑의 마음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까지 왜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여호와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불렀는지, 그리고 왜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어린양이 되셨는지 설명했습니다. 사실 우리는 교회를 다니면서 예수님에 대해 수도 없이 들어왔고, 그래서 예수님이 나를 대신해 희생당하고 십자가에 달려 피 흘려 죽으셨다는 얘기도 너무나 많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를 들으며 어쩌면 이런 생각을 하셨을 지도 모릅니다. "저건 너무나도 뻔한 얘기 아니냐 얼마나 많이 들어본 이야기인데… 저런 말은 교회 처음 나온 사람이나 들을 얘기지 나처럼 교회 오래 다닌 사람이 뭐 하러 또 들어야 하나 목사님은 왜 저런 식상한 얘기를 또 하시나"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예수님의 희생과 사랑은 들어도 들어도 늘 마음이 뜨거워지고 감동이 되는 이야기여야 합니다. 너무 많이 들었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고, 그래서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이야기지만 우리는 듣고 또 듣고 들을 때마다 가슴이 저리도록 감동하고 뼈저리게 마음속에 새겨야 합니다. 너무 들어서 감동이 없다고요 그렇다면 내 가슴이 식었기 때문입니다. 하도 들어서 식상하다고요 그것은 내 신앙이 습관화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번에 세례입교 문답을 하면서 눈물 흘리는 분이 있었습니다. 세례와 입교를 받는 것이 감격이 되어서 그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구원과 은혜를 생각하니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나는 것입니다. 저는 그 모습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나도 저런 때가 있었는데... 이제 교회 오래 다니고 목회 하면서 신앙생활에는 익숙해지고 교회생활도 노련해지고 기도도 제법 유창하게 하고 성경지식은 늘어났지만 저런 순수한 마음은 많이 식었구나" 하고 말입니다. 저도 처음 믿을 때, 처음 세례 받을 때 십자가만 바라보면 눈물이 났습니다.
예수님의 사랑과 은혜만 생각하면 가슴이 뜨거웠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모습이 정말 많이 사라졌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지금도 예수님이 어린양이 되어 우리 위해 죽으셨다, 피 흘리셨다는 말을 들으며 "나도 잘 알아요. 한두 번 들은 얘기도 아니고 너무 뻔한 얘기인데" 하지는 않는지, "나도 이제 신앙생활 오래 해서 알 건 다 안다"고 하지는 않는지, 그런데 알 건 다 알고 너무도 익숙한데 정작 내 마음에 십자가에 대한 감격이, 예수님의 사랑에 대한 눈물이 메마르고 사라진 것은 아닌지 말입니다.
예수님이 왜 어린양이 되셨습니까 왜 기꺼이 희생제물 되어 우리를 위해 살이 찢기시고 피를 흘리셨습니까 왜 도수장에 끌려가는 짐승처럼, 광야로 외로이 쫓겨나는 아사셀 염소처럼 외로이 십자가 지고 골고다 언덕에 오르셨습니까 그것은 오로지 사랑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자신의 생명까지도 기꺼이 희생한 위대한 사랑이었습니다. 우리는 너무 잘 안다고, 식상하다고 하기 전에 '여호와 하나님의 어린양' 되어 자기 생명을 우리 위해 내던진 그 분의 사랑을 늘 가슴속에 새기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 사랑을 생각할 때마다, 그 고귀한 희생에 대해 들을 때마다, 십자가를 바라볼 때마다 내 마음이 뜨겁고 감격해야 합니다. 이 뜨거운 감격이 없으면 우리는 믿음이 이미 식은 사람입니다.
양은 성경에 '어린양'이라는 낱말을 포함해 자그마치 500번 이상이나 나온다고 합니다. 그러면 그 까닭이 있지 않겠습니까 우선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양이라는 가축은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하고 또 친근한 동물입니다. 이스라엘은 일찍이 양을 키우는 유목민이었는데 가나안에 정착해 농사를 짓게 된 다음에도 이스라엘은 양을 키워서 의식주 모두를 해결했기 때문에 너무도 중요한 가축이었던 것이지요.
'의식주' 모두를 양에게서 해결했다는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닙니다. 먼저 이스라엘 사람들은 양가죽이나 양털 실로 옷을 만들었으니 의(依)가 해결된 것이고, 양고기와 양젖이 그들의 일상적인 음식이었으니 식(食)이 해결된 것이고, 마지막으로 양가죽으로는 장막(텐트)을 만들었으니 주(住)까지 해결된 것입니다. 그러니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양이 없는 생활은 상상할 수도 없을 정도로 중요한 존재였던 것이지요.
그런데 양은 이렇게 이스라엘 사람들의 의식주 뿐 아니라 또 다른 이유 때문에 더욱 중요한 존재였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때 가장 중요한 제물로 사용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때 어떤 제물이 사용되었습니까 물론 양 말고도 소나 염소, 비둘기, 고운 밀가루도 사용되었지만 가장 많이 쓰인 희생제물이 바로 양, 그 중에서도 흠 없고 깨끗한 어린양입니다.
어린양 예수
오늘부터 부활절까지 몇 주간 사순절을 보내며 "예수님은 누구신가"라는 주제로 말씀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오늘은 그 첫 번째 시간으로 '어린양 예수'라는 말씀을 나눕니다. 예수님은 누구신가 성경이 말씀하는 예수님은 무엇보다 어린양으로 이 땅에 오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이 '어린양 예수'라는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선 어린양을 제물로 바친 구약의 제사에 대해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구약에 나오는 제사 중에 가장 중요한 제사방법은 '피 제사'입니다. 희생제물로 드리는 짐승의 피를 여호와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 피 제사인데 희생물로 드리는 짐승의 고기와 기름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이 피 제사에서 피가 빠지면 제사가 드려질 수 없었던 것입니다. 성경에서 피 제사가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레위기 17장 11절에 보면 피를 먹는 사람은 무조건 죽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요즈음 건강에 좋다고 사슴피나 다른 짐승의 피를 먹는 사람들이 있다는데 만약 그 사람들이 구약시대에 살았다면 다 죽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피를 먹지 말아야 하는 이유가 바로 그 다음 절에 설명되는데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고 했습니다. 즉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든 생명체의 생명이 피에 있다고 믿었기에 이 피는 먹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께 드려서 우리의 생명을 위해 속죄하는 데 쓰여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제사를 드린 이유는 자신의 죄 때문입니다. 신약시대에 사는 우리는 어떻게 죄 사함을 받느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 죄 사함을 받기 때문에 아주 쉽습니다. 내 죄를 사하시려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됩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아직 오시지 않았던 구약시대에는 죄 사함을 받는 유일한 방법이 양으로 대표되는 흠 없고 깨끗한 제물을 바치고 그 생명이 들어있는 피를 바침으로 내 생명을 대신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쉽게 말해볼까요 죄를 지은 것은 누구입니까 내가 죄를 지은 것이지요 그렇다면 그 죄 때문에 죽어야 할 죄인은 누구입니까 바로 나입니다. 그런데 내가 죽지 않으려니다른 희생제물을 바쳐 대신 죽게 해야 하고, 내 생명 대신 그 희생제물의 생명을 드려 내가 사는 것이 제사라는 말입니다. 내 죄를 대신해 죄 없는 양이 희생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죄 없고 흠 없고 깨끗한 양이 속죄양 되어 피를 흘리고 그 살이 찢어짐으로 내 더러운 죄가 용서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구약의 제사입니다. 이 제사에 흠 없는 어린양이 필요하고 그 피가 흘려져야 하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을 보십시오. '이튿날' 즉 세례 요한이 예수님에 대해 말씀한 바로 그 다음날, 예수님이 자기에게 나아오시는 것을 보고 세례 요한이 뭐라고 말합니까 29절을 보십시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여호와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보고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여호와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불렀습니다. 성경에 예수님에 대해 묘사한 말이 아주 많지만 사실 이보다 예수님을 잘 표현한 말은 없다고 할 정도로 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여호와 하나님의 어린양'이라는 말은 예수님을 너무도 정확하게 묘사한 말입니다.
예수님이 어린양이 되심은…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여호와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한 것은 네 가지의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이 '여호와 하나님의 어린양'이라는 말은 앞서 설명한 대로 예수님이 구약시대에 드려졌던 희생제물인 속죄양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앞에서 희생제물로 양과 그 피가 드려져야 하는 이유가 뭐라고 했습니까 우리의 죄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지은 죄 때문에 우리는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입니다(롬 6:23). 그런데 내가 안 죽으려고, 내 죄를 용서 받기 위해 우리는 흠이 없고 깨끗한 어린양을 잡아 내 죄를 대신 뒤집어씌우고 죽게 했습니다.
그 죄 없는 피를 흘려 내 피를 대신하고 내 죄를 사함 받은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여호와 하나님의 어린양이 되셨다는 말은 바로 예수님이 어린양이 되고 희생제물이 되어 우리 죄를 대신 덮어쓰고 희생하셨다는 뜻이 됩니다. 그런데 구약의 양은 자기 의사와 상관없이 사람이 붙잡아다가 내 대신 죽게 한 것이지만 예수님은 다릅니다. 예수님이 스스로 그렇게 죽으신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스스로 자신의 외아들을 보내어 우리 대신 죄를 뒤집어쓰고 피 흘려 죽게 하신 것입니다. 스스로 말입니다. 왜요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이지요.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를 너무도 사랑하셔서, 예수님이 이 죽을 수밖에 없는 더러운 죄인을 사랑하셔서 기꺼이 스스로 그렇게 희생하고 죽으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살리시고 우리를 더 이상 죽을 죄인이 아닌 의인을 만드시고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를 삼으셨다는 뜻입니다.
둘째, 예수님이 '여호와 하나님의 어린양'이라는 말은 예수님이 유월절의 희생양이 되셨다는 뜻입니다.
구약에서 제사를 드릴 때뿐 아니라 어린양이 또 한 번 남의 죄를 뒤집어쓰고 남 대신 죽은 일이 있었습니다. 바로 유월절 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할 때 여호와 하나님은 바로 왕과 애굽 땅에 열 가지 재앙을 내리십니다. 아홉 번의 무서운 재앙에도 꿈쩍 않던 바로 왕은 열 번째 재앙에서 자신과 모든 애굽 사람의 장자를 쳐서 죽이시는 재앙을 당하자 꼼짝 없이 항복하고 맙니다. 그런데 이 열 번째 재앙이 온 애굽 땅에 내릴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재앙을 피해 갈 수 있었습니다. 그 까닭은 여호와 하나님이 말씀하신대로 흠 없고 일 년 된 수컷 어린양을 잡아 그 피를 집 좌우 문설주와 인방에 발랐기 때문입니다.
'문설주'란 문 양쪽에 세로로 세운 기둥을 뜻하고 '인방'이란 문의 가로로 세운 기둥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은 어린양의 피를 집 문 가로 세로로 모두 바른 것입니다. 그러자 여호와 하나님이 애굽의 모든 장자를 치러 오셨다가 다른 집은 모두 장자들을 죽이셨지만 그 어린양의 피가 발라진 문을 보면 그 집을 넘어가신 것입니다. 그래서 '넘어갔다'는 뜻을 가진 한자인 넘을 유(逾) 자와 넘을 월(越) 자를 써서 '유월절'(Pass Over)이라는 이름이 붙게 된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 예수님도 유월절 어린양이 되셨습니다.
공의의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 죄를 그냥 지나치실 수 없습니다. 우리 죄 때문에 반드시 우리를 벌하고 죽이셨어야만 합니다. 하지만 유월절 어린양 되신 예수님이 그 죄 없으신 피를 흘리심으로 우리를 향한 심판은 우리를 넘어가게 된 것입니다. 어린양 예수님의 보혈의 피는 이런 능력이 있습니다. 모든 죄를 넘어가게 하고, 모든 사망과 죽음이 건너뛰게 하십니다. 모든 불행과 고통이 예수님의 피를 보면 피해가게 됩니다. 이 유월절 어린양의 피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로 왕의 압제에서 벗어나 해방됩니다. 마찬가지로 유월절 어린양 되신 예수님의 보혈로 우리는 마귀 사탄의 압제와 죄의 사슬에서부터 해방되어 참 자유를 누리고 죄의 자녀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로 바뀌게 됩니다.
셋째, 예수님이 '여호와 하나님의 어린양'이라는 말은 예수님이 아사셀이 되셨다는 뜻입니다.
여러분은 '아사셀'이라는 말이 꽤 생소하게 들릴 것입니다. '아사셀'이란 레위기 16장에 나오는 염소 이름입니다. 여기 보면 이스라엘 백성의 제사장인 아론이 염소 두 마리를 취해 성막 문 앞에 둔 후 제비를 뽑습니다. 제비 하나는 여호와 하나님을 위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아사셀을 위한 것인데 여호와를 위한 제비가 뽑힌 염소는 여호와 하나님께 속죄제로 드리고, 아사셀을 위한 제비에 뽑힌 염소는 속죄 염소로 삼아 광야로 몰아내 죽게 했습니다. 그 염소 이름이 바로 '아사셀'입니다.
성경에는 안 나와 있지만 유대인들에게 전해 내려오는 전승에 따르면 이때 대제사장은 광야로 내보낼 그 아사셀 염소의 머리 위에 양손을 얹고 이렇게 고백했다고 합니다. "오, 주여! 주의 백성 이스라엘 집이 잘못을 범하고, 배반함으로 당신 앞에 죄를 지었나이다. 오, 주여! 간절히 비노니 이제 주의 백성이 당신께 지은 모든 허물과 죄악을 이 시간 용서하소서!"라고 말입니다. 아사셀은 이와 같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대신 지고 광야로 쫓겨나 죽은 희생 염소입니다. 따라서 이 아사셀 염소는 인간의 모든 죄를 대신 지고 성문 밖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신 예수님을 뜻하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희생양'이라는 말을 많이 씁니다. 며칠 전 신문을 보니 이런 제목의 기사가 나왔습니다. "아무개, 이번 사건의 희생양이 되다. " 예수님을 안 믿고 성경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까지도 '희생양' 하면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정도가 된 것입니다. 하지만 이 경우는 예수님의 희생과 전혀 다릅니다. 이 사람들은 자기 의사와 전혀 상관없이 희생양이 된 것이지만 예수님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요 죄 없으신 분입니다. 누구를 위해 희생해야 할 어떤 이유도 없는 분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를 위해 희생하고 자기 목숨을 주신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모두가 어쩔 수 없이 희생양이 됩니다. 하지만 우리 주님은 누구도 시키지 않았지만 스스로 희생하셨습니다. 바로 사랑 때문입니다. 이 사랑 때문에 그는 스스로 기꺼이 아사셀의 희생이 되시고 우리 대신 성문 밖으로 쫓겨나 십자가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신 것입니다. 우리 대신 그 수모와 아픔을 당하신 것입니다. 쫓겨날 죄인은 난데, 십자가 지고 가야 할 괴수는 난데 그렇게 대신 죄인이 되고 대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입니다. 다른 어떤 이유도 아닌 바로 사랑 때문입니다.
마지막 네 번째로, 예수님이 '여호와 하나님의 어린양'이 되셨다는 말은 이사야 53장 7절의 도수장으로 끌려가신 어린양이 되셨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사순절 기간에 읽을 성경말씀 중에 가장 대표적인 말씀이 바로 이사야 53장입니다. 이 말씀이 구약에서 예수님을 가장 잘 묘사한 본문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이사야 53장에서 예수님은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으로 나옵니다. 도수장(屠獸場)이란 도축장, 즉 가축을 잡아 죽이는 곳입니다. 그런데 여기 나오는 어린양은 도수장으로 끌려가면서도 아무 말이 없습니다.
미물인 짐승도 자기 죽으러 갈 때는 안다고 합니다. 소나 돼지가 평상시에는 얌전히 있다가 자기가 도수장에 끌려가 죽을 때가 되면 알고 버틴다지요 제가 어렸을 때 집에서 키우던 개가 이러는 것을 보았습니다. 어머니가 개를 개장수에게 팔았습니다. 참 너무하셨지요 그런데 평상시에는 그렇게 얌전하던 개가, 어린 제가 옆구리를 걷어차도 꿈쩍 않던 그 얌전한 녀석이 그 때만은 끝까지 안 끌려가려고 버티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무리 미물인 짐승이라도 죽는 것은 싫은 법입니다. 그래서 버티기도 하고 소리를 지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사야 53장에 나오는 양은 도수장에 죽으러 가면서도 버티기는커녕 어떤 말도 안 합니다. 한 마디 불평조차 없습니다. 이 이사야 53장에 나오는 양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도수장에 끌려가는 양처럼 사람들에게 끌려가 비참한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 분은 여호와 하나님의 뜻에 절대 순종하여 말없이 죽음의 길로 가십니다. 물론 그 분도 완전한 사람이신지라 여느 사람들처럼 죽기가 싫었습니다. 그래서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이 고통의 잔, 이 죽음의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하고 기도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 분은 인간을 넘어서 우리 모든 인간의 죄를 지러 오신 여호와 하나님의 어린양이기에 즉시 이렇게 기도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39). 그리고는 정말 한 마디 말도 없이, 한 마디 불평이나 원망도 없이 묵묵히 도수장으로 끌려가듯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를 오르신 것입니다. 그 분은 내가 죽음으로 남을 살리고, 내가 희생함으로 남을 섬긴 분이었던 것입니다.
어린양의 사랑의 마음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까지 왜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여호와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불렀는지, 그리고 왜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어린양이 되셨는지 설명했습니다. 사실 우리는 교회를 다니면서 예수님에 대해 수도 없이 들어왔고, 그래서 예수님이 나를 대신해 희생당하고 십자가에 달려 피 흘려 죽으셨다는 얘기도 너무나 많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를 들으며 어쩌면 이런 생각을 하셨을 지도 모릅니다. "저건 너무나도 뻔한 얘기 아니냐 얼마나 많이 들어본 이야기인데… 저런 말은 교회 처음 나온 사람이나 들을 얘기지 나처럼 교회 오래 다닌 사람이 뭐 하러 또 들어야 하나 목사님은 왜 저런 식상한 얘기를 또 하시나"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예수님의 희생과 사랑은 들어도 들어도 늘 마음이 뜨거워지고 감동이 되는 이야기여야 합니다. 너무 많이 들었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고, 그래서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이야기지만 우리는 듣고 또 듣고 들을 때마다 가슴이 저리도록 감동하고 뼈저리게 마음속에 새겨야 합니다. 너무 들어서 감동이 없다고요 그렇다면 내 가슴이 식었기 때문입니다. 하도 들어서 식상하다고요 그것은 내 신앙이 습관화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번에 세례입교 문답을 하면서 눈물 흘리는 분이 있었습니다. 세례와 입교를 받는 것이 감격이 되어서 그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구원과 은혜를 생각하니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나는 것입니다. 저는 그 모습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나도 저런 때가 있었는데... 이제 교회 오래 다니고 목회 하면서 신앙생활에는 익숙해지고 교회생활도 노련해지고 기도도 제법 유창하게 하고 성경지식은 늘어났지만 저런 순수한 마음은 많이 식었구나" 하고 말입니다. 저도 처음 믿을 때, 처음 세례 받을 때 십자가만 바라보면 눈물이 났습니다.
예수님의 사랑과 은혜만 생각하면 가슴이 뜨거웠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모습이 정말 많이 사라졌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지금도 예수님이 어린양이 되어 우리 위해 죽으셨다, 피 흘리셨다는 말을 들으며 "나도 잘 알아요. 한두 번 들은 얘기도 아니고 너무 뻔한 얘기인데" 하지는 않는지, "나도 이제 신앙생활 오래 해서 알 건 다 안다"고 하지는 않는지, 그런데 알 건 다 알고 너무도 익숙한데 정작 내 마음에 십자가에 대한 감격이, 예수님의 사랑에 대한 눈물이 메마르고 사라진 것은 아닌지 말입니다.
예수님이 왜 어린양이 되셨습니까 왜 기꺼이 희생제물 되어 우리를 위해 살이 찢기시고 피를 흘리셨습니까 왜 도수장에 끌려가는 짐승처럼, 광야로 외로이 쫓겨나는 아사셀 염소처럼 외로이 십자가 지고 골고다 언덕에 오르셨습니까 그것은 오로지 사랑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자신의 생명까지도 기꺼이 희생한 위대한 사랑이었습니다. 우리는 너무 잘 안다고, 식상하다고 하기 전에 '여호와 하나님의 어린양' 되어 자기 생명을 우리 위해 내던진 그 분의 사랑을 늘 가슴속에 새기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 사랑을 생각할 때마다, 그 고귀한 희생에 대해 들을 때마다, 십자가를 바라볼 때마다 내 마음이 뜨겁고 감격해야 합니다. 이 뜨거운 감격이 없으면 우리는 믿음이 이미 식은 사람입니다.
댓글목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