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절] 우리 시대의 죄
본문
아모스는 주전 800-750년경 예루살렘에서 남쪽으로 18킬로미터쯤 떨어진 마을 드고아 에 살았던 선지자입니다. 그는 아모스는 이사야처럼 왕족 출신도 아니고 예레미야처럼 제사 장 집안 출신도 아니었습니다. 아모스 자신의 말에 따르면 그는 양을 치고 뽕나무를 가꾸어 먹고살던 사람이었습니다(7:14-15; 1:1 참조).
여호와 하나님은 이러한 환경 가운데 살던 아모스를 불러내셔서 북 왕국 이스라엘로 보내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맡기신 임무 때문에 아모스는 정치 적으로 불안정한 수도 사마리아와 북왕국의 남쪽 경계선에 있는 왕립 성소 벧엘로 갔던 것 입니다. 아모스는 닥쳐 올 심판에 대해서만 말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심판 받지 않을 수 없는 까 닭도 함께 밝힙니다.
경제가 부흥하면서 부유한 상류층은 점점 더 부패의 늪에 빠지게 되었 습니다. 지주들은 날로 더 많은 재산을 모은 반면, 시골 사람들은 높은 세금 부담으로 가난 해지고 예속 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나 이는 여호와 하나님이 율법을 통해 자기 백성에게 하셨 던 지시에 분명히 어긋나는 것이었습니다. 아모스는 가난하고 힘이 없는 사람들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상류층 사람들을 매섭게 그 책임을 물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이웃 민족들에게도 사정없이 그들의 죄를 따집니다. 당시의 예배에 대해서도 아모스는 날카롭게 비판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공의의 여호와 하나님을 전하는 선 지자가 되었고 정의의 선지자라는 별명을 얻습니다. 헨리 나우웬은 "사역자들에게 가장 위험한 두 가지 태도는 죄의식과 구원열망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지나친 죄의식을 키워주는 것은 사역자들에게 위험합니다. 그리고 지나친 종말 에 대한 의식을 심어주는 것도 위험합니다. 그러나 요즘의 그리스도인들은 죄의식이 너무나 희박합니다. 종말에 대한 의식이 너무나 없습니다.
죄를 죄로 알지 못하고 자신의 감정에 자신의 삶을 맡기고 살 때가 너무 많습니다. 이런 때에 아모스를 통하여 주시는 우리 시대 의 죄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우리 시대와 그 시대가 얼마나 비슷한지 모릅니다. 그리고 사 순절 기간을 맞이하여 우리의 어떤 죄가 고백되어야 할지 묵상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칼로 형제를 쫓아갑니다.
당시의 사람들은 칼로 형제를 쫓아가는 삶을 살았고 이것이 당시의 죄라고 하였습니다.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여호와 하나님의 진노를 삽니다. 산상보훈에는 형제에 대한 권면이 많이 있습니다.
첫째는 형제에게 노하는 자는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에게 나가 고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형제에게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던지운다고 하였습니다.
둘째는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형제에게 원망 들을만한 일이 생각나면 먼저 형제와 화목한 후에 예물을 드리라고 합니다.
셋째는 형제의 눈에 있는 티를 빼라고 하기 전에 먼저 자신의 눈속의 티를 빼라고 권합니다.
요한일서에도 형제에 대한 권면이 많습니다.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다"고 하였습니다.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형제들 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습니다.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한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고 하였 습니다.
동생을 죽인 것은 가인의 실수입니다. 그러나 동생을 죽인 다음 죽인 것을 여호와 하나님께 부 인하고 동생을 마음에서 상실한 것은 더 큰 결정적 실수입니다. 가인은 동생을 죽인 후 형 제를 상실했습니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라는 말이 바로 그 뜻입니다. 형은 동생을 지키는 자입니다. 아담의 범죄로 죄가 인간에게 들어왔고 가인의 죄로 형제 상실의 죄가 인간에게 들어왔습니다. 그후의 모든 후손들은 형제상실의 후손이 되었습니다.
둘째, 긍휼을 버립니다.
긍휼 없는 죄는 긍휼 없는 형벌을 받습니다. 예수님은 산상보훈에서 긍휼이 여기는 자는 긍휼이 여김을 받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제사 보다 긍휼을 원하십니다(마 9:13). 우리 여호와 하나님도 긍휼히 여기시는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롬 9:16). 긍휼은 여호와 하나님의 별명이며 긍휼은 여호와 하나님의 속내입니다. 그러므로 긍휼을 버리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을 버리는 것입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긍휼 때문에 살면서, 긍휼이 없으면 못살면서도 긍휼을 베풀지 못 하고 삽니다.
차머즈라는 분의 "정오의 강풍"이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그 내용은 대강 이런 얘기입니다. 건축 기사인 피어홈은 도처에 많은 다리와 터널을 건설했습니다. 이 때문에 큰 명성을 얻습니다. 얼마 후에 그는 질병과 실패로 부인과 어린 딸을 데리고 낙향하여 삽니다.
피어홈의 이웃에 한 몰인정한 노인이 있었습니다. 이 노인은 너무 사나운 개를 길러 위 험하고 늘 위협을 느꼈습니다. 피어홈은 그 개가 너무 사납다고 여러 번 경고하였습니다. 그 러나 그 때마다 오히려 번번히 피오홈은 모욕만 당했습니다. 그러던 중 불행은 갑자기 닥쳐 왔습니다. 그 개가 피어홈의 어린 딸을 물어 죽인 것입니다. 동네 사람들은 일제히 개 주인 인 이 노인을 비난했습니다. 파종기가 되었지만 그 노인에게 한 톨의 곡식 종자를 주거나 팔지 않았습니다. 그 노인이 거리에 나오면 사람들은 냉소하였고 그 노인은 맨 밭을 간 후 에 씨를 달라고 애걸하였습니다. 그 노인의 모습을 피어홈은 보았습니다.
그는 그날 아침 일찍 광에서 자신이 쓸 씨앗 반되를 가지고 나와서 열심히 노인의 밭에 씨를 뿌려주었습니다. 얼마쯤 지나자 이웃 노인의 밭은 파릇파릇한 반면 피어홈의 밭은 그 일부가 아직도 빈 땅으로 남아 있었다. 긍휼은 원수의 밭에 좋은 씨를 뿌리도록 요구합니다. 그로 말미암아 비록 우리 자신의 밭 일부가 맨 땅으로 남겨집니다. 긍휼을 베푸는 것은 베푼 후에 내가 손해보는 일입니다.
셋째, 노가 항상 맹렬합니다.
당시의 사람들은 노가 맹렬하고 불붙듯 해서 삭지 않았습니다. 노를 발해야 할 때와 발 하지 않을 때를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성경에는 여호와 하나님도 노늘 발하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노를 발하시는 경우는
첫째는 순종치 않을 경우입니다. 모세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치 않고 애급으로 가지 못하겠다고 했을 때에 여호와께서 모세를 향하여 노를 발하셨습 니다(출 4:14).
둘째는 다른 신을 섬기며 우상을 만들 때입니다. "다른 신을 만들며 우상을 부어 만들어 나의 노를 격발하고"(왕상 14:9)라고 여호와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노를 발하는 경우는 언제입니까 아무 때나입니다. 사람들이 아무 때나 노를 발 하는 것은 자신을 통제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잠언 22:24은 "노를 품는 자와 사귀 지 말며 울분한 자와 동행하지 말지니"라고 합니다. 노를 품는 자와 왜 사귀지 말라고 하십 니까
노를 품는 자는 미친 자입니다. 그래서 영어에서는 노하다는 말을 매드(mad)라는 단 어를 많이 쓰는데 이 말의 원래 뜻은 미쳤다는 말입니다.
넷째, 분을 끝없이 품습니다.
분은 노보다 더 심한 심리적 상태입니다. 애가서 4:11은 "여호와께서 분을 발하시며 맹 렬한 노를 쏟으심이여 시온에 불을 피우사 그 지대를 사르셨도다"고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노와 분이 함께 나타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상당히 진노하시는 장면입니다. 여호와 하나님도 분을 발하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분은 정말 무섭습니다.
성경에는 '여호와 하나님의 노'라는 단어는 많이 나옵니다. 특히 다른 신을 섬기고 우상을 만들 때에 여호와 하나님은 노를 발하십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의 분'이란 단어는 상대적으로 적게 나오고 거의 없습니다. 오히려 시편 78:38에는 "그 진노를 여러번 돌이키시며 그 분을 다 발하지 아니하셨으니"라고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분 내는 것을 싫어하십 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사람을 죽일 만큼 화를 내지 않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사람을 멸망시킬만큼 분을 내 지 않으십니다. 또 여호와 하나님은 분을 발하지 않으려고 하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사람에 대한 근본 의도는 살리는 것이지 죽이는 것이 아닙니다. 고린도전서 15:45에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 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라고 합니다. 예수님도 이 땅 에 오셔서 살려주는 영이 되셨습니다. 생명을 공급하는 영이라는 뜻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사람 에 대한 분노는 살리려는 영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분은 사람을 사랑하는 영입니다. 현대인은 분을 풀지 아니하고 분을 품고 삽니다. 사람의 분노는 살인을 불러일으킵니다. 사람들은 분을 내면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자신을 죽이기도 합니다.
인간의 첫 살인도 분 때문이었습니다. 분노에 대한 표현이 민족에 따라 다양합니다. 서부 아프리카의 멘데 족은 '베인 마음'이 라고 표현합니다. 미스키토 인디언은 '쪼개는 마음'이라고 표현합니다. 멕시코의 치이파스에 초트칠 족은 '달구어진 마음'이라고 표현합니다. 과테말라 국경 근처의 코놉 족은 '붉은 영 혼'이라고 합니다. 서부 아프리카의 맛시 족은 '썩는 마음'이라고 합니다. 이런 표현들은 하 나같이 파괴적이고 상처를 주는 것들입니다.
맥스 루카도는 그의 책 "여호와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다"에서 분노는 영혼의 소음, 보이지 않는 마음의 자극물, 끊임없는 고요의 침해자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잠언 15:18에 "분을 쉽게 내는 자는 다툼을 일으켜도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시비를 그치게 하느니라"라고 권고하 며 바울은 에베소서 4:26에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라 고 권합니다. 분을 내는 것은 자신을 상실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잃지 않으려면 분을 그치 고 노를 버려야 합니다(시 37:8).
죄의 문제는 아버지께로서 분리된 것입니다. 우리의 생명의 근원으로부터 단절된 것을 의미합니다.
인간 사회는 개선할 수 있지만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재창조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 의 내면의 세계에서 경보가 울릴 때면 우리 자신에게 이 세 가지 질문을 해 보아야 합니다.
첫째, 내 삶에서 고백하지 않은 죄가 있는가
둘째, 내 속에 해결되지 않은 어떤 갈등이 있는가
셋째, 내 마음속에 사라지지 않는 근심이 있는가
이 끊임없는 질문에서 우리 시대의 죄를 발견하시고 우리의 모든 죄짐을 다 주께 맡기고 고난의 주님을 좇아 십자가를 향하는 사순절의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이러한 환경 가운데 살던 아모스를 불러내셔서 북 왕국 이스라엘로 보내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맡기신 임무 때문에 아모스는 정치 적으로 불안정한 수도 사마리아와 북왕국의 남쪽 경계선에 있는 왕립 성소 벧엘로 갔던 것 입니다. 아모스는 닥쳐 올 심판에 대해서만 말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심판 받지 않을 수 없는 까 닭도 함께 밝힙니다.
경제가 부흥하면서 부유한 상류층은 점점 더 부패의 늪에 빠지게 되었 습니다. 지주들은 날로 더 많은 재산을 모은 반면, 시골 사람들은 높은 세금 부담으로 가난 해지고 예속 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나 이는 여호와 하나님이 율법을 통해 자기 백성에게 하셨 던 지시에 분명히 어긋나는 것이었습니다. 아모스는 가난하고 힘이 없는 사람들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상류층 사람들을 매섭게 그 책임을 물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이웃 민족들에게도 사정없이 그들의 죄를 따집니다. 당시의 예배에 대해서도 아모스는 날카롭게 비판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공의의 여호와 하나님을 전하는 선 지자가 되었고 정의의 선지자라는 별명을 얻습니다. 헨리 나우웬은 "사역자들에게 가장 위험한 두 가지 태도는 죄의식과 구원열망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지나친 죄의식을 키워주는 것은 사역자들에게 위험합니다. 그리고 지나친 종말 에 대한 의식을 심어주는 것도 위험합니다. 그러나 요즘의 그리스도인들은 죄의식이 너무나 희박합니다. 종말에 대한 의식이 너무나 없습니다.
죄를 죄로 알지 못하고 자신의 감정에 자신의 삶을 맡기고 살 때가 너무 많습니다. 이런 때에 아모스를 통하여 주시는 우리 시대 의 죄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우리 시대와 그 시대가 얼마나 비슷한지 모릅니다. 그리고 사 순절 기간을 맞이하여 우리의 어떤 죄가 고백되어야 할지 묵상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칼로 형제를 쫓아갑니다.
당시의 사람들은 칼로 형제를 쫓아가는 삶을 살았고 이것이 당시의 죄라고 하였습니다.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여호와 하나님의 진노를 삽니다. 산상보훈에는 형제에 대한 권면이 많이 있습니다.
첫째는 형제에게 노하는 자는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에게 나가 고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형제에게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던지운다고 하였습니다.
둘째는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형제에게 원망 들을만한 일이 생각나면 먼저 형제와 화목한 후에 예물을 드리라고 합니다.
셋째는 형제의 눈에 있는 티를 빼라고 하기 전에 먼저 자신의 눈속의 티를 빼라고 권합니다.
요한일서에도 형제에 대한 권면이 많습니다.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다"고 하였습니다.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형제들 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습니다.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한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고 하였 습니다.
동생을 죽인 것은 가인의 실수입니다. 그러나 동생을 죽인 다음 죽인 것을 여호와 하나님께 부 인하고 동생을 마음에서 상실한 것은 더 큰 결정적 실수입니다. 가인은 동생을 죽인 후 형 제를 상실했습니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라는 말이 바로 그 뜻입니다. 형은 동생을 지키는 자입니다. 아담의 범죄로 죄가 인간에게 들어왔고 가인의 죄로 형제 상실의 죄가 인간에게 들어왔습니다. 그후의 모든 후손들은 형제상실의 후손이 되었습니다.
둘째, 긍휼을 버립니다.
긍휼 없는 죄는 긍휼 없는 형벌을 받습니다. 예수님은 산상보훈에서 긍휼이 여기는 자는 긍휼이 여김을 받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제사 보다 긍휼을 원하십니다(마 9:13). 우리 여호와 하나님도 긍휼히 여기시는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롬 9:16). 긍휼은 여호와 하나님의 별명이며 긍휼은 여호와 하나님의 속내입니다. 그러므로 긍휼을 버리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을 버리는 것입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긍휼 때문에 살면서, 긍휼이 없으면 못살면서도 긍휼을 베풀지 못 하고 삽니다.
차머즈라는 분의 "정오의 강풍"이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그 내용은 대강 이런 얘기입니다. 건축 기사인 피어홈은 도처에 많은 다리와 터널을 건설했습니다. 이 때문에 큰 명성을 얻습니다. 얼마 후에 그는 질병과 실패로 부인과 어린 딸을 데리고 낙향하여 삽니다.
피어홈의 이웃에 한 몰인정한 노인이 있었습니다. 이 노인은 너무 사나운 개를 길러 위 험하고 늘 위협을 느꼈습니다. 피어홈은 그 개가 너무 사납다고 여러 번 경고하였습니다. 그 러나 그 때마다 오히려 번번히 피오홈은 모욕만 당했습니다. 그러던 중 불행은 갑자기 닥쳐 왔습니다. 그 개가 피어홈의 어린 딸을 물어 죽인 것입니다. 동네 사람들은 일제히 개 주인 인 이 노인을 비난했습니다. 파종기가 되었지만 그 노인에게 한 톨의 곡식 종자를 주거나 팔지 않았습니다. 그 노인이 거리에 나오면 사람들은 냉소하였고 그 노인은 맨 밭을 간 후 에 씨를 달라고 애걸하였습니다. 그 노인의 모습을 피어홈은 보았습니다.
그는 그날 아침 일찍 광에서 자신이 쓸 씨앗 반되를 가지고 나와서 열심히 노인의 밭에 씨를 뿌려주었습니다. 얼마쯤 지나자 이웃 노인의 밭은 파릇파릇한 반면 피어홈의 밭은 그 일부가 아직도 빈 땅으로 남아 있었다. 긍휼은 원수의 밭에 좋은 씨를 뿌리도록 요구합니다. 그로 말미암아 비록 우리 자신의 밭 일부가 맨 땅으로 남겨집니다. 긍휼을 베푸는 것은 베푼 후에 내가 손해보는 일입니다.
셋째, 노가 항상 맹렬합니다.
당시의 사람들은 노가 맹렬하고 불붙듯 해서 삭지 않았습니다. 노를 발해야 할 때와 발 하지 않을 때를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성경에는 여호와 하나님도 노늘 발하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노를 발하시는 경우는
첫째는 순종치 않을 경우입니다. 모세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치 않고 애급으로 가지 못하겠다고 했을 때에 여호와께서 모세를 향하여 노를 발하셨습 니다(출 4:14).
둘째는 다른 신을 섬기며 우상을 만들 때입니다. "다른 신을 만들며 우상을 부어 만들어 나의 노를 격발하고"(왕상 14:9)라고 여호와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노를 발하는 경우는 언제입니까 아무 때나입니다. 사람들이 아무 때나 노를 발 하는 것은 자신을 통제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잠언 22:24은 "노를 품는 자와 사귀 지 말며 울분한 자와 동행하지 말지니"라고 합니다. 노를 품는 자와 왜 사귀지 말라고 하십 니까
노를 품는 자는 미친 자입니다. 그래서 영어에서는 노하다는 말을 매드(mad)라는 단 어를 많이 쓰는데 이 말의 원래 뜻은 미쳤다는 말입니다.
넷째, 분을 끝없이 품습니다.
분은 노보다 더 심한 심리적 상태입니다. 애가서 4:11은 "여호와께서 분을 발하시며 맹 렬한 노를 쏟으심이여 시온에 불을 피우사 그 지대를 사르셨도다"고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노와 분이 함께 나타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상당히 진노하시는 장면입니다. 여호와 하나님도 분을 발하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분은 정말 무섭습니다.
성경에는 '여호와 하나님의 노'라는 단어는 많이 나옵니다. 특히 다른 신을 섬기고 우상을 만들 때에 여호와 하나님은 노를 발하십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의 분'이란 단어는 상대적으로 적게 나오고 거의 없습니다. 오히려 시편 78:38에는 "그 진노를 여러번 돌이키시며 그 분을 다 발하지 아니하셨으니"라고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분 내는 것을 싫어하십 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사람을 죽일 만큼 화를 내지 않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사람을 멸망시킬만큼 분을 내 지 않으십니다. 또 여호와 하나님은 분을 발하지 않으려고 하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사람에 대한 근본 의도는 살리는 것이지 죽이는 것이 아닙니다. 고린도전서 15:45에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 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라고 합니다. 예수님도 이 땅 에 오셔서 살려주는 영이 되셨습니다. 생명을 공급하는 영이라는 뜻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사람 에 대한 분노는 살리려는 영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분은 사람을 사랑하는 영입니다. 현대인은 분을 풀지 아니하고 분을 품고 삽니다. 사람의 분노는 살인을 불러일으킵니다. 사람들은 분을 내면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자신을 죽이기도 합니다.
인간의 첫 살인도 분 때문이었습니다. 분노에 대한 표현이 민족에 따라 다양합니다. 서부 아프리카의 멘데 족은 '베인 마음'이 라고 표현합니다. 미스키토 인디언은 '쪼개는 마음'이라고 표현합니다. 멕시코의 치이파스에 초트칠 족은 '달구어진 마음'이라고 표현합니다. 과테말라 국경 근처의 코놉 족은 '붉은 영 혼'이라고 합니다. 서부 아프리카의 맛시 족은 '썩는 마음'이라고 합니다. 이런 표현들은 하 나같이 파괴적이고 상처를 주는 것들입니다.
맥스 루카도는 그의 책 "여호와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다"에서 분노는 영혼의 소음, 보이지 않는 마음의 자극물, 끊임없는 고요의 침해자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잠언 15:18에 "분을 쉽게 내는 자는 다툼을 일으켜도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시비를 그치게 하느니라"라고 권고하 며 바울은 에베소서 4:26에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라 고 권합니다. 분을 내는 것은 자신을 상실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잃지 않으려면 분을 그치 고 노를 버려야 합니다(시 37:8).
죄의 문제는 아버지께로서 분리된 것입니다. 우리의 생명의 근원으로부터 단절된 것을 의미합니다.
인간 사회는 개선할 수 있지만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재창조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 의 내면의 세계에서 경보가 울릴 때면 우리 자신에게 이 세 가지 질문을 해 보아야 합니다.
첫째, 내 삶에서 고백하지 않은 죄가 있는가
둘째, 내 속에 해결되지 않은 어떤 갈등이 있는가
셋째, 내 마음속에 사라지지 않는 근심이 있는가
이 끊임없는 질문에서 우리 시대의 죄를 발견하시고 우리의 모든 죄짐을 다 주께 맡기고 고난의 주님을 좇아 십자가를 향하는 사순절의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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