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절] 죽어야 산다
본문
예수님의 고난은 인간 영혼의 구원뿐만 아니라 육신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 겪었던 필연적인 과정이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예수님의 지상의 선교활동은 인생들의 저 세상을 위한 길을 준비하는 일이었고 동시에 이 땅에서 충만한 생명을 누리면서 살기 위함이었습니다. 사순절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을 묵상하는 절기라면 이 절기에 예수님이 그토록 아끼셨던 고귀하고 아름다운 생명들이 죽지 않도록 지켜주는 일에 우리 모두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교회의 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이 현실과는 동떨어지게 해석되고 이해되어 온 것이 사실입니다.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 라는 명제를 인간의 죽음 이후의 세계와만 관련지어 생각을 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과연 예수님의 지상의 공생애가 인간의 죽음 이후의 세계만을 위한 것이었을까요 그렇다면 그가 이 땅에 와서 인간의 죄의 형벌을 대신하는 십자가의 처형만 받으면 그것으로 그의 사명을 다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공생애 3년간의 어록들과 업적들을 자세하게 살펴보면 그 시대에 살고있었던 사람들에 관한 관심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오병이어 즉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000명을 먹이신 일,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신 일, 중풍병자, 시각장애인, 한센병 환자를 고치신 일, 다리 저는 자를 고치신 일 등등 육신의 생명을 살리기 위하여 잠도 제대로 못 주무시면서 팔레스틴과 사마리아와 그 이웃 지방까지 열심히 뛰어 다녔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인간의 죽음후의 영원한 삶만에 관심하고, 그 천국에 우리들이 갈 수 있는 자격을 주시기 위하여 고난 당하시고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시는 것으로 그 사명을 다 하셨다면 인간들의 육신의 아픔이나 고통이 그의 중요한 관심사가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오히려 그 고통에서 빨리 벗어나려면 천국으로 가는 길이라고 역설하면서 자신이 곧 십자가에 죽어 인간들이 받을 죄의 벌을 대신 할 것이니 염려하지 말고 고통을 잘 이기라고 설파하셨을 것입니다. 그리고는 친히 나무에 달려 피를 흘리시고 죽어주시는 것으로 그 사명을 다 하실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런 말씀을 한번도 하시지 않았습니다. 아픈 사람 보시면 그 현장에서 바로 고쳐주셨습니다. 배고픈 자 있으면 그 당장에 먹여주었습니다. 이것이 지구상의 생명에 깊이 관심한 증거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공생애 3년 동안에 한 생명이라도 꺼지지 않도록, 한 생명이라도 위축되게 살지 않도록 도와주시고 보호하시고 고쳐주시고 지켜주셨습니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 곳곳에 인간의 육신의 생명에 관심하고 그 생명을 보호하시려고 애타게 노력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쉽게 접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이 육신의 생명이 전부라고 말씀한 적은 없습니다. 인간의 삶의 유한성을 아셨고 그리고 영생에 대하여 말씀했습니다. 그 때문에 나인성 과부의 아들도 예수님에 의하여 다시 살아나긴 했지만 이 땅에서 영원히 살도록 해 주신 것은 아닙니다. 육은 육입니다. 그 사람도 예수님에 의하여 다시 살았지만 육신의 한정된 삶을 다 살고는 눈을 감았고 장례되어 땅에 묻혔습니다.
예수님이 그토록 사랑하시던 마리아의 동생 나사로 역시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접한 에수님이 눈물을 보이셨고 그리고 무덤으로 가서 그를 다시 살려주었습니다. 하지만 나사로가 그 이후 영원히 산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부활을 말씀하셨고 영원히 살 소망을 알려주었습니다. 우리가 신앙을 갖는 가장 큰 이유는 죽음 이후의 영생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육신의 생명도 극진하게 사랑하셨고 동시에 죽은 이후의 영생에 대하여서 확실하게 설파하셨던 예수님의 모습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늘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 자신도 육신으로는 33년의 짧은 생애를 마쳤습니다. 그것은 육의 삶의 하계성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부활을 통하여 영생을 확보해주었습니다.
예수님은 또한 지상의 삶의 중요성을 아셨습니다. 지상에서의 육신의 삶이 위축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 하였습니다. 그의 지상에서의 많은 시간과 정열을 육의 삶의 충만을 위하여 바쳤습니다. 여기에 예수님의 교회가 해야할 일들의 큰 부분이 있습니다.
교회는 이 세상 안에서의 인간의 삶에 깊이 관심하여야 합니다. 동시에 영적 삶의 충만에 관심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많은 교회들이 이 교회의 양면성의 균형을 잃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교회들은 예배와 기도 등 교회 안에서의 영성에만 모든 관심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영성은 영혼의 삶의 충만입니다. 영혼이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사는 데 있어서는 영성이 충만해야 합니다. 찬송하고 기도함에서 영성의 충만을 누립니다. 교회생활을 아무리 오래 했어도 찬송을 힘차게 부르지 않고 기도를 간절하게 하지 않는 분들은 영성의 충만을 맛보지 못합니다. 찬송은 입을 열어 큰 목소리로 음을 내어 부름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고 동시에 여호와 하나님과의 영적 교제를 통하여 마음에 기쁨이 가득하게 채워집니다. 지난주일 오후 찬양시간에 참여했던 분들이 100명 모여서 손바닥을 치면서, 때론 손을 높이 들고 찬양함에서 그리고 중간중간 합심기도를 드림에서 뜨거운 눈물의 기도와 감격의 분위기에 휩싸였던 것입니다. 이런 시간을 통하여 영성이 충만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교회는 영성에 일차적인 우선 순위를 두지만 동시에 이웃의 육신의 생명에 대하여 크게 관심하여야 합니다. 사회복지를 위한 프로그램들은 육의 삶의 질을 보다 좋게 만들려는 데 있습니다. 정부에서 국가의 재원으로 이 일들을 하고는 있지만 역부족입니다. 따라서 동네 한 가운데 세워진 교회들이 이런 일들에 활발하게 참여하는 것은 올바른 일입니다. 우리 교회도 교육선교관의 건립과 더불어 이웃의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하여 공간을 개방할 수 있게 되어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누구나 와서 책을 읽을 수 있는 수송 작은도서관, 얼굴과 얼굴이 대면하여 대화할 수 있는 공간인 쉼터, 유아들을 위한 공간인 수송어린이 선교원, 노인들을 위하여 마련된 늘푸른학교 등등이 그것입니다. 모든 계층의 나이의 사람들을 위하여 저들의 삶의 질을 높이면서 그들에게 삶의 의미와 보람을 심어주는 프로그램을 위하여 교육선교관이 지어진 것은 큰 여호와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노래하고 춤추고 같이 음식을 나누고 함께 뛰면서 사는 맛을 느끼도록 공간을 제공하고 있고 이를 위하여 많은 성도들이 자원하여 수고하고 있습니다. 몸의 움직임으로, 시간의 희생으로, 물질을 드림에서 이런 일들을 돕는 분들의 희생이 많습니다. 이들의 수고와 고난과 희생으로 다른 많은 사람들의 삶이 재미가 있고 환희를 맛보게 됩니다.
오늘 주보에 공고하였듯이 14일부터는 중고등학생들을 위한 공부방이 야간에 마련됩니다. 환경이 열악한 가정에서 힘들게 공부하고 있는 중고등 학생들을 위하여 우선 교육선교관 쉼터 옆에 30여개의 책상들을 준비할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 교회의 노력을 높이 평가한 사회복지과에서 나라의 재정으로 도서관과 공부방을 위하여 수고할 두 사람의 봉사자들을 14일부터 파송하여 주기로 하였습니다. 월요일에서 금요일까지 아침 9시에서 밤 10시까지 상근자가 늘 있어서 이웃을 돕는 교회의 일들이 진행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당대의 고난받던 사람들의 삶의 충만을 위하여 고난을 당하신 것처럼 우리 교회의 이웃을 위한 프로그램을 위하여 여러 성도님들도 함께 고난에 참여해 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이웃을 돕기 위하여 고난을 당하셨듯이 여러 성도님들도 이웃 사람들의 땅위에서의 생명의 충만을 위하여 고난을 감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사순절은 영적 삶의 충만과만 연결되는 것이 아니고 육신의 삶에도 직결되는 것임입니다.
신약의 본문 22절에 예수님이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라고 예고하고 있는데 예수님이 이미 당한 고난과 버림받음은 물론이고 곧 당할 십자가에서의 죽음은 근본적인 인간의 죄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장로들, 제사장들, 서기관들에게 억압을 당하던 사람들의 생명을 옹호하고 지켜주고 보호하려고 했던 때문이었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든다면 날 때부터 시각장애인이었던 한 사람을 안식일에 눈을 뜨게 함에서 오히려 무서운 질타와 박해를 받고 미움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사순절은 육신의 생명을 살리려는 데 있어서의 그의 고난과 아픔과 고통과 연결되고 있습니다.
한달 여 전에 기독교환경운동연합의 사무총장이었던 김영락목사님이 우리 교회 구역연합예배에 오셔서 “생명 길은 좁은 문으로” 라는 제목으로 설교했습니다. 그 때 그분이 전해준 삶의 수칙 10가지는 고난과 희생을 요구하고 있는 것들입니다. 1)일회용품을 쓰지 맙시다 2)대중교통을 이용합시다 3)합성세제를 삼갑시다. 4)중고품을 사용합시다 5)물과 전기를 아껴씁시다 6)음식을 절제합시다 7)칠일 째는 쉽시다 8)소비광고에 한 눈을 팔지 맙시다 9)작고 단순하고 불편한 것을 구합시다 10)십자가의 예수님처럼 가난한 이웃을 도웁시다. 이상의 일들을 실천한다는 것은 생명 길이지만 동시에 좁은 문입니다. 다른 사람을 살리기 위하여 나 자신은 자원을 되도록 아껴서 쓰자는 것입니다. 다른 생명을 갉아먹는 일은 피하자는 말입니다.
지금 환경이 많이 파괴됨에서 자연의 생명, 동물의 생명 더 나아가서 인간들의 생명이 죽고 있습니다. 이것을 막기 위하여 환경단체들이 애를 쓰고 있습니다. 지율 스님이 오랜 동안 단식한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는 모 교수(호서대 자연과학부 교수 이기영)의 글을 보았습니다: “ 그의 단식은 단지 천성산 도룡뇽만을 살리기 위한 투쟁이 아니었다. 개발을 위한 경쟁적 생태계파괴로 공멸의 위기에 처한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를 살리기 위해 ‘현대 자살문명’에 보내는 경고의 메시지다. ” 그 교수의 글에서 나도 처음 알고 놀랐는데 얼마전 세계경제포럼이 발표한 환경지수에서 세계 146개 나라 중 우리나라가 122위에 있다고 합니다. 지난 15년 동안 지구온도가 9번이나 최고 갱신되어 온난화 현상이 계속 경신되고 있다고 합니다. ‘기후변동에 대한 대응’보고서에 현재 대기중 이산화탄소 농도가 379ppm인데 이것이 매년
2ppm씩 상승해서 앞으로 10년 안에 400ppm이 되면 인류는 돌이킬 수 없는 재앙으로 빠진다고 경고했다고 합니다. 이 교수의 설명은 이렇습니다. 지구온난화가 갑작스러운 빙하기를 가져올 수 있다는 학설이 제기되고 있는데 온난화로 지구의 빙하가 다 녹으면 북대서양의 해류가 멈추면서 몇 주만에 지구에 빙하기가 급습하는 대 재앙이 온다는 설명입니다. 빙하분석 결과 8000년 전과 1만 3000년 전에도 지금처럼 온난화로 지구 온도가 올라가다가 갑자기 빙하기로 바뀌어 유럽 전역이 얼음으로 덮이는 사태가 발생했었음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현재 극 지방의 얼음이 녹아서 바닷물 염도가 낮아지면서 북대서양 난류가 멈출 수 있다는 과학적 증거도 있다고 합니다. 적도의 열을 지구 북반구에 골고루 나누어주는 이 해류가 완전히 소멸되면 갑자기 10년 내에 지구에 빙하기가 오고, 온도가 지금 보다 5도만 떨어져도 북반구에는 1000m 가 넘는 두꺼운 얼음으로 뒤덮이고 이 때문에 생태계의 활동이 중단되면서 식량이 모자라게 되고 결국 지구 전멸의 재앙이 온다는 설입니다. 오늘 구약의 본문의 인간들과 자연이 전멸하는 재앙인 노아 홍수의 이야기는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 10년 안에 일어날 수 있는 재앙임을 알려주는 듯 합니다. 우리와 우리 후손들이 육의 생명을 이 지구촌에서 계속 유지시키려면 우리가 먼저 희생을 해야 합니다. 덜 먹고 덜 소비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지구촌의 온난화를 막기 위해서는 에너지를 가급적 적게 써야 합니다. 우리들이 먼저 고난을 당하고 희생하여 합니다. 내가 죽으면 다른 사람은 삽니다.
한 알의 밀 알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 것처럼 우리도 멀리 바라보면서 이 지구촌을 살려내야 합니다. 오늘 내가 고난을 당하고 배가 고프고 춥고 불편하게 살아감에서 지구의 에너지가 보존되고 그래서
온난화를 막아서 자연의 생태계가 죽지 않도록 하여야 합니다.
에너지를 되도록 적게 쓰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것은 좁은 길입니다. 지금과 같이 무서운 경쟁으로 서로 더 많이 에너지를 쓰려고 하다가는 일류 전체가 공멸합니다. 공생하는 길은 각 자가 정신을 차리고 자신을 죽이는 자세를 지녀야 합니다. 스스로를 희생함에서 공생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삶의 태도를 예수님의 고난을 기념하는 사순절에 실천해 주시기 바랍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예수님의 지상의 선교활동은 인생들의 저 세상을 위한 길을 준비하는 일이었고 동시에 이 땅에서 충만한 생명을 누리면서 살기 위함이었습니다. 사순절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을 묵상하는 절기라면 이 절기에 예수님이 그토록 아끼셨던 고귀하고 아름다운 생명들이 죽지 않도록 지켜주는 일에 우리 모두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교회의 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이 현실과는 동떨어지게 해석되고 이해되어 온 것이 사실입니다.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 라는 명제를 인간의 죽음 이후의 세계와만 관련지어 생각을 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과연 예수님의 지상의 공생애가 인간의 죽음 이후의 세계만을 위한 것이었을까요 그렇다면 그가 이 땅에 와서 인간의 죄의 형벌을 대신하는 십자가의 처형만 받으면 그것으로 그의 사명을 다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공생애 3년간의 어록들과 업적들을 자세하게 살펴보면 그 시대에 살고있었던 사람들에 관한 관심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오병이어 즉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000명을 먹이신 일,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신 일, 중풍병자, 시각장애인, 한센병 환자를 고치신 일, 다리 저는 자를 고치신 일 등등 육신의 생명을 살리기 위하여 잠도 제대로 못 주무시면서 팔레스틴과 사마리아와 그 이웃 지방까지 열심히 뛰어 다녔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인간의 죽음후의 영원한 삶만에 관심하고, 그 천국에 우리들이 갈 수 있는 자격을 주시기 위하여 고난 당하시고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시는 것으로 그 사명을 다 하셨다면 인간들의 육신의 아픔이나 고통이 그의 중요한 관심사가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오히려 그 고통에서 빨리 벗어나려면 천국으로 가는 길이라고 역설하면서 자신이 곧 십자가에 죽어 인간들이 받을 죄의 벌을 대신 할 것이니 염려하지 말고 고통을 잘 이기라고 설파하셨을 것입니다. 그리고는 친히 나무에 달려 피를 흘리시고 죽어주시는 것으로 그 사명을 다 하실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런 말씀을 한번도 하시지 않았습니다. 아픈 사람 보시면 그 현장에서 바로 고쳐주셨습니다. 배고픈 자 있으면 그 당장에 먹여주었습니다. 이것이 지구상의 생명에 깊이 관심한 증거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공생애 3년 동안에 한 생명이라도 꺼지지 않도록, 한 생명이라도 위축되게 살지 않도록 도와주시고 보호하시고 고쳐주시고 지켜주셨습니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 곳곳에 인간의 육신의 생명에 관심하고 그 생명을 보호하시려고 애타게 노력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쉽게 접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이 육신의 생명이 전부라고 말씀한 적은 없습니다. 인간의 삶의 유한성을 아셨고 그리고 영생에 대하여 말씀했습니다. 그 때문에 나인성 과부의 아들도 예수님에 의하여 다시 살아나긴 했지만 이 땅에서 영원히 살도록 해 주신 것은 아닙니다. 육은 육입니다. 그 사람도 예수님에 의하여 다시 살았지만 육신의 한정된 삶을 다 살고는 눈을 감았고 장례되어 땅에 묻혔습니다.
예수님이 그토록 사랑하시던 마리아의 동생 나사로 역시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접한 에수님이 눈물을 보이셨고 그리고 무덤으로 가서 그를 다시 살려주었습니다. 하지만 나사로가 그 이후 영원히 산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부활을 말씀하셨고 영원히 살 소망을 알려주었습니다. 우리가 신앙을 갖는 가장 큰 이유는 죽음 이후의 영생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육신의 생명도 극진하게 사랑하셨고 동시에 죽은 이후의 영생에 대하여서 확실하게 설파하셨던 예수님의 모습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늘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 자신도 육신으로는 33년의 짧은 생애를 마쳤습니다. 그것은 육의 삶의 하계성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부활을 통하여 영생을 확보해주었습니다.
예수님은 또한 지상의 삶의 중요성을 아셨습니다. 지상에서의 육신의 삶이 위축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 하였습니다. 그의 지상에서의 많은 시간과 정열을 육의 삶의 충만을 위하여 바쳤습니다. 여기에 예수님의 교회가 해야할 일들의 큰 부분이 있습니다.
교회는 이 세상 안에서의 인간의 삶에 깊이 관심하여야 합니다. 동시에 영적 삶의 충만에 관심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많은 교회들이 이 교회의 양면성의 균형을 잃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교회들은 예배와 기도 등 교회 안에서의 영성에만 모든 관심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영성은 영혼의 삶의 충만입니다. 영혼이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사는 데 있어서는 영성이 충만해야 합니다. 찬송하고 기도함에서 영성의 충만을 누립니다. 교회생활을 아무리 오래 했어도 찬송을 힘차게 부르지 않고 기도를 간절하게 하지 않는 분들은 영성의 충만을 맛보지 못합니다. 찬송은 입을 열어 큰 목소리로 음을 내어 부름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고 동시에 여호와 하나님과의 영적 교제를 통하여 마음에 기쁨이 가득하게 채워집니다. 지난주일 오후 찬양시간에 참여했던 분들이 100명 모여서 손바닥을 치면서, 때론 손을 높이 들고 찬양함에서 그리고 중간중간 합심기도를 드림에서 뜨거운 눈물의 기도와 감격의 분위기에 휩싸였던 것입니다. 이런 시간을 통하여 영성이 충만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교회는 영성에 일차적인 우선 순위를 두지만 동시에 이웃의 육신의 생명에 대하여 크게 관심하여야 합니다. 사회복지를 위한 프로그램들은 육의 삶의 질을 보다 좋게 만들려는 데 있습니다. 정부에서 국가의 재원으로 이 일들을 하고는 있지만 역부족입니다. 따라서 동네 한 가운데 세워진 교회들이 이런 일들에 활발하게 참여하는 것은 올바른 일입니다. 우리 교회도 교육선교관의 건립과 더불어 이웃의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하여 공간을 개방할 수 있게 되어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누구나 와서 책을 읽을 수 있는 수송 작은도서관, 얼굴과 얼굴이 대면하여 대화할 수 있는 공간인 쉼터, 유아들을 위한 공간인 수송어린이 선교원, 노인들을 위하여 마련된 늘푸른학교 등등이 그것입니다. 모든 계층의 나이의 사람들을 위하여 저들의 삶의 질을 높이면서 그들에게 삶의 의미와 보람을 심어주는 프로그램을 위하여 교육선교관이 지어진 것은 큰 여호와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노래하고 춤추고 같이 음식을 나누고 함께 뛰면서 사는 맛을 느끼도록 공간을 제공하고 있고 이를 위하여 많은 성도들이 자원하여 수고하고 있습니다. 몸의 움직임으로, 시간의 희생으로, 물질을 드림에서 이런 일들을 돕는 분들의 희생이 많습니다. 이들의 수고와 고난과 희생으로 다른 많은 사람들의 삶이 재미가 있고 환희를 맛보게 됩니다.
오늘 주보에 공고하였듯이 14일부터는 중고등학생들을 위한 공부방이 야간에 마련됩니다. 환경이 열악한 가정에서 힘들게 공부하고 있는 중고등 학생들을 위하여 우선 교육선교관 쉼터 옆에 30여개의 책상들을 준비할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 교회의 노력을 높이 평가한 사회복지과에서 나라의 재정으로 도서관과 공부방을 위하여 수고할 두 사람의 봉사자들을 14일부터 파송하여 주기로 하였습니다. 월요일에서 금요일까지 아침 9시에서 밤 10시까지 상근자가 늘 있어서 이웃을 돕는 교회의 일들이 진행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당대의 고난받던 사람들의 삶의 충만을 위하여 고난을 당하신 것처럼 우리 교회의 이웃을 위한 프로그램을 위하여 여러 성도님들도 함께 고난에 참여해 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이웃을 돕기 위하여 고난을 당하셨듯이 여러 성도님들도 이웃 사람들의 땅위에서의 생명의 충만을 위하여 고난을 감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사순절은 영적 삶의 충만과만 연결되는 것이 아니고 육신의 삶에도 직결되는 것임입니다.
신약의 본문 22절에 예수님이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라고 예고하고 있는데 예수님이 이미 당한 고난과 버림받음은 물론이고 곧 당할 십자가에서의 죽음은 근본적인 인간의 죄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장로들, 제사장들, 서기관들에게 억압을 당하던 사람들의 생명을 옹호하고 지켜주고 보호하려고 했던 때문이었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든다면 날 때부터 시각장애인이었던 한 사람을 안식일에 눈을 뜨게 함에서 오히려 무서운 질타와 박해를 받고 미움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사순절은 육신의 생명을 살리려는 데 있어서의 그의 고난과 아픔과 고통과 연결되고 있습니다.
한달 여 전에 기독교환경운동연합의 사무총장이었던 김영락목사님이 우리 교회 구역연합예배에 오셔서 “생명 길은 좁은 문으로” 라는 제목으로 설교했습니다. 그 때 그분이 전해준 삶의 수칙 10가지는 고난과 희생을 요구하고 있는 것들입니다. 1)일회용품을 쓰지 맙시다 2)대중교통을 이용합시다 3)합성세제를 삼갑시다. 4)중고품을 사용합시다 5)물과 전기를 아껴씁시다 6)음식을 절제합시다 7)칠일 째는 쉽시다 8)소비광고에 한 눈을 팔지 맙시다 9)작고 단순하고 불편한 것을 구합시다 10)십자가의 예수님처럼 가난한 이웃을 도웁시다. 이상의 일들을 실천한다는 것은 생명 길이지만 동시에 좁은 문입니다. 다른 사람을 살리기 위하여 나 자신은 자원을 되도록 아껴서 쓰자는 것입니다. 다른 생명을 갉아먹는 일은 피하자는 말입니다.
지금 환경이 많이 파괴됨에서 자연의 생명, 동물의 생명 더 나아가서 인간들의 생명이 죽고 있습니다. 이것을 막기 위하여 환경단체들이 애를 쓰고 있습니다. 지율 스님이 오랜 동안 단식한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는 모 교수(호서대 자연과학부 교수 이기영)의 글을 보았습니다: “ 그의 단식은 단지 천성산 도룡뇽만을 살리기 위한 투쟁이 아니었다. 개발을 위한 경쟁적 생태계파괴로 공멸의 위기에 처한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를 살리기 위해 ‘현대 자살문명’에 보내는 경고의 메시지다. ” 그 교수의 글에서 나도 처음 알고 놀랐는데 얼마전 세계경제포럼이 발표한 환경지수에서 세계 146개 나라 중 우리나라가 122위에 있다고 합니다. 지난 15년 동안 지구온도가 9번이나 최고 갱신되어 온난화 현상이 계속 경신되고 있다고 합니다. ‘기후변동에 대한 대응’보고서에 현재 대기중 이산화탄소 농도가 379ppm인데 이것이 매년
2ppm씩 상승해서 앞으로 10년 안에 400ppm이 되면 인류는 돌이킬 수 없는 재앙으로 빠진다고 경고했다고 합니다. 이 교수의 설명은 이렇습니다. 지구온난화가 갑작스러운 빙하기를 가져올 수 있다는 학설이 제기되고 있는데 온난화로 지구의 빙하가 다 녹으면 북대서양의 해류가 멈추면서 몇 주만에 지구에 빙하기가 급습하는 대 재앙이 온다는 설명입니다. 빙하분석 결과 8000년 전과 1만 3000년 전에도 지금처럼 온난화로 지구 온도가 올라가다가 갑자기 빙하기로 바뀌어 유럽 전역이 얼음으로 덮이는 사태가 발생했었음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현재 극 지방의 얼음이 녹아서 바닷물 염도가 낮아지면서 북대서양 난류가 멈출 수 있다는 과학적 증거도 있다고 합니다. 적도의 열을 지구 북반구에 골고루 나누어주는 이 해류가 완전히 소멸되면 갑자기 10년 내에 지구에 빙하기가 오고, 온도가 지금 보다 5도만 떨어져도 북반구에는 1000m 가 넘는 두꺼운 얼음으로 뒤덮이고 이 때문에 생태계의 활동이 중단되면서 식량이 모자라게 되고 결국 지구 전멸의 재앙이 온다는 설입니다. 오늘 구약의 본문의 인간들과 자연이 전멸하는 재앙인 노아 홍수의 이야기는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 10년 안에 일어날 수 있는 재앙임을 알려주는 듯 합니다. 우리와 우리 후손들이 육의 생명을 이 지구촌에서 계속 유지시키려면 우리가 먼저 희생을 해야 합니다. 덜 먹고 덜 소비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지구촌의 온난화를 막기 위해서는 에너지를 가급적 적게 써야 합니다. 우리들이 먼저 고난을 당하고 희생하여 합니다. 내가 죽으면 다른 사람은 삽니다.
한 알의 밀 알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 것처럼 우리도 멀리 바라보면서 이 지구촌을 살려내야 합니다. 오늘 내가 고난을 당하고 배가 고프고 춥고 불편하게 살아감에서 지구의 에너지가 보존되고 그래서
온난화를 막아서 자연의 생태계가 죽지 않도록 하여야 합니다.
에너지를 되도록 적게 쓰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것은 좁은 길입니다. 지금과 같이 무서운 경쟁으로 서로 더 많이 에너지를 쓰려고 하다가는 일류 전체가 공멸합니다. 공생하는 길은 각 자가 정신을 차리고 자신을 죽이는 자세를 지녀야 합니다. 스스로를 희생함에서 공생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삶의 태도를 예수님의 고난을 기념하는 사순절에 실천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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