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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 사랑의 절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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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그가 알고 있는 것으로 평가될 것이 아니라 그가 사랑하는 것에 따라 평가되어진다. 헬라어에는 사랑이 네가지 차원으로 나누이는데 에로스(eros)와 필리아(philia)와 스톨게(stolge)와 아가페(agape)이다. 사랑의 질과 사랑의 지혜와 사랑의 도덕성에 따라서 사랑은 위대하고 숭고한 것이다. 선한 사랑이어야 하고 지혜로운 사랑이어야 하며 거듭난 사랑이어야 한다. 여호와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 희생적인 사랑 안에서 모든 것이 포용된다.
 주님은 십자가로 사랑을 실천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는 것과 기도하는 것을 친히 십자가를 지심으로 본을 보이셨다. 이는 사랑을 실천하는 삶의 극치요 십자가 진리의 현장이었다. 주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신 것이다. (롬 5:8) 십자가의 길이란 죽음의 길인데 십자가를 통해서만 참 사랑이 실현될 수 있다. 십자가 없는 사랑은 위선적이요 이기적이다. 스데반 집사의 기도인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는 십자가 사랑의 실천이다.
 서로 사랑하라는 주님의 부탁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이다.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격이나 가치가 없는 사람인데도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자비와 은혜로서 주어졌다. 여호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랑은 형제를 사랑함으로 보답된다.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막으면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 보냐"(요일 3:17)고 하셨다.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희생으로 살게 되었다. 이제 우리는 서로 사랑함으로 주님의 사랑을 확장시켜 나가야 한다.
사순절 둘째 주일을 맞았습니다. 지난 주일에는 사순절이란 죽음의 절기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오늘은 사순절이 사랑의 절기임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인간은 그가 알고 있는 것으로 평가될 것이 아니라 그가 사랑하는 것에 따라 평가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사람의 값이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많이 안다고 값이 높은 사람입니까 지위가 높고 돈이 많아야 행복한 사람이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가 무엇을 사랑하느냐가 문제이며 얼마나 사랑하느냐가 문제입니다. 나 자신을 온전히 바쳐서 사랑할만한 대상을 사랑하고 있는가 참 사랑을 알고 사는가 인간의 가치는 이에 따라서 평가되어야 합니다.
사랑의 질과 사랑의 지혜와 사랑의 도덕성이 문제입니다. 이기적인 사랑은 사람을 악하게 만듭니다. 무모한 사랑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다른 사람을 괴롭힙니다. 잘못된 사랑은 나도 고생이요 남까지 괴롭게 합니다. 사랑한다고 하면서 시기하고 질투합니다. 사랑이 변질된 것이 시기요 질투입니다. 이 시기, 질투는 나도 괴롭고 남도 괴롭힐 뿐입니다. 선한 사랑이어야 하고 지혜로운 사랑이어야 하고 거듭난 사랑이어야 합니다.
사랑은 숭고하고 위대한 것입니다.
헬라어에는 사랑이 네가지 차원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첫째는 에로스(eros)인데 본능적인 사랑을 말합니다. 우리가 에로틱하다는 말을 많이 쓰는데 이성간의 애정을 가리킵니다. 둘째로 필리아(philia)가 있습니다. 친구를 사랑하고 나라를 사랑하고 형제를 사랑하는, 말하자면 인간적인 사랑이 모두 필리아에 속합니다.  셋째로 스톨게(stolge)가 있습니다. 부모 자식간의 사랑, 곧 혈육간의 사랑입니다. 그리고 넷째로 아가페(agape)가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거룩한 사랑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 희생적인 사랑을 말합니다.
독일 윈첼 대학의 철학과 교수인 요하네스 로즈는 이 네가지 사랑의 관계를 이렇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에로스가 필리아를 통하여 정화하고 필리아나 스톨게가 아가페를 통하여 고양될 때에 비로소 건전한 사랑을 이룰 수 있다. 네가지 사랑이 다 특성을 갖고 있으며 필요한 것이지만 아가페 없는 에로스나 필리아는 타락하고 만다 그런데 "아가페 역시 에로스, 필리아, 스톨게 없이는 개발될 수 없다"고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사랑의 이름으로 많은 죄를 짓고 있습니다. 나라 사랑한다는 말로 나라를 망칩니다. 애국이라는 말로 민족을 괴롭히는 일이 많습니다. 모든 사랑이 아가페 안에서 거듭나지 않고는 나라 사랑이고 형제 사랑이고 다 소용 없습니다.
스위스의 신학자 칼 바르트는 말년에 온 세계를 두루 다니며 강연을 했습니다. 그가 미국을 방문하여 강연을 할 때의 일입니다. 그의 강연에 모두들 큰 감동을 받고 더욱 바르트 교수를 존경하게 되었습니다. 강연을 마치자 한 청년이 벌떡 일어나 질문을 했습니다. "지금까지 교수님의 마음을 스쳐간 생각 가운데 가장 위대한 것이 무엇입니까"하고 물었습니다.
칼 바르트 교수는 깊이 생각한 후 짤막하게 대답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입니다. 나는 성경을 통하여 이 사실을 깨닫고 내 생활을 통하여 이것을 간증하고 있습니다. 나의 가르침이란 예수님의 사랑을 간증하는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깨닫는 사람이 믿음의 사람이요 행복한 사람입니다.
나의 삶을 통하여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이 확증되는 것 이상으로 더 귀한 것은 없습니다. 성경 안에는 사랑에 대한 수많은 말씀과 이야기가 있습니다. 성경이 보여주는 사랑의 언어의 절정은 십자가입니다. 요한복음 3:16을 보십시요. "여호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를 사랑한다면 돈이나 건강이나 명예나 내게 당장 필요한 것을 주시지 않고 왜 독생자를 주셨습니까
오늘 본문 8절 말씀에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말로만 사랑한 것이 아니라 사랑을 실천하셨습니다. 사랑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요한1서 4:9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여호와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를 살리시려고 독생자를 보내사 십자가에 달리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로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산상설교의 가르침을 몸소 실천하심으로 참 사랑을 보여 주셨습니다. 산상보훈인 마 5:44에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라고 하셨는데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는 것 십자가 상에서 친히 보여 주셨습니다. 이는 사랑을 실천하는 삶의 극치였고 십자가 진리의 현장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내 마음을 괴롭히고 나의 가는 길을 가로막고 마음에 커다란 상처를 준 사람, 나에게 손해를 입힌 사람에 대하여 어떻게 대할 수 있습니까 그를 위하여 기도하고 축복해 줄 수 있습니까 나를 사랑하고 나에게 관심과 친절을 베푸는 사람에게 사랑하는 것으로는 그리스도인의 사랑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나를 핍박하고 나에게 큰 어려움을 안겨 준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것이 성도의 사랑이요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원수들에게 둘러 쌓였을때, 저 무리들이 십자가에 못박을때 그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며 그들을 사랑했습니다. 우리가 건강할때 사랑할 수 있습니다. 나에게 평안과 기쁨이 있을때 사랑할 수 있습니다. 내 마음에 여유가 있을때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병들어 허약해졌을때, 평안을 뺏기고 불안할때, 기쁨이 사라지고 역경의 밤을 만났을때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에게 해를 입히고 믿음을 방해하는 원수같이 느껴지는 그를 위해 기도하고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어야 십자가의 사랑에 접근하게 됩니다.
우리 교회 어떤 집사님이 겪은 일을 들었습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때에 친정 부모님이 보내주신 돈 30만원을 은행에서 찾아 버스를 탔는데 버스에 타고 보니 그 돈이 사라지고 없어졌더랍니다. 버스를 타기도 전에 소매치기 당한 것입니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고 가슴이 뛰고 버스 바닥에 주저 앉고 싶었답니다.
떨리는 다리를 이끌고 집에 들어가 방에 앉는데 자신도 모르게 무릎을 꿇고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드렸다고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 저보다 얼마나 더 어려운 사람이길래 그 돈을 소매치기해 간 것 같습니다. 그것으로 그 어려움이 펴지게 하시고 다시는 그런 일을 저지르지 않게 해 주십시요"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랬더니 마음이 그렇게 평안해지더랍니다.
이런 경우 대부분 어떤 생각을 가지며 어떤 말을 내 뱉습니까 원수를 위하여 기도하고 그가 구원받고 잘 되기를 기도하는 것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런 기도를 드리고 그러한 마음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십자가를 지신 주님의 마음을 품고 사는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당장 나에게 해를 끼치고 마음에 큰 분노를 일으킨 사람을 위해서 기도할 믿음이 못된다 하더라도 나로 인하여 마음 아파하거나 나 때문에 기분 나쁘게 된 사람이 있으면 그에게 정중히 사과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도 적은 사랑이 될 것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십자가의 사랑을 뭔가 작은 것이라도 하나 실천하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어느날 식당에 가서 네 사람이 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만두가 든 찌게를 시켰는데 김치 깍두기가 나왔습니다. 그 깍두기가 그렇게 맛있어 보였는데 네 사람이 먹기에는 양이 너무 적어 보였습니다.
봉사하는 아가씨에게 깍두기 하나 더 갖다 달라고 했습니다. 들은 척도 안 하고 가 버리기에 한참 뒤에 그 아가씨를 불러서 김치 깍두기 하나 더 갖다 달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이 아가씨가 노려보듯이 빤히 쳐다 보고는 가서 하나 더 갖다 주었습니다.
그 사이에 만두찌게가 다 익어서 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 찌게는 양도 많았지만 간도 잘 되어서 누구도 김치 깍두기에 손이 가지 않았습니다. 그 찌게 하나로 저녁밥을 다 먹고도 찌게가 남아 돌았습니다.
그때 저는 그 아가씨에게 퍽 미안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아가씨가 말을 안 하고 불쾌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가 속으로 생각한 것은 그 깍두기는 손도 안댈 것인데 이 사람이 욕심을 부린다고 느꼈을 것입니다.
저는 식사를 다할 때까지 그 사실을 몰랐습니다. 아가씨가 손님에게 불친절하다고만 생각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식사가 끝났는데도 김치 깍두기 그릇에 누구 하나 손도 대지 않은 것에 대하여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아가씨가 곁을 지나가길래 정중히 사과했습니다. 내가 먹어 보지도 않고 욕심을 부리며 함부로 시킨 것 정말 미안하다고 했습니다. 그 아가씨는 괜찮다며 한참 동안 웃고 서 있었습니다. 저의 마음은 편안해졌습니다. 아마 그 아가씨도 그 이후로 가벼운 마음으로 봉사했을 것입니다.
참 사랑은 나의 잘못을 솔직히 인정하고 사과하는 자세라고 믿습니다. 권위 의식으로 몰아 부치거나 남을 업수이 여기고 함부로 다루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가끔 3-4천원짜리 밥 한그릇 시켜 놓고도 마치 제왕처럼 군림하여 명령하고 나무랄때가 많습니다. 여기에 무슨 사랑이 있다는 말입니까
얼마전 신문에 보니까 요즘 중국 집에는 주방장보다 철가방 든 사람을 더 우대한다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주방장은 많은 보수와 주택까지 주면서 모셔 왔으나 지금은 철가방 들고 음식 배달하는 종업원을 더 소중히 여긴다는 것입니다. 주방장이 아무리 맛있는 요리를 해도 철가방 들 사람이 없으면 그 장사는 헛장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방장도 철가방 직원에게 꼼짝 못하는 시대라는 기사를 보고 웃었습니다.
내 마음에 사랑이 없으면 군림합니다. 남을 무시하고 깔보고 다스리려고 합니다. 그러나 작은 사랑이라도 있으면 소자 하나에게도 존경과 관심을 나타낼 것입니다.
지도자와 지배자는 다릅니다. 지배자는 다른 사람을 넘어뜨리고 싸워 이기고 죽여서 그 자리를 얻습니다. 그러나 지도자는 자기와의 싸움에서 이긴 자요 자기를 쳐서 복종시켜 다른 사람을 섬기고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지배자는 사랑이 없는 사람이요 지도자는 사랑이 있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희생을 통하여 참 사랑을 실천하시므로 우리에게 사랑을 보여 주셨고 그 길을 따라 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일생은 가난하 자, 소외당한 자, 고통 중에 있는 자에게 사랑을 베푸시고 위로하시며 용기를 주셨습니다. 그 주님께서 우리에게 부탁하십니다.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서로 사랑하라는 주님의 부탁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 사랑을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도 아니었고 사랑받을 이유가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값없이 은혜로 구원받았으며 날마다 크신 사랑안에서 호흡하며 살아갑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해 주심으로 나에게 가치가 부여된 것입니다.
스웨덴의 감독이었던 니그렌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아가페는 사랑 때문에 가치를 창조하고 에로스는 가치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다"고 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자비와 은혜로서 오는 것입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가치없는 자에게 주시는 것이므로 자비이고 거져 주시는 것이므로 은혜입니다. 우리는 그 사랑에 감격하여 살아가야 할 뿐 아니라 형제를 사랑할 사명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사도 요한은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요일 3:17)고 했습니다. 나의 관심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관심을 기울입시다. 나의 기도가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기도해 줍시다. 나의 도움이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도움을 줍시다. 나의 사과를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미안하다고 말합시다. 나의 용서가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용서의 사랑을 베풉시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용서하심 같이 우리도 서로 용서합시다. 스데반처럼 "주여 저들의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고 눈물 흘리며 기도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진정한 사랑, 주의 사랑으로 사랑을 베푸는 사순절 절기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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