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절] 연한 순은 연한 가지에 접붙여진다
본문
그동안 사순절 시리즈로 계속 말씀을 드려왔습니다. 오늘 그 다섯 번째로 이천년 사순절 시리즈의 내용을 마감하는 날로써연한 순은 연한 가지에 접붙여진다라는 주제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십시다. 대체로 창문이 많은 그런 집을 가지고 살던 사람에게 어느 날 그 창문을 통해서 도둑이 들어왔습니다. 그 도둑이 들어와서 약간의 물건을 훔쳐간 것 같은데 그 도둑이 유리창으로 또 들어올까바 그 주인이 바로 그 뒷날 기술자를 불러서 그 깨어지기 쉬운 유리창문마다 벽돌로다 굳게굳게 막아버렸다면, 또 뜯을 수도 없도록 깨지도 못하도록 그렇게 털어 막았다면 과연 그 집이 어떻게 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연약한 창문을 벽돌로 막았으니 도둑은 들어오지 않겠습니다마는 또 아울러서 공기도 들어오지 않고 햇빛도 들어오지 않을 테니 환기도 되지 아니하고 빛도 그 집안으로 전혀 들어오지 않으니 집안에 있는 화초도 죽을 것이고 어항에 있는 고기도 죽을 것이고, 그러니 튼튼하게 방어한 그 벽체의 집안에서도 사람인들 어찌 살겠는가 하는 생각을 한 번 해 보게 됩니다.
누가복음 19장 9절에 보면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하는 말씀을 주님께서 하셨는데 그 집이 누구 집이었겠습니까 삭개오의 집 아니겠습니까 이 삭개오는 만 사람이 다 그를 비난하여 죄인이라 했습니다. 과연 그러했던 것 같습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보아도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 라고 하는 것 보니까 죽을 수밖에 없는 자리에 있는 자를 살렸다, 또 이제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었다 라고 하는 것으로 보아서 주님이 그 집에 들어가기 이전까지는 그는 그야말로 잘 사는 부자요 또 권세 있는 세리장이었지만 그러나 영적으로 큰 죄인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이처럼 죄인이었기 때문에 이렇게 그 비난받을 수밖에 없는 형편에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그를 불러내렸고 그의 집에 들어가게 되었던 것이지요. 만약에 이 삭개오가 아무런 죄가 없었다면, 의인 중에 의인같이 살고 있었다면 주님이 그 집에 들어가지도 않았을 것이고 또 들어가셨더라도 구원을 했느니 용서를 했느니 혹은 아브라함의 자손이 이제 되었느니 이런 말씀은 안 할 겁니다.
여기에서 제가 이 사순절 시리즈를 마감하면서 우리 성도님들께 한 번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병은 자랑해야 한다 라고 하듯이 우리 각 인에게는 각각 연약한 부분이 있겠습니다. 허물스러운 부분도 있고 죄도 있겠는데 이러한 것에 대하여 감추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라는 겁니다. 죄짓지 않고 평생 주의 뜻대로 잘 사는 것 물론 좋습니다마는 그러나 죄짓고 약하여지고 허물이 있다는 것 자체도 크게 나쁜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예를 들면 이 삭개오의 경우를 보면 자기가 죄인인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지 않게 하기 위해서, 또 특히 예수님에게는 자기의 죄스러운 부분을 들키게 하지 아니하기 위해서 그 많은 여리고의 에워싼 사람들 한 복판쯤 들어가서 키도 작고 하니 그 사람들 사이에 따라서 돌아다녔다면 예수님이 그 사람을 특별히 찾아낼 이유가 없겠습니다.
또 자기의 허물을 감추기 위해서, 특히 예수님에게 자기의 허물스러운 면이 들키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저 사람들 맨 뒤에 예수님과 가장 먼 곳에 위치해 가지고서 혹 따라가거나 자기 집에 있었더라면 정말 이 삭개오같은 즐거움은 없었을 겁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그런 일은 없었을 겁니다.
이 삭개오의 경우 자기가 죄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에게 혹 그것이 알려져서 자존심 상하기는 했지만 자존심보다는 더 중요한 것은 주님을 한 번 만나봐야 되겠다, 주님을 한 번 내가 가까이에서 뵈어야 되겠다 하는 생각이 더 앞섰기 때문에 그가 관중 속으로 뛰어들어가서도 자기가 표가 나지 아니하고 관중들 앞에 가서도 자꾸만 뒤로 밀쳐지고 그렇게 되니 뽕나무 위에로 올라갔습니다.
그러므로 자기의 허물스러운 자기의 그 육신을 뽕나무 위에 올려 놓으므로써, 즉 감추지 아니하므로써 자기의 그 약점을 깨어질 수밖에 없는 유리창같은 자기의 그 연약한 모습을 드러내므로써 주님을 만날 수 있었다 라는 것입니다.
연한 순으로 오신 주께서는 어떤 자를 만나주시느냐 강하고 죄 없고 의원이 필요없는 그런 자에게 찾아가기를 우선하는 것이 아니라, 죄 많고 허물 많고 병들고 죽어가는 그런 자를 찾으시고 그런 자를 구원하기 위해서 오셨던 연한 순이신 주님이시기에 이런 주님을 자주 만났던 바울같은 이는 고린도후서 12장 9절 말씀에 보면,
"나는 혹 내 개인의 자랑을 했을지라도 그것은 너희의 유익을 위해서 했을 뿐이지 나는 자랑할 것이 없노라. 자랑하지 않노라. 그러나 내가 다만 자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나의 연약함 그 자체로다. 나는 나의 연약한 것을 자랑하노니 나의 이 연약한 데서 나의 이 약한 데서 여호와 하나님의 큰 능력이 나타나서 나의 약함 때문에 나를 온전하게 했느니라. 만약 내가 강해서 내 자신이 밀고 나갔다면 어느 정도 갔다가 쓰러졌겠지만 내가 마냥 약하다 보니 여호와 하나님께서 약한 나에게 마냥 크신 능력으로 함께 해 주셔서 오히려 능력 주시는 그 분을 통해서 내가 완전하여졌느니라. " 이런 말씀을 고백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주님은 이 땅에 연한 순으로 오셨습니다.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고, 상상해 보십시오.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라면 무슨 통통하겠습니까 형편없지요. 또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었습니다. 이사야서 53장에 소개된 대로 보면 아무도 그를 인정해 주지 않았고 싫어 버린바 된 그런 분이었습니다.
그는 가능하였지만 아버지 여호와 하나님께 강력한 가시나무로 태어나게 해 달라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강력한 단단한 나무이기를 구하지 않았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면서도 그는 강력한 자기 되기를 구하지 않았습니다. 혹 내가 강력할 때가 있다면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다만 강력할 뿐이지 나는 내 자신이 강한 자가 되기를 구치 않노라 라고 했습니다.
빌립보서 4장 13절에 나타난 대로 내가 혹 강력해서 귀신을 쫓아내고 병든 자를 고치고 큰 이적을 행한다면 그것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 있어서 내게서 나타나는 그의 능력으로 이것이 가능한 것이지 내 자신이 능력자가 되지 않겠다 했습니다. 그는 생애 끝까지 그렇게 했습니다.
마태복음 27장 42절에 보면 강도가 그를 향하여 말합니다. 또 대제사장과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십자가에 달려 하염없이 하염없이 연한 순으로 꺾여져 가고 있는, 그래서 막 생명의 불이 꺼져가는 그를 향하여 침을 으며 손가락질하면서 말하기를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어찌 자기 자신을 구원하지 못하는가" 이렇게 비방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아주 연한 모습으로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이 오셨지만, 참으로 약하게 나타나셨지만,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 약한 예수님과 강한 여호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므로 많은 역사를 해서 남을 구원했습니다. 죽은 자를 살리고 큰 이적을 베풀었고 그리고 바람과 파도도 잔잔하게 하는 놀라운 역사를 했습니다마는, 마지막 예수님 자신이 죽게 되었을 때 붙들리게 되었을 때 지금까지 했던 어떤 기도보다도 강한 기도를 했습니다. 땀이 피가 되어 쏟아질 만큼 기도했다고 했습니다.
"아버지여 웬만하시면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가게 하소서 이 고난을 면케 하소서. 죽지 않게 하소서. " 그렇게 기도했지만 그동안 능력 주시던 자가 아무 말씀 아니하시니, 네 기도를 내가 들어준다 말씀 아니하시니 그는 참으로 어이없이 약한 자였습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이 예수님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대단한 능력자인 줄로 아는데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실 때에 연한 순으로 오셔서 꺾일 때에도 연한 순으로 꺾이셨던 겁니다. 마지막 순간에 여호와 하나님이 아니시면 아무 것도 자기를 위해서는 할 수 없었던 분이십니다. 일생이 그러하였습니다.
연한 순은 이처럼 꺾이기도 잘 합니다마는 새 순이 나려면 역시 그 꺾인 연한 데서 잘 나옵니다. 또 그 가지가 연할 때에 순이 나올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접목을 할 때 접붙이기를 할 때에도 연한 순을 꺾어서 연한 가지에다 접을 붙이는 것이지, 연한 순을 꺾어 가지고 딱딱한 나무 둥치에다 접붙이지 않습니다. 붙여지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이 접붙이는 기간도 언제든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주 물이 올라서 연할 그때에 그 연한 가지를 꺾어서 연한 부위에다가 접붙이는 것이지요.
지금 막 연하신 순이 꺾이고 계신 십자가 위에 예수 그리스도 그 연한 순이 속수무책으로 죽어가고 있습니다. 때리면 맞고 십자가를 지고 가라면 지고 가고 쓰러지고 또 일어서고 못 박으면 못 박히고 옆구리를 찌르면 찔리고 옷을 벗기면 벗기우고 침 뱉음을 받으면 받고, 이렇게 참 어이없이 연약한 모습 그대로 오셨다가 연약한 모습 그대로 십자가 위에서 죽어가고 있는데 그 양 옆에 두 강도가 달렸습니다.
오늘 읽었던 누가복음 23장 39절로 43절 사이에 보면 그 두 사람 가운데 한 사람 강도는 자기의 연약한 그 창을 통해서 자기가 강도였음을 순순히 시인합니다. 강도가 강도짓 할 때에는 굉장히 강하였지만 그 강한 자기의 강함은 역시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볼 때에는 생명을 지키는 문제 앞에서 볼 때에는 아주 연약한 깨어지는 창이었습니다.
이 깨어지는 창을 통하여 자기 자신이 강도였던 것을 당연히 죽어 마땅하다는 것을 시인하면서 자기가 강도였음을 오히려 자랑합니다. 내가 지은 죄는 마땅히 이처럼 죽어야 된다 라는 것을 인정하면서 순순히 꺾여들어가고 있는 강도가 주님 옆에 있었고, 또 다른 한 편의 강도는 어떠했느냐 자기의 약점은 드러내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대하여 합당한 보응을 받으니 우리가 이처럼 죽어가는 것이 당연하다고 한 편 강도는 말하지만, 그것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향하여 "너도 살아보고 나도 살려보라. 네가 다른 사람을 많이 구했으니 혹 너는 내려가지 못하더라도 나를 한 번 내려가게 해 달라. " 하면서 불평을 합니다. 자기의 죄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죽어가면서도 인정하지 않습니다.
연한 순은 꺾였습니다. 연한 순 옆에 있는 두 강도의 모습은 하나는 연하여 스스로 자기를 드러냅니다. 죄인임을 드러냅니다. 그리고 주님께 차라리 영혼을 부탁합니다. 그러나 한 편 강도는 강하여 지금 이 육신을 살려내라고 화를 냅니다. 죄인인 자신을 드러내려고 하지 않고 자꾸 감추려고 합니다. 살아나기만 하면 얼른 내려가서 뛰어서 그저 죄인 아닌 것처럼 살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연하게 꺾이신 가운데 섰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나타난 새순은 어느 강도의 순에서 접붙여져 났습니까 그날 밤 낙원에 예수님 혼자 가 있지 않았습니다. 옆에 있던 한 강도와 같이 갔습니다. 두 강도 다 같이 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어느 강도와 같이 갔습니까 자기의 연약을 드러내고 자기의 연약을 감추지 아니한 그 강도와 함께 낙원에 가서 부활의 새 순으로 생명의 새 순으로 다시 새순을 내었던 이런 장면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보게 됩니다.
주님을 만나서 주로 말미암아 주의 꺾이신 후에 주께서 다시 돋아나게 하는 그 주님의 새순을 나의 상한 줄기의 현장에다가 접붙이고 거기에서 그 순이 새로이 뿌리를 내리게 되고 싹을 내게 만들려고 한다면 내가 어떠해야 되겠는가 연약한 나를 감추어야 되겠는가, 아니면 연약한 내 자신을 인정해야 되겠는가
삭개오가 자기의 죄인된 허물된 모습을 감추었으면 그 주님을 만날 수없었습니다. 이처럼 큰 구원의 복을 받을 수가 없었을 겁니다. 삭개오는 오히려 자기의 허물을 주님 앞에서 차라리 드러낼 때에 큰 복을 받았던 것을 우리는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께서는 주로 정죄를 받고 계십니까 이웃으로부터 비난을 주로 받고 사는 그런 형편에 계십니까 그래서 이웃으로부터 나의 잘못에 대한 비판을 받을 때 속이 많이 상하시지는 않습니까
부부간에 싸움한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알아 가지고서 이웃에 있는 집사가 말해오면 남의 사생활을 침범한다고 하면서 기분이 나쁘고, 또 내가 십일조 안 하는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저 집사는 십일조도 안 한다고 할 때 십일조 안 하는 것은 사실인데 안 한다 라고 하니까 굉장히 기분 나쁘고,
내 자식이 잘할 때도 많지만 자식이 동네 나가서 싸우고 남의 물건을 훔친 것도 사실인데 그것을 또 어떻게 알았는지 아무개 집 자식은 도둑질했단다 이렇게 하니까 사실은 사실이지만 굉장히 속이 상해가지고서 "아이고 집사 꼴 보기 싫어서 교회도 안 갈란다. " 하면서 교회를 원망하는 경우가 더러 있다고 보는데,
그렇다면 그 십자가 위에서 그 연한 순이 찢어지고 깨어지고 죽으시므로 세우신 교회이니 오늘 교회는 그의 몸인 줄로 믿습니다. 오늘 이 교회를 비난받는 일 때문에 정죄 받는 일 때문에 이웃이 내게 대하여 욕을 하는 일 때문에 교회를 원망하게 된다면 주님 십자가 옆에 있는 두 강도 가운데 누구와 같겠습니까
자기에게 약점이 있는 것은 사실인데 자기 약점을 지적하면서 당신과 나는 약점이 있으니 이와 같이 보응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라고 말할 때에 그만 기분이 상해가지고서 옆에 있는 예수를 오히려 비방하고 예수께 막 불평을 토로했던 그 한 편 강도와 다른 바가 조금도 없지 않겠습니까
다른 한 편 강도는 "여보시오, 건너편에 있는 강도여, 당신과 나는 당신과 내가 행한 일에 합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오늘 읽었던 누가복음 23장 41절에) 이와 같이 만 사람 앞에 매달리고 창피를 당하고 끝내 죽는 것이 우리의 행한 일에 비하면 당연한 것 아니냐. " 그랬습니다. 당연한 것 아니냐.
꺾이신 주님의 새순과 함께 낙원에 올라갔던 이 한 편 강도는 어떤 자세였느냐 이보다 더 큰 비난을 받을지라도 내게 지은 죄가 있으니 죄값에 해당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내가 어떻게 죄를 지었는데 아무에게도 욕을 듣지 않겠다고 내 연약의 창을 벽돌로 쌓아버려서야 되겠는가.
깨어진 유리창 안으로 도둑도 들어오지만, 우리 인생에 있어서 강하고 강한 심령 속에는 죄도 안 들어오지만 예수님도 못 들어갑니다. 바리새인들은 법을 잘 지키고 율법에 대해서 얼마나 강력했던지 자기 자신을 죄로부터 지키기 위해서, 자기 자신을 율법으로부터 어김없이 지키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하고 자기의 연약을 벽돌로 전부 커버를 해서 단단하게 쌓아버렸더니 마귀에게 시험들지는 않고 죄는 안 지었지만 구원을 가지고 사랑을 가지고 위로를 가지고 찾아가시는 예수님도 필요가 없더라 그겁니다.
오늘 사순절 기간 동안에 연한 순으로 오신 주님을 생각해 보면 어떤 자에게 가서 함께 싹을 내어주셨는가 어떤 줄기에 순을 내어주셨는가 양편 강도 중에 한 사람 "어떤 비난을 받을지라도 내가 저지른 죄에 비하면 이렇게 받아서 당연하지 않는가. 왜 불평하느냐. 불평을 할 수가 없지 않느냐. " 바로 이렇게 자기의 약점을 인정하고 비난을 받을 때에 당연하다고 주장하였던 그 사람은 그가 비록 예수님과 함께 꺾였지만 그날 밤에 낙원에서 영원한 생명의 순으로 함께 살아났던 것입니다.
주님 만나시기를 원하십니까 주로 말미암아 위로 받고 주로 말미암아 내 허물을 씻기를 원하십니까 그러면 나의 연약과 나의 허물을 남들 앞에서 감추려고만 하지 마시고 오히려 드러내 보실 수는 없겠습니까
주로 정죄를 받고 있는 형편에 있었다면 그 나무로부터 정죄를 받을 때에 비판을 받을 때에 기분이 나빠서 원망을 했다면 주님의 옆에 있는 이 강한 강도와 같았고, 혹 여러분께서 비난을 받으면 받을수록 "주여 감사합니다. 내가 이 비난을 받기에 합당한 죄를 이미 지었으니 혹 이 비난을 받는 것으로 내가 창피를 당하는 것으로 나의 죄 일부라도 사하여질 수 있는 것인지요 당연합니다. 내가 지은 죄는 죽기까지도 합당한 죄였으니 내 평생 사는 동안에 평생 손가락질을 받을지라도 이에 당연합니다. " 이런 연약의 창을 여는 사람이라면 그 연약의 창을 통하여 새 순이신 위로의 주께서, 용서의 주께서 함께 손을 잡아 주실 줄로 믿습니다.
이제 받는 입장이 아니고 정죄를 받거나 비난을 받는 입장이 아니고 반대로 비난하는 남을 비판하는 정죄하는 그런 편에서 주로 사시는 분들이 계십니까 더러 있는 줄로 압니다. 참 신기하게도 그 능력이 어디서 나왔는지 모르지만 옆에서 보지 않았는데도 참 비난 잘하는 분이 있습니다.
그리고 남을 비난하기 위해서 공짜 전화도 아닌데 전화까지 해가면서 막 아무개 아무개가 이런 잘못이 있다고 열심으로 전하는 분이 있어요. 하루 여러 차례 그것도, 참 열심입니다. 아주 그런 분들이 많지는 않지만 더러 있습니다. 그런 분들이 이제 남을 정죄하고 비판하는 그런 편에 살고 계신 분이겠지요.
잘도 압니다. 관심이 많으니까 들려지고 보여지는지 모르지만 어떻게 알았을까 싶을 정도로, 비밀이 하나도 없구나 싶을 정도로 우리 성도들 간에 그저 남을 정죄하고 비판하는 이런 경우가 많은데 그렇다면 그런 분은 마치 누구와 같으냐 간음한 여인을 치기 위해서 돌 들고 모여든 바리새인들과 같지 않겠습니까
"이 여인은 간음하였으니 우리의 돌을 맞아 죽어야 합니다. 치리이까, 말리이까" 그러나 그 치리이까 말리이까 하고 돌을 들었던 그 수많은 사람 중에 자기 자신에게 죄가 하나도 없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예수님 말씀하시기를 "너희 중에 죄 없는 사람이 먼저 돌로 치라. " 하였습니다. 아무도 칠 수 없었습니다.
우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없는 척 할 뿐이지요. 연약한 죄가 다 있습니다. 허물이 다 있습니다. 깨어진 창이 있습니다. 그 창을 통하여 도둑이 들어오듯이 시험이 들어왔습니다. 유혹이 왔고 그 유혹을 따라 산 적이 있습니다. 이런 죄가 다 있습니다.
이런 죄가 다 있음에도 불구하고 삭개오처럼 그 죄를 뽕나무 위에 내어놓으려고 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감추기 위해서 벽돌로 쌓아 버렸습니다. 죄를 속에 둔 채로 벽돌로 튼튼하게 쌓고서 오히려 죄 없음같이 보이려고 죄 없는 사람처럼 보이려고 주님의 뜻대로 다 산 것처럼 보이려고 주의 뜻대로 살지 못하는 사람을 찾아내어 돌을 들고 치려고 합니다.
그러면 객관적으로 사람들이 보면 돌 맞게 되어 있는 사람은 죄인이고 돌로서 던지는 사람들은 죄 없는 것처럼 이 세상 사람들은 보겠지만 주님은 그렇게 보지 않았습니다. "죄 지은 자도 죄인이지만 죄를 속에 감추어 둔 채로 철저히 덮어버리고 드러내지 아니하고, 남에게 욕 먹지 아니하고 속으로 죄를 악독하게 갖고 있으면서 남을 쳐 죽이려고 돌까지 들었도다. 너희는 더 악한 죄인이라. " 이렇게 한 것을 보게 됩니다.
주로 남을 비판하는 그런 형편에 있다면 '이 바리새인들과 내가 무엇이 다를까. 꼭 같구나' 하는 생각을 이 기간을 통해서 한 번 생각해 보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성도들이 당당하신 것을 보고 목사로서 참 위로를 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한 편 생각해 보면 어떻게 저렇게 당당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때로 떨쳐버릴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교회에 들어와서 주님을 구세주로 모시면서 주로 말미암아서 만이 내가 천당갈 수 있다 라고 한 분들은 다 전과가 있는데 다 죄인이었었기에 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었다 라고 말하는데, 자기의 전과를 생각하면 저렇게 어깨가 당당하고 저렇게 얼굴 빳빳하게 들고 다닐 형편이 아닌데 어째 저렇게 당당할까 하는 생각을 하다가, "과연 그리스도의 피의 능력이 강하구나. 그리스도의 사유하심이 확실하구나. 주께서 용서해 주시는 용서가 얼마나 철저했으면 전과가 있었던 것도 생각못할 정도로 저렇게 의인인 것처럼 살꼬. "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일만 죄가 있었을지라도 일만 달란트를 다 탕감받은 줄로 믿습니다. 주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는 일만 달란트의 빚도 한꺼번에 그저 아무 것도 없는 빚 없는 사람으로 만들어준 줄을 믿습니다.
그러나, 일만 달란트 탕감받은 사람에게 탕감해 주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바라는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아무 조건 없이 네가 다 갚을 수 없기에 내가 갚아주었느니라. 다 탕감해 주었느니라. 그러나 내가 네게 해 준 것처럼 네 이웃에게 그리하라. "
이 일만 달란트 탕감받았던 사람은 받기 직전에는 큰 죄인이어서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도 엎드려서 어쩔줄을 모르고 이웃 사람들에게도 그저 죄인인 것처럼 도망을 다녔는데, 탕감을 받고 나가면서 얼마나 어깨가 당당해졌던지 "나는 이제 아무 빚이 없는 사람이야. " 하면서 나가다 보니 겨우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그 백 데나리온 빚진 사람을 향하여 큰 소리 치면서 내 돈을 내어놓으라고 합니다.
자기 죄를 다 사함 받았으니 큰 소리 칠만도 하지요.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내가 네 죄를 다 사해주었으니 너의 일만 죄가 다 사함 받았느니라. 그러나 사함받은 사실은 기억하기를 바라네. 사함받았다는 사실은 기억하기를 바라네. 네가 지금 죄 없다고 하여서 네가 날 때부터 죄 없는 자가 아니라 주 예수로 말미암아 죄 없이 된 사실을 기억하기를 바라네. 그렇다면 네 이웃에게 대하여도 내가 네게 베푼 것처럼 네 이웃에게도 네가 그렇게 베풀어야 될 것이 아니냐"
주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여러분, 비판을 주로 하는 쪽에 계시다면 남을 정죄하고 남의 목을 조이는 그런 형편에 계시면서 그런 쪽에서 살아오셨다면, 탕감을 다 받았기 때문에도 그리하지 마시고 탕감을 못 받아서도 그리 하지 마시고 이 경우든지 저 경우든지 남을 정죄하고 비판하는 것은 주께는 맞지 않은 것 같습니다.
앞으로 우리가 살아가면서 비판을 받을 때에는 당연하다 여기고 감사하고 비판을 해야 될 어떤 형편이 될 때에는 내가 전에 누구였는데 생각해서 비판하지 못하는 자가 된다면, 이천년 사순절을 통하여 우리에게 나타나신 꺾이신 연한 순 예수께서 여러분의 그 약하신 비판할 거리를 보고도 비판하지 못하는 그 연약의 허물의 그 고장난 줄기에 주님의 싹이 날 줄로 믿는 것입니다.
전에 주께서 베푸시는 성찬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 안에 들어오셨습니다. 그의 살을 통하여 그의 피를 통하여 축사된 그의 포도주와 떡은 몸과 살로서 우리 안에 그 말씀과 함께 들어왔으니, 생명이 우리 안에 거하시기를 원하셨고 우리는 그의 생명을 성찬을 받으므로써 모셨습니다.
지금까지 그 사실을 인정하면 아멘 합시다. 그렇습니다. 그의 연한 순을 낼 수 있는 씨앗이 우리 안에 우리 심령 속에 살아계십니다. 그런데 평생에 그 씨가 우리 안에만 있으면 무엇하겠습니까. 우리 몸에서 그의 가지를 내어야 될 줄을 믿습니다. 그의 열매를 맺게 되어야 될 줄로 믿는 것입니다.
씨앗이 아무리 좋아도 그 씨앗을 뿌려놓은 밭이 어떠해야 싹이 납니까 좋은 씨앗을 뿌렸으니 깨끗한 씨앗을 뿌렸으니 흙이 깨끗해야 싹이 납니까 깨끗한 흙에서는 싹이 나지 않습니다. 물이 깨끗해야 고기가 사는 줄 아시지만 윗물부터 아랫물까지 다 깨끗하면 살 고기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 고기가 산란을 할 수가 없습니다.
밭도 마찬가집니다 땅도 마찬가집니다. 땅이 어떤 땅이 좋은 겁니까 아무 박테리아도 없고 깨끗하고 수분도 하나 없고 썩은 것 하나도 없이 그저 펄펄 날리면 균이 하나도 없는 그런 무균의 그리고 아무 습기가 없는 그리고 거름기가 썩은 것이 하나도 없는 그런 땅에 씨앗을 두면 일년이 가도 싹 나지 않고 이년이 가도 싹 나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언제 싹이 나기 시작합니까 거기에 물이 떨어지고 거름이 떨어지고 썩어지고 하면서 이제 그 땅이 썩어서 열을 내면서 그 싹이 이제 나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주의 성찬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우리 안에 모셨습니다. 우리 영혼에 모셨습니다. 그런데 여러분께서 팔과 다리 여러분의 온 몸에 허물이 생겼을 때 상처가 났을 때 혹은 시험을 받았을 때 도둑이 들어온 깨어진 창처럼 되었을 때 그것을 주님 앞에 드러내어 놓고 "여기에 열이 납니다. 썩어들어 갑니다. 당신 속에 있는 그 씨앗의 싹을 나의 이 곳에 드러내시옵소서" 이렇게 되어야 할텐데 벽돌로 덮어버립니다. 철저히 커버해버립니다.
저는 많은 성도님들 보면서 참으로 귀하다 다행스럽다 싶은 것이 무엇인가 하면 집집마다 참 행복한 것 같아요. 애 먹이는 자녀들도 없는 것 같아요. 사업도 다 잘되는 것 같아요 부부간에도 아주 좋은 것 같아요. 뭘 보고 제가 이렇게 말합니까 항상 저를 보면 생긋 생긋 웃고 만족스러운 것 같습니다.
거의 대부분의 가정에서 자기 자식이 잘못을 저질렀던 얘기 거의 하지 않습니다. 부부간에 틀림없이 싸움질도 많이 했을 텐데 제가 몇 년을 보면서 싸웠단 말 한 적이 거의 없습니다. 모두가 다. 그리고 교회 들어올 때 보면 둘이서 다정스럽게 들어오고 책도 서로 내어주고 헌금도 주고 이렇게 옆에 앉기도 하고.
해서 "야 참 저 집은 권태기도 없구나. " 그런 생각을 하면서 잘 지내구나 하면서 마치고 제 사무실에 올라가서 성도님들 나가실 때 어떻게 하는가 차량들 하고 복잡해서 어떻게 나가시는가 하고 이제 살펴보면, 아까 목사 앞에 들어올 때에는 그저 옆에서 아주 처음 사랑하는 것처럼 그렇게 하다가는 그냥 나갈 때에는 그냥 이십 미터 삼십 미터 갈수록 거리가 떨어지고 고개를 따로 해 가지고서 만나지도 않아요. 심지어 차도 한 차로 와 가지고서 나갈 때에는 그냥 따로 타고 가버려요.
이런 것을 보니까 분명히 사랑이 넘치는 가정이 아닌데 왜 저럴까. 그것 뭡니까 전부 덮어버렸지요. 우리 성도님들 참 많으신데 모든 자녀들이 나쁜 짓 한 아이도 안 한 것 같아요. 전부 부모님들 보면 자식 자랑만 하고 그렇습니다. 그러나 자랑스러운 것도 좋고 덮어주는 것도 좋지만 허물이 있다면 연한 순을 가지고 꺾이러 오신 우리 주님에게는 그 꺾인 것이 우리의 연한 곳에 접붙여져서 새 순을 내고 그 새 순이 내리는 뿌리가 나의 뿌리가 되도록 하기 위해서 차라리 드러내어 보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예수의 씨앗을 우리 속에 품었으니 우리 안에서 예수의 씨가 발아되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도 아시겠습니다마는 영국에서 전해오는 얘깁니다. 두 사람이 도둑질을 했는데 영국 사람이 가장 싫어하는 도둑질, 양을 도둑질했던 것 같습니다. 양을 상당히 많이 훔쳐 가지고서 이제 잡혀 들어왔는데 재판장이 이 죄수들을 감옥에 보내고서 이 죄인들을 감옥에 보낸 것으로만 만족하지 아니하고 형을 살리면서 이 죄인에게 어떤 형벌을 더 내렸는고 하면 이 죄수들의 이마에다 죄인이라고 하는 영어로 'Sinner'라고 하는 그 약자 'S'자를 각인을 시켜라 그랬습니다. 이마에다 'S'자를 도장 찍듯이 찍어라 그랬습니다.
평생에 씻지 못하도록 그것을 없애지 못하도록 그렇게 하라고 해서 그 두 죄인에게 이마에 'S'자를 붙였는데, 그렇게 한 이유는 무엇이냐 하면 평생 저 사람들을 보는 자마다 죄인인 줄을 알아서 도둑놈인 줄 알아서 조심도 하고 저 사람이 평생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받아야 한 다고 해서 이제 'S'자를 콱콱 찍었는데 이 두 사람이 다 형을 마치고 감옥에서 나옵니다.
감옥에서 나오는데 한 사람은 자기의 얼굴에 아무리 씻어도 아무리 긁어도 떠나가지 아니하는 'S'자 때문에 이 죄인이라는 'S'자 표시 때문에 굉장히 기분이 나쁘고 내가 형을 살만큼 살았는데 이 'S'자는 웬 'S'자냐 하면서 내가 동네 사람들 부끄러워서 살 수 없다 해서 저 어디 다른 곳으로 도망을 가버렸습니다. 숨어살아 버렸고.
또 다른 한 죄수는 그 안에 있으면서 주님을 만났습니다. 전도하는 자에 의해서 주님을 영접하고 내가 주님같이 살아야 되겠다 라는 생각을 하면서 부끄러움에도 불구하고 여호와 하나님 앞에 자기의 남은 삶을 바쳐야 되겠다 해서 사죄의 뜻으로 그때부터 이 'S'자를 오히려 볕을 가리기 위해서 모자를 쓸 때가 있어도 오히려 쓰지 아니하고,
"나는 죄인입니다. 나를 조심하십시오. 내가 언제 또 죄를 저지를지 모르니 여러분이 조심하면 내가 오히려 죄를 안 지을 수가 있습니다. " 하면서 내어놓고 돌아다니면서 동네에 가서 쓰레기도 치우고 이삿짐 나르는 집이 있으면 이삿짐도 옮겨주고 또 나이 많은 사람들이 있으면 부축도 해 드리고 업어도 드리고 이것을 하는데 하루 이틀 한 것이 아닙니다. 몇 년 동안을 그렇게 했어요.
그래서 처음에 많은 동네 사람들은 'S'자 붙인 이 'Sinner'라는 이 죄인 때문에 경계를 하고 조심을 했는데 이 사람이 진심한 마음으로 자꾸만 꽃을 핍니다. 그 'S'자라는 죄인의 표시에서 자꾸만 예수님 같은 생활을 나타냅니다. 이웃을 돕고 있습니다.
그래서 동네 사람들이 한 해 지내고 두 해 지내고 보니 어른들이 어떤 생각들을 하게 되었는고 하니 '아이고 전에는 저놈이 우리의 신세를 진 놈인데 우리의 것을 도둑질하고 저놈이 산 놈인데 이제는 우리가 저 죄인의 빚을 더 많이 졌지 않는가. 우리가 뺏겼던 양보다도 저 사람이 우리를 위하여 봉사한 것이 다 많으니 우리가 저 죄인에게 오히려 빛을 졌도다' 그렇게 생각하고서 이제 미안해 합니다. 그 사람이 와서 일하는 것을 오히려 이제 사양하려고 합니다.
어느 날 초등학교 손자가 찾아와서 "할아버지 저 착한 사람 이마에 왜 'S'자가 있습니까
저 'S'자가 무슨 뜻입니까" 이렇게 물었습니다. 그 할아버지가 대답하기 곤란하지요. 이 어린아이가 착한 아저씨를 보고 저 'S'자의 의미를 묻는데 멈칫하다가 "아마 내가 알기로는 저 사람의 이마에 있는 것은 저 사람이 그동안 우리들 보는 앞에서 행한 행실 그대로 아마 'Saint'라고 하는 거룩한 사람이다 성자다 하는 뜻에서 'S'자를 표시했을 것이야. "라고 설명을 해 주었답니다.
그랬더니 그 손자가 "할아버지 과연 그렇군요. " 하면서 그 'S'자 아저씨에게 가서 "성자씨여, 성자씨여" 하면서 따라다녔다는 겁니다. 그는 그 'S'자가 죄수요 양을 도둑질한 죄인이었지만 그러한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아니하고 오히려 내어놓고 자기의 역점을 드러내어 놓고 그 약점 가진 사람처럼 'S'자 가진 사람처럼 하지 아니하고 자기에 꺾여 들어오신 자기 영혼 속에 들어오신 예수님의 순을 내었더라 그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모시고 있으면서 과연 예수님의 순을 남들로 하여금 보게 하고 사는지. 아니면 예수님은 예수님대로 내 안에 몇 년이 계시던지 싹 내지 말고 가만 계시도록 해 놓고 나의 약점을 덮어버리면서 의로운 사람처럼 사는지….
가출한 딸의 얼굴을 자기 얼굴로 가리우고 그 상한 딸의 갈대를 꺾지 않으려고 그의 이름을 거리에 나가서 들리게 부르지 아니하고 그 우범지역에 자기의 사진을 갖다 걸고 딸의 이름이 크리스티나지만 그 이름도 기록하지 아니하고 그저 돌아오라고만 말하였던 그 브라질의 마리아라고 하는 그 여인을 제가 이번 기간동안 소개한 바가 있는데, 그의 그런 모습을 보고 많은 어머니들이 그 예화를 들 때에 많은 어머니들이 '아. 아' 탄성을 자아내면서 귀한 어머니였구나 하는 것을 보고 저는 또 한 번 놀랬습니다.
어머니면 당연히 다 그렇게 하고 계신 줄 알았더니 그렇게 하지 못했구나, 자식을 사랑한다지만 이 소개된 여인같이 못했구나 생각하면서 또 한 번 제가 생각을 가다듬어 보았습니다. 그렇다. 이 세상 어느 나라 어느 곳에서도 부모가 아무리 자식을 사랑해도 이 여인같이 할 수 없었는데 특별난 이런 특별난 케이스가 있으니 이것이 온 세계에 소개된 것 아니겠는가.
그러면 이 특별한 여인은 누구와 같았는가 예수님의 보통 사건과 같았다 그것입니다. 예수님의 생활은 그것이 보통 생활이었던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 여인으로 소개되었던 예수님, 그 예수님의 그 여인같은 순을 여러분의 그 썩어가는 줄기에서 돋아나오게 해 보시지 않으시겠습니까
허물을 감추지만 마시고 깨어진 창을 다시는 깨어지지 않겠다고 벽돌로 막아버리지만 마시고 시험 들어온 마음이지만 마음이 흔들리고 여릴 때에 성령도 그 심령을 따라 들어오시는 겁니다. 시험 들어오는 길 다르고 예수님 들어오는 길 다르고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 너무 마음이 굳건해서 마귀도 닫아 버리고 예수도 닫아버리고 하지 마시고, 혹 여러분이 시험에 들었다면 그 약점을 감추려고만 하지 마시고 오히려 드러내어 이처럼 연한 순으로 찾아오시는 주님을 여러분의 그 썩어가는 마디에서 새 순으로 새 싹으로 나게 해보시기를 바랍니다.
어느 카펫 기술자가 물론 자기가 그 사실을 모르고 앵무새를 짖이기고 그것도 안되니까 납작하게 만들어버리고서 그 죽여버린 앵무새 탓에 돈도 벌고 초대되어 칭찬도 듣고 그리고 술도 마시며 춤도 추었다는 얘기를 함께 우리가 나누어보았습니다마는 우린들 그 카펫 기술자와 뭐가 다를 것이 있겠습니까
그 카펫 기술자가 모르고 앵무새를 죽였던 것처럼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서 고난받게 하지는 않았습니다. 알고서 십자가에 올라가도록 하지는 않았습니다.
이렇게 구원받고 사망으로 지옥으로 갈 수밖에 없는 우리가 영원한 천국으로 갈 수 있게 되어서 귀한 천국 복음을 듣게 되어서 어떻게 되어서 이것이 가능했던가 생각해보니, 그때는 몰랐지만 이 카펫 기술자가 앵무새를 짖이기고 밟고 때리고 평평하게 만들어서 돈도 벌고 칭찬도 듣고 즐거움을 누릴 수 있었던 것처럼 오늘 우리가 이처럼 돈도 벌고 영혼도 천국 길을 행하고 당당하게 살수 있는 것이 다른 이유 전혀 없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가 죽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를 짓밟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의 죽음 위에서 우리가 이렇게 살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삭개오 그 집에 예수님 들어오시니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처럼 존경받던 예수님은 순식간에 삭개오 집에 들어감으로써 그 따르던 모든 사람들에게서 얼마나 욕을 많이 먹었는지 모릅니다. "저러고도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인가. 저러고도 어떻게 죄인과 함께 있으면서도 천국 복음이고 어쩌고 하느냐. 삭개오 같은 사람과 한 집에서 유하게 되었으니 죄인과 함께 있으니 죄인이 아닌가. "
예수님은 많은 욕을 먹었습니다마는 예수님이 욕을 바가지로 먹는 동안에 삭개오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얼마나 기분이 좋았던지 "내가 뉘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 배나 갚겠사오며 나의 이 많은 재산 절반을 정리해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습니다. " 여러분, 많은 재산 처리를 해서 가난한 자들에게 반이나 떼어주고 토색한 것이 있으면 사 배나 갚겠다고 이렇게 설치고 나온다면 그사람 기분 알 만하지 않겠습니까.
누구를 욕먹이고 삭개오가 이렇게 기분이 좋은 겁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욕먹이고 삭개오는 그렇게 기분이 좋은 겁니다. 그렇다 라고 해서 그리하지 말아야 하겠습니까 그리하지 말 수도 없는 것이 저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이처럼 살게 된 것이지요.
지난 사순절 만찬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 곧 그의 생명과 그의 성품의 그 인자가 우리들 안에 들어와 계십니다. 성찬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우리 안에 모셨는데 그때 이후로 예수의 새순을 얼마나 다른 사람 앞에 보여지게 했습니까
그때 이후로도 내가 여전하게 자랑만 하고 있습니까 교만만 하고 있습니까 남에게 합당한 이 정죄를 받고도 합당한 비난을 받고도 남이 내게 대하여 어떤 말을 하면 그렇게 듣기 싫었습니까 그렇다면 전에와 다를 바가 뭐가 있겠습니까 여러분은 전과 똑같지만 여러분 속에 있는 예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여전하게 남을 비판하고 있습니까 남을 정죄하고 있습니까 남의 약점을 손가락질하고 욕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둘 중의 하나입니다. 죄를 갖고 있으면서도 자기의 죄를 커버하기 위해서 돌을 들었던 바리새인과 같든지, 아니면 일만 달란트 탕감을 받았기 때문에 나는 아무 죄가 털끝 눈끝만큼도 죄가 없다 라고 여겨서 죄 없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래서 남을 비판하십니까
이 경우든지 저 경우든지 비판하지 마십시오. 우리 속에 들어있는 예수님은 비판받을 사람의 이름을 거리에 들리게 부르지 않았습니다.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시고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시려고 자신을 사방에다가 십자가 위에 내어다 걸었습니다.
우리는 그의 십자가 선 곳을 말하여 저 은밀한 계곡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케년(canyon)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갈보리산 위에 골고다 언덕이라고 합니다. 만 사람이 볼 수 있는데 자기의 가장 부끄러움을 내어다 걸었습니다. 그래도 그림을 보면 몸에다 홍포인지 수건인지 허리춤에 조금은 걸쳐는 놓았습니다마는도 걸쳐졌던지 안 걸쳐졌던지 사실 따지고 보면 더 이상 부끄러울 수 없는 그 부끄러움을 숨겨놓지 아니하고 맨 위에 드러내어 놓았습니다.
그렇게 하여 찢어주신 살과 그렇게 하여 흘려주신 피를 우리 속에 들게 해 주셨고 그 생명과 함께 우리 안에 오시었으니 그 씨앗이 여러 해 동안 그냥 있게 마시고 이제는 우리가 우리의 옛 모습으로 살지 마시고 우리에게서 예수의 이파리가 피어나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의 열매가 맺히도록 이 해를 살아보시기를 부탁합니다.
104 장 찬송합시다.
주님의 연한 순이 십자가 위에서 꺾여집니다. 꺾여진 순이 땅속으로 들어가 흙으로 돌아가버리고 말지 않습니다. 꺾여지면 곧 생명으로 새 순을 내려합니다. 새 싹을 내려합니다. 우리는 그의 십자가로서 새운 그의 교회 앞에 왔습니다.
어느 편 쪽의 강도입니까 우리는 비난을 받아 마땅하고 이같은 어려움을 당해 마땅하다고 여깁니까 아니면 죄는 그같은 비난을 받아 마땅할 만큼 짓고서도 비난하는 것이 싫어서, 억울해서 교회가 싫다면 바로 주님이 싫은 것인데 그같이 주님을 비방하던 강도와 같습니까
간음한 여인을 향하여 돌을 든 바리새인과 같습니까 나도 따지고 보면 죄가 있으면서 남들 보기에 죄가 보이지 않도록 철저히 덮어버리고 몇 년 동안을 죄짓지 않고 산 사람처럼 주의 뜻대로 다 하고 산 사람처럼 그래서 다른 사람 죄인을 향하여 돌을 들어 던지면 남보기에 나는 의로운 것처럼 그렇게 생각하는 분이 계십니까 그런 분이라도 주께 맞지 않습니다. 그것은 바리새인이었습니다.
아니면 우리의 모든 죄를 주로 말미암아 다 용서받았기 때문에 일만 달란트 일만 죄를 완전히 용서받은 이유 때문에 아무 죄 없게된 이같은 축복 때문에 이제는 죄짓는 사람을 보고서 비난할 수 있겠습니까 그 경우도 주께는 맞지 않다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가 이처럼 사는 것은 삭개오처럼 예수님 욕 먹이고 우리는 즐거움을 찾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삭개오의 이같은 복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자기의 그 허물을 군중 속에다 감추지 않았습니다. 군중 뒤에 따라가면서 주님에게 안 들키려 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에게 자기의 약점을 보여보려고 온갖 비난받는 자기를 주님에게 보여보려고 뽕나무 위에 올라가서 드러내었습니다.
여러분의 그 연약한 부분을 그 욕먹는 부분을 욕먹어 마땅해서 먹지만 그 욕먹는 부분을 싫어만 말고 감추려고만 하지 말고 차라리 핍박받고 비난받고 간음한 여인처럼 그 돌들 앞에 엎어져 보십시오. 혈루증 열두 해 여인처럼 엎어져보십시오. 거기에 연한 순으로 오셔서 꺾이셨던 주님이 새 싹으로 곧 나타나게 될 줄을 믿습니다.
예수의 그 연한 순은 탄생할 때부터 죽으실 때까지 스스로 강하려고 하지 않고 끝까지 약하셨습니다. 약함 가지고 오셨고 약함 가지고 가셨는데 그 약함 가진 자에게 능력 주시는 자인 여호와 하나님께서 능력으로 역사 하시니, 예수 안에서 하늘 나라의 힘을 얻어서 하늘 이파리를 펼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합니다. 기도합시다.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십시다. 대체로 창문이 많은 그런 집을 가지고 살던 사람에게 어느 날 그 창문을 통해서 도둑이 들어왔습니다. 그 도둑이 들어와서 약간의 물건을 훔쳐간 것 같은데 그 도둑이 유리창으로 또 들어올까바 그 주인이 바로 그 뒷날 기술자를 불러서 그 깨어지기 쉬운 유리창문마다 벽돌로다 굳게굳게 막아버렸다면, 또 뜯을 수도 없도록 깨지도 못하도록 그렇게 털어 막았다면 과연 그 집이 어떻게 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연약한 창문을 벽돌로 막았으니 도둑은 들어오지 않겠습니다마는 또 아울러서 공기도 들어오지 않고 햇빛도 들어오지 않을 테니 환기도 되지 아니하고 빛도 그 집안으로 전혀 들어오지 않으니 집안에 있는 화초도 죽을 것이고 어항에 있는 고기도 죽을 것이고, 그러니 튼튼하게 방어한 그 벽체의 집안에서도 사람인들 어찌 살겠는가 하는 생각을 한 번 해 보게 됩니다.
누가복음 19장 9절에 보면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하는 말씀을 주님께서 하셨는데 그 집이 누구 집이었겠습니까 삭개오의 집 아니겠습니까 이 삭개오는 만 사람이 다 그를 비난하여 죄인이라 했습니다. 과연 그러했던 것 같습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보아도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 라고 하는 것 보니까 죽을 수밖에 없는 자리에 있는 자를 살렸다, 또 이제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었다 라고 하는 것으로 보아서 주님이 그 집에 들어가기 이전까지는 그는 그야말로 잘 사는 부자요 또 권세 있는 세리장이었지만 그러나 영적으로 큰 죄인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이처럼 죄인이었기 때문에 이렇게 그 비난받을 수밖에 없는 형편에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그를 불러내렸고 그의 집에 들어가게 되었던 것이지요. 만약에 이 삭개오가 아무런 죄가 없었다면, 의인 중에 의인같이 살고 있었다면 주님이 그 집에 들어가지도 않았을 것이고 또 들어가셨더라도 구원을 했느니 용서를 했느니 혹은 아브라함의 자손이 이제 되었느니 이런 말씀은 안 할 겁니다.
여기에서 제가 이 사순절 시리즈를 마감하면서 우리 성도님들께 한 번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병은 자랑해야 한다 라고 하듯이 우리 각 인에게는 각각 연약한 부분이 있겠습니다. 허물스러운 부분도 있고 죄도 있겠는데 이러한 것에 대하여 감추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라는 겁니다. 죄짓지 않고 평생 주의 뜻대로 잘 사는 것 물론 좋습니다마는 그러나 죄짓고 약하여지고 허물이 있다는 것 자체도 크게 나쁜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예를 들면 이 삭개오의 경우를 보면 자기가 죄인인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지 않게 하기 위해서, 또 특히 예수님에게는 자기의 죄스러운 부분을 들키게 하지 아니하기 위해서 그 많은 여리고의 에워싼 사람들 한 복판쯤 들어가서 키도 작고 하니 그 사람들 사이에 따라서 돌아다녔다면 예수님이 그 사람을 특별히 찾아낼 이유가 없겠습니다.
또 자기의 허물을 감추기 위해서, 특히 예수님에게 자기의 허물스러운 면이 들키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저 사람들 맨 뒤에 예수님과 가장 먼 곳에 위치해 가지고서 혹 따라가거나 자기 집에 있었더라면 정말 이 삭개오같은 즐거움은 없었을 겁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그런 일은 없었을 겁니다.
이 삭개오의 경우 자기가 죄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에게 혹 그것이 알려져서 자존심 상하기는 했지만 자존심보다는 더 중요한 것은 주님을 한 번 만나봐야 되겠다, 주님을 한 번 내가 가까이에서 뵈어야 되겠다 하는 생각이 더 앞섰기 때문에 그가 관중 속으로 뛰어들어가서도 자기가 표가 나지 아니하고 관중들 앞에 가서도 자꾸만 뒤로 밀쳐지고 그렇게 되니 뽕나무 위에로 올라갔습니다.
그러므로 자기의 허물스러운 자기의 그 육신을 뽕나무 위에 올려 놓으므로써, 즉 감추지 아니하므로써 자기의 그 약점을 깨어질 수밖에 없는 유리창같은 자기의 그 연약한 모습을 드러내므로써 주님을 만날 수 있었다 라는 것입니다.
연한 순으로 오신 주께서는 어떤 자를 만나주시느냐 강하고 죄 없고 의원이 필요없는 그런 자에게 찾아가기를 우선하는 것이 아니라, 죄 많고 허물 많고 병들고 죽어가는 그런 자를 찾으시고 그런 자를 구원하기 위해서 오셨던 연한 순이신 주님이시기에 이런 주님을 자주 만났던 바울같은 이는 고린도후서 12장 9절 말씀에 보면,
"나는 혹 내 개인의 자랑을 했을지라도 그것은 너희의 유익을 위해서 했을 뿐이지 나는 자랑할 것이 없노라. 자랑하지 않노라. 그러나 내가 다만 자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나의 연약함 그 자체로다. 나는 나의 연약한 것을 자랑하노니 나의 이 연약한 데서 나의 이 약한 데서 여호와 하나님의 큰 능력이 나타나서 나의 약함 때문에 나를 온전하게 했느니라. 만약 내가 강해서 내 자신이 밀고 나갔다면 어느 정도 갔다가 쓰러졌겠지만 내가 마냥 약하다 보니 여호와 하나님께서 약한 나에게 마냥 크신 능력으로 함께 해 주셔서 오히려 능력 주시는 그 분을 통해서 내가 완전하여졌느니라. " 이런 말씀을 고백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주님은 이 땅에 연한 순으로 오셨습니다.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고, 상상해 보십시오.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라면 무슨 통통하겠습니까 형편없지요. 또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었습니다. 이사야서 53장에 소개된 대로 보면 아무도 그를 인정해 주지 않았고 싫어 버린바 된 그런 분이었습니다.
그는 가능하였지만 아버지 여호와 하나님께 강력한 가시나무로 태어나게 해 달라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강력한 단단한 나무이기를 구하지 않았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면서도 그는 강력한 자기 되기를 구하지 않았습니다. 혹 내가 강력할 때가 있다면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다만 강력할 뿐이지 나는 내 자신이 강한 자가 되기를 구치 않노라 라고 했습니다.
빌립보서 4장 13절에 나타난 대로 내가 혹 강력해서 귀신을 쫓아내고 병든 자를 고치고 큰 이적을 행한다면 그것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 있어서 내게서 나타나는 그의 능력으로 이것이 가능한 것이지 내 자신이 능력자가 되지 않겠다 했습니다. 그는 생애 끝까지 그렇게 했습니다.
마태복음 27장 42절에 보면 강도가 그를 향하여 말합니다. 또 대제사장과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십자가에 달려 하염없이 하염없이 연한 순으로 꺾여져 가고 있는, 그래서 막 생명의 불이 꺼져가는 그를 향하여 침을 으며 손가락질하면서 말하기를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어찌 자기 자신을 구원하지 못하는가" 이렇게 비방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아주 연한 모습으로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이 오셨지만, 참으로 약하게 나타나셨지만,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 약한 예수님과 강한 여호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므로 많은 역사를 해서 남을 구원했습니다. 죽은 자를 살리고 큰 이적을 베풀었고 그리고 바람과 파도도 잔잔하게 하는 놀라운 역사를 했습니다마는, 마지막 예수님 자신이 죽게 되었을 때 붙들리게 되었을 때 지금까지 했던 어떤 기도보다도 강한 기도를 했습니다. 땀이 피가 되어 쏟아질 만큼 기도했다고 했습니다.
"아버지여 웬만하시면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가게 하소서 이 고난을 면케 하소서. 죽지 않게 하소서. " 그렇게 기도했지만 그동안 능력 주시던 자가 아무 말씀 아니하시니, 네 기도를 내가 들어준다 말씀 아니하시니 그는 참으로 어이없이 약한 자였습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이 예수님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대단한 능력자인 줄로 아는데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실 때에 연한 순으로 오셔서 꺾일 때에도 연한 순으로 꺾이셨던 겁니다. 마지막 순간에 여호와 하나님이 아니시면 아무 것도 자기를 위해서는 할 수 없었던 분이십니다. 일생이 그러하였습니다.
연한 순은 이처럼 꺾이기도 잘 합니다마는 새 순이 나려면 역시 그 꺾인 연한 데서 잘 나옵니다. 또 그 가지가 연할 때에 순이 나올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접목을 할 때 접붙이기를 할 때에도 연한 순을 꺾어서 연한 가지에다 접을 붙이는 것이지, 연한 순을 꺾어 가지고 딱딱한 나무 둥치에다 접붙이지 않습니다. 붙여지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이 접붙이는 기간도 언제든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주 물이 올라서 연할 그때에 그 연한 가지를 꺾어서 연한 부위에다가 접붙이는 것이지요.
지금 막 연하신 순이 꺾이고 계신 십자가 위에 예수 그리스도 그 연한 순이 속수무책으로 죽어가고 있습니다. 때리면 맞고 십자가를 지고 가라면 지고 가고 쓰러지고 또 일어서고 못 박으면 못 박히고 옆구리를 찌르면 찔리고 옷을 벗기면 벗기우고 침 뱉음을 받으면 받고, 이렇게 참 어이없이 연약한 모습 그대로 오셨다가 연약한 모습 그대로 십자가 위에서 죽어가고 있는데 그 양 옆에 두 강도가 달렸습니다.
오늘 읽었던 누가복음 23장 39절로 43절 사이에 보면 그 두 사람 가운데 한 사람 강도는 자기의 연약한 그 창을 통해서 자기가 강도였음을 순순히 시인합니다. 강도가 강도짓 할 때에는 굉장히 강하였지만 그 강한 자기의 강함은 역시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볼 때에는 생명을 지키는 문제 앞에서 볼 때에는 아주 연약한 깨어지는 창이었습니다.
이 깨어지는 창을 통하여 자기 자신이 강도였던 것을 당연히 죽어 마땅하다는 것을 시인하면서 자기가 강도였음을 오히려 자랑합니다. 내가 지은 죄는 마땅히 이처럼 죽어야 된다 라는 것을 인정하면서 순순히 꺾여들어가고 있는 강도가 주님 옆에 있었고, 또 다른 한 편의 강도는 어떠했느냐 자기의 약점은 드러내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대하여 합당한 보응을 받으니 우리가 이처럼 죽어가는 것이 당연하다고 한 편 강도는 말하지만, 그것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향하여 "너도 살아보고 나도 살려보라. 네가 다른 사람을 많이 구했으니 혹 너는 내려가지 못하더라도 나를 한 번 내려가게 해 달라. " 하면서 불평을 합니다. 자기의 죄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죽어가면서도 인정하지 않습니다.
연한 순은 꺾였습니다. 연한 순 옆에 있는 두 강도의 모습은 하나는 연하여 스스로 자기를 드러냅니다. 죄인임을 드러냅니다. 그리고 주님께 차라리 영혼을 부탁합니다. 그러나 한 편 강도는 강하여 지금 이 육신을 살려내라고 화를 냅니다. 죄인인 자신을 드러내려고 하지 않고 자꾸 감추려고 합니다. 살아나기만 하면 얼른 내려가서 뛰어서 그저 죄인 아닌 것처럼 살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연하게 꺾이신 가운데 섰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나타난 새순은 어느 강도의 순에서 접붙여져 났습니까 그날 밤 낙원에 예수님 혼자 가 있지 않았습니다. 옆에 있던 한 강도와 같이 갔습니다. 두 강도 다 같이 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어느 강도와 같이 갔습니까 자기의 연약을 드러내고 자기의 연약을 감추지 아니한 그 강도와 함께 낙원에 가서 부활의 새 순으로 생명의 새 순으로 다시 새순을 내었던 이런 장면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보게 됩니다.
주님을 만나서 주로 말미암아 주의 꺾이신 후에 주께서 다시 돋아나게 하는 그 주님의 새순을 나의 상한 줄기의 현장에다가 접붙이고 거기에서 그 순이 새로이 뿌리를 내리게 되고 싹을 내게 만들려고 한다면 내가 어떠해야 되겠는가 연약한 나를 감추어야 되겠는가, 아니면 연약한 내 자신을 인정해야 되겠는가
삭개오가 자기의 죄인된 허물된 모습을 감추었으면 그 주님을 만날 수없었습니다. 이처럼 큰 구원의 복을 받을 수가 없었을 겁니다. 삭개오는 오히려 자기의 허물을 주님 앞에서 차라리 드러낼 때에 큰 복을 받았던 것을 우리는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께서는 주로 정죄를 받고 계십니까 이웃으로부터 비난을 주로 받고 사는 그런 형편에 계십니까 그래서 이웃으로부터 나의 잘못에 대한 비판을 받을 때 속이 많이 상하시지는 않습니까
부부간에 싸움한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알아 가지고서 이웃에 있는 집사가 말해오면 남의 사생활을 침범한다고 하면서 기분이 나쁘고, 또 내가 십일조 안 하는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저 집사는 십일조도 안 한다고 할 때 십일조 안 하는 것은 사실인데 안 한다 라고 하니까 굉장히 기분 나쁘고,
내 자식이 잘할 때도 많지만 자식이 동네 나가서 싸우고 남의 물건을 훔친 것도 사실인데 그것을 또 어떻게 알았는지 아무개 집 자식은 도둑질했단다 이렇게 하니까 사실은 사실이지만 굉장히 속이 상해가지고서 "아이고 집사 꼴 보기 싫어서 교회도 안 갈란다. " 하면서 교회를 원망하는 경우가 더러 있다고 보는데,
그렇다면 그 십자가 위에서 그 연한 순이 찢어지고 깨어지고 죽으시므로 세우신 교회이니 오늘 교회는 그의 몸인 줄로 믿습니다. 오늘 이 교회를 비난받는 일 때문에 정죄 받는 일 때문에 이웃이 내게 대하여 욕을 하는 일 때문에 교회를 원망하게 된다면 주님 십자가 옆에 있는 두 강도 가운데 누구와 같겠습니까
자기에게 약점이 있는 것은 사실인데 자기 약점을 지적하면서 당신과 나는 약점이 있으니 이와 같이 보응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라고 말할 때에 그만 기분이 상해가지고서 옆에 있는 예수를 오히려 비방하고 예수께 막 불평을 토로했던 그 한 편 강도와 다른 바가 조금도 없지 않겠습니까
다른 한 편 강도는 "여보시오, 건너편에 있는 강도여, 당신과 나는 당신과 내가 행한 일에 합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오늘 읽었던 누가복음 23장 41절에) 이와 같이 만 사람 앞에 매달리고 창피를 당하고 끝내 죽는 것이 우리의 행한 일에 비하면 당연한 것 아니냐. " 그랬습니다. 당연한 것 아니냐.
꺾이신 주님의 새순과 함께 낙원에 올라갔던 이 한 편 강도는 어떤 자세였느냐 이보다 더 큰 비난을 받을지라도 내게 지은 죄가 있으니 죄값에 해당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내가 어떻게 죄를 지었는데 아무에게도 욕을 듣지 않겠다고 내 연약의 창을 벽돌로 쌓아버려서야 되겠는가.
깨어진 유리창 안으로 도둑도 들어오지만, 우리 인생에 있어서 강하고 강한 심령 속에는 죄도 안 들어오지만 예수님도 못 들어갑니다. 바리새인들은 법을 잘 지키고 율법에 대해서 얼마나 강력했던지 자기 자신을 죄로부터 지키기 위해서, 자기 자신을 율법으로부터 어김없이 지키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하고 자기의 연약을 벽돌로 전부 커버를 해서 단단하게 쌓아버렸더니 마귀에게 시험들지는 않고 죄는 안 지었지만 구원을 가지고 사랑을 가지고 위로를 가지고 찾아가시는 예수님도 필요가 없더라 그겁니다.
오늘 사순절 기간 동안에 연한 순으로 오신 주님을 생각해 보면 어떤 자에게 가서 함께 싹을 내어주셨는가 어떤 줄기에 순을 내어주셨는가 양편 강도 중에 한 사람 "어떤 비난을 받을지라도 내가 저지른 죄에 비하면 이렇게 받아서 당연하지 않는가. 왜 불평하느냐. 불평을 할 수가 없지 않느냐. " 바로 이렇게 자기의 약점을 인정하고 비난을 받을 때에 당연하다고 주장하였던 그 사람은 그가 비록 예수님과 함께 꺾였지만 그날 밤에 낙원에서 영원한 생명의 순으로 함께 살아났던 것입니다.
주님 만나시기를 원하십니까 주로 말미암아 위로 받고 주로 말미암아 내 허물을 씻기를 원하십니까 그러면 나의 연약과 나의 허물을 남들 앞에서 감추려고만 하지 마시고 오히려 드러내 보실 수는 없겠습니까
주로 정죄를 받고 있는 형편에 있었다면 그 나무로부터 정죄를 받을 때에 비판을 받을 때에 기분이 나빠서 원망을 했다면 주님의 옆에 있는 이 강한 강도와 같았고, 혹 여러분께서 비난을 받으면 받을수록 "주여 감사합니다. 내가 이 비난을 받기에 합당한 죄를 이미 지었으니 혹 이 비난을 받는 것으로 내가 창피를 당하는 것으로 나의 죄 일부라도 사하여질 수 있는 것인지요 당연합니다. 내가 지은 죄는 죽기까지도 합당한 죄였으니 내 평생 사는 동안에 평생 손가락질을 받을지라도 이에 당연합니다. " 이런 연약의 창을 여는 사람이라면 그 연약의 창을 통하여 새 순이신 위로의 주께서, 용서의 주께서 함께 손을 잡아 주실 줄로 믿습니다.
이제 받는 입장이 아니고 정죄를 받거나 비난을 받는 입장이 아니고 반대로 비난하는 남을 비판하는 정죄하는 그런 편에서 주로 사시는 분들이 계십니까 더러 있는 줄로 압니다. 참 신기하게도 그 능력이 어디서 나왔는지 모르지만 옆에서 보지 않았는데도 참 비난 잘하는 분이 있습니다.
그리고 남을 비난하기 위해서 공짜 전화도 아닌데 전화까지 해가면서 막 아무개 아무개가 이런 잘못이 있다고 열심으로 전하는 분이 있어요. 하루 여러 차례 그것도, 참 열심입니다. 아주 그런 분들이 많지는 않지만 더러 있습니다. 그런 분들이 이제 남을 정죄하고 비판하는 그런 편에 살고 계신 분이겠지요.
잘도 압니다. 관심이 많으니까 들려지고 보여지는지 모르지만 어떻게 알았을까 싶을 정도로, 비밀이 하나도 없구나 싶을 정도로 우리 성도들 간에 그저 남을 정죄하고 비판하는 이런 경우가 많은데 그렇다면 그런 분은 마치 누구와 같으냐 간음한 여인을 치기 위해서 돌 들고 모여든 바리새인들과 같지 않겠습니까
"이 여인은 간음하였으니 우리의 돌을 맞아 죽어야 합니다. 치리이까, 말리이까" 그러나 그 치리이까 말리이까 하고 돌을 들었던 그 수많은 사람 중에 자기 자신에게 죄가 하나도 없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예수님 말씀하시기를 "너희 중에 죄 없는 사람이 먼저 돌로 치라. " 하였습니다. 아무도 칠 수 없었습니다.
우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없는 척 할 뿐이지요. 연약한 죄가 다 있습니다. 허물이 다 있습니다. 깨어진 창이 있습니다. 그 창을 통하여 도둑이 들어오듯이 시험이 들어왔습니다. 유혹이 왔고 그 유혹을 따라 산 적이 있습니다. 이런 죄가 다 있습니다.
이런 죄가 다 있음에도 불구하고 삭개오처럼 그 죄를 뽕나무 위에 내어놓으려고 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감추기 위해서 벽돌로 쌓아 버렸습니다. 죄를 속에 둔 채로 벽돌로 튼튼하게 쌓고서 오히려 죄 없음같이 보이려고 죄 없는 사람처럼 보이려고 주님의 뜻대로 다 산 것처럼 보이려고 주의 뜻대로 살지 못하는 사람을 찾아내어 돌을 들고 치려고 합니다.
그러면 객관적으로 사람들이 보면 돌 맞게 되어 있는 사람은 죄인이고 돌로서 던지는 사람들은 죄 없는 것처럼 이 세상 사람들은 보겠지만 주님은 그렇게 보지 않았습니다. "죄 지은 자도 죄인이지만 죄를 속에 감추어 둔 채로 철저히 덮어버리고 드러내지 아니하고, 남에게 욕 먹지 아니하고 속으로 죄를 악독하게 갖고 있으면서 남을 쳐 죽이려고 돌까지 들었도다. 너희는 더 악한 죄인이라. " 이렇게 한 것을 보게 됩니다.
주로 남을 비판하는 그런 형편에 있다면 '이 바리새인들과 내가 무엇이 다를까. 꼭 같구나' 하는 생각을 이 기간을 통해서 한 번 생각해 보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성도들이 당당하신 것을 보고 목사로서 참 위로를 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한 편 생각해 보면 어떻게 저렇게 당당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때로 떨쳐버릴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교회에 들어와서 주님을 구세주로 모시면서 주로 말미암아서 만이 내가 천당갈 수 있다 라고 한 분들은 다 전과가 있는데 다 죄인이었었기에 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었다 라고 말하는데, 자기의 전과를 생각하면 저렇게 어깨가 당당하고 저렇게 얼굴 빳빳하게 들고 다닐 형편이 아닌데 어째 저렇게 당당할까 하는 생각을 하다가, "과연 그리스도의 피의 능력이 강하구나. 그리스도의 사유하심이 확실하구나. 주께서 용서해 주시는 용서가 얼마나 철저했으면 전과가 있었던 것도 생각못할 정도로 저렇게 의인인 것처럼 살꼬. "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일만 죄가 있었을지라도 일만 달란트를 다 탕감받은 줄로 믿습니다. 주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는 일만 달란트의 빚도 한꺼번에 그저 아무 것도 없는 빚 없는 사람으로 만들어준 줄을 믿습니다.
그러나, 일만 달란트 탕감받은 사람에게 탕감해 주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바라는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아무 조건 없이 네가 다 갚을 수 없기에 내가 갚아주었느니라. 다 탕감해 주었느니라. 그러나 내가 네게 해 준 것처럼 네 이웃에게 그리하라. "
이 일만 달란트 탕감받았던 사람은 받기 직전에는 큰 죄인이어서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도 엎드려서 어쩔줄을 모르고 이웃 사람들에게도 그저 죄인인 것처럼 도망을 다녔는데, 탕감을 받고 나가면서 얼마나 어깨가 당당해졌던지 "나는 이제 아무 빚이 없는 사람이야. " 하면서 나가다 보니 겨우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그 백 데나리온 빚진 사람을 향하여 큰 소리 치면서 내 돈을 내어놓으라고 합니다.
자기 죄를 다 사함 받았으니 큰 소리 칠만도 하지요.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내가 네 죄를 다 사해주었으니 너의 일만 죄가 다 사함 받았느니라. 그러나 사함받은 사실은 기억하기를 바라네. 사함받았다는 사실은 기억하기를 바라네. 네가 지금 죄 없다고 하여서 네가 날 때부터 죄 없는 자가 아니라 주 예수로 말미암아 죄 없이 된 사실을 기억하기를 바라네. 그렇다면 네 이웃에게 대하여도 내가 네게 베푼 것처럼 네 이웃에게도 네가 그렇게 베풀어야 될 것이 아니냐"
주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여러분, 비판을 주로 하는 쪽에 계시다면 남을 정죄하고 남의 목을 조이는 그런 형편에 계시면서 그런 쪽에서 살아오셨다면, 탕감을 다 받았기 때문에도 그리하지 마시고 탕감을 못 받아서도 그리 하지 마시고 이 경우든지 저 경우든지 남을 정죄하고 비판하는 것은 주께는 맞지 않은 것 같습니다.
앞으로 우리가 살아가면서 비판을 받을 때에는 당연하다 여기고 감사하고 비판을 해야 될 어떤 형편이 될 때에는 내가 전에 누구였는데 생각해서 비판하지 못하는 자가 된다면, 이천년 사순절을 통하여 우리에게 나타나신 꺾이신 연한 순 예수께서 여러분의 그 약하신 비판할 거리를 보고도 비판하지 못하는 그 연약의 허물의 그 고장난 줄기에 주님의 싹이 날 줄로 믿는 것입니다.
전에 주께서 베푸시는 성찬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 안에 들어오셨습니다. 그의 살을 통하여 그의 피를 통하여 축사된 그의 포도주와 떡은 몸과 살로서 우리 안에 그 말씀과 함께 들어왔으니, 생명이 우리 안에 거하시기를 원하셨고 우리는 그의 생명을 성찬을 받으므로써 모셨습니다.
지금까지 그 사실을 인정하면 아멘 합시다. 그렇습니다. 그의 연한 순을 낼 수 있는 씨앗이 우리 안에 우리 심령 속에 살아계십니다. 그런데 평생에 그 씨가 우리 안에만 있으면 무엇하겠습니까. 우리 몸에서 그의 가지를 내어야 될 줄을 믿습니다. 그의 열매를 맺게 되어야 될 줄로 믿는 것입니다.
씨앗이 아무리 좋아도 그 씨앗을 뿌려놓은 밭이 어떠해야 싹이 납니까 좋은 씨앗을 뿌렸으니 깨끗한 씨앗을 뿌렸으니 흙이 깨끗해야 싹이 납니까 깨끗한 흙에서는 싹이 나지 않습니다. 물이 깨끗해야 고기가 사는 줄 아시지만 윗물부터 아랫물까지 다 깨끗하면 살 고기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 고기가 산란을 할 수가 없습니다.
밭도 마찬가집니다 땅도 마찬가집니다. 땅이 어떤 땅이 좋은 겁니까 아무 박테리아도 없고 깨끗하고 수분도 하나 없고 썩은 것 하나도 없이 그저 펄펄 날리면 균이 하나도 없는 그런 무균의 그리고 아무 습기가 없는 그리고 거름기가 썩은 것이 하나도 없는 그런 땅에 씨앗을 두면 일년이 가도 싹 나지 않고 이년이 가도 싹 나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언제 싹이 나기 시작합니까 거기에 물이 떨어지고 거름이 떨어지고 썩어지고 하면서 이제 그 땅이 썩어서 열을 내면서 그 싹이 이제 나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주의 성찬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우리 안에 모셨습니다. 우리 영혼에 모셨습니다. 그런데 여러분께서 팔과 다리 여러분의 온 몸에 허물이 생겼을 때 상처가 났을 때 혹은 시험을 받았을 때 도둑이 들어온 깨어진 창처럼 되었을 때 그것을 주님 앞에 드러내어 놓고 "여기에 열이 납니다. 썩어들어 갑니다. 당신 속에 있는 그 씨앗의 싹을 나의 이 곳에 드러내시옵소서" 이렇게 되어야 할텐데 벽돌로 덮어버립니다. 철저히 커버해버립니다.
저는 많은 성도님들 보면서 참으로 귀하다 다행스럽다 싶은 것이 무엇인가 하면 집집마다 참 행복한 것 같아요. 애 먹이는 자녀들도 없는 것 같아요. 사업도 다 잘되는 것 같아요 부부간에도 아주 좋은 것 같아요. 뭘 보고 제가 이렇게 말합니까 항상 저를 보면 생긋 생긋 웃고 만족스러운 것 같습니다.
거의 대부분의 가정에서 자기 자식이 잘못을 저질렀던 얘기 거의 하지 않습니다. 부부간에 틀림없이 싸움질도 많이 했을 텐데 제가 몇 년을 보면서 싸웠단 말 한 적이 거의 없습니다. 모두가 다. 그리고 교회 들어올 때 보면 둘이서 다정스럽게 들어오고 책도 서로 내어주고 헌금도 주고 이렇게 옆에 앉기도 하고.
해서 "야 참 저 집은 권태기도 없구나. " 그런 생각을 하면서 잘 지내구나 하면서 마치고 제 사무실에 올라가서 성도님들 나가실 때 어떻게 하는가 차량들 하고 복잡해서 어떻게 나가시는가 하고 이제 살펴보면, 아까 목사 앞에 들어올 때에는 그저 옆에서 아주 처음 사랑하는 것처럼 그렇게 하다가는 그냥 나갈 때에는 그냥 이십 미터 삼십 미터 갈수록 거리가 떨어지고 고개를 따로 해 가지고서 만나지도 않아요. 심지어 차도 한 차로 와 가지고서 나갈 때에는 그냥 따로 타고 가버려요.
이런 것을 보니까 분명히 사랑이 넘치는 가정이 아닌데 왜 저럴까. 그것 뭡니까 전부 덮어버렸지요. 우리 성도님들 참 많으신데 모든 자녀들이 나쁜 짓 한 아이도 안 한 것 같아요. 전부 부모님들 보면 자식 자랑만 하고 그렇습니다. 그러나 자랑스러운 것도 좋고 덮어주는 것도 좋지만 허물이 있다면 연한 순을 가지고 꺾이러 오신 우리 주님에게는 그 꺾인 것이 우리의 연한 곳에 접붙여져서 새 순을 내고 그 새 순이 내리는 뿌리가 나의 뿌리가 되도록 하기 위해서 차라리 드러내어 보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예수의 씨앗을 우리 속에 품었으니 우리 안에서 예수의 씨가 발아되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도 아시겠습니다마는 영국에서 전해오는 얘깁니다. 두 사람이 도둑질을 했는데 영국 사람이 가장 싫어하는 도둑질, 양을 도둑질했던 것 같습니다. 양을 상당히 많이 훔쳐 가지고서 이제 잡혀 들어왔는데 재판장이 이 죄수들을 감옥에 보내고서 이 죄인들을 감옥에 보낸 것으로만 만족하지 아니하고 형을 살리면서 이 죄인에게 어떤 형벌을 더 내렸는고 하면 이 죄수들의 이마에다 죄인이라고 하는 영어로 'Sinner'라고 하는 그 약자 'S'자를 각인을 시켜라 그랬습니다. 이마에다 'S'자를 도장 찍듯이 찍어라 그랬습니다.
평생에 씻지 못하도록 그것을 없애지 못하도록 그렇게 하라고 해서 그 두 죄인에게 이마에 'S'자를 붙였는데, 그렇게 한 이유는 무엇이냐 하면 평생 저 사람들을 보는 자마다 죄인인 줄을 알아서 도둑놈인 줄 알아서 조심도 하고 저 사람이 평생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받아야 한 다고 해서 이제 'S'자를 콱콱 찍었는데 이 두 사람이 다 형을 마치고 감옥에서 나옵니다.
감옥에서 나오는데 한 사람은 자기의 얼굴에 아무리 씻어도 아무리 긁어도 떠나가지 아니하는 'S'자 때문에 이 죄인이라는 'S'자 표시 때문에 굉장히 기분이 나쁘고 내가 형을 살만큼 살았는데 이 'S'자는 웬 'S'자냐 하면서 내가 동네 사람들 부끄러워서 살 수 없다 해서 저 어디 다른 곳으로 도망을 가버렸습니다. 숨어살아 버렸고.
또 다른 한 죄수는 그 안에 있으면서 주님을 만났습니다. 전도하는 자에 의해서 주님을 영접하고 내가 주님같이 살아야 되겠다 라는 생각을 하면서 부끄러움에도 불구하고 여호와 하나님 앞에 자기의 남은 삶을 바쳐야 되겠다 해서 사죄의 뜻으로 그때부터 이 'S'자를 오히려 볕을 가리기 위해서 모자를 쓸 때가 있어도 오히려 쓰지 아니하고,
"나는 죄인입니다. 나를 조심하십시오. 내가 언제 또 죄를 저지를지 모르니 여러분이 조심하면 내가 오히려 죄를 안 지을 수가 있습니다. " 하면서 내어놓고 돌아다니면서 동네에 가서 쓰레기도 치우고 이삿짐 나르는 집이 있으면 이삿짐도 옮겨주고 또 나이 많은 사람들이 있으면 부축도 해 드리고 업어도 드리고 이것을 하는데 하루 이틀 한 것이 아닙니다. 몇 년 동안을 그렇게 했어요.
그래서 처음에 많은 동네 사람들은 'S'자 붙인 이 'Sinner'라는 이 죄인 때문에 경계를 하고 조심을 했는데 이 사람이 진심한 마음으로 자꾸만 꽃을 핍니다. 그 'S'자라는 죄인의 표시에서 자꾸만 예수님 같은 생활을 나타냅니다. 이웃을 돕고 있습니다.
그래서 동네 사람들이 한 해 지내고 두 해 지내고 보니 어른들이 어떤 생각들을 하게 되었는고 하니 '아이고 전에는 저놈이 우리의 신세를 진 놈인데 우리의 것을 도둑질하고 저놈이 산 놈인데 이제는 우리가 저 죄인의 빚을 더 많이 졌지 않는가. 우리가 뺏겼던 양보다도 저 사람이 우리를 위하여 봉사한 것이 다 많으니 우리가 저 죄인에게 오히려 빛을 졌도다' 그렇게 생각하고서 이제 미안해 합니다. 그 사람이 와서 일하는 것을 오히려 이제 사양하려고 합니다.
어느 날 초등학교 손자가 찾아와서 "할아버지 저 착한 사람 이마에 왜 'S'자가 있습니까
저 'S'자가 무슨 뜻입니까" 이렇게 물었습니다. 그 할아버지가 대답하기 곤란하지요. 이 어린아이가 착한 아저씨를 보고 저 'S'자의 의미를 묻는데 멈칫하다가 "아마 내가 알기로는 저 사람의 이마에 있는 것은 저 사람이 그동안 우리들 보는 앞에서 행한 행실 그대로 아마 'Saint'라고 하는 거룩한 사람이다 성자다 하는 뜻에서 'S'자를 표시했을 것이야. "라고 설명을 해 주었답니다.
그랬더니 그 손자가 "할아버지 과연 그렇군요. " 하면서 그 'S'자 아저씨에게 가서 "성자씨여, 성자씨여" 하면서 따라다녔다는 겁니다. 그는 그 'S'자가 죄수요 양을 도둑질한 죄인이었지만 그러한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아니하고 오히려 내어놓고 자기의 역점을 드러내어 놓고 그 약점 가진 사람처럼 'S'자 가진 사람처럼 하지 아니하고 자기에 꺾여 들어오신 자기 영혼 속에 들어오신 예수님의 순을 내었더라 그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모시고 있으면서 과연 예수님의 순을 남들로 하여금 보게 하고 사는지. 아니면 예수님은 예수님대로 내 안에 몇 년이 계시던지 싹 내지 말고 가만 계시도록 해 놓고 나의 약점을 덮어버리면서 의로운 사람처럼 사는지….
가출한 딸의 얼굴을 자기 얼굴로 가리우고 그 상한 딸의 갈대를 꺾지 않으려고 그의 이름을 거리에 나가서 들리게 부르지 아니하고 그 우범지역에 자기의 사진을 갖다 걸고 딸의 이름이 크리스티나지만 그 이름도 기록하지 아니하고 그저 돌아오라고만 말하였던 그 브라질의 마리아라고 하는 그 여인을 제가 이번 기간동안 소개한 바가 있는데, 그의 그런 모습을 보고 많은 어머니들이 그 예화를 들 때에 많은 어머니들이 '아. 아' 탄성을 자아내면서 귀한 어머니였구나 하는 것을 보고 저는 또 한 번 놀랬습니다.
어머니면 당연히 다 그렇게 하고 계신 줄 알았더니 그렇게 하지 못했구나, 자식을 사랑한다지만 이 소개된 여인같이 못했구나 생각하면서 또 한 번 제가 생각을 가다듬어 보았습니다. 그렇다. 이 세상 어느 나라 어느 곳에서도 부모가 아무리 자식을 사랑해도 이 여인같이 할 수 없었는데 특별난 이런 특별난 케이스가 있으니 이것이 온 세계에 소개된 것 아니겠는가.
그러면 이 특별한 여인은 누구와 같았는가 예수님의 보통 사건과 같았다 그것입니다. 예수님의 생활은 그것이 보통 생활이었던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 여인으로 소개되었던 예수님, 그 예수님의 그 여인같은 순을 여러분의 그 썩어가는 줄기에서 돋아나오게 해 보시지 않으시겠습니까
허물을 감추지만 마시고 깨어진 창을 다시는 깨어지지 않겠다고 벽돌로 막아버리지만 마시고 시험 들어온 마음이지만 마음이 흔들리고 여릴 때에 성령도 그 심령을 따라 들어오시는 겁니다. 시험 들어오는 길 다르고 예수님 들어오는 길 다르고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 너무 마음이 굳건해서 마귀도 닫아 버리고 예수도 닫아버리고 하지 마시고, 혹 여러분이 시험에 들었다면 그 약점을 감추려고만 하지 마시고 오히려 드러내어 이처럼 연한 순으로 찾아오시는 주님을 여러분의 그 썩어가는 마디에서 새 순으로 새 싹으로 나게 해보시기를 바랍니다.
어느 카펫 기술자가 물론 자기가 그 사실을 모르고 앵무새를 짖이기고 그것도 안되니까 납작하게 만들어버리고서 그 죽여버린 앵무새 탓에 돈도 벌고 초대되어 칭찬도 듣고 그리고 술도 마시며 춤도 추었다는 얘기를 함께 우리가 나누어보았습니다마는 우린들 그 카펫 기술자와 뭐가 다를 것이 있겠습니까
그 카펫 기술자가 모르고 앵무새를 죽였던 것처럼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서 고난받게 하지는 않았습니다. 알고서 십자가에 올라가도록 하지는 않았습니다.
이렇게 구원받고 사망으로 지옥으로 갈 수밖에 없는 우리가 영원한 천국으로 갈 수 있게 되어서 귀한 천국 복음을 듣게 되어서 어떻게 되어서 이것이 가능했던가 생각해보니, 그때는 몰랐지만 이 카펫 기술자가 앵무새를 짖이기고 밟고 때리고 평평하게 만들어서 돈도 벌고 칭찬도 듣고 즐거움을 누릴 수 있었던 것처럼 오늘 우리가 이처럼 돈도 벌고 영혼도 천국 길을 행하고 당당하게 살수 있는 것이 다른 이유 전혀 없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가 죽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를 짓밟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의 죽음 위에서 우리가 이렇게 살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삭개오 그 집에 예수님 들어오시니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처럼 존경받던 예수님은 순식간에 삭개오 집에 들어감으로써 그 따르던 모든 사람들에게서 얼마나 욕을 많이 먹었는지 모릅니다. "저러고도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인가. 저러고도 어떻게 죄인과 함께 있으면서도 천국 복음이고 어쩌고 하느냐. 삭개오 같은 사람과 한 집에서 유하게 되었으니 죄인과 함께 있으니 죄인이 아닌가. "
예수님은 많은 욕을 먹었습니다마는 예수님이 욕을 바가지로 먹는 동안에 삭개오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얼마나 기분이 좋았던지 "내가 뉘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 배나 갚겠사오며 나의 이 많은 재산 절반을 정리해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습니다. " 여러분, 많은 재산 처리를 해서 가난한 자들에게 반이나 떼어주고 토색한 것이 있으면 사 배나 갚겠다고 이렇게 설치고 나온다면 그사람 기분 알 만하지 않겠습니까.
누구를 욕먹이고 삭개오가 이렇게 기분이 좋은 겁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욕먹이고 삭개오는 그렇게 기분이 좋은 겁니다. 그렇다 라고 해서 그리하지 말아야 하겠습니까 그리하지 말 수도 없는 것이 저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이처럼 살게 된 것이지요.
지난 사순절 만찬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 곧 그의 생명과 그의 성품의 그 인자가 우리들 안에 들어와 계십니다. 성찬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우리 안에 모셨는데 그때 이후로 예수의 새순을 얼마나 다른 사람 앞에 보여지게 했습니까
그때 이후로도 내가 여전하게 자랑만 하고 있습니까 교만만 하고 있습니까 남에게 합당한 이 정죄를 받고도 합당한 비난을 받고도 남이 내게 대하여 어떤 말을 하면 그렇게 듣기 싫었습니까 그렇다면 전에와 다를 바가 뭐가 있겠습니까 여러분은 전과 똑같지만 여러분 속에 있는 예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여전하게 남을 비판하고 있습니까 남을 정죄하고 있습니까 남의 약점을 손가락질하고 욕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둘 중의 하나입니다. 죄를 갖고 있으면서도 자기의 죄를 커버하기 위해서 돌을 들었던 바리새인과 같든지, 아니면 일만 달란트 탕감을 받았기 때문에 나는 아무 죄가 털끝 눈끝만큼도 죄가 없다 라고 여겨서 죄 없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래서 남을 비판하십니까
이 경우든지 저 경우든지 비판하지 마십시오. 우리 속에 들어있는 예수님은 비판받을 사람의 이름을 거리에 들리게 부르지 않았습니다.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시고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시려고 자신을 사방에다가 십자가 위에 내어다 걸었습니다.
우리는 그의 십자가 선 곳을 말하여 저 은밀한 계곡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케년(canyon)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갈보리산 위에 골고다 언덕이라고 합니다. 만 사람이 볼 수 있는데 자기의 가장 부끄러움을 내어다 걸었습니다. 그래도 그림을 보면 몸에다 홍포인지 수건인지 허리춤에 조금은 걸쳐는 놓았습니다마는도 걸쳐졌던지 안 걸쳐졌던지 사실 따지고 보면 더 이상 부끄러울 수 없는 그 부끄러움을 숨겨놓지 아니하고 맨 위에 드러내어 놓았습니다.
그렇게 하여 찢어주신 살과 그렇게 하여 흘려주신 피를 우리 속에 들게 해 주셨고 그 생명과 함께 우리 안에 오시었으니 그 씨앗이 여러 해 동안 그냥 있게 마시고 이제는 우리가 우리의 옛 모습으로 살지 마시고 우리에게서 예수의 이파리가 피어나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의 열매가 맺히도록 이 해를 살아보시기를 부탁합니다.
104 장 찬송합시다.
주님의 연한 순이 십자가 위에서 꺾여집니다. 꺾여진 순이 땅속으로 들어가 흙으로 돌아가버리고 말지 않습니다. 꺾여지면 곧 생명으로 새 순을 내려합니다. 새 싹을 내려합니다. 우리는 그의 십자가로서 새운 그의 교회 앞에 왔습니다.
어느 편 쪽의 강도입니까 우리는 비난을 받아 마땅하고 이같은 어려움을 당해 마땅하다고 여깁니까 아니면 죄는 그같은 비난을 받아 마땅할 만큼 짓고서도 비난하는 것이 싫어서, 억울해서 교회가 싫다면 바로 주님이 싫은 것인데 그같이 주님을 비방하던 강도와 같습니까
간음한 여인을 향하여 돌을 든 바리새인과 같습니까 나도 따지고 보면 죄가 있으면서 남들 보기에 죄가 보이지 않도록 철저히 덮어버리고 몇 년 동안을 죄짓지 않고 산 사람처럼 주의 뜻대로 다 하고 산 사람처럼 그래서 다른 사람 죄인을 향하여 돌을 들어 던지면 남보기에 나는 의로운 것처럼 그렇게 생각하는 분이 계십니까 그런 분이라도 주께 맞지 않습니다. 그것은 바리새인이었습니다.
아니면 우리의 모든 죄를 주로 말미암아 다 용서받았기 때문에 일만 달란트 일만 죄를 완전히 용서받은 이유 때문에 아무 죄 없게된 이같은 축복 때문에 이제는 죄짓는 사람을 보고서 비난할 수 있겠습니까 그 경우도 주께는 맞지 않다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가 이처럼 사는 것은 삭개오처럼 예수님 욕 먹이고 우리는 즐거움을 찾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삭개오의 이같은 복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자기의 그 허물을 군중 속에다 감추지 않았습니다. 군중 뒤에 따라가면서 주님에게 안 들키려 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에게 자기의 약점을 보여보려고 온갖 비난받는 자기를 주님에게 보여보려고 뽕나무 위에 올라가서 드러내었습니다.
여러분의 그 연약한 부분을 그 욕먹는 부분을 욕먹어 마땅해서 먹지만 그 욕먹는 부분을 싫어만 말고 감추려고만 하지 말고 차라리 핍박받고 비난받고 간음한 여인처럼 그 돌들 앞에 엎어져 보십시오. 혈루증 열두 해 여인처럼 엎어져보십시오. 거기에 연한 순으로 오셔서 꺾이셨던 주님이 새 싹으로 곧 나타나게 될 줄을 믿습니다.
예수의 그 연한 순은 탄생할 때부터 죽으실 때까지 스스로 강하려고 하지 않고 끝까지 약하셨습니다. 약함 가지고 오셨고 약함 가지고 가셨는데 그 약함 가진 자에게 능력 주시는 자인 여호와 하나님께서 능력으로 역사 하시니, 예수 안에서 하늘 나라의 힘을 얻어서 하늘 이파리를 펼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합니다.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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