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절] 나를 때리는 자에게 내 등을 돌리며
본문
성경은 오늘 상식으로는 가히 이해할 수 없는 한 아들과 그의 아버지를 우리로 하여금 만나게 해 주었습니다. 오늘 성경에 나타난 그 아들이란 사람은 가히 자신에게 죄도 없으면서 6절에 나타난 대로 소개해 드린다면 자기를 때리는 자들에게 자기의 등을 돌리기는커녕 되레 실컷 때리라고 맡기며, 자기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저항을 하기는커녕 마음대로 하라고 자기 뺨을 통째로 갖다 맡기는가 하면, 수욕과 침 뱉음을 당할 때에 피하려고 자기 얼굴을 가리우는 것이 상식이고 또 얼굴에 침을 뱉으면 본능적으로 눈이 감기게 되어 있습니다마는 여기에 소개된 한 아들은 남이 침을 뱉어도 그리고 모욕을 그 얼굴에 퍼붓고 있어도 얼굴을 돌리거나 눈이 감기어지지 않는 그런 아들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아니 이 멀쩡하던 사람이 어쩌다가 이렇게까지 되어버렸는가 하는 그것입니다. 그 아들이 그렇게 상식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게된 데는 그의 아버지가 세뇌를 시켰기 때문임을 성경은 말하여 주고 있습니다. 얼마나 철저히 그 아버지가 아들에게 세뇌를 시켰던지 7절에 보면, 아들의 얼굴을 철판보다 더한 부싯돌같게 했으므로 수치를 당하여도 그 수치를 수치인 줄을 알지 아니할 정도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철판 두껍다고 그러지요. 그러나 철판과 철판을 이렇게 충돌시켜 가지고서는 불이 잘 피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강한 부싯돌은 서로 충돌시키면 불꽃이 튀어서 불쏘시개로 삼기도 합니다. 아들의 얼굴을 철판보다 더한 부싯돌로 만드신 이가 바로 그의 아버지셨습니다.
그러면 그 아버지가 어떠한 방법으로 이 아들을 이토록 만들 수 있었는가 그의 세뇌시킨 방법이 과연 무엇인가 4절부터 5절 사이에 잘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아비는 아들에게 학자의 혀를 주어서 곤핍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줄 것을 깨우쳐주었고 그리고 매일 아침마다, 다시 말씀드리면 세상사 보기 전에 세상의 지식과 접하기 전에 세상의 어떤 즐거움들을 만나기 전에 매일 아침 눈만 뜨면 그에게 말을 해 주었는데, 그 귀에다가 대고 진리의 말씀을 얼마나 계속적으로 말씀했던지 결국 그 아들이 그 아버지가 귀에다 대고 세상 물정도 알기도 전에 그냥 퍼붓듯 계속해서 말씀해주시는 그 말씀으로 귀가 열려버렸는데 아들의 귀가 아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그 아비 여호와께서 아들의 귀를 열었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잘 아시겠지만 영어를 하려고 하면 영어를 우선 많이 들어야 합니다. 또 한국말을 하는 우리 아이들이 일단은 많이 듣습니다. 듣다가 보면 어느 날 갑자기 혀가 돌아가고 입이 터집니다. 그래서 영어를 하게 됩니다. 듣지 못하는 사람은 아무리 나이 들어도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들음으로써 자꾸 들음으로써 결국 그 혀는 들은 대로를 그대로 표현하게 되는 것이지요.
여기에 나타난 아들은 그 아버지가 세상도 보기 전에 아침마다 그 귀에다 대고 그 아버지가 무슨 말씀인지 모르지만 말씀을 계속 해 주었는데 그 내용은, 곤핍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줄 것을 늘 가르쳤다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그 아들의 귀가 어느 날 갑자기 열리기 시작했는데 누구로 말미암아 열려졌느냐 여호와께서 나의 귀를 여셨으므로, 5절에 그랬지요 주 여호와께서 나의 귀를 열으셨으므로 내가 그에 의하여 내 귀가 열렸더니 그가 말하는 대로 기계처럼 로봇처럼 그저 명령을 따를 뿐 거역할 수도 없고 뒤로 물러서지도 못하는 이런 내가 되어 버렸도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소개되고 있는 이 희한한 아버지가 4절에도 5절에도 '여호와'라고 그 성호가 소개되었으니 여호와 하나님과 그의 아들과의 일인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이 세상 물정 알기 전에, 세상에 그 무엇을 접하기 전에 계속해서 그 귀에다가 진리의 말씀을 말해주었습니다.
그 내용은 무엇이냐 죄인된 사람 죽어가는 사람 곤핍한 자를 어떻게 구원할 것인가 말로 거듭나게 하는 것을 가르쳐 주었고, 그 다음에 그들을 위하여 네가 어떻게 어떻게 하는 것이 네게 생명이 되는 것이다 라고 계속적으로 주입을 시키고, 그 외에 다른 말은 한 마디 들을 수 없었으므로 그 아들이 성장하여 막상 말을 하게 될 때에는 그 말이 아버지의 말이었고 그의 행동은 아버지의 뜻대로 기계처럼 움직인 것이니 내가 거역하거나 뒤로 돌아서거나 할 수 없는 이런 이상한 청년이 되고 말았다 라고 고백한 고백을 요한복음 12장 50절에서 볼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한 번 찾아보실까요. 요한복음 12장 50절에 보면 이제 그 아들이그 아버지로부터 세뇌를 받아 가지고 자기의 행할 수 있었던, 다 성장한 후에 자기 행동을 설명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요한복음 12장 50절 봅니다. "나는 그의 명령이(아버지의 명령입니다) 영생인줄 아노라 그러므로 나의 이르는 것은 내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이르노라 하시니라"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나이 삼십이 넘으시고 이제 그 백성들을 위하여 일을 하시면서 그가 하시는 모든 행동과 그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에 대하여 그는 해명을 했습니다.
"내 입에서 나가는 이 말은 원래부터 내가 생각하여 내가 하는 말이 아니요 내 아버지께서 내 귀에다가 담아주었고 계속해서 담겼던 내 아버지께로부터 들은 말을 그대로 했을 뿐이요, 내가 너희를 위하여 무엇을 하든지 이것은 내 아버지의 명령이니 내가 죽든지 살든지 나는 아버지의 명령대로 따라가는 것이 영생인줄 아노라. 그 외에는 내가 아는 것이 없도다. "라고 주께서 고백하신 이 고백을 보아서도 그 아버지는 그 아들을 이처럼 철저하게 세뇌시켜서 우리에게 내어보내셨던 것을 짐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러면 무엇 때문에 그리하셨으며, 왜 그 아들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를 그 모양으로 만드셨는가 오늘 본문 있는 조금 앞에 이사야서 50장 1절로 3절이 설명을 잘 해주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그렇게 만들 수밖에 없었던 것은, 세상 사람이 본다면 어쩌면 비정상적인 그런 아들로 세뇌를 시켜버릴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50장 1절로 3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나 여호와가 이같이 이르노라 내가 너희 어미를 내어보낸 이혼서가 어디 있느냐 내가 어느 채주에게 너희를 팔았느냐 오직 너희는 너희의 죄악을 인하여 팔렸고 너희 어미는 너희의 허물을 인하여 내어보냄을 입었느니라 내가 왔어도 사람이 없었으며 내가 불러도 대답하는 자가 없었음은 어찜이뇨 내 손이 어찌 짧아 구속하지 못하겠느냐 내게 어찌 건질 능력이 없겠느냐 보라 내가 꾸짖은즉 바다가 마르며 하수가 광야가 될 것이며 거기 물이 없어졌으므로 어족이 갈하여 죽어 악취를 발하게 되느니라 내가 흑암으로 하늘을 입히며 굵은 베로 덮느니라"
이 말씀은 어떠한 말씀입니까 여호와의 말씀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당신의 형상과 그 모양대로 지은 자기 백성을 좋은 세상에 살게 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세상을 자기 백성에게 다 맡겨 주었습니다. 거룩하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잠시 다른 곳에 가셨다가 찾아오셨습니다. 에덴 동산에 아담을 찾듯이 찾아왔습니다. 얼굴이 보여야 할 사람이 보이지 않습니다. 불러도 대답이 없습니다. 찾아도 사람이 없습니다.
내가 언제 너희 어미에게 이혼증서를 주어서 나를 떠나서 너는 자유 하라고 했느냐 보기 싫으니 함께 살기 싫다고 했느냐 나는 네 어미에게 이혼증서를 써준 적이 없느니라.
내가 너희를 어느 채주에게 팔았더란 말이냐 너희를 팔고서 내가 받은 돈이 있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지은 죄로 너희는 주인을 바꾸어 버렸도다. 너희가 지은 죄로 말미암아 죄값을 받으려고 하는 마귀에게 너희는 종이 되고 말았도다.
너희 어미는 어떤 형편이냐 내가 이혼 증서를 주어서 나가라고 한 적이 없느니라. 내가 싫어서 쫓아낸 적이 없느니라. 너희 어미는 왜 나를 떠났느냐 왜 내가 만날 수 없게 되었느냐 너희의 허물을 인함이니 어미된 자로서 너희가 죄를 지어 다른 채주에게 종이 되어 그 마귀의 종이 되어 있는 것을 보고 어미는 어쩔 수 없이 따라 나갔느니라.
하와가 범죄 했을 때 아담이 어쩔 수 없이 에덴을 두고 떠나감같이 너희 어미는 내가 쫓아내어서 이혼증서를 가지고 간 것이 아니라 너희의 허물을 인하여 내 현장을 떠나서 너희와 함께 그곳에 내어 보냄을 입히게 되었느니라. 그런데 내가 너희를 당장 데리고 오려면 손이 짧으냐 능력이 없느냐 내가 바다를 꾸짖은즉 바다가 말라버리고, 강을 명한즉 강물이 말라서 그곳에 있던 어족이 다 죽어 악취가 온 세상에 가득하지 않았더냐 내가 능력이 없어서 다른 채주에게 가 있는 너희를 내가 당장 찾아오지 못하겠느냐
나는 흑암으로 하늘을 두른 자니라. 베로서 이 땅을 감쌀 수 있는 여호와 하나님이니라. 내게 능력이 없겠느냐 너희를 찾을 힘이 없겠느냐마는 그러나 내가 그렇게 하여 너희를 당장 찾아온다고 하면 너희가 지은 너희의 죄값은 언제 물겠느냐 죄인으로서 내 나라에 온다면 너희가 편하겠느냐
죄지은 사람은 또 죄를 해결 받지 못한 사람은 차라리 죄악 세상에 사는 것이 편하지, 죄지은 사람이 그 죄를 해결 받지 못하고 죄인으로서 여호와 하나님 나라에 간다면 그것은 지옥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에는 죄인으로서는 살 수 없는 곳입니다. 빛의 나라에서는 어두움을 가지고는 살 수 없는 곳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찾아 그 맡겨준 세상 땅에 찾아오셨더니 불러도 대답이 없습니다. 찾아도 없습니다. 그 어미마저 없어졌습니다. 어미는 죄지을 사람이 아닌데 없어졌습니다. 알고 보니 자식들이 죄를 지어 다른 채주의 종이 되었고, 그 어미는 자식들을 인하여 아담이 하와 때문에 에덴 동산을 버리고 함께 쫓겨난 것처럼 내어보냄을 입혀서 떠나가고 말았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손에 힘이 있고 능력이 있으니 당장 그 채주로부터, 그 마귀로부터 자기 백성과 그 어미를 불러 나왔으면 했지만 그러나 그렇게 한다면 죄를 해결하지 못하고 나온 내 백성이 어떻게 행복하게 살 수 있겠는가 내 나라에 오면 더 불행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이사야서 53장 10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그의 아들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케 하셨은즉 그가 죽어 그 영혼을 죄인들 대신 속건 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 씨를 되찾아, 죄인의 씨앗이 아니라 의롭게 된 자의 씨앗을 되찾아 그들로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에서 살게 하기 위하여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놓아 죽게 하였노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 믿으시면 아멘 합시다.
어느 카펫 깔아주는 일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이 남의 집에 가서 일을 맡았습니다. 카펫을 깔고 있었는데 한참 깔다가 힘도 들고 해서 담배 한 대를 피우고 싶어서 밑 포켓에 넣어 두었던 담배를 꺼내려고 찾아보니 담배가 없었습니다.
"담배를 내가 어디 두었지 일하다가 어디 빠뜨렸나" 하고서 두리번두리번 하다보니 카펫트 저 한 쪽 편이 불룩했습니다. "아이구머니나. 담배가 어떻게 저기 들어갔지" 그래서 가서 담배이리라 생각하고 발로 자근자근 밟아보니까 역시 말랑말랑했습니다. 담배였습니다.
카펫을 뜯어가지고 담배를 꺼내 한 대 피우고 싶지만 강력 접착제로 다 붙여 놓았고 그리고 전부 무늬를 맞추어 놓았는데 이것을 다시 뜯어낸다면 아주 복잡하게 생겼습니다. 차라리 내가 담배를 피우지 말고 말지 하고서 이렇게 막 밟아도 불룩하고 좀 뜹니다. "이것 안되겠네. "해 가지고서 몽둥이를 하나 갖고 와서 얼마나 거기를 두들겨 팼던지 납작하게 두들겨 팼습니다.
일을 끝내고 그 주인 아주머니에게 "아주머니, 끝났습니다. 이제 저 돌아갑니다. " 하고서 장비를 다 챙겨 가지고서 자기 차에 갖다 실었습니다. 차에 실으려고 짐을 싣는데 자기가 앉았던 운전석에 보니까 담배갑이 거기 있다 그겁니다. "아이구머니나.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아까 나는 카펫 밑에 있는 것이 담배갑인줄 알고 자근자근 밟다가 그것도 안 되어 가지고서 몽둥이로서 납작하게 만들어버렸는데 이것 어떻게 된 일인가 그게 뭐던가" 좀 궁금합니다.
그런데 여주인이 "아저씨!" "왜요" "혹 일하다가 우리 앵무새 못봤어요" 몽둥이로 한없이 두들겨 팬 그것이 담배갑이 아니라 앵무새였습니다. 그래서 납작하게 이제 본 살처럼 되고 말았는데, 아저씨는 망설였습니다. 자기가 두들겨 패서 납작하게 만들었던 그것이 앵무새였구나 하고 이실직고 하려고 하다가 멈칫 하다가 모른척했습니다.
집주인은 그저 앵무새가 바깥으로 날아갔거니 생각하고 이제 일한 노임도 주고 그리고 "아저씨 오늘밤에 오세요. 우리가 집수리를 깨끗이 했으므로 동네 지인들을 불러서 우리 파티를 하기로 했습니다. 오늘 저녁에 오십시오. " 해서 그날 저녁에 파티에 참석했더니, 그저 수고했다가 카펫트 잘 깔아주셨다고 술도 한 잔 주고 마시고 전부 춤을 추는데 다른 사람들은 그저 카펫을 잘 깔았다라고만 알고 편편한 카펫 위에 춤을 추고 자기는 그 현장을 지나갈 때마다 발을 조금 조금 이렇게 건너뜁니다. 자기는 알고서도 춤을 출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카펫 작업을 하는 이 아저씨는 처음에는 이 불룩했던 것이 자기의 담배갑인줄 알았습니다. 이사야 53장 4절에 나타난 대로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여호와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고난을 받는 것은 그의 죄 때문에 그가 당연히 받을 벌을 받는 줄을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 카펫 깔은 사람은 나중에는 그 죽은 것이 자기의 담배갑이 아니라 앵무새였다는 것을 발견하고, 이제 우리는 마음 아파합니다. "우리가 어찌할꼬!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을 우리가 죽였도다. "라고 우리는 회개하는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마는 어쩔 수 없어 살아갑니다. 돈을 받아야 가족이 살겠고 그리고 그 파티에 춤을 추어야만 하겠기에 그가 죽은 사실을, 그 새를 자기가 두들겨 패서 죽였다는 사실을 말을 못하고 있습니다마는 마음속으로는 항상 이것이 걸렸습니다.
이런 생각도 해 보았습니다. 다른 새면 모르겠거니와 말한다고 해서 앵무새인데 그냥 내가 두들겨 팰 때 "앵무, 앵무" 하지 왜 아무 말 안하고 그냥 죽는단 말인가 저는 앵무새는 원래 "앵무, 앵무" 하는 줄 알았더니 "앵무, 앵무" 하는 것이 아니라 아프면 "아프다. " 하고 "반갑습니다. " "안녕하세요" 말하는 앵무새인데 이 앵무새는 아무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덕분에 자기는 편리하게 일을 다 마쳐버렸고 그 위에 춤을 추고 그 일 했다고 돈을 받아서 잘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와 같습니까 이 카펫 작업을 하는 사람과 다를 바가 뭐 있습니까 우리는 교회 와서 즐거워합니다. 십자가 밑에서 교회라는 반석 위에서 춤을 춥니다. 우리는 우리를 가리켜 우리의 옆 사람을 가리켜 죄인이라 하지 않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 말미암아 이미 의롭게 된 사람들, 의롭다 칭함을 받은 사람들이라 합니다.
우리는 거룩한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이요, 저 바깥에 있는 사람들은 죄인이며 결국은 주께로 돌아오지 아니하면 지옥으로 갈 사람들이라고 우리는 구별하고 있습니다. 바깥 사람들은 죄인이요 사망의 구렁텅이로 빠질 것이나, 우리는 죄인이 아니요 그래서 천국에 갈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 말하는 이 바닥이 어디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깨어진, 그리스도가 반석이 되어 세우신 이 바닥인 것을 인정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무엇 밑에서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까 십자가 밑에서만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뽑아버린다면 저 바깥 사람이나 믿는다고 하는 우리나 무엇이 다를 수 있겠습니까
십자가 때문에 우리는 죄인 아닌 것처럼 되고 저 바깥에 있는 사람들은 채주가 다른, 그래서 마귀가 채주가 되어 있는 그 현장으로 끝내 갈 것이라고 우리는 말하면서 우리는 언제 그런 신분을 가졌던가 하는 생각을 벌써 갖고 있습니다마는, 그런 생각을 할 수 있고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앵무새가 깔려 죽은 그 카펫 평평한 그 바닥 위에서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형편이 바로 그런 것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입이 있었으나 말없이 자기를 때리는 자들에게 등을 맡겼습니다. 비록 죄를 지었을지라도 수염을 잡아 뽑는다면 그것은 참으로 찐한 모욕을 주는 겁니다. 차라리 재판정에서 몇 년 징역을 받고 있지 수염을 뽑힌다는 것은 참으로 부끄러운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수염을 뽑으면서 얼굴에다가 침을 뱉으면서 온갖 모욕을 퍼붓는데도 그 얼굴 하나 변하지 아니하고, 침을 뱉어도 본능적으로 눈이 감길 것인데 눈도 감지 아니하고 자기의 수염을 뽑는 사람들에게 얼굴을 노다지 갖다 맡기며 "마음대로 뽑아라. 더 뽑아라. 다 뽑아라. " 그렇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 그에게 죄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죄로 말미암아 그가 등을 맞고 있었으며 우리의 죄로 말미암아 그의 수염이 뽑히고 있었던 것을 카펫 공사한 사람처럼 우리는 압니다.
남의 죄를 지고도 부끄러움을 부끄러움으로 알지 못합니다. 수치를 수치로 알지 못합니다. 그 아들이 그렇게 된 것을 오늘 성경은 말하기를, 그 아버지가 그렇게 만들었으니 그 아버지는 우리를 찾아왔으되 찾지 못하고 우리의 이름을 불렀으되 대답하는 자가 없어 살펴보았더니 모두들 자기 죄로 말미암아 채주를 바꾸어 버렸더라 그겁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으로 있어야 될 사람들이 마귀를 주인으로 삼고 마귀는 자기의 백성이 되었다고 그 권리를 주장하고 있더라 그것입니다.
어미를 내어보내지 아니할 수가 없었다는 겁니다. 여기에 나타난 어미는 누굽니까 그는 죄를 짓지 아니했어도 죄짓고 떠나간 백성을 위하여 자식들을 위하여 내어보냄을 입었느니라고 말했으니, 오늘 우리가 믿고 있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죄가 없었어도 내어보냄을 받게 되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그를 내어보낼 때에 내어보내기 전에 오랜 세월동안 귀에다 대고 진리만을 말해 주었습니다. 아침 눈을 뜨면 해질 때까지 진리만을 그 속에 넣어주었습니다.
사람은 들은 대로 합니다. 본 대로 합니다. 가끔 공부를 잘해서 점수가 좋고 퀴즈대회 같은 데서 아주 높은 점수를 따는 학생들을 보니까 아버지 어머니가 같이 선생님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물어보았습니다. 역시 선생님들은 공부를 잘하고(옛날에 다 공부 잘하면 선생님 했으니까요) 공부를 잘하니까 공부 잘하는 부모 밑에서 난 자식들이 공부를 잘하는가 보다 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제게 그 얘기를 듣고 있던 분이 아주 그럴듯한 얘기를 해 주었습니다. "저는 그 부분에 대해서 좀 연구했습니다. 아버지 어머니가 공부를 잘했기 때문에 자식이 꼭 공부를 잘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어머니가 아이를 배고서도 어쩔 수 없이 매일 교단에 나가서 가르치기 때문에 배속에 있는 아이가 가르치는 어머니 때문에 다른 아이들보다 가르치는 얘기를 훨씬 많이 듣기 때문입니다. 태교가 된 것입니다. "
그렇습니다. 어린 아이일 적부터 무슨 말인지 잘 알아 들을 수 없으리라 생각하는 그때부터도 그 어머니가 마음먹은 대로 말하는 대로 그 집안의 분위기대로 그 아이가 나서 그대로 나타나듯이,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에게 진리 외에는 들리게 하지 않았습니다. 세상 사람을 구원하는 일 외에는 보이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 아들을 우리 가운데 보내사 자기 뺨을 때리는 자에게 뺨을 돌리지 아니하며, 수염을 뽑는 자에게 자기 뺨을 오히려 갖다 들이대며. 그리고 자기를 때리는 자들에게 등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등을 다 맡겨 버리는 이런 일을 했습니다.
누가 이처럼 하도록 만들어 주었는가 그 아버지께서 그토록 하도록 만들어주셨던 것입니다. 누구를 위해서입니까 바로 저와 여러분을 위해서. "맞아야 한다. 맞아야 한다. 맞는 것이 사는 것이다. 수욕을 당하는 것이 내 백성이 수욕을 당하지 않고 죄짐을 벗고 빠져 나오는 길이야. 다른 사람이 할 사람이 없어. 네가 해야돼. 네가 해야돼. "
하늘에 계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그렇게 만들어 우리 가운데 보내셨으니, 그가 끌려갈 때에도 아무 말 하지 않았습니다. 털 깎는 자 앞에 앉은 양처럼 아무 말이 없었습니다.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소처럼 끌려가서 때리면 때리는 대로 맞으면 맞는 대로 죽이면 죽이는 대로 아무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화도 내자 않았습니다. 부끄러워한 흔적을 볼 수가 없습니다. 누가 그렇게 만들었다 라고 했습니까 그 아버지가 그 아들을 세뇌하여 우리 인생을 구원하기 위하여 그의 얼굴을 철판보다 더한 부싯돌같이 만들었기 때문에, 수치와 곤욕을 당하여도 그를 수치로 알지 못하였노라고 주님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연산군의 부왕되는 성종은 여러 여자들을 후궁으로 삼았고 많은 자식을 낳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마는, 그 중에 엄 귀인과 정 귀인이 역사에 잘 나타나 있지요. 이들은 연산군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게 되는데 연산군 자기 생모를 어렵게 했다 라고 해서 죽입니다. 이 두 여인에게 자루를 뒤집어 씌워버립니다.
자루를 뒤집어 씌운 후에 이 여인들의 아들들을 불러와 가지고서 다 왕자들인데 이 왕자들을 그 자루 뒤집어쓴 어머니 옆에다 세우고서 "이 속에 있는 이 사람들은 대역죄인이니라. " 너희 어머니라고 하지 않았어요. 연산군이 말하기를 "대역죄인이니라. 이 대역죄인을 나는 나의 동기가 되고 형제가 되는 너희들의 손으로 때려죽이기를 원하노라. 너희가 만약에 이 대역죄인을 몽둥이로 때려죽이지 못하면 단칼에 너희를 베겠노라. " 이렇게 했습니다.
자루 하나 뒤집어썼으니 귀가 막힌 것도 아니고 이 여인들은 자루 속에서 다 들었습니다. 끌려온 자식들이 자기 아들인 것을 알았습니다. 연산군이 미쳐 있습니다. 많은 사람을 죽이고 있는데 지금 이 아들들이 자기를 두들겨 패서 죽이지 아니하면 칼을 뽑아서 그 아들들을 죽임으로써 다른 왕자를 없애서 자기의 왕위를 보존하려는 아마 그런 뜻이 있는 것으로 여인들은 충분히 헤아릴 수 있었겠지요.
연산군이 너무나 무섭게 채근하니 몽둥이를 들고서 그 여인들을 두들겨 팹니다. 두들겨 맞는 여자들이 누굽니까 자기 어머니입니다. 그런데 그 맞아 다 죽어가는 어머니가 죽을 때까지 이 두 여인은 "이놈아 네가 왜 나를 때리느냐. 나는 네 어미다. "라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왜입니까
아들들이 오기 전에는 그렇게 살려고 연산군에게까지 대어들면서 또 인수대비에게 그렇게 생명을 부탁하고 하던 이 여인들인데 막상 자기 아들들이 자기를 두들겨 팰 때에는 어미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아들을 살리려면 내가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이니 내가 이 속에서 "이놈아, 나는 네 어미다. "라고 말하면 저 아들이 어떻게 나를 죽일 수 있을까. 아들이 끝내 나를 죽이지 못하면 저 연산군이 당장 내 아들들을 칼로 벨 것이다.
그래서 여인들은 죽고 아들은 겨우 살아남았던 사실을 우리는 역사 속에서 바라보는데, 앵무새 주인은 모르기라도 했지만 우리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성종의 후궁들처럼 알고도 오히려 그 아들을 죽이는 자들을 살리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알고도 능력이 있으면서 조처를 하지 않았습니다. 얼마든지 건져낼 수 있는데 그 아들을 건져내려 하지 않았습니다.
세상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을 그 아들이 세상에 보냄을 받아서 하고 있습니다. 끌려갑니다. 쓰러지고 또 쓰러집니다. 침 뱉음을 받습니다. 뻘건 베옷을 감고서는 침을 뱉고 그 병정들이 뺨을 때립니다. 수염을 뽑습니다. 모욕을 가합니다.
그렇게 하는데도 부끄러움도 타지 아니하고 자기를 때리는 자들에게 등을 돌려대며, 자기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뺨을 맡기며, 침을 뱉으며 뺨을 치는 자들에게 "아버지여, 저들이 몰라서 저리하오니 저들을 용서하여 주소서. "라고 하는데 거짓이 아니었습니다. 어쩔 수 없어 하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진심이었습니다.
세상에 사람 치고 상식적인 사람 치고, 자기의 죄도 아니고 남의 죄를 위하여 죽어주면서 이렇게 진실할 수가 있더란 말인가 그것입니다. 이 세상에 난 사람 치고 그렇게 된 사람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누가 그렇게 만들었습니까 누구의 실력이 그를 그토록 되게 했습니까 여호와 하나님이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실력이었습니다.
당신께서 교육을 시켜서 때리는 자에게 자기 등을 돌려대게 하였고 자기 수염을 뽑는 자에게 자기 뺨을 맡기는 것을 여호와 하나님이 친히 직접 봅니다. 그 아들이 십자가에 올라가서 막 모욕하고 목마르다 라고 하는데 그저 쓸개탄 포도주를 자기 입에다 문지르는 그런 사람들을 향하여 "아버지여, 저들이 몰라서 저리하오니 저들에게 감정을 갖지 마시옵소서. 저들을 용서하시옵소서. "
아들의 부르짖음은 거짓이 아니었습니다. 빈 말이 아니었습니다. 체면상 하는 말이 이었습니다. 진심었습니다. 진심할 수 없는 자리에서 진심을 내어놓는 그 아들을 보는 아버지, 그 아들이 그렇게 당하는 것은 아들 탓이 아니라 아비 탓이었습니다.
십자가에서 그 아들이 자기의 시킨 대로 기계처럼 끌려가서 그렇게 죽는 것을 바라다보면서 진심까지 다 드러내었는데 "나 죽이는 저들을 용서하소서. " 라고 하면서 그 영혼이 떠나가는 것을 보면서 그렇게 되도록 가르쳤던 여호와 하나님께서 얼마나 하늘에서 몸서리를 쳤던지 예수 운명하는 순간에 하늘이 흔들리고 땅이 흔들리고 태양이 빛을 잃고, 얼마나 흔들어대었던지 주님이 운명하는 순간에 많은 무덤들의 돌문이 다 굴러 떨어져버렸다고 하지 않습니까
상식적인 지진이 아니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몸부림이었습니다. 성전의 휘장이 찢어졌습니다. 누구의 육체가 갈라진 것입니까 그리스도의 육체가 갈라졌으니 여호와 하나님의 마음이 쪼개진 것입니다. 그렇게까지 하셨지만, 그처럼 당신의 가슴이 찢기어졌어도 여호와 하나님은 그 아들 죽인 자들을 찾지 않았습니다. 보복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성경을 잘 보십시오. 당신의 아들을 그처럼 모욕하고 그토록 험하게 죽였던 사람들을 그 천사들로 찾아 나서지 않았습니다. 단 한사람도 책임을 묻지 않았습니다. 왜입니까 그 아들을 그렇게 희생시키므로써 수많은 잃었던 우리를 찾았기 때문입니다.
힘이 없어 아들을 그렇게 만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될 줄 몰라서 그렇게 내어놓았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유는 무엇입니까 내가 너희를 불러도 대답이 없고 찾아도 찾을 수가 없었도다. 너희가 갑자기 어디에 갔느냐 너희 위에 있는 그 주인은 누구냐 너희의 채주가 마귀로구나. 언제 그렇게 되었는가. 너희가 죄를 지었구나. 너희가 죄를 지었구나.
죄지은 너희를 내가 어떻게 찾아내랴 내가 힘이 있어서 손을 쓰면 바로 데리고 오겠지만, 죄를 갚지 아니하고 그대로 데리고 온다면 너희는 지옥에서 사는 것보다 천국에서는 더 힘들 것이야. 방법이 따로 없으니 내 아들을 너희 대신 너희 당할 수치를 당하게 하고 너희 뽑힐 수염을 뽑히게 하고 너희 맞을 등을 맞게 하고 너희 죽을 죽음을 죽게 하여 내 아들을 희생시키고 너희를 찾겠노라.
그 아들이 십자가에서 죽을 때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죽는 아들만을 쳐다보고 계신 것이 아니라 되찾을 수 있는 우리을 찾으셨던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가 사하여지는 것을 보고 그는 억울하지 않았습니다. 손해보지 않았습니다.
내 아들 하나를 희생시켰고, 충분하게 내 백성을 찾아내었으니 그가 속건 제물로 그 영혼을 드리기에 이르면 나의 많은 씨를 되찾게 될 것이라 하시던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대로 우리를 찾게 되었으니 그가 억울해 한다면 우리를 찾을 기쁨이 없었겠지요. 우리를 찾은 기쁨이 너무나 컸기 때문에 내 아들 하나를 죽이고 모든 내 백성을 찾았도다 하고 슬퍼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를 닮았던 그 아들께서도 죽기 전에도 자기를 죽이는 자들에게 "저들의 죄를 용서해주소서. " 하고 그리고 자기의 뺨을 치는 자에게 수염을 뽑는 자에게 자기의 뺨을 맡기고, 자기를 죄인이라고 여겨서 두들겨 패는 자에게 자기의 등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등을 내어 맡기던 그 분이 부활하신 후에 어찌하였습니까
저는 부활하자마자 주님이 빌라도에게 갈 줄 알았습니다. 헤롯에게 갈 줄 알았습니다. 자기를 십자가에 내어놓게 만들었던 대제사장들에게 갈 줄 알았습니다. 사십일 동안 여러 곳에 다니셨지만, 제자들과 함께는 저 호숫가에도 가고 저 산에도 가고 또 방에도 가서 여러 차례 만나주시고 식사도 같이 했지만 자기를 죽인 사람들에게 찾아가지 않았습니다.
하늘에 올라갈 날이 가까운데도 단 한 번도 찾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너희가 나를 죽였지만 나는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었고 이렇게 살았도다. 이놈들아!" 하고 찾아갈 만한데 전혀 가지 않았습니다. 왜 안 가냐고 물어볼 필요가 없었습니다. 주님은 만족했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만족이었습니까 죽인 자들에게 가서 "나의 죽음의 값을 내어놓아라. 나의 죽음을 보상하라. " 한다면 주께서 보상을 받는다면 우리는 무엇이 됩니까 그로 말미암아 삶을 입은 우리는 무엇이 됩니까
주께서 자기를 죽인 자들에게 찾아가서 보복하지 아니한 것은 자기의 죽음에 대하여 보상을 요구하지 아니한 것은 그 보상으로 저와 여러분을 찾았기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을 구원했기 때문에 오히려 찾아가서 말하다가 "나 당신의 생명을 보상해주겠소. 그러나 당신의 백성은 도로 찾아오겠소. " 할까바 주님께서는 우리를 찾은 것으로 만족하시고 하늘로 오르셨던 것으로 인정하시기 바랍니다.
이처럼 하신 여호와 하나님, 이처럼 하신 예수님, 이 여호와 하나님과 그 아들로 말미암아 오늘 우리가 벌써 의인되어, 죄인이었던 시절마저 잊어버리고 천국 시민의 길을 가고 있으면서 기뻐하고 즐거워 춤을 추며 사는 저희가 된 줄로 믿습니다.
참으로 이 사순절을 기하여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 앵무새의 여주인처럼 모르고 그 아들을 희생시킨 것이 아니라 알고서 보고서 그리하였고, 그 아들이 그처럼 희생되도록 미리부터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렇게 다 만들어주셨으니다시 한 번 성경으로 돌아가 성경이 우리에게 만나게 해 주신 이 아버지와 이 아들을 한 번 더 만나보십시다.
이사야서 50장 1절 이하를 봅니다. "나 여호와가 이같이 이르노라 내가 너희 어미를 내어보낸 이혼서가 어디 있느냐 내가 어느 채주에게 너희를 팔았느냐 오직 너희는 너희의 죄악을 인하여 팔렸고 너희 어미는 너희의 허물을 인하여 내어보냄을 입었느니라 내가 왔어도 사람이 없었으며 내가 불러도 대답하는 자가 없었음은 어찜이뇨 내 손이 어찌 짧아 구속하지 못하겠느냐 내게 어찌 건질 능력이 없겠느냐 보라 내가 꾸짖은즉 바다가 마르며 하수가 광야가 될 것이며 거기 물이 없어졌으므로 어족이 갈하여 죽어 악취를 발하게 되느니라 내가 흑암으로 하늘을 입히며 굵은 베로 덮느니라 주 여호와께서 학자의 혀를 내게 주사(이것은 이제 아들의 입장에서 쓰는 말입니다)
나로 곤핍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줄 줄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길을 깨우치사 학자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학자처럼 말씀하시고 학자같은 귀를 주시고 학자같은 혀를 만들어 버렸으니, 들은즉 말하게 되니 아들의 입에서는 아버지에게서 나온 말 외에는 더 이상 할 수가 없었습니다) 주 여호와께서 나의 귀를 열으셨으므로(자기가 자기의 귀를 열었던 것이 아닙니다. 자라났기 때문에 열린 것이 아닙니다) 내가 거역지도 아니하며 뒤로 물러가지도 아니하며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수욕과 침 뱉음을 피하려고 내 얼굴을 가리우지 아니하였느니라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므로 내가 부끄러워 아니하고 내 얼굴을 부싯돌같이 굳게 하였은즉 내가 수치를 당치 아니할 줄 아노라"
수치를 당치 아니한다 라고 하니까 수치 당할 일이 없었다는 겁니까 온갖 수치에도 수치를 느끼지 못하게 만들었는 것입니다. 누가 그리하였습니까 그의 아버지가 그리 하였습니다. 그의 아버지가 무엇 때문에 아들을 하나밖에 없는데 그렇게 만들었습니까 우리를 위하여 그렇게 했습니다. 믿으시면 아멘 합시다.
그의 아들이 죽었어도 죽인 자를 보복하지 않습니다. 죽었다가 살아난 아들도 자기 죽인 자를 찾아 나서지 않습니다. 왜 입니까 억울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왜 입니까 만족했기 때문입니다. 무엇으로 만족했습니까 저와 여러분으로 만족한 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아니 이 멀쩡하던 사람이 어쩌다가 이렇게까지 되어버렸는가 하는 그것입니다. 그 아들이 그렇게 상식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게된 데는 그의 아버지가 세뇌를 시켰기 때문임을 성경은 말하여 주고 있습니다. 얼마나 철저히 그 아버지가 아들에게 세뇌를 시켰던지 7절에 보면, 아들의 얼굴을 철판보다 더한 부싯돌같게 했으므로 수치를 당하여도 그 수치를 수치인 줄을 알지 아니할 정도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철판 두껍다고 그러지요. 그러나 철판과 철판을 이렇게 충돌시켜 가지고서는 불이 잘 피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강한 부싯돌은 서로 충돌시키면 불꽃이 튀어서 불쏘시개로 삼기도 합니다. 아들의 얼굴을 철판보다 더한 부싯돌로 만드신 이가 바로 그의 아버지셨습니다.
그러면 그 아버지가 어떠한 방법으로 이 아들을 이토록 만들 수 있었는가 그의 세뇌시킨 방법이 과연 무엇인가 4절부터 5절 사이에 잘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아비는 아들에게 학자의 혀를 주어서 곤핍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줄 것을 깨우쳐주었고 그리고 매일 아침마다, 다시 말씀드리면 세상사 보기 전에 세상의 지식과 접하기 전에 세상의 어떤 즐거움들을 만나기 전에 매일 아침 눈만 뜨면 그에게 말을 해 주었는데, 그 귀에다가 대고 진리의 말씀을 얼마나 계속적으로 말씀했던지 결국 그 아들이 그 아버지가 귀에다 대고 세상 물정도 알기도 전에 그냥 퍼붓듯 계속해서 말씀해주시는 그 말씀으로 귀가 열려버렸는데 아들의 귀가 아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그 아비 여호와께서 아들의 귀를 열었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잘 아시겠지만 영어를 하려고 하면 영어를 우선 많이 들어야 합니다. 또 한국말을 하는 우리 아이들이 일단은 많이 듣습니다. 듣다가 보면 어느 날 갑자기 혀가 돌아가고 입이 터집니다. 그래서 영어를 하게 됩니다. 듣지 못하는 사람은 아무리 나이 들어도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들음으로써 자꾸 들음으로써 결국 그 혀는 들은 대로를 그대로 표현하게 되는 것이지요.
여기에 나타난 아들은 그 아버지가 세상도 보기 전에 아침마다 그 귀에다 대고 그 아버지가 무슨 말씀인지 모르지만 말씀을 계속 해 주었는데 그 내용은, 곤핍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줄 것을 늘 가르쳤다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그 아들의 귀가 어느 날 갑자기 열리기 시작했는데 누구로 말미암아 열려졌느냐 여호와께서 나의 귀를 여셨으므로, 5절에 그랬지요 주 여호와께서 나의 귀를 열으셨으므로 내가 그에 의하여 내 귀가 열렸더니 그가 말하는 대로 기계처럼 로봇처럼 그저 명령을 따를 뿐 거역할 수도 없고 뒤로 물러서지도 못하는 이런 내가 되어 버렸도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소개되고 있는 이 희한한 아버지가 4절에도 5절에도 '여호와'라고 그 성호가 소개되었으니 여호와 하나님과 그의 아들과의 일인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이 세상 물정 알기 전에, 세상에 그 무엇을 접하기 전에 계속해서 그 귀에다가 진리의 말씀을 말해주었습니다.
그 내용은 무엇이냐 죄인된 사람 죽어가는 사람 곤핍한 자를 어떻게 구원할 것인가 말로 거듭나게 하는 것을 가르쳐 주었고, 그 다음에 그들을 위하여 네가 어떻게 어떻게 하는 것이 네게 생명이 되는 것이다 라고 계속적으로 주입을 시키고, 그 외에 다른 말은 한 마디 들을 수 없었으므로 그 아들이 성장하여 막상 말을 하게 될 때에는 그 말이 아버지의 말이었고 그의 행동은 아버지의 뜻대로 기계처럼 움직인 것이니 내가 거역하거나 뒤로 돌아서거나 할 수 없는 이런 이상한 청년이 되고 말았다 라고 고백한 고백을 요한복음 12장 50절에서 볼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한 번 찾아보실까요. 요한복음 12장 50절에 보면 이제 그 아들이그 아버지로부터 세뇌를 받아 가지고 자기의 행할 수 있었던, 다 성장한 후에 자기 행동을 설명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요한복음 12장 50절 봅니다. "나는 그의 명령이(아버지의 명령입니다) 영생인줄 아노라 그러므로 나의 이르는 것은 내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이르노라 하시니라"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나이 삼십이 넘으시고 이제 그 백성들을 위하여 일을 하시면서 그가 하시는 모든 행동과 그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에 대하여 그는 해명을 했습니다.
"내 입에서 나가는 이 말은 원래부터 내가 생각하여 내가 하는 말이 아니요 내 아버지께서 내 귀에다가 담아주었고 계속해서 담겼던 내 아버지께로부터 들은 말을 그대로 했을 뿐이요, 내가 너희를 위하여 무엇을 하든지 이것은 내 아버지의 명령이니 내가 죽든지 살든지 나는 아버지의 명령대로 따라가는 것이 영생인줄 아노라. 그 외에는 내가 아는 것이 없도다. "라고 주께서 고백하신 이 고백을 보아서도 그 아버지는 그 아들을 이처럼 철저하게 세뇌시켜서 우리에게 내어보내셨던 것을 짐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러면 무엇 때문에 그리하셨으며, 왜 그 아들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를 그 모양으로 만드셨는가 오늘 본문 있는 조금 앞에 이사야서 50장 1절로 3절이 설명을 잘 해주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그렇게 만들 수밖에 없었던 것은, 세상 사람이 본다면 어쩌면 비정상적인 그런 아들로 세뇌를 시켜버릴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50장 1절로 3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나 여호와가 이같이 이르노라 내가 너희 어미를 내어보낸 이혼서가 어디 있느냐 내가 어느 채주에게 너희를 팔았느냐 오직 너희는 너희의 죄악을 인하여 팔렸고 너희 어미는 너희의 허물을 인하여 내어보냄을 입었느니라 내가 왔어도 사람이 없었으며 내가 불러도 대답하는 자가 없었음은 어찜이뇨 내 손이 어찌 짧아 구속하지 못하겠느냐 내게 어찌 건질 능력이 없겠느냐 보라 내가 꾸짖은즉 바다가 마르며 하수가 광야가 될 것이며 거기 물이 없어졌으므로 어족이 갈하여 죽어 악취를 발하게 되느니라 내가 흑암으로 하늘을 입히며 굵은 베로 덮느니라"
이 말씀은 어떠한 말씀입니까 여호와의 말씀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당신의 형상과 그 모양대로 지은 자기 백성을 좋은 세상에 살게 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세상을 자기 백성에게 다 맡겨 주었습니다. 거룩하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잠시 다른 곳에 가셨다가 찾아오셨습니다. 에덴 동산에 아담을 찾듯이 찾아왔습니다. 얼굴이 보여야 할 사람이 보이지 않습니다. 불러도 대답이 없습니다. 찾아도 사람이 없습니다.
내가 언제 너희 어미에게 이혼증서를 주어서 나를 떠나서 너는 자유 하라고 했느냐 보기 싫으니 함께 살기 싫다고 했느냐 나는 네 어미에게 이혼증서를 써준 적이 없느니라.
내가 너희를 어느 채주에게 팔았더란 말이냐 너희를 팔고서 내가 받은 돈이 있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지은 죄로 너희는 주인을 바꾸어 버렸도다. 너희가 지은 죄로 말미암아 죄값을 받으려고 하는 마귀에게 너희는 종이 되고 말았도다.
너희 어미는 어떤 형편이냐 내가 이혼 증서를 주어서 나가라고 한 적이 없느니라. 내가 싫어서 쫓아낸 적이 없느니라. 너희 어미는 왜 나를 떠났느냐 왜 내가 만날 수 없게 되었느냐 너희의 허물을 인함이니 어미된 자로서 너희가 죄를 지어 다른 채주에게 종이 되어 그 마귀의 종이 되어 있는 것을 보고 어미는 어쩔 수 없이 따라 나갔느니라.
하와가 범죄 했을 때 아담이 어쩔 수 없이 에덴을 두고 떠나감같이 너희 어미는 내가 쫓아내어서 이혼증서를 가지고 간 것이 아니라 너희의 허물을 인하여 내 현장을 떠나서 너희와 함께 그곳에 내어 보냄을 입히게 되었느니라. 그런데 내가 너희를 당장 데리고 오려면 손이 짧으냐 능력이 없느냐 내가 바다를 꾸짖은즉 바다가 말라버리고, 강을 명한즉 강물이 말라서 그곳에 있던 어족이 다 죽어 악취가 온 세상에 가득하지 않았더냐 내가 능력이 없어서 다른 채주에게 가 있는 너희를 내가 당장 찾아오지 못하겠느냐
나는 흑암으로 하늘을 두른 자니라. 베로서 이 땅을 감쌀 수 있는 여호와 하나님이니라. 내게 능력이 없겠느냐 너희를 찾을 힘이 없겠느냐마는 그러나 내가 그렇게 하여 너희를 당장 찾아온다고 하면 너희가 지은 너희의 죄값은 언제 물겠느냐 죄인으로서 내 나라에 온다면 너희가 편하겠느냐
죄지은 사람은 또 죄를 해결 받지 못한 사람은 차라리 죄악 세상에 사는 것이 편하지, 죄지은 사람이 그 죄를 해결 받지 못하고 죄인으로서 여호와 하나님 나라에 간다면 그것은 지옥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에는 죄인으로서는 살 수 없는 곳입니다. 빛의 나라에서는 어두움을 가지고는 살 수 없는 곳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찾아 그 맡겨준 세상 땅에 찾아오셨더니 불러도 대답이 없습니다. 찾아도 없습니다. 그 어미마저 없어졌습니다. 어미는 죄지을 사람이 아닌데 없어졌습니다. 알고 보니 자식들이 죄를 지어 다른 채주의 종이 되었고, 그 어미는 자식들을 인하여 아담이 하와 때문에 에덴 동산을 버리고 함께 쫓겨난 것처럼 내어보냄을 입혀서 떠나가고 말았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손에 힘이 있고 능력이 있으니 당장 그 채주로부터, 그 마귀로부터 자기 백성과 그 어미를 불러 나왔으면 했지만 그러나 그렇게 한다면 죄를 해결하지 못하고 나온 내 백성이 어떻게 행복하게 살 수 있겠는가 내 나라에 오면 더 불행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이사야서 53장 10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그의 아들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케 하셨은즉 그가 죽어 그 영혼을 죄인들 대신 속건 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 씨를 되찾아, 죄인의 씨앗이 아니라 의롭게 된 자의 씨앗을 되찾아 그들로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에서 살게 하기 위하여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놓아 죽게 하였노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 믿으시면 아멘 합시다.
어느 카펫 깔아주는 일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이 남의 집에 가서 일을 맡았습니다. 카펫을 깔고 있었는데 한참 깔다가 힘도 들고 해서 담배 한 대를 피우고 싶어서 밑 포켓에 넣어 두었던 담배를 꺼내려고 찾아보니 담배가 없었습니다.
"담배를 내가 어디 두었지 일하다가 어디 빠뜨렸나" 하고서 두리번두리번 하다보니 카펫트 저 한 쪽 편이 불룩했습니다. "아이구머니나. 담배가 어떻게 저기 들어갔지" 그래서 가서 담배이리라 생각하고 발로 자근자근 밟아보니까 역시 말랑말랑했습니다. 담배였습니다.
카펫을 뜯어가지고 담배를 꺼내 한 대 피우고 싶지만 강력 접착제로 다 붙여 놓았고 그리고 전부 무늬를 맞추어 놓았는데 이것을 다시 뜯어낸다면 아주 복잡하게 생겼습니다. 차라리 내가 담배를 피우지 말고 말지 하고서 이렇게 막 밟아도 불룩하고 좀 뜹니다. "이것 안되겠네. "해 가지고서 몽둥이를 하나 갖고 와서 얼마나 거기를 두들겨 팼던지 납작하게 두들겨 팼습니다.
일을 끝내고 그 주인 아주머니에게 "아주머니, 끝났습니다. 이제 저 돌아갑니다. " 하고서 장비를 다 챙겨 가지고서 자기 차에 갖다 실었습니다. 차에 실으려고 짐을 싣는데 자기가 앉았던 운전석에 보니까 담배갑이 거기 있다 그겁니다. "아이구머니나.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아까 나는 카펫 밑에 있는 것이 담배갑인줄 알고 자근자근 밟다가 그것도 안 되어 가지고서 몽둥이로서 납작하게 만들어버렸는데 이것 어떻게 된 일인가 그게 뭐던가" 좀 궁금합니다.
그런데 여주인이 "아저씨!" "왜요" "혹 일하다가 우리 앵무새 못봤어요" 몽둥이로 한없이 두들겨 팬 그것이 담배갑이 아니라 앵무새였습니다. 그래서 납작하게 이제 본 살처럼 되고 말았는데, 아저씨는 망설였습니다. 자기가 두들겨 패서 납작하게 만들었던 그것이 앵무새였구나 하고 이실직고 하려고 하다가 멈칫 하다가 모른척했습니다.
집주인은 그저 앵무새가 바깥으로 날아갔거니 생각하고 이제 일한 노임도 주고 그리고 "아저씨 오늘밤에 오세요. 우리가 집수리를 깨끗이 했으므로 동네 지인들을 불러서 우리 파티를 하기로 했습니다. 오늘 저녁에 오십시오. " 해서 그날 저녁에 파티에 참석했더니, 그저 수고했다가 카펫트 잘 깔아주셨다고 술도 한 잔 주고 마시고 전부 춤을 추는데 다른 사람들은 그저 카펫을 잘 깔았다라고만 알고 편편한 카펫 위에 춤을 추고 자기는 그 현장을 지나갈 때마다 발을 조금 조금 이렇게 건너뜁니다. 자기는 알고서도 춤을 출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카펫 작업을 하는 이 아저씨는 처음에는 이 불룩했던 것이 자기의 담배갑인줄 알았습니다. 이사야 53장 4절에 나타난 대로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여호와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고난을 받는 것은 그의 죄 때문에 그가 당연히 받을 벌을 받는 줄을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 카펫 깔은 사람은 나중에는 그 죽은 것이 자기의 담배갑이 아니라 앵무새였다는 것을 발견하고, 이제 우리는 마음 아파합니다. "우리가 어찌할꼬!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을 우리가 죽였도다. "라고 우리는 회개하는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마는 어쩔 수 없어 살아갑니다. 돈을 받아야 가족이 살겠고 그리고 그 파티에 춤을 추어야만 하겠기에 그가 죽은 사실을, 그 새를 자기가 두들겨 패서 죽였다는 사실을 말을 못하고 있습니다마는 마음속으로는 항상 이것이 걸렸습니다.
이런 생각도 해 보았습니다. 다른 새면 모르겠거니와 말한다고 해서 앵무새인데 그냥 내가 두들겨 팰 때 "앵무, 앵무" 하지 왜 아무 말 안하고 그냥 죽는단 말인가 저는 앵무새는 원래 "앵무, 앵무" 하는 줄 알았더니 "앵무, 앵무" 하는 것이 아니라 아프면 "아프다. " 하고 "반갑습니다. " "안녕하세요" 말하는 앵무새인데 이 앵무새는 아무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덕분에 자기는 편리하게 일을 다 마쳐버렸고 그 위에 춤을 추고 그 일 했다고 돈을 받아서 잘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와 같습니까 이 카펫 작업을 하는 사람과 다를 바가 뭐 있습니까 우리는 교회 와서 즐거워합니다. 십자가 밑에서 교회라는 반석 위에서 춤을 춥니다. 우리는 우리를 가리켜 우리의 옆 사람을 가리켜 죄인이라 하지 않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 말미암아 이미 의롭게 된 사람들, 의롭다 칭함을 받은 사람들이라 합니다.
우리는 거룩한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이요, 저 바깥에 있는 사람들은 죄인이며 결국은 주께로 돌아오지 아니하면 지옥으로 갈 사람들이라고 우리는 구별하고 있습니다. 바깥 사람들은 죄인이요 사망의 구렁텅이로 빠질 것이나, 우리는 죄인이 아니요 그래서 천국에 갈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 말하는 이 바닥이 어디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깨어진, 그리스도가 반석이 되어 세우신 이 바닥인 것을 인정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무엇 밑에서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까 십자가 밑에서만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뽑아버린다면 저 바깥 사람이나 믿는다고 하는 우리나 무엇이 다를 수 있겠습니까
십자가 때문에 우리는 죄인 아닌 것처럼 되고 저 바깥에 있는 사람들은 채주가 다른, 그래서 마귀가 채주가 되어 있는 그 현장으로 끝내 갈 것이라고 우리는 말하면서 우리는 언제 그런 신분을 가졌던가 하는 생각을 벌써 갖고 있습니다마는, 그런 생각을 할 수 있고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앵무새가 깔려 죽은 그 카펫 평평한 그 바닥 위에서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형편이 바로 그런 것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입이 있었으나 말없이 자기를 때리는 자들에게 등을 맡겼습니다. 비록 죄를 지었을지라도 수염을 잡아 뽑는다면 그것은 참으로 찐한 모욕을 주는 겁니다. 차라리 재판정에서 몇 년 징역을 받고 있지 수염을 뽑힌다는 것은 참으로 부끄러운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수염을 뽑으면서 얼굴에다가 침을 뱉으면서 온갖 모욕을 퍼붓는데도 그 얼굴 하나 변하지 아니하고, 침을 뱉어도 본능적으로 눈이 감길 것인데 눈도 감지 아니하고 자기의 수염을 뽑는 사람들에게 얼굴을 노다지 갖다 맡기며 "마음대로 뽑아라. 더 뽑아라. 다 뽑아라. " 그렇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 그에게 죄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죄로 말미암아 그가 등을 맞고 있었으며 우리의 죄로 말미암아 그의 수염이 뽑히고 있었던 것을 카펫 공사한 사람처럼 우리는 압니다.
남의 죄를 지고도 부끄러움을 부끄러움으로 알지 못합니다. 수치를 수치로 알지 못합니다. 그 아들이 그렇게 된 것을 오늘 성경은 말하기를, 그 아버지가 그렇게 만들었으니 그 아버지는 우리를 찾아왔으되 찾지 못하고 우리의 이름을 불렀으되 대답하는 자가 없어 살펴보았더니 모두들 자기 죄로 말미암아 채주를 바꾸어 버렸더라 그겁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으로 있어야 될 사람들이 마귀를 주인으로 삼고 마귀는 자기의 백성이 되었다고 그 권리를 주장하고 있더라 그것입니다.
어미를 내어보내지 아니할 수가 없었다는 겁니다. 여기에 나타난 어미는 누굽니까 그는 죄를 짓지 아니했어도 죄짓고 떠나간 백성을 위하여 자식들을 위하여 내어보냄을 입었느니라고 말했으니, 오늘 우리가 믿고 있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죄가 없었어도 내어보냄을 받게 되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그를 내어보낼 때에 내어보내기 전에 오랜 세월동안 귀에다 대고 진리만을 말해 주었습니다. 아침 눈을 뜨면 해질 때까지 진리만을 그 속에 넣어주었습니다.
사람은 들은 대로 합니다. 본 대로 합니다. 가끔 공부를 잘해서 점수가 좋고 퀴즈대회 같은 데서 아주 높은 점수를 따는 학생들을 보니까 아버지 어머니가 같이 선생님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물어보았습니다. 역시 선생님들은 공부를 잘하고(옛날에 다 공부 잘하면 선생님 했으니까요) 공부를 잘하니까 공부 잘하는 부모 밑에서 난 자식들이 공부를 잘하는가 보다 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제게 그 얘기를 듣고 있던 분이 아주 그럴듯한 얘기를 해 주었습니다. "저는 그 부분에 대해서 좀 연구했습니다. 아버지 어머니가 공부를 잘했기 때문에 자식이 꼭 공부를 잘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어머니가 아이를 배고서도 어쩔 수 없이 매일 교단에 나가서 가르치기 때문에 배속에 있는 아이가 가르치는 어머니 때문에 다른 아이들보다 가르치는 얘기를 훨씬 많이 듣기 때문입니다. 태교가 된 것입니다. "
그렇습니다. 어린 아이일 적부터 무슨 말인지 잘 알아 들을 수 없으리라 생각하는 그때부터도 그 어머니가 마음먹은 대로 말하는 대로 그 집안의 분위기대로 그 아이가 나서 그대로 나타나듯이,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에게 진리 외에는 들리게 하지 않았습니다. 세상 사람을 구원하는 일 외에는 보이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 아들을 우리 가운데 보내사 자기 뺨을 때리는 자에게 뺨을 돌리지 아니하며, 수염을 뽑는 자에게 자기 뺨을 오히려 갖다 들이대며. 그리고 자기를 때리는 자들에게 등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등을 다 맡겨 버리는 이런 일을 했습니다.
누가 이처럼 하도록 만들어 주었는가 그 아버지께서 그토록 하도록 만들어주셨던 것입니다. 누구를 위해서입니까 바로 저와 여러분을 위해서. "맞아야 한다. 맞아야 한다. 맞는 것이 사는 것이다. 수욕을 당하는 것이 내 백성이 수욕을 당하지 않고 죄짐을 벗고 빠져 나오는 길이야. 다른 사람이 할 사람이 없어. 네가 해야돼. 네가 해야돼. "
하늘에 계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그렇게 만들어 우리 가운데 보내셨으니, 그가 끌려갈 때에도 아무 말 하지 않았습니다. 털 깎는 자 앞에 앉은 양처럼 아무 말이 없었습니다.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소처럼 끌려가서 때리면 때리는 대로 맞으면 맞는 대로 죽이면 죽이는 대로 아무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화도 내자 않았습니다. 부끄러워한 흔적을 볼 수가 없습니다. 누가 그렇게 만들었다 라고 했습니까 그 아버지가 그 아들을 세뇌하여 우리 인생을 구원하기 위하여 그의 얼굴을 철판보다 더한 부싯돌같이 만들었기 때문에, 수치와 곤욕을 당하여도 그를 수치로 알지 못하였노라고 주님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연산군의 부왕되는 성종은 여러 여자들을 후궁으로 삼았고 많은 자식을 낳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마는, 그 중에 엄 귀인과 정 귀인이 역사에 잘 나타나 있지요. 이들은 연산군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게 되는데 연산군 자기 생모를 어렵게 했다 라고 해서 죽입니다. 이 두 여인에게 자루를 뒤집어 씌워버립니다.
자루를 뒤집어 씌운 후에 이 여인들의 아들들을 불러와 가지고서 다 왕자들인데 이 왕자들을 그 자루 뒤집어쓴 어머니 옆에다 세우고서 "이 속에 있는 이 사람들은 대역죄인이니라. " 너희 어머니라고 하지 않았어요. 연산군이 말하기를 "대역죄인이니라. 이 대역죄인을 나는 나의 동기가 되고 형제가 되는 너희들의 손으로 때려죽이기를 원하노라. 너희가 만약에 이 대역죄인을 몽둥이로 때려죽이지 못하면 단칼에 너희를 베겠노라. " 이렇게 했습니다.
자루 하나 뒤집어썼으니 귀가 막힌 것도 아니고 이 여인들은 자루 속에서 다 들었습니다. 끌려온 자식들이 자기 아들인 것을 알았습니다. 연산군이 미쳐 있습니다. 많은 사람을 죽이고 있는데 지금 이 아들들이 자기를 두들겨 패서 죽이지 아니하면 칼을 뽑아서 그 아들들을 죽임으로써 다른 왕자를 없애서 자기의 왕위를 보존하려는 아마 그런 뜻이 있는 것으로 여인들은 충분히 헤아릴 수 있었겠지요.
연산군이 너무나 무섭게 채근하니 몽둥이를 들고서 그 여인들을 두들겨 팹니다. 두들겨 맞는 여자들이 누굽니까 자기 어머니입니다. 그런데 그 맞아 다 죽어가는 어머니가 죽을 때까지 이 두 여인은 "이놈아 네가 왜 나를 때리느냐. 나는 네 어미다. "라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왜입니까
아들들이 오기 전에는 그렇게 살려고 연산군에게까지 대어들면서 또 인수대비에게 그렇게 생명을 부탁하고 하던 이 여인들인데 막상 자기 아들들이 자기를 두들겨 팰 때에는 어미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아들을 살리려면 내가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이니 내가 이 속에서 "이놈아, 나는 네 어미다. "라고 말하면 저 아들이 어떻게 나를 죽일 수 있을까. 아들이 끝내 나를 죽이지 못하면 저 연산군이 당장 내 아들들을 칼로 벨 것이다.
그래서 여인들은 죽고 아들은 겨우 살아남았던 사실을 우리는 역사 속에서 바라보는데, 앵무새 주인은 모르기라도 했지만 우리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성종의 후궁들처럼 알고도 오히려 그 아들을 죽이는 자들을 살리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알고도 능력이 있으면서 조처를 하지 않았습니다. 얼마든지 건져낼 수 있는데 그 아들을 건져내려 하지 않았습니다.
세상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을 그 아들이 세상에 보냄을 받아서 하고 있습니다. 끌려갑니다. 쓰러지고 또 쓰러집니다. 침 뱉음을 받습니다. 뻘건 베옷을 감고서는 침을 뱉고 그 병정들이 뺨을 때립니다. 수염을 뽑습니다. 모욕을 가합니다.
그렇게 하는데도 부끄러움도 타지 아니하고 자기를 때리는 자들에게 등을 돌려대며, 자기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뺨을 맡기며, 침을 뱉으며 뺨을 치는 자들에게 "아버지여, 저들이 몰라서 저리하오니 저들을 용서하여 주소서. "라고 하는데 거짓이 아니었습니다. 어쩔 수 없어 하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진심이었습니다.
세상에 사람 치고 상식적인 사람 치고, 자기의 죄도 아니고 남의 죄를 위하여 죽어주면서 이렇게 진실할 수가 있더란 말인가 그것입니다. 이 세상에 난 사람 치고 그렇게 된 사람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누가 그렇게 만들었습니까 누구의 실력이 그를 그토록 되게 했습니까 여호와 하나님이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실력이었습니다.
당신께서 교육을 시켜서 때리는 자에게 자기 등을 돌려대게 하였고 자기 수염을 뽑는 자에게 자기 뺨을 맡기는 것을 여호와 하나님이 친히 직접 봅니다. 그 아들이 십자가에 올라가서 막 모욕하고 목마르다 라고 하는데 그저 쓸개탄 포도주를 자기 입에다 문지르는 그런 사람들을 향하여 "아버지여, 저들이 몰라서 저리하오니 저들에게 감정을 갖지 마시옵소서. 저들을 용서하시옵소서. "
아들의 부르짖음은 거짓이 아니었습니다. 빈 말이 아니었습니다. 체면상 하는 말이 이었습니다. 진심었습니다. 진심할 수 없는 자리에서 진심을 내어놓는 그 아들을 보는 아버지, 그 아들이 그렇게 당하는 것은 아들 탓이 아니라 아비 탓이었습니다.
십자가에서 그 아들이 자기의 시킨 대로 기계처럼 끌려가서 그렇게 죽는 것을 바라다보면서 진심까지 다 드러내었는데 "나 죽이는 저들을 용서하소서. " 라고 하면서 그 영혼이 떠나가는 것을 보면서 그렇게 되도록 가르쳤던 여호와 하나님께서 얼마나 하늘에서 몸서리를 쳤던지 예수 운명하는 순간에 하늘이 흔들리고 땅이 흔들리고 태양이 빛을 잃고, 얼마나 흔들어대었던지 주님이 운명하는 순간에 많은 무덤들의 돌문이 다 굴러 떨어져버렸다고 하지 않습니까
상식적인 지진이 아니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몸부림이었습니다. 성전의 휘장이 찢어졌습니다. 누구의 육체가 갈라진 것입니까 그리스도의 육체가 갈라졌으니 여호와 하나님의 마음이 쪼개진 것입니다. 그렇게까지 하셨지만, 그처럼 당신의 가슴이 찢기어졌어도 여호와 하나님은 그 아들 죽인 자들을 찾지 않았습니다. 보복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성경을 잘 보십시오. 당신의 아들을 그처럼 모욕하고 그토록 험하게 죽였던 사람들을 그 천사들로 찾아 나서지 않았습니다. 단 한사람도 책임을 묻지 않았습니다. 왜입니까 그 아들을 그렇게 희생시키므로써 수많은 잃었던 우리를 찾았기 때문입니다.
힘이 없어 아들을 그렇게 만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될 줄 몰라서 그렇게 내어놓았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유는 무엇입니까 내가 너희를 불러도 대답이 없고 찾아도 찾을 수가 없었도다. 너희가 갑자기 어디에 갔느냐 너희 위에 있는 그 주인은 누구냐 너희의 채주가 마귀로구나. 언제 그렇게 되었는가. 너희가 죄를 지었구나. 너희가 죄를 지었구나.
죄지은 너희를 내가 어떻게 찾아내랴 내가 힘이 있어서 손을 쓰면 바로 데리고 오겠지만, 죄를 갚지 아니하고 그대로 데리고 온다면 너희는 지옥에서 사는 것보다 천국에서는 더 힘들 것이야. 방법이 따로 없으니 내 아들을 너희 대신 너희 당할 수치를 당하게 하고 너희 뽑힐 수염을 뽑히게 하고 너희 맞을 등을 맞게 하고 너희 죽을 죽음을 죽게 하여 내 아들을 희생시키고 너희를 찾겠노라.
그 아들이 십자가에서 죽을 때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죽는 아들만을 쳐다보고 계신 것이 아니라 되찾을 수 있는 우리을 찾으셨던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가 사하여지는 것을 보고 그는 억울하지 않았습니다. 손해보지 않았습니다.
내 아들 하나를 희생시켰고, 충분하게 내 백성을 찾아내었으니 그가 속건 제물로 그 영혼을 드리기에 이르면 나의 많은 씨를 되찾게 될 것이라 하시던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대로 우리를 찾게 되었으니 그가 억울해 한다면 우리를 찾을 기쁨이 없었겠지요. 우리를 찾은 기쁨이 너무나 컸기 때문에 내 아들 하나를 죽이고 모든 내 백성을 찾았도다 하고 슬퍼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를 닮았던 그 아들께서도 죽기 전에도 자기를 죽이는 자들에게 "저들의 죄를 용서해주소서. " 하고 그리고 자기의 뺨을 치는 자에게 수염을 뽑는 자에게 자기의 뺨을 맡기고, 자기를 죄인이라고 여겨서 두들겨 패는 자에게 자기의 등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등을 내어 맡기던 그 분이 부활하신 후에 어찌하였습니까
저는 부활하자마자 주님이 빌라도에게 갈 줄 알았습니다. 헤롯에게 갈 줄 알았습니다. 자기를 십자가에 내어놓게 만들었던 대제사장들에게 갈 줄 알았습니다. 사십일 동안 여러 곳에 다니셨지만, 제자들과 함께는 저 호숫가에도 가고 저 산에도 가고 또 방에도 가서 여러 차례 만나주시고 식사도 같이 했지만 자기를 죽인 사람들에게 찾아가지 않았습니다.
하늘에 올라갈 날이 가까운데도 단 한 번도 찾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너희가 나를 죽였지만 나는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었고 이렇게 살았도다. 이놈들아!" 하고 찾아갈 만한데 전혀 가지 않았습니다. 왜 안 가냐고 물어볼 필요가 없었습니다. 주님은 만족했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만족이었습니까 죽인 자들에게 가서 "나의 죽음의 값을 내어놓아라. 나의 죽음을 보상하라. " 한다면 주께서 보상을 받는다면 우리는 무엇이 됩니까 그로 말미암아 삶을 입은 우리는 무엇이 됩니까
주께서 자기를 죽인 자들에게 찾아가서 보복하지 아니한 것은 자기의 죽음에 대하여 보상을 요구하지 아니한 것은 그 보상으로 저와 여러분을 찾았기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을 구원했기 때문에 오히려 찾아가서 말하다가 "나 당신의 생명을 보상해주겠소. 그러나 당신의 백성은 도로 찾아오겠소. " 할까바 주님께서는 우리를 찾은 것으로 만족하시고 하늘로 오르셨던 것으로 인정하시기 바랍니다.
이처럼 하신 여호와 하나님, 이처럼 하신 예수님, 이 여호와 하나님과 그 아들로 말미암아 오늘 우리가 벌써 의인되어, 죄인이었던 시절마저 잊어버리고 천국 시민의 길을 가고 있으면서 기뻐하고 즐거워 춤을 추며 사는 저희가 된 줄로 믿습니다.
참으로 이 사순절을 기하여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 앵무새의 여주인처럼 모르고 그 아들을 희생시킨 것이 아니라 알고서 보고서 그리하였고, 그 아들이 그처럼 희생되도록 미리부터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렇게 다 만들어주셨으니다시 한 번 성경으로 돌아가 성경이 우리에게 만나게 해 주신 이 아버지와 이 아들을 한 번 더 만나보십시다.
이사야서 50장 1절 이하를 봅니다. "나 여호와가 이같이 이르노라 내가 너희 어미를 내어보낸 이혼서가 어디 있느냐 내가 어느 채주에게 너희를 팔았느냐 오직 너희는 너희의 죄악을 인하여 팔렸고 너희 어미는 너희의 허물을 인하여 내어보냄을 입었느니라 내가 왔어도 사람이 없었으며 내가 불러도 대답하는 자가 없었음은 어찜이뇨 내 손이 어찌 짧아 구속하지 못하겠느냐 내게 어찌 건질 능력이 없겠느냐 보라 내가 꾸짖은즉 바다가 마르며 하수가 광야가 될 것이며 거기 물이 없어졌으므로 어족이 갈하여 죽어 악취를 발하게 되느니라 내가 흑암으로 하늘을 입히며 굵은 베로 덮느니라 주 여호와께서 학자의 혀를 내게 주사(이것은 이제 아들의 입장에서 쓰는 말입니다)
나로 곤핍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줄 줄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길을 깨우치사 학자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학자처럼 말씀하시고 학자같은 귀를 주시고 학자같은 혀를 만들어 버렸으니, 들은즉 말하게 되니 아들의 입에서는 아버지에게서 나온 말 외에는 더 이상 할 수가 없었습니다) 주 여호와께서 나의 귀를 열으셨으므로(자기가 자기의 귀를 열었던 것이 아닙니다. 자라났기 때문에 열린 것이 아닙니다) 내가 거역지도 아니하며 뒤로 물러가지도 아니하며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수욕과 침 뱉음을 피하려고 내 얼굴을 가리우지 아니하였느니라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므로 내가 부끄러워 아니하고 내 얼굴을 부싯돌같이 굳게 하였은즉 내가 수치를 당치 아니할 줄 아노라"
수치를 당치 아니한다 라고 하니까 수치 당할 일이 없었다는 겁니까 온갖 수치에도 수치를 느끼지 못하게 만들었는 것입니다. 누가 그리하였습니까 그의 아버지가 그리 하였습니다. 그의 아버지가 무엇 때문에 아들을 하나밖에 없는데 그렇게 만들었습니까 우리를 위하여 그렇게 했습니다. 믿으시면 아멘 합시다.
그의 아들이 죽었어도 죽인 자를 보복하지 않습니다. 죽었다가 살아난 아들도 자기 죽인 자를 찾아 나서지 않습니다. 왜 입니까 억울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왜 입니까 만족했기 때문입니다. 무엇으로 만족했습니까 저와 여러분으로 만족한 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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