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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 그 소리로 거리에 들리게 아니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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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고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는 한 사람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 별스럽게도 상한 갈대를 꺾지 않고 그리고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않는 사람이기에 특별나서 이 성경에 소개되고 있는 것입니다.
갈대를 가지고 지붕을 이거나 혹은 엮어서 울타리를 만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상한 갈대를 꺾어버리지 아니하고 지붕에 사용하는 사람 없고 또 꺾어버리지 아니하고 울타리로 썼다면 그 상한 것이 계속 상하면서 비도 세게 하고 그리고 또 꽁꽁 묶어서 울타리를 만들었을 적에 상한 갈대 하나 있으면 비 맞으면 곧 썩어서 그 묶음이 풀어지고 헐거워져서 울타리가 무너지는데, 이 상한 갈대를 꺾지 않는 사람이 오늘 성경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꺼져가는 등불, 그것을 가지고 먼 길 가겠다고 밤길 나서는 사람은 없습니다. 기름이 다 되어 불이 꺼져가면 그 등을 바꾸어 나가야 합니다. 꺼져가는 등불 가지고 어두운 밤길 몇 리나 더 가겠습니까 끄고 새 불 바꾸어 가지고 나가는 것이 상식인데 오늘 성경에 소개되는 분은 꺼져가는 등불도 끄지 아니하시는 분이라는 겁니다.
이런 특별난 분이 누구시겠는가 성경에 이런 일을 행하신 그의 일을 소개한 바가 있는데, 마태복음 25장 1절로 13절 사이에 그가 신랑으로 오면서 예상 외로 기름이 넉넉한 다섯 처녀를 데리고 잔칫집 안으로 들어간 것이 아니라 기름이 넉넉하지 못한 다섯 처녀를 데리고 들어갔고 잠시 후 기름을 가득 채워 가지고 온 다섯 처녀는 밖에 두고서 잔치집 안으로 들이지 아니했던 그 신랑이 오늘 바로 이 이사야서에 소개되고 있는 신랑입니다.
우리는 생각하기를 들어간 다섯 처녀는 기름을 충분하게 갖고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들 합니다. 못 들어간 다섯 처녀는 미련하여 기름을 준비하지 못했기 때문에 기름이 없어서 못들어갔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로 그렇게 알도록 한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잘 따져서 읽어보면 들어갔던 다섯 처녀는 들어가지 못한 다섯 처녀의 기름 도움 요청을 받았을 때에 우리의 남은 이 적은 기름을 너희에게 나누어 주면 너희가 우리의 쓰기에 다 부족할 것 같으니, 신랑 올 때에 정작 너희 등불도 우리 등불도 꺼질 것 같으니 줄 수 없노라 라고 했습니다.
신랑과 함께 잔치집에 들어갔던 이 다섯 처녀는 기름이 그야말로 신랑이 올 때에는 매우 부족했지만 그 신랑은 부족한 다섯 처녀를, 꺼져가는 등불을 가진 다섯 처녀를 아무 말 없이 데리고 들어갔습니다. 잠시 후 못 들어간 다섯 처녀는 오히려 장사하는 사람에게 가서 기름을 가득 채워가지고 왔습니다.
물론 문은 닫혔지만 신랑이 멀리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가득 기름을 채워가지고 불을 밝히고 와서 신랑이여 우리가 불 밝히어 왔으니 우리를 입장시켜 주소서 주소서 했지만 기름을 가득 채워 왔던 이 다섯 처녀는 주님에게 그다지 반가웠던 사람들이 아닌지, 그 사람들은 밖에 두어도 밝은 등불과 함께 살 수 있어서 그랬는지 모르지만 불러들이지 않았습니다.
저는 오늘 이 별난 사람을 소개하기 위하여 제가 읽고 지금도 기억에 남아있는 사례 하나를 예로 말씀드려서 오늘 소개하고자 하는 이 분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말씀 드려볼까 합니다.
브라질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브라질에 한 시골 마을에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딸이 살고 있었는데 아버지가 병들어서 그나마 있는 재산 다 허비하고 아내와 딸만 남겨두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딸이 어릴 때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고 또 그 가정은 매우 가난하기 때문에 어머니는 딸 때문에 걱정을 했습니다. 그러나 딸은 자라는 동안 어머니의 말씀을 잘 들었고 또 어머니는 그를 사랑하며 교육을 잘 시켜서 아주 행복스러워 보이던 그런 가정이었는데, 그 어머니의 이름은 '마리아'이고 그 딸의 이름은 '크리스티나'라고 제가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 아이가 십대가 되면서 학교 가서 친구들을 만납니다. 이 친구들을 만나면서 가끔 주말이 되면 이제 큰 도시에로 한 번 가고 싶어서 친구들과 함께 나가기도 하고 어떤 때는 또 자고 들어오기도 했습니다.
아무래도 걱정이 되던 어머니 마리아가 이 크리스티나에게 말하기를 "조심해야 한다. 도시에 가면 도둑놈도 많고 험한 사람 많으니 집에 있어야 한다. 나쁜 친구 사귀지 말아야 한다. "라고 당부를 했지만 그 어머니가 일하고 지친 몸으로 집에 들어왔더니 딸이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가출해 버렸습니다. 그 못된 십대 친구들과 함께 이제 향락스러워 보이고 행복해 보이는 큰 도외지로 도망을 가고 말았습니다.
어머니 마리아는 딸이 갔을 것이라고 예상한 리오데자네이로, 세계 유흥도시 향락도시 리오데자네이로로 갔습니다. 크리스티나가 가서 있을 곳이 뻔했기 때문에 그곳에 있는 호텔, 나이트 클럽, 또 술집, 도박장 이런 곳을 찾아 나서게 되었습니다.
그는 찾아 나서기에 앞서서 자기 사진을 사진관에 가서 여러 장 복사를 했습니다. 좀 확대해서 복사를 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서 자기 딸이 갔을 만한 그 나쁜 지역 사방을 돌아다니면서 그 사진을 이제 부착했습니다. 화장실에도 붙이고 또 전화박스에도 붙이고 그리고 현상금 붙은 죄인 수배하는 그런 사진 옆에도 갖다 붙이고 온갖 나쁘게 된 사람들이 갈 만한 곳에다가 자기 사진을 많이 갖다 붙였습니다.
그리고 그 사진 뒤에는, 앞에도 쓰지 않고 그 뒤에다가 메모를 남겨두었습니다. "네가 무엇을 했던지 지금 네가 어떤 형편에 있던지 나는 상관하지 않으니 돌아오렴!" 하고 메모를 남겨두었습니다. 그리고서 그 어머니는 지치고 돈도 떨어지고 해서 다시 시골 마을로 돌아왔습니다.
몇 주 후 그의 딸 크리스티나가 나이트 클럽에서 밤새도록 나쁜 사람들과 춤추고 그리고 호텔을 전전하면서 몸을 다 망친 후에 피곤하여 쓰러질 듯 쓰러질 듯 건물 층계를 한층 한층 내려오고 있었는데, 지친 자기의 눈에 약간 취한 자기의 눈에 언뜻 익숙한 얼굴이 보이는 것 같았습니다.
무의식적으로 가까이 가까이 가 보았더니 자기 어머니의 사진이었습니다. 얼른 그 사진을 떼였습니다. 그 동네에 사진이 붙는다는 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부끄러운 얼굴이 팔리기 때문에 사진을 뜯었습니다. 뜯고서 앞면 뒷면을 살펴보았더니 메모가 있었습니다. "네가 무엇을 했던지 지금 어떤 형편에 있던지 나는 상관하지 않으니 돌아오렴!"이라고 써 두었습니다.
부끄러워서 옆에 누가 있나 없나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자기가 부끄러워 할 이유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딸의 이름도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어머니 얼굴만 팔린 것이지 자기는 누구도 알아보지 못하도록 이름도 자기 얼굴도 쓰지 않았습니다.
그의 어머니 마리아는 상한 갈대요 꺼져가는 등불이 되었던 자기 딸을 남들이 알까바 외쳐 부르지 않았습니다. 그 찾는 소리가 거리에 들릴까바, 자기 딸의 허물이 거리에 들릴까바 서서 기다리고 있지도 않았습니다. 조용하게 자기 얼굴만을 사방에다 갖다 붙였던 것입니다.
범죄하고 떠나간 딸의 사진을 붙여야 할 것인데 어머니 자신의 사진을 붙여놓고 그리고 메모를 남겼지만, 혹 누가 그 메모를 보고 자기 딸이 나쁜 짓을 하고 있는 그런 딸인 것으로 생각할까바, 들킬까바 자기 딸 죄인인 것이 남에게 들킬까바 딸의 이름도 기록하지 않았던 이 어머니, 그는 딸을 대신해서 죄지어 만신창이가 된 그 딸의 얼굴을 씻기 위해서 그 딸의 체면을 살려주기 위해서 평생을 선량하게 살아온 이 어머니가 온갖 우범지역에 자기 얼굴을 내어다 팔았던 것입니다.
자기 얼굴이 붙었던 그 지역의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은 그 지역에 얼굴이 붙으면 어디 학교에 동상을 보는 것 같이 여기지 않습니다. 큰 기념관 앞에 있는 자신으로 보지 않습니다. 침을 뱉으며 "저 다 늙은 여자도 무슨 나쁜 짓을 했기에 얼굴이 저기 붙었지 현상금 얼마짜리인가" 이렇게 하면서 모두들 지나가는 그 현장에 자기를 있는 대로 복사해서 갖다 붙이고 딸을 찾았지만 그 동네에 이름이 들켜질까바 그 딸의 체면을 위하여 딸의 이름을 쓰지도 않고 그냥 돌아오라고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주변에서는 집 나간 아이를 찾는다고 막 사진을 수만장 복사해 갖고 뿌립니다. 아버지 어머니의 사진을 뿌리는 것이 아닙니다. 나쁜 짓 한 아이의 사진을 뿌립니다. 그리고 어떻게 어떻게 생겼다고 몽타쥬를 만들고 특색까지 씁니다. 턱이 나오고 눈이 크고 작고 자세히 알아볼 수 있도록 다 기록합니다. 더 많이 붙이려고 애를 씁니다. 그리고 게다가 "아무 아무개야 돌아오라. 모든 것을 용서하겠다. " 그렇게 합니다.
어찌 보면 참 훌륭한 아버지이고 훌륭한 어머니인 것 같습니다. 많은 큰 죄를 짓고 나갔지만 다 용서하겠다고 아무 아무개야 돌아 오라 했지만, 이 브라질 여인 마리아는 딸의 이름을 쓰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용서해주겠다는 말은 쓰지 않았습니다. 그런 말은 곧 누구를 허물되게 하느냐 허물된 자기 딸을 더욱 허물되게 소문을 내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아마 한 이년 전인가 기억됩니다마는 월남 엄마들이 한국 군인 아저씨들과의 사이에서 낳은 자식들을 이끌고 한국에 와서 TV에 부끄러운 자기 얼굴을 비취고 태어난 아이 얼굴을 비취는 것을 보았습니다. 알고 보았더니 우리 한국 군인 아저씨들이 전쟁터에 파병되면서 총알만 뿌리고 온 것이 아니라 다른 씨앗까지 뿌리고들 와 가지고서 그런 일이 발생한 겁니다.
여인이 나타나서 이렇게들 했지요. "나는 어느 지역 몇 번지에 이층집에 있었습니다. 나와 동침한 남편 되는 사람이 거기 지냈습니다. 이 아이가 바로 그 아이입니다. " 하고서 신문에다가 어머니도 내고 아이의 얼굴도 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본 월남 갔던 씨뿌린 아저씨들은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나타나지 않는 것이 상식이라서 나타나지 않는 사람을 두고서 비판한 적을 보지 못했습니다.
자기의 허물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상식입니다. 그러나 오늘 소개되었던 이 브라질의 마리아라고 하는 여자는 딸의 수치 위에다가 자기의 얼굴로서 덮어버렸던 것입니다. 딸의 이름 위에다가 자기 이름으로 덮어버렸습니다. 딸의 이름이 자랑스러운 이름이 아닙니다. 딸의 얼굴이 자랑스러운 얼굴이 아닙니다. 그런 그의 얼굴 위에 어머니의 얼굴로서 덮었고, 그런 딸의 이름 위에 자기의 이름으로 그 딸의 부끄러움을 가리웠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 속에 나타난 그는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구원하되 그 구원받는 자의 체면을 위해서 외치지 아니하며 거리에 들리게도 아니하면서 자신을 사방에 십자가 위에 걸어 세우고 우리를 소리없이 찾으셨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속에 주인공은 상한 갈대면 꺾어버리면 그가 가진 갈대 단은 훌륭한 단인데 꺼져가는 등불 꺼뜨려버리고 새로 기름부은 새 등불을 들고 나가면 얼마든지 밤길을 갈 터인데, 그는 상한 갈대라 하여 꺾을 용기가 없고 용기가 없다기보다 진실한 사랑 때문에 꺾지를 못하고 꺼져가는 등불로써 자기가 헤매면 헤맬지라도 이 등불마저 아직도 명이 붙어있는데 꺼버려서야 되겠는가. 버려서야 되겠는가. 차라리 내가 다시 불을 지펴보리라 생각하면서 꺼져가는 등불의 사람을 찾을 적에 상한 갈대를 찾을 적에 소리내어 동네방네 다니면서 외치지 않았다는 겁니다.
"상한 갈대 아무개야 나오라. 꺼져가는 등불 아무개야 나타나라. 내가 여기 있다. 너를 구원하려 왔노라. 내가 너를 용서하겠다. " 그런 말씀을 거리에 다니면서 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외치지도 아니하고 거리에 혹 죄인의 이름이 들릴까바 외치지도 아니했다는 그분이 바로 오늘 본문 속에 나타나는 분인데,
그렇게 하자니 죄인이 가 있는 우범지역 스스로 찾아다니시면서 죄인 찾는 게시판에다가 누구의 얼굴과 누구의 이름을 오히려 내어야 그 죄인이 욕되지 않게 허물스럽지 않게 돌아설 수 있겠습니까 마치 크리스티나를 부끄럽게 아니하려고 대신 어머니가 부끄러움을 당했듯이 죄로 말미암아 이 딸 크리스티나처럼 되었던 우리들, 그렇지 않았던 사람이 여기 어디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다고 말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죄로 말미암아 참으로 부끄럽게 된 우리를 꺼져가던 우리 등불 그리고 반드시 꺾어버리고 추려내어야만 될 상한 갈대였던 우리를 위해 구원을 하시되 우리의 이름이 팔릴까바 우리의 잘못된 그 얼굴이 사람들에게 알려질까바 곳곳에 우리를 내세운 것이 아니라 그의 십자가를 사방에 걸었습니다.
십자가 십자가 하면, 우리가 십자가에 달려야 합니까, 죄없는 주께서 달려야 합니까 당연히 우리가 달려야 함에도 십자가 하면 우리도 그렇게 말하고 세상 사람도 말하기를 십자가에 여호와 하나님 아들 예수가 달렸다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는 세워지면 세워질수록 걸리면 걸릴수록 예수님의 체면이 참 추하게 됩니다.
이 세상 많은 사람들이 큰 죄를 가졌어도 예수님의 십자가가 없는 곳이 없고 그 십자가 위에 주인공은 예수님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에 우리의 죄는 덮어져 버린 겁니다. 그러한 주님에게 우리는 조용히 찾아가면 되었습니다.
처음 신랑을 맞으려 나가는 열 처녀는 신랑이 더디 온다고는 상상도 못했을 겁니다. 왜냐하면 오게 되어 있는 날 온다는 그 시간에 등불을 밝히고 나갔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을 읽어보면 슬기로운 다섯 처녀는 기름 등불에 가득 채우고도 또 다른 병에 기름을 더 준비해 갔었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신랑이 금방 올 터인데 등불에 기름이 가득 찼으면 그만이지 또 다른 병에 기름을 더 담아갈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정작 기름이 소비되는 곳은 신랑을 기다리는 길목이 아니라, 신랑이 입장한 후에 날이 샐 때까지 그 잔치의 집을 밝혀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등불에 기름을 가득 채우는 이유도 그리고 슬기로워서 다른 기름병에 기름을 더 준비한 이 처녀들도 기다리기 위해서 더 준비했던 것이 아니라, 당연히 신랑과 함께 들어가서 밤새도록 등불을 밝혀주어야 하는 일을 이 처녀들이 해야 되었기 때문에 등불을 준비했던 것입니다. 기름을 따로 또 준비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상 밖으로 신랑이 더디 오기 때문에 문제가 생긴 겁니다. 등불에 담았던 기름이 다 소비되고 그리고 슬기로운 처녀들이 따로 준비했던 기름마저도 다시 부었는데 거의 다 소비될 쯤에 신랑이 그때서야 왔던 것입니다.
그러니 미련한 다섯 처녀는 기름이 다 떨어졌고 슬기롭다고 해서 기름을 더 가져갔던 그 처녀들도 이제는 마저 부었지만 신랑이 올 때까지도 버틸 만큼 기름이 안 될 만큼 나누어 쓸 수 없을 만큼 꺼져가는 등불을 가졌던 처녀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주인공이 되었던 이 신랑은 기름이 모자라는 그 처녀들을 안으로 들어가자 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삼십 분 후에도 한 시간 후에도 다섯 시간 후에도 기름이 떨어진 이유로 해서 처녀들이 쫓겨나는 것을 성경에서 볼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 사건의 비유를 보면서 슬기로운 다섯 처녀 신랑 예수님과 함께 입장했던 처녀들은 기름을 많이 가졌던 것처럼 우리는 생각하고 있고, 오히려 들어가지 못했던 미련한 다섯 처녀는 기름이 없었기 때문에 들어가지 못한 것쯤으로 우리는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성경은 오해하게끔 만들었습니다. 왜입니까 기름이 다 떨어져가는 처녀들이 들어갔지만 쫓겨나오지 않았습니다. 밤새도록 불을 켜준 것으로 되어버렸습니다. 그 처녀들에게 기름이 있었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신랑되신 우리 주님께서는 꺼져가는 등불의 주인공에게 그의 기름을 채워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꺼져가는 등불을 가진 처녀라고 알리려고 하지 않는 것이 신랑의 사랑이었습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고 기름 얼마 없는 처녀들을 불러들이어서 밤새도록 다음 해가 밝을 때까지 기름이 없었던 여자로 나타나지 않게끔 커버를 해 주신 신랑, 그가 참으로 우리의 구주십니다. 완벽하게 우리를 덮어주시는 것입니다.
정작 멸시를 받아서 싫어 버린바 된 자가 누굽니까 간고를 겪어야 할 자가 누굽니까 죄로 말미암아 상한 갈대된 우리요, 꺼져가는 등불이었던 우리가 아닙니까 그런데 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을 고난받게 했습니까 허물스러운 상한 갈대로 만들었습니까 꺼져가는 등불처럼 만들어 결국은 등불이 꺼지도록 만들었습니까 왜 그가 그같은 간고를 겪었으며 그같은 질고를 당했어야만 했습니까
여러분 아시지 않습니까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 무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그의 죄가 있어서 징벌을 받아 여호와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고 이사야 53장 3절에 당시에나 지금에나 마찬가지로 생각들 하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 예수님께서는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마치 범죄한 딸 크리스티나의 허물을 덮기 위해서 허물없는 그 어머니가 자기 얼굴을 확대하고 복사를 해서 온갖 우범지역에 붙였습니다. 딸이 당할 모든 죄인 취급을 그 어머니가 죄인 취급받도록 자기 자신이 죄인 취급받으므로써 죄인 된 자기 딸을 덮어버렸던 그 허물을 면케 해 주었던 마리아처럼, 우리들이 죄짓는 현장마다 어디를 가든지 주님의 십자가를 보게 됩니다.
십자가 없는 곳이 없습니다. 세계 어디를 가든지 어느 골목 가든지 교회 종탑으로만 십자가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방에 십자가가 있습니다. 누가 말하여 십자가 볼 수 있는 사람을 죄인이라 하겠습니까 누가 말하여 십자가에 달린 자를 죄 없다 하겠습니까
여러분, 여러분은 십자가를 주로 보는 입장에 계십니까, 아니면 달려서 십자가를 볼 수 없는 입장에 계십니까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셨기에 위로 하늘에 계신 여호와 하나님께 자기 영혼을 부탁할 뿐, 십자가가 과연 이렇게 저렇게 생겼구나 오히려 보이지 않습니다. 그때에 모든 방백들과 모든 관원들은 십자가에 달린 저 사람은 죄인이고,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사람을 구경하는 사람들은 죄없는 것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봅니다. 사방에서 봅니다. 사기꾼 되어 사기꾼과 함께 사기를 치고 있어도 며칠 안에 십자가를 볼 수 있습니다. 현상금 붙은 그래서 수배하는 강도의 옆에도 십자가는 있습니다. 심지어 술집에도 정상 영업시간을 어기고 불법으로 영업하는 심야에 영업하는 술집 계단 지하로 내려가서 문을 다 걸어 잠그고 그리고 은밀하게 술을 마십니다.
그곳에서 술 마시다가 나온 사람이 이런 말을 합디다. 사방 사방 돌아다녀도 그 계단 밑으로 내려가서 지하에서 앞 뒤문 다 걸어 잠그고 술집 술방에서 술 마실 때에는 십자가 안 뵐 줄 알았는데 거기도 십자가가 있더라는 겁니다. "에이 어느 술집 주인이 술집에다 십자가를 걸어놓았겠어요" "아이고 목사님 말도 마십시오. 벽에 걸어둔 것이 아니라 술 따라주는 여자 목에 걸려 있습디다. " 그럽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 하면 예수님 생각합니다. 십자가 하면 십자가 져야할 죄인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에는 우리가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주께서 오히려 우리의 위치에서 구경을 해야 하는 게 맞지 않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십자가에 달리셔서 십자가를 보지 못하고 정작 십자가에 달렸어야 할 우리는 십자가를 봅니다.
칼을 찬 병정도 재판관도 십자가를 쳐다보고 있는 사람을 죄인이라 여기지 않습니다. 죄가 있건 없건 십자가에 달려있는 사람을 죄인이라 여깁니다. 이 세상 마귀도 십자가를 바라보는 사람을 죄인이라 여겨 공격하지 않습니다. 십자가에 달린 자가 마땅히 죄로 말미암아 징벌을 받는구나 하고 외칠 뿐입니다. 그러나 그 위치가 바뀌어 있는 것을 생각하지 못합니까
이처럼 우리의 죄를 미리 덮어주신 예수님.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온갖 우범지역에 자기 얼굴을 십자가에 달린 채로 나타내 보이시는 예수님.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그런 당신의 아들을 향하여 오늘 본문에 말씀하시기를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나의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신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공의를 베풀리라. 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로 거리에 들리게 아니하며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리로 공의를 베푸나니 그는 나의 붙드는 종이요 내 마음에 기뻐하는 나의 택한 사람이라. 내가 그에게 나의 신을 주었더니 그는 이방에게 나아가서 죄지은 자기 백성을 찾되 그 이름이 거리에 들리지 않게 하며 외치지 아니하며 꺾여야 될 상한 갈대를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자신이 꺾여버리고 자신이 꺼지면서 정작 죽어야 될 자기 백성들을 죄 없었던 것처럼, 죄 없는 것처럼, 앞으로도 그리 할 것처럼 드러내기를 기뻐하는 사람이라. " 그러한 분이 오늘 성경 속에 소개되었습니다.
한 때 저에게 몇 분들이 말씀하기를 "세례식을 하고서 세례받는 사람들과 목사님이 같이 촬영을 하면 좋겠습니다. " "그것도 좋겠습니다. " 하고 저도 촬영을 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다가 며칠 후 저는 함께 촬영하지 않겠다 했습니다.
세례를 받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세례를 받았다는 것 귀한 일입니다. 그러나 바꾸어 말하면 세례받기 이전에는 마귀의 자식이요 사망의 자식이요 이제 세례받은 것은 비로소 거듭난 자라는 것을 증거하여 세례주는 것이니, 아무 날 아무 시에 세례받은 기념사진이라 하여 사진을 찍고 나면 세례 준 사람은 거룩해 보이지만 거기에 얼굴 같이 내밀고 있었던 사람들은 그 날짜 이전에는 마귀의 자식들처럼 소문이 나지 않겠습니까
큰 질병 중에 큰 슬픔 가운데 있다가 주로 말미암아 성령님의 역사로 나음을 입었거나 문제 해결을 받았던 사람 간증시키는 일을 저는 조심스럽게 하려고 합니다. 귀신들린 사람, 큰 죄 중에 있는 사람을 만 사람 앞에 불러내어 가지고서 귀신을 쫓으니 귀신이 소리지르며 그 사람에게서 떠나갑니다. 나둥그러집니다.
능력이 있으니 그렇게도 할 수 있어서 저도 한 때 그렇게도 해 보았지만, 미친듯이 거품을 흘리고 쓰러지고 온갖 희한한 소리를 하면서 그 사람 속에 들었던 귀신이 떠나가는 것을 보곤 할 때 떠나간 그 이후에 낫게된 것도 좋지만 그 이전에 그런 귀신과 함께 살았던 것을 드러내어버리는 효과도 동시에 있었던 것을 봅니다. 이것은 좋은 효과가 아니라 역효과였던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병을 낫게 해 주시고 죽을 자를 살려주시되 그가 꺼져가는 등불이었다는 것을 알리지 않기 위하여 거리에 소리를 들리지 않게 하신 주님. 상한 갈대였던 것을 고쳐주어 버리고 전에 상한 갈대였다는 것을 나타내지 않기 위하여 스스로 상한 갈대되어 그 허물 많은 사람 위에 덮어버리고 죽어 가는 사람 위에 덮여져서 욕을 보지 않아야 될 사람이 사방에 걸렸습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봅니다. 죄의 현장에 와 있는 십자가를 보면서 성령으로 마음에 감동을 받으면 달리신 주님을 생각해 봅니다. 그러면서 조용히 빠져 딸 크리스티나가 그 어머니 마리아의 시골집으로 갔던 것처럼 아무 소리 소문 내지 아니하고 주께로 찾아와 조용하게 회개합니다.
우리 대신 온갖 창피를 당하고 계시는 주님께서는 우리가 허물스러운 이름으로 알려지지 않기를 바라겠지요. 우리 얼굴을 펴라고 하겠지요. "내가 네 허물을 덮었는데, 내가 네 얼굴을 가리웠는데 왜 어깨가 처져 있는가 왜 죄지은 사람 인상을 하고 있는가 너는 의롭다 칭함을 받았느니라. 그러므로 당당하고 담대하라. 큰 소리 쳐라. 여호와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에도 떨지 말고 담대함으로 나아오라. "
주께서는 그리 말씀하십니다마는 그래서 우리 그렇게 살아오기는 합니다마는 그러나 우리의 당당한 어깨와 담대함은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대신하여 주신 오늘의 주인공 주 예수로 말미암아 된 것쯤은 알아야 될 줄로 믿습니다.
일만달란트 탕감의 은혜를 베푸신 임금이 탕감받은 자에게 원하여 "다만 나아가서 네 이웃의 짐을 덜어주기를 원하노라. 내가 네 일만달란트의 빚을 탕감하였거늘 너는 나가서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이웃이 또한 힘들지 않도록 짐을 덜어주어라. "라는 부탁을 다만 하셨습니다.
바로 그 여호와 하나님이 보내신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내가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 졌고 그리고 교회를 세웠나니 너희는 이제 죄인이 아니로다. 그러나 나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남은 고난을 너희에게 잠깐 맡겨두었으니 내 십자가를 지고 오히려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면서 날 따라오지 않겠느냐. " 주님 말씀하셨건만 우리는 십자가 밑에서 이웃을 정죄합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집안에 걸어두고도 집안에서 자랑합니다. 십자가가 걸려있는 성전 안에서도 남보다 나타나기를 좋아합니다. 남보다 자랑스러워지기를 좋아합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주께서 "그래 너는 자랑스러워 해. 아무렇지도 않았던 것처럼 해. 똑똑해. 남보다 훌륭해. 그래 너 잘났어. " 십자가 위에서 주님은 그리 하도록 허락하시겠지만, 그러나 우리가 이제 신앙의 아이가 아니라 좀 자랐으니 우리가 자랑하며 교만할 수 있는 것도 주님 때문에 되었던 것이니 이 사순절 기간 중에라도 그리 하신 주님, 온갖 우범지역에 얼굴을 팔아버리고 그 이름을 파신 주님을 생각하여 이웃에게 용서를 베풀어보시기 바랍니다. 교만을 버려보시기 바랍니다. 자랑을 뒤로 해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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