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절] 거룩한 연합
본문
지금은 사순절(旬節) 기간입니다. 사순절이란 부활절 전 40일부터 부활절 이브까지로 금년에는 3월 24일부터 4월 3일까지의 기간을 말합니다. 이 기간 동안 우리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명상하면서 회개와 금식, 혹은 기도와 구제 등으로 경건하게 보내는 것입니다. 이번 이 사순절 기간을 맞으면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체험을 해야겠다는 의미에서 오늘 이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우리가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사탄 마귀가 지배하는 세상을 떠나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을 말합니다. 롬 11:17에 보면 우리는 원래 돌감람나무 가지로 아무 쓸모 없는 자였으나 참감람나무이 예수님에게 접붙임으로 참감람열매를 맺는 좋은 가지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우리나라 열매로 표현한다면 시골에 가면 마구간이나 뒷간 옆에 흔히 자라는 돌배나무가 있습니다. 그 열매는 대단히 작으면서도 어찌나 단단한지 돌처럼 딱딱합니다. 그러나 어느 배는 나주에 배처럼 어찌나 크고 단맛이 나는지 먹으면 시원하고 답니다. 그러한 배를 참배라고 합니다. 그런데 참배가지를 짤라서 돌배나무에 접을 붙이면 이상하지요, 참배가 열립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접붙임은 조금 다르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나쁜 열매만 맺던 우리라는 가지를 좋은 나무이신 예수님에게 접붙임하면, 어느날부터 예수님의 열매를 맺는 자가 된다는 점입니다. 사실, 우리 인간들은 예수님을 영접하기 전에는 돌배나무 가지와 같았습니다. 아무리 선한 사람이 되어야지 결심해도 결과는 죄만 짓는 자였습니다. 남을 사랑해야지 하면서 왜인지 미움과 시기의 열매로 나타나고, 남을 용서하고 도와주어야지 하지만 인색한 자신, 용서하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그러므로 선하게 살고 싶어하는 자신의 생각과는 달리 우리가 나타내는 것은 갈5:19절의 열매들로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취함과 방탕“의 열매를 맺고 있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그러므로 롬7:15에 ”나의 행하는 것은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 “고 하는 탄식을 자아내게 되며, 더 나가서는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고 절망의 외침을 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자신을 예수님이라는 줄기에 접붙이니 놀랍지요, 예수님이라는 나무의 뿌리 진액이 우리 속에 흘러 넘치게 되며, 어느날 보니 예수님의 열매인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의 열매를 맺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접붙임이 바로 거룩한 연합인 것입니다. 엡 5:22-33에서는 거룩한 연합을 결혼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여기 어떤 처녀가 있었습니다. 그 집안은 환경이 대단히 안 좋은 가정이었습니다. 언제나 아버지는 술을 마시고 어머니를 때리고 도박하고 여인관계가 복잡합니다. 어머니는 언제나 미신을 많이 섬기면서 쩍하면 굿을 하는, 어두운 기운이 꽉 들어찬 가정이었습니다. 처녀는 그런 미신적인 삶이 싫었으나 어쩔 수 없이 우상숭배를 했습니다. 그러다가 이 처녀는 친구를 따라 교회를 출석하게 되었습니다. 집안의 핍박이 대단했으나 끝까지 이기고 교회를 다닙니다.
그러다가 좋은 총각을 만나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그 집안은 예수님을 잘 믿는 가정으로 언제나 가정예배를 드리고 주일이면 교회 왼종일 나가 충성봉사하는 가정이었습니다. 친정 가정은 언제나 우울과 반목과 어두운 영이 가득하던 가정이었으나 시댁 가정은 기쁨과 평안이 넘치는 가정이었습니다. 이 처녀는 결혼함으로 마귀의 지배를 받던 삶에서 성령의 지배를 받는 삶으로, 지옥적인 삶에서 천국적인 삶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반대로 어느 신앙이 좋은 가정에서 자란 처녀가 믿지 않는 가정으로 시집을 감으로 영적으로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받으면 사는 것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처녀들은 결혼을 잘 해야 합니다. 성경에서는 남자는 머리와 같고 여인은 몸과 같다고 했습니다. 아무리 몸이 팔등미인일지라도 머리가 나쁘면 비참한 삶을 삽니다. 제가 결혼식에 자주 쓰는 내용으로남자는 연주자와 같고 여인은 악기과 같습니다. 아무리 수백 수천 만원 짜리 악기라도 연주자가 형편 없으면 씨그러운 소리가 납니다.
아무리 미인이요, 훌륭한 대학을 나온 여인일지라도 주정뱅이를 만나면 주정뱅이 부인이 되고 사기꾼을 만나면 사기꾼의 아내로 살면서 허무한 세월을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볼품이 없고 배운 것이 많지 않은 여인이라도 좋은 남자를 만나면 나중에는 귀부인처럼 대우 받으며 삽니다. 아무리 악기가 보잘 것 없는 것이라도 명연주자가 연주하면 좋은 음률이 울려 퍼지면서 사람들에게 감동을 줍니다.
우리 신자들은 여인이나 신부와 같습니다. 그런데 마귀 신랑을 만나면 아무리 바르게 살려고 할지라도 마귀가 시키는 대로 범죄의 삶을 살면서 나쁜 열매를 맺는 자가 되고 맙니다. 그러나 예수 신랑을 만나면 우리는 성격이나 외양이나 환경은 형편없을지라도 귀한 성도가 됨으로 좋은 열매를 맺는 삶을 살게되는 것입니다.
백민영이라는 분의 간증입니다. 그 분이 어느 처녀와 결혼을 했는데 두 사람이 다 못된 성격을 가진 자였었다고 합니다. 남편은 날마다 술에 취해서 밤 11시나 12시에 들어와서는 ‘물 떠오너라. ’ ‘발을 씻겨라. ’ ‘옷을 벗겨라. ’ ‘밥을 채려라. ’고 하면서 주정하기를 다반사로 했고, 아내도 아주 성질이 고약해서 남에게 싸움을 해서 지는 법이 없다고 합니다. 그러니 남편에게 지겠습니까 한 마디 하면 열마디 하고, 한 대 때리면 같이 때리는 거친 성격이었으므로 그 가정은 밤낮 싸우고 깨어지면서 편한 날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부인이 먼저 교회를 나가 예수님을 영접하였는데 얼마나 변화되고 생활이 바뀌었는지 남편이 한 밤중에 와서 주정을 하든, 때리든 그 시중을 다 들어주었고 반항을 하지 않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러자, 아내의 거친 성격을 잘 아는 남편은 감동을 받아 교만과 자만을 버리고 교회를 열심히 출석하기 시작하더니 그도 완전히 변화되어서 나중에는 인천 제7교회 백민영 장로님이 되고 부인은 하 권사님이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려면 이 정도는 변화되어야 합니다. 그러한 변화를 받으려면 옛사람의 생활을 과감히 끊고 예수님에게 철저하게 접붙임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신부가 되어 철저하게 순종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거룩한 연합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제자들을 위해서 기도하신 내용입니다.
22-23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곧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고 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들에게 간절히 원하시는 것은 예수 신랑과 거룩한 연합을 하는 신부가 되기를 원하시며 예수님의 열매를 맺는 좋은 가지가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자, 이와같이 여호와 하나님이 원하시는 성도들이 되려면 어찌해야 합니까 주님과 거룩한 연합을 이루는 길은 네 가지 단계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첫째 단계는 거룩한 연합을 이루려면 예수 신랑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 남녀가 연애를 하든지, 중매를 통해서 남녀가 결혼할 때 그 결혼의 외적조건부터 따지는 사람은 그 결혼이 불행으로 끝나게 됩니다. 그 사람의 됨됨이를 먼저 바라보아야 합니다. 최근에 많은 남녀들이 결혼이 불행해지거나 파탄이 오는 이유가 사람의 됨됨이를 보기보다 먼저 결혼조건들을 보기 때문입니다. 요즈음같이 어려운 시기에는 조금 나아졌지만 한 때 우리나라의 큰 문제 중의 하나가 호화혼수였습니다.
언제인가 신문에 보니까, 어느 화약회사의 상무의 아들과 어느 그룹 회장의 딸이 결혼하는데 신랑측은 예물로 몇캐럿 짜리 다이어반지, 몇 십 평 짜리 아파트요, 신부측에서는 롤렉스 시계, 외제 가전제품 일체 등 무려 트럭 4대분의 혼수품을 해왔다고 하며, 어느 병원원장의 원장은 자기 딸을 어느 의사에게 시집을 보내면서 고급아파트와 몇 천만원이 넘는 중국식 자개장 등 혼수품을 보내었다고 하며, 더 나가서는 제주도의 감귤농장이나 대도시의 빌딩까지고 혼수품으로 등장한다고 합니다.
그러한 혼수품을 주고 받으면서 결혼하면 행복이 넘칩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그런 결혼이 불행해지기 쉽고 파탄이 오기가 쉬운 것입니다. 사실, 역사적으로 가장 잘 사는 미국입니다. 그러면 미국 사회는 가정 천국입니까 아닙니다. 미국사회는 물질의 부가 높아갈수록 가정은 점점 파탄을 만났던 것입니다. 1900년도에는 12명의 한 부부가 이혼했는데, 1922년에는 8명의 하나가 이혼했고, 1980년대에는 세 부부의 하나꼴로 이혼하고 지금은 모든 부부의 반 이상이 이혼하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아닙니다. 진정한 결혼은 외적 조건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 기독교인들은 외적 조건을 보기 보다 먼저 그 사람의 신앙이나 인격 등, 됨됨이를 보아야 합니다. 영적인 신부인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과 거룩한 연합을 이루기 위해서는 예수 신랑을 바라보고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처음에는 예수님에게서 육신적인 조건으로만 본 것이 문제였습니다.
예수님이 유대의 왕이 되는 날, 자기에게 주어질 자리에만 연연헸습니다, 그러다 보니 예수님의 바램과는 전혀 달리 서로 높은 자리만 차지하려고 혈안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십자가 사건이 터지자 너나 없이 도망치는 자가 됨으로 신앙의 실패자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신자들을 고전 2:14에서는 ‘육에 속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오늘도 많은 분들이 교회를 나와서 예배를 통해서 말씀을 듣고 여러 가지 직분을 가지고 충성하지만 육신적의 일에만 관심을 가지는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저 물질적인 복, 자녀의 복만 원하고 병 낳기만 원하는 등, 육신의 축복만 받기를 원합니다. 그래가지고 아무 변화도 나타나지 않을 뿐 아니라, 결국 신앙의 실패로 끝나기 쉽습니다. 아닙니다. 성도 여러분이여, 먼저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하면,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둘째 단계로 경건의 연합은 예수님을 신랑으로 영접할 때 일 어나는 것입니다.
한 남자와 여자가 선을 보아서 이든, 연애에서 이든 만나서 깊은 교제를 나누다 보면 점점 사랑이 깊어집니다. 나중에는 같이 있고 싶어지고 싶고 헤어지기 싫습니다. 그래서 어떤 남녀는 서로 바래다 준다고 왔다가 다시 가고 다시 오다 보니 자정이 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어느날부터는 아무 헛간이나 오두막이라도 좋으니 함께 살고 싶어 못 견딥니다. 그 때는 결혼해야 할 때입니다. 결혼하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서로가 배우자로 맞아들이어야 합니다. 그 때에 결혼관계, 부부관게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남녀는 초등학교 때부터 거의 15년 이상이나 흉허물 없이 친구처럼 지내면서 어떠한 비밀도 서로 의논할 정도로 친했습니다. 그러나 서로가 좋아하면서도 결국 결혼하지 못하고 다른 여인, 다른 남자와 결혼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서로가 사랑한다고 고백하지 못하고 결혼하자고 말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결국 결혼관계는 서로가 신랑으로, 신부로 맞아들일 때만 성사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동안 간직해 왔던 나의 몸과 마음을 신랑, 신부에게 다 맡기므로 한 육체, 한 마음, 더 나가서는 한 영혼이 되는 것입니다.
육신적으로만 예수님을 보고 따르던 제자들은 오순절 때에 성령의 세례를 받기 전에는 예수님은 언제나 밖에 계신 분이셨습니다. 어느 때는 멀리 떠나 계시고, 어느 때는 풍랑이는 바다 위에 제자들을 그냥 팽개치듯 놓아두실 때도 있으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지시고 돌아가신 후에는 영원히 그들을 떠나신 주님처럼 보였습니다. 3년을 열심히 쫓아다닌 결과, 남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제자들은 너무나 허무했습니다. 이제는 고향에도 고개를 들고 돌아갈 수조차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신 후에 약속대로 오순절날 성령의 세례를 받고야 그들의 영혼과 마음, 그리고 육신 속에 예수님의 영이 임재하시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부터 예수님은 언제, 어디서나 그들과 함께 계셨습니다. 주님이 그들 속에, 그들이 주님 속에 거하는 거룩한 연합체, 한 몸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감옥에 던져지든지, 핍박을 받고 광야에서 헤메이는 자가 되든지 주님과 함께 계신 것만으로 최고로 행복했습니다.
주님과 더불어 생명의 성령의 법이 그들을 사로 잡음으로 그들을 그처럼 괴롭히던 죄와 사망의 법이 떠나감으로 세상의 것으로는 비교할 수 없는 기쁨과 평안을 소유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아직도 이러한 기쁨과 평안을 체험하지 못한 분이 이 자리에 계십니까 그것은 아직도 에수님 밖에 계신 탓입니다. 이제는 예수님의 품으로 들어와 예수님을 나의 신랑, 나의 주님으로 영접하십시오. 그 때 영적 생명이 싹틉니다. 그러면 어느날부터 영적인 기쁨의 꽃, 영적인 열매를 맺게되는 줄로 믿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셋째 단계로 거룩한 연합은 신랑 예수님을 닮아갈 때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는 경건의 연습 단계입니다. 처음 남녀가 결혼한 다음에는 세상 말로 앉으나 서나 깨가 쏟아지는 것 같습니다. 단칸방이든, 반찬이 한가지이든, 그저 부부가 함께 사는 것만으로 최고의 행복과 기쁨이 있는 것같습니다. 그러한 감정이 일생 간다면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4-5년의 세월이 되어 가면서 신혼의 기쁨과 행복감은 점점 사라지고 왜인지 권태가 이끼처럼 끼게되고 서로의 결함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모든 것이 분홍빛처럼 아름답게만 보이던 것들이 안개처럼 걷히고 나니 살림살이, 요리, 성격, 습관의 차이 때문에 서로가 부딪히기 시작하는 느끼게 됩니다. 결혼 초기에는 부부싸움을 해도 곧 화해하지만 이 때는 부부싸움하면 상처도 오래가고 화해도 잘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이 때가 젊은 부부들로서는 참으로 위기입니다. 그 때에 깨지는 부부가 많으므로 그 고비를 잘 넘겨야 합니다. 부부 싸움의 댜부분은 자기 이기심 때문에 일어납니다.
R. L 스투라우스 박사가 저술한 사랑의 신비라는 책에는 이런 글이 나옵니다. 대부분의 부부의 갈등은 자아가 들어 있다. 무조건 상대방의 찬성을 기대하다가 그렇게 안해 줄 때 서로 빈정대로 성난 말로 퍼붓는다. 고 했습니다. 이지연이라는 분이 쓴 행복지수를 높인느 66가지 지혜라는 책에서는 부부 싸움할 때 제일 조심할 말은 ‘능력 없는 남자’ ‘이혼하자. ’ ‘집에서 놀면서 그것도 못해. ’ ‘아무래도 우린 잘못 결혼한 것같애. ’ ‘돈돈돈… 그놈의 돈 때문에’ ‘당신 집안은 왜 그 모양이야. ’ ‘집에만 있는 당신이 뭘 안다고 그래. ’라는 말이라고 했습니다.
대부분의 부부가 싸움할 때 사소한 문제로 다투는데 싸움이 커지는 이유는 거친 말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엡4:26 말씀대로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라는 말씀과 잠 15:1 말씀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 ”고 한 말씀들을 우리 부부들은 언제나 명심해야 됩니다. 그렇다면 부부 싸움은 백해 무익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런 속에서 성장하는 부부들은 서로의 이기심이 점점 깨어져 갑니다. 그리고 서로가 닮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신랑은 신부의 좋은 점을 닮아가고 신부는 신랑의 좋은 점을 닮아가는 유익이 있습니다. 더 나가서는 습관이나 입맛, 취미도 닮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처음에 결혼하고서는 아내가 해주는 요리가 입에 맞지 않고 어머니 요리가 입맛에 맞았습니다. 그러나 결혼하고 3년이 지난 후에 보니 오히려 어머니의 요리가 입에 맛지 않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부부는 서로 티거덕 태거덕 다투기도 하면서 자아는 깨어지고 세월만큼 점점 닮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신랑을 모시고 사는 삶도 비슷합니다. 처음에 예수님을 모시고 살 때는 얼마나 기쁨과 평안이 넘치는지요. 찬송가 493장의 가사대로 나 이제 주님의 새생명 얻은 몸 옛것은 지나고 새사람이로다 그 생명 내 맘에 강같이 흐르고 그 사랑 내게서 해같이 빛난다 주안에 감추인 새생명 얻으니 이전의 좋던 것 이제는 값없다 하늘의 은혜와 평화를 맛보니 찬송과 기도로 주함께 살리라는 내용대로입니다. 주님을 모시고 사니까 그저 그 어디나 천국같습니다.
그러나 어느날부터 그런 기쁨이 없어지고 있음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내게 지워진 십자가 너무 무거워 짜증이 납니다. 요나처럼 도망치고 싶습니다. 탕자처럼 여호와 하나님의 율례의 울타리를 벗어나 자유롭게 살고 싶습니다. 또한 무슨 어려운 일이 생길 때마다 주님에게 ‘나는 주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고 충성봉사하는 데 왜 내게 이런 고통을 주십니까’라고 따지며 기도하기를 자주합니다. 어찌된 노릇입니까 그 하늘의 기쁨과 평안은 어디로 갔습니까 그렇다면 믿음이 떠난 것일까요
아닙니다. 어느 때는 믿음이 충만하여 주님과 깊은 관계에 있다가, 어느 때는 주님과 거리가 멀어지는 과정이 반복되면 자아가 깨어지면서 예수님을 닮아가는 연단과정일 뿐입니다. 그것을 신앙적으로 말하면 성화(聖化) 혹은 성결의 과정이라고 부릅니다. 열매는 하루 아침에 안 커집니다. 참배 나무 가지를 돌배나무에 접목했다고 해도 단번에 열매를 맺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이여, 우리는 자아가 더 깨어져야 합니다. 때로 또 신앙적으로 넘어질 때라도 다시 일어나 탕자처럼 주님 앞에 나아가십시오. 혹 죄를 범하는 때라도 다시 주님 앞에 나아가 용서를 구하십시오. 그런 속에서 주님과 우리의 관계는 깊어가는 것이요, 주님의 용서의 횟수가 많아가고 용서의 크기가 커지는 만큼 우리는 더 주님을 닮아가게 될 줄 믿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넷째 단계로 마침내 온전한 연합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부부가 결혼한지 10년이 될 때는 곧잘 말다툼이 많아지고 성격차가 두드러지더니 15년 -20년이 넘어서면 상대방 표정만 보아도 좋고 나쁜 것을 알고 서로 참게되고 부딪히는 일을 피하게 됩니다. 사실, 제가 늘 농담 삼아 ‘부부 싸움도 힘 있을 때 하는 것이지, 힘 없으면 부부 싸움도 하기 싫어진다. ’라는 말을 곧잘 합니다. 사실입니다. 힘이 있을 때는 부부 싸움하고 2-3일 말을 안해도 견딜 수 있지만, 이제는 귀찮기 그지 없습니다. 그래서 싸울 일이 생기면 서로 조금 언성을 높이다가 슬그머니 서로 피하게 됩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젊어서처럼 서로 별로 말을 많이 하지 않을지라도 부부 사이에 서로가 안되었다는 감정이 생기면서 서로 편하게 해주려 합니다. 그리고 상대방이 무엇을 요구하는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환히 알므로 좋아하는 것을 해주려는 마음이 이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는 점입니다. 40년, 50년 살아온 부부들을 보면 육체는 다 쇠해서 볼 품이 없으나 서로가 오누이처럼 닮아 있는 모습이 나름대로 어떤 세상을 초연한 아름다움이 진하게 전해오는 것을 느낍니다. 옳습니다. 그것이 바로 온전한 연합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신랑으로 모실 때는 그저 사랑을 받기만 하고 그저 용서만 받기만 했습니다. 그것도 부족헤서 항상 순종하지 못하고 반항하면서 무척 가슴을 아프게 해드리었으나 주님은 끝까지 우리를 감싸주시고 덮어주시는 동안 성숙함으로 온전한 연합이 이루어졌습니다. 이제는 내 중심보다 그저 주님 중심이 되어 있습니다. 그저 주님의 이름을 조용히 부르기만 해도 가슴이 저미어 옵니다. 그저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해드리고 싶고 주님이 인도하신다면 어디라도 따라가고 싶은 경지에 이르게 됩니다.
한나 W. 스미스 여사가 쓴 행복한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비결이라는 책은 미국에서만도 한 때 300만부가 팔린 책인데 그 글 중에서 세 가지 거룩한 연합단계를 영어로 재미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1) I and not Christ 번역하면 나요 그리스도 아니요. (2) I and Christ 번역하면 나요 그리스도요. (3)Christ and I 그리스도요 나요. 입니다. 이제는 그리스도가 먼저시오, 그 다음이 나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바로 이러한 거룩한 연합입니다. 예수님이 여호와 하나님과 하나가 되신 것처럼 주님도 우리와 하나가 되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아프리카의 개척자이며 선교사인 리빙스톤이 오랜만에 고국에 돌아와 글래스고우대학에소 명예박사를 받게될 때나 너무나 쇠약헤 있는 것을 모든 사람은 발견했습니다. 아프리카의 특유의 열병으로 스무번이나 쓰러졌기 때문이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이제 리빙스톤이 고향에서 조용히 여생을 보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강단에서 인사말을 하면서 ‘나는 다시 아프리카로 돌아갈 것이라. ’고 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염려하자 그는 말하기를 ‘여러분이여, 염려하지 마십시오. 나는 혼자가 아닙니다.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신 주님이 나의 길동무로 원시림과 광야를 함께 걸어가 주십니다. ’라고 했습니다. 과연 주님과 거룩한 연합을 이룬 모습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이여, 이번 사순절 기간동안 여러분은 주님과 거룩한 연합을 이루시는 체험을 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우리가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사탄 마귀가 지배하는 세상을 떠나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을 말합니다. 롬 11:17에 보면 우리는 원래 돌감람나무 가지로 아무 쓸모 없는 자였으나 참감람나무이 예수님에게 접붙임으로 참감람열매를 맺는 좋은 가지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우리나라 열매로 표현한다면 시골에 가면 마구간이나 뒷간 옆에 흔히 자라는 돌배나무가 있습니다. 그 열매는 대단히 작으면서도 어찌나 단단한지 돌처럼 딱딱합니다. 그러나 어느 배는 나주에 배처럼 어찌나 크고 단맛이 나는지 먹으면 시원하고 답니다. 그러한 배를 참배라고 합니다. 그런데 참배가지를 짤라서 돌배나무에 접을 붙이면 이상하지요, 참배가 열립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접붙임은 조금 다르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나쁜 열매만 맺던 우리라는 가지를 좋은 나무이신 예수님에게 접붙임하면, 어느날부터 예수님의 열매를 맺는 자가 된다는 점입니다. 사실, 우리 인간들은 예수님을 영접하기 전에는 돌배나무 가지와 같았습니다. 아무리 선한 사람이 되어야지 결심해도 결과는 죄만 짓는 자였습니다. 남을 사랑해야지 하면서 왜인지 미움과 시기의 열매로 나타나고, 남을 용서하고 도와주어야지 하지만 인색한 자신, 용서하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그러므로 선하게 살고 싶어하는 자신의 생각과는 달리 우리가 나타내는 것은 갈5:19절의 열매들로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취함과 방탕“의 열매를 맺고 있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그러므로 롬7:15에 ”나의 행하는 것은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 “고 하는 탄식을 자아내게 되며, 더 나가서는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고 절망의 외침을 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자신을 예수님이라는 줄기에 접붙이니 놀랍지요, 예수님이라는 나무의 뿌리 진액이 우리 속에 흘러 넘치게 되며, 어느날 보니 예수님의 열매인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의 열매를 맺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접붙임이 바로 거룩한 연합인 것입니다. 엡 5:22-33에서는 거룩한 연합을 결혼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여기 어떤 처녀가 있었습니다. 그 집안은 환경이 대단히 안 좋은 가정이었습니다. 언제나 아버지는 술을 마시고 어머니를 때리고 도박하고 여인관계가 복잡합니다. 어머니는 언제나 미신을 많이 섬기면서 쩍하면 굿을 하는, 어두운 기운이 꽉 들어찬 가정이었습니다. 처녀는 그런 미신적인 삶이 싫었으나 어쩔 수 없이 우상숭배를 했습니다. 그러다가 이 처녀는 친구를 따라 교회를 출석하게 되었습니다. 집안의 핍박이 대단했으나 끝까지 이기고 교회를 다닙니다.
그러다가 좋은 총각을 만나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그 집안은 예수님을 잘 믿는 가정으로 언제나 가정예배를 드리고 주일이면 교회 왼종일 나가 충성봉사하는 가정이었습니다. 친정 가정은 언제나 우울과 반목과 어두운 영이 가득하던 가정이었으나 시댁 가정은 기쁨과 평안이 넘치는 가정이었습니다. 이 처녀는 결혼함으로 마귀의 지배를 받던 삶에서 성령의 지배를 받는 삶으로, 지옥적인 삶에서 천국적인 삶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반대로 어느 신앙이 좋은 가정에서 자란 처녀가 믿지 않는 가정으로 시집을 감으로 영적으로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받으면 사는 것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처녀들은 결혼을 잘 해야 합니다. 성경에서는 남자는 머리와 같고 여인은 몸과 같다고 했습니다. 아무리 몸이 팔등미인일지라도 머리가 나쁘면 비참한 삶을 삽니다. 제가 결혼식에 자주 쓰는 내용으로남자는 연주자와 같고 여인은 악기과 같습니다. 아무리 수백 수천 만원 짜리 악기라도 연주자가 형편 없으면 씨그러운 소리가 납니다.
아무리 미인이요, 훌륭한 대학을 나온 여인일지라도 주정뱅이를 만나면 주정뱅이 부인이 되고 사기꾼을 만나면 사기꾼의 아내로 살면서 허무한 세월을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볼품이 없고 배운 것이 많지 않은 여인이라도 좋은 남자를 만나면 나중에는 귀부인처럼 대우 받으며 삽니다. 아무리 악기가 보잘 것 없는 것이라도 명연주자가 연주하면 좋은 음률이 울려 퍼지면서 사람들에게 감동을 줍니다.
우리 신자들은 여인이나 신부와 같습니다. 그런데 마귀 신랑을 만나면 아무리 바르게 살려고 할지라도 마귀가 시키는 대로 범죄의 삶을 살면서 나쁜 열매를 맺는 자가 되고 맙니다. 그러나 예수 신랑을 만나면 우리는 성격이나 외양이나 환경은 형편없을지라도 귀한 성도가 됨으로 좋은 열매를 맺는 삶을 살게되는 것입니다.
백민영이라는 분의 간증입니다. 그 분이 어느 처녀와 결혼을 했는데 두 사람이 다 못된 성격을 가진 자였었다고 합니다. 남편은 날마다 술에 취해서 밤 11시나 12시에 들어와서는 ‘물 떠오너라. ’ ‘발을 씻겨라. ’ ‘옷을 벗겨라. ’ ‘밥을 채려라. ’고 하면서 주정하기를 다반사로 했고, 아내도 아주 성질이 고약해서 남에게 싸움을 해서 지는 법이 없다고 합니다. 그러니 남편에게 지겠습니까 한 마디 하면 열마디 하고, 한 대 때리면 같이 때리는 거친 성격이었으므로 그 가정은 밤낮 싸우고 깨어지면서 편한 날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부인이 먼저 교회를 나가 예수님을 영접하였는데 얼마나 변화되고 생활이 바뀌었는지 남편이 한 밤중에 와서 주정을 하든, 때리든 그 시중을 다 들어주었고 반항을 하지 않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러자, 아내의 거친 성격을 잘 아는 남편은 감동을 받아 교만과 자만을 버리고 교회를 열심히 출석하기 시작하더니 그도 완전히 변화되어서 나중에는 인천 제7교회 백민영 장로님이 되고 부인은 하 권사님이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려면 이 정도는 변화되어야 합니다. 그러한 변화를 받으려면 옛사람의 생활을 과감히 끊고 예수님에게 철저하게 접붙임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신부가 되어 철저하게 순종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거룩한 연합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제자들을 위해서 기도하신 내용입니다.
22-23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곧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고 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들에게 간절히 원하시는 것은 예수 신랑과 거룩한 연합을 하는 신부가 되기를 원하시며 예수님의 열매를 맺는 좋은 가지가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자, 이와같이 여호와 하나님이 원하시는 성도들이 되려면 어찌해야 합니까 주님과 거룩한 연합을 이루는 길은 네 가지 단계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첫째 단계는 거룩한 연합을 이루려면 예수 신랑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 남녀가 연애를 하든지, 중매를 통해서 남녀가 결혼할 때 그 결혼의 외적조건부터 따지는 사람은 그 결혼이 불행으로 끝나게 됩니다. 그 사람의 됨됨이를 먼저 바라보아야 합니다. 최근에 많은 남녀들이 결혼이 불행해지거나 파탄이 오는 이유가 사람의 됨됨이를 보기보다 먼저 결혼조건들을 보기 때문입니다. 요즈음같이 어려운 시기에는 조금 나아졌지만 한 때 우리나라의 큰 문제 중의 하나가 호화혼수였습니다.
언제인가 신문에 보니까, 어느 화약회사의 상무의 아들과 어느 그룹 회장의 딸이 결혼하는데 신랑측은 예물로 몇캐럿 짜리 다이어반지, 몇 십 평 짜리 아파트요, 신부측에서는 롤렉스 시계, 외제 가전제품 일체 등 무려 트럭 4대분의 혼수품을 해왔다고 하며, 어느 병원원장의 원장은 자기 딸을 어느 의사에게 시집을 보내면서 고급아파트와 몇 천만원이 넘는 중국식 자개장 등 혼수품을 보내었다고 하며, 더 나가서는 제주도의 감귤농장이나 대도시의 빌딩까지고 혼수품으로 등장한다고 합니다.
그러한 혼수품을 주고 받으면서 결혼하면 행복이 넘칩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그런 결혼이 불행해지기 쉽고 파탄이 오기가 쉬운 것입니다. 사실, 역사적으로 가장 잘 사는 미국입니다. 그러면 미국 사회는 가정 천국입니까 아닙니다. 미국사회는 물질의 부가 높아갈수록 가정은 점점 파탄을 만났던 것입니다. 1900년도에는 12명의 한 부부가 이혼했는데, 1922년에는 8명의 하나가 이혼했고, 1980년대에는 세 부부의 하나꼴로 이혼하고 지금은 모든 부부의 반 이상이 이혼하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아닙니다. 진정한 결혼은 외적 조건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 기독교인들은 외적 조건을 보기 보다 먼저 그 사람의 신앙이나 인격 등, 됨됨이를 보아야 합니다. 영적인 신부인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과 거룩한 연합을 이루기 위해서는 예수 신랑을 바라보고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처음에는 예수님에게서 육신적인 조건으로만 본 것이 문제였습니다.
예수님이 유대의 왕이 되는 날, 자기에게 주어질 자리에만 연연헸습니다, 그러다 보니 예수님의 바램과는 전혀 달리 서로 높은 자리만 차지하려고 혈안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십자가 사건이 터지자 너나 없이 도망치는 자가 됨으로 신앙의 실패자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신자들을 고전 2:14에서는 ‘육에 속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오늘도 많은 분들이 교회를 나와서 예배를 통해서 말씀을 듣고 여러 가지 직분을 가지고 충성하지만 육신적의 일에만 관심을 가지는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저 물질적인 복, 자녀의 복만 원하고 병 낳기만 원하는 등, 육신의 축복만 받기를 원합니다. 그래가지고 아무 변화도 나타나지 않을 뿐 아니라, 결국 신앙의 실패로 끝나기 쉽습니다. 아닙니다. 성도 여러분이여, 먼저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하면,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둘째 단계로 경건의 연합은 예수님을 신랑으로 영접할 때 일 어나는 것입니다.
한 남자와 여자가 선을 보아서 이든, 연애에서 이든 만나서 깊은 교제를 나누다 보면 점점 사랑이 깊어집니다. 나중에는 같이 있고 싶어지고 싶고 헤어지기 싫습니다. 그래서 어떤 남녀는 서로 바래다 준다고 왔다가 다시 가고 다시 오다 보니 자정이 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어느날부터는 아무 헛간이나 오두막이라도 좋으니 함께 살고 싶어 못 견딥니다. 그 때는 결혼해야 할 때입니다. 결혼하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서로가 배우자로 맞아들이어야 합니다. 그 때에 결혼관계, 부부관게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남녀는 초등학교 때부터 거의 15년 이상이나 흉허물 없이 친구처럼 지내면서 어떠한 비밀도 서로 의논할 정도로 친했습니다. 그러나 서로가 좋아하면서도 결국 결혼하지 못하고 다른 여인, 다른 남자와 결혼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서로가 사랑한다고 고백하지 못하고 결혼하자고 말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결국 결혼관계는 서로가 신랑으로, 신부로 맞아들일 때만 성사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동안 간직해 왔던 나의 몸과 마음을 신랑, 신부에게 다 맡기므로 한 육체, 한 마음, 더 나가서는 한 영혼이 되는 것입니다.
육신적으로만 예수님을 보고 따르던 제자들은 오순절 때에 성령의 세례를 받기 전에는 예수님은 언제나 밖에 계신 분이셨습니다. 어느 때는 멀리 떠나 계시고, 어느 때는 풍랑이는 바다 위에 제자들을 그냥 팽개치듯 놓아두실 때도 있으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지시고 돌아가신 후에는 영원히 그들을 떠나신 주님처럼 보였습니다. 3년을 열심히 쫓아다닌 결과, 남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제자들은 너무나 허무했습니다. 이제는 고향에도 고개를 들고 돌아갈 수조차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신 후에 약속대로 오순절날 성령의 세례를 받고야 그들의 영혼과 마음, 그리고 육신 속에 예수님의 영이 임재하시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부터 예수님은 언제, 어디서나 그들과 함께 계셨습니다. 주님이 그들 속에, 그들이 주님 속에 거하는 거룩한 연합체, 한 몸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감옥에 던져지든지, 핍박을 받고 광야에서 헤메이는 자가 되든지 주님과 함께 계신 것만으로 최고로 행복했습니다.
주님과 더불어 생명의 성령의 법이 그들을 사로 잡음으로 그들을 그처럼 괴롭히던 죄와 사망의 법이 떠나감으로 세상의 것으로는 비교할 수 없는 기쁨과 평안을 소유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아직도 이러한 기쁨과 평안을 체험하지 못한 분이 이 자리에 계십니까 그것은 아직도 에수님 밖에 계신 탓입니다. 이제는 예수님의 품으로 들어와 예수님을 나의 신랑, 나의 주님으로 영접하십시오. 그 때 영적 생명이 싹틉니다. 그러면 어느날부터 영적인 기쁨의 꽃, 영적인 열매를 맺게되는 줄로 믿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셋째 단계로 거룩한 연합은 신랑 예수님을 닮아갈 때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는 경건의 연습 단계입니다. 처음 남녀가 결혼한 다음에는 세상 말로 앉으나 서나 깨가 쏟아지는 것 같습니다. 단칸방이든, 반찬이 한가지이든, 그저 부부가 함께 사는 것만으로 최고의 행복과 기쁨이 있는 것같습니다. 그러한 감정이 일생 간다면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4-5년의 세월이 되어 가면서 신혼의 기쁨과 행복감은 점점 사라지고 왜인지 권태가 이끼처럼 끼게되고 서로의 결함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모든 것이 분홍빛처럼 아름답게만 보이던 것들이 안개처럼 걷히고 나니 살림살이, 요리, 성격, 습관의 차이 때문에 서로가 부딪히기 시작하는 느끼게 됩니다. 결혼 초기에는 부부싸움을 해도 곧 화해하지만 이 때는 부부싸움하면 상처도 오래가고 화해도 잘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이 때가 젊은 부부들로서는 참으로 위기입니다. 그 때에 깨지는 부부가 많으므로 그 고비를 잘 넘겨야 합니다. 부부 싸움의 댜부분은 자기 이기심 때문에 일어납니다.
R. L 스투라우스 박사가 저술한 사랑의 신비라는 책에는 이런 글이 나옵니다. 대부분의 부부의 갈등은 자아가 들어 있다. 무조건 상대방의 찬성을 기대하다가 그렇게 안해 줄 때 서로 빈정대로 성난 말로 퍼붓는다. 고 했습니다. 이지연이라는 분이 쓴 행복지수를 높인느 66가지 지혜라는 책에서는 부부 싸움할 때 제일 조심할 말은 ‘능력 없는 남자’ ‘이혼하자. ’ ‘집에서 놀면서 그것도 못해. ’ ‘아무래도 우린 잘못 결혼한 것같애. ’ ‘돈돈돈… 그놈의 돈 때문에’ ‘당신 집안은 왜 그 모양이야. ’ ‘집에만 있는 당신이 뭘 안다고 그래. ’라는 말이라고 했습니다.
대부분의 부부가 싸움할 때 사소한 문제로 다투는데 싸움이 커지는 이유는 거친 말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엡4:26 말씀대로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라는 말씀과 잠 15:1 말씀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 ”고 한 말씀들을 우리 부부들은 언제나 명심해야 됩니다. 그렇다면 부부 싸움은 백해 무익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런 속에서 성장하는 부부들은 서로의 이기심이 점점 깨어져 갑니다. 그리고 서로가 닮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신랑은 신부의 좋은 점을 닮아가고 신부는 신랑의 좋은 점을 닮아가는 유익이 있습니다. 더 나가서는 습관이나 입맛, 취미도 닮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처음에 결혼하고서는 아내가 해주는 요리가 입에 맞지 않고 어머니 요리가 입맛에 맞았습니다. 그러나 결혼하고 3년이 지난 후에 보니 오히려 어머니의 요리가 입에 맛지 않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부부는 서로 티거덕 태거덕 다투기도 하면서 자아는 깨어지고 세월만큼 점점 닮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신랑을 모시고 사는 삶도 비슷합니다. 처음에 예수님을 모시고 살 때는 얼마나 기쁨과 평안이 넘치는지요. 찬송가 493장의 가사대로 나 이제 주님의 새생명 얻은 몸 옛것은 지나고 새사람이로다 그 생명 내 맘에 강같이 흐르고 그 사랑 내게서 해같이 빛난다 주안에 감추인 새생명 얻으니 이전의 좋던 것 이제는 값없다 하늘의 은혜와 평화를 맛보니 찬송과 기도로 주함께 살리라는 내용대로입니다. 주님을 모시고 사니까 그저 그 어디나 천국같습니다.
그러나 어느날부터 그런 기쁨이 없어지고 있음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내게 지워진 십자가 너무 무거워 짜증이 납니다. 요나처럼 도망치고 싶습니다. 탕자처럼 여호와 하나님의 율례의 울타리를 벗어나 자유롭게 살고 싶습니다. 또한 무슨 어려운 일이 생길 때마다 주님에게 ‘나는 주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고 충성봉사하는 데 왜 내게 이런 고통을 주십니까’라고 따지며 기도하기를 자주합니다. 어찌된 노릇입니까 그 하늘의 기쁨과 평안은 어디로 갔습니까 그렇다면 믿음이 떠난 것일까요
아닙니다. 어느 때는 믿음이 충만하여 주님과 깊은 관계에 있다가, 어느 때는 주님과 거리가 멀어지는 과정이 반복되면 자아가 깨어지면서 예수님을 닮아가는 연단과정일 뿐입니다. 그것을 신앙적으로 말하면 성화(聖化) 혹은 성결의 과정이라고 부릅니다. 열매는 하루 아침에 안 커집니다. 참배 나무 가지를 돌배나무에 접목했다고 해도 단번에 열매를 맺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이여, 우리는 자아가 더 깨어져야 합니다. 때로 또 신앙적으로 넘어질 때라도 다시 일어나 탕자처럼 주님 앞에 나아가십시오. 혹 죄를 범하는 때라도 다시 주님 앞에 나아가 용서를 구하십시오. 그런 속에서 주님과 우리의 관계는 깊어가는 것이요, 주님의 용서의 횟수가 많아가고 용서의 크기가 커지는 만큼 우리는 더 주님을 닮아가게 될 줄 믿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넷째 단계로 마침내 온전한 연합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부부가 결혼한지 10년이 될 때는 곧잘 말다툼이 많아지고 성격차가 두드러지더니 15년 -20년이 넘어서면 상대방 표정만 보아도 좋고 나쁜 것을 알고 서로 참게되고 부딪히는 일을 피하게 됩니다. 사실, 제가 늘 농담 삼아 ‘부부 싸움도 힘 있을 때 하는 것이지, 힘 없으면 부부 싸움도 하기 싫어진다. ’라는 말을 곧잘 합니다. 사실입니다. 힘이 있을 때는 부부 싸움하고 2-3일 말을 안해도 견딜 수 있지만, 이제는 귀찮기 그지 없습니다. 그래서 싸울 일이 생기면 서로 조금 언성을 높이다가 슬그머니 서로 피하게 됩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젊어서처럼 서로 별로 말을 많이 하지 않을지라도 부부 사이에 서로가 안되었다는 감정이 생기면서 서로 편하게 해주려 합니다. 그리고 상대방이 무엇을 요구하는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환히 알므로 좋아하는 것을 해주려는 마음이 이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는 점입니다. 40년, 50년 살아온 부부들을 보면 육체는 다 쇠해서 볼 품이 없으나 서로가 오누이처럼 닮아 있는 모습이 나름대로 어떤 세상을 초연한 아름다움이 진하게 전해오는 것을 느낍니다. 옳습니다. 그것이 바로 온전한 연합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신랑으로 모실 때는 그저 사랑을 받기만 하고 그저 용서만 받기만 했습니다. 그것도 부족헤서 항상 순종하지 못하고 반항하면서 무척 가슴을 아프게 해드리었으나 주님은 끝까지 우리를 감싸주시고 덮어주시는 동안 성숙함으로 온전한 연합이 이루어졌습니다. 이제는 내 중심보다 그저 주님 중심이 되어 있습니다. 그저 주님의 이름을 조용히 부르기만 해도 가슴이 저미어 옵니다. 그저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해드리고 싶고 주님이 인도하신다면 어디라도 따라가고 싶은 경지에 이르게 됩니다.
한나 W. 스미스 여사가 쓴 행복한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비결이라는 책은 미국에서만도 한 때 300만부가 팔린 책인데 그 글 중에서 세 가지 거룩한 연합단계를 영어로 재미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1) I and not Christ 번역하면 나요 그리스도 아니요. (2) I and Christ 번역하면 나요 그리스도요. (3)Christ and I 그리스도요 나요. 입니다. 이제는 그리스도가 먼저시오, 그 다음이 나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바로 이러한 거룩한 연합입니다. 예수님이 여호와 하나님과 하나가 되신 것처럼 주님도 우리와 하나가 되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아프리카의 개척자이며 선교사인 리빙스톤이 오랜만에 고국에 돌아와 글래스고우대학에소 명예박사를 받게될 때나 너무나 쇠약헤 있는 것을 모든 사람은 발견했습니다. 아프리카의 특유의 열병으로 스무번이나 쓰러졌기 때문이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이제 리빙스톤이 고향에서 조용히 여생을 보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강단에서 인사말을 하면서 ‘나는 다시 아프리카로 돌아갈 것이라. ’고 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염려하자 그는 말하기를 ‘여러분이여, 염려하지 마십시오. 나는 혼자가 아닙니다.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신 주님이 나의 길동무로 원시림과 광야를 함께 걸어가 주십니다. ’라고 했습니다. 과연 주님과 거룩한 연합을 이룬 모습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이여, 이번 사순절 기간동안 여러분은 주님과 거룩한 연합을 이루시는 체험을 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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