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기

TOP
DOWN

[사순절] 나를 죽이는 십자가의 길

본문

요한은 우레의 아들이란 표현과 함께 사랑이란 뜻을 가지고 있고 요한복음은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의 사역을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그 내용에서의 핵심에 반석에서 떨어진 또 하나의 반석이라는 뜻을 가진 베드로가 있다.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의 사역은 여호와 하나님의 후사가 되어 여호와 하나님의 일을 대신하는 자 즉,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는 자에 대한 모든 설명을 함축하고 있다.
서론 격인 그 요한 서신의 시작인 1장에 베드로가 등장하고
결론적인 21장에 역시 베드로가 등장한다.
그리고 요한복음에서의 예수님이 말을 거는 대상이 항상 베드로 였고, 나머지 제자들은 자기들의 의문점을 예수님께 묻고 있을 뿐이었다.
즉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로서 후사가 되어 사람의 영을 살리는 일인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양들의 문지기가 되어 각각의 문제들을 찾아 필요를 따라 채워주고 먹여주는 선한 목자를 예수에게 배워 떨어진 후 다시 예수와 같이 영을 살려야 할 일을 하는 목회자의 사명이 베드로라고 하신 것이다.
13장 전체는 베드로와 예수님의 대화였다.
그리고 베드로가 예수가 가시는 길을 묻고 자신의 몸이라도 죽여 따라가겠다고 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지금은 따를 수 없는 길이지만 닭이 울기 전에 예수를 세 번 부인하는 것을 베드로의 목숨 갑으로 설명하고 있다.
14장 4절의 원문은 예수님 자신을 가리켜 “나도 알고 그 길도 알리라”라고 말하자 도마가 “예수님도 모르는데 그 길을 우리가 어찌 알겠습니까”고 반문을 하는 것으로 되어있다.
그러므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말씀은 예수님이 지고가신 십자가의 길이 십자가에 죽기 전인 베드로적인 믿음을 죽이는 길이라는 뜻이 된다.
또 이 길만이 진리의 길이며 영의 생명을 얻는 길인 것이다.
7절에서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라”라는 말을 통해 예수그리스도의 삶에서 찾게 되는 신앙인의 삶을 보면 거기에 여호와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암시한다.
그 길만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새 계명 안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히 사람 앞에 보여주는 길이다.
하나를 더하면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의 다음 문장은 그런 것이 아니라고 하는 부정문이다.
예수의 죽음은 우리를 천국으로 데려가고자 함이 아니라 십자가에 죽는 방법을 알려주기 위한 것이다.
본론
여호와 하나님은 자신을 죽이고자 했고, 또 여호와 하나님을 우상으로 믿으면서 여호와 하나님을 바알이라고 부르고, 사람들과 싸워 여호와 하나님의 일군들과 사자들과의 싸움을 싸우면서 여호와 하나님을 불의하다고 하며 여호와 하나님이 보낸 일군들을 판단하여 여호와 하나님을 판단하는 우리 죄인들의 죄를 말하지 않고 그 죄를 통해 여호와 하나님이 정하신 길을 즐거움으로 따라오게 하신다.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은 세상사람 그 누구라도 죄인이라는 뜻으로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하나도 없어야 한다.
지금 교회의 모습에서 교회는 교회와, 교단은 교단과, 종단은 종단과, 교인들은 교인과, 교인들이 세상과, 싸우고 있다.
그리고 서로의 잘못을 지적하고 있으면서 오직 자기들만 고고한 척 한다.
베드로의 뜻과 같이 말로 사람을 가르치는 방법에는 두 종류가 있다.
 첫째는 자기의 지식 안에 있는 말들을 전하는 것으로 이 방법에는 타인의 생각이나 이념 신념 개념은 전혀 무시된다.
그래서 괴리감이나 이질감, 또는 열등감이나 죄의식, 감정이나 자존심들이 서로에게 존재하여 서로 다툼이 생긴다.
 둘째는 자신이 아는 지식을 따라 자기 자신이 다 지키고 행한 후에 사람들의 공경을 받으면서 타인이 자신의 삶을 인정해주면서 물을 때 자신의 말을 전하는 방법이다.
이 방법에는 서로의 의견이 일맥상통하는 가운데에서 하나의 목적이 있어 절대로 다툼이 없다.
여호와 하나님이 정하신 처음 베드로는 첫째의 방법과 같이 자신이 아는 지식을 일방적으로 전하는 지식전달의 방법이고, 십자가에 죽은 후의 베드로의 모습은 자신의 사상이나 방법을 물으러 오는 자들에게 여호와 하나님의 감동과 함께 여호와 하나님의 사상을 전하는 쌍방교류의 방법이었다.
우리들을 돌아보자!!!
남들보고 틀렸다고 말하면서 고치라고 요구하는가 아니면 내 모습을 인정하며 우리의 삶의 방법을 묻는 자들에게 우리가 나 자신이 변화 받는 길을 알게 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복음의 방법을 따라 내가 변한 것을 전달하여 공감하게 하는 베드로 적인 가르침이 있는가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방법이 옳다고 하거나, 자신은 의인이라고 생각하거나 자신의 자존심을 앞세우도록 여호와 하나님이 만드셨다.
그래서 세상사람 그 어느 누구라도 자신의 부족함이나 미련함, 죄를 말하게 되면 긍정보다는 울화가 먼저 나오게 되어있다.
그리고 자신의 생각과 비교하여 우월하게 다른 것이 아닌 비교우위를 가름 할 수 없다고 생각되면 그 어느 것이라도 그 이론의 절대성을 신뢰하지 못하는 것이 사람의 본바탕이다.
지금까지의 기독교 교육은 그 어떤 것이라도 세상 사람들이 비교해 봐도 절대 비교우위를 자랑할 수 없는 교육의 법으로 세상의 문화를 정복하려고 했다.
그 교육법에는 자신스스로도 살아가며 세상과 같은 방법을 가지고 귀신과 여호와 하나님을 비교하여 더 큰 우주의 권력자를 찾아 이제 줄 한번 잘 선 것뿐이라는 개념조차 없다.
모든 사람은 줄을 잘 서서 있는 사람보다 주인의 의향대로 그 줄을 이끌 사람들이 만들어지길 원한다.
여호와 하나님은 여호와 하나님의 사상을 따라 여호와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자를 바라시는 것이지, 여호와 하나님이 주실 때까지 여호와 하나님께 얻어먹는 자를 바라시는 것이 아니다.
사순절이다.
이제 우리는 내가 먼저 여호와 하나님께 죽어야 하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 안에는 밖으로 나가는 베드로도 필요하지만 자기 자신을 여호와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기 위한 자기에게 필요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하고 따르게 하는 내면의 베드로도 필요하다.
아니 밖으로 나가는 베드로는 필요 없다고 하여도 자신이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과 사상을 따라 살게 하는 내면의 베드로는 절대적으로, 꼭, 반드시 필요하며 자신의 내면에 이 베드로의 출현 또는 변화를 간절히 사모해야 한다.
사람에게도 지식을 채워주어 말로만 떠들게 하는 말이 있고, 지식을 따라 자신을 돌아보면서 마음을 변화받기위한 여호와 하나님의 감동이 있는 심령을 울리는 말이 있다.
우리는 이제 마음의 성품이 바뀌어 여호와 하나님의 집을 하늘로부터 받아 누리는 사람이 되기 위해,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머리를 채우는 지식으로만 받는 말씀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을 돌아보게 하면서 자신의 성품을 바꿔주시는 말씀으로서의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히 사모하는 영적인 베드로를 여호와 하나님께 바라야 한다.
그리고 세상이 뒤집어 져도 내 마음에 천국이 임하여 내 마음이 천국이 되어야 한다는 절대 믿음을 여호와 하나님께 구하여야 한다.
남에게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전하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온전하심 같이 온전하게 되고 ,
나의 그 온전함을 보고 인정하여 그 사상을 배우려고 오는 남에게 같은 목적을 가지고 전하고 배우는 귀한 신앙의 일들이 있어야 한다.

내 안에서 죽어야 할 베드로는 나를 위한 신앙의 길을 온전히 벗어나서 여호와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는 그 아가페의 사랑 방법을 따라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것이나 행동이나 말이나 그 어느 것에서도 사람을 정죄하는 것이 없고 오직 마음에 여호와 하나님의 집을 짓기 위한 공통의 목적이 있는 때를 말한다.
이러한 모든 신앙의 참 일은 예수가 죽으시는 과정에서 있던 일들이 모범적 길이고 자신의 것을 전혀 피력하지 않고 여호와 하나님의 방법만을 따라가는 그 길 안에서 자신을 죽이는 일 즉 인본주의 적인 베드로의 세 종류를 죄라고 인정하고 부인하고 포기하는 것이다.
성경적으로 타인의 죄를 정확하게 계산하여 여호와 하나님께 고백하게 하는 안식의 때인 7의 수처럼 세상이 가진 마음에 있는 성품의 죄를 여호와 하나님께 기쁨으로 고백하게 하는 기적의 역사가 각각의 성도들에게 있게 되는 여호와 하나님의 복이 가득하길 간절히 축원한다.

댓글목록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