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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 남의 귀를 자르는 칼을 버리자

본문

사순절기간이다. 십자가 사건에 앞서 일어난 사건들을 돌아볼 때이다.
오늘 본문도 문자로 보면 그냥 역사일뿐이다.
그러나 비유요 비밀로서 사람의 마음에서 일어날 말씀으로 풀어본다면 이 말씀도 영적 의미가 있다.
유다는 찬양하길 소원한다는 뜻으로 찬양과 예배, 기도를 함께 포함하고 있다.
거짓의 땅 거십에 있는 유다가 다말을 범하고 죄를 고백한다.
같은 의미가 있다.
유다는 찬양이라는 의미가 있지만 이 본문의 대 전제가 어두움에 복종하기 위한 때다.
죄인의 모양을 보여주기위해 오셨던 예수가 아직 죽은 것이 아니다
자신의 행동을 보고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이루어지는 완전한 찬양 앞에서, 자신의 입으로 찬양하는 찬양을 참 찬양이 아니다.
우리는 악기이다. 악기가 소리를 내면 가수나 구경꾼이 소리를 하고 춤을 추어야 한다. 나 아닌 다른 사람이 가수가 되어야 참 찬양이 된다.
유다가 예수와 입맞추고자 하는 것은 참 찬양을 모른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예수와 같은 말을 한다고 말하는 모습이다.
그리고 함께 온 사람들이 검(여성형, 전쟁)과 몽치(나무, 곤봉)을 가지고 예수님을 강도처럼 생각하고 잡으러 왔다.
성경의 강도는 타인의 말을 묵살시키고 자신의 말만 말이라고 우겨서 타인이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지 못하게 한다는 뜻이 있다.
검은 전쟁을 일으키러 말을 가지고 왔다는 뜻이며, 몽치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무기삼았다는 말이다.
또 성전에 있을 때에는 손을 대지 않는다는 것은 마음을 중심으로 살 때에는 가만이 있더니 생활에서의 문제에서 부딛히니까 싸움을 싸우지고 한다는 의미가 있고, 또 교회에서는 가만히 있더니 교회 밖에서는 자신이 옳다고 싸우자고 한다는 의미가 있다.
십자가에 죽기 위해 자신을 포기하고 여호와 하나님만 바라보며 자신의 성품을 죽이려고 애쓰는 사람에게 자신도 같은 예배의 방식과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하면서도 행위를 앞세우는 신앙인이 문자중심의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앞세워 가르치려 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이유는 당연히 그 사람의 신앙심 때문에 자신들의 신앙이 엉터리로 소문날까봐 일어난 일이다. 마치 여호와 하나님이 받으신 아벨의 예배 때문에 자신의 예배가 거부당한 것으로 믿고 아벨을 죽인 가인과 같이!!!
예수와 함께한 좌우의 사람이 있다. 좌는 염소 우는 양이다. 염소는 타인과의 관계에서 우는 여호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참 신앙을 찾는 믿음이다.
그 중에 하나가 율법중심의 사람의 오른 쪽 귀를 베었다.
그러자 예수님이 그것도 참으라고 하시며 그 귀를 붙여주셨다.
오른쪽은 철저하게 여호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자신의 마음을 돌아보는 양의 자리이다.
귀는 소리를 듣는 것이다.
육신의 행위중심의 율법주의적인 신앙인에게 마음중심의 말씀을 듣는 귀가 잘못됐다고, 너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자격이 없다고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욕을 하고 있는 형태이다.
마음중심의 신앙인이 십자가에서 자기의 전부를 죽이기 위한 자격에 자기를 훈계하고 자신을 미련한 자로 비하시키는 타인을 판단하여 틀렸다고 하는 말을 버려야 한다고 하신 것이다.
십자가란 타인이 주는 고난의 날, 어두움의 날에 자신의 속성을 돌아보며 자신을 여호와 하나님의 십자가 자기를 죽이라고 주신 사람을 통한 말에 복종하는 것이다.
본론
지금 교회는 서로의 입장을 밝히기 위해 애쓰고 있다.
그리고 그 종국에는 여호와 하나님이 불법으로 정하신 세상 법정에서 판결받아 자신의 정당성을 밝히기 위해 애를 쓴다.
그리고 세상 법정에서 패소한 또 다른 한 부류들은 그 법은 여호와 하나님의 법이 아니라고 하며 성경의 법을 들먹인다.
믿을 신(信)가 사람의 말이다. 사람의 말을 믿어야 한다고 해석하는 부류들이 있지만 성경으로 여호와 하나님은 사람이 하는 말을 보고 그 사람이 순종하는 자인지 불순종하는 자인지 의를 행하는 자인지 불의를 행하는자인지를 구분하여 볼 날이 있다고 했다.
사람의 말 속에서 믿음의 척도를 찾으라고 하신 것이다.
사람의 말에서 믿음을 찾으라고 하신 것은 행동 속에서 나타나는 영적인 또 다른 말이 있음을 암시한다.
우리 기독교는 교단은 교단끼리 종단은 종단끼리 종교는 종교끼리 충돌하며 자신만의 우월성을 피력하려 애쓰고있다.
여호와 하나님의 판결보다는 자신의 노력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증명하려고 한다는 뜻이다.
이는 다 인간적인 방법이다.
그리고 자신이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우주의 유일한 신이신 여호와 하나님의 방법에는 잠잠히 있으면서 몸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참 방법이다.
가정이나 개인적인 관계에서나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예배드리는 그 시간만, 또는 교회 안에서만 잠잠히 참고 있다가 교회 밖으로나오기만 하면 자신의 생각과 기분이 다른 사람에게 말을 하여 자신의 우월성을 강조하거나 허세를 부리거나 본문의 뜻과 같이 자신이 왜소하게 보이게 되는 것이 싫어서 타인을 자신과 같은 사람으로 만들려고 애를 쓴다.
이런 부류는 십자가는 고사하고 오직 인간적인 방법을 부리는 인본주의적인 율법에 매여 사는 사람일 뿐이다.
십자가의 법을 따르는 사람에게는 또 다른 마음의 세상을 산다.
예수님의 모든 말씀은 마음 안에서 있는 일이라고 설명하셨다.
율법중심의 신앙은 버렸어도 자신이 아주 죽지 않은 신앙인에게는 마음 속에서 일어나 요동치는 행동으로 찾는 보이지 않는 말 속에서 그러한 율법중심의 타인을 경멸하거나그들과 다투고 싶은 경쟁심이 남아 있다.
십자가의 법은 인간의 생각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아주 고차원적인 생활이다.
그래서 마음 속에 존재하는 자신의 생각을 여호와 하나님이 종의 귀를 칼로 베는 믿음이라고 하신 것이다.
마음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보시는 불법을 요구하여 여호와 하나님께 죄를 지으라고 요구하는 타인이 아닌 여호와 하나님의 법에대해 무조건 적인 순종에 대한 말씀이 주제인 누가복음에서 베드로와 말고의 이름을 뺀 것은 나름대로 여호와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이해해야 한다.
결론
사람에게는 나의 욕심을 채우기위한 요구가 있고 내 것을 빼앗기기 싫은 욕심의 요구가 있다.
마음에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고 왕이 되어 성품을 제물삼아 제사를 드리는 제사장이 되어야 할 것을 주문하시는 마태복음의 욕구는 빼앗는 자를 통한 십자가이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로서 여호와 하나님의 음벙에 복종해야 하는 것을 주제로 하는 누가복음은 열등감을 가진 타인이 올바로 가는 신앙인에게 자기와 같이 수준을 낮추어다라고 하면서 불법을 행하라고 요구하는 자를 통한 십자가이다.
우리는 예수님이 본으로 보이신 십자가를 지어야 한다.
바라보는 십자가는 이제 그만!!!
그 십자가는 지고자 하여 지는 것이 아니다.
오직 죄로 시작된 자기의 마음 속에 있는 성품을 생각하고 항상 그 성품의 변화를 목적으로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하며 생활에서 결단할 때 때를따라 주시는 비와 같이, 또 양식과 같이 채워질 것이다.
다만 여호와 하나님게 자신의 마음의 문제를 고쳐주시고 살리시는 여호와 하나님만 바라보는 큰 복이 있기를 간절히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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