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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산 자를 찾는가?죽은 자를 찾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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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은 온 세상의 크리스챤들이 지키는 '승리의 축제일'입니다. 교회의 명절 중에 제일 큰 명절이 크리스마스인데 부활절은 크리스마스보다 소홀히 여겨지는 경향에 대해 저는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성경에도 보면 예수그리스도께서 오심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으심 그리고 부활에 대해 더 큰 비중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들마다 고난주간과 부활을 소홀히 여깁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는 소솔히 여길 수가 없고, 여기면 안되기에 종려주일 밤부터 고난주간 새벽 부홍회를 열었고 금식을 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아름다운 꽃으로 주님의 부활을 장식 했습니다. 다른 주간 보다 더 특별하게 장식했습니다. 오늘 어린이들에게 달걀을 나누어 줄 것이고 오늘 밤 부활절 찬양예배를 드립니다.
저는 오히려 부활절이면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예수 믿는 사람이 부활절을 알려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저희 집 아이들에게 달걀을 삶아서 반 학생들과 선생님께 드리라고 달걀을 예쁘게 포장하고 바구니를 준비해서 들려 보냈습니다. 그런데 4학년생인 초등학생은 그래도 괜찮지만, 중학교 3학년생은 가지고 가라고 했더니 머쓱해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알리기 위해서 달걀을 가지고 갑니다. 내년에는 우리 교인들도 모두 다 그렇게 부활을 알렸으면 좋겠습니다. 이렇게 부활절이 되면 달걀을 삶아서 돌리는 풍습이 있습니다. 고난주간에 기도하고 금식하고 장식하고 계란을 나누는 것도 중요한 일이지만 가장 중요한 일은 예수님이 다시 사신 것을 다른 사람에게 알리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예수님이 다시 사셨대, 예수님이 다시 사셨대"라고 알 리는 일이 가장 중요한 일이기 때문에 입에서 입으로 전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일은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구원해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시고 그 예수님이 우리의 죗값을 치르기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부활하게 하신, 다시 말해 죽은 자에게 소망을 주신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양하는 일이 가장 좋은 일입니다. 정말 부활절을 기뻐하는 사람은 찬양하는 자리에 있는 사람입니다. 오늘 저녁 찬양예배에 꼭 참석하셔서 은혜받는 시간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부활절마다 '달걀 돌리는 풍습'은 언제부터 유래된 것일까요 중세 유럽, "여호와 하나님의 보호를 믿으라 여호와 하나님은 자신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시느니라"는 가훈을 마음에 품고 사는 진실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십자군 전쟁이 일어났을 때 사랑하는 아내를 두고 전쟁터로 떠났고 오랫동안 소식이 단절된 채 헤어졌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혼자 남은 부인을 협박해 집을 빼앗았습니다. 그녀는 남편이 돌아올 길목에 방을 얻어 살았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로자린드'라는 여인이었습니다. 마을 아이들을 사랑했던 로자린드는 어느 해 부활절을 맞아 달걀에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려 넣은 후 아이들로 하여금 숲 속 새집에다 숨겨 놓고 찾게 했습니다. 아이들은 그 달걀을 꺼내들고 기뻐했습니다. 그 중 한 아이가 달걀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던 중 지쳐 쓰러진 부상병 한 사람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아이는 자기의 보물처럼 생각하는 달걀을 부상병에게 주었습니다. 군인은 달걀에 "여호와 하나님의 보호를 믿으라…"는 자기 집의 가훈이 적힌 것을 보고 깜짝놀랐습니다. 바로 로자린드의 남편이었습니다. 그는 달걀의 출처를 물어 마침내 아내를 만나게 되었고 로자린드는 그 후 부활절마다 계속 색달걀을 만들어 아이들에게 나눠주었는데, 그 아름다운 풍습이 지금까지도 전해 오는 것입니다.
종교는 세상에 많습니다. 저마다 진리라고 주장하고 자기에게 오라고 합니다. 그러나 부활을 말하는 종교는 없습니다. 신약 성경 260장 가운데 100여번 기록된 부활은 기독교의 중심이 되는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부인하면 이단이요, 못 믿으면 참된 크리스챤이 아닙니다.
부활절은 인간에게 여호와 하나님이 어떤 분임을 깨닫게 했고, 인간의 죄의 문제를 해결케 하였으며, 인간에게 있어 가장 심각한 죽음의 문제를 해결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복음'은 믿는 자들로 하여금 바르게 살게 해 주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믿는 자가 소망 중에 죽을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로마서 15장 8절에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는 주의 것이로다"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죽음이 전제된 유한적인 인생이지만 그러나 부활이 약속된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사람들입니다. 죽음은 아무리 명성이 뛰어난 사람도 아무 것도 아니게 만듭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사람도 소용없게 만듭니다. 재물이 아무리 많아도 무색케 하며, 아무리 기가 막힌 재간을 가지고 있고 많은 것을 가지고 있다 해도 죽음은 모든 것을 소용없게 만들고 끝내 버립니다. 인간은 예외 없이 죽음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만일 죽음 뒤에 생명이 없다면, 죽음 뒤에 그 후가 없다면 정말 세상은 허무할 수밖에 없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영원을 부정한다면 그 사람은 사실 자기 자신을 동물로 만드는 것입니다. 만약 죽음 뒤에 아무 것도 없다면 우리는 지금 어떻게 하든지 즐기며 살고, 남이 피해를 보든 상관할 이유도 없고 자기 이익에 급급해 하면 됩니다. 그러나 사람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소망하는 마음을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셨습니다.
사람들이 어떤 판단을 하고 그것에 대해 말을 할 때에는 자기 경험, 배운 지식, 몸담은 자리에서 느끼는 것…등 여러 조건들을 통해 나름대로의 잣대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나름대로의 잣대 때문에 좋은 점도 있지만 때로는 자기 주장만 펴는 독선에 빠질 수 있고, 자기만 아는 이기심으로, 자기 생각대로 판단하고 단정짓는 편협적인 사고방식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단점이 될 수도 있다는 얘기입니다.
보통 사람들의 인생의 잣대로는 '죽음은 끝'이라는 것입니다. '죽고 나면 끝', 더 이상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 보통 사람들의 잣대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3년동안 데리고 다녔습니다. 3년동안 가르쳤고, 3년동안 당신이 죽으실 것과 부활하실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영원히 살 것도 가르쳤고 그런데 다 배운 제자들이 예수님이 죽으시고 무덤에 갇히게 되니 어떻게 했습니까 그들의 생각으로는 아무리 배웠어도 '죽은 예수는 끝'이었고, 제자로서의 삶도 끝이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갈릴리 고기잡이로, 자기들의 삶의 현장으로,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제자들의 잣대였습니다.
여러분, 만약 부활이 없다면 기독교의 모든 신앙의 터전이나 사도들의 멧세지, 오늘 우리가 봉독한 성경말씀, 찬양대의 찬양, 설교 이 모든 것이 다 필요가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기독교의 진리는 '부활'이라는 터전위에 세워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의 죽음은 끝이 아니었습니다. 예수의 무덤은 세상과 예수, 세상과 여호와 하나님의 단절이 아니었습니다. 만약 부활이 없다면, 부활은 사망을 파헤친 것이므로 우리가 그대로 '사망'에 있어야 하고 부활은 '잠자는 자들의 생명'이므로 부활이 없으면 그들은 '영원한 멸망'으로, 부활은 '생존한 크리스챤의 소망'이므로 부활이 없으면 우리는 한없이 불쌍한 자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9절에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음으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로라"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므로 부활이 제외된 기독교는 헛소리이며 부활을 못 믿는 신앙은 샤머니즘이며 부활을 전하지 못하는 믿음은 성경을 도덕책으로 전락시키는 행위입니다.
정직한 역사가가 어떤 사실이 실제로 일어났다는 것을 확인하려면 반드시 두 가지를 확인해야 합니다. 첫째로 그 사건이 신빙성이 있고 증인이 있는지, 증언할 사람이 있는지 뒷받침이 되어야 합니다. 살아서 직접 말을 하지 않더라도 어떤 기록으로 남겨 놓아야 합니다. 둘째로 그 사건이 주변에 참된 증거들이 있어야 합니다. 이런 조건들이 증거들을 통해 명백히 밝혀졌다면 우리는 그 일에 대해서 믿을 수밖에 없습니다. 옛날 문화나 역사를 봐서도 깨진 항아리, 도기 등을 왜 귀중히 여깁니까 그 시대와 문화를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라는 것은 그 당시에 증인도 있었고 증언도 있었고 증거도 있습니다. 기독교의 역사가 2000년이 되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알고 순교 당했습니다. 초대 교회 많은 사람들이 사자에게 물려 죽었고, 목에 칼이 들어와도 찬송하며 죽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습니까 그들은 예수님이 죽으셨다가 다시 사신 것을 보았고 죽었다가 다시 사는 영원한 삶을 믿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죽음이 두렵지 않은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들은 예수그리스도의 부활 신앙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아직도 마음속에 그런 확신이 없는 사람은 말씀을 듣는 중에 깨달아지는 역사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명화인 "벤허"를 지은 '루 웰레스'라는 사람은 군대의 장군이었습니다. 부하들 중에 예수 믿는 부하들이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주일날 작업을 시켜도 몰래 도망가서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립니다. 훈련을 시키고 때려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도대체 예수 믿는 부하들을 다룰 수 없으니 성경이 모두 거짓말 이라는 것을 밝히려고 성경을 열심히 보다가 가슴이 뜨거워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속에 예수님이 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성경이 거짓말 이라는 것을 밝히기 위해서 성경을 읽다가 써낸 글이 '벤허'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부활'은 단순히 죽었다가 다시 사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는 단순히 죽었다가 살았던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의사가 죽었다고 했는데 하루가 지난 후에 다시 산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 세 번이나 사람을 살려 내셨습니다. 야이로의 딸(막 5:, 눅 8:), 나인성 과부의 아들(눅 7:), 나사로(요 11:) 등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들입니다. 특별히 나사로는 죽은지 나흘만에 살림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부활했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또 죽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살렸던 사람들도 다시 죽었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부활'은 다시 살아난 후에 '영원히 죽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그 영원히 죽지 않는 삶 때문에 오늘도 모였습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시니까 제자들이 흩어졌습니다. 예수님을 따라 다녔던 사람들이 모두 흩어졌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부활하셨다고 하니 흩어졌던 사람들이 다시 모였습니다. 그들은 모여서 기도하고, 모여 예배하고, 모여 봉사하였습니다. 초대교회의 특색은 열심히 모이는 것이었습니다. 성령 강림으로 교회가 출발된 것도 120문도가 모여서 기도할 때였습니다. 역사가 '누가'는 당시의 모습을 이렇게 전하였습니다. "날마다 한 마음으로 성전에 열심히 모이고 집마다 빵을 떼면서 순수한 마음으로 기쁘게 음식을 먹고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하였다"(행 2:46)라고 말했습니다. 잡히면 죽음을 당하는데도 모였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10:25)고 했습니다. '모이기를 폐하지 말자'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사람의 첫 번째 증거가 '모이는 것'입니다. 그날은 그리스도께서 오시는 날입니다. 즉 재림의 때(37절, 고전 3:13, 빌 1:10)입니다.
1965년부터 1985년까지 20년동안 미국의 교회들이 부흥했는지, 줄어 들었는지를 조사했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늘어난 교회들도 많고 줄어든 교회들도 많았습니다. 늘어난 교회는 어떻게 성장했는지 확인해 보니 보수적인 교단과 보수적인 단체들이 성장했습니다. 보수적인 교단이라는 것은 '성경 말씀대로 모이기를 폐하면 안된다고 하니까 열심히 모이고 모여서 성경 말씀 배우고, 모여서 봉사하고 나가서 전도하고' 어떻게 하든지 모이려고 애쓰는 교회들은 부흥했습니다. 문 닫는 교회, 줄어드는 교회는 '모이기를 폐하는' 교회들이 자꾸 줄어들기 시작했습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모이기를 폐하는 교회들은 자꾸 줄어듭니다. 우리 기둥교회는 모이기를 폐하는 교회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저는 가는 곳마다 만나는 목회자마다 만나면 "저녁예배를 제대로 드려야 합니다"라고 말합니다. 제가 우리 교회에서도 예배 때마다 강조합니다. 여러분, 모이는데 최선을 다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모이지 못했으면 마음에 부담을 느끼고 죄송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을 안 사람들이 첫 번째 했던 일이 모인 것입니다. 모인 사람들이 와서 예배를 드리고 나가서 "예수님이 사셨습니다. 예수님이 죽었다가 사셨습니다"라고 예수의 사심을 사람들에게 알 리는 일이었습니다. 오늘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가 사셨음을 알리는 날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부활절은 인간에게
① 여호와 하나님이 어떤 분임을 알게 했고,
② 죄문제를 해결하였으며,
③ 가장 심각한 문제인 죽음의 해답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음이 전제된 유한한 인생이지만 부활이 약속된 영원한 생명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과 하나가 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1998년 이라는 세상 시간 안에 있지만 예수를 믿는 우리는 영원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눈앞에 보이는 사물을 보고 귀에 들리는 소리를 듣고 사는 제한된 공간의 역사 속의 인생이지만 예수를 믿는 우리는, 믿음으로 예수와 하나된 우리는 신비로 세상에 오신 주님, 풍랑을 잔잔케 하신 주님, 병든 자에게 일어나라 믿음대로 되리라 소리치신 예수님과 함께 있습니다.
제가 편지를 받았습니다. 거기에 이런 글이 있었습니다.
"목사님, 목사님은 항상 내 안에 있었습니다. 목사님은 항상 내 안에 있습니다. 목사님은 항상 내 기도에 있었고, 목사님은 항상 내 삶 속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나는 목사님 안에 있었는지요"라고 묻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별로 그분을 마음에 두고 있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 글을 읽으면서 마음에 큰 용기를 얻었습니다. 그리고 제 자신에게 한번 질문해 보았습니다. 그 분의 마음속에 내가 있었고 그분의 기도 속에 내가 있었다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예수님이 우리들에게 질문하셨다고 생각해 봅시다. "너희들은 내 안에 있었다, 너는 내 안에 있었다"라고 하시면서 "나는 네 안에 있었느냐, 네가 말할 때, 네 삶속에 어떤 곳에 가서든지 내가 네 속에 있었니"라고 물어 보신다면 여러분 어떻게 답하시겠습니까 골로새서 3장 17절에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고 했습니다. 정말 우리의 말 속에 예수님이 계셨습니까 우리의 일속에, 내 가정에, 내 생활속에 예수님이 계셨습니까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은
예수가 내 안에 있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예수 안에 있다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백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갈 2:20 上), "이제 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下). 이 믿음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이 말은 무슨 뜻입니까 "내가 예수를 믿는 것은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가 내 안에 있기 때문에,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 안에 내가 있기 때문에 못박힌 것입니다. 그래서 내 속에 계신 예수님과 나는 같이 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고, 예수님과 함께 무덤에 묻히고,
예수님과 함께 무덤에서 살아나는 그 자리에 같이 있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1장 29절에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내가 예수 믿는다'는 말은 예수님 안에 있다는 말입니다. 또한 예수님이 내 안에 있는다는 말인데 그렇다면 십자가의 고난도 내 고난이요, 무덤에 묻힌 것도 내가 묻힌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예수 믿는 것 때문에 십자가에 달 리는 고난을 겪어 보셨습니까 예수 믿는 것 때문에 무덤에 묻히는 것 같은 외로움과 캄캄함을 경험해 보셨습니까 외면을 당해 보셨는지요 매장을 당해 보셨는지요 예수 믿는 것 때문에 사람들의 조롱하는 말을 들어 보셨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다는 것은 그것이 전제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체험을 고백할 만한 고난과 소외가 있다면, 소망이 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다시 사는 부활의 소망, 부활의 기쁨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누가복음 24장 10절에 막달라 마리아, 요안나,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 그리고 다른 여자들이 죽음을 확인하러 무덤에 갔으나 생명을 발견합니다. 시체에 향유를 바르기 위해서 죽은 예수를 찾기 위해 갔습니다. 그러나 죽은 예수를 만나지 못했습니다. 무덤이 열렸습니다. 빈 무덤, 생명이 가득 찬 부활의 무덤을 봅니다. 오늘 여러분들이 예배의 자리에 오셨습니다. 죽은 예수를 기념하는 주일에 나오셨습니까 빈 무덤을 확인하러 오셨습니까 그 자리에 있던 천사가 이르기를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고 했습니다.
오늘 교회에 나와 예배드리는 사람들 가운데, 이 세상 사람들 가운데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는 죽음을 바라보고 죽음을 향해가는 인생입니다. 다른 한 종류의 인간은 생명을 바라보고 생명을 향하여 사는 사람입니다. 영생을 찾아가는 인생입니다. 여러분은 오늘 교회에 오셔서 죽은 예수를 만나는 것이 아니라 살아계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종말이 될수록,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옴을 볼수록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내던지고 싶고, 교회를 멀리 하고 싶고, 내가 예수 믿는 것이 부끄럽고 성경책을 집어 던지고 싶은 일이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앞으로 예수 믿는 다는 것 때문에 점점 힘든 일이 많아질 것입니다. 말세에 그런 일이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죽음을 향하는 사람에게는 죽음이 모든 것의 끝입니다. 인생의 이야기는 곧 죽음의 이야기입니다. "죽으면 그만이지. "하는 인생관입니다. 그러나 생명을 향하여 사는 사람에게는 뒤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부활의 이야기, 더 길고 영원한 이야기가 계속됩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했습니다. "내가 너희들 앞에 생명과 죽음을 두노니 생명을 택하라. "(신 30:10) 그리고 이 생명은 곧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주석을 붙였습니다(20절). 여호와 하나님은 생명을 주시는 자시오, 영원한 생명이십니다. 생명의 근원이신 여호와 하나님께 예수를 통하여 연결될 때 우리도 영원한 생명을 받게 됩니다. 죽음, 캄캄한 어둠, 끝(인생의 끝)을 찾은 여인에게 사람들과 함께 하시며, 하늘의 복음을 전하시고, 병든 자를 고치시던 때 주님께서 하신 말씀은 생명, 해결의 기쁨, 새로운 삶에 대해 죽은 후 부활에 대해 하시던 말씀을 기억하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흔들림이 없는 믿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왜요 부활의 산 소망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점점 더 캄캄해져 가는 세상, 그러나 흑암이 깊어지는 것은 머지 않아 새 아침이 밝아 온다는 증거입니다. 오늘 이 시대는, 이 세대는 음란하고 더러운 이야기, 경제적인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그러나 낙심하지 마십시오. 승리의 새 아침이 밝게 될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살아 계십니다. 오늘 우리가 흑암 가운데 산다고 해도 우리에게는 새 아침이 소망의 세계가 있습니다. 무덤(죽음)을 찾지 말고 죽은 얘기를 하지 말고 생명을 찾으시기 바랍니다. 산 얘기를 하십시오. 삶의 현장(갈릴리)에서 살아 역사 하시는 예수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내 힘으로, 내가 살지 말고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사십시오. '구주와 함께 나 죽었으니 구주와 함께 나 살았도다'라고 고백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이미 승리자입니다. 부활을 믿는 자는 이미 여호와 하나님 나라의 백성입니다. 이미 영생의 주인공입니다. 버림받은 것 같은 외로움, 목마른 고통, 캄캄한 어둠에 갇힌 것 같은 절망, 모든 것이 끝난 것 같은 죽음에서 모든 것을 이기신 부활의 주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사신 예수를 믿는 사람이 더러운 이야기, 절망의 이야기, 목마른 이야기, 캄캄한 이야기꾼이 아니라 사신 예수님을 찾는 승리자의 입, 이긴 자의 가슴을 가지고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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