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절] 십자가를 지십시오
본문
이 세상의 피조물 중 자존심을 가진 존재는 인간밖에 없습니다. 자존심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중요한 것입니다. ‘자존심이 강한 것’은 나쁜 것이 아닙니다. 진짜 나쁜 것은 ‘자존심만 강한 것’입니다. 자존심이 강한 삶에서는 책임의식과 교양이 나오고, 열정과 도전정신이 나옵니다. 그러나 자존심만 강한 삶에서는 우월감과 열등감이 나오고, 무엇이 없으면 좌절하고 무엇이 있으면 잘난 척을 합니다.
성도는 자존심만 강한 사람이 되지 말고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성도는 거룩한 자존심을 가지고 어떤 경우에도 기가 꺾이지 않고, 어떤 환란을 당해도 힘을 잃지 않고, 항상 자신에게 주어진 분수의 복을 감사하면서 여호와 하나님의 사명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어떤 분은 사소한 것으로 자존심이 상합니다. “나를 보고도 모른 척 했다”고 자존심이 크게 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살다보면 서로가 서로를 제대로 보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것으로 자존심이 상할 필요는 없습니다. 쉽게 자존심이 상하는 사람은 자존심이 강한 것이 아니라 자존심이 약한 것입니다. 성도에게 진짜 자존심이 상하는 것은 믿는 사람답게 살지 못하고, 사명을 따라 살지 못해서 욕을 먹고 눈총을 받는 것입니다.
두 종류의 사람이 있었습니다. 한 종류의 사람은 시시한 것에 매여 잘난 척 하고 치사하게 사는 사람이고, 또 한 종류의 사람은 거룩한 자존심을 가지고 사명을 따라 겸손히 사는 사람입니다. 사람이 돈이 많고, 인물이 잘나고, 많이 배웠다고 목에 힘을 주면 어느 누구도 존경하지 않지만 돈이 많고 인물이 잘나고 많이 배웠음에도 불구하고 교회에서 묵묵히 설거지를 하며 섬기는 자세로 살면 그 안에 있는 예수 신앙을 보고 다 존경합니다.
성도는 사는 세계가 달라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내 안에 주님 계신 것을 감격해하고 천국 소망을 가지고 세상 것을 부러워하지 말고 살아야 합니다. 솔직히 세상 것을 많이 가진 사람이 부러울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곧 정신을 차리고 주님이 주신 더욱 소중한 것들을 외면하고 잠시 그런 것에 한눈을 팔았던 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는 믿지 않는 사람들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고 그들을 긍휼히 여겨야 합니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 “나는 주님 한분만으로 족하다”고 고백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처럼 ‘주님’을 따르고, ‘주님의 삶’을 따르고, ‘주님의 뜻’을 따르며 천국 갈 때까지 끝까지 제 코스에서 이탈하지 않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자기의 길을 택해놓고도 갈까 말까 망설이는 것처럼 불행한 모습은 없습니다.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 여호와 하나님의 일은 상관하지 않고 다른 것에 눈이 번쩍이면 사단이 얼마나 좋아하겠습니까 우리가 ‘천국 길’을 택한 존재로서 ‘천국 일’에 매진하지 않으면 우리의 영혼은 서서히 죽어가면서 진짜 여호와 하나님의 축복은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적으로는 못 살아도 신앙적으로는 잘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따르지 말아야 할 것
오늘 본문 19절에서 주님은 베드로에게 사명을 주시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은 누구를 따르느냐에 따라 그 인생이 현저하게 달라집니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가 주님을 따라 산다면 그것처럼 복된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을 따르려면 다른 것을 따라가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따라가지 말아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1. 욕심을 따라 살지 말아야 합니다.
가끔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사명에는 관심이 없이 오직 복만 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돈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돈을 사모해서 생긴 돈은 저주가 되지만 돈이 우리를 사모해서 생긴 돈은 진정한 축복이 됩니다. 우리는 주님을 이용해 돈을 벌려고 하지 말고, 돈을 이용해 주님께 영광을 돌리려고 해야 합니다. 사명에 욕심을 가지면 축복받지만 돈에 욕심을 가지면 오히려 돈이 재앙의 도구가 됩니다.
며칠 전에 한 목사님 수기를 읽었습니다. 어느 날, 어떤 부부가 목사님을 찾아와 “건축헌금 1억 원을 작정하겠다”고 했습니다. 목사님은 그 말을 듣고 감격해서 “집사님! 생활도 넉넉하지 않는데 그 많은 돈을 작정하니 감사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집사님에게 큰 축복으로 함께 하실 줄 믿습니다”하고 축복하는데 갑자기 그 집사님이 한 가지 조건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목사님! 제가 이번 주부터 로또를 저와 아내의 이름으로 10장씩 사려고 하는데 로또가 맞을 수 있게 기도해주세요. ”
그 후 1년이 지나도록 로또가 맞지 않았습니다. 결국 목사님을 다시 찾아와서 말했습니다. “목사님! 목사님이 저희를 위해 기도해주시지 않는 것 같습니다. 아무리 기다려도 로또가 맞지 않아 저회는 이 교회를 떠나야 하겠습니다. ” 그처럼 돈 욕심으로 주님을 이용하고, 기도를 이용하다가 나중에는 교회까지 떠나는 것을 보고 그 목사님은 씁쓸한 마음이었다고 합니다. 주님을 온전히 따르려면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2. 외모를 따라 살지 말아야 합니다.
미성숙한 사람은 외모에 관심이 많고 성숙한 사람은 내면에 관심이 많습니다. 요즘 세상 사람들은 스타에 열광하는데 아쉽게도 교회도 그런 양상을 따라가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어떤 스타급 은퇴 목사님이 아들 목사님과 함께 교회를 크게 지어 새로 예배를 드렸습니다. 처음에는 매주 5백 명씩 새로운 사람이 찾아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사람들이 거의 100% 기존 신자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구원 받은 숫자는 똑같은데, 그 교회가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수많은 교회에 아픔과 기도제목을 남기고 등장한 모습이 되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폼 나는 예배, 폼 나는 성가대, 폼 나는 예배당에 매료됩니다. 그렇게 외형에 매료되어 따라다니지만 교회의 존재의의가 무엇인지, 주님의 교회를 위해 자신의 사명과 역할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 줄어들고 있습니다. 교회는 스타를 따라 다니는 팬클럽이 아니라 목숨 걸고 희생하고 충성해야 될 거룩한 공동체입니다.
외적인 화려함이 축복이 아닙니다. 로마에 성지순례를 가면 두 가지를 보게 됩니다. 하나는 성도들의 지하 무덤인 카타콤입니다. 그들은 박해를 피해 지하 무덤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다가 발각되면 서로 다투어 사지로 향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들을 보고 얼마나 기뻐하셨겠습니까
카타콤을 본 다음날에는 바티칸 궁과 성베드로 대성당을 봅니다. 그러면 그 엄청난 규모와 예술성에 넋을 잃게 되지만 그 화려함의 이면에는 성당 건축헌금을 위해 여호와 하나님의 뜻과 비전을 팔고 면죄부를 팔았던 모습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외적인 것에 현혹되어 영안이 닫혀서는 안 됩니다. 영안이 닫히면 축복의 문도 닫힙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축복은 ‘베드로 성당의 신앙’에 있지 않고 ‘카타콤의 신앙’에 있습니다.
3. 문제를 따라 살지 말아야 합니다.
살면서 문제를 만날 때가 있습니다. 그때 문제만 바라보지 말고 그 문제를 통해 여호와 하나님의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역사가 있을 것이라고 믿어야 합니다. 문제가 생기면 “응답이 생긴다!”고 생각하고, 환난이 오면 “축복이 온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중세기 유명한 성자 한 분은 늘 “여호와 하나님의 뜻은 선하다. ”는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어느 날, 그가 한 동네에 전도차 갔는데 동네 사람들이 그를 동네 밖으로 내쫓았습니다. 할 수 없이 산골짜기를 찾아 여장을 풀고 기도한 후, 불을 켜서 성경을 보려고 하는데 갑자기 바람이 불어 불이 꺼졌습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의 뜻은 선하시다” 하고 그냥 잠자리에 들었는데 조금 후에 사자가 와서 자기가 타고 온 나귀를 잡아갔습니다. 그래도 그는 고백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뜻은 선하시다. ”
아침이 되었습니다. 다시 동네로 들어가니까 동네가 마적단에 의해 완전히 폐허가 되어 있었습니다. 결국 동네에서 자지 않아서 그는 화를 면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바람이 불어 불이 꺼진 것도, 맹수가 와서 나귀를 잡아간 것도 결국 마적단에게 발각되지 않게 하시려는 여호와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그때 수도사는 “여호와 하나님의 뜻은 정말 선하시구나!”하고 고백했다고 합니다.
위대한 믿음의 선배들은 고난을 받을 때마다 항상 생각했습니다. “여기에는 분명 여호와 하나님의 뜻이 있을 거야. 묵묵히 충성하자!” 그처럼 우리가 문제를 만나도 그 문제에 몰입하지 않고 주님을 바라보고 나가면 여호와 하나님이 반드시 은혜와 축복을 내려주실 것입니다.
주님을 따라 산다는 것의 의미
우리는 욕심, 외형, 그리고 문제를 따라 살지 말고 오직 주님만 따라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을 따라 산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슨 의미일까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이 시간에는 4가지만 함께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1. 믿음을 가지고 살라는 말입니다.
사람이 얼마나 약한 존재인지 모릅니다. 강한 사람도 알고 보면 약합니다. 옛날 권투 선수 중 알리는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쏘겠다”고 떠벌였습니다. 나중에 그가 고백하기를 시합을 할 때마다 두려워서 그렇게 떠벌였다고 합니다. 사람이 얼마나 쉽게 무너지는지 모릅니다.
결혼 9년 만에 임신한 임산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임신하면서 허약증세로 시달리며 가끔 헛것을 보았습니다. 그때 기도해준다고 찾아온 전도사가 산모에게 귀신이 붙었다고 했습니다. 그 후 11년 동안 수없는 귀신 쫓기 의식을 행하면서 귀신 공포증에 시달려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성경 말씀을 보면서 믿음이 생겼습니다. “귀신이 찾아와 죽이겠다면 죽이라고 하지! 나는 주님만 바라볼 거야!” 그 한 마디 고백으로 11년 만에 귀신 공포증에서 해방되었다고 합니다.
말 한 마디가 이렇게 사람을 죽일 수 있고, 말씀 한 마디에 대한 확신이 이렇게 사람을 살릴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믿음의 확신입니다. 우리는 어떤 시련이 있고, 사단의 어떤 공격이 있어도 나를 사랑하는 주님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2. 은혜를 추구하며 살라는 말입니다.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은혜입니다.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한시도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아무리 대단한 존재도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그날로 끝장납니다.
저는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안 된다는 것과 관련해서 아직도 잊지 못하는 일이 있습니다. 1980년 대학 예비고사 치기 바로 전날, 방송과 주위 사람들이 일찍 자라고 해서 저는 9시도 되기 전에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그런데 매일 새벽 1-2시에 자다가 일찍 자려고 하니까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11시쯤 되니 불안했습니다. 불안하니까 더 잠이 안 왔습니다. 자정이 넘어 1시쯤 되니까 미칠 것만 같았습니다. 미칠 것 같으니까 더 잠이 안 왔습니다.
새벽 4시쯤 되니까 신경과민에 환청 현상까지 생겼습니다. 이웃집에서 라디오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습니다. 온 식구가 다 깼고 어머님이 이웃집 문을 두드리며 “라디오 좀 끄라!”고 했습니다. 이웃집에서 자다가 일어나 황당하다는 듯이 “누가 라디오를 틀고 있느냐 다 자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하다가 새벽 5시 20분쯤 되어서야 깜빡 잠이 들었고, 50분만 자고 일어나야 했습니다.
그날 고통과 짜증과 졸음이 섞인 상태에서 시험을 치르고 난 후에 얼마나 허무했는지 모릅니다. 생전 불면증이 없다가 하필 그날 그런 일이 벌어지니 사람 무너지는 것은 순식간이었습니다. 사람이 아무리 준비를 잘해도 중요한 것은 여호와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여호와 하나님이 축복해 주셔야 축복 받을 수 있고 여호와 하나님이 길을 열어주셔야 길이 열릴 것입니다.
3. 주님만 바라보며 살라는 말입니다.
사람이 주님만 바라보며 살 때 나타나는 표시가 있습니다. 그것은 화사한 얼굴입니다. 가끔 신앙생활 하면서 표정이 전반적으로 어두운 분들이 있습니다. 이유는 하나뿐입니다. 영적인 신랑을 바라보지 않고 엉뚱한 것을 신랑으로 삼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오직 주님만 바라보고 살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환한 얼굴을 주실 것입니다.
어떤 처녀가 결혼하기 전에는 아주 초라했는데 결혼 4년 만에 교회에 다시 오니 얼마나 훤해지고 예뻐졌는지 교인들이 다 감탄했습니다. 그것을 보고 한 사람이 말했습니다. “신랑 잘 만나서 그래!” 신랑 잘 만나면 외모가 조금 못해도 환하게 되지만, 신랑 잘못 만나면 아무리 잘생겨도 기미가 사라질 날이 없습니다.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날, 한 부인이 남편을 위해 열심히 음식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남편이 그 모습이 사랑스러워서 가까이 가서 “여보!”하고 불렀습니다. 그때 부인이 쳐다보지도 않고 “나 바빠요! 저리 가세요!” 한다면 무엇인가 중요한 것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남편 자체를 받아주는 것’이 ‘남편을 위해 식사를 준비하는 것’보다 더 중요합니다. 영적으로도 똑 같습니다.
주님을 위해 일하겠다고 하면서 예배와 기도를 소홀히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주님께 더 드리기 위해 돈을 벌겠다고 하다가 예배도 빼먹고, 기도도 멀리하고, 봉사도 멀리한다면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이 결코 기뻐하시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무엇보다 여호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예배와 기도의 자리를 제일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예배와 기도가 없으면 꽃이 꺾인 것처럼 처음에는 괜찮은 것 같아도 그 영혼은 점차 시들고 축복의 문도 점차 닫히게 될 것입니다.
4. 주님의 십자가를 지라는 말입니다.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영광의 길을 따른다”는 말이 아니라 “십자가의 길을 따른다”는 말입니다. 마태복음 16장 24절 말씀을 보면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아무든지 나를 따르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존재는 어디에 가든지 주님을 위해 십자가를 지는 사람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십자가를 회피하고 우리의 영혼이 살고 축복 받는 길은 결코 없습니다. 축복을 원하면 내게 주어진 십자가를 잘 져야 합니다. 새의 날개가 무겁지만 잘라버리면 날지 못하고, 베의 돛도 무겁지만 잘라버리면 항해를 할 수 없고, 시계추도 무겁다고 떼버리면 시계가 돌아가지 않듯이 성도가 십자가가 무겁다고 던져버리면 그날로 축복의 문도 닫히게 될 것입니다.
신앙생활의 정수는 십자가입니다. 요새 신령하다는 분들이 많습니다. 환상을 보고, 천국을 보고, 예언을 하고, 신유의 은사가 있다고 합니다. 그런 분들이 최고의 성도일까요 아닙니다. 최고의 성도는 주님을 위해 십자가를 지는 성도입니다. 돈이 없고, 학력이 없고, 외모가 없어도 십자가를 지는 자는 어디에 가든지 인정받고 존경받습니다. 진정한 축복은 십자가의 희생 속에 있습니다.
가끔 아무 보람도 없이 삶이 허무하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때 제일 먼저 할 일은 십자가를 지는 일입니다. 보람이란 섬기는 삶의 대가로 얻어진 정신적 보상이지만 공허는 자기 안일과 정욕을 위해 살다가 생긴 삶의 후유증입니다. 그러므로 삶에서 보람을 느낀다는 것은 십자가를 지고 존귀하게 살고 있다는 표시이고, 삶에서 공허를 느낀다는 것은 십자가를 외면하고 비천하게 살고 있다는 표시입니다.
흔히 여자는 세월이 갈수록 값이 떨어지고, 어머니는 세월이 갈수록 값이 올라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어머니에게는 십자가의 헌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희생해서 남에게 베풀고 살면 삶은 점차 고귀하게 되고, 인생의 행복도 찾아오게 될 것입니다. 십자가는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기적의 불씨입니다.
어느 날, 어떤 가정에 갈등이 생겼습니다. 남편이 교회에 나가는 것을 반대한 것입니다. 너무 마음이 괴로워서 40일 작정 새벽기도를 했습니다. 그리고 말씀 듣고 기도하면서 십자가 외에는 길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때부터 최선을 다해 남편을 섬겨주었습니다. 그리고 40일 새벽기도가 끝나는 날 저녁에 진지한 대화 기회가 생겨서 말했습니다. “여보! 지난 10년간 당신에게 항상 고마웠어요. 내가 좀더 잘했어야 하는데…” 그러니까 남편이 “왜 이래! 갑자기!” 하고 핀잔을 주었지만 만족하는 기색이 역력했습니다.
조금 더 대화를 하다가 이 아내가 자기 마음을 털어놓았습니다. “여보! 당신을 정말 사랑하지만 나는 믿음 생활 하지 않으면 살 수 없어요. 이제는 당신이 좀 내 신앙생활을 도와주세요. ” 그러자 남편이 “요즘처럼 살림 잘하려면 다녀!”라고 말하더랍니다. 그렇게 해방된 후에 더욱 기쁜 마음으로 지내니까 얼마 후에 남편마저 교회에 나오게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따라 십자가를 지면 놀라운 일이 벌어질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를 고생 시킬 목적으로 우리에게 십자가를 지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축복하시려고 십자가를 지라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잘 지면 주님은 우리의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보다 더 넘치도록 채워주신다고 성경은 약속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앞에 어떤 일이 생길지 알 수 없고, 사실상 알 필요도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십자가를 지고 헌신하는 마음으로 살면 여호와 하나님의 우리의 꿈과 비전과 미래를 붙들어주시고, 가장 복된 자리로 우리를 이끌어주실 것 하나만 알고 살면 됩니다. 항상 십자가를 잘 지고 승리하는 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성도는 자존심만 강한 사람이 되지 말고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성도는 거룩한 자존심을 가지고 어떤 경우에도 기가 꺾이지 않고, 어떤 환란을 당해도 힘을 잃지 않고, 항상 자신에게 주어진 분수의 복을 감사하면서 여호와 하나님의 사명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어떤 분은 사소한 것으로 자존심이 상합니다. “나를 보고도 모른 척 했다”고 자존심이 크게 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살다보면 서로가 서로를 제대로 보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것으로 자존심이 상할 필요는 없습니다. 쉽게 자존심이 상하는 사람은 자존심이 강한 것이 아니라 자존심이 약한 것입니다. 성도에게 진짜 자존심이 상하는 것은 믿는 사람답게 살지 못하고, 사명을 따라 살지 못해서 욕을 먹고 눈총을 받는 것입니다.
두 종류의 사람이 있었습니다. 한 종류의 사람은 시시한 것에 매여 잘난 척 하고 치사하게 사는 사람이고, 또 한 종류의 사람은 거룩한 자존심을 가지고 사명을 따라 겸손히 사는 사람입니다. 사람이 돈이 많고, 인물이 잘나고, 많이 배웠다고 목에 힘을 주면 어느 누구도 존경하지 않지만 돈이 많고 인물이 잘나고 많이 배웠음에도 불구하고 교회에서 묵묵히 설거지를 하며 섬기는 자세로 살면 그 안에 있는 예수 신앙을 보고 다 존경합니다.
성도는 사는 세계가 달라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내 안에 주님 계신 것을 감격해하고 천국 소망을 가지고 세상 것을 부러워하지 말고 살아야 합니다. 솔직히 세상 것을 많이 가진 사람이 부러울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곧 정신을 차리고 주님이 주신 더욱 소중한 것들을 외면하고 잠시 그런 것에 한눈을 팔았던 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는 믿지 않는 사람들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고 그들을 긍휼히 여겨야 합니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 “나는 주님 한분만으로 족하다”고 고백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처럼 ‘주님’을 따르고, ‘주님의 삶’을 따르고, ‘주님의 뜻’을 따르며 천국 갈 때까지 끝까지 제 코스에서 이탈하지 않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자기의 길을 택해놓고도 갈까 말까 망설이는 것처럼 불행한 모습은 없습니다.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 여호와 하나님의 일은 상관하지 않고 다른 것에 눈이 번쩍이면 사단이 얼마나 좋아하겠습니까 우리가 ‘천국 길’을 택한 존재로서 ‘천국 일’에 매진하지 않으면 우리의 영혼은 서서히 죽어가면서 진짜 여호와 하나님의 축복은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적으로는 못 살아도 신앙적으로는 잘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따르지 말아야 할 것
오늘 본문 19절에서 주님은 베드로에게 사명을 주시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은 누구를 따르느냐에 따라 그 인생이 현저하게 달라집니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가 주님을 따라 산다면 그것처럼 복된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을 따르려면 다른 것을 따라가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따라가지 말아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1. 욕심을 따라 살지 말아야 합니다.
가끔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사명에는 관심이 없이 오직 복만 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돈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돈을 사모해서 생긴 돈은 저주가 되지만 돈이 우리를 사모해서 생긴 돈은 진정한 축복이 됩니다. 우리는 주님을 이용해 돈을 벌려고 하지 말고, 돈을 이용해 주님께 영광을 돌리려고 해야 합니다. 사명에 욕심을 가지면 축복받지만 돈에 욕심을 가지면 오히려 돈이 재앙의 도구가 됩니다.
며칠 전에 한 목사님 수기를 읽었습니다. 어느 날, 어떤 부부가 목사님을 찾아와 “건축헌금 1억 원을 작정하겠다”고 했습니다. 목사님은 그 말을 듣고 감격해서 “집사님! 생활도 넉넉하지 않는데 그 많은 돈을 작정하니 감사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집사님에게 큰 축복으로 함께 하실 줄 믿습니다”하고 축복하는데 갑자기 그 집사님이 한 가지 조건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목사님! 제가 이번 주부터 로또를 저와 아내의 이름으로 10장씩 사려고 하는데 로또가 맞을 수 있게 기도해주세요. ”
그 후 1년이 지나도록 로또가 맞지 않았습니다. 결국 목사님을 다시 찾아와서 말했습니다. “목사님! 목사님이 저희를 위해 기도해주시지 않는 것 같습니다. 아무리 기다려도 로또가 맞지 않아 저회는 이 교회를 떠나야 하겠습니다. ” 그처럼 돈 욕심으로 주님을 이용하고, 기도를 이용하다가 나중에는 교회까지 떠나는 것을 보고 그 목사님은 씁쓸한 마음이었다고 합니다. 주님을 온전히 따르려면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2. 외모를 따라 살지 말아야 합니다.
미성숙한 사람은 외모에 관심이 많고 성숙한 사람은 내면에 관심이 많습니다. 요즘 세상 사람들은 스타에 열광하는데 아쉽게도 교회도 그런 양상을 따라가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어떤 스타급 은퇴 목사님이 아들 목사님과 함께 교회를 크게 지어 새로 예배를 드렸습니다. 처음에는 매주 5백 명씩 새로운 사람이 찾아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사람들이 거의 100% 기존 신자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구원 받은 숫자는 똑같은데, 그 교회가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수많은 교회에 아픔과 기도제목을 남기고 등장한 모습이 되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폼 나는 예배, 폼 나는 성가대, 폼 나는 예배당에 매료됩니다. 그렇게 외형에 매료되어 따라다니지만 교회의 존재의의가 무엇인지, 주님의 교회를 위해 자신의 사명과 역할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 줄어들고 있습니다. 교회는 스타를 따라 다니는 팬클럽이 아니라 목숨 걸고 희생하고 충성해야 될 거룩한 공동체입니다.
외적인 화려함이 축복이 아닙니다. 로마에 성지순례를 가면 두 가지를 보게 됩니다. 하나는 성도들의 지하 무덤인 카타콤입니다. 그들은 박해를 피해 지하 무덤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다가 발각되면 서로 다투어 사지로 향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들을 보고 얼마나 기뻐하셨겠습니까
카타콤을 본 다음날에는 바티칸 궁과 성베드로 대성당을 봅니다. 그러면 그 엄청난 규모와 예술성에 넋을 잃게 되지만 그 화려함의 이면에는 성당 건축헌금을 위해 여호와 하나님의 뜻과 비전을 팔고 면죄부를 팔았던 모습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외적인 것에 현혹되어 영안이 닫혀서는 안 됩니다. 영안이 닫히면 축복의 문도 닫힙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축복은 ‘베드로 성당의 신앙’에 있지 않고 ‘카타콤의 신앙’에 있습니다.
3. 문제를 따라 살지 말아야 합니다.
살면서 문제를 만날 때가 있습니다. 그때 문제만 바라보지 말고 그 문제를 통해 여호와 하나님의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역사가 있을 것이라고 믿어야 합니다. 문제가 생기면 “응답이 생긴다!”고 생각하고, 환난이 오면 “축복이 온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중세기 유명한 성자 한 분은 늘 “여호와 하나님의 뜻은 선하다. ”는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어느 날, 그가 한 동네에 전도차 갔는데 동네 사람들이 그를 동네 밖으로 내쫓았습니다. 할 수 없이 산골짜기를 찾아 여장을 풀고 기도한 후, 불을 켜서 성경을 보려고 하는데 갑자기 바람이 불어 불이 꺼졌습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의 뜻은 선하시다” 하고 그냥 잠자리에 들었는데 조금 후에 사자가 와서 자기가 타고 온 나귀를 잡아갔습니다. 그래도 그는 고백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뜻은 선하시다. ”
아침이 되었습니다. 다시 동네로 들어가니까 동네가 마적단에 의해 완전히 폐허가 되어 있었습니다. 결국 동네에서 자지 않아서 그는 화를 면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바람이 불어 불이 꺼진 것도, 맹수가 와서 나귀를 잡아간 것도 결국 마적단에게 발각되지 않게 하시려는 여호와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그때 수도사는 “여호와 하나님의 뜻은 정말 선하시구나!”하고 고백했다고 합니다.
위대한 믿음의 선배들은 고난을 받을 때마다 항상 생각했습니다. “여기에는 분명 여호와 하나님의 뜻이 있을 거야. 묵묵히 충성하자!” 그처럼 우리가 문제를 만나도 그 문제에 몰입하지 않고 주님을 바라보고 나가면 여호와 하나님이 반드시 은혜와 축복을 내려주실 것입니다.
주님을 따라 산다는 것의 의미
우리는 욕심, 외형, 그리고 문제를 따라 살지 말고 오직 주님만 따라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을 따라 산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슨 의미일까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이 시간에는 4가지만 함께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1. 믿음을 가지고 살라는 말입니다.
사람이 얼마나 약한 존재인지 모릅니다. 강한 사람도 알고 보면 약합니다. 옛날 권투 선수 중 알리는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쏘겠다”고 떠벌였습니다. 나중에 그가 고백하기를 시합을 할 때마다 두려워서 그렇게 떠벌였다고 합니다. 사람이 얼마나 쉽게 무너지는지 모릅니다.
결혼 9년 만에 임신한 임산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임신하면서 허약증세로 시달리며 가끔 헛것을 보았습니다. 그때 기도해준다고 찾아온 전도사가 산모에게 귀신이 붙었다고 했습니다. 그 후 11년 동안 수없는 귀신 쫓기 의식을 행하면서 귀신 공포증에 시달려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성경 말씀을 보면서 믿음이 생겼습니다. “귀신이 찾아와 죽이겠다면 죽이라고 하지! 나는 주님만 바라볼 거야!” 그 한 마디 고백으로 11년 만에 귀신 공포증에서 해방되었다고 합니다.
말 한 마디가 이렇게 사람을 죽일 수 있고, 말씀 한 마디에 대한 확신이 이렇게 사람을 살릴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믿음의 확신입니다. 우리는 어떤 시련이 있고, 사단의 어떤 공격이 있어도 나를 사랑하는 주님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2. 은혜를 추구하며 살라는 말입니다.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은혜입니다.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한시도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아무리 대단한 존재도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그날로 끝장납니다.
저는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안 된다는 것과 관련해서 아직도 잊지 못하는 일이 있습니다. 1980년 대학 예비고사 치기 바로 전날, 방송과 주위 사람들이 일찍 자라고 해서 저는 9시도 되기 전에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그런데 매일 새벽 1-2시에 자다가 일찍 자려고 하니까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11시쯤 되니 불안했습니다. 불안하니까 더 잠이 안 왔습니다. 자정이 넘어 1시쯤 되니까 미칠 것만 같았습니다. 미칠 것 같으니까 더 잠이 안 왔습니다.
새벽 4시쯤 되니까 신경과민에 환청 현상까지 생겼습니다. 이웃집에서 라디오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습니다. 온 식구가 다 깼고 어머님이 이웃집 문을 두드리며 “라디오 좀 끄라!”고 했습니다. 이웃집에서 자다가 일어나 황당하다는 듯이 “누가 라디오를 틀고 있느냐 다 자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하다가 새벽 5시 20분쯤 되어서야 깜빡 잠이 들었고, 50분만 자고 일어나야 했습니다.
그날 고통과 짜증과 졸음이 섞인 상태에서 시험을 치르고 난 후에 얼마나 허무했는지 모릅니다. 생전 불면증이 없다가 하필 그날 그런 일이 벌어지니 사람 무너지는 것은 순식간이었습니다. 사람이 아무리 준비를 잘해도 중요한 것은 여호와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여호와 하나님이 축복해 주셔야 축복 받을 수 있고 여호와 하나님이 길을 열어주셔야 길이 열릴 것입니다.
3. 주님만 바라보며 살라는 말입니다.
사람이 주님만 바라보며 살 때 나타나는 표시가 있습니다. 그것은 화사한 얼굴입니다. 가끔 신앙생활 하면서 표정이 전반적으로 어두운 분들이 있습니다. 이유는 하나뿐입니다. 영적인 신랑을 바라보지 않고 엉뚱한 것을 신랑으로 삼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오직 주님만 바라보고 살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환한 얼굴을 주실 것입니다.
어떤 처녀가 결혼하기 전에는 아주 초라했는데 결혼 4년 만에 교회에 다시 오니 얼마나 훤해지고 예뻐졌는지 교인들이 다 감탄했습니다. 그것을 보고 한 사람이 말했습니다. “신랑 잘 만나서 그래!” 신랑 잘 만나면 외모가 조금 못해도 환하게 되지만, 신랑 잘못 만나면 아무리 잘생겨도 기미가 사라질 날이 없습니다.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날, 한 부인이 남편을 위해 열심히 음식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남편이 그 모습이 사랑스러워서 가까이 가서 “여보!”하고 불렀습니다. 그때 부인이 쳐다보지도 않고 “나 바빠요! 저리 가세요!” 한다면 무엇인가 중요한 것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남편 자체를 받아주는 것’이 ‘남편을 위해 식사를 준비하는 것’보다 더 중요합니다. 영적으로도 똑 같습니다.
주님을 위해 일하겠다고 하면서 예배와 기도를 소홀히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주님께 더 드리기 위해 돈을 벌겠다고 하다가 예배도 빼먹고, 기도도 멀리하고, 봉사도 멀리한다면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이 결코 기뻐하시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무엇보다 여호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예배와 기도의 자리를 제일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예배와 기도가 없으면 꽃이 꺾인 것처럼 처음에는 괜찮은 것 같아도 그 영혼은 점차 시들고 축복의 문도 점차 닫히게 될 것입니다.
4. 주님의 십자가를 지라는 말입니다.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영광의 길을 따른다”는 말이 아니라 “십자가의 길을 따른다”는 말입니다. 마태복음 16장 24절 말씀을 보면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아무든지 나를 따르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존재는 어디에 가든지 주님을 위해 십자가를 지는 사람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십자가를 회피하고 우리의 영혼이 살고 축복 받는 길은 결코 없습니다. 축복을 원하면 내게 주어진 십자가를 잘 져야 합니다. 새의 날개가 무겁지만 잘라버리면 날지 못하고, 베의 돛도 무겁지만 잘라버리면 항해를 할 수 없고, 시계추도 무겁다고 떼버리면 시계가 돌아가지 않듯이 성도가 십자가가 무겁다고 던져버리면 그날로 축복의 문도 닫히게 될 것입니다.
신앙생활의 정수는 십자가입니다. 요새 신령하다는 분들이 많습니다. 환상을 보고, 천국을 보고, 예언을 하고, 신유의 은사가 있다고 합니다. 그런 분들이 최고의 성도일까요 아닙니다. 최고의 성도는 주님을 위해 십자가를 지는 성도입니다. 돈이 없고, 학력이 없고, 외모가 없어도 십자가를 지는 자는 어디에 가든지 인정받고 존경받습니다. 진정한 축복은 십자가의 희생 속에 있습니다.
가끔 아무 보람도 없이 삶이 허무하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때 제일 먼저 할 일은 십자가를 지는 일입니다. 보람이란 섬기는 삶의 대가로 얻어진 정신적 보상이지만 공허는 자기 안일과 정욕을 위해 살다가 생긴 삶의 후유증입니다. 그러므로 삶에서 보람을 느낀다는 것은 십자가를 지고 존귀하게 살고 있다는 표시이고, 삶에서 공허를 느낀다는 것은 십자가를 외면하고 비천하게 살고 있다는 표시입니다.
흔히 여자는 세월이 갈수록 값이 떨어지고, 어머니는 세월이 갈수록 값이 올라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어머니에게는 십자가의 헌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희생해서 남에게 베풀고 살면 삶은 점차 고귀하게 되고, 인생의 행복도 찾아오게 될 것입니다. 십자가는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기적의 불씨입니다.
어느 날, 어떤 가정에 갈등이 생겼습니다. 남편이 교회에 나가는 것을 반대한 것입니다. 너무 마음이 괴로워서 40일 작정 새벽기도를 했습니다. 그리고 말씀 듣고 기도하면서 십자가 외에는 길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때부터 최선을 다해 남편을 섬겨주었습니다. 그리고 40일 새벽기도가 끝나는 날 저녁에 진지한 대화 기회가 생겨서 말했습니다. “여보! 지난 10년간 당신에게 항상 고마웠어요. 내가 좀더 잘했어야 하는데…” 그러니까 남편이 “왜 이래! 갑자기!” 하고 핀잔을 주었지만 만족하는 기색이 역력했습니다.
조금 더 대화를 하다가 이 아내가 자기 마음을 털어놓았습니다. “여보! 당신을 정말 사랑하지만 나는 믿음 생활 하지 않으면 살 수 없어요. 이제는 당신이 좀 내 신앙생활을 도와주세요. ” 그러자 남편이 “요즘처럼 살림 잘하려면 다녀!”라고 말하더랍니다. 그렇게 해방된 후에 더욱 기쁜 마음으로 지내니까 얼마 후에 남편마저 교회에 나오게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따라 십자가를 지면 놀라운 일이 벌어질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를 고생 시킬 목적으로 우리에게 십자가를 지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축복하시려고 십자가를 지라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잘 지면 주님은 우리의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보다 더 넘치도록 채워주신다고 성경은 약속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앞에 어떤 일이 생길지 알 수 없고, 사실상 알 필요도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십자가를 지고 헌신하는 마음으로 살면 여호와 하나님의 우리의 꿈과 비전과 미래를 붙들어주시고, 가장 복된 자리로 우리를 이끌어주실 것 하나만 알고 살면 됩니다. 항상 십자가를 잘 지고 승리하는 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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