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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 십자가상의 일곱 말씀(2)

본문

이 시간에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하셨던 말씀을 함께 묵상하면서 우리 함께 감사하면서 은혜 받기 원합니다. 이 일곱 말씀을 흔히 가상 칠언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는 그 일조차도 어려운데 십자가 위에서 죄인을 위해 기도하시고 축복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기록에 의하면 로마황제가 식사하는 자리에서 십자가 얘기를 꺼냈다가 그 자리에서 처형당한 신하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로마의 사상가 키케로에 의하면 “십자가는 로마 시민의 머리에서 생각조차 되어서도 안 된다”고 했습니다. 그만큼 두렵고 생각하기조차 싫은 것이 십자가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죄인들을 위해서 그 험한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에 오르셨고 또 십자가에서 6시간 동안 온갖 고통을 겪으셨을 뿐 아니라 거기서 죄인들을 축복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십자가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을 봅니다.
그럼 주님은 십자가상에서 무슨 말을 하셨을까요
1. 십자가상에서 원수들을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
눅23:34에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고 기도하셨습니다.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는 원수들을 위한 용서의 기도였습니다. 우리 주님은 “네 원수를 사랑하라” 하신 그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최고의 사랑은 남을 위해서 죽는 것이고 또 최고의 사랑은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사랑입니다. 우리는 이 사랑을 받았습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을 두 번 십자가에 욕 보였다는 말씀에서 우리가 한 번씩은 욕 보였음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이 기도는 군병들에 대한 기도만이 아니라 우리를 위한 기도입니다.
2. 십자가상에서 강도에게 낙원을 약속하셨습니다.
눅23:43에 보면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좌우편에 강도 둘이 있었는데 한 강도는 예수님을 불신하고 모욕했지만 한 강도는 죄를 뉘우치고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는 부탁을 드렸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이렇게 주님은 마지막까지 객관적 구속사역 만이 아니라 주관적으로도 죽어가는 한 개인의 영혼을 구원하셨습니다.
우리들도 마지막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감당해야 하겠습니다. 처음에 예수님을 함께 비방하던 강도가 뉘우치고 비방하던 다른 강도를 꾸짖으며 예수님의 옮음을 칭찬한(눅23:41) 말을 종합해 보면 십자가상에서 주님의 행실의 감화력이 얼마나 컸는가를 깨닫게 합니다. 우리도 부르시는 그 날까지 어떤 환경에 처하든지 감동스럽게 사명을 감당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3. 십자가상에서 제자에게 어머니를 부탁하셨습니다.
요19:26-27 “예수께서 그 모친과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섰는 것을 보시고 그 모친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 했습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기독교에는 효가 없다는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제사문제를 가지고 기독교에 효가 없다고 폄하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보세요, 십계명의 인간에 대한 계명의 첫 계명이 효에 대한 계명이요, 우리 주님께서는 죽으시면서도 살아있는 어머니를 생각하신 예수님이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에서까지 어머니를 생각하셨음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제자가 모셨다는 것은 우리에게 나의 혈친이 아닐찌라도 부모로 모시고 효도해야 함을 교훈해 줍니다.
4. 주님은 십자가에서 여호와 하나님께 호소하셨습니다.
마27:46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여호와 하나님, 나의 여호와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
마태복음을 보면 정오부터 오후 3시까지는 온 땅에 어두움이 임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여호와 하나님에게 철저하게 외면하시는 모습입니다. 그리고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 그 뜻은 ‘나의 여호와 하나님, 나의 여호와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외침 역시 버림받아야 할 죄인들을 대신하여 아버지께 철저하게 버림받으시는 외침입니다.
왜 버림을 당하셨습니까 합1:13에 보면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참아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참아 보지 못하시거늘” 그랬고, 사53:6에 보면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했고, 그리고 고후5:21에 “여호와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셨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악과 죄를 차마 볼 수 없는 공의의 여호와 하나님은 그 몇 시간 동안 등을 돌리신 것입니다.
5. 십자가상에서 육신적인 고통을 말씀하셨습니다.
요19:28에 “가라사대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생각해 보십시오. 6시간을 나무위에 달려 계셨으니 얼마나 심장이 뛰고 내장이 열이 나고 또 피와 땀이 빠졌겠습니까 우리는 이 사실을 그대로 믿습니다. 우리는 초대교회의 이단이었던 가현설을 정죄합니다. 가현설이란 실제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 아니라 그렇게 보여졌다고 하는 환상설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실제로 고난 받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구주가 되실 수 없습니다.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는 가짜가 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6.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승리의 개선가를 부르셨습니다.
요19:30에 “다 이루었다”고 하셨습니다.
이 외마디 속에 성경에 예언했듯 모든 구원의 성취가 이루어졌음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예수님만 믿으면 여호와 하나님 앞에 다 나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영국의 어느 전도자가 전도 집회를 막 끝내고 시설을 철거하고 있었을 때 한 젊은이가 ‘목사님, 제가 구원을 받으려면 무슨 일을 해야 하겠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이때 목사님은 ‘젊은이 한발 늦었네요’ ‘아니 늦었다니요 집회가 끝난 다음에 와서 늦었다는 것입니까’ 그러자 목사님은 ‘자네는 지금 구원받기 위해서는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그렇다면 이미 2천년 늦은 셈이네, 구원의 역사는 이미 십자가에 완성 되었으니 말일세’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구원받기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것도 없습니다. 농사 지어 도정하여 밥 해 놓은 것 이제 수저 가지고 먹으면 됩니다. 이처럼 십자가에서 이루어 놓으신 구원의 은총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모두 구원받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믿음마저도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을 알 때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맡기신 사명만큼은 예수님처럼 다 이루었다고 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마지막. 주님은 영혼을 부탁하시는 기도를 하셨습니다.
눅23:46에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운명하시다” 하셨습니다.
이처럼 우리도 마지막 해야 할 기도가 여호와 하나님께 생명을 맡기는 기도여야 합니다. 사도행전 7장을 스데반 집사도 돌에 맞아 죽으면서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라고 했습니다. 다른 사람은 구원하고 내 영혼을 구원하지 못하면 무엇이 유익하겠습니까 온전히 아버지께 생명 맡긴 구원 받은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시간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 위에서까지 우리를 축복하신 주님의 크신 사랑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모두 그 사랑에 감격하여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성숙한 믿음에 서시는 사랑하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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