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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산자의 부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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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역사 이래 최대의 문제는 죽음의 문제입니다. 지금도 가장 큰 문제는 죽음의 문제입니다. 사람이 죽는다는 것처럼 슬픈 것이 없고, 죽는다는 것처럼 비참한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죽는다고 할 때 모두 다 인생의 허무와 절망감을 느끼게 됩니다. 죽는다고 하는 것은 인간에게 가장 엄숙한 사실입니다. 어떤 사람도 죽는 것을 소홀히 여기는 사람은 없습니다.
얼마 전에 한 교도관이 저에게 이런 얘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사형을 받으러 가는 한 죄수가 가는 도중에 조금 파인 길이 있는 것을 모르고 가다가 발을 헛디뎠습니다. 그때 그 사형수가 "어이쿠 하마터면 죽을뻔 했네. " 그러더랍니다.
사람이 죽으러 가면서도 죽음이 얼마나 싫으면 자기도 모르게 '하마터면 죽을뻔 했다'라고 했겠습니까 공자나 석가나 모두 무덤에 들어가서 한줌의 흙이 되어 역사에서 사라졌습니다. 무덤에 갇혔다가 살아나온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한때 많은 교주들이 자기는 죽지 않는다고 호언장담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우매하게 착취해갔던 신흥의 이단종파들이 결국 헛되이 죽음으로 끝났던 것입니다.
그런데 역사상 전무하게 무덤 문을 열고 살아나신 분이 있으니 그 분이 바로 예수님이셨습니다. 이것은 역사에 유일한 일이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무덤으로 끝났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무덤에 들어가신 지 삼일만에 무덤 문을 여시고 일어나셨습니다.
산 자의 소망
역사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는 죽은 자요, 하나는 산 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역사 속의 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향해서 나아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역사의 현장에서 놀라운 사실을 우리는 하나 알게 됩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살아계시면서 종종 우리에게 말씀하신 그 말씀입니다. '나는 십자가에 죽을 것이다. 그리고 반드시 삼일만에 살아날 것이다. '
이 말씀을 예수님은 종종 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따르던 믿음 좋았던 여인들도 그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제자들도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무덤으로 간 것입니다. 삼일만에 살아난다는 사실을 잊은채 무덤에 가서 예수님의 몸에 향품을 바르기 위해서 달려갔습니다. 평소에 사랑했던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향해서 눈물을 흘리며 달려갔습니다.
당시에 유대 권력층들은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예수를 장사지내고 나면 제자들이 시체를 훔쳐갈지 모른다. 예수가 다시 산다고 말했으니까 제자들이 시체를 훔치고 나서 예수가 부활했다고 소문을 내면 온통 나라가 소동할 것이니 시체를 훔쳐가지 못하도록 무덤 문을 지켜야 한다. ' 그래서 빌라도에게 무덤 문을 굳게 지키도록 명령해서 병사들이 무덤 문을 굳게 지키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인들이 무덤에 도착했을 때 무덤을 가로막은 돌이 굴러져 나갔고 무덤 문이 열려 있었습니다. 여인들이 의아해 하면서 무덤 속으로 들어갈 때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천사가 곁에 서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그는 여기에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
이 말씀은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 다 기록되어 있는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무덤이 현주소가 아니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죽으면 무덤에 누워서 참배객을 맞이하고, 자녀들을 맞이하고 무덤에 호화스럽게 비석을 세우고 그 무덤이 땅에서 존재하는 한 거기 누워 현주소를 삼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살아나셨기에 무덤이 그의 현주소가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역사상에 존재하는 살아계신 주님으로 친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막 14:28)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그의 공생애 사역을 이루었으며 '갈릴리에 먼저 가서 거기에서 일하게 될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무덤에 달려갔던 여인들에게 주었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이 말씀은 당시에 그 여인들에게 한 말이면서 지금 우리에게도 들려오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찾으러 온 여인들에게 '왜 죽은 예수를 찾느냐 산 예수를 만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죽은 예수를 만날 수 없습니다. 주님은 살아나셨기 때문입니다. 죽은 예수를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은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변함이 없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죽은 예수를 만날 수 없습니다. 살아있는 예수를 만나야 합니다. 죽은 예수를 찾는 사람들은 슬퍼하고 무덤에 갔습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어찌하여 슬퍼하느냐 너희가 찾는 예수는 살아나셨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이제 주님의 음성을 들읍시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곰곰이 생각해보면 살아계신 예수님은 무덤을 현주소로 계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심령을 현주소로 삼고 여기 와 있습니다. 주님은 2천년 전 유대땅에 계신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지금 성령으로 우리 안에 오셔서 우리 안에 살아계시면서 우리의 심령을 현주소로 삼고 나를 성전 삼아 여기 계십니다. 그러기에 주님은 죽은 자의 주님이 아니요, 산자의 주님이십니다.
죽은 자는 살아나지 못합니다. 산 자만이 살아납니다. 마치 잠들 때 산 자는 다음날 아침에 깨어납니다. 살아있기 때문에 깨어납니다. 죽은 자는 깨어나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친히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죽은 자가 아니고 산자니라" 우리 모든 성도들은 산 자입니다. 그래서 산 자만이 살아계신 여호와 하나님을 만날 수 있고 살아계신 여호와 하나님은 산 자인 우리를 만나주십니다. 우리는 죽은 자가 아닙니다. 산 자입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요 11:25-26)
수많은 구약의 선진들은 무덤 가운데 누워있지만 주님 재림하시는 날 일어날 것이고 지금 살아서 믿는 우리는 영원히 죽지 않는 산 자가 됩니다. 내가 무덤 속에 들어가도 죽은 자가 아니고 산 자로 잠든 것입니다. 그래서 영원히 살리라는 말은 영원히 산 자로서의 생명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우리 자신에 대해서 실망하고, 좌절하고, 낙심하는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찾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안믿는 사람들을 죽은 자라고 말하고 우리를 산 자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산 자들이 자기 존재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고 있기 때문에 좌절하고, 실망하고, 낙심하는 것입니다.
산 자의 영광
사도 바울은 친히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고전 15:19). 이 말은 다른 말로 말하면 너희가 산 자로서 살지 아니하면 더욱 불쌍한 자라는 말입니다.
분명히 우리는 우리 자신을 산 자에서 자기를 봐야지 죽은 자들 속에서 자기 존재를 봐서는 안됩니다. '왜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우리는 이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우리의 존재를 언제나 주 안에서, 교회 안에서, 저 천국의 생명록에서 찾아야 합니다.
인간의 세계는 천차만별입니다. 부자와 가난한 자로 구별할 수 있습니다. 세상적인 지위도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날 우리에게 주님께서 '네가 산 자냐 죽은 자냐' 이 질문으로 끝납니다. 어떤 분은 10년만 젊었으면 좋겠다고 아쉬워합니다. 이것은 아직도 자기 존재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몸은 아무리 오래 산다고 한들, 10년 젊어진다고 한들 이것으로는 여전히 그것 뿐입니다.
우리는 산 자의 의식을 가지고 어떤 외모에 구애받지 않아야 합니다. 인생의 최고의 과제는 사는 것이요, 오늘 자기 존재에 대하여 죽은 자에게서 구별하는 것입니다. 죽은 자를 부러워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부자집 사람으로 죽을 때 캐틀락 자동차를 타고 공동묘지로 갑니다. 이 사람을 보면서 '나도 지금 죽어서 저 사람처럼 가고 싶다. ' 하는 사람 있습니까 하나도 없습니다. 어떻게든지 살아있는 것이 좋은 것입니다. 무덤을 크게 만들면 뭐하고 장례차가 호화스러우면 뭐합니까 다 부질없는 짓입니다. 안믿는 사람은 죽은 자입니다. 죽은 자를 보면서 불쌍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다윗의 자손 예수의 부활은 찬양하면서도 자기는 여전히 죽은 자로 탄식하며 허무한 것에 종노릇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죽은 자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죽은 자는 여호와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죽은 자의 여호와 하나님이 아니고 산 자의 여호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산 자만이 만날 수 있습니다. '산 자들이여 어찌하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네 존재를 찾고 있느냐' 거기에서 자기를 보지 말라는 것입니다.
산 자에게는 분명히 그의 삶에 가치가 있습니다. 산 자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았기 때문에 내가 산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갈 2:20)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았으므로 그리스도의 영광으로 살며, 그리스도의 가치로 살며,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사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살아계신 주로 내 안에 계시기 때문에 나는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어야 합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로 우리의 생명을 얻었다면 사는 목적이 달라져야 합니다. 산 자는 위하여 살 대상이 죽은 자들과는 다릅니다. 죽은 자는 돈벌기 위해서 살고 세상에서 뭘 얻기 위해서 산다면 우리는 살아계신, 나의 주인 되신 주님을 위하여 사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내가 산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입니다.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을 위하여 사는 줄 믿습니다.
주일학교 다니는 아이가 있었는데 이 아이가 공부할 때마다 기도하고 늘 전도하면서 믿음으로 살아가니까 예수 믿는 사람을 몹시 싫어하는 담임선생이 하루는 이 아이에게 물었습니다. "네가 믿는 천당이 어디 있는지 나에게 알려 주려므나"라고 말했습니다. 그때 그 아이가 "선생님, 제가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선생님 가는 길로 계속 가면 지옥이 있고 제가 가는 길로 계속 되면 천국이 있습니다. "라고 했다고 합니다.
산 자의 부활은 내가 살아있을 때 부활의 영성을 많이 가져야 부활될 때 영광스러운 존재로 부활됩니다.
달을 볼 때 실날같은 초생달이 있고, 반달이 있고, 보름달이 있습니다. 이것은 태양의 빛을 적게 받으면 초생달이 되고, 반절 받으면 반달이 되고, 온전히 받으면 보름달이 됩니다. 우리가 은혜를 온전히 받으면 보름달 신자가 되고, 반절만 받으면 반달 신자가 되고, 조금 받으면 초생달 신자가 됩니다. 주일날 겨우 와서 예배드리는 사람은 초생달 신자가 되고, 주님도 좋고 세상도 좋은 사람은 반달 신자가 되고, ' 벽에도 주여, 아침에도 주여, 밤에 잠들 때도 주여' 하는 사람은 보름달 신자처럼 되는 줄 믿습니다.
우리가 흠없고 점없이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부활되는 그 날을 사모한다면 내가 육체를 가지고 있는 동안 주님의 은혜를 많이 담으시기 바랍니다.
산 자의 행복
우리가 곤충을 보면 곤충이 유충 시절에는 땅에 기어다니면서 땅의 버러지를 먹고 삽니다. 그러던 어느날 나무 위에 집을 짓고 잠을 잡니다. 잠에서 허물을 벗고 깨어날 때 날개를 하나 답니다. 날개를 단 곤충이 옛날을 잊은 듯 창공을 날면서 하늘의 이슬을 먹고 꽃의 향기를 맡으며 꿀을 먹는 존재로 바꾸어집니다.
우리의 삶이 믿기 전에는 세상에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면서 세상을 헤매는 버러지처럼 살던 우리들이 교회라고 하는 집속에 들어와서 나의 과거의 허물을 벗고 신앙의 날개를 달아주니 "나같은 죄인이 용서함 받아서 주앞에 옳다함 얻음은 내 공로 아니라 어린양 예수의 그 피로 속죄함 얻었네. " 하고 찬송을 합니다.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의 꿀을 먹고 하늘의 신령한 이슬을 마시면서 자유합니다. 내가 세상의 어떤 형편에도 매이지 아니하고 자유하면서 노래하며 사는 존재가 부활신앙을 가진 자인 줄 믿습니다. 죽은 자는 땅에 기어 다니는 자입니다. 산 자는 하늘에서 자유하는 자입니다.
우리는 불신자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내가 여호와 하나님을 몰랐더라면 저렇게 되었을 것인데 내가 여호와 하나님을 믿으므로 말미암아 이 자유를 얻었네. ' 이런 감격의 행복을 누리는 줄 믿습니다.
월남 이상재 선생이 독립운동을 하면서 일본 사람들을 비판하면서 꿋꿋하게 살아가니까 '어떻게 하면 저 사람을 매수해서 독립운동을 못하게 할까' 하다가 총독부의 지시를 받고 신문 기자가 돈을 한 뭉치 들고 이상재 선생을 찾아가서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선생님, 이 돈으로 시골에서 편히 사시지요" 그러자 이상재 선생은 "나는 돈으로 사는 자가 아니다. 나는 말씀으로 산다. "고 대답하셨습니다. "인도의 간디는 백세를 산다고 했고, 영국의 누구는 얼마 동안을 산다고 장담했는데 선생님께서는 몇 살이나 사시겠습니까" 그때 월남 이상재 선생은 젊은 기자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다보며 "이 사람아, 사람이 한 번 났으면 영원히 살지 죽긴 왜 죽나"라고 하셨습니다. "진시황은 불로불사약을 구했으나 결국 죽었는데 무슨 불사약이라도 잡수셨습니까" 하고 기자가 다시 물으니 "나는 먹었지. 너희 천황이 먹지 못한 것을 내가 먹었지, 영생 불사약을 먹었기에 나는 죽지 않을 것이며 일본이 망하고 군국주의자들이 죽는 것을 다 볼거야"라고 대답하셨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하고 묻자 선생은 그 옆에 있는 성경을 가리키며 "이것이 예수님의 말씀이다. 나는 이 말씀으로 산다"고 대답하셨다 합니다. 성도 여러분도 이렇게 산 자의 신앙으로 영원을 품에 안고 사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분명히 내 존재에 대하여 그런 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자기 존재가 분명한 의식을 가질 때 우리는 이 세상에서 어떤 경우에도 좌절하지 않습니다. 실망하지 않습니다. 기죽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도 죽는다고 하면 기가 죽습니다. 그러나 산 자들은 기가 죽지 않습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교인들은 사형장에 끌려가면서도 찬송하고, 매 맞으면서도 기도하고, 자기를 욕하는 자를 축복해주고, 죽으면서도 웃었습니다. 그러니까 저들을 죽였던 네로와 그의 무리들이 묻습니다. "저들은 어찌하여 죽으면서도 웃는가" "저들은 죽어도 천국에 가기 때문에 웃고 가는 것입니다. "
여자들이 미장원에 가서 미용할 때 3단계 원리가 있습니다. 가면 얼굴을 거울에 비춰줍니다. 그 다음에 세수를 합니다. 그 다음에 맛사지를 합니다.
교회는 신령한 미장원입니다. 미용사가 목사입니다. 일주일동안 머리가 흩어지고 온갖 더러워진 성도들을 교회에 모셔와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의 거울로 비춥니다. 그러면 그것을 보면서 '아, 여기가 더럽구나!' 하면서 자기의 더러움을 봅니다. 우리의 더러움을 거울로 보면 주님께서 십자가의 보혈로 다 씻어주십니다. '나의 죄를 씻기는 예수의 피밖에 없네. ' 그 다음에 성령께서 오셔서 우리의 심령에 기름을 부어 아름답게 단장하십니다. 왜 그렇게 하는 줄 아십니까 우리의 신랑으로 오실 주님을 맞이하게 하기 위해서, 내가 영화로운 몸으로 부활될 때 주님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매일같이 단장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더러워진 심령들이 이 은혜 가운데서 산 자로 아름답게 단장되어 주님이 오시는 날 우리가 살아 일어날 때 아름다운 모습으로, 흠없고 점없이 깨끗한 주님의 신부로 단장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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