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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부활 신앙

본문

우리가 믿고 있는 기독교라고 하는 집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네개의 기둥에 의해서 세워진 종교입니다.
그 첫째 기둥이, 여호와 하나님이 친히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유대 땅 베들레헴 마굿간에서 태어나신 탄생의 기둥입니다.
 둘째는, 갈보리 산 언덕에서 "엘리 엘리 라마 사막다니" 즉, "여호와 하나님 여호와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 하시면서 죄 없으신 몸이 저와 여러분들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의 비참한 형극을 받고 돌아가신 속죄의 기둥입니다.
세째는, 장사지낸지 사흘 만에 무거운 무덤의 돌문을 굴리시고 생명의 첫 열매로 부활하신 부활의 기둥입니다.
네째는, 아직 이루어지지 아니한 만왕의 왕으로 심판의 권세를 가지시고 천군천사의 나팔 소리와 함께 이 땅에 재림할 기둥입니다.
그런데 이 네 개의 기둥 가운데서 제일 중심을 이루고 있는 기둥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부활의 기둥입니다. 이 부활의 기둥에 다른 기둥들이 연결되어 있을 때, 기독교라는 집은 튼튼히 서 있을 수 있습니다. 아름답게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기독교라는 집으로서의 사명을 감당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부활의 기둥을 베어 내 버리고 딴 기둥만을 가지고서는 기독교란 집이 설 수가 없습니다. 설 수 있다고 하여도 영생의 축복이 없는 현재적인 삶으로 끝나버리고 말 것이요, 영생이 없는 죽음으로 막을 내리는 딴 종교와 같이 되어 버릴 것이고, 소망이 없는 절망과 낙담과 비애로 끝나 버렸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의 신앙은 우리가 믿고 있는 기독교의 핵심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전 15장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으면, 1) 우리의 전파하는 것이 헛것이요, 2) 믿음도 헛것이며 3)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될 것이며 4) 모든 사람 가운데서 우리가 제일 불쌍한 자라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부활을 우리 몸에 비교하면, 심장과도 같습니다. 우리 몸에 수 많은 지체가 다 있어야 합니다. 눈이 하나 없어도 생명에는 지장이 없습니다. 손이나 발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심장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심장을 떼어 버리고서는 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심장은 우리 몸에 있어 가장 중요한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기독교에 있어서 부활의 신앙은 바로 우리 몸의 심장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기독교인이 신앙생활을 해 나갈 때, 제일 중요한 것이 부활신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활을 모르거나 믿지 않거나, 부활과 관계없이 신앙생활하는 사람은 사단의 밥이 되고 말 것입니다. 부활을 이룩하지 못하면 거짓 선지자가 되고, 교회를 망치는 사람이 되고, 교회를 헐뜯는 사람, 교회에 적 그리스도의 행위를 하게 되고 가룟유다 같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에 대한 가장 중대한 시금석은 부활관을 어떻게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신앙생활하는 사람에게는 부활의 신앙이 확고한지 아닌지를 알아보아야 합니다. 부활신앙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부활을 모르는 십자가는 거짓입니다. 부활을 모르고 장사지낸다는 것도 다 거짓입니다. 또 부활도 모르는 세례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따라서 예수 믿는 사람이 제대로 믿는지 아닌지를 알려면 부활관을 어떻게 가지고 있는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말세지말에 제일 흉칙한 거짓 선지자들과 이단들은 부활을 가로 막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을 들으시는 여러분들은 부활에 대한 온전한 성서적인 분명한 진리의 지식을 가져서 올바른 신앙을 가지시기를 축원합니다.
이 부활의 신앙은 최후의 교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부활의 신앙이 우리 기독교의 마지막이고 그 보다 더 귀한 교훈은 없습니다. 부활이라는 것은 한마디로 말해서 變化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특별히 "化"자가 중요합니다. 여기서 변화한다는 것은 세가지가 변화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첫째는, 과학적인 변화보다도 신령한 변화를 말합니다. 부활은 신령한 변화입니다. 신령한 변화는 과거, 현재, 미래가 다 들어 있습니다. 신령한 변화를 가져오지 못한 사람은 예수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또 신령한 변화란, 없어지지 않는 것으로 변화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늘나라 것으로 변화하는 것을 말합니다.
 둘째는, 영광의 변화를 말합니다. 이 영광은 면류관을 의미합니다. 생명의 면류관, 의의 면류관, 축복의 면류관, 상급의 면류관, 장자의 면류관입니다. 면류관이 주어지지 않는 변화는 할 필요가 없습니다.
 셋째는, 성장의 변화입니다. 이 변화는 여호와 하나님의 형상과 여호와 하나님의 성품을 다 찾아서 성장하는 것입니다. 또 여호와 하나님의 모양을 따라서 성장하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예수님 자신이 부활하시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나를 부활시키시기 위해서 부활의 첫열매가 되셨습니다. 이렇게도 중요한 부활을 모르거나 관심이 없다면 큰일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 교회에 다니는 이유는 부활 때문에 교회를 다니고 예수님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배하는 시간에, 기도하는 시간에, 찬송하는 시간에 부활의 역사가 일어나야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부활을 꼭 믿어야 되는 것이냐 부활을 생각하지 않고 교회 다녀도 괜찮다고 합니다. 부활은 나중 문제고, 우선 예배당 잘 다니면 복받고 재미있고 즐겁고 유쾌하고 기쁘다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잘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이런 사람은 기독교인이 아니라 그저 종교생활을 하는 것 뿐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런 사람은 부활에 대해 전혀 상식이 없는 사람입니다. 우리 인생의 종국은 부활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어떠한 부활체로 예수님 앞에 나올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부활을 위해서 나를 찾아 오시고 나를 위해서 고난을 당하시고 죽으시고 부활 하시고 승천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나를 기다리고 계시는 신랑되신 예수님을 영접하는 부활이 이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아무리 신앙 생활 잘했다고 해도 부활이 안되면 주님을 만날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미련한 것이 지혜롭게 변화가 되지 않으면 아무리 주님을 만나는데까지 갔었다 할지라도 주님을 만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부활이 안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기름을 잘 준비해서 신랑 되시는 예수님이 오실 때에 주님을 맞아들일 수 있었던 슬기로운 다섯처녀처럼 우리는 준비를 잘하는 신앙인들이 되어야 합니다. 부활은 내세의 부활과 현세의 부활로 나눌 수 있습니다. 문제는 현세의 부활을 잘 해야 내세의 부활을 이룰 수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현세에서 변화하지 않고 내세의 부활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현세에 막 살아놓고, 열매도 하나도 맺지 못한다면 내세의 부활을 가져올수 없습니다.
이렇게 부활이 중대한 것인데 부활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부활을 안 믿으니까 주일도 빠지고 또 빠져도 마음이 편한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을 믿는 사람은 절대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부활 신앙은 기독교에서 첫째가는 신앙입니다. 부활을 믿는 사람은 신앙 생활의 모든 것에 철저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합하여 죽었는데 왜 죽었는가 하면 부활의 씨를 내 속에 주시기 위해서 주님도 죽으시고 나도 죽이신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내속에 생명의 씨가 되시는 그리스도가 사시게 되어진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산 것이 아니라 내 속에 사신 이가 예수 그리스도가 되시는 것입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가 사셨기 때문에 내가 산것보다는 장수도 할 것이고, 성공과 승리와 성취하실 주님이 나를 위해 돌아가셨습니다. 주님이 죽으시면서 또 나의 옛 사람을 죽여서 주님이 내 속에 살아 주심으로 머리가 되어서 나는 그리스도의 지체가 될 수 있게 되어진 것을 우리는 십자가를 통해서 확실히 깨달아 알았습니다. 그러니까 죽여야 할 나를 죽이지 않고, 나의 옛사람만을 죽여서 나를 살리시는데 주님이 내 속에 사시면서 결국은 생명의 씨가 되셨다는 사실입니다. 죽이지 않을 나를 죽이지 않으시고 오로지 옛사람을 죽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살리신 나는 새사람입니다. 이 새사람이 내 속에 들아와 살게 될 때 생명화가 되고 그리스도화가 되는 것입니다.
이제는 밑바닥부터 완전히 변화를 입어야 부활하는 것인데 우리의 본질, 인간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아담은 옛사람으로 본질화되고, 체질화되었습니다. 이러한 인간은 죄와 허물이 많아서 사망 밖에는 가져올 것이 없는 것이 인간의 본질입니다. 그러나 진짜 사망은 죽여 주셨기 때문에 남아있는 것은 사망적 요소만 살아 있습니다. 그래서 사망적 요소서부터 출발을 하는데 사망적 요소라는 것은 약하고 약해다가 약해집니다. 또 변질적입니다. 변질하다가 썩게 됩니다. 그 다음에는 무가치하게 됩니다. 무가치하게 죽게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썩을 것이로되 썩지 않을 것으로 약한 것인데 약하지 않은 것으로 변화시켜 주시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근본 본밭은 사망적 요소입니다. 우리 인간이 처음 주님을 만났을 때에는 전부 약하고 변질적이고 썩고 무가치한 상태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그냥 두면 약해지고 썩게되고 죽게 됩니다. 이것을 한마디로 말하면 사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절로 놔두면 저절로 악하고 썩고 죽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요소를 끊어버리고 짤라버리는 운동을 성령의 도우심으로 해야 합니다. 그런데 악하고 썩고 무가치한 것을 맹물이라고 합니다. 요 2장에 가나 혼인 잔치집에서 포도주가 떨어졌다고 합니다. 포도는 포도주를 만들기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잔치집에서 생명과 즐거움과 흥을 돋구어 주는 것이 포도주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포도주가 떨어지면 잔치가 깨지고 맙니다. 그러나 인간적인 포도주는 언제나 끊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인간적 조작의 기쁨이나 즐거움이나 성공과 출세는 다 끊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맹물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바로 그런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가나 혼인집에서는 인간적인 잔치가 끊어질 때 다행히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주님은 이 잔치집을 변화 시켜 주시려고 오신 것입니다. 부활에 대한 무관심한 교회나 교인이 숱하게 많습니다. 죽었다가 살아나면 그것이 그저 부활인줄 알고 있습니다. 조작적인 인간적인 교회는 특별히 가나의 잔치는 유대교의 잔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의 잔치입니다. 이런 것들은 얼마 가지를 못합니다. 굉장한 바벨론이나 앗수르나 로마나 파사제국이나 일본제국주의나 독일등은 얼마나 갔습니까 인간적인 것은 변화되기 전에 다 무너지고 만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침 예수님이 계셔서 맹물과 같은 것이지만 예수님이 하라고 하는 대로 하기만 하면 그 물이 포도주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령한 변화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영광과 성장의 변화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물의 부활입니다. 맹물은 약하고 썩고 무가치한 것인데 이것이 포도주로 변하는 것입니다.
출애굽할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발랐습니다. 이것은 인생들은 십자가의 보혈과 십자가의 은혜를 입어야 변화를 입어서 부활이 되는 것이지 그렇지 않으면 부활이 안되고 무너지고 만다고 하는 것입니다. 썩고 맙니다. 사망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피가 들어가야 합니다. 물은 변질만 되지 변화가 될 수 없습니다. 물 그 자체적으로는 가치있는 것으로 변화가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물을 항아리에 채우라고 하신 후에 갖다 주라고 하셔서 갖다 주었더니 최고의 극상품 포도주로 변화가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없이는 부활을 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없어서 부활을 못하는 것은 맹물로 있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다 변질이 되어서 썩고 죽게 되어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나를 부활시키려고 오시는 것이지 예수님 자신이 부활하려고 오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부활을 안하셔도 본래 부활이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요 나를 믿는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요 11:25,26). 주님은 돌아가시지 않아도 벌써 부활이십니다.
요즘 부활이 뭔지 모르는 사람들 때문에 교회가 얼마나 혼탁해지는지 모릅니다. 변화가 없습니다. 변화가 없는 사람은 부활을 안 믿는 사람입니다. 신앙생활하는 목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왜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입니까 부활하려고 예수를 믿는 것이지, 잘 살려고 예수를 믿습니까 성공하기 위해서 예수를 믿습니까 방향이 아주 다릅니다. 굶주려 살더라도 좋습니다. 왕관을 안써도 좋습니다. 당장 내일이면 왕관을 쓸 모세가 왕관을 안써도 좋다는 것입니다. 나는 부활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애굽의 산더미 같은 보화라고 할지라도 족히 비교가 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부활의 신앙이 대단한 사람이 모세입니다. 신앙의 선진들이 전부 그것 때문에, 부활하나 때문에 다른 것을 하다가도 부활할 수 있는데라면 빠져서는 안되겠다는 것입니다.
맹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될 때에 끝날뻔한 잔치가 멋있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다된줄 알았던 잔치집이 다시금 멋지게 되어져 가는 것입니다. 안될줄 알았던 잔치집이 다시 흥이 나고 기쁨이 나고 즐거움이 넘치는 잔치집이 되는 것입니다. 유대교 가지고서는 썩고 죽게 됩니다. 악하게 됩니다. 맹물이나 하나도 다를게 없습니다. 조작된 포도주는 다 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수가성에 야곱의 우물이 있습니다. 야곱의 우물이란 옛 우물을 말합니다. 이 우물물을 마시면 또 마셔야 합니다. 그래서 밤낮으로 물뜨러 다니다가 볼장 다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인생이라는 것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밤낮 그짓만 하다가 맙니다. 그짓 하다가 변화가 되어야 할텐데 변화가 안되면 그짓 하다가 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을 만났더니 악한 짓을 했고, 썩을 짓을 했던 것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변질될 것을, 무가치한 것을 했다는 것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수가성의 그 여인은 남편이 다섯이나 있다고 했습니다. 그것 가지고 행복하기는 틀렸습니다. 그것을 가지고는 행복을 가져도 만족이 없습니다. 돈을 가져도 성공이 없습니다. 많은 것을 배웠어도 덕을 끼칠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생명의 씨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여인이 예수님을 만났더니 되지못한 여자가 여선지로 변했습니다. 여선지로 변해서 나는 선지자를 봤노라 와보라고 했습니다. 요샛말로 하면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부활을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현세의 부활인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시면서도 부활시키고 계신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찾아보기가 힘이 듭니다. 죽어서만 부활하는줄로 압니다. 죽어서만 부활이 있는 줄로 압니다. 이것이 기독교에 있어서 제일가는 비기독교적이며 반기독교적이며 적기독교적인 행위에 들어가는 운동입니다. 참으로 조심해야 합니다. 살아 있으면서도 부활하는 줄을 모릅니다. 살아 있으면서 지금 부활이 되어가고 있는 것을 부인하는 사람들은 예수를 부인하는 사람입니다. 변화라고 하는 상당히 중대한 변화를 모르고 있습니다.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예수님을 밤중에 찾아왔던 니고데모는 사망적 요소로 얼버무려 놓았습니다. 사망만 죽여 놓았습니다. 그러나 사망이 안 죽은 사람처럼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 찾아와서 예수님 만나고 보니까 사망을 면치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억울하게 살뻔 했습니까 그런데 예수님 만나게 되니까 나중에는 없어서는 안될 숨은 선지자가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형편없는 맹물이었습니다.
아리마대 요셉하고 니고데모하고 바리새중에서 특별히 변화를 받아서 유대주의적 기독교를 진짜 기독교로 변화시키는데 앞장선 사람이 셋인데 그가 얼마나 변화를 받았으면 이렇게 달라지겠습니까 예수님을 만나지 않으면 변화가 안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났는데도 변화가 안되는 사람은 안 믿는 사람입니다. 부활신앙을 안 믿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12사람이 있었습니다. 그중의 한 사람은 예수를 믿지 않았습니다. 믿지 않았다란 말은 부활을 안 믿었다는 말입니다. 변화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변화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썩고 말겠다는 것입니다. 결국 원수마귀에게 가고 마는 것입니다. 이렇게 부활을 믿지 않는 것이 그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에 대한 것을 확실하게 분명하게 똑똑하게 알지 못했다가는 큰일입니다. 얼마나 중대한 일인지 모릅니다.
베다니에 세 오누이가 살았습니다. 예수님이 그 집에 다니시면서 가까이 지내셨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나사로가 죽었다는 전갈이 왔습니다. 그런데 나사로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잠자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과만 합하면 죽는 것도 예수님같이 죽을뿐 아니라 부활하는 것도 예수님과 함께 부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본을 받는다고 하셨습니다. 그 죽으심과 합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부활과도 합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르다는 예수님이 오신다는 말을 듣고 가서 맞이하되 마리아는 집에 있었습니다. 마르다가 예수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계셨더라면 안죽었을텐데 예수님이 계시지 않았기 때문에 죽었다는 말이 됩니다. 이 말 속에는 예수님의 무소부재하심은 안믿었다는 얘기가 됩니다. 이 가정은 믿어야 할 만한 집안입니다. 그들은 누구보다도 예수님을 제일 잘 믿고 있다고 하는 교회를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여기 계셨더라면 오라비가 안죽었을텐데 예수님이 안 계셔서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 속에는 원망조가 가득 들어 있습니다. 왜 오라고 했는데 빨리 오시지 않았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왜 빨리 가시지 않았습니까 그 집이 부활을 도무지 안 믿는 집안이기 때문입니다. 부활을 믿지 않고 있는 집안에 부활을 가르치셔야 했기 때문에 늦게 가셨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여호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여호와 하나님이 주실줄 아나이다 라고 마르다가 계속해서 고백했습니다. 이것은 유대교 신앙이고 교리입니다. 유대교의 교리와 신앙은 내세 부활을 믿는 신앙입니다. 이것과 정반대되는 것이 사두개파입니다. 사두개파는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죽이는데는 이 두 파가 마음이 하나가 되어서 합작을 하게 된 것입니다.
신앙은 믿는 신앙인데 교리는 죽은 다음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잘 구별하여야 합니다. 마리아는 지금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라 교리를 믿고 있는 것입니다. 이게 유대교의 정통성입니다. 여호와 하나님보다 율법주의입니다. 전통주의요 교리주의입니다. 이게 아주 위험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유대교의 교리와 신앙만을 가지고 있지, 예수님을 직접 만났는데도 예수님을 아직까지도 믿지 않고 있습니다. 지금까지도 유대교의 신앙과 교리를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마음이 아파서 우신 것입니다. 그래도 마리아나 마르다나 나사로 같은 정도면 예수님을 알아 볼 정도는 되었습니다. 진짜 믿음의 대상이 막바로 주님을 믿을줄 알았는데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것이 교리보다 더 중한 것이고 그게 곧 성경인데 이것을 안 믿으니 부활이 되겠습니까 부활은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생명의 씨로 받아들이지 않고는 부활이 안됩니다.
차라리 나사로처럼 죽었더라면 믿었을텐데 안 죽었으니까 못믿는 것입니다. 죽을 것은 안 죽고 죽을 것이 살아있는 마리아와 마르다는 못 믿습니다. 죽은 나사로는 나사로야 일어나라고 하니까 벌떡 일어났습니다. 죽을 것이 죽었으면 잘 믿는데, 죽을 것이 안죽고 죽어야 할 것이 살아서 믿는 행세를 하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그것을 잘 구별해야 부활신앙이 무엇인지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 11:39절에 보니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돌을 옮겨 놓으라 하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이르되 주여 무슨 소리입니까 죽은지가 나흘이나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라고 했습니다. 도무지 믿지를 않았습니다. 죽어서 부활되기만 바랬지 살아서 부활되는 것은 아예 생각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교회에서 신앙생활이 어떻게 되고 있을 것인가를 뻔히 알 수 있습니다. 죽은 다음에야 부활하든지 말든지 알게 뭐냐라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것이 아닙니다. 부활에 대한 개념을 알지 못하니까 예수님이 얼마나 안타까우셨으면 이것을 통해서 싹 갈라놓으셨겠습니까 주님께서 돌을 옮기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믿지도 않으면서도 돌을 옮겨 놓았습니다. 이게 성령의 역사입니다. 싫어도 순종하는 것이 좋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망을 폐하신 주 여호와 하나님의 신령한 능력으로 변화를 주셨습니다. 죽었다가 다시 사는 변화 이게 바로 성장의 변화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변화를 입는 것은 죽었다가 다시 사는 변화입니다. 죽어서만 부활한다는 것은 유대교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변화가 되어져야 하는 것입니까 결실과 열매는 생명의 씨입니다. 생명의 씨는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만 모시게 되면 예수님하고만 합하게 되면 부활이 되고 여기에서 죽는다는 것은 생명의 씨를 마련하는 운동입니다. 씨만 만들어 놓으면 변화는 오게 되어 있습니다. 씨는 보잘 것 없지만 심어서 부활할 때는 아름다운 것으로 변화가 됩니다. 우리의 변화는 그리스도 예수의 말씀을 받아서 변화가 되어질 때는 엄청난 변화를 입어서 부활의 신앙을 간직하고 간직해서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 부활이 있고 죽어도 다시 사는 부활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생명을 걸고 부활신앙의 말씀을 들으시는 여러분,
우리가 부활신앙을 분명히 믿는다면 어떻게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에 아무렇게나 신앙생활 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사람은 부활을 안 믿는 사랍입니다. 난 그래도 못 참아 한 번 해 보아야지 하는 사람은 안 믿는 사랍입니다. 아무렇게나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안 믿는 사람은 부활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망적으로 불의한 것으로 놓아두고 놓아둔다면 변질되고 썩고 죽기밖에 더하겠습니까 부활을 믿는 사람과 무관심 내지는 안 믿는 사람하고는 얼마나 엄청난 차이입니까 하늘과 땅의 차이만큼이나 큰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자꾸만 환란과 핍박이 온다고 할지라도 변질이 될 턱이 없습니다. 오히려 더 좋은 것으로 변화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씨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오늘 말씀 들으신 대로 부활의 신앙을 바로 알아서 신앙의 대승리와 인생의 대승리를 가져오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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