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절] 부활의 메시지(1)
본문
예배는 기독교인의 모든 신앙활동 가운데 가장 핵심적인 내용을 이루고 있는 부분입니다. 그래서 칼 바르트는 기독교 예배를 “기독교 공동체 삶의 중심이요”, “기독교인들의 매일의 삶과 그들의 이웃관계의 중심”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예배에 실패하면 기독교인의 신앙생활은 온전히 이루어졌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배란 무엇인가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사건 안에 나타난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대한 인간의 응답”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을 통한 성육의 사건과 십자가의 구속사건, 그리고 부활의 사건 속에서 보여주신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을 깨달은 자들이 그 은혜에 감사하여 여호와 하나님 앞에 나아와 그분께 최상의 가치와 영광을 돌리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예배인 것입니다.
그러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하신 가장 크고 놀라운 일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사건입니다.
결국 기독교 예배는 안식후 첫날에 주님의 부활을 기뻐하며 제자들이 모여서 떡을 떼었던 데서부터 시작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초대교회에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예배는 부활의 기쁨을 나누는 자리요, 여호와 하나님 나라의 잔치를 미리 맛보는 축제의 자리였던 것입니다.
때문에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매주일이 기쁨의 날이요, 부활 신앙을 입증하는 감격스러운 날이 되었으며, 그래서 매 주일이 초대교회 성도들에게는 작은 부활주일 ( little Easter )였습니다.
예배는 이렇게 기쁨의 잔치, 부활의 잔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축하하고 감사하는 의식이 바로 예배입니다.
할렐루야!
예수님께서 이 아침에 부활하셨습니다. 사망의 권세를 깨트리고 우리의 죄를 다 사하시고 우리로 이제 새 생명 가운데 살게 하시는 일을 우리 주님께서 이루셨습니다.
실로 온 인류가 가장 기뻐해야 할 날이고, 이 땅에 모든 성도들이 가장 기뻐해야 할 날이 바로 오늘 부활의 아침인 줄 믿습니다.
우리를 붙잡고 있었던 흑암의 세력을, 우리를 죄와 사망의 사슬아래 꼼짝 못하게 했던 그 권세들이 깨어져 나가고, 사망, 저주, 형벌에서 우리를 구원한 날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이렇게 그의 몸된 교회에 주일마다 모이는 것은 이 부활의 사실을 근거로 하고 이 사실을 믿고 확신할 때 우리 신앙이 힘이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망과 저주와 형벌의 결박된 사슬에서 풀어주기 위하여 오신 성탄절도 기쁜 날이지만, 정작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일은 바로 이 부활을 위하여 오셨기 때문에 우리가 가장 기뻐하고 또한 이 사실을 제쳐놓고 신앙생활 자체를 할 수 없는 것이며 이 부활의 문제를 대강처리 하고는 성도라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확실한 부활을 믿는 성도들이 주변의 여러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기보다는 훨씬 비난받는 종교로 전락해 가고 있다는 아픔을 우리는 오늘 부끄러움으로 맞이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 입에서 도대체 예수 믿는 사람과는 약속을 할 수 없다. 특별히 돈과 이해관계가 얽힌 문제에서는 도무지 약속할 수 없는, 묘하게도 몰상식하고 그 상식이하의 행동들을 이상한 쪽으로 합리화시킨다고 비난을 받고 있습니다.
또한 여호와 하나님이 자기편이고, 자기는 여호와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종종 말도 안되는 짓을 해놓고 회개하면 된다는 식으로 이야기하거나, 여호와 하나님은 알아주실 것이라는 등 말도 안되는 것으로 자기를 합리화시키고, 변명하고, 또 그것을 미안하게 생각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고 비난하는 소리를 많이 듣습니다.
어디 이것뿐이겠습니까 오늘날 교회가 안고 있는 많은 문제점들이 말입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이 인정하고 잘 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장례식입니다.
사실 우리가 이렇게 살아서 만날 때에는 혹 있는 사람, 없는 사람, 지위가 높고 낮음에 결코 무관할 수 없는 실수를 한국교회가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참으로 놀랍게도 장례식만은 어려운 집, 고달픈 집에 더 많이 오는 것도 사실입니다.
뜻밖에도 장례에 대해서만은 우리 모든 신자들이 공평하고 진지하며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신 있어 합니다.
성도는 눈물을 흘리되 절망의 눈물이 아니며, 슬픔에 동조하되 그것은 결단코 좌절이 아닙니다. 위로하며 슬픔에 동참해 주며 같이 가슴아파 하되 죽음과 사망에 대하여 속수무책으로 서 있는 사람이 우리 중에는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주님으로 고백하며 확신하고,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을 아버지로 고백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죽음과 사망 바로 이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죽음과 사망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예수를 믿을 수가 없습니다.
적어도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 죽음 뒤에 반드시 내세가 있음을 믿고, 그 내세를 우리에게 준비해 주신 분께서 이 세상을 만드셨고, 또한 우리를 세상에서 따로 불러내어 영원을 준비케 하셨다는 사실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분명히 외면할 수 없고, 대강 넘어올 수 없는 이런 신앙적 기초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뜻밖에도 많은 성도들이 여기 오늘 본문에 나오는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를 꾸짖으신 예수님의 꾸짖음 앞에, 핑계할 수 없는, 외면할 수 없는 상황에 늘 와 있곤 한다는 사실입니다.
“미련하고 성경의 모든 약속들을 더디 믿는 자들이어”(25절) 하는 예수님의 이 말씀이 오늘 이 아침에 참으로 우리에게 깊은 찔림이 되고, 그 찔림을 넘어서서 위로가 되고, 힘이 되시길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호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은 어느 것 하나도 불가능한 것이 없습니다. 만약 불가능해 보이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지혜가 모자라고 또한 믿음이 부족해서입니다.
우리가 유한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못하실 것이 있으십니까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못하실 것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모든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얼마든지 “예”가 됩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성경에 나타난 모든 말씀들과 약속들이 한가지도 어김없이 역사 앞에 나타났고 또한 각자 개인의 삶과 신앙 속에 분명히 이루어졌음을 우리 믿고 있습니다.
혹 성경에서 “이 일만 가능하다면 나머지는 다 믿겠습니다”하는 것으로 우리가 제시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죽음과 사망의 권세를 깨트리는 부활 사건일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확실하게 예수님께서 친히 부활하심으로 이 문제에 관한 확실한 증거를 우리에게 보이셨습니다.
사실 이 문제만 확실하게 신앙을 고백하는 신자는 결단코 주변 상황에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갖게 됩니다.
오늘 우리는 적어도 부활하신 이 사실을 우리의 신앙의 가장 중요한 근거로, 기초로 갖고 이 축복의 축제에 감격의 자리에 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보다 더 쉬운 약속들에 관한 것조차도 별로 삶 속에 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이 가장 많이 호소하고, 가장 많이 불평하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이 진정 살아 계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내편이시고, 나를 사랑한다면, 왜! 어째서 이런 일이 내게 벌어지느냐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 문제에 대해서 이렇게 약속하고 있습니다. 본문 26-27절을 보십시다.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예수께서 친히 우리에게 설명하고 계십니다. “내가 이렇게 해 가지고 내 영광에 들어갈 자가 아니냐” “내가 이 일을 위해 세상에 - 온 그리스도가 아니냐”라고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성경에 약속하신 이 사실을 똑같이 이루신 여호와 하나님이, 그 일을 이루신 동일한 열심과 동일한 집념을 가지시고 우리에게 약속하시고 허락하신 것들이 있습니다.
때로 우리의 인생살이에서 고달프고, 외롭고, 슬픔과 절망을 홀로 씹어야 된다고 생각하고, 실패와 낙망 속에 있을 때 성경의 모든 약속들을 다 이루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말씀들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다시 오리라” (요14:18절) 우리 결코 혼자가 아닙니다. 마28:20절에서도 우리에게 약속하셨습니다.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말입니다. 이 얼마나 가슴 벅차고 놀라운 약속의 말씀입니까 우리는 결코 혼자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항변하는 성도들도 있습니다. “같이 있으면 뭐해 내가 요구하는 것 하나도 안해 주시고, 이 고생, 저 고생 다 하고 이제 좀 살만 하니까 또 이 날벼락을 주시고” 우리는 그렇게 이야기하는 존재들이올시다.
그러나 성경은 롬8:28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그래서 저는 이런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신앙인의 삶이라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연륜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고, 또한 경험이 필요하다고 말입니다.
우리는 너무 쉽게 기뻐하고 너무 쉽게 절망하는 경우를 봅니다. 왜 그렇습니까 신앙의 길을 걷는 길이가 너무나도 짧기 때문에 우리에게 여호와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들에 대한 경험이 적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 이 말씀은 신앙의 길을 깊이 걸어보신 분들이라면 누구나 납득하고 깨닫는 말씀일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 백발이 성성한 어른들이 계시다는 것은 언제나 기쁜 일이고 언제나 다행한 일이며, 또 자랑스러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그 분들을 보면서 우리는 신앙의 많은 부분을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보세요!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들은 거의 동일한 고생과 좌절과 절망의 시간들을 지냅니다. 그러한 무수히 어려운 시간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어른들이 그 긴 신앙의 길을 걸으면서 여호와 하나님 앞에 꿋꿋하게 서있는 것은 고생, 좌절, 절망, 아픔, 이 모든 것에 여호와 하나님 앞에 항복하는 모습의결론을 보이신 것이며, 또한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하는 신앙의 모습을 보이는 아름다운 증거인 것을 우리는 그 백발을 보면서 신앙의 위로와 힘을 얻게 되기 때문입니다.
혹 우리 가운데 이런 분계십니까 “그래도 이것만은 못 참겠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것만 이렇게 해 주신다면 참 좋겠다”라고 생각하시는 분 말입니다. 아직도 여호와 하나님께 완전히 항복하지 않은 구석이 있으신 분 말입니다. 성경에 이런 분들에게 주시는 말씀을 살펴봅시다.
고후12:9절에 보면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함이라”
성도여러분!
내가 좀더 잘된다면, 시간적, 경제적으로 지위로, 건강으로, 조금만 더 여유가 있게 된다면 주를 위하여 더 놀랍게 일할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래서 현재의 여러분의 위치가 더 억울하십니까 이 문제만 여호와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신다면 내가 주께 더 많이 항복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으십니까
“아니올시다” 그것은 다 우리의 욕심이라는 사실입니다. 결국은 여호와 하나님께 온전히 항복하는 신앙생활을 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우리의 욕심을 채우고 싶은, 정욕을 따라 품은 나쁜 생각에 불과합니다.
성도는 분명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존재하는 자들이며, 그래서 우리의 인생이 결코 나만의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간섭하사 동행하시고 나를 통하여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펼치시기 위하여 우리는 특별히 계획된 길을 걸어가고 있다고 믿고 살아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고 인도하시고 걷게 하시는 이 믿음에 길에는 부족한 것이 없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부족함을 느끼는 것은 아직도 여호와 하나님께 온전히 항복하지 못했기 때문이며, 욕심 때문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와 주의 복음을 위하여 그토록 애쓰며, 그토록 충성하였지만 마지막에 그에게 있었던 아픔만은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기에 여호와 하나님 앞에 그 가시를 떼어 주기를 기도했습니다.
바울은 자기 욕심을 따라 구하지도 않았고, 이 문제만 해결해 주시면 더 많이 주를 위해 봉사하며, 더 열심히 주를 위해 일을 할 수 있을텐데 라는 정말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과 복음을 위한 애끓는 기도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고 거절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감옥에 갇히기가 다반사였고 고생하며 매맞는 일이 매우 많았지만 그 일들로 인해 그가 할 일이 방해받았거나 모자랐거나, 한번도 부족을 느낀 적이 없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결국 우리는 이렇듯 여호와 하나님의 모든 약속들과 여호와 하나님이 권면하시는 일에 대하여 미련한 자들이며, 더디 믿는 자들이요, 욕심으로 눈이 가리워진 자들인 것을 고백할 수밖에 없는 존재들입니다.
성도여러분!
이 부활의 아침, 이제 우리의 잠들었던 영혼이 다시 깨어나고, 게을렀던 마음들이 다시 분발함을 얻으며, 우리의 눈이 더욱 밝아져, 우리를 부르신 부름과, 우리를 통하여 역사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과 인도하심에 대하여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새로운 깨우침과, 죽었던 시체가 일어나는 것같이 놀라운 역사가 마땅히 있어야 되는 아침인 것을 깊이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이것이 오늘의 부활의 역사인 것입니다.
우리는 사망과 죽음이 두려운 사람들이 아닙니다. 사망과 죽음이 두렵지 않은 여호와 하나님의 생명인 영생을 가진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들이 왜 비 맞는 것이 두렵고, 바람 부는 것이 두렵고, 인생의 배가 뒤집힐 것 같음, 때문에 두려워하십니까 이 시간 우리들 자신을 돌아보십시다. 두려워하고 있지 않나 말입니다.
우리는 미련한 자들입니다. 우리는 참으로 더디 믿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더 많이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을 마음속에 새겨 봐야 되며, 그 약속을 따라 믿는 우리의 도리들을 여호와 하나님 앞에 더 많이 구하여야 하며,
은혜를 구하고, 긍휼을 구하며, 나의 나됨을 놓치지 않기로 주님 앞에 무릎을 꿇을 줄아는 성도로 다시금 이 부활의 아침에 결심해야 할 것입니다.
이 죄악의 사슬로부터 그 결박을 풀어 우리를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신 이가 우리를 의와, 거룩과, 평강과, 희열을 위하여 부르신 것을 마음에 확신하시고 주께서 주신 모든 우리의 신앙의 자랑과 행복과 모든 축복들을 놓치지 않겠다고 결심하시길 축원합니다.
성도여러분!
우리는 이 놀라운 주님의 부활을 믿음 속에 확신하며 살기에 세상에 사람들이 예수 믿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 화살들 앞에, 그 도전 앞에 당당하게 맞서서 “당신들은 모르지만! 그러나 나는 내가 누리고 있는 이 신앙의 행복과 기쁨과 축복은 결코 방해받을 수 없습니다. ”라는 자랑스러운 답변을 마음에 가득 채워서
그것을 자신 있게 증언하며 주의 약속을 따라 새로운 결심이 있는 부활의 아름다운 시간이 되시길 간절히 축원합니다.
그러므로 예배에 실패하면 기독교인의 신앙생활은 온전히 이루어졌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배란 무엇인가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사건 안에 나타난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대한 인간의 응답”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을 통한 성육의 사건과 십자가의 구속사건, 그리고 부활의 사건 속에서 보여주신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을 깨달은 자들이 그 은혜에 감사하여 여호와 하나님 앞에 나아와 그분께 최상의 가치와 영광을 돌리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예배인 것입니다.
그러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하신 가장 크고 놀라운 일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사건입니다.
결국 기독교 예배는 안식후 첫날에 주님의 부활을 기뻐하며 제자들이 모여서 떡을 떼었던 데서부터 시작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초대교회에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예배는 부활의 기쁨을 나누는 자리요, 여호와 하나님 나라의 잔치를 미리 맛보는 축제의 자리였던 것입니다.
때문에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매주일이 기쁨의 날이요, 부활 신앙을 입증하는 감격스러운 날이 되었으며, 그래서 매 주일이 초대교회 성도들에게는 작은 부활주일 ( little Easter )였습니다.
예배는 이렇게 기쁨의 잔치, 부활의 잔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축하하고 감사하는 의식이 바로 예배입니다.
할렐루야!
예수님께서 이 아침에 부활하셨습니다. 사망의 권세를 깨트리고 우리의 죄를 다 사하시고 우리로 이제 새 생명 가운데 살게 하시는 일을 우리 주님께서 이루셨습니다.
실로 온 인류가 가장 기뻐해야 할 날이고, 이 땅에 모든 성도들이 가장 기뻐해야 할 날이 바로 오늘 부활의 아침인 줄 믿습니다.
우리를 붙잡고 있었던 흑암의 세력을, 우리를 죄와 사망의 사슬아래 꼼짝 못하게 했던 그 권세들이 깨어져 나가고, 사망, 저주, 형벌에서 우리를 구원한 날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이렇게 그의 몸된 교회에 주일마다 모이는 것은 이 부활의 사실을 근거로 하고 이 사실을 믿고 확신할 때 우리 신앙이 힘이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망과 저주와 형벌의 결박된 사슬에서 풀어주기 위하여 오신 성탄절도 기쁜 날이지만, 정작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일은 바로 이 부활을 위하여 오셨기 때문에 우리가 가장 기뻐하고 또한 이 사실을 제쳐놓고 신앙생활 자체를 할 수 없는 것이며 이 부활의 문제를 대강처리 하고는 성도라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확실한 부활을 믿는 성도들이 주변의 여러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기보다는 훨씬 비난받는 종교로 전락해 가고 있다는 아픔을 우리는 오늘 부끄러움으로 맞이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 입에서 도대체 예수 믿는 사람과는 약속을 할 수 없다. 특별히 돈과 이해관계가 얽힌 문제에서는 도무지 약속할 수 없는, 묘하게도 몰상식하고 그 상식이하의 행동들을 이상한 쪽으로 합리화시킨다고 비난을 받고 있습니다.
또한 여호와 하나님이 자기편이고, 자기는 여호와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종종 말도 안되는 짓을 해놓고 회개하면 된다는 식으로 이야기하거나, 여호와 하나님은 알아주실 것이라는 등 말도 안되는 것으로 자기를 합리화시키고, 변명하고, 또 그것을 미안하게 생각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고 비난하는 소리를 많이 듣습니다.
어디 이것뿐이겠습니까 오늘날 교회가 안고 있는 많은 문제점들이 말입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이 인정하고 잘 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장례식입니다.
사실 우리가 이렇게 살아서 만날 때에는 혹 있는 사람, 없는 사람, 지위가 높고 낮음에 결코 무관할 수 없는 실수를 한국교회가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참으로 놀랍게도 장례식만은 어려운 집, 고달픈 집에 더 많이 오는 것도 사실입니다.
뜻밖에도 장례에 대해서만은 우리 모든 신자들이 공평하고 진지하며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신 있어 합니다.
성도는 눈물을 흘리되 절망의 눈물이 아니며, 슬픔에 동조하되 그것은 결단코 좌절이 아닙니다. 위로하며 슬픔에 동참해 주며 같이 가슴아파 하되 죽음과 사망에 대하여 속수무책으로 서 있는 사람이 우리 중에는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주님으로 고백하며 확신하고,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을 아버지로 고백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죽음과 사망 바로 이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죽음과 사망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예수를 믿을 수가 없습니다.
적어도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 죽음 뒤에 반드시 내세가 있음을 믿고, 그 내세를 우리에게 준비해 주신 분께서 이 세상을 만드셨고, 또한 우리를 세상에서 따로 불러내어 영원을 준비케 하셨다는 사실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분명히 외면할 수 없고, 대강 넘어올 수 없는 이런 신앙적 기초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뜻밖에도 많은 성도들이 여기 오늘 본문에 나오는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를 꾸짖으신 예수님의 꾸짖음 앞에, 핑계할 수 없는, 외면할 수 없는 상황에 늘 와 있곤 한다는 사실입니다.
“미련하고 성경의 모든 약속들을 더디 믿는 자들이어”(25절) 하는 예수님의 이 말씀이 오늘 이 아침에 참으로 우리에게 깊은 찔림이 되고, 그 찔림을 넘어서서 위로가 되고, 힘이 되시길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호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은 어느 것 하나도 불가능한 것이 없습니다. 만약 불가능해 보이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지혜가 모자라고 또한 믿음이 부족해서입니다.
우리가 유한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못하실 것이 있으십니까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못하실 것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모든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얼마든지 “예”가 됩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성경에 나타난 모든 말씀들과 약속들이 한가지도 어김없이 역사 앞에 나타났고 또한 각자 개인의 삶과 신앙 속에 분명히 이루어졌음을 우리 믿고 있습니다.
혹 성경에서 “이 일만 가능하다면 나머지는 다 믿겠습니다”하는 것으로 우리가 제시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죽음과 사망의 권세를 깨트리는 부활 사건일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확실하게 예수님께서 친히 부활하심으로 이 문제에 관한 확실한 증거를 우리에게 보이셨습니다.
사실 이 문제만 확실하게 신앙을 고백하는 신자는 결단코 주변 상황에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갖게 됩니다.
오늘 우리는 적어도 부활하신 이 사실을 우리의 신앙의 가장 중요한 근거로, 기초로 갖고 이 축복의 축제에 감격의 자리에 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보다 더 쉬운 약속들에 관한 것조차도 별로 삶 속에 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이 가장 많이 호소하고, 가장 많이 불평하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이 진정 살아 계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내편이시고, 나를 사랑한다면, 왜! 어째서 이런 일이 내게 벌어지느냐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 문제에 대해서 이렇게 약속하고 있습니다. 본문 26-27절을 보십시다.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예수께서 친히 우리에게 설명하고 계십니다. “내가 이렇게 해 가지고 내 영광에 들어갈 자가 아니냐” “내가 이 일을 위해 세상에 - 온 그리스도가 아니냐”라고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성경에 약속하신 이 사실을 똑같이 이루신 여호와 하나님이, 그 일을 이루신 동일한 열심과 동일한 집념을 가지시고 우리에게 약속하시고 허락하신 것들이 있습니다.
때로 우리의 인생살이에서 고달프고, 외롭고, 슬픔과 절망을 홀로 씹어야 된다고 생각하고, 실패와 낙망 속에 있을 때 성경의 모든 약속들을 다 이루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말씀들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다시 오리라” (요14:18절) 우리 결코 혼자가 아닙니다. 마28:20절에서도 우리에게 약속하셨습니다.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말입니다. 이 얼마나 가슴 벅차고 놀라운 약속의 말씀입니까 우리는 결코 혼자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항변하는 성도들도 있습니다. “같이 있으면 뭐해 내가 요구하는 것 하나도 안해 주시고, 이 고생, 저 고생 다 하고 이제 좀 살만 하니까 또 이 날벼락을 주시고” 우리는 그렇게 이야기하는 존재들이올시다.
그러나 성경은 롬8:28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그래서 저는 이런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신앙인의 삶이라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연륜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고, 또한 경험이 필요하다고 말입니다.
우리는 너무 쉽게 기뻐하고 너무 쉽게 절망하는 경우를 봅니다. 왜 그렇습니까 신앙의 길을 걷는 길이가 너무나도 짧기 때문에 우리에게 여호와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들에 대한 경험이 적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 이 말씀은 신앙의 길을 깊이 걸어보신 분들이라면 누구나 납득하고 깨닫는 말씀일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 백발이 성성한 어른들이 계시다는 것은 언제나 기쁜 일이고 언제나 다행한 일이며, 또 자랑스러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그 분들을 보면서 우리는 신앙의 많은 부분을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보세요!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들은 거의 동일한 고생과 좌절과 절망의 시간들을 지냅니다. 그러한 무수히 어려운 시간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어른들이 그 긴 신앙의 길을 걸으면서 여호와 하나님 앞에 꿋꿋하게 서있는 것은 고생, 좌절, 절망, 아픔, 이 모든 것에 여호와 하나님 앞에 항복하는 모습의결론을 보이신 것이며, 또한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하는 신앙의 모습을 보이는 아름다운 증거인 것을 우리는 그 백발을 보면서 신앙의 위로와 힘을 얻게 되기 때문입니다.
혹 우리 가운데 이런 분계십니까 “그래도 이것만은 못 참겠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것만 이렇게 해 주신다면 참 좋겠다”라고 생각하시는 분 말입니다. 아직도 여호와 하나님께 완전히 항복하지 않은 구석이 있으신 분 말입니다. 성경에 이런 분들에게 주시는 말씀을 살펴봅시다.
고후12:9절에 보면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함이라”
성도여러분!
내가 좀더 잘된다면, 시간적, 경제적으로 지위로, 건강으로, 조금만 더 여유가 있게 된다면 주를 위하여 더 놀랍게 일할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래서 현재의 여러분의 위치가 더 억울하십니까 이 문제만 여호와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신다면 내가 주께 더 많이 항복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으십니까
“아니올시다” 그것은 다 우리의 욕심이라는 사실입니다. 결국은 여호와 하나님께 온전히 항복하는 신앙생활을 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우리의 욕심을 채우고 싶은, 정욕을 따라 품은 나쁜 생각에 불과합니다.
성도는 분명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존재하는 자들이며, 그래서 우리의 인생이 결코 나만의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간섭하사 동행하시고 나를 통하여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펼치시기 위하여 우리는 특별히 계획된 길을 걸어가고 있다고 믿고 살아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고 인도하시고 걷게 하시는 이 믿음에 길에는 부족한 것이 없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부족함을 느끼는 것은 아직도 여호와 하나님께 온전히 항복하지 못했기 때문이며, 욕심 때문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와 주의 복음을 위하여 그토록 애쓰며, 그토록 충성하였지만 마지막에 그에게 있었던 아픔만은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기에 여호와 하나님 앞에 그 가시를 떼어 주기를 기도했습니다.
바울은 자기 욕심을 따라 구하지도 않았고, 이 문제만 해결해 주시면 더 많이 주를 위해 봉사하며, 더 열심히 주를 위해 일을 할 수 있을텐데 라는 정말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과 복음을 위한 애끓는 기도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고 거절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감옥에 갇히기가 다반사였고 고생하며 매맞는 일이 매우 많았지만 그 일들로 인해 그가 할 일이 방해받았거나 모자랐거나, 한번도 부족을 느낀 적이 없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결국 우리는 이렇듯 여호와 하나님의 모든 약속들과 여호와 하나님이 권면하시는 일에 대하여 미련한 자들이며, 더디 믿는 자들이요, 욕심으로 눈이 가리워진 자들인 것을 고백할 수밖에 없는 존재들입니다.
성도여러분!
이 부활의 아침, 이제 우리의 잠들었던 영혼이 다시 깨어나고, 게을렀던 마음들이 다시 분발함을 얻으며, 우리의 눈이 더욱 밝아져, 우리를 부르신 부름과, 우리를 통하여 역사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과 인도하심에 대하여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새로운 깨우침과, 죽었던 시체가 일어나는 것같이 놀라운 역사가 마땅히 있어야 되는 아침인 것을 깊이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이것이 오늘의 부활의 역사인 것입니다.
우리는 사망과 죽음이 두려운 사람들이 아닙니다. 사망과 죽음이 두렵지 않은 여호와 하나님의 생명인 영생을 가진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들이 왜 비 맞는 것이 두렵고, 바람 부는 것이 두렵고, 인생의 배가 뒤집힐 것 같음, 때문에 두려워하십니까 이 시간 우리들 자신을 돌아보십시다. 두려워하고 있지 않나 말입니다.
우리는 미련한 자들입니다. 우리는 참으로 더디 믿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더 많이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을 마음속에 새겨 봐야 되며, 그 약속을 따라 믿는 우리의 도리들을 여호와 하나님 앞에 더 많이 구하여야 하며,
은혜를 구하고, 긍휼을 구하며, 나의 나됨을 놓치지 않기로 주님 앞에 무릎을 꿇을 줄아는 성도로 다시금 이 부활의 아침에 결심해야 할 것입니다.
이 죄악의 사슬로부터 그 결박을 풀어 우리를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신 이가 우리를 의와, 거룩과, 평강과, 희열을 위하여 부르신 것을 마음에 확신하시고 주께서 주신 모든 우리의 신앙의 자랑과 행복과 모든 축복들을 놓치지 않겠다고 결심하시길 축원합니다.
성도여러분!
우리는 이 놀라운 주님의 부활을 믿음 속에 확신하며 살기에 세상에 사람들이 예수 믿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 화살들 앞에, 그 도전 앞에 당당하게 맞서서 “당신들은 모르지만! 그러나 나는 내가 누리고 있는 이 신앙의 행복과 기쁨과 축복은 결코 방해받을 수 없습니다. ”라는 자랑스러운 답변을 마음에 가득 채워서
그것을 자신 있게 증언하며 주의 약속을 따라 새로운 결심이 있는 부활의 아름다운 시간이 되시길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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