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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네가 부활을 아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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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를 어떤 종교라고 생각하십니까? 애매한 질문이죠. 무엇인가를 한 마디로 정의 내리기는 쉽지 않습니다.
요즘 엽기 시리즈가 유행인데, 제가 보기에는 기독교만큼 엽기적()인 종교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더 정확히 얘기하자면 예수님이 참으로 엽기적인 존재이고, 엽기적인 일을 하신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탄생부터가 특별했습니다. 이 땅을 정복하고, 죽음에서 건지러 온 구원자치고는 너무도 초라하게 오셨습니다. 왕궁은 고사하고서라도 그 흔한 산모 한 사람 대동하지 못하고 태어났습니다. 더 특별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배 받는 것은 왕처럼 경배 받았습니다. 천사들이 그의 탄생 소식을 전했고, 낮은 신분의 목자에서 동방에서 온 박사들까지 그 경배층이 다양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꼭 흔적을 남기시는 분입니다.
사53장 2절, 그의 모양은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갔다고 하고 있습니다. 별로 볼품없고, 남자답지도 못한 것 같습니다. 뿐만 아니라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어서 남이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모습도 아니라고 합니다.
적어도 세계를 구원할 분이라면 징키스칸이나 알렉산더, 시저같이 몸이 좋던지 패기가 있던지 보기만 해도 왠지 느낌이 다른 기운이 풍겨야할텐데 그렇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사52장 14절에는 그의 모양을 보고 열왕들이 놀랬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열왕들이 보기에 그 모습이 전혀 세상을 구원할 사람처럼 안보였다는 뜻이죠. 그런데 그 사람이 메시아라고 하니 놀랠 수 밖에요.
그런데 더 엽기적인 것은 자신의 그 많은 능력을 30년 동안 고스란히 묻어두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한 가지 비밀을 1년 이상 간직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30년 동안이나 숨겼습니다.
그뿐이면 말도 안해요. 활동을 시작하신 그 메시아가 주로 활동하던 무대가 주로 서민층이었다는 겁니다. 보통 유명한 사람들은 그들의 세력을 확장할 때 힘 있고, 권세있는 사람들과 결탁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야말로 민초들의 왕이었습니다. 가난한 자, 병든 자, 소외된 자들의 왕이었습니다.
그렇게 인기 전성기에 이르렀을 때에 그분이 선택하신 길은 죽음의 길이었습니다. 그것도 죄가 하나도 없는 그 분이 당대 최고형이었던 십자가형을 받은 것이었습니다. 이사야서 53장에서는 그것을 불법적인 재판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말합니다. 정의를 실천하실 그 분이 불법적인 재판으로 죽는 겁니다.
일 주일 전까지만 해도 "호산나, 다윗의 자손(왕)이여"라고 외치던 그들에게 예수님은 정죄받아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그 배신자들을 향해 하시는 말씀, "주님 쟤들이 뭘 압니까 몰라서 그런 것이니까 용서해주십시오". 이런 것을 엽기적이라고 하는 겁니다. 노란 국물이 엽기적인 것이 아니고 말이죠. 그것은 지저분한 것이지.
더 엽기적인 것은 참 여호와 하나님이신 그분이 죽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여호와 하나님이 인생들처럼 죽을 수가 있습니까
그런데 기대하시라 최고의 사건은 그 분이 다시 살아났다는 겁니다. 그것도 바로 살아나신 것도 아니고 삼일이나 썩은 몸을 다시 일으키셨다는 겁니다.
기독교는 믿으면 믿을수록 특별합니다. 놀랄 일이 많습니다. "놀람의 종교" "쇼킹한 종교"입니다.
우리 정말 가슴에 손을 얹고 한 번 생각해봅시다. 우리 같은 사람이 구원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합니까 엽기적이죠...
그래 어쩌다 구원받았다고 생각합시다. 그런데 우리가 정말 그분의 자녀가 되어서 날마다 새롭게 공급되는 이런 은혜들을 받을 자격이 있는겁니까 여호와 하나님의 인내가 놀랍지 않습니까
오늘은 예수님의 많은 쇼킹한 사건 중 으뜸인 부활 사건을 한 번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인류 역사상 아무도 죽었다고 영원히 다시 산 사람은 없습니다. 나사로가 살았다구요 옆집 아저씨가 관에 들어갔는데 장사하기 바로 전에 관문을 두드리고 다시 살아났다구요 그들이 영원히 살았습니까 아닙니다. 다시 죽었잖습니까 나사로도 죽은 것은 마찬가집니다. 그리고 나사로나 야이로의 딸 같은 사람은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난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능력으로 다시 살아난 것이죠.
그런데 유일하게 예수님은 자신의 힘으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 그 의미를 너무 축소해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오늘은 예수님의 부활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몇 가지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1. 부활은 세상의 재창조라 말할 수 있습니다.
"산 자를 왜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5절)
이 땅은 죽은 자들이 사는 땅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산 자들의 땅이 되었습니다. 아니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타락과 함께 이 땅은, 전 우주는 죽었습니다. 그 속에 있는 모든 사람들도 죽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그 죽었던 세상을 다시 살리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단순히 개인의 부활이 아닙니다. 2000년 전에 존재했던 예수님이라고 하는 어떤 사람이 죽었다가 살아난 정도의 사건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살아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부활을 축소시키지 마십시오. 이 사건은 전 우주적인 사건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의 삶 자체가 온 세상을 대신한 삶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죽으신 것입니다. 온 우주의 죽음을 자신이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예수님은 아무런 죄가 없으시므로 실로 우리의 죄악을 짊어지기에 충분한 자격이 있었습니다. 그 예수님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것은 그 분 개인만의 사건이 아니라. 전 우주적인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 사신 것은 분명히 그 분의 개인적인 사건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사역의 특성상 그 분은 자신만을 위해 사신 것이 아닙니다. 자신만을 위한 일이라면 이 땅에 오실 필요도 십자가를 지실 필요도 없었습니다. 그 분의 삶은 어떤 의미에서 자신을 위한 삶이 아니라 우리를 위한, 세상을 위한 대속의 삶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분의 십자가상의 죽음은 우리의 죄악의 죽음이요. 그 분의 부활은 우리의 생명의 부활입니다. 그래서 "예수 부활 내 부활"이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 사건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만드신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죄악으로 인하여 죽어버렸는데 예수님께서 다시 회복시킨, 재창조의 날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날은 주님의 날이고, 영원한 안식의 표식이므로, 우리가 이 날을 주일로 지키는 것입니다. 새로운 재창조의 날이 바로 오늘 부활절입니다.
우리 주님의 그 크신 사랑과 희생으로 우리는 다시 태어났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은 어떠해야 되겠습니까 갈2장 20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라는 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아니 우리의 삶이 그런 삶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지금 행복을 누리는 것은 그리스도의 못 박힌 손과 창 자국 지닌 허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금 다시 살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의 부활의 영광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부활에 참여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이 영광스러운 재창조에 우리가 참여하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의 창조 섭리에 맞게 살아야 합니다. 우리 인생의 주인은 더 이상 내가 아닙니다. 예수님입니다. 그 분의 뜻에 맞게 사는 것 그것이 예수님의 창조섭리에 순응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부활에 참여하는 것이고, 우리를 위해 부활하는 예수님께 드려야 할 우리의 바른 자세입니다.
2. 부활은 완전한 승리의 사건입니다.
이 땅에 많은 위인들이 거쳐갔습니다. 광활한 대지를 정복하고 많은 나라들을 다스렸고, 남이 발견하지 못한 학문을 발견하고, 남들이 갱신하지 못한 진기록들을 세운 많은 위인들이 오고 갔습니다. 그들이 남긴 많은 유적들이 있기에 박물관이 운영됩니다.
하지만 그 어떤 사람이 남기고 간 위대한 유산보다 가장 큰 유산은 "빈 무덤"입니다. 누가 시체를 도굴해가서 빈 무덤이 아닙니다. 무덤의 주인공이 죽음에 승리하고 다시 살아났기 때문에 무덤이 비었습니다.
가장 큰 정복은 죽음에 대한 정복입니다. 지금까지 아무리 넓은 영토를 정복한 사람도 죽음이라는 영역은 정복하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유일한 사건입니다. 그리고 완전한 사건입니다.
가장 큰 다스림은 죽음에 대한 다스림입니다. 무력으로 다스릴 수 있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언제나 저항 세력, 안티 세력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다스림은 완전한 다스림입니다. 다시 죽음이 고개를 들 수 없는, 들지 못하는 다스림입니다.
가장 큰 발견은 부활에 대한 발견입니다. 아무도 부활에 대해서 생각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직접 그 일을 이루셨습니다. 자신의 몸이 실험대에 올려졌고, 성공적인 실험을 마쳤습니다. 부활은 우리에게 완전한 법칙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나 이 부활의 법칙이 적용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완전한 승리"입니다. 죄와 사망에 대한 완전한 승리입니다. 악한 세력, 이 세상의 지배자에 대한 완전한 승리입니다. 더 이상의 싸움이 필요하지 않는 완전한 승리입니다. 더 이상 죽음과의 싸움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이미 끝나버린 사건입니다. 한 번도 정복된 적이 없는 죽음의 영역이 정복되었습니다. 그 누구도 정복하지 못한 죽음을 예수님이 완전하게 정복했습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승리자입니다.
승리자되신 예수님 그분이 우리의 구원자입니다. 그 분을 보내신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 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두려울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믿으면서도 말뿐입니다. 세상에서 두려워하는 것이 너무 많습니다. 세상의 것들을 다스리지 못하고 끌려다니고 있습니다. 오히려 정복자라기 보다는 노예처럼 행동합니다.
학생들은 공부의 노예가 되어 주일날에도 학교로 끌려다닙니다. 그래도 그것은 모범생에 속합니다. 어떤 학생들은 연예인의 노예가 되어서 콘서트장마다 끌려다니고요. 오락의 노예가 되어서 컴퓨터 앞에서 벗어나지를 못합니다. 마약이나 섹스에 노예가 된 학생들도 많습니다. 안타깝게도 기독학생들 가운데서도 그런 학생들이 많습니다.
학생들만 그렇습니까 우리 어른들은 어떻습니까 돈의 노예가 되어서 돈이 말하는 소리에는 꺼뻑 죽습니다. 돈되는 일이면 주일이고, 예수님이고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술의 노예가 되기도 하기요. 섹스에 노예가 되기도 하기요. 우리 어머니들 중에는 자식에 노예가 되어서 자식의 일이라면 모든 것을 불사하시는 용감한 분들도 계십니다. TV의 노예가 되어서 그 앞을 떠나지 못하는 분들, 스포츠, 심지어 낚시의 노예가 되신 분들도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예수님께서 부활 사건을 통해서 이 땅에서 완전한 승리를 했다고 믿어지십니까 그 승리가 믿는 우리의 것이라는 것도 믿어지십니까
그런데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정말 승리자처럼 생활합니까 아니면 아직도 노예처럼 생활합니까
올림픽 금메달 딴 사람은 동네 경기에는 참여하지 않습니다. 작은 경기에서 1등 2등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우습다는 얘기죠. 우리는 세상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예수님의 군사들입니다. 이땅에서 돈 몇푼 더 벌고 덜 벌고 그런 것에 얽매일 것 없습니다. 공부 좀 잘하고 못하는 것 중요하지 않습니다. 인물 좀 잘났고 못났고 그런 것에서 신경 접으세요.
우리는 죽음을 정복한 아직은 아니지만 믿는 그 순간 정복한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우리는 죽음을 정복한 사람입니다. 죽음에 완전히 승리한 주님을 믿는 그 순간 우리도 죽음에 승리했습니다. 정복자처럼 행동하십시오. 승리자처럼 행동하십시오. 제발 패배자처럼 죽을 인상쓰지 말고, 승리자처럼 당당하게 생활하십시오. 누군가 여러분에게 돈으로, 지식으로, 건강으로, 자식의 성공으로, 무엇으로 도전해오더라도 웃고 넘기십시오. 우리는 그런 것과 싸울 시기는 지났습니다. 그들은 우리의 스파링 상대도 안됩니다.
무덤에 가서 예수님의 시체를 찾는 마리아의 행동이 믿음 없어 보입니까 그는 그래도 예수님의 시체를 보존하려는 순수한 마음이라도 있었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패배자처럼 생활하는 것은 마리아의 행동보다 더 어리석고 미련한 행동입니다. 예수님을 무덤에 보존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은 살아나셨습니다. 그분이 살아나신 것은 우리가 승리자처럼 행동하는 것을 통해서 세상에 알려지는 것입니다. 예수님 믿더니 달라졌다는 얘기 들어야 그것이 부활을 알리는 것입니다. 부활계란 아무리 예쁘게 싸서 이웃에게 갔다 줘보십시오. 그것이 부활을 알리는 것이 아니라 승리자답게 사는 그것이 진정으로 부활을 알리는 것입니다.
3. 부활은 우리에게 평화와 더불어서 소망을 가져다 줍니다.
요즘 여러분 살기 어떻습니까 살맛 납니까 죽을 맛입니까 무엇 때문에 죽을 맛입니까
제자들처럼 죽을 맛일까요 직장도, 부모도 다 내버려두고 오직 예수님만 따라 다니기를 3년(3년 반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을 따라 다닐수록 매력이 있었습니다. 살맛 났습니다. 아무도 함부로 대하지 못하던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장로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늘 멋있는 말로 펀치를 날리셨습니다. 병든 자에게 말만하면 병이 떠나갔습니다. 먹을 것이 없어도 살만했습니다. 물고기 한 두 마리와 떡 몇 덩이만 있어도 몇 천명을 먹일 수 있는 능력을 그들을 자신의 손으로 떡을 나누면서 목격했습니다. 심지어 바다와 풍랑까지도 예수님의 말 한마디에 순종했습니다. 그 분의 인기는 하늘을 치솟아서 조용히 쉴 곳을 찾기 힘들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위풍당당하고 멋있던 예수님이 죽어버렸습니다. 그것도 가장 극악한 죄인들과 같이 십자가에게 죽어버렸습니다. 아주 맥없이 한 마디 저항도 하지 못하고 말이죠. 그리고 예수님을 죽인 무리들은 지금 예수님의 제자들마저 가만두지 않을 기세입니다.
사면이 다 막혔습니다. 고향으로 돌아가기도 그렇고,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가족과 직업도 다 버리고 예수 따라와서 일에 손 뗀지가 3년이나 됐습니다. 안하던 일을 하기가 쉽겠습니까 더군다나 자기들이 그토록 따라 다니던 예수님은 맥 없이 죽고, 아무 유산도 안남겨준 마당에 무슨 염치로 고향으로 가겠습니까 그렇다고 예루살렘에 남아있기도 두려웠습니다. 예수님까지 죽인 마당에 제자들 죽이기야 장난 아닙니까 문을 잠가두고 있는 그들의 심정을 이해하시겠습니까
여러분의 삶이 혹시 제자들의 삶만큼이나 힘듭니까
제자들이 모여서 두려움에 떨고 있을 때 예수님이 나타났습니다. 여러분 같으면 죽은 사람이 한 사흘 뒤에 문도 열지도 않고 떡 나타나면 어떻겠습니까 반갑겠습니까 무서워서 다 졸도 할 겁니다. 살아난 분이 부모나 배우자라고 하더라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겁니다. 그렇지 않아도 두려움에 떨고 있는 그들에게 나타난 예수님의 유령 공포 위의 공포 속에 가장 먼저 던져진 예수님의 말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요20:19). 예수님의 그 말씀은 부활의 또 다른 의미를 우리에게 가져다 줍니다.
주님의 부활은 우리에게 평화를 가져다 줍니다.
죄악으로 인하여 여호와 하나님과 우리 사이는 원수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부활하심 그 사역의 완성을 통해서 우리와 여호와 하나님 사이에 막힌 담을 허셨고, 우리와 여호와 하나님과의 교통할 수 있는 길을 열었습니다. 이제 더 이상 여호와 하나님과 인간은 원수 사이가 아니라 부자지간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에게 평화를 가져다 주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사건의 클라이맥스입니다. 휘장을 찢는 사건, 죄의 담을 허무는 사건, 그것은 곧 부활입니다. 부활의 힘은 우리와 여호와 하나님 사이에 평화를 가져다 주었습니다.
이 평화는 전염되어서, 아무리 치열한 전쟁 중에도 부활절에는 쉰다고 합니다. 부활절에는 많은 가난한 사람과 가진 자들 사이에 담이 헐린다고 합니다. 물론 이 땅에서의 평화는 완전하지 않지만 말입니다.
우리 크리스챤들은 어떤 의미에서 이런 평화를 이 땅에 실현하기 위해 가장 앞장서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탕감 받은 사람이므로, 우리에게 빚진 사람을 탕감하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더불어서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에게 소망을 가져다 줍니다. 공포와 두려움, 이 세상의 고난 가운데서 희망이 있는 것은 우리에게 부활의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죄 가운데 희망이라곤 실오라기 하나만도 없는데 예수님의 부활은 가장 확실한 소망입니다. 고전15:20, 예수님은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다고 합니다. 우리는 다음 열매입니다. 우리의 부활은 이미 결정되었습니다. 기정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세상의 어려움이나 고난에 너무 얽매이지 마십시오. 여러분 군대 생활이 어려워도 참는 것은 무엇 때문인지 압니까 그 기간이 한정적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것은 십자가 고통보다는 부활의 영광을 바라보셨기 때문 아닐까요
여러분 이 땅에서 예수님 때문에 당하는 고난 그 것 때문에 너무 힘들어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고난은 기간이 정해져 있습니다. 그 다음은 영원한 평화의 나라로 옮기는 부활이 있습니다. 부활의 소망이 있으므로 우리는 평화할 수 있습니다.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참을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께서 여호와 하나님 우편에 서 계신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선조들이 신앙을 지키다 순교할 수 있었던 것은 부활의 소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물며 우리의 잘못으로 닥친 고난이나 어려움이라면 당연히 감수해야죠. 혹 까닭없이 닥치는 고난에 휩사여 있습니까 희망을 가지십시오. 우리에게는 영원한 세상으로의 부활의 소망이 있지 않습니까
그 나라를 바라보며, 그 때를 바라보며, 다시 부활할 나를 바라보며, 그 일을 완성시킨 그분 예수님을 바라보며 소망가운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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