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절] 예수 무덤에서 부활하시다
본문
할렐루야! 우리 주가 되시는 예수 다시 사셨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가도의 부활절을 경축하고 예배드리기 위하여 모이신 성도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과 사업 위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부활절을 성탄절과 함께 우리는 은총과 감사의 날이요 희망과 영광과자랑의 날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십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이 예수님의 부활에 대하여 사복음서의 기자들은 공통적으로 안식후 첫 '새벽'이라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부활은 인류 구원의 새 아침이요, 우주 만물의 새 아침입니다.
예수께서 만일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막을 내리셨다면 공자나 석가나 소크라테스나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부활이라는 사건 위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첫째로, 예수 부활의 새 아침은 인류에게 새 소망을 주는 아침입니다.
베드로는 말하기를 예수의 부활로 말미암아 산 소망을 가졌다고 하였습니다.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여호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벧전 1:3)고 산 소망이라고 기술합니다.
이 소망은 썩지도 않고 더럽지도 않고 쇠하지도 않는 소망이며 하늘에 간
직한 기업입니다.
그러나 땅의 소망은,땅에 있는 육체, 육체의 소망 이런 것은 다 시한적입니다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벧전 1:24).
그러하기에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여호와 하나님께 두어야 합니다 (딤전 6:17).
현대인들은 기계 문명을 자랑하며 그 혜택을 많이 받습니다.
편리하고 번영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기계에 의하여 학대도 받고 죽기도 하며 직장에서 쫓겨나기도 합니다. 땅에 있는 소망은 오래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가져다준 새 소망을 소유할 때에만 영원한 소망이 될수있습니다.
둘째로, 예수의 부활의 새 아침은 신앙의 확증을 주는 새 아침입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죽으시고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에 장사되셨고 제자들은
사방으로 흩어졌습니다. 베드로는 죽을 지언정 주님을 부인하지 않겠노라고 했으나 세 번이나 부인하였습니다.
왜 부활의 신앙이 없는 베드로는 이렇게 약할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근심 중에,시험 중에 잠자고 있었습니다. 공포 중에 떨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부활의 주님을 뵈온 후에는 확고한 신앙을 가졌습니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뵈옵고 확신있는 신앙을 가졌습니다.
부활 신앙입니다.
부활은 신앙의 활력소가 됩니다.
부활은 생명을 지닌 기독교의 핵심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무덤에 더 머물러 계시지 않으십니다.
기독교는 무덤이 없는 종교입니다.
불교의 석가는 무덤이 인도 창수서안에 있고 유명한 사찰에서는 석가의 유물과 손톱까지도 보관하고 있음을 자랑합니다.
이슬람교의 모하메트는 그의 무덤이 아라비아 메카에 있고
유교의 공자는 창평향추읍에 있습니다. 이들은 무덤을 자랑합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자랑합니다.
부활의 신앙이 없는사람은 아직도 예수의 시체가 무덤 속에 있다고 믿는 자와
같습니다. 이들에게는 확신도 소망도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부활의 신앙을 갖지 못하고 무덤 속 같은 이 세상에 끊일 줄 모르는 환란 중에 몸부림치고 있습니다. 이들에게 부활의 증거를 보여 주어야 하겠습니다.
셋째로, 예수의 부활의 아침은 영생의 문이 열리는 아침입니다.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은 영생의 길입니다
(히1:20).
이 영생의 문은 아담이 범죄함으로 닫혔던 문입니다.
아담이 범죄함으로 에덴 동산에서 내어 쫓고 회전하는 불칼로 막았습니다 (창 3:24).
예수님은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고 이 닫혔던 영생의 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리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던 것입니다.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과 무덤에서의 부활은 인생의 새 출발을 허락하였습니다.
주께서는"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요11:25).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부활의 확신의 표를 지니면 그 앞에 영생의문이 열립니다.
끝으로, 우리가 분명히 믿기는 주님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여호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강림 하실 때에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 우리 살아남은 자들이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리어 공중에서 주님을 영접하게 하시며 주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확실히 예수님의 부활은 인생에게 산 소망을 주시며, 믿는 자들에게 신앙의 확신을 주며, 인생의 새 출발이 됩니다.
미극의 극작가인 유진 오닐이 쓴 작품 중에 '나사로는 웃었다'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누구복음 16장에 나오는 나사로는 죽어서 낙원에 갔다는 것으로 끝맺음을 하고 있지만 이 작가는 낙원에서 4일간 머물면서 낙원을 경험한 후 다시 세상에 돌아 왔다는데서 부터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낙원에 갔다온 나사로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하여 등장하고 있는데
그 중에 특별히 두드려진 부분은 돈에 대한 자세입니다.
나사로는 우리가 잘 아는 것처렴 지독히 가난했을 뿐 아니라 신체적인 부 자유 때문에 부잦집 문전에서 걸식하면서 살았습니다. 이렇게 얻어먹으면서도 더 많은 돈을 가지길 갈망하고 더 큰 부자를 꿈꾸엇을 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낙원에서 4일간의 경험이 세상의 모든 것을 하챦은 것으로 여기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돈 앞에서도 여유롭게 웃을 수 있었고/ 세상 권세자 앞에서도 여유있게 웃을수 있었고/ 또 다시 자기를 죽이고자 하는 황제 앞에서도 여유롭게 웃을수 있었던 것은 나사로는 낙원에서 부활의 영광된 삻을 경험햇기 때문이였습을 말하고 있습니다.
부활절은 하나의 절기가 아니라 부활은 곧 우리의 삶이되어야합니다
이는 우리의 삶에서 나타나야 합니다.
신앙은 체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신앙을 위해 목숨을 기꺼이 내 놓을 수 있었던 것도/
또 신앙의 선배들이 순교의 제물이 될 수 있었던 것도 그들에게 신앙적인 체험이 있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래야 부활절을 맞는 참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부활의 믿음으로 바꾸어지는 순간 제일 먼저 가정에서의 변화가 됩니다. 부부의 애정금실이 부활합니다. 부모님에 대한 효성이 부활합니다. 자녀에 대한 사랑이 부활합니다. 형제간의 우애심도 부활합니다. 친구간의 의리도 부활합니다. 가정의 생활이 부활합니다. 부활신앙은 사업도 부활케 합니다. 부활 신앙을 갖은 자는 절대로 아주 넘어져 실패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역사 속에서
가장 놀라운 사건은 죽었던 예수님이 다시 사셨다는 부활의 사건이다.
부활의 역사적 사실이 없었다면
십자가의 사건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을 것이다.
진실로 "예수 다시 사셨네!" 하는 이 고백과 사실이 기독교의 메시지의 절정이 되는 것이다.
첫째로, 예수 부활의 새 아침은 인류에게 새 소망을 주는 아침입니다.
둘째로, 예수의 부활의 새 아침은 신앙의 확증을 주는 새 아침입니다.
셋째로, 예수의 부활의 아침은 영생의 문이 열리는 아침입니다.
오늘 이 부활의 아침에
높은 산이 낮아지고/ 깊은 골짜기는 높아지며
구부러진 길을 곧아지여 평지가 되며
영생의 대로로 고속도로가 열리는 아침
예수 다시 사셨네
나도 다시 살겠네
우리 모두 살겠네/
할렐루야
부활의 아침에 영광에 이루기를 부활하신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가도의 부활절을 경축하고 예배드리기 위하여 모이신 성도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과 사업 위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부활절을 성탄절과 함께 우리는 은총과 감사의 날이요 희망과 영광과자랑의 날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십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이 예수님의 부활에 대하여 사복음서의 기자들은 공통적으로 안식후 첫 '새벽'이라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부활은 인류 구원의 새 아침이요, 우주 만물의 새 아침입니다.
예수께서 만일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막을 내리셨다면 공자나 석가나 소크라테스나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부활이라는 사건 위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첫째로, 예수 부활의 새 아침은 인류에게 새 소망을 주는 아침입니다.
베드로는 말하기를 예수의 부활로 말미암아 산 소망을 가졌다고 하였습니다.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여호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벧전 1:3)고 산 소망이라고 기술합니다.
이 소망은 썩지도 않고 더럽지도 않고 쇠하지도 않는 소망이며 하늘에 간
직한 기업입니다.
그러나 땅의 소망은,땅에 있는 육체, 육체의 소망 이런 것은 다 시한적입니다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벧전 1:24).
그러하기에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여호와 하나님께 두어야 합니다 (딤전 6:17).
현대인들은 기계 문명을 자랑하며 그 혜택을 많이 받습니다.
편리하고 번영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기계에 의하여 학대도 받고 죽기도 하며 직장에서 쫓겨나기도 합니다. 땅에 있는 소망은 오래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가져다준 새 소망을 소유할 때에만 영원한 소망이 될수있습니다.
둘째로, 예수의 부활의 새 아침은 신앙의 확증을 주는 새 아침입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죽으시고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에 장사되셨고 제자들은
사방으로 흩어졌습니다. 베드로는 죽을 지언정 주님을 부인하지 않겠노라고 했으나 세 번이나 부인하였습니다.
왜 부활의 신앙이 없는 베드로는 이렇게 약할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근심 중에,시험 중에 잠자고 있었습니다. 공포 중에 떨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부활의 주님을 뵈온 후에는 확고한 신앙을 가졌습니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뵈옵고 확신있는 신앙을 가졌습니다.
부활 신앙입니다.
부활은 신앙의 활력소가 됩니다.
부활은 생명을 지닌 기독교의 핵심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무덤에 더 머물러 계시지 않으십니다.
기독교는 무덤이 없는 종교입니다.
불교의 석가는 무덤이 인도 창수서안에 있고 유명한 사찰에서는 석가의 유물과 손톱까지도 보관하고 있음을 자랑합니다.
이슬람교의 모하메트는 그의 무덤이 아라비아 메카에 있고
유교의 공자는 창평향추읍에 있습니다. 이들은 무덤을 자랑합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자랑합니다.
부활의 신앙이 없는사람은 아직도 예수의 시체가 무덤 속에 있다고 믿는 자와
같습니다. 이들에게는 확신도 소망도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부활의 신앙을 갖지 못하고 무덤 속 같은 이 세상에 끊일 줄 모르는 환란 중에 몸부림치고 있습니다. 이들에게 부활의 증거를 보여 주어야 하겠습니다.
셋째로, 예수의 부활의 아침은 영생의 문이 열리는 아침입니다.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은 영생의 길입니다
(히1:20).
이 영생의 문은 아담이 범죄함으로 닫혔던 문입니다.
아담이 범죄함으로 에덴 동산에서 내어 쫓고 회전하는 불칼로 막았습니다 (창 3:24).
예수님은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고 이 닫혔던 영생의 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리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던 것입니다.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과 무덤에서의 부활은 인생의 새 출발을 허락하였습니다.
주께서는"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요11:25).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부활의 확신의 표를 지니면 그 앞에 영생의문이 열립니다.
끝으로, 우리가 분명히 믿기는 주님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여호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강림 하실 때에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 우리 살아남은 자들이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리어 공중에서 주님을 영접하게 하시며 주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확실히 예수님의 부활은 인생에게 산 소망을 주시며, 믿는 자들에게 신앙의 확신을 주며, 인생의 새 출발이 됩니다.
미극의 극작가인 유진 오닐이 쓴 작품 중에 '나사로는 웃었다'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누구복음 16장에 나오는 나사로는 죽어서 낙원에 갔다는 것으로 끝맺음을 하고 있지만 이 작가는 낙원에서 4일간 머물면서 낙원을 경험한 후 다시 세상에 돌아 왔다는데서 부터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낙원에 갔다온 나사로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하여 등장하고 있는데
그 중에 특별히 두드려진 부분은 돈에 대한 자세입니다.
나사로는 우리가 잘 아는 것처렴 지독히 가난했을 뿐 아니라 신체적인 부 자유 때문에 부잦집 문전에서 걸식하면서 살았습니다. 이렇게 얻어먹으면서도 더 많은 돈을 가지길 갈망하고 더 큰 부자를 꿈꾸엇을 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낙원에서 4일간의 경험이 세상의 모든 것을 하챦은 것으로 여기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돈 앞에서도 여유롭게 웃을 수 있었고/ 세상 권세자 앞에서도 여유있게 웃을수 있었고/ 또 다시 자기를 죽이고자 하는 황제 앞에서도 여유롭게 웃을수 있었던 것은 나사로는 낙원에서 부활의 영광된 삻을 경험햇기 때문이였습을 말하고 있습니다.
부활절은 하나의 절기가 아니라 부활은 곧 우리의 삶이되어야합니다
이는 우리의 삶에서 나타나야 합니다.
신앙은 체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신앙을 위해 목숨을 기꺼이 내 놓을 수 있었던 것도/
또 신앙의 선배들이 순교의 제물이 될 수 있었던 것도 그들에게 신앙적인 체험이 있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래야 부활절을 맞는 참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부활의 믿음으로 바꾸어지는 순간 제일 먼저 가정에서의 변화가 됩니다. 부부의 애정금실이 부활합니다. 부모님에 대한 효성이 부활합니다. 자녀에 대한 사랑이 부활합니다. 형제간의 우애심도 부활합니다. 친구간의 의리도 부활합니다. 가정의 생활이 부활합니다. 부활신앙은 사업도 부활케 합니다. 부활 신앙을 갖은 자는 절대로 아주 넘어져 실패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역사 속에서
가장 놀라운 사건은 죽었던 예수님이 다시 사셨다는 부활의 사건이다.
부활의 역사적 사실이 없었다면
십자가의 사건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을 것이다.
진실로 "예수 다시 사셨네!" 하는 이 고백과 사실이 기독교의 메시지의 절정이 되는 것이다.
첫째로, 예수 부활의 새 아침은 인류에게 새 소망을 주는 아침입니다.
둘째로, 예수의 부활의 새 아침은 신앙의 확증을 주는 새 아침입니다.
셋째로, 예수의 부활의 아침은 영생의 문이 열리는 아침입니다.
오늘 이 부활의 아침에
높은 산이 낮아지고/ 깊은 골짜기는 높아지며
구부러진 길을 곧아지여 평지가 되며
영생의 대로로 고속도로가 열리는 아침
예수 다시 사셨네
나도 다시 살겠네
우리 모두 살겠네/
할렐루야
부활의 아침에 영광에 이루기를 부활하신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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