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절] 단순한 삶의 연장이 아닌 부활
본문
사두개인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하면 귀족 계급에 속했고 상위층에 있는 사람들이고 부와 명성을 누렸던 사람들입니다.
사두개인 중에 제사장들이 많았고 오늘날 국회와 같은 산헤드린 회원이 많이 있었습니다.
사두개인들은 부와 지위를 마음껏 누린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오셔서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 천국을 가르치시면서 부활을 가르쳤는데 그것이 사두개인과의 가르침과는 반대되는 것이었습니다.
원래 이들은 바리새인들과 적대 관계를 이루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부활이 있다고 외쳤거든요. 그러나 사두개인들은 웃기지 마라 부활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평소에는 사두개인과 바리새인이 적대 관계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시니까 바리새인들도 예수님을 싫어하고 사두개인도 예수님을 싫어하여 같은 적이 생기니까 전에는 따로 따로 지내며 적대시하던 사람들이 예수님을 공격하기 위해서 한편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모세 오경만을 성경으로 인정하였기 때문에
신명기 25:5-10에서의 역연혼의 법을 들어 예수님께 질문하였던 것은 그리 놀랄만한 일이 아닙니다. 역연혼 법이란 남편이 자녀 없이 죽으면 그 다음의 형제가 그 과부와 결혼하여 그 유업을 잇는 법을 말합니다.
전쟁은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상처를 안겨다 주었습니다.
남북으로 헤어진 이산가족들이 만날 때마다 들려오는 그들의 사연들은 듣는 이들로 하여금 매우 안타까운 마음을 갖게 합니다.
그런데 헤어진 가족과의 만남 속에서 정말 기뻐하기보다는 오히려 가족 간의 문제가 매우 복잡하게 되어서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는 가족도 있습니다.
정귀업 할머니는 북한에 52년을 기다려 남편을 만났지만 이미 북한에서 결혼을 하고 아내를 둔 가정을 이루었습니다.
그런데 통일이 되면 도대체 누가 이 사람의 아내가 되어야 합니까
북한의 아내를 포기해야 합니까
아니면 남한의 아내가 ' 둘째 부인'이라는 불명예를 안고 살아가야 합니까
도대체 누가 이 사람의 아내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옳단 말입니까
그리고 정부에서는 이 문제를 어떻게 처리해야 합니까
그렇다고 해서 한 사람이 두 명의 아내를 둘 수 있도록 법을 '일부다처제'로 고치는 것이 옳겠습니까
헤어진 가족과의 만남이라는 큰 기쁨을 안겨다 주는 것이 사실이겠지만 어떤 가족에게는 풀기 어려운 숙제를 남겨 놓을 수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을 향한 사두개인들의 질문이 바로 이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먼저 본문 23절에 보면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그 날에 예수께 와서 물어 가로되"라고 했습니다.
당시 유대사회를 대표하던 종교적 집단은 바리새파와 사두개파였습니다.
바리새파와 사두개파의 차이점은
바리새파가 몸의 부활을 믿었던 반면
사두개파는 부활을 믿지 않았다는데 있었습니다.
여태까지 살펴본 바에 의하면 예수를 공격했던 집단은 주로 바리새파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번엔 사두개파 사람들이 예수를 공격하는 일에 가세를 했습니다.
아마도 사두개파 사람들은 지금까지 바리새파 사람들이 예수를 공격해 보았지만 그들의 공격이 신통치 않다고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이번엔 자신들의 교리를 가지고서 예수를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24절에
"선생님이여 모세가 일렀으되 사람이 만일 자식이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그 아내에게 장가들어 형을 위하여 후사를 세울지니라 하였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사두개인들은 '모세가 일렀으되'라는 말로 공격의 말문을 열었습니다.
그들이 모세의 이름을 끄집어 낸 이유를 우리는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들의 주장에 무게를 더하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주장에 대해 무게를 싣기 위해 자기보다는 더 권위있는 사람을 내 세움으로서 자신의 주장에 대해 더 이상 반론을 펼 수 없게 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입니다.
특히 그들은 성경 중에서도 오직 모세오경(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만 가치 있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지금 신명기 25장 5절과 6절에 나오는 말씀을 근거로 자신들의 주장을 폈습니다.
즉 사람이 만일 자식이 없이 죽었을 경우 동생이 형수에게 장가들어 형을 위해 후사를 두는 문제였습니다.
실제로 신명기에서는 과부가 고인의 형제와 결혼하는 관습이 허용되고 있었습니다.
이 법에 따르면 사내아이를 얻지 못하고 아내가 지아비를 잃었을 경우, 그 사람은 남편의 형제나 혹은 가까운 친족이 결혼을 해서 그 첫아들을 죽은 자의 자식으로 여겨 그 대를 끊기지 않도록 해야 했고,
이 명령에 대해 불복하거나 내키지 않는 순종을 할 경우에는 벌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사두개파 사람들이 신명기의 말씀을 근거로 이야기를 꾸며 예수님께 난처한 질문을 던졌습니다.
25절에서 28절까지입니다.
"우리 중에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 장가들었다가 죽어 후사가 없으므로 그의 아내를 그 동생에게 끼쳐 두고 그 둘째와 셋째로 일곱째까지 그렇게 하다가 최후에 그 여자도 죽었나이다. 그런즉 저희가 다 그를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일곱 중에 뉘 아내가 되리이까"
그들의 얘기는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형이 장가를 들었지만 자식을 낳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그래서 둘째가 그 형수에게 장가를 들어 같이 살게 되었는데 얼마 있지 않아 둘째도 자식을 두지 못한 채 죽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이번엔 셋째가 형수에게 장가들어 같이 살게 되었는데 셋째 역시 얼마 있지 않아 자식 없이 죽고 말았습니다. 그와 같은 형태로 맨 막내인 일곱째까지 이 여인이 함께 살다가 마침내 그 여자도 죽었습니다. "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당신 말대로 사람이 부활한다면 부활 때에 이 사람은 도대체 누구의 아내가 되는 것입니까" 이것이 그들의 질문이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과연 누구의 아내라고 해야 옳은 것입니까
첫째입니까 아니면 둘째입니까 아니면 맨 마지막인 막내입니까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알아야 할 것이 한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이들의 의도가 부활을 부인하려는데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들은 부활을 부인하려 했던 것이었을까요
그것은 만약 부활이 있다면 자신들의 모든 행위가 드러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그들은 죽음으로서 자신들의 모든 행위를 묻어두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기억하고 싶지도 않은 일, 남에게 들키면 부끄럽고 창피한 일들을 그들이 저질렀는지도 모릅니다.
그런 이유때문에 그들은 부활을 극구 부인하고 싶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들로부터 질문을 받고 뭐라고 대답하셨습니까
29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도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라고 했습니다.
아마 그들은 자신들의 질문에 대해 이번만큼은 예수가 쉽게 대답 할 수 없을 것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대답은 거침이 없었습니다.
그들의 예상과는 달리 너무도 쉽게 그들의 질문에 대해 대답을 하십니다.
먼저 사두개파의 물음에 대해 주님은 두 가지 사실을 지적하셨습니다.
하나는 그들이 성경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는 것,
또 다른 하나는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을 알지 못했다는 것,
이 두 가지였습니다.
이상합니다. 사두개파 사람들은 분명히 성경을 근거로 해서 얘기했는데 주님은 왜 사두개인들이 성경을 알지 못했다는 것이었을까요
사실 그들이 인용한 신명기의 말씀은
죽은 형제의 후사를 잇게 하여 그 이름을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서 끊어지지 않게 하려는데 진정한 의미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이 말씀의 본 뜻이나 의미는 생각지 않고 부활이 없다는 자신들의 교리를 합리화시키기 위해, 그리고 예수님을 궁지에 몰아 넣기 위해 말씀을 자신들의 틀에 끼워 맞추었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은 이들이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적어도 그들이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을 알았다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결혼이 더 이상 요구되지 않는 방식으로 죽은 자를 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30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무슨 말입니까 장가가고 시집가는 것은 이 세상에서의 존재양식입니다.
하지만 부활의 때에는 더 이상 세상의 존재양식으로 우리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는 결혼을 하게 됩니다. 결혼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창세기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결혼이라는 제도를 허락하시면서 사람들에게 주신 책임이 있었습니다.
인류를 보존하는 일입니다.
창세기 1장 27절과 28절을 보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난 뒤, 제일 첫 번째 주신 명령이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을 정복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이 땅에 사는 동안에는 결혼을 통해 대(代)를 이어가게 됩니다.
왜냐하면 궁극적으로는 죽음이 모든 사람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명기에서 수혼제도를 허락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죽은 자의 대를 잇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부활 때, 우리들에게 찾아오는 세상은 더 이상 죽음이 존재하지 않는 세상입니다.
죽음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곳에서 죽은 자의 대를 잇기 위해 결혼하는 일도 없을 것입니다.
사두개인들은 부활을 지상에서의 삶의 연장정도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천국에 가면 우리보다 먼전에 간 성도들이 죽은 것이 아니라, 지금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은 죽음이라는 한계를 넘어 그들로 여전히 살아 있게 하십니다. 그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죽음을 잔다라고 표현합니다
여호와 하나님나라는 현세와 다르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의 삶이 연장되는 정도가 아니라 새로운 세계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천국에는 모든 사람들이 제한이나 질투 없이 서로 사랑할 수 있는 관계에 이를 수 있는 곳입니다.
천국에 갔는 데 여전히 돈 받을 사람을 만난다는 것, 상상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천국 세계를 가리켜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계21:4)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앞으로 우리가 만나게 될 세상이 이 땅에서의 삶의 연장이라면 우리는 소망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살아온 삶의 여정들이 고달프고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짐의 아픔도 겪고,
지나온 서러운 세월 때문에 눈물을 훔쳤던 적이 한 두번이 아니었는데
또 다시 그런 세상이 연장되어진다면 누가 그 세상을 사모하고 기다리겠습니까
고린도전서 15장 42절에서 44절 말씀을 보면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 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 때는 때때로 썩을 것으로 심기도 하고, 욕된 것으로 심기도 하고, 약한 것으로 심기도 했지만
부활 때에는 썩지 않은 것으로 다시 살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게 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과 논리를 벗어나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너희가 부활을 믿지 못하는 것은 성경을 깨닫지 못할 뿐이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을 너희들이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부활 중에서 30절에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안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 같으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 천국에서 장가도 안가고 시집도 안가면 무슨 재미에 살겠어요" 그러시겠습니까
여기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이 땅에서 사는 대로 천국에서 사는 것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천국의 삶은 이 땅의 삶의 연장이 아니라, 새로운 삶의 시작입니다.
우리가 의심하는 이유는 바로 이런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무지 때문입니다.
사두개인들은 모세오경을 그토록 중시하고 있었지만 실상은 모세오경에 나오는 말씀을 올바르게 알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참 그렇습니다. 성경에 기록되어진 그대로 여호와 하나님은 죽은 자의 여호와 하나님이 아닙니다.
산 자의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도 살아서 여전히 역사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주님의 말씀앞에 사두개인들의 모습이 어떠합니까
33절에 "무리가 듣고 그의 가르침에 놀라더라" 의기양양하게 예수를 곤경에 빠트리려 했다가 아무 소리도 못하고 함구하는 사두개인들의 모습입니다.
이 시간 저와 여러분이 다시 한번 주를 생각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산 자의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은 살아 있습니까
지상의 삶은 거의 모두가 실수와 병눈물한숨탄식의 경험들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삶들이 부활의 때에 다시 재현된다면 부활은 기쁨과 찬양, 축제의 시간이 아닌 수치와 후회의 시간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부활을 희망하며 기다릴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에게서 발견하는 전 역사는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화해되었고 올바르게 회복되었으며, 치유되었고, 완성된 삶의 역사로서 발견입니다. 그러므로 이 현세에서 심한 장애인으로 살던 삶이나, 일찍 죽은 어린아이의 삶도 부활의 때에서는 치유되고 완성된 삶으로 발견되기 때문에 그때가 기쁨과 은혜충만영광의 때가 됩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부활은 새 창조입니다. 부활이 새 창조라 함은 완전히 옛것과의 단절에서 다른 것을 만들어 낸다는 뜻이 아니며, 사멸할 이 삶이 영원한 삶으로서의 새 창조, 곧 우리의 삶이 신적인 삶 속으로 받아들여진다는 뜻에서 새 창조입니다.
부활의 목적과 중심은 여호와 하나님과의 온전한 교제에 있기 때문에 부활의 때는 이 현세에서의 삶의 목적이 완전히 성취되는 때입니다.
부활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생의 의미며 목적 그 자체입니다.
만약 부활이 없다면 우리는 진정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생이 이 현실의 삶으로 끝난다면 허무한 것입니다.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이 참여할 그 부활의 생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현실에서 불의와 타협하지 않게 되고, 현실에서 고난이 있지만 소망의 인내 가운데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부활은 의혹과 갈등이 많은 이 현세에서 진정 찬란한 친교의 세계로 나아가는 길을 열어 놓았습니다. 우리는 미움과 증오, 불신을 넘어서서 진정 화해하고 사랑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눈물과 한숨이 있는 이 현세에서 희망과 찬미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떠한 유형의 죽음 앞에서도 두려워하며 떨지 아니하고 담대히 죽음의 관문을 통과해 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떠한 불의와 위협에 직면하더라도 좌절하지 않고 당당히 정의의 길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부활이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죽은 자들의 장례식만을 치르는 장의사가 아닙니다. 교회는 죽음의 관문을 뚫고 영원한 세계로 들어가게 하는 부활의 공동체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죽은 자의 여호와 하나님이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살아있는 사람의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우리는 이 영원한 삶에 대한 약속과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사후의 세계를 믿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습니다".
사후 세계를 믿는 것은 기독교적 부활 신앙이 아닙니다.
우리는 영혼 불멸을 믿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과 거룩한 친교 가운데 있는 삶은 결코 폐기되지 않고 여호와 하나님 안에서 완성되고 변형된다는 것을 믿습니다.
부활은 삶의 완성의 시간입니다.
사두개인 중에 제사장들이 많았고 오늘날 국회와 같은 산헤드린 회원이 많이 있었습니다.
사두개인들은 부와 지위를 마음껏 누린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오셔서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 천국을 가르치시면서 부활을 가르쳤는데 그것이 사두개인과의 가르침과는 반대되는 것이었습니다.
원래 이들은 바리새인들과 적대 관계를 이루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부활이 있다고 외쳤거든요. 그러나 사두개인들은 웃기지 마라 부활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평소에는 사두개인과 바리새인이 적대 관계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시니까 바리새인들도 예수님을 싫어하고 사두개인도 예수님을 싫어하여 같은 적이 생기니까 전에는 따로 따로 지내며 적대시하던 사람들이 예수님을 공격하기 위해서 한편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모세 오경만을 성경으로 인정하였기 때문에
신명기 25:5-10에서의 역연혼의 법을 들어 예수님께 질문하였던 것은 그리 놀랄만한 일이 아닙니다. 역연혼 법이란 남편이 자녀 없이 죽으면 그 다음의 형제가 그 과부와 결혼하여 그 유업을 잇는 법을 말합니다.
전쟁은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상처를 안겨다 주었습니다.
남북으로 헤어진 이산가족들이 만날 때마다 들려오는 그들의 사연들은 듣는 이들로 하여금 매우 안타까운 마음을 갖게 합니다.
그런데 헤어진 가족과의 만남 속에서 정말 기뻐하기보다는 오히려 가족 간의 문제가 매우 복잡하게 되어서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는 가족도 있습니다.
정귀업 할머니는 북한에 52년을 기다려 남편을 만났지만 이미 북한에서 결혼을 하고 아내를 둔 가정을 이루었습니다.
그런데 통일이 되면 도대체 누가 이 사람의 아내가 되어야 합니까
북한의 아내를 포기해야 합니까
아니면 남한의 아내가 ' 둘째 부인'이라는 불명예를 안고 살아가야 합니까
도대체 누가 이 사람의 아내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옳단 말입니까
그리고 정부에서는 이 문제를 어떻게 처리해야 합니까
그렇다고 해서 한 사람이 두 명의 아내를 둘 수 있도록 법을 '일부다처제'로 고치는 것이 옳겠습니까
헤어진 가족과의 만남이라는 큰 기쁨을 안겨다 주는 것이 사실이겠지만 어떤 가족에게는 풀기 어려운 숙제를 남겨 놓을 수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을 향한 사두개인들의 질문이 바로 이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먼저 본문 23절에 보면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그 날에 예수께 와서 물어 가로되"라고 했습니다.
당시 유대사회를 대표하던 종교적 집단은 바리새파와 사두개파였습니다.
바리새파와 사두개파의 차이점은
바리새파가 몸의 부활을 믿었던 반면
사두개파는 부활을 믿지 않았다는데 있었습니다.
여태까지 살펴본 바에 의하면 예수를 공격했던 집단은 주로 바리새파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번엔 사두개파 사람들이 예수를 공격하는 일에 가세를 했습니다.
아마도 사두개파 사람들은 지금까지 바리새파 사람들이 예수를 공격해 보았지만 그들의 공격이 신통치 않다고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이번엔 자신들의 교리를 가지고서 예수를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24절에
"선생님이여 모세가 일렀으되 사람이 만일 자식이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그 아내에게 장가들어 형을 위하여 후사를 세울지니라 하였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사두개인들은 '모세가 일렀으되'라는 말로 공격의 말문을 열었습니다.
그들이 모세의 이름을 끄집어 낸 이유를 우리는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들의 주장에 무게를 더하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주장에 대해 무게를 싣기 위해 자기보다는 더 권위있는 사람을 내 세움으로서 자신의 주장에 대해 더 이상 반론을 펼 수 없게 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입니다.
특히 그들은 성경 중에서도 오직 모세오경(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만 가치 있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지금 신명기 25장 5절과 6절에 나오는 말씀을 근거로 자신들의 주장을 폈습니다.
즉 사람이 만일 자식이 없이 죽었을 경우 동생이 형수에게 장가들어 형을 위해 후사를 두는 문제였습니다.
실제로 신명기에서는 과부가 고인의 형제와 결혼하는 관습이 허용되고 있었습니다.
이 법에 따르면 사내아이를 얻지 못하고 아내가 지아비를 잃었을 경우, 그 사람은 남편의 형제나 혹은 가까운 친족이 결혼을 해서 그 첫아들을 죽은 자의 자식으로 여겨 그 대를 끊기지 않도록 해야 했고,
이 명령에 대해 불복하거나 내키지 않는 순종을 할 경우에는 벌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사두개파 사람들이 신명기의 말씀을 근거로 이야기를 꾸며 예수님께 난처한 질문을 던졌습니다.
25절에서 28절까지입니다.
"우리 중에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 장가들었다가 죽어 후사가 없으므로 그의 아내를 그 동생에게 끼쳐 두고 그 둘째와 셋째로 일곱째까지 그렇게 하다가 최후에 그 여자도 죽었나이다. 그런즉 저희가 다 그를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일곱 중에 뉘 아내가 되리이까"
그들의 얘기는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형이 장가를 들었지만 자식을 낳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그래서 둘째가 그 형수에게 장가를 들어 같이 살게 되었는데 얼마 있지 않아 둘째도 자식을 두지 못한 채 죽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이번엔 셋째가 형수에게 장가들어 같이 살게 되었는데 셋째 역시 얼마 있지 않아 자식 없이 죽고 말았습니다. 그와 같은 형태로 맨 막내인 일곱째까지 이 여인이 함께 살다가 마침내 그 여자도 죽었습니다. "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당신 말대로 사람이 부활한다면 부활 때에 이 사람은 도대체 누구의 아내가 되는 것입니까" 이것이 그들의 질문이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과연 누구의 아내라고 해야 옳은 것입니까
첫째입니까 아니면 둘째입니까 아니면 맨 마지막인 막내입니까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알아야 할 것이 한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이들의 의도가 부활을 부인하려는데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들은 부활을 부인하려 했던 것이었을까요
그것은 만약 부활이 있다면 자신들의 모든 행위가 드러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그들은 죽음으로서 자신들의 모든 행위를 묻어두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기억하고 싶지도 않은 일, 남에게 들키면 부끄럽고 창피한 일들을 그들이 저질렀는지도 모릅니다.
그런 이유때문에 그들은 부활을 극구 부인하고 싶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들로부터 질문을 받고 뭐라고 대답하셨습니까
29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도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라고 했습니다.
아마 그들은 자신들의 질문에 대해 이번만큼은 예수가 쉽게 대답 할 수 없을 것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대답은 거침이 없었습니다.
그들의 예상과는 달리 너무도 쉽게 그들의 질문에 대해 대답을 하십니다.
먼저 사두개파의 물음에 대해 주님은 두 가지 사실을 지적하셨습니다.
하나는 그들이 성경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는 것,
또 다른 하나는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을 알지 못했다는 것,
이 두 가지였습니다.
이상합니다. 사두개파 사람들은 분명히 성경을 근거로 해서 얘기했는데 주님은 왜 사두개인들이 성경을 알지 못했다는 것이었을까요
사실 그들이 인용한 신명기의 말씀은
죽은 형제의 후사를 잇게 하여 그 이름을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서 끊어지지 않게 하려는데 진정한 의미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이 말씀의 본 뜻이나 의미는 생각지 않고 부활이 없다는 자신들의 교리를 합리화시키기 위해, 그리고 예수님을 궁지에 몰아 넣기 위해 말씀을 자신들의 틀에 끼워 맞추었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은 이들이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적어도 그들이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을 알았다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결혼이 더 이상 요구되지 않는 방식으로 죽은 자를 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30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무슨 말입니까 장가가고 시집가는 것은 이 세상에서의 존재양식입니다.
하지만 부활의 때에는 더 이상 세상의 존재양식으로 우리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는 결혼을 하게 됩니다. 결혼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창세기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결혼이라는 제도를 허락하시면서 사람들에게 주신 책임이 있었습니다.
인류를 보존하는 일입니다.
창세기 1장 27절과 28절을 보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난 뒤, 제일 첫 번째 주신 명령이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을 정복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이 땅에 사는 동안에는 결혼을 통해 대(代)를 이어가게 됩니다.
왜냐하면 궁극적으로는 죽음이 모든 사람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명기에서 수혼제도를 허락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죽은 자의 대를 잇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부활 때, 우리들에게 찾아오는 세상은 더 이상 죽음이 존재하지 않는 세상입니다.
죽음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곳에서 죽은 자의 대를 잇기 위해 결혼하는 일도 없을 것입니다.
사두개인들은 부활을 지상에서의 삶의 연장정도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천국에 가면 우리보다 먼전에 간 성도들이 죽은 것이 아니라, 지금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은 죽음이라는 한계를 넘어 그들로 여전히 살아 있게 하십니다. 그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죽음을 잔다라고 표현합니다
여호와 하나님나라는 현세와 다르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의 삶이 연장되는 정도가 아니라 새로운 세계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천국에는 모든 사람들이 제한이나 질투 없이 서로 사랑할 수 있는 관계에 이를 수 있는 곳입니다.
천국에 갔는 데 여전히 돈 받을 사람을 만난다는 것, 상상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천국 세계를 가리켜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계21:4)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앞으로 우리가 만나게 될 세상이 이 땅에서의 삶의 연장이라면 우리는 소망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살아온 삶의 여정들이 고달프고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짐의 아픔도 겪고,
지나온 서러운 세월 때문에 눈물을 훔쳤던 적이 한 두번이 아니었는데
또 다시 그런 세상이 연장되어진다면 누가 그 세상을 사모하고 기다리겠습니까
고린도전서 15장 42절에서 44절 말씀을 보면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 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 때는 때때로 썩을 것으로 심기도 하고, 욕된 것으로 심기도 하고, 약한 것으로 심기도 했지만
부활 때에는 썩지 않은 것으로 다시 살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게 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과 논리를 벗어나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너희가 부활을 믿지 못하는 것은 성경을 깨닫지 못할 뿐이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을 너희들이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부활 중에서 30절에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안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 같으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 천국에서 장가도 안가고 시집도 안가면 무슨 재미에 살겠어요" 그러시겠습니까
여기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이 땅에서 사는 대로 천국에서 사는 것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천국의 삶은 이 땅의 삶의 연장이 아니라, 새로운 삶의 시작입니다.
우리가 의심하는 이유는 바로 이런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무지 때문입니다.
사두개인들은 모세오경을 그토록 중시하고 있었지만 실상은 모세오경에 나오는 말씀을 올바르게 알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참 그렇습니다. 성경에 기록되어진 그대로 여호와 하나님은 죽은 자의 여호와 하나님이 아닙니다.
산 자의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도 살아서 여전히 역사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주님의 말씀앞에 사두개인들의 모습이 어떠합니까
33절에 "무리가 듣고 그의 가르침에 놀라더라" 의기양양하게 예수를 곤경에 빠트리려 했다가 아무 소리도 못하고 함구하는 사두개인들의 모습입니다.
이 시간 저와 여러분이 다시 한번 주를 생각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산 자의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은 살아 있습니까
지상의 삶은 거의 모두가 실수와 병눈물한숨탄식의 경험들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삶들이 부활의 때에 다시 재현된다면 부활은 기쁨과 찬양, 축제의 시간이 아닌 수치와 후회의 시간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부활을 희망하며 기다릴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에게서 발견하는 전 역사는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화해되었고 올바르게 회복되었으며, 치유되었고, 완성된 삶의 역사로서 발견입니다. 그러므로 이 현세에서 심한 장애인으로 살던 삶이나, 일찍 죽은 어린아이의 삶도 부활의 때에서는 치유되고 완성된 삶으로 발견되기 때문에 그때가 기쁨과 은혜충만영광의 때가 됩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부활은 새 창조입니다. 부활이 새 창조라 함은 완전히 옛것과의 단절에서 다른 것을 만들어 낸다는 뜻이 아니며, 사멸할 이 삶이 영원한 삶으로서의 새 창조, 곧 우리의 삶이 신적인 삶 속으로 받아들여진다는 뜻에서 새 창조입니다.
부활의 목적과 중심은 여호와 하나님과의 온전한 교제에 있기 때문에 부활의 때는 이 현세에서의 삶의 목적이 완전히 성취되는 때입니다.
부활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생의 의미며 목적 그 자체입니다.
만약 부활이 없다면 우리는 진정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생이 이 현실의 삶으로 끝난다면 허무한 것입니다.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이 참여할 그 부활의 생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현실에서 불의와 타협하지 않게 되고, 현실에서 고난이 있지만 소망의 인내 가운데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부활은 의혹과 갈등이 많은 이 현세에서 진정 찬란한 친교의 세계로 나아가는 길을 열어 놓았습니다. 우리는 미움과 증오, 불신을 넘어서서 진정 화해하고 사랑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눈물과 한숨이 있는 이 현세에서 희망과 찬미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떠한 유형의 죽음 앞에서도 두려워하며 떨지 아니하고 담대히 죽음의 관문을 통과해 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떠한 불의와 위협에 직면하더라도 좌절하지 않고 당당히 정의의 길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부활이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죽은 자들의 장례식만을 치르는 장의사가 아닙니다. 교회는 죽음의 관문을 뚫고 영원한 세계로 들어가게 하는 부활의 공동체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죽은 자의 여호와 하나님이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살아있는 사람의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우리는 이 영원한 삶에 대한 약속과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사후의 세계를 믿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습니다".
사후 세계를 믿는 것은 기독교적 부활 신앙이 아닙니다.
우리는 영혼 불멸을 믿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과 거룩한 친교 가운데 있는 삶은 결코 폐기되지 않고 여호와 하나님 안에서 완성되고 변형된다는 것을 믿습니다.
부활은 삶의 완성의 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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