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절] 산 자와 죽은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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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지를 방문해 보셨습니까 묘지를 가게 되면 그 앞에는 항상 묘비명이 있습니다. 유명한 사람들도 자기 묘지 앞에 묘비명을 남깁니다. 임마뉴엘 칸트는 이런 묘비명을 남겼습니다. "하늘에는 별을 가슴에는 진리를" 혹은 음악가 슈베르트는 이런 묘비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음의 예술은 여기 풍부한 재산을 묻었노라. " 여러 가지 묘비명을 읽어보면 대부분 이런 내용들입니다. "우리들의 다정한 친구 여기 잠들다. 편히 잠드소서. 우리들의 위대한 스승 여기에 누워 있다. " 시체가 여기에 있다는 얘기들입니다. 우리 예수님의 묘비명이 어떤지 아십니까
주님이 부활하시던 그 새벽에 묘비명을 천사가 외쳤습니다. "그는 여기에 계시지 아니 하느니라. 그가 살아나셨느니라. " 이것이 주님의 묘비명이 될 것입니다. 실제로 예루살렘에 가보면 주님의 무덤이라고 추정되는 그 곳에 문이 있습니다. 무덤 문 앞에는 이런 글이 있습니다. "그는 살아나셨다. 그는 일어나셨다. 살아 계신다. " 이런 글을 써 두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살아나셨습니다. 예수님은 다시 사셨습니다. 그는 산 자입니다. 그가 살아 계시는 분이십니다.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지옥문을 여시고 무덤 문을 여시고 오늘 새벽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은총이 사랑하는 성도들의 개인과 가정 가운데 삶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은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산 자입니다. 그뿐 아니라 산 자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모두다 산 자들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이 살아 계시는 것을 믿지 못하면 살아 움직이고 있어도 그는 산 자가 아니라 죽은 자라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부활을 아주 실감나게 그리고 있는 이 본문 말씀, 이 속에서 우리는 산 자와 죽은 자를 대비해 볼 수 있습니다. 제가 만약 영화를 찍는 감독이라면 오늘 본문을 가지고 적어도 3장면을 찍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먼저 마리아와 또 다른 마리아 샬롬에가 향품을 손에 들고 무덤을 향해 가는 그 장면을 하나 찍을 것입니다.
그리고 무덤에 도착해서 무덤에서 주어지는 모든 일들을 또 한 장면 찍을 것입니다. 그리고 무덤을 등지고 돌아오는 그 장면을 또한 찍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 첫 장면을 같이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첫 장면은 이런 제목을 붙이면 적당할 것입니다. "무덤을 향하여" 그런데 무덤을 향해가는 여인들의 발걸음은 산 자의 발걸음이 아니라 죽은 자의 행진이었습니다. 1절 말씀입니다. "안식 후 첫날 새벽에 이 여자들이 그 예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가서" 여자들은 지금 무덤을 향해서 가고 있습니다. 이 여자들은 예수님에게 모든 희망을 걸었던 사람들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행복해 졌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사는 이유를 알았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기쁨이 무엇인지 알았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사는 목표가 생긴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사실은 예수님만 죽은 것이 아니라 여인들도 함께 죽어 버렸습니다. 그들의 소망도 사라졌습니다. 그들의 기쁨도 사라졌습니다. 그들의 목표도 사라졌습니다. 그들 속에 있는 큰 소망도 모두 함께 사라져 갔던 것입니다. 그들은 울면서 가슴을 두드렸습니다. 드디어 칠흙 같은 밤이 지나갔습니다. 안식일이 지나갔습니다. 금요일 밤부터 토요일 밤까지 계속 이어진 안식일이 모두 지나갔습니다. 그들은 이제 주일 새벽이 밝아 오지 전에 무덤을 향해 걷기 시작했습니다. 죽은 자 예수님에게 드릴 향품이 그들 손에 들려 있었습니다.
그들의 발걸음에는 슬픔이 가득차 있습니다. 그들의 발걸음에는 절망이 가득차 있었습니다. 손에는 죽은 자들을 위한 물건인 향품이 들려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지금 어디를 향해 가고 있습니까 무덤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누구를 만나기 위하여 갑니까 죽은자 예수 그리스도의 시체를 만나기 위하여 지금 걸음을 재촉학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살아 있기는 해도 사실은 죽은 자와 다를바 없습니다. 여기 제가 한자를 하나 섰습니다. "미망인" 누구를 보고 미망인이라고 합니까 과부들, 남편이 죽은 사람들을 보고 미망인이라고 말합니다. 그 뜻이 재미있지 않습니까 미처 죽지 못해 사는 사람, 못 죽어서 사는 사람, 아직 죽지 않은 사람, 살아 있어도 죽은 사람과 다름바 없는 사람, 이런 뜻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사실 여인들의 상태를 이 말로 우리는 요약할 수 있습니다.
살아 있어도 예수님 없는 삶, 그것은 죽은 것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그들의 기쁨도 만족도 희망도 모두 사라진 참으로 죽은 자 같은 모습으로 힘없이 지금 무덤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이 부활절 예배에 참석하신 성도 여러분 지금 우리의 상태가 어떠합니까 마땅히 감격을 가지고 힘있는 발걸음으로 와야 하는데 마치 무덤을 찾아오듯이 힘없이 이 곳에 찾아오신 분은 없으십니까 손에 향품을 든체 맨날 좋았던 시절을 생각하는 여인들처럼 옛날 생각이 나면서 여기 앉아 있는 감격 없이 예배드리는 성도들이 있으십니까 우리들이 마음속으로는 예수를 믿는다고 말하지만 때때로 무덤을 향해 갈 때가 있습니다. 죽은 예수만을 기억하는 죽은 자의 행진을 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 앞에 닥쳐오는 시련들, 절망들을 바라보면서 낙심하는 그런 순간들이 있습니다.
내가 바라는 대로 잘 되지 않는다고 실망하고 낙담하는 순간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좌절을 느낄때가 있습니다. 내가 믿고 의지하는 것들이 흔들릴 때, 우리도 함께 흔들리는 그런 순간이 많이 있었던 것을 고백합니다. 그런 순간은 바로 우리도 모르게 무덤을 향해 죽은 자의 행진을 우리가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1517년에 마틴루트가 종교 개혁을 했습니다. 수많은 원수들이 있었습니다. 마틴루트를 죽이기 위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개략을 꾸몄습니다. 그는 아주 고통 중에 살고 있었습니다. 말할 수 없는 수많은 반대자들을 바라보면서 마틴루트는 실망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날도 아주 낙심하는 가운데 쳐진 모습으로 앉아 있는데 옆방에서 우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자기 아내의 우는 소리였습니다. 깜짝 놀라서 그 방을 찾아갔더니 소복을 입은 자가 아내가 울고 있었습니다. "여보 웬일이요" "글세 여호와 하나님이 죽었지 뭐예요. 그래서 내가 슬피 울고 있어요. " "무슨 소리 여호와 하나님은 살아 계신데 왜 죽었다고 하는 것이요. " "여호와 하나님이 살아 계시면 왜 당신은 힘없고 낙심하는 모습을 거기에 앉아 계세요" 성도 여러분 주님이 살아 계시는 것을 믿지 못하고 나 혼자 염력하고 걱정하는 것은 무덤을 향해 가는 죽은 자의 행진이 될 것입니다. 실패했다고 좌절해 버리는 것은 무덤을 향해 가는 죽은 자의 행진,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낙심하는 것은 무덤을 향해 가는 죽은 자의 행진입니다. 때때로 예수 믿는 사람도 질병에 걸리 때가 있지 않습니까 내 몸이 점점 약해지고 병이 낫지 않는다고 절망하는 것은 바로 주님의 시체를 만날 가는 죽은 자의 행진에 불과 할 것입니다.
교회를 몇 년 다녔고 직분이 무엇인지, 그것은 상관이 없습니다. 참으로 지금 내가 이렇게 죽음을 향해 가고 있으면 나는 살아 있어도 죽은 자와 다를바 없을 것입니다. 주님을 향해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외치지만 세상 속에 나가서 세상 사람과 똑같이 염려하고 걱정하고 좌절한다고 하면 우리는 이름만 성도이지 죽은 자와 다를바 없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무덤을 향해가는 사람은 여기에 없습니까 오늘 내가 무덤을 향해가면 나는 살아 있어도 죽은 자와 다를바 없습니다. 오늘 이 부활의 아침에 무덤을 향한 행진을 중단하시기 바랍니다. 시체를 향한 행진을 중단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죽은 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산 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살아 있는 성도들입니다.
어떤 절망의 상황에도 일어나는 사람들입니다. 죽어도 사는 성도들입니다. 오늘 주님의 말씀입니다. 요한복음11:25,26절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주지 아니하리니 이것은 네가 믿느냐. " 이것을 믿으십니까 우리는 살아 있는 자들입니다. 살아 계신 부활의 주님을 믿는 자는 어떤 죽음의 상황에도 일어나는 산 자들입니다. 무덤을 향해 가는 죽은 자의 행진을 중단하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살아 계신 주님을 만나기 위해서 가는 산 자의 행진으로 바꾸는 은혜의 부활절 아침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 다음 장면을 같이 찍겠습니다.
드디어 이 여인들은 무덤에 도착했습니다. 무덤에서 여인들은 귀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무덤에서 그들은 산 자를 만나는 경험을 합니다. 무덤에 도착한 여인들의 관심, 여전히 예수님의 시체에 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시체를 찾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시체가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시체, 이 말이 얼마나 어색합니까 살아 있는 자의 시체, 이것은 말도 안돼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시체라니, 이것은 성립할 수 없는 말의 결합입니다. 살아 계신 분은 시체가 없어야 합니다. 그러나 죽음의 믿음을 가진 사람은 시체를 찾게 됩니다. 죽은 자의 눈은 불가능한 것만을 바라봅니다. 죽은 자의 눈은 절망만을 바라봅니다.
자신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자인 것을 바라보게 됩니다. 모든 것을 비관적으로 봅니다. 모든 것을 부정적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모든 것을 할 수 없는 것으로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3,4절 말씀입니다. "들어가니 주 예수의 시체가 뵈지 아니하더라 이를 인하여 근심할 때에" 그들은 시체가 보이지 않아서 근심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산 자이십니다. 산 자는 시체가 없는 것이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여인들은 시체를 계속 찾고 있는 것입니다. 죽은 자의 눈은 시체밖에는 보지 못합니다. 산 자에 대하여 관심이 없습니다. 여러분 살아 계신 주님을 만나는 부활 신앙을 가지기 전에는 절대로 이 귀한 주님의 부활을 이해 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을 믿는 것으로 만족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살아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산 믿음을 소유할 때 우리의 믿음은 완성되게 되는 것입니다. 미켈란젤로라고 하는 유명한 화가가 있습니다. 그의 제자가 하나 있었는데, 그 제자는 늘 그리는 그림, 늘 하는 조각이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 밖에는 없었습니다. 그 일그러진 모습, 고통 당하고 피 흘리는 그 주님의 모습만을 그렸습니다. 하루는 제자를 불렀습니다. "자네는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밖에는 그릴 줄 모르는 가 이제부터는 부활하신 예수, 살아 계시는 예수, 우리와 동행하시는 그 예수님의 영광의 모습도 그리도록 하게.
" 여러분 십자가에 고난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 분의 고난의 생각하면 눈물 짖는 것으로 만족하지 마십시오. 우리 속에 만일 살아 계신 주님, 나와 동행하시는 부활하신 주님을 확실한 믿음이 없이는 십자가의 믿음은 완성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지난 40일 동안 사순절을 지켰습니다. 지난 두 주간 동안 '특별 새벽 기도회'를 했습니다. 저는 이 모든 기간에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만약에 사순절로만 이어지는 기독교라면 이거 얼마나 재미가 없겠는가 목사하기도 참 어렵겠다. '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사순절의 모든 고난에 끝에는 부활의 영광이 기다리고 있지 않습니까! 오늘 이 아침의 부활의 감격적인 예배를 드리고 있지 않습니까! 십자가의 끝에는 부활의 영광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모든 십자가의 고난의 끝에는 부활의 영광의 주님을 우리가 만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을 믿는 신앙은 살아 계신 주님을 만나는 신앙으로 성숙할 수 있게 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이 여인들이 어떻게 살아 계신 주님을 분명히 믿는 믿음으로 자라게 되었습니까 이 여자들은 말씀을 듣게 되었습니다. 5,6절 말씀입니다. "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니 두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는냐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라. " 천사들은 그들이 무덤 속에서 죽은 시체를 찾고 있는 것을 책망했습니다. "왜 살아 계신 주님을 무덤 속에서 찾고 있느냐" 그렇게 책망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도록 도와주었습니다. 예수님은 미리 말씀하신 대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3일 만에 다시 살아나야 한다는 말을 깊이 기억시켜 주었습니다.
여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깊이 회상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죽으시고 난 다음에 말씀하신 그대로 오늘 새벽에 분명히 살아나셨구나. " 말씀을 기억하고 말씀이 자기들의 생각과 마음을 지배하는 그 순간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대한 믿음이 자라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지 주님이 부활하셨구나!" 엠마을로 향하는 제자들도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 만난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을 전해 주었습니다. 말씀을 듣고 있는 그들의 마음은 뜨거워졌습니다. 주님과 헤어진 다음에 그들이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까 "주님의 말씀을 들을 때 우리의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들을 때 이 말씀이 우리로 하여금 살아 계신 주님을 믿을 수 있는 귀한 능력이 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이 시간 여러분들은 살아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메시지를 듣고 계십니다.
이 말씀을 들으시는 이 선포되는 이 말씀을 듣는 이 순간에 믿음으로 '아멘'하며 이 말씀을 영접해 들으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될 때 산 자이신 예수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기록된 여호와 하나님이 말씀인 성경을 그대로 '아멘'하며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살아 계신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믿게 되자 여인들의 눈도 바뀌게 되었습니다. 예전에는 시체를 찾는 죽은 눈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산 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찾는 눈으로 바뀌게 되었던 것입니다. 열린 무덤 문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깨달았습니다. "아하! 부활의 주님이 저 문을 여셨구나!" 그들은 빈 무덤을 보았습니다. "그러면 그렇지 무덤에 주님이 없는 것이 참으로 당연한 것이 아닌가" 빈 무덤의 영광을 그들은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침침한 그 무덤 속에서 천사들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무엇입니까 불가능과 절망과 좌절이 시체입니까 여러분 시체를 보지 마십시오. 시체를 찾지 마십시오. 시체는 없습니다. 산 자의 눈으로 무덤 안을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인생의 여러면 가운데 무덤과 같은 환경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산 자의 눈으로 그 무덤을 바라보십시오. 무덤의 영광을 바라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 인생에 가로 막혀 있는 수많은 돌문들이 산 자이신 예수님의 부활과 함께 이미 굴러가 버린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산 자 앞에는 무덤 문이 가로 막혀 있을 수 없습니다. 산 예수 그리스도 앞에는 무덤 문이 절대 주님을 방해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내 인생의 모든 무덤은 이제는 무덤이 아닙니다. 그것은 빈 무덤이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무덤을 빈 무덤으로 이해하게 될 때 우리 인생에는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시체 없는 무덤 이것이 빈 무덤이 아닙니까 여러분 시체 대신에 무엇이 있습니까 그 무덤에 시체 대신 있는 것은 바로 영광스러운 천사들의 모습이었습니다. 천사가 있는 곳을 우리가 무엇이라고 합니까 그것은 바로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노래하지 않습니까 "내 영혼이 은총 입어 주가 쥔 짐 벗고 보니 슬픔 많은 이 세상도 그 어디나 하늘나라. " 우리의 눈, 산 눈, 부활 신앙의 눈으로 보면 무덤 속에 천사가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인생의 여러 면에서 천사를 보시기 바랍니다. 살아 계시는 주님의 영광을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무덤이 아닙니다. 어디 있든지 산 자의 눈으로 보면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요, 주님의 영광이 충만한 곳이 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주변에 만나는 사람들을 바라보십시오. 그 사람의 얼굴이 어떠하든지 나에게 해를 끼치는 사람들인지, 나를 미워하는 사람들인지 상관없이 그들이 천사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부활의 눈, 산 눈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천사를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내 인생의 모든 절망과 좌절의 현장은 살아 계신 예수님과 함께 새 소망과 새 기쁨이 잉태 곳임을 믿음으로 고백하는 귀한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새는 알에서 깨어나지 않습니까 그런데 새가 날개를 치면서 알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셨습니까 불가능합니다. 이미 알에서 나온 새는 절대로 안으로 들어가지 않습니다. 여러분 병아리를 보셨습니까 그것도 역시 알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병아리가 알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셨습니까 천만에 말씀, 불가능한 일입니다. 아름다운 나비를 보셨습니까 나비가 훨훨 날아서 다시 빠져 나왔던 그 고치 속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셨습니까 천만에 말씀, 불가능한 일입니다. 예수님도 무덤 속에서 나오셨습니다. 주님은 다시 무덤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그분은 살아 계시는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나사로도 죽었다가 3일만에 살아났지만 그러나 그는 다시 죽음으로 무덤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무덤에서 나온 이후 다시 무덤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이 땅에 많은 종교 창설자들의 무덤은 존재하고 있습니다. 수많은 뼈들이 아직도 이 땅에 있습니다. 수많은 뼈 조각들이 지금도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의 뼈 조각은 없습니다. 주님의 죽음의 모든 흔적은 없습니다. 그분은 무덤을 빠져 나오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도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의 무덤, 사망의 무덤을 빠져 나온 사람들이입니다. 빠져 나온 곳으로 다시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부활의 신앙을 가진 자는 다시 사망 속으로 들어가지 않습니다. 염려 속으로 들어가지 않습니다. 절망 속으로 들어가지 않습니다.
모든 빠져 나온 무덤을 다시는 돌아가지 않고 산 자와 더불어 산 자의 행진을 시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부활하신 산 자 예수님을 말씀으로 다시 만나셔서 산 신앙, 부활 신앙을 회복하는 산 성도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이제 또 한 장면을 봅시다. 세 번째 장면입니다. 드디어 여인들은 무덤에서 말씀을 통해 주님을 만나고 무덤을 등지고 세상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합니다. 무덤을 등지고 부활하신 주님을 확신하고 가는 그들의 발걸음은 죽은 자의 행진이 아니었습니다. 산 자의 행진이었습니다. 죽은 자의 모습으로 향품을 들고 두려워하는 가운데 비판하는 마음을 가지고 무덤을 향해 왔던 여인들은 무덤에서 살아 계신 예수님을 말씀으로 만났습니다.
이제 드디어 무덤을 등지고 부활의 소망을 가진 체 세상을 향해가고 있습니다. 산 자의 행진이 시작이 되었던 것입니다. 8,9절 말씀입니다. "저희가 예수의 말씀을 기억하고 무덤에서 돌아가 이 모든 것을 열한 사도와 모든 다른 이에게 고하니" 무덤을 향해 올 때는 그들의 발걸음이 너무나 무거웠습니다. 죽은 자의 발걸음이었습니다. 그들의 관심이 죽은 자였습니다. 그들의 목표가 시체를 찾는 일이었고 그 시체에 향품을 바르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산 자의 발걸음으로 바뀌었습니다. 부활의 신앙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산 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들의 관심이 바뀌었습니다. 그는 시체가 아니라 살아 계시는 주님이었습니다. 살아 계신 주님을 믿는 자는 바로 산 자입니다. 살아 계신 주님을 마음에 모신 자는 산 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들의 목표가 바뀌었습니다. 전에는 예수님의 시체에 향품을 바르는 것이 목표였다고 하면 이제는 살아 계시는 예수님의 부활의 소식을 사람들에게 증거하는 것, 이것이 그들의 목표가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 부활절 예배를 드리고 계시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만약 이 예배를 드리고 다시 한 시간 동안 잊었던 나의 걱정과 나의 염려와 나의 근심의 짐을 다시 들고 세상 속으로 다시 힘없이 들어간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시체를 찾는 참배에 불과 할 것입니다.
한 시간 동안 했던 행위는 산 자를 만난 예배가 아니라 죽은 자 예수님의 시체에 향품을 바르는 의식에 불과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산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은 돌아 설 때 발걸음이 다릅니다. 근심을 이기고 염려를 이기고 걱정을 이기고 산 자가 되어서 당당하게 담대하게 세상을 향해 산 자의 행진을 시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이 복된 시간 살아 계신 예수님을 만나셔서 그와 함께 힘있는 산 자의 행진을 시작하는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위대한 문어 중에 한 사람인 괴테가 지은 파우스트라고 하는 소설이 있습니다.
이 파우스트에는 이런 감동적인 대목이 나옵니다. 파우스트는 유명한 학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괴로운 가운데 목숨을 끊기로 작정을 합니다. 독배를 앞에다 두었습니다. 그걸 이제 마시고 죽기를 원해서 초조하게 그 독배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막 마시려고 하는데 저 멀리서 부활절 새벽 종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합니다. 그는 그 종소리를 들으며 생각합니다. "주님은 살아 나셨는데 나는 지금 죽으려고 부활하신 그 주님 앞에서 이 독배를 들고 있구나!" 그는 너무나 놀랐습니다. 자기가 하는 행동이 너무나 우스운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독배를 집어 던졌습니다. 그러고 일어났습니다. 오늘 이 부활 예배를 드리는 성도가 해야 할 결단이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 손에 들려진 모든 종류의 독배들을 던지는 것입니다. 절망의 독배를 던지는 것입니다. 염려의 독배를 던지는 것입니다.
모든 근심의 독배를 던지는 것입니다. 우리 속에 있는 부정적인 독배를 주님의 이름으로 던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산 자와 함께 벌떡 일어나는 그런 귀한 예배가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슬픔도 미움도 저주도 절망도 모두 던져 버리고 살아 계신 주님과 함께 산 자의 행진을 시작하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만 예배를 드리고 만약에 헤어진다면 우리가 드리는 예배는 마치 예수님의 시체에 마치 향품을 바르는 의식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살아 계신 주님을 만나고 계십니까 그러면 산 자의 대한 소식을 사람들에게 전해 주시기 바랍니다. 산 자이신 예수님을 만난 감격이 있는 사람은 사람들에게 예수 부활의 복음을 전파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자의 발걸음 이것이 바로 산 자의 행진이 되는 것입니다. 열왕기하7:9절 말씀입니다.
"문둥이가 서로 말하되 우리가 소위가 선치 못하도다 오늘날은 아름다운 소식이 있는 날이어늘 우리가 잠잠하고 있도다 만일 밝은 아침까지 기다리면 벌이 우리에게 미칠지니 이제 떠나 왕궁에 가서 고하자 하고" 아람군대가 모두 도망가 버린 승리의 소식을 이 병자들이 보았습니다. 그들은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아침까지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벌떡 일어났습니다. 이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기 위하여 달려갔습니다.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기 위하여 움직이는 발, 이것이 바로 산 자의 발이요, 산 자의 행진인 것입니다.
이 땅에 두려움으로 떨고 있는 자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슬픔 중에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들에게 복음을 들고 갑시다. 희망 없이 사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살아나신 소식을 전합시다. "주는 당신을 사랑하고 주님은 당신의 희망이 되신다"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목소리 높여 전하는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5월 26일부터 28일까지 우리 교회는 한 생명을 초청하여 귀한 집회를 가집니다. 여러분 거기에 귀한 생명을 초청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살아 계신 주님의 복음을 전하여 그들로 하여금 산 자의 행진에 동참하도록 만들어 주시기 바랍니다.
살아 계신 주님을 믿는 자는 산 자가 되어서 죽은 자들 속에 나아가 그들로 하여금 산 자들 대열의 행진 속에 동참시키는 위대한 삶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리하여 수많은 사람들을 살려서 살아 있는 성도로 충만해 지는 그런 세상을 만들 생각이 없으십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산 자이십니까 죽은 자이십니까 살아 계신 주님을 지금 찾고 계십니까 무덤 속에 시체를 찾고 있습니까 시체가 보이십니까 혹은 천사가 보이십니까 무덤 문이 열려 있습니까 혹은 무덤 문이 닫혀 있습니까 산 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오늘 말씀으로 만나셔서 믿음으로 일어나십시오.
그리고 산 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산 자로 살아가십시오. 수많은 죽은 자들에게 생명의 복음을 전하는 산 자, 산 성도로 사는 복된 축복이 함께 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님이 부활하시던 그 새벽에 묘비명을 천사가 외쳤습니다. "그는 여기에 계시지 아니 하느니라. 그가 살아나셨느니라. " 이것이 주님의 묘비명이 될 것입니다. 실제로 예루살렘에 가보면 주님의 무덤이라고 추정되는 그 곳에 문이 있습니다. 무덤 문 앞에는 이런 글이 있습니다. "그는 살아나셨다. 그는 일어나셨다. 살아 계신다. " 이런 글을 써 두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살아나셨습니다. 예수님은 다시 사셨습니다. 그는 산 자입니다. 그가 살아 계시는 분이십니다.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지옥문을 여시고 무덤 문을 여시고 오늘 새벽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은총이 사랑하는 성도들의 개인과 가정 가운데 삶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은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산 자입니다. 그뿐 아니라 산 자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모두다 산 자들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이 살아 계시는 것을 믿지 못하면 살아 움직이고 있어도 그는 산 자가 아니라 죽은 자라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부활을 아주 실감나게 그리고 있는 이 본문 말씀, 이 속에서 우리는 산 자와 죽은 자를 대비해 볼 수 있습니다. 제가 만약 영화를 찍는 감독이라면 오늘 본문을 가지고 적어도 3장면을 찍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먼저 마리아와 또 다른 마리아 샬롬에가 향품을 손에 들고 무덤을 향해 가는 그 장면을 하나 찍을 것입니다.
그리고 무덤에 도착해서 무덤에서 주어지는 모든 일들을 또 한 장면 찍을 것입니다. 그리고 무덤을 등지고 돌아오는 그 장면을 또한 찍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 첫 장면을 같이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첫 장면은 이런 제목을 붙이면 적당할 것입니다. "무덤을 향하여" 그런데 무덤을 향해가는 여인들의 발걸음은 산 자의 발걸음이 아니라 죽은 자의 행진이었습니다. 1절 말씀입니다. "안식 후 첫날 새벽에 이 여자들이 그 예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가서" 여자들은 지금 무덤을 향해서 가고 있습니다. 이 여자들은 예수님에게 모든 희망을 걸었던 사람들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행복해 졌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사는 이유를 알았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기쁨이 무엇인지 알았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사는 목표가 생긴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사실은 예수님만 죽은 것이 아니라 여인들도 함께 죽어 버렸습니다. 그들의 소망도 사라졌습니다. 그들의 기쁨도 사라졌습니다. 그들의 목표도 사라졌습니다. 그들 속에 있는 큰 소망도 모두 함께 사라져 갔던 것입니다. 그들은 울면서 가슴을 두드렸습니다. 드디어 칠흙 같은 밤이 지나갔습니다. 안식일이 지나갔습니다. 금요일 밤부터 토요일 밤까지 계속 이어진 안식일이 모두 지나갔습니다. 그들은 이제 주일 새벽이 밝아 오지 전에 무덤을 향해 걷기 시작했습니다. 죽은 자 예수님에게 드릴 향품이 그들 손에 들려 있었습니다.
그들의 발걸음에는 슬픔이 가득차 있습니다. 그들의 발걸음에는 절망이 가득차 있었습니다. 손에는 죽은 자들을 위한 물건인 향품이 들려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지금 어디를 향해 가고 있습니까 무덤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누구를 만나기 위하여 갑니까 죽은자 예수 그리스도의 시체를 만나기 위하여 지금 걸음을 재촉학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살아 있기는 해도 사실은 죽은 자와 다를바 없습니다. 여기 제가 한자를 하나 섰습니다. "미망인" 누구를 보고 미망인이라고 합니까 과부들, 남편이 죽은 사람들을 보고 미망인이라고 말합니다. 그 뜻이 재미있지 않습니까 미처 죽지 못해 사는 사람, 못 죽어서 사는 사람, 아직 죽지 않은 사람, 살아 있어도 죽은 사람과 다름바 없는 사람, 이런 뜻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사실 여인들의 상태를 이 말로 우리는 요약할 수 있습니다.
살아 있어도 예수님 없는 삶, 그것은 죽은 것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그들의 기쁨도 만족도 희망도 모두 사라진 참으로 죽은 자 같은 모습으로 힘없이 지금 무덤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이 부활절 예배에 참석하신 성도 여러분 지금 우리의 상태가 어떠합니까 마땅히 감격을 가지고 힘있는 발걸음으로 와야 하는데 마치 무덤을 찾아오듯이 힘없이 이 곳에 찾아오신 분은 없으십니까 손에 향품을 든체 맨날 좋았던 시절을 생각하는 여인들처럼 옛날 생각이 나면서 여기 앉아 있는 감격 없이 예배드리는 성도들이 있으십니까 우리들이 마음속으로는 예수를 믿는다고 말하지만 때때로 무덤을 향해 갈 때가 있습니다. 죽은 예수만을 기억하는 죽은 자의 행진을 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 앞에 닥쳐오는 시련들, 절망들을 바라보면서 낙심하는 그런 순간들이 있습니다.
내가 바라는 대로 잘 되지 않는다고 실망하고 낙담하는 순간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좌절을 느낄때가 있습니다. 내가 믿고 의지하는 것들이 흔들릴 때, 우리도 함께 흔들리는 그런 순간이 많이 있었던 것을 고백합니다. 그런 순간은 바로 우리도 모르게 무덤을 향해 죽은 자의 행진을 우리가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1517년에 마틴루트가 종교 개혁을 했습니다. 수많은 원수들이 있었습니다. 마틴루트를 죽이기 위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개략을 꾸몄습니다. 그는 아주 고통 중에 살고 있었습니다. 말할 수 없는 수많은 반대자들을 바라보면서 마틴루트는 실망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날도 아주 낙심하는 가운데 쳐진 모습으로 앉아 있는데 옆방에서 우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자기 아내의 우는 소리였습니다. 깜짝 놀라서 그 방을 찾아갔더니 소복을 입은 자가 아내가 울고 있었습니다. "여보 웬일이요" "글세 여호와 하나님이 죽었지 뭐예요. 그래서 내가 슬피 울고 있어요. " "무슨 소리 여호와 하나님은 살아 계신데 왜 죽었다고 하는 것이요. " "여호와 하나님이 살아 계시면 왜 당신은 힘없고 낙심하는 모습을 거기에 앉아 계세요" 성도 여러분 주님이 살아 계시는 것을 믿지 못하고 나 혼자 염력하고 걱정하는 것은 무덤을 향해 가는 죽은 자의 행진이 될 것입니다. 실패했다고 좌절해 버리는 것은 무덤을 향해 가는 죽은 자의 행진,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낙심하는 것은 무덤을 향해 가는 죽은 자의 행진입니다. 때때로 예수 믿는 사람도 질병에 걸리 때가 있지 않습니까 내 몸이 점점 약해지고 병이 낫지 않는다고 절망하는 것은 바로 주님의 시체를 만날 가는 죽은 자의 행진에 불과 할 것입니다.
교회를 몇 년 다녔고 직분이 무엇인지, 그것은 상관이 없습니다. 참으로 지금 내가 이렇게 죽음을 향해 가고 있으면 나는 살아 있어도 죽은 자와 다를바 없을 것입니다. 주님을 향해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외치지만 세상 속에 나가서 세상 사람과 똑같이 염려하고 걱정하고 좌절한다고 하면 우리는 이름만 성도이지 죽은 자와 다를바 없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무덤을 향해가는 사람은 여기에 없습니까 오늘 내가 무덤을 향해가면 나는 살아 있어도 죽은 자와 다를바 없습니다. 오늘 이 부활의 아침에 무덤을 향한 행진을 중단하시기 바랍니다. 시체를 향한 행진을 중단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죽은 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산 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살아 있는 성도들입니다.
어떤 절망의 상황에도 일어나는 사람들입니다. 죽어도 사는 성도들입니다. 오늘 주님의 말씀입니다. 요한복음11:25,26절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주지 아니하리니 이것은 네가 믿느냐. " 이것을 믿으십니까 우리는 살아 있는 자들입니다. 살아 계신 부활의 주님을 믿는 자는 어떤 죽음의 상황에도 일어나는 산 자들입니다. 무덤을 향해 가는 죽은 자의 행진을 중단하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살아 계신 주님을 만나기 위해서 가는 산 자의 행진으로 바꾸는 은혜의 부활절 아침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 다음 장면을 같이 찍겠습니다.
드디어 이 여인들은 무덤에 도착했습니다. 무덤에서 여인들은 귀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무덤에서 그들은 산 자를 만나는 경험을 합니다. 무덤에 도착한 여인들의 관심, 여전히 예수님의 시체에 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시체를 찾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시체가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시체, 이 말이 얼마나 어색합니까 살아 있는 자의 시체, 이것은 말도 안돼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시체라니, 이것은 성립할 수 없는 말의 결합입니다. 살아 계신 분은 시체가 없어야 합니다. 그러나 죽음의 믿음을 가진 사람은 시체를 찾게 됩니다. 죽은 자의 눈은 불가능한 것만을 바라봅니다. 죽은 자의 눈은 절망만을 바라봅니다.
자신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자인 것을 바라보게 됩니다. 모든 것을 비관적으로 봅니다. 모든 것을 부정적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모든 것을 할 수 없는 것으로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3,4절 말씀입니다. "들어가니 주 예수의 시체가 뵈지 아니하더라 이를 인하여 근심할 때에" 그들은 시체가 보이지 않아서 근심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산 자이십니다. 산 자는 시체가 없는 것이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여인들은 시체를 계속 찾고 있는 것입니다. 죽은 자의 눈은 시체밖에는 보지 못합니다. 산 자에 대하여 관심이 없습니다. 여러분 살아 계신 주님을 만나는 부활 신앙을 가지기 전에는 절대로 이 귀한 주님의 부활을 이해 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을 믿는 것으로 만족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살아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산 믿음을 소유할 때 우리의 믿음은 완성되게 되는 것입니다. 미켈란젤로라고 하는 유명한 화가가 있습니다. 그의 제자가 하나 있었는데, 그 제자는 늘 그리는 그림, 늘 하는 조각이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 밖에는 없었습니다. 그 일그러진 모습, 고통 당하고 피 흘리는 그 주님의 모습만을 그렸습니다. 하루는 제자를 불렀습니다. "자네는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밖에는 그릴 줄 모르는 가 이제부터는 부활하신 예수, 살아 계시는 예수, 우리와 동행하시는 그 예수님의 영광의 모습도 그리도록 하게.
" 여러분 십자가에 고난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 분의 고난의 생각하면 눈물 짖는 것으로 만족하지 마십시오. 우리 속에 만일 살아 계신 주님, 나와 동행하시는 부활하신 주님을 확실한 믿음이 없이는 십자가의 믿음은 완성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지난 40일 동안 사순절을 지켰습니다. 지난 두 주간 동안 '특별 새벽 기도회'를 했습니다. 저는 이 모든 기간에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만약에 사순절로만 이어지는 기독교라면 이거 얼마나 재미가 없겠는가 목사하기도 참 어렵겠다. '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사순절의 모든 고난에 끝에는 부활의 영광이 기다리고 있지 않습니까! 오늘 이 아침의 부활의 감격적인 예배를 드리고 있지 않습니까! 십자가의 끝에는 부활의 영광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모든 십자가의 고난의 끝에는 부활의 영광의 주님을 우리가 만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을 믿는 신앙은 살아 계신 주님을 만나는 신앙으로 성숙할 수 있게 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이 여인들이 어떻게 살아 계신 주님을 분명히 믿는 믿음으로 자라게 되었습니까 이 여자들은 말씀을 듣게 되었습니다. 5,6절 말씀입니다. "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니 두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는냐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라. " 천사들은 그들이 무덤 속에서 죽은 시체를 찾고 있는 것을 책망했습니다. "왜 살아 계신 주님을 무덤 속에서 찾고 있느냐" 그렇게 책망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도록 도와주었습니다. 예수님은 미리 말씀하신 대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3일 만에 다시 살아나야 한다는 말을 깊이 기억시켜 주었습니다.
여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깊이 회상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죽으시고 난 다음에 말씀하신 그대로 오늘 새벽에 분명히 살아나셨구나. " 말씀을 기억하고 말씀이 자기들의 생각과 마음을 지배하는 그 순간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대한 믿음이 자라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지 주님이 부활하셨구나!" 엠마을로 향하는 제자들도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 만난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을 전해 주었습니다. 말씀을 듣고 있는 그들의 마음은 뜨거워졌습니다. 주님과 헤어진 다음에 그들이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까 "주님의 말씀을 들을 때 우리의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들을 때 이 말씀이 우리로 하여금 살아 계신 주님을 믿을 수 있는 귀한 능력이 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이 시간 여러분들은 살아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메시지를 듣고 계십니다.
이 말씀을 들으시는 이 선포되는 이 말씀을 듣는 이 순간에 믿음으로 '아멘'하며 이 말씀을 영접해 들으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될 때 산 자이신 예수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기록된 여호와 하나님이 말씀인 성경을 그대로 '아멘'하며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살아 계신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믿게 되자 여인들의 눈도 바뀌게 되었습니다. 예전에는 시체를 찾는 죽은 눈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산 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찾는 눈으로 바뀌게 되었던 것입니다. 열린 무덤 문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깨달았습니다. "아하! 부활의 주님이 저 문을 여셨구나!" 그들은 빈 무덤을 보았습니다. "그러면 그렇지 무덤에 주님이 없는 것이 참으로 당연한 것이 아닌가" 빈 무덤의 영광을 그들은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침침한 그 무덤 속에서 천사들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무엇입니까 불가능과 절망과 좌절이 시체입니까 여러분 시체를 보지 마십시오. 시체를 찾지 마십시오. 시체는 없습니다. 산 자의 눈으로 무덤 안을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인생의 여러면 가운데 무덤과 같은 환경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산 자의 눈으로 그 무덤을 바라보십시오. 무덤의 영광을 바라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 인생에 가로 막혀 있는 수많은 돌문들이 산 자이신 예수님의 부활과 함께 이미 굴러가 버린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산 자 앞에는 무덤 문이 가로 막혀 있을 수 없습니다. 산 예수 그리스도 앞에는 무덤 문이 절대 주님을 방해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내 인생의 모든 무덤은 이제는 무덤이 아닙니다. 그것은 빈 무덤이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무덤을 빈 무덤으로 이해하게 될 때 우리 인생에는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시체 없는 무덤 이것이 빈 무덤이 아닙니까 여러분 시체 대신에 무엇이 있습니까 그 무덤에 시체 대신 있는 것은 바로 영광스러운 천사들의 모습이었습니다. 천사가 있는 곳을 우리가 무엇이라고 합니까 그것은 바로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노래하지 않습니까 "내 영혼이 은총 입어 주가 쥔 짐 벗고 보니 슬픔 많은 이 세상도 그 어디나 하늘나라. " 우리의 눈, 산 눈, 부활 신앙의 눈으로 보면 무덤 속에 천사가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인생의 여러 면에서 천사를 보시기 바랍니다. 살아 계시는 주님의 영광을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무덤이 아닙니다. 어디 있든지 산 자의 눈으로 보면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요, 주님의 영광이 충만한 곳이 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주변에 만나는 사람들을 바라보십시오. 그 사람의 얼굴이 어떠하든지 나에게 해를 끼치는 사람들인지, 나를 미워하는 사람들인지 상관없이 그들이 천사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부활의 눈, 산 눈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천사를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내 인생의 모든 절망과 좌절의 현장은 살아 계신 예수님과 함께 새 소망과 새 기쁨이 잉태 곳임을 믿음으로 고백하는 귀한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새는 알에서 깨어나지 않습니까 그런데 새가 날개를 치면서 알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셨습니까 불가능합니다. 이미 알에서 나온 새는 절대로 안으로 들어가지 않습니다. 여러분 병아리를 보셨습니까 그것도 역시 알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병아리가 알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셨습니까 천만에 말씀, 불가능한 일입니다. 아름다운 나비를 보셨습니까 나비가 훨훨 날아서 다시 빠져 나왔던 그 고치 속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셨습니까 천만에 말씀, 불가능한 일입니다. 예수님도 무덤 속에서 나오셨습니다. 주님은 다시 무덤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그분은 살아 계시는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나사로도 죽었다가 3일만에 살아났지만 그러나 그는 다시 죽음으로 무덤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무덤에서 나온 이후 다시 무덤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이 땅에 많은 종교 창설자들의 무덤은 존재하고 있습니다. 수많은 뼈들이 아직도 이 땅에 있습니다. 수많은 뼈 조각들이 지금도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의 뼈 조각은 없습니다. 주님의 죽음의 모든 흔적은 없습니다. 그분은 무덤을 빠져 나오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도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의 무덤, 사망의 무덤을 빠져 나온 사람들이입니다. 빠져 나온 곳으로 다시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부활의 신앙을 가진 자는 다시 사망 속으로 들어가지 않습니다. 염려 속으로 들어가지 않습니다. 절망 속으로 들어가지 않습니다.
모든 빠져 나온 무덤을 다시는 돌아가지 않고 산 자와 더불어 산 자의 행진을 시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부활하신 산 자 예수님을 말씀으로 다시 만나셔서 산 신앙, 부활 신앙을 회복하는 산 성도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이제 또 한 장면을 봅시다. 세 번째 장면입니다. 드디어 여인들은 무덤에서 말씀을 통해 주님을 만나고 무덤을 등지고 세상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합니다. 무덤을 등지고 부활하신 주님을 확신하고 가는 그들의 발걸음은 죽은 자의 행진이 아니었습니다. 산 자의 행진이었습니다. 죽은 자의 모습으로 향품을 들고 두려워하는 가운데 비판하는 마음을 가지고 무덤을 향해 왔던 여인들은 무덤에서 살아 계신 예수님을 말씀으로 만났습니다.
이제 드디어 무덤을 등지고 부활의 소망을 가진 체 세상을 향해가고 있습니다. 산 자의 행진이 시작이 되었던 것입니다. 8,9절 말씀입니다. "저희가 예수의 말씀을 기억하고 무덤에서 돌아가 이 모든 것을 열한 사도와 모든 다른 이에게 고하니" 무덤을 향해 올 때는 그들의 발걸음이 너무나 무거웠습니다. 죽은 자의 발걸음이었습니다. 그들의 관심이 죽은 자였습니다. 그들의 목표가 시체를 찾는 일이었고 그 시체에 향품을 바르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산 자의 발걸음으로 바뀌었습니다. 부활의 신앙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산 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들의 관심이 바뀌었습니다. 그는 시체가 아니라 살아 계시는 주님이었습니다. 살아 계신 주님을 믿는 자는 바로 산 자입니다. 살아 계신 주님을 마음에 모신 자는 산 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들의 목표가 바뀌었습니다. 전에는 예수님의 시체에 향품을 바르는 것이 목표였다고 하면 이제는 살아 계시는 예수님의 부활의 소식을 사람들에게 증거하는 것, 이것이 그들의 목표가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 부활절 예배를 드리고 계시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만약 이 예배를 드리고 다시 한 시간 동안 잊었던 나의 걱정과 나의 염려와 나의 근심의 짐을 다시 들고 세상 속으로 다시 힘없이 들어간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시체를 찾는 참배에 불과 할 것입니다.
한 시간 동안 했던 행위는 산 자를 만난 예배가 아니라 죽은 자 예수님의 시체에 향품을 바르는 의식에 불과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산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은 돌아 설 때 발걸음이 다릅니다. 근심을 이기고 염려를 이기고 걱정을 이기고 산 자가 되어서 당당하게 담대하게 세상을 향해 산 자의 행진을 시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이 복된 시간 살아 계신 예수님을 만나셔서 그와 함께 힘있는 산 자의 행진을 시작하는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위대한 문어 중에 한 사람인 괴테가 지은 파우스트라고 하는 소설이 있습니다.
이 파우스트에는 이런 감동적인 대목이 나옵니다. 파우스트는 유명한 학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괴로운 가운데 목숨을 끊기로 작정을 합니다. 독배를 앞에다 두었습니다. 그걸 이제 마시고 죽기를 원해서 초조하게 그 독배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막 마시려고 하는데 저 멀리서 부활절 새벽 종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합니다. 그는 그 종소리를 들으며 생각합니다. "주님은 살아 나셨는데 나는 지금 죽으려고 부활하신 그 주님 앞에서 이 독배를 들고 있구나!" 그는 너무나 놀랐습니다. 자기가 하는 행동이 너무나 우스운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독배를 집어 던졌습니다. 그러고 일어났습니다. 오늘 이 부활 예배를 드리는 성도가 해야 할 결단이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 손에 들려진 모든 종류의 독배들을 던지는 것입니다. 절망의 독배를 던지는 것입니다. 염려의 독배를 던지는 것입니다.
모든 근심의 독배를 던지는 것입니다. 우리 속에 있는 부정적인 독배를 주님의 이름으로 던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산 자와 함께 벌떡 일어나는 그런 귀한 예배가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슬픔도 미움도 저주도 절망도 모두 던져 버리고 살아 계신 주님과 함께 산 자의 행진을 시작하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만 예배를 드리고 만약에 헤어진다면 우리가 드리는 예배는 마치 예수님의 시체에 마치 향품을 바르는 의식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살아 계신 주님을 만나고 계십니까 그러면 산 자의 대한 소식을 사람들에게 전해 주시기 바랍니다. 산 자이신 예수님을 만난 감격이 있는 사람은 사람들에게 예수 부활의 복음을 전파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자의 발걸음 이것이 바로 산 자의 행진이 되는 것입니다. 열왕기하7:9절 말씀입니다.
"문둥이가 서로 말하되 우리가 소위가 선치 못하도다 오늘날은 아름다운 소식이 있는 날이어늘 우리가 잠잠하고 있도다 만일 밝은 아침까지 기다리면 벌이 우리에게 미칠지니 이제 떠나 왕궁에 가서 고하자 하고" 아람군대가 모두 도망가 버린 승리의 소식을 이 병자들이 보았습니다. 그들은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아침까지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벌떡 일어났습니다. 이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기 위하여 달려갔습니다.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기 위하여 움직이는 발, 이것이 바로 산 자의 발이요, 산 자의 행진인 것입니다.
이 땅에 두려움으로 떨고 있는 자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슬픔 중에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들에게 복음을 들고 갑시다. 희망 없이 사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살아나신 소식을 전합시다. "주는 당신을 사랑하고 주님은 당신의 희망이 되신다"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목소리 높여 전하는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5월 26일부터 28일까지 우리 교회는 한 생명을 초청하여 귀한 집회를 가집니다. 여러분 거기에 귀한 생명을 초청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살아 계신 주님의 복음을 전하여 그들로 하여금 산 자의 행진에 동참하도록 만들어 주시기 바랍니다.
살아 계신 주님을 믿는 자는 산 자가 되어서 죽은 자들 속에 나아가 그들로 하여금 산 자들 대열의 행진 속에 동참시키는 위대한 삶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리하여 수많은 사람들을 살려서 살아 있는 성도로 충만해 지는 그런 세상을 만들 생각이 없으십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산 자이십니까 죽은 자이십니까 살아 계신 주님을 지금 찾고 계십니까 무덤 속에 시체를 찾고 있습니까 시체가 보이십니까 혹은 천사가 보이십니까 무덤 문이 열려 있습니까 혹은 무덤 문이 닫혀 있습니까 산 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오늘 말씀으로 만나셔서 믿음으로 일어나십시오.
그리고 산 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산 자로 살아가십시오. 수많은 죽은 자들에게 생명의 복음을 전하는 산 자, 산 성도로 사는 복된 축복이 함께 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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