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절] 죽음과 부활에 감춰진 보물
본문
난 주께서 정말 살아났느냐는 유치한 논리를 이 귀한 시간에 전개하고 싶지 않다.
I. 죽음
죽음이란 무엇인가
1) 사전적 의미
사전이란 말의 모음인데, 말이란 사람들의 생활 속에서 정착된 개념들이다. 사람들은 죽음을 경험하면서 죽음과 관련된 여러 가지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것을 몇 가지로 정리해 보면 이렇다.
lost 생명을 잃다. 무엇을 잃었다는 것인가 심장이 힘을 잃었다. 그래서 피가 멈추면 죽는 것이다. 요즘은 심장이 멈추지 않아도 죽었다고 판정하는 시대가 되었지만, 과거 인간의 심장이 완전히 멈추었을 때 비로소 사람이 죽었다고 판정했다.
피가 멈추면 어떻게 되는가
lack 무감각/무반응/마비
quiet 쥐 죽은 듯 고요함
stop멈춤 모든 활동이 멈추어 진다.
end
cold
elasticity hard(딱딱함)
Departure 떠남(실제로 장례를 치루어서 영원히 떠나는 것을 본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죽음을 정의하면서 사람들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있지 않다. 죽음이 완전히 없어지는 것, 지워지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2) 성경적 의미
이 세상에의 모든 종교와 이론과 학문 중에서 유일하게 성경만이 죽음의 유래에 대해서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i. 형벌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함으로
ii. 분리됨
죽음은 분리이다. 3가지 종류의 분리
-1 여호와 하나님과 인간의 분리(영적 사망)
-2 몸과 영혼의 분리(육체적 사망)
-3 영생에서의 분리(영원한 사망)
“죄의 삯은 사망이며, 누구든지 피할 수 없는 인간에게 내려진 형벌이다. ”
인간은 육체적 사망으로 우선 한 번 죽는다. 그리고 죽은 후에 심판을 받아 영원한 사망에 처해진다. 말똥 말똥한 의식을 가지고 영원한 지옥 형벌에 들어간다. 죽어서 의식도 없어지고, 생각도 사라지고, 자취도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몸은 죽어도 그 속에 형벌이 남아있다. 이 형벌이 없어지지 않는 한, 사람이 죽어서도 안식을 갖지 못한다.
예수님의 죽음의 의미
1) 예고된 죽음
어제 우리집 아이가 재미난 이야기를 해주었다. 어떤 사람이 물에 빠져서 죽어가고 있었다. 그 사람을 구하는데 있어서 사람들의 전공에 따라 그 방법이 다르다.
건축과 토목공사를 하여 물길을 다른 곳으로 돌려놓고 그 사람을 구한다.
항공학과 엄청난 바람을 선풍기로 일으켜서 그 사람을 물 밖으로 날려버려서 구한다.
화학과 물에서 산소와 수소를 분리하여 수소를 발생시켜 수소가 사람을 번쩍 들어올리게 하여 그를 구한다.
철학과 사람은 누구나 다 죽는다. 그러니 그 사람도 어차피 죽은테니까 그냥 내버려 두어 장엄한 최후를 맞이하게 한다.
인간들 중에 그 누구도 죽기 위해 이 땅에 태어나지 않는다. 다만 죽음이 그를 강타하여 죽음을 맞이한다. 그래서 인간은 죽음을 두려워하며, 그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죽지 않으려고 애를 쓴다.
그러나 주님은 다르시다. 처음부터 죽으시려고 이 땅에 오셨다. 아니 그분은 반드시 죽으셔야만 했다. 주님은 천수를 다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분이 아니시다.
그분은 반드시 죽어야 했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왜 그럴까
왜냐하면 값을 치루기 위해서다.
2) 피의 기능
사람 몸 속에 있는 피란, 참 신비한 물질이다. 이 피의 신비를 밝히려면 인간은 앞으로도 수 천년 이상을 더 연구해야 할 것이다.
1. 그런데 인간이 밝혀 낸 피의 단순한 세 가지 기능이 있다.
1. 산소공급 생명 유지
2. 정화작용 몸 속에 불순물 제거
3. 영양공급
2. 성경이 밝히는 피의 두 가지 기능
그러나 아직 세상 과학과 의학이 밝히지 못한 피에 들어있는 다른 기능이 있다. 성경이 밝히는 피의 기능은 크게 두 가지 이다.
1. 생명이 그 속에 들어있다.
여호와 하나님은 피 속에는 생명이 있다고 말씀하신다.
2. 가격이 매겨져 있다.
즉, 피란 지불 수단이다. 피에는 가격이 매겨져 있다는 뜻이다. 우리는 남아있는 피의 값어치 만큼만 이 땅을 살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피를 맹세의 수단으로 삼기도 한다. 의형제, 주먹세계의 피의 맹세, 고대에서 피의 의미 맹세
그래서 무엇인가 중요한 값을 치룰 때 우리는 혈맹이라는 단어로 이 친분이나 계약을 깨질 수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피가름이라는 말을 통해 중요한 약속이 파기 되었을 때, 사람들이 물불 안 가리고 그 대가를 치루는 행위를 의미하기도 한다.
하지만 인간의 몸 속에 돌고 있는 피는 값이 형편없이 떨어지고 말았다. 고작해야 자기들의 약속이나, 민족 간의 약속 정도의 가치밖에 없다. 왜냐하면 피가 죄로 인해 오염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이 죽는 것은 피의 가격이 다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소중한 피를 아무데다, 아무 일에나 쏟지 말라. 우리 몸 속에 흐르는 피는 선지피가 아니다. 고귀한 생명의 피, 여호와 하나님이 값어치를 높게 매겨주신 피이다.
2) 실제적인 죽음
우리는 주님의 죽음을 대할 때, 그토록 훌륭하신 분이 죽었으니 어쩌나, 안타깝다 하는 마음으로 주님의 죽음을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분은 바로 날 구원하기 위해서 그 피로써 값을 지불하여 주신 것이다.
그분이 피를 흘리신 것은 단순히 몸에 상처가 나서 피가 조금 나온 것이 아니었다.
그분은 형벌 때문에 피를 쏟은 것이 아니었다. 주님이 피를 흘리신 것은 값을 지불하신 것이며, 곧 생명을 주신 것이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스스로 자원하여 큰 값을 지불하여 주신 것이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점도 없고, 흠도 없는, 정말로 순도 100%의 정결한 피를 모두 쏟아 주셨다. 그분의 그 가치 있는 피를 단 한 방울도 그 몸에 남기지 않으시고 다 쏟아 주셨다.
그분은 우리를 위해서 값을 지불하시면서 단 한가지만 요구하신다.
“누구든지 다 내게로 와서 마시라. ”
즉 마음을 정하여 주님께 나와서 주님을 구세주와 주님으로 영접하기만 하면 주님께서 흘리신 그 보혈의 공로를 거저 값없이 주신다는 것이다.
3) 죽음의 결과
우리는 예수님의 피 흘린 죽음을 통해서 생명을 얻게 되었다. 값이 지불되었기 때문에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게 되었다.
우리는 죄 없이 함을 받았다. 죄가 없어진 것이 아니다. 죄가 있지만 죄가 없는 것처럼 여겨지게 되었다는 뜻이다.
정리하자면, 그분은 죽기 위해서, 아니 피 흘리기 위해서 오셨다. 그분이 피 흘리신 것은 값을 지불하신 행위이다. 무슨 값이 지불되었는가 우리의 죄 값이 지불되었다. 그래서 우리에게서 영원한 지옥 형벌이 풀어지게 되었다. 벗게 되었다. 오직 주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우리가 주님께 나와서 그 값 치루어 주신 것을 믿으라는 것이다.
2. 부활
성경은 예수님이 죽었다가 다시 사신 것을 말씀한다. 우리가 성경을 곧이 곧 대로 믿는다면 주님의 부활이 자연스럽게 의심 없이 믿어진다. 주님은 피를 다 쏟으시고 죽으셨다. 주님은 여호와 하나님이시기에 받으실 형벌도 없으시다. 죽음은 완전히 없어지는 것이 아니기에 더 이상 주께서 무덤 속에 계실 이유가 없으시다. 이제 주님은 죽음에서 일어나사 영원한 왕, 영원한 구세주, 영원한 여호와 하나님으로서 하늘에 오르셔야만 하신다.
본래 예수님은 영이신 여호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육체가 필요 없으시다. 피를 쏟으시기 위해 육체를 입으셨다가 육체가 죽고 그냥 영만 살아서 하늘에 가시면 그만 이실 수도 있다. 그런데 왜 굳이 그분은 육체를 가지고 다시 살아나셨을까
첫째, 구원의 완전한 보증이 되시기 위해서 이다.
우리도 물건 값을 지불하고 나면 영수증을 발급 받는다. 왜 영수증을 받는가 확실히 해두자는 뜻이다. 훗날 누군가 이의를 제기했을 때, 영수증은 확실한 증거가 된다.
죽으신 예수님의 몸은 우리를 구원키 위한 화목 제물이었다. 그 몸이 땅에 묻혀 썩어버렸다면 오랜 시간이 지난 뒤, 사단이 언제 주님이 인간의 죄 값을 치뤘냐고 발뺌을 할 수 있다. 그러면 우리는 사단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야 이놈아 예수님을 쳐다보라. 그분의 양손과 양발에 못자국은 무엇이며, 옆구리의 창자국은 무엇이며, 이마에 가시자국은 무엇이며, 등에 채찍자국은 무엇이더냐 내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당장 물러가지 못할까!”
그러면 사단은 꽁지 빠진 닭처럼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아나 버리고 만다.
그러니 예수님의 부활은 필연적이다.
둘째, 부활의 본이 되시기 위해서 이다.
그런데 성경은 장차 우리도 예수님처럼 부활의 몸, 성경의 용어를 빌자면 영광의 몸을 입게 된다. 그 몸을 입을 때가 언제냐 하면, 예수님의 재림의 말인데, 그날 주안에서 먼저 죽은 자들은 죽은 몸이 부활의 몸으로 새롭게 변하고, 살아있는 신자들은 죽음을 보지 않고, 그 몸에 부활의 몸을 덧입게 된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부모에게 물려받은 피와 살은 몽땅 부활의 몸으로 대치된다. 마치 컴퓨터에서 같은 이름의 파일을 덮어쓰기를 하면 파일 이름은 그대로지만 그 내용이 완전히 새것으로 바뀌어 지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을 통해서 장차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 바뀔지 상상해 볼 수 있다.
1) 못 자국을 그대로 가지고 계셨다. 우리 안에 주님을 위해 일한 흔적이 아마도 그대로 남아있을 것이다.
2) 시공을 초월한다.
3) 잡수신다. 즐거움을 느낀다. 참 재미있다.
4) 변형된다 제자들도 몰라보았다. 추남추녀는 한 사람도 없다.
5) 눈부시다. 요한계시록에서 부활의 몸을 입으신 주님을 요한은 감히 눈을 들어 볼 수 없었다.
셋째, 완전한 승리의 보장이 되시기 위해서 이다.
예수님이 살아계시는 한 마귀는 꼼짝 못한다. 마귀는 더 이상 우리를 소유할 수 없다. 단지 공격/유혹/넘어뜨릴 뿐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그 권세와 권능으로 마귀를 도리어 대적하고 공격할 수 있다. 마귀는 우리의 말을 무서워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말과 함께 하시는,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을 보고, 주님의 이름을 주장하는 우리 앞에서 맥을 못 추는 것이다. 그 피의 권세를 주장하라. 다 치루어 졌다. 그리고 그 증거를 확실히 증거하라. 그분이 살아나셨다. 그리고 우리와 함께하신다. 증거가 확실한데 두려워할게 뭐가 있는가
주님은 부활의 몸을 입으시고 현재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신다. 그분은 자기 대신 여호와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을 우리에게 보내서 우리 안에 계시게 하신다. 난 휴대폰 때문에 이런 놀라운 여호와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더욱 확실히 증거 할 수 있게 되어서 기쁘다.
서로 멀리 떨어져 있어도 휴대폰만 있으면 아주 가까이 있는 것처럼 느낄 수 있다. 올 하반기부터는 영상까지 되는 휴대폰이 나올 것이다. 그러면 더욱 생생하게 상대를 자기 곁에서 느낄 수 있다. 물론 음성이나 영상, 이것은 모두 가상이다. 음성을 들을 수 있으되 그가 옆에 없고, 영상을 볼 수 있으되 단지 비디오 화면이다.
그런데 주님은 온 우주에서 가장 확실한 영적 휴대폰을 사용하시어 성령님을 통해, 가상으로 우리와 함께하시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우리와 함께 하신다. 그분의 손길을 느낄 수 있다. 그분의 호흡을 알 수 있다.
만일 그분이 부활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그분을 기리기 위해 몽땅 그분의 무덤으로 가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분이 생전에 말씀하시던 죽은 자의 부활이 뭘까하며 막연할 것이다.
그런데 그분이 부활하심으로 우리는 쪼개진 무덤을 생생하게 머리 속에 그릴 수 있다. 찬란하게 다시 사는 꿈을 확실히 가질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눈을 감으면 십자가만 보지 않는다. 동시에 열린 무덤도 보아야 한다.
십자가에서 나의 모든 저주가 청산되고 나의 모든 좌절과 죽음과 고난이 못박히는 것을 보라. 나의 못난 자아가 깨지는 것을 보라.
열린 무덤에서 완전히 변화되고, 승리한 모습을 보라.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십자가를 보라. 그리고 열린 무덤에서 찬란하게 부활하신 주님과 더불어 그 안에 더불어 존재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라. 예수 죽음 내 죽음, 예수 부활, 내 부활이다.
I. 죽음
죽음이란 무엇인가
1) 사전적 의미
사전이란 말의 모음인데, 말이란 사람들의 생활 속에서 정착된 개념들이다. 사람들은 죽음을 경험하면서 죽음과 관련된 여러 가지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것을 몇 가지로 정리해 보면 이렇다.
lost 생명을 잃다. 무엇을 잃었다는 것인가 심장이 힘을 잃었다. 그래서 피가 멈추면 죽는 것이다. 요즘은 심장이 멈추지 않아도 죽었다고 판정하는 시대가 되었지만, 과거 인간의 심장이 완전히 멈추었을 때 비로소 사람이 죽었다고 판정했다.
피가 멈추면 어떻게 되는가
lack 무감각/무반응/마비
quiet 쥐 죽은 듯 고요함
stop멈춤 모든 활동이 멈추어 진다.
end
cold
elasticity hard(딱딱함)
Departure 떠남(실제로 장례를 치루어서 영원히 떠나는 것을 본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죽음을 정의하면서 사람들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있지 않다. 죽음이 완전히 없어지는 것, 지워지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2) 성경적 의미
이 세상에의 모든 종교와 이론과 학문 중에서 유일하게 성경만이 죽음의 유래에 대해서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i. 형벌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함으로
ii. 분리됨
죽음은 분리이다. 3가지 종류의 분리
-1 여호와 하나님과 인간의 분리(영적 사망)
-2 몸과 영혼의 분리(육체적 사망)
-3 영생에서의 분리(영원한 사망)
“죄의 삯은 사망이며, 누구든지 피할 수 없는 인간에게 내려진 형벌이다. ”
인간은 육체적 사망으로 우선 한 번 죽는다. 그리고 죽은 후에 심판을 받아 영원한 사망에 처해진다. 말똥 말똥한 의식을 가지고 영원한 지옥 형벌에 들어간다. 죽어서 의식도 없어지고, 생각도 사라지고, 자취도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몸은 죽어도 그 속에 형벌이 남아있다. 이 형벌이 없어지지 않는 한, 사람이 죽어서도 안식을 갖지 못한다.
예수님의 죽음의 의미
1) 예고된 죽음
어제 우리집 아이가 재미난 이야기를 해주었다. 어떤 사람이 물에 빠져서 죽어가고 있었다. 그 사람을 구하는데 있어서 사람들의 전공에 따라 그 방법이 다르다.
건축과 토목공사를 하여 물길을 다른 곳으로 돌려놓고 그 사람을 구한다.
항공학과 엄청난 바람을 선풍기로 일으켜서 그 사람을 물 밖으로 날려버려서 구한다.
화학과 물에서 산소와 수소를 분리하여 수소를 발생시켜 수소가 사람을 번쩍 들어올리게 하여 그를 구한다.
철학과 사람은 누구나 다 죽는다. 그러니 그 사람도 어차피 죽은테니까 그냥 내버려 두어 장엄한 최후를 맞이하게 한다.
인간들 중에 그 누구도 죽기 위해 이 땅에 태어나지 않는다. 다만 죽음이 그를 강타하여 죽음을 맞이한다. 그래서 인간은 죽음을 두려워하며, 그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죽지 않으려고 애를 쓴다.
그러나 주님은 다르시다. 처음부터 죽으시려고 이 땅에 오셨다. 아니 그분은 반드시 죽으셔야만 했다. 주님은 천수를 다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분이 아니시다.
그분은 반드시 죽어야 했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왜 그럴까
왜냐하면 값을 치루기 위해서다.
2) 피의 기능
사람 몸 속에 있는 피란, 참 신비한 물질이다. 이 피의 신비를 밝히려면 인간은 앞으로도 수 천년 이상을 더 연구해야 할 것이다.
1. 그런데 인간이 밝혀 낸 피의 단순한 세 가지 기능이 있다.
1. 산소공급 생명 유지
2. 정화작용 몸 속에 불순물 제거
3. 영양공급
2. 성경이 밝히는 피의 두 가지 기능
그러나 아직 세상 과학과 의학이 밝히지 못한 피에 들어있는 다른 기능이 있다. 성경이 밝히는 피의 기능은 크게 두 가지 이다.
1. 생명이 그 속에 들어있다.
여호와 하나님은 피 속에는 생명이 있다고 말씀하신다.
2. 가격이 매겨져 있다.
즉, 피란 지불 수단이다. 피에는 가격이 매겨져 있다는 뜻이다. 우리는 남아있는 피의 값어치 만큼만 이 땅을 살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피를 맹세의 수단으로 삼기도 한다. 의형제, 주먹세계의 피의 맹세, 고대에서 피의 의미 맹세
그래서 무엇인가 중요한 값을 치룰 때 우리는 혈맹이라는 단어로 이 친분이나 계약을 깨질 수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피가름이라는 말을 통해 중요한 약속이 파기 되었을 때, 사람들이 물불 안 가리고 그 대가를 치루는 행위를 의미하기도 한다.
하지만 인간의 몸 속에 돌고 있는 피는 값이 형편없이 떨어지고 말았다. 고작해야 자기들의 약속이나, 민족 간의 약속 정도의 가치밖에 없다. 왜냐하면 피가 죄로 인해 오염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이 죽는 것은 피의 가격이 다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소중한 피를 아무데다, 아무 일에나 쏟지 말라. 우리 몸 속에 흐르는 피는 선지피가 아니다. 고귀한 생명의 피, 여호와 하나님이 값어치를 높게 매겨주신 피이다.
2) 실제적인 죽음
우리는 주님의 죽음을 대할 때, 그토록 훌륭하신 분이 죽었으니 어쩌나, 안타깝다 하는 마음으로 주님의 죽음을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분은 바로 날 구원하기 위해서 그 피로써 값을 지불하여 주신 것이다.
그분이 피를 흘리신 것은 단순히 몸에 상처가 나서 피가 조금 나온 것이 아니었다.
그분은 형벌 때문에 피를 쏟은 것이 아니었다. 주님이 피를 흘리신 것은 값을 지불하신 것이며, 곧 생명을 주신 것이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스스로 자원하여 큰 값을 지불하여 주신 것이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점도 없고, 흠도 없는, 정말로 순도 100%의 정결한 피를 모두 쏟아 주셨다. 그분의 그 가치 있는 피를 단 한 방울도 그 몸에 남기지 않으시고 다 쏟아 주셨다.
그분은 우리를 위해서 값을 지불하시면서 단 한가지만 요구하신다.
“누구든지 다 내게로 와서 마시라. ”
즉 마음을 정하여 주님께 나와서 주님을 구세주와 주님으로 영접하기만 하면 주님께서 흘리신 그 보혈의 공로를 거저 값없이 주신다는 것이다.
3) 죽음의 결과
우리는 예수님의 피 흘린 죽음을 통해서 생명을 얻게 되었다. 값이 지불되었기 때문에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게 되었다.
우리는 죄 없이 함을 받았다. 죄가 없어진 것이 아니다. 죄가 있지만 죄가 없는 것처럼 여겨지게 되었다는 뜻이다.
정리하자면, 그분은 죽기 위해서, 아니 피 흘리기 위해서 오셨다. 그분이 피 흘리신 것은 값을 지불하신 행위이다. 무슨 값이 지불되었는가 우리의 죄 값이 지불되었다. 그래서 우리에게서 영원한 지옥 형벌이 풀어지게 되었다. 벗게 되었다. 오직 주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우리가 주님께 나와서 그 값 치루어 주신 것을 믿으라는 것이다.
2. 부활
성경은 예수님이 죽었다가 다시 사신 것을 말씀한다. 우리가 성경을 곧이 곧 대로 믿는다면 주님의 부활이 자연스럽게 의심 없이 믿어진다. 주님은 피를 다 쏟으시고 죽으셨다. 주님은 여호와 하나님이시기에 받으실 형벌도 없으시다. 죽음은 완전히 없어지는 것이 아니기에 더 이상 주께서 무덤 속에 계실 이유가 없으시다. 이제 주님은 죽음에서 일어나사 영원한 왕, 영원한 구세주, 영원한 여호와 하나님으로서 하늘에 오르셔야만 하신다.
본래 예수님은 영이신 여호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육체가 필요 없으시다. 피를 쏟으시기 위해 육체를 입으셨다가 육체가 죽고 그냥 영만 살아서 하늘에 가시면 그만 이실 수도 있다. 그런데 왜 굳이 그분은 육체를 가지고 다시 살아나셨을까
첫째, 구원의 완전한 보증이 되시기 위해서 이다.
우리도 물건 값을 지불하고 나면 영수증을 발급 받는다. 왜 영수증을 받는가 확실히 해두자는 뜻이다. 훗날 누군가 이의를 제기했을 때, 영수증은 확실한 증거가 된다.
죽으신 예수님의 몸은 우리를 구원키 위한 화목 제물이었다. 그 몸이 땅에 묻혀 썩어버렸다면 오랜 시간이 지난 뒤, 사단이 언제 주님이 인간의 죄 값을 치뤘냐고 발뺌을 할 수 있다. 그러면 우리는 사단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야 이놈아 예수님을 쳐다보라. 그분의 양손과 양발에 못자국은 무엇이며, 옆구리의 창자국은 무엇이며, 이마에 가시자국은 무엇이며, 등에 채찍자국은 무엇이더냐 내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당장 물러가지 못할까!”
그러면 사단은 꽁지 빠진 닭처럼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아나 버리고 만다.
그러니 예수님의 부활은 필연적이다.
둘째, 부활의 본이 되시기 위해서 이다.
그런데 성경은 장차 우리도 예수님처럼 부활의 몸, 성경의 용어를 빌자면 영광의 몸을 입게 된다. 그 몸을 입을 때가 언제냐 하면, 예수님의 재림의 말인데, 그날 주안에서 먼저 죽은 자들은 죽은 몸이 부활의 몸으로 새롭게 변하고, 살아있는 신자들은 죽음을 보지 않고, 그 몸에 부활의 몸을 덧입게 된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부모에게 물려받은 피와 살은 몽땅 부활의 몸으로 대치된다. 마치 컴퓨터에서 같은 이름의 파일을 덮어쓰기를 하면 파일 이름은 그대로지만 그 내용이 완전히 새것으로 바뀌어 지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을 통해서 장차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 바뀔지 상상해 볼 수 있다.
1) 못 자국을 그대로 가지고 계셨다. 우리 안에 주님을 위해 일한 흔적이 아마도 그대로 남아있을 것이다.
2) 시공을 초월한다.
3) 잡수신다. 즐거움을 느낀다. 참 재미있다.
4) 변형된다 제자들도 몰라보았다. 추남추녀는 한 사람도 없다.
5) 눈부시다. 요한계시록에서 부활의 몸을 입으신 주님을 요한은 감히 눈을 들어 볼 수 없었다.
셋째, 완전한 승리의 보장이 되시기 위해서 이다.
예수님이 살아계시는 한 마귀는 꼼짝 못한다. 마귀는 더 이상 우리를 소유할 수 없다. 단지 공격/유혹/넘어뜨릴 뿐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그 권세와 권능으로 마귀를 도리어 대적하고 공격할 수 있다. 마귀는 우리의 말을 무서워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말과 함께 하시는,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을 보고, 주님의 이름을 주장하는 우리 앞에서 맥을 못 추는 것이다. 그 피의 권세를 주장하라. 다 치루어 졌다. 그리고 그 증거를 확실히 증거하라. 그분이 살아나셨다. 그리고 우리와 함께하신다. 증거가 확실한데 두려워할게 뭐가 있는가
주님은 부활의 몸을 입으시고 현재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신다. 그분은 자기 대신 여호와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을 우리에게 보내서 우리 안에 계시게 하신다. 난 휴대폰 때문에 이런 놀라운 여호와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더욱 확실히 증거 할 수 있게 되어서 기쁘다.
서로 멀리 떨어져 있어도 휴대폰만 있으면 아주 가까이 있는 것처럼 느낄 수 있다. 올 하반기부터는 영상까지 되는 휴대폰이 나올 것이다. 그러면 더욱 생생하게 상대를 자기 곁에서 느낄 수 있다. 물론 음성이나 영상, 이것은 모두 가상이다. 음성을 들을 수 있으되 그가 옆에 없고, 영상을 볼 수 있으되 단지 비디오 화면이다.
그런데 주님은 온 우주에서 가장 확실한 영적 휴대폰을 사용하시어 성령님을 통해, 가상으로 우리와 함께하시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우리와 함께 하신다. 그분의 손길을 느낄 수 있다. 그분의 호흡을 알 수 있다.
만일 그분이 부활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그분을 기리기 위해 몽땅 그분의 무덤으로 가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분이 생전에 말씀하시던 죽은 자의 부활이 뭘까하며 막연할 것이다.
그런데 그분이 부활하심으로 우리는 쪼개진 무덤을 생생하게 머리 속에 그릴 수 있다. 찬란하게 다시 사는 꿈을 확실히 가질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눈을 감으면 십자가만 보지 않는다. 동시에 열린 무덤도 보아야 한다.
십자가에서 나의 모든 저주가 청산되고 나의 모든 좌절과 죽음과 고난이 못박히는 것을 보라. 나의 못난 자아가 깨지는 것을 보라.
열린 무덤에서 완전히 변화되고, 승리한 모습을 보라.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십자가를 보라. 그리고 열린 무덤에서 찬란하게 부활하신 주님과 더불어 그 안에 더불어 존재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라. 예수 죽음 내 죽음, 예수 부활, 내 부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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