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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부활 하신 주님을 볼려면

본문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비단 성경에서만이 아니라 그 당시 로마와 유대역사 속에서 객관적으로 입증되어진 사실입니다. 또한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이 그분의 죽음 이후 뿔뿔이 도망치고 숨어버린 것 또한 사실입니다.
그런데 흩어졌던 그들이 다시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더 이상 두려워하거나 떨지 아니하고, 오히려 예수의 이름을 외치며 나사렛 예수의 복음을 증거하기 시작합니다. 갈릴리를 넘고 지중해를 넘어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두사건의 역사적 반전을 어떻게 바라봐야 합니까 일부 신학자들은 이러한 현상이 3년동안이나 매달렸던 그들 자신의 일에 대한 격렬한 허무감을 만회하기 위한 몸짓이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또한 어떤 이는 로마의 압제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민중의 욕구를 부활에 투영시킨, 하나의 종교적 술책에 불과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분명히 말씀하고 계십니다.
"장사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태반이나 살아 있고 어떤 이는 잠들었으며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고전 15:4-8)
분명히 예수님의 부활은 꾸며진 일이 아니었습니다. 300년동안 믿음의 선진들이 사자굴에 들어가고 죽음을 당할때에도 그 입술 벌리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던 것은, 분명한 예수님의 부활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본 자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헌신하고 그리스도를 위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의 고백에서 우리는 '보이시고(appeared)'라는 단어를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제자들에 의한 단순한 스캔들이나, 부활에 대한 단순한 열망의 투사가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오직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들에게 찾아오셨고 부활하심을 계시적으로 나타내 보이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숨어있던 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부활을 보이셨습니다. 낙향하던 엠마오의 제자들과 동행하시며 자기를 보이셨습니다. 연약한 여인들에게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그리고 예수 믿는 자들을 박해하려 다니던 극악한 바리새인 사울에게 나타나시어 그를 당신의 종으로 삼으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계시적 나타나심은 사람들에게 불가항력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다시 부활하신 주님에게 사로잡혔습니다. 이전보다 더욱 확실하게 영생의 믿음이 충만케 되었습니다. 세상의 권력이 무섭지 않게 되었습니다. 왜 살며, 무엇 때문에 사는지가 확실케 되었습니다.
2. 계시적 나타나심
예수님의 부활이 분명한 역사적 사건임은 틀림없지만, 또 한가지 분명한 것은 누구에게나 당신의 부활하신 몸을 나타내 보이시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두 제자가 엠마오로 내려가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새로운 성을 짓고 로마의 압제에서 놓임받게 되리라고 믿고 있다가, 예수님이 돌아가시자 심히 낙심하여 자신들의 고향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처음에는 옆에 동행하고 있는 낯선 동행자가 예수님인 것을 몰랐습니다. 그러나 두 가지 이유를 통하여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첫 번째로 예수님은 구약의 말씀을 펼쳐들고, 인자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며 사흘만에 살아날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들은 저항 할 수 없이 그 말씀에 빠져들어 마음이 뜨겁게 되었습니다.
 두번째로 고향마을에 도착해 만찬을 들면서 예수님이 떡을 떼어 축사하시고 저들에게 나누어 줄 때, 비로소 그들의 눈이 밝아져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블레드리 홀트는 초기 기독교 공동체 영성의 중심은 '예배와 성례'라고 말하고 있는데, 그 근거를 오늘 본문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즉, 엠마오의 두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부활의 주님 체험은 초기 기독교회에 말씀과 성찬의 가치를 더욱 증대시켰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주님의 말씀강론과 성찬을 나누면서 교회에 나타나신 부활의 주님을 계속 만났던 것입니다. 초기 교회가 로마제국에게 핍박을 받던 시대에 '나사렛 교단은 몰래 모여서 사람의 몸과 피를 나누어 먹는 사교'라는 애매한 오해를 받았던 적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그들이 카타콤에 들어가면서도 말씀예배와 성찬을 계속 지켰던 것은 그만큼 말씀과 성찬을 통하여 부활의 주님을 지속적으로 체험할 수 있었고, 그 체험 속에서 그들은 순교의 길을 걸으면서 신앙을 굳건히 지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말씀을 읽읍시다. 겸손한 어린아이와 같이, 사슴이 목말라 시냇물을 찾음과 같이 주의 말씀을 받아 먹읍시다. 말씀을 통하여 부활의 주님을 만나기를 원합니다. 일주일에 한번이 아니라 순간순간 말씀에 빠져듭시다.
또한 성찬식을 소홀히 여겨서는 안됩니다. 성찬을 믿음으로 받아들때에 다시 살아나신 부활의 주님의 그 모습을 드러내 주실 것입니다. 이러한 소망을 갖고 말씀과 성찬을 통해 부활의 주님을 만나기를 원합니다. 이 말씀과 성찬은 그들이 안식 후 첫날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던 그 날을 기념하면서 시작된 것이기에 주일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보고자 하는 사모함으로 모였습니다. 그래서 주일은 주님의 부활의 사건을 계시적으로 체험하는 주기적 부활절이 도리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일마다 이런 부활절을 재현시킬 수 있는 예배를 드릴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말씀을 받을 때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살아있는 주님의 말씀으로 받을 때 우리들의 마음이 뜨거워지고, 주님의 죽으심을 생각하고 부활의 주님에 대한 소망을 성찬으로 나눌 때에, 주님은 우리 예배드리는 공동체에 그 찬연한 모습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3. 부활의 의미 (곧 우리들을 위한 것입니다)
엠마오로 내려가던 제자와의 만남에서, 과연 '주님의 부활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를 보여주는 계시를 발견케 됩니다. 엠마오는 갈릴리와는 반대 방향에 있는 곳입니다. 주님이 부활하시면 갈릴리로 가시겠다는 예언을 하신 적이 있는데 그들은 갈릴리로 가지 않고 그들의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주님의 십자가 사건이 그들에게 엄청난 절망을 안겨주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부활하신 주님이 나타나심으로 그들에게 비로소 고난과 죽음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해준 것입니다.
부활은 모든 고난에 의미를 가지게 해줍니다.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셨으리라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또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중거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여호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시지 아니하셨으리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사신 것이 없었을 터이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고전 15:13-19)
오늘의 세상살이는 참으로 어렵고 불안하기 그지없습니다. 이럴 때에 우리 성도들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부활의 신앙입니다. 인생의 가장 밑바닥인 죽음에까지 이르렀다가 다시 살아나신 부활의 예수님을 바라봅시다. 많이 가지고, 건강하고, 높은 지위에 있어도 우리에게 이 부활의 믿음이 없다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만일 부활하심이 없다면 우리의 믿음은 헛것이며 불쌍한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이 있기에 우리의 고난에는 의미와 가치를 가지게 되고 소망을 가지고 인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의심많았던 도마가 예수님의 찔린 손과 옆구리를 보고서야 비로소 주님의 부활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주님의 부활을 확신한 뒤에는 사도들 중에서 가장 멀리 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지금 인도에 가면 도마기념 교회가 있습니다. 그에게 임한 부활의 목도가 너무나도 명확했기에 주님의 부탁을 받은대로 세상 끝까지 가려했던 것입니다.
부활의 주님 보기를 소망합시다. "내가 너를 위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도다" 하는 부활의 음성을 사모합시다.
4. 세상이 요구하는 부활의 교회
오늘의 세상은, 도마처럼 우리에게 '부활의 흔적을 보여달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부활의 체험을 한 우리를 통하여 그 산 증인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사도행전 1:8에서 복음의 증인은 바로 '부활의 증인'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 모두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목도한 체험자로 살아갑시다.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아둥바둥하지 않고 원수 갚고자 하지 맙시다. 진정 부활을 목격한 사람은 이 땅에 소망을 두지 않고 사랑하고 희생하며 살아갑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러한 우리를 바라보고 부활의 축제에 동참하게 될 것입니다. 불신 남편, 불신 이웃들과 세상의 정욕으로 싸우지 마십시오. 부활의 신앙으로 져주고 부활의 신앙으로 참을 수 있기를 원합니다. 만방에 나아가 부활의 소식을 전합시다. 우리를 기꺼이 찢어주어 세상을 부요하게 하는 성찬의 삶을 삽시다. 그리고 성령을 받으라고 하신 주님의 명령대로 성령 충만한 삶을 살아갑시다. 이러한 믿음 속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나는 귀한 증인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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