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절] 부활의 공동체
본문
유대교가 율법주의의 허세와 위선으로 화석화되었을 때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습니다. 그가 이땅에서 하시려던 일은 조직의 교회를 설립하려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처음부터 기독교를 세울려는 목적을 가지고 오신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선민들인 이스라엘의 종교 유대교를 청소하고 그 본래의 모습으로 바꿔놓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썩은 것들을 제거하고 맑은것들로 채우려고 오셨습니다. 어둡고 침침한 구석들을 밝게 할려고 오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창조한 사람들과 그 세계와 사회가 그 본래의 창조의 질서대로 밝고 명랑한 모습으로 바꿔지도록 하기 위하여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 파송 받아 왔습니다. 그래서 우선적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택함받은 사람들부터 제대로의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하여 예수님은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비진리와 불의와 무질서로 뒤죽박죽이 된 성전과 유대교를 향하여 지극한 애정을 가지고 권고하셨고 충고하셨고 때론 무서운 질책도 했습니다.
한데 이들 이른바 선민들이 전혀 그의 말을 들어 주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유대교를 지배하던 핵심 인사들은 예수를 처음부터 죽이려고 모의를 시작했습니다. 자기들이 누리고 있는 기득권을 빼앗길까 두려워한 나머지 반성하기는 커녕 더 악 감정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선의를 거꾸로 해석하면서 그를 없앨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12제자들만을 세워 천국복음 사역에 동원시켰을 뿐 조직적인 교회 설립운동을 한 번도 한 적이 없습니다. 그의 말씀 어디에서도 조직적인 유대교 이탈운동을 부추긴 대목은 없습니다. 그는 철저히 모세의 유대교 전통에 서 있었고 다윗의 후손으로서의 전통을 지키려고 했습니다. 그의 관심사는 성전을 없애거나 유대교를 헐어버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단지 타락되고 부패된 것들의 수정과 개혁과 변혁에 온 마음을 기울였습니다. 유대교의 종교개혁을 한창 진행중인 한 복판에서 그는 잡혔습니다. 그의 개혁운동이 겨우 삼년 정도 될까 말까할 때에 그는 잡혔고 십자가의 처형으로 죽었습니다. 여기서 그의 지상에서의 공생애는 마감하였습니다. 더 이상 예수는 대중들 앞에나 유대교 성전에 나타나지 않으셨습니다. 부활후에 오직 자기를 믿는 사람들 앞에서만 보이시고는 많은 대중들 앞에는 전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소수의 무리에게 보여 주셨고 갈피를 못잡은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그들에게 확신과 용기를 주시는 정도였지, 절대로 큰 집회 앞에는 서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그는 승천하셨고 땅에서는 아무도 그의 모습을 보지 못했습니다. (조직교회 욕심이 전혀 없었음) 승천하시면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고 유언처럼 말씀하시고는 아버지께로 올라가셨습니다. 모든 족속이란 말속에 유대교의 지평을 넓힌 선교적 안목이 처음으로 보입니다. 유대인들만을 상대하지 말고 모든 족속을 포함하여 천국의 시민으로 영입하라고 명했습니다. 예수는 유대인들이 자기를 십자가 처형으로 죽이는 것을 당하시면서 선민 유대인들 가지고는 아니 되겠다고결론을 낸 것 같습니다. 이제부터는 지평을 넓혀서 새로운 여호와 하나님 나라의 운동을 벌여야 한다고 생각했었을 것입니다. 저토록 오만 불손하고 위선적인 유대교 지도자들 가지고는 종교개혁은 불가능하고 여호와 하나님의 질서 회복운동은 틀렸고 멋진 사회의 재건은 어렵다고 체험적인 판단을 내리셨습니다. 부활의 예수 그리스도가 그들에게 다시 나타났어도 그들은 믿을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토록 많은 기적과 기사를 보고서도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않았고 오히려 기적의 예수님을 땅에서 제거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니 부활후에 그들에게 나타났어도 소용없는 짓이고 오히려 이상한 거짓말을 만들어서 부활의 주님을 모독했을 것입니다. 이것을 예수님은 살아 계실 때 아셨습니다.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서 알 수 있습니다. 부자가 지옥에 떨어져서 목이 타 들어갈 때, 아브라함의 품에 안긴 거지였던 나사로를 시켜서 자기 형제들에게 이 무서운 지옥의 현실을 알려주어서 지옥불에 오지 않게 해달라고 부탁했을 때 아브라함의 말씀:"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의 말을 들으면 산다. 비록 죽은자가 다시 살아서 그들에게 가서 말할지라도 그들은 믿지 않을 것이다. " 이런 것을 아셨기에 예수님은 승천하시고 땅에 남은 제자들에게 복음의 사역을 맡겼습니다. 오늘 사도행전 본문은 베드로가 다른 사도들과 함께 대중들 앞에 나타나서 설교하는 내용입니다. 설교하는 대상들은 유대인들입니다. 이방인들이 아니었습니다. "유대사람과 모든 예루살렘 주민 여러분!" 대상이 확실합니다. 아직도 제자들의 마음에는 유대교를 이탈하여 다른 교회를 세울 생각이 있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설교의 본을 그대로 따르고 있습니다. "회개하시요. "로 시작되는 베드로의 설교 내용에는 그들이 전하는 종교가 유대교의 전통을 떠난 새로운 것이란 말은 없습니다. 단지 회개하고 사악한 세대에서 받을 벌을 면하라고 권하고 있습니다. 그 길은 여러분들이 십자가에 죽인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음에서 가능하다고 알려 주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그날 세례를 받은 사람들이 3000명이나 되었습니다. 여기서 조직이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기독교 교회가 유대교와는 별도로 조직이 시작될 수밖에 없었던 정황을 여기서 봅니다. 물론 마가의 다락방에서 120명의 신도들이 기도하다가 성령의 충만을 받아 여러 가지 다른 방언이 주어지고 그 결과로 세계 각지에서 온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됨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이후의 복음의 역사가 유대교의 범위를 넘어섰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제자들의 마음에 있는 것은 이방세계 보다는 자기들의 동족이었고 자기들이 몸담고 살던 유대교였습니다.
하지만 부활의 신앙을 체험한 저들은 마음과 생각이 전혀 달라졌습니다. 그 결과로 그들의 생활 태도나 생활양식이 전혀 달라진 모습을 사도행전의 본문이 보여줍니다. 부활의 신앙공동체의 모습이 오늘의 본문에서 밝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과거 유대교 공동체 안에서는 전혀 맛볼 수 없었던 새로운 일들이 이 복음의 공동체요 부활의 공동체 안에서 벌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과거와는 전혀 다른 공동체가 탄생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여 새로운 교회가 탄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새로운 공동체의 탄생은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남에서 시작이 되었습니다. 제자들이 부활의 주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저들은 뿔뿔이 흩어져서 세상의 생업, 예컨대 물고기나 잡으면서 일생을 살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 부활의 신앙을 체험한 저들은 달라졌습니다. 복음서에 보면 여러 가지 형태로 부활하신 주님을 저들은 만나게 됩니다. 오늘 누가복음의 본문은 예수님이 엠마오 도상에서 두 제자를 만나 변화시키시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들이 부활의 주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그렇게 달라질 수가 없었겠지요. 제자들 중에 가장 놀랍게 달라진 사람이 베드로였습니다. 베드로전서 오늘 본문에서 그가 증언하는 말씀을 들어 보세요: "그는(예수 그리스도) 창세 전부터 미리 알리신 바 된 자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 바 되었으니 너희는 저를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영광을 주신 여호와 하나님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니 너희 믿음과 소망이 여호와 하나님께 있게 하셨느니라. " 이 증언 속에서 분명하게 드러나는 사실은 베드로가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신 여호와 하나님을 확실하게 믿음에서 대 설교자로 변신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설교의 내용은 누구든지 부활하신 주님을 믿음으로써 부활의 소망을 얻을 수 있음을 확인합니다. 메시지의 핵심은 죽은자 가운데서 그리스도가 다시 사셨다는 진리이고 이것을 믿는 자는 참 소망을 소유한다는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남에서 시작이 되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사람들이 이심전심 모이기 시작했는데 그곳이 마가의 다락방이었습니다. 여기서 저들은 뜨거워졌습니다. 성령의 놀라운 은총을 체험하였습니다. 이들은 방에만 머물러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나가서 부활의 주님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베드로가 앞장을 섰습니다. 그의 놀라운 설교는 하루에 3000명을 구원시켰습니다. 상상을 불허하는 전도 역사였습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몰려오니 그리스도의 교회가 조직이 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외적인 조직의 교회가 아니었고 내적인 교회 본질이 유대교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데 있습니다. 하루 3000명씩 전도되고 세례 받아 구성된 저 초대교회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보시기 바랍니다. 저들은 첫째로 사도의 교훈을 받았습니다(42절). 기독교의 진리를 차분히 배웠습니다. 둘째로는 서로 교제하였습니다. 그 많은 사람들이 서로서로 대화와 식사를 통하여 사귀는 일을 했습니다. 그리고 기도하기를 힘썼습니다. 초대교회가 이상과 같은 공동체로 발전되면서 교인들은 물건들을 서로 같이 쓰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서 나누어 주었습니다. 초대교회 공동체의 성격이 여기에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유대교가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한 이유가 개인주의로 굳어지면서부터 였습니다. 원래 유대교는 모세가 광야에서 창건한 것입니다. 사막의 한 가운데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공급 받으면서 끈끈한 공동체로 발전했던 것입니다. 이들이 노예로 살던 애굽이 고통스러웠던 것은 애굽 본토인들의 학대와 착취였습니다. 거기에는 나눔이 없었고 사랑이 없었습니다. 인정받지 못하고 사는 노예생활은 죽은 삶이었습니다. 아무런 의미도 없는 하루 하루의 삶을 죽지 못해 살다가 해방되어 자유를 얻어 광야로 탈출한 이스라엘 사람들은 너무나 기쁘고 즐거운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비록 쌓아 논 재산은 없어도 하루하루 밥 먹으면서 동족들 서로서로 사랑하면서 사니 즐겁고 행복했습니다. 위로는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고 아래로 사람들을 사랑하면서 사니 정말 보람된 삶이었습니다. 유대교는 이렇게 아름다운 공동체로서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이들이 가나안에 들어 와서도 이런 나눔과 사랑의 공동체는 계속되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만을 절대 의지하는 신앙이 있었기에 이것이 가능했습니다. 한데 이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멀리 떠나면서, 이 생이 최고인줄로 믿으면서 저들의 삶은 다시금 옛날로 돌아가기 시작했습니다. 가진자들이었던 애굽의 사람들의 모습을 그대로 닮았던 것입니다. 나누고 사랑하는 삶이 아니고 제 욕심만을 채우는 잔인하고 이기적인 삶으로 변했습니다. 유대교는 이렇게 하여 그 기능을 상실했고 매력을 잃고 종교성을 잃었습니다. 이때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고 이 본래적인 유대교적인 삶의 방식을 회복하려고 하시다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비록 작지만 유대교의 본래적인 모습을 회복하였던 제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실망하고 좌절하여 잠시 흩어졌었으나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서 다시금 이 아름다운 공동체를 재건하고 그리고 성령의 도움으로 그런 공동체를 확산시키는 운동에 돌입했는데 그 초기의 활동모습이 오늘의 본문에서 확연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그 이후에도 계속적으로 여호와 하나님 사랑과 사람 사랑의 도를 준행하면서 세계사를 바꿔갔습니다. 여호와 하나님 없는 세상의 철학이나 문화는 인간 사랑에 인색합니다. 플라톤도 가난한 자들을 죽게함으로서 그들의 고통을 덜어 준다고 말했고 세네카도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가난하고 연약한 사람들을 도울 필요가 없다고 했습니다. 세상의 윤리는 약육강식입니다. 오로지 이 생이 전부이기에 그렇게 밖에는 생각하지 못했고 그렇게 밖에는 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구약과 신약의 여호와 하나님의 윤리는 철저하게 약한자를 돌보고 없는자와 나누라고 권합니다. 물질 자체가 아니고 그 배후에서 그 물질을 창조하시고 또 주시는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이 절대적임을 믿는자라면 세속의 잘못된 윤리를 따르지 않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합니다.
처음 부활의 예수님을 믿은 성도들에게는 세상의 보화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고 영원한 부활의 소망이 더 벅차게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지상에서의 말씀과 삶의 스타일에 관심을 쏟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베드로와 기타 제자들과 그의 말을 듣고 믿은 부활의 공동체의 회원들은 모두가 오늘 사도행전의 본문에서 보시는 대로 제것을 제것이라 하지 않고 내어 놓았습니다. 죽음을 극복시키셨고 영원한 생명을 확증해 주신 그 은혜에 도취되어 자기의 것을 아낌없이 나눠 주었던 것입니다. 우리 교회 공동체도 이 초대교회의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우리의 기력이 쇄하여 더 이상 우리들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게 되기 전에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적은것이라도 다른 사람과 나누면서 사는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정리:1)말씀을 배웁시다. 2)서로 교제합시다. 3)가진 것을 서로 나눕시다. 4)그리고 성전에 모여 예배합시다.
한데 이들 이른바 선민들이 전혀 그의 말을 들어 주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유대교를 지배하던 핵심 인사들은 예수를 처음부터 죽이려고 모의를 시작했습니다. 자기들이 누리고 있는 기득권을 빼앗길까 두려워한 나머지 반성하기는 커녕 더 악 감정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선의를 거꾸로 해석하면서 그를 없앨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12제자들만을 세워 천국복음 사역에 동원시켰을 뿐 조직적인 교회 설립운동을 한 번도 한 적이 없습니다. 그의 말씀 어디에서도 조직적인 유대교 이탈운동을 부추긴 대목은 없습니다. 그는 철저히 모세의 유대교 전통에 서 있었고 다윗의 후손으로서의 전통을 지키려고 했습니다. 그의 관심사는 성전을 없애거나 유대교를 헐어버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단지 타락되고 부패된 것들의 수정과 개혁과 변혁에 온 마음을 기울였습니다. 유대교의 종교개혁을 한창 진행중인 한 복판에서 그는 잡혔습니다. 그의 개혁운동이 겨우 삼년 정도 될까 말까할 때에 그는 잡혔고 십자가의 처형으로 죽었습니다. 여기서 그의 지상에서의 공생애는 마감하였습니다. 더 이상 예수는 대중들 앞에나 유대교 성전에 나타나지 않으셨습니다. 부활후에 오직 자기를 믿는 사람들 앞에서만 보이시고는 많은 대중들 앞에는 전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소수의 무리에게 보여 주셨고 갈피를 못잡은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그들에게 확신과 용기를 주시는 정도였지, 절대로 큰 집회 앞에는 서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그는 승천하셨고 땅에서는 아무도 그의 모습을 보지 못했습니다. (조직교회 욕심이 전혀 없었음) 승천하시면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고 유언처럼 말씀하시고는 아버지께로 올라가셨습니다. 모든 족속이란 말속에 유대교의 지평을 넓힌 선교적 안목이 처음으로 보입니다. 유대인들만을 상대하지 말고 모든 족속을 포함하여 천국의 시민으로 영입하라고 명했습니다. 예수는 유대인들이 자기를 십자가 처형으로 죽이는 것을 당하시면서 선민 유대인들 가지고는 아니 되겠다고결론을 낸 것 같습니다. 이제부터는 지평을 넓혀서 새로운 여호와 하나님 나라의 운동을 벌여야 한다고 생각했었을 것입니다. 저토록 오만 불손하고 위선적인 유대교 지도자들 가지고는 종교개혁은 불가능하고 여호와 하나님의 질서 회복운동은 틀렸고 멋진 사회의 재건은 어렵다고 체험적인 판단을 내리셨습니다. 부활의 예수 그리스도가 그들에게 다시 나타났어도 그들은 믿을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토록 많은 기적과 기사를 보고서도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않았고 오히려 기적의 예수님을 땅에서 제거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니 부활후에 그들에게 나타났어도 소용없는 짓이고 오히려 이상한 거짓말을 만들어서 부활의 주님을 모독했을 것입니다. 이것을 예수님은 살아 계실 때 아셨습니다.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서 알 수 있습니다. 부자가 지옥에 떨어져서 목이 타 들어갈 때, 아브라함의 품에 안긴 거지였던 나사로를 시켜서 자기 형제들에게 이 무서운 지옥의 현실을 알려주어서 지옥불에 오지 않게 해달라고 부탁했을 때 아브라함의 말씀:"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의 말을 들으면 산다. 비록 죽은자가 다시 살아서 그들에게 가서 말할지라도 그들은 믿지 않을 것이다. " 이런 것을 아셨기에 예수님은 승천하시고 땅에 남은 제자들에게 복음의 사역을 맡겼습니다. 오늘 사도행전 본문은 베드로가 다른 사도들과 함께 대중들 앞에 나타나서 설교하는 내용입니다. 설교하는 대상들은 유대인들입니다. 이방인들이 아니었습니다. "유대사람과 모든 예루살렘 주민 여러분!" 대상이 확실합니다. 아직도 제자들의 마음에는 유대교를 이탈하여 다른 교회를 세울 생각이 있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설교의 본을 그대로 따르고 있습니다. "회개하시요. "로 시작되는 베드로의 설교 내용에는 그들이 전하는 종교가 유대교의 전통을 떠난 새로운 것이란 말은 없습니다. 단지 회개하고 사악한 세대에서 받을 벌을 면하라고 권하고 있습니다. 그 길은 여러분들이 십자가에 죽인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음에서 가능하다고 알려 주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그날 세례를 받은 사람들이 3000명이나 되었습니다. 여기서 조직이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기독교 교회가 유대교와는 별도로 조직이 시작될 수밖에 없었던 정황을 여기서 봅니다. 물론 마가의 다락방에서 120명의 신도들이 기도하다가 성령의 충만을 받아 여러 가지 다른 방언이 주어지고 그 결과로 세계 각지에서 온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됨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이후의 복음의 역사가 유대교의 범위를 넘어섰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제자들의 마음에 있는 것은 이방세계 보다는 자기들의 동족이었고 자기들이 몸담고 살던 유대교였습니다.
하지만 부활의 신앙을 체험한 저들은 마음과 생각이 전혀 달라졌습니다. 그 결과로 그들의 생활 태도나 생활양식이 전혀 달라진 모습을 사도행전의 본문이 보여줍니다. 부활의 신앙공동체의 모습이 오늘의 본문에서 밝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과거 유대교 공동체 안에서는 전혀 맛볼 수 없었던 새로운 일들이 이 복음의 공동체요 부활의 공동체 안에서 벌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과거와는 전혀 다른 공동체가 탄생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여 새로운 교회가 탄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새로운 공동체의 탄생은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남에서 시작이 되었습니다. 제자들이 부활의 주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저들은 뿔뿔이 흩어져서 세상의 생업, 예컨대 물고기나 잡으면서 일생을 살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 부활의 신앙을 체험한 저들은 달라졌습니다. 복음서에 보면 여러 가지 형태로 부활하신 주님을 저들은 만나게 됩니다. 오늘 누가복음의 본문은 예수님이 엠마오 도상에서 두 제자를 만나 변화시키시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들이 부활의 주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그렇게 달라질 수가 없었겠지요. 제자들 중에 가장 놀랍게 달라진 사람이 베드로였습니다. 베드로전서 오늘 본문에서 그가 증언하는 말씀을 들어 보세요: "그는(예수 그리스도) 창세 전부터 미리 알리신 바 된 자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 바 되었으니 너희는 저를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영광을 주신 여호와 하나님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니 너희 믿음과 소망이 여호와 하나님께 있게 하셨느니라. " 이 증언 속에서 분명하게 드러나는 사실은 베드로가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신 여호와 하나님을 확실하게 믿음에서 대 설교자로 변신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설교의 내용은 누구든지 부활하신 주님을 믿음으로써 부활의 소망을 얻을 수 있음을 확인합니다. 메시지의 핵심은 죽은자 가운데서 그리스도가 다시 사셨다는 진리이고 이것을 믿는 자는 참 소망을 소유한다는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남에서 시작이 되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사람들이 이심전심 모이기 시작했는데 그곳이 마가의 다락방이었습니다. 여기서 저들은 뜨거워졌습니다. 성령의 놀라운 은총을 체험하였습니다. 이들은 방에만 머물러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나가서 부활의 주님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베드로가 앞장을 섰습니다. 그의 놀라운 설교는 하루에 3000명을 구원시켰습니다. 상상을 불허하는 전도 역사였습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몰려오니 그리스도의 교회가 조직이 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외적인 조직의 교회가 아니었고 내적인 교회 본질이 유대교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데 있습니다. 하루 3000명씩 전도되고 세례 받아 구성된 저 초대교회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보시기 바랍니다. 저들은 첫째로 사도의 교훈을 받았습니다(42절). 기독교의 진리를 차분히 배웠습니다. 둘째로는 서로 교제하였습니다. 그 많은 사람들이 서로서로 대화와 식사를 통하여 사귀는 일을 했습니다. 그리고 기도하기를 힘썼습니다. 초대교회가 이상과 같은 공동체로 발전되면서 교인들은 물건들을 서로 같이 쓰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서 나누어 주었습니다. 초대교회 공동체의 성격이 여기에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유대교가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한 이유가 개인주의로 굳어지면서부터 였습니다. 원래 유대교는 모세가 광야에서 창건한 것입니다. 사막의 한 가운데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공급 받으면서 끈끈한 공동체로 발전했던 것입니다. 이들이 노예로 살던 애굽이 고통스러웠던 것은 애굽 본토인들의 학대와 착취였습니다. 거기에는 나눔이 없었고 사랑이 없었습니다. 인정받지 못하고 사는 노예생활은 죽은 삶이었습니다. 아무런 의미도 없는 하루 하루의 삶을 죽지 못해 살다가 해방되어 자유를 얻어 광야로 탈출한 이스라엘 사람들은 너무나 기쁘고 즐거운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비록 쌓아 논 재산은 없어도 하루하루 밥 먹으면서 동족들 서로서로 사랑하면서 사니 즐겁고 행복했습니다. 위로는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고 아래로 사람들을 사랑하면서 사니 정말 보람된 삶이었습니다. 유대교는 이렇게 아름다운 공동체로서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이들이 가나안에 들어 와서도 이런 나눔과 사랑의 공동체는 계속되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만을 절대 의지하는 신앙이 있었기에 이것이 가능했습니다. 한데 이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멀리 떠나면서, 이 생이 최고인줄로 믿으면서 저들의 삶은 다시금 옛날로 돌아가기 시작했습니다. 가진자들이었던 애굽의 사람들의 모습을 그대로 닮았던 것입니다. 나누고 사랑하는 삶이 아니고 제 욕심만을 채우는 잔인하고 이기적인 삶으로 변했습니다. 유대교는 이렇게 하여 그 기능을 상실했고 매력을 잃고 종교성을 잃었습니다. 이때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고 이 본래적인 유대교적인 삶의 방식을 회복하려고 하시다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비록 작지만 유대교의 본래적인 모습을 회복하였던 제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실망하고 좌절하여 잠시 흩어졌었으나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서 다시금 이 아름다운 공동체를 재건하고 그리고 성령의 도움으로 그런 공동체를 확산시키는 운동에 돌입했는데 그 초기의 활동모습이 오늘의 본문에서 확연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그 이후에도 계속적으로 여호와 하나님 사랑과 사람 사랑의 도를 준행하면서 세계사를 바꿔갔습니다. 여호와 하나님 없는 세상의 철학이나 문화는 인간 사랑에 인색합니다. 플라톤도 가난한 자들을 죽게함으로서 그들의 고통을 덜어 준다고 말했고 세네카도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가난하고 연약한 사람들을 도울 필요가 없다고 했습니다. 세상의 윤리는 약육강식입니다. 오로지 이 생이 전부이기에 그렇게 밖에는 생각하지 못했고 그렇게 밖에는 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구약과 신약의 여호와 하나님의 윤리는 철저하게 약한자를 돌보고 없는자와 나누라고 권합니다. 물질 자체가 아니고 그 배후에서 그 물질을 창조하시고 또 주시는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이 절대적임을 믿는자라면 세속의 잘못된 윤리를 따르지 않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합니다.
처음 부활의 예수님을 믿은 성도들에게는 세상의 보화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고 영원한 부활의 소망이 더 벅차게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지상에서의 말씀과 삶의 스타일에 관심을 쏟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베드로와 기타 제자들과 그의 말을 듣고 믿은 부활의 공동체의 회원들은 모두가 오늘 사도행전의 본문에서 보시는 대로 제것을 제것이라 하지 않고 내어 놓았습니다. 죽음을 극복시키셨고 영원한 생명을 확증해 주신 그 은혜에 도취되어 자기의 것을 아낌없이 나눠 주었던 것입니다. 우리 교회 공동체도 이 초대교회의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우리의 기력이 쇄하여 더 이상 우리들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게 되기 전에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적은것이라도 다른 사람과 나누면서 사는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정리:1)말씀을 배웁시다. 2)서로 교제합시다. 3)가진 것을 서로 나눕시다. 4)그리고 성전에 모여 예배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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