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절] 부활하신 주님의 능력있는 증인이 됩시다
본문
오늘은 예수님이 죽음의 권세를 깨버리시고 다시 살아나신 부활절입니다.
부활이라는 것은 단순한 상징이 아닙니다.
부활은 죽음이라는 실제적인 세력을 깨버린 능력입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부활을 능력으로 생각하기 보다는 단순히 기념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부활을 기념할 것이 아니라 체험해야 할 내용이라고 말합니다. 과거에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만이 아니라 부활하신 그 예수님이 지금도 나와 함께 역사하신다는 것과 내 속에서 지금도 일하고 계신다는 체험이 있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에서 소개하는 부활의 능력이 임한 제자들의 삶을 보면 우선적으로 능력의 삶이었으며 죽어가는 영혼들을 변화시키는 삶이었고 많은 영혼들에게 생명을 주는 삶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부활 주일을 맞이하여 "부활하신 주님의 능력있는 증인이
됩시다"라는 제목으로 본문에서 소개하는 두 제자를 조명하여 여호와 하나님 앞에
서 성도 여러분과 함께 은혜받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1. 두 제자의 잘못은
1) 삶의 현장을 떠났습니다.
그들은 일하던 곳, 다른 제자들과 함께 어울려 살던 예루살렘을 떠났습니다.
13절을 보면 "그 날에"라고 했는데 그 뜻은 "부활하신 그 날 예루살렘을 떠나 엠마오로 내려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너무 성급하게, 조급하게 떠난 것입니다. 우리는 세 가지를 경계해야 하는데 그것은 방관주의, 회피주의, 도피주의입니다. 방관은 무관심이고 회피는 편의주의이며 도피는 적극적 외면이며 부인입니다. 이 세 가지는 모두 나쁜 것입니다.
예를 들면, 두 제자가 한 달정도 예루살렘에서 고통받다가 떠났다면 이해가 되지만 그러나 그날 더욱이 부활의 소식이 퍼져나가고 있는 예루살렘을 떠난 것은 제 아무리 미화하고 호평을 한다 해도 이해되지 않는 처사였습니다.
오늘날 성도들의 특징은 방관자 회피자 도피자가 되어 필요하면 내밀고 불리하면 움추리는데 익숙하다는 것입니다. 고현의 성도 여러분! 떠나면 안됩니다.
왜냐하면 부활의 현장을 떠난다는 것은 믿음이 떠났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2)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16절을 보면 "저희의 눈이 가리워져서 그 인줄 알아보지 못하거늘"이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충격을 받거나 손상을 입으면 기억 상실증에 걸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의 경우는 사흘 전까지 곁에 있었던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한마디로 비극입니다. "눈이 가리워졌다"는 것은 신령한 것과 신령한 세계를 보는 눈이 어두워졌다는 것입니다. 안과 의사들에 의하면 사람의 눈에 발생할 수 있는 질환이 수 십가지라고 말합니다. 그 가운데 가장 심각한 질환은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보지 못하는 질환 중에 가장 큰 질환은 신령한 것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네 개의 눈이 필요합니다. 사물을 보는 눈, 이웃을 보는 눈, 세계를 보는 눈, 여호와 하나님을 바라보는 눈입니다. 그 중에 여호와 하나님을 바라보는 눈은 믿음이라는 보조수단이 없는 한 보이지 않는 눈으로서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아야 하는 눈입니다. 그런데 현대인은 그 눈이 점점 어두워져 가고 있습니다. 중세기는 천주교의 교리와 성물숭배가 믿음의 눈을 어둡게 했습니다.
그래서 교회사적으로 그때를 암흑기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오늘날 현대인들은 인간의 지식과 과학문명이 여호와 하나님을 바라보는
눈을 가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분명히 주목해야 할 것은 여기 두 제자의 경우 신령한 눈이 어두워졌기 때문에 곁에 계시는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3) 말씀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길을 가면서 그들은 예수님과 이야기를 주고 받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성경을 풀어주는데도 깨닫지 못했습니다.
정상적인 인격을 가진 사람이라면 네가지 단계의 결단이 필요합니다.
첫째는 듣는 것이요
둘째는 느끼는 것이요
셋째는, 깨닫는 것이요
넷째는 실천하는 것입니다.
듣기는 듣는데 느낌이 없다든지, 느끼긴 하지만 깨달음이 없다든지, 깨닫긴
깨닫는데 실천이 없다면 인격을 갖춘 사람이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두 제자가 말씀을 깨닫지 못한 원인을 25절이 밝혀주고 있는데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라고 했습니다. 여기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이란 예수님의 부활을 예언한 선지자들의 예언을 의미합니다. 그 예언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도 믿지 못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구약을 믿지 못하는 사람은 신약도 믿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믿는 일에 익숙한 사람은 무엇이나 잘 믿습니다.
그러나 안믿고 의심하는데 길들여져 있는 사람은 무엇이나 안믿고 믿지 못
합니다. 때문에 안믿기로 작정한 사람은 예수님이 직접 말씀을 하셔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4)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남의 이야기처럼 말했습니다.
그들은 길을 걸어가면서 예수님과 예수님 자신의 부활이야기를 주고 받으
면서 마치 남의 이야기처럼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만일 두 제자가 부활 신앙이 확실했더라면 이렇게 말했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직접 다시 사신 예수님을 만나지는 못했지만 그 분은 반드시 사흘만에 살아나셨고 우리는 그것을 믿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속담에 "남의 얘기하듯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자기 부모나 처자를 그리고 남편을 남처럼 여기거나 말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그리고 내가 믿는 예수님을 남처럼 여기는 것은 더 큰 잘못입니다.
그리고 내가 다니고 은혜받는 내 교회를 남의 교회처럼 생각하는 것도 큰
잘못입니다.
2. 이러한 두 제자들이 변화된 이유는
두 제자의 이야기는 부정적으로 끝나지 않고 그들의 삶에 놀랍고도 새로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1) 시각이 변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눈이 밝아졌습니다.
그들은 밝아진 눈으로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눈이 밝아져 허물과 자신들의 벌거벗은 수치를 보았습니다.
그러나 신령한 눈이 밝아지면 예수님이 보이고 천국이 보이고 영원한 세계
가 보입니다. 반대로 죄의 눈이 밝아지면 세상 것들이 보이고, 쾌락이 보이고, 죄 짓는 법이 보이고, 불의한 길이 보입니다.
중요한 것은 두 제자의 눈이 언제 어떻게 밝아졌느냐 하는 것인데 30절을 보면 "저희와 함께 음식잡수실 때"라고 했고 31절을 보면 "저희 눈이 밝아져 그 인줄 알아 보더니"라고 했습니다. 함께 음식을 먹었다는 것은 예수님과의 격의 없는 교제를 의미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과 만나고 교제하는 사람은 눈과 마음이 열려있지만 그러나 악한 사
람과 교제하고 먹고 마시면 금방 악을 닮는 것입니다. 때문에 내가 신령한 눈을 떠서 예수님을 보려면 그분과 만나고 늘 교제해야 하며 함께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2) 심령이 변했습니다.
32절을 보면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
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라고 했습니다. 마음이 뜨겁다는 것은 성령체험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그날 거기서 성령을 받고 모든 것이 변했습니다. 냉소적인 신앙이 불처럼 뜨거운 신앙으로 침체되었던 신앙이 되살아나는 신앙으로 탕진되었던 신앙이 활기찬 신앙으로 의심하던 신앙이 확신하는 신앙으로 회복되었습니다.
언제 뜨거워졌습니까
32절을 보면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라고
했습니다. 즉 그들은 길에서 성경 말씀을 듣다가 성령을 받은 것입니다.
행 10장을 보면 고넬료가 베드로를 자기 집으로 초청하여 예수님의 십자가
와 부활에 대한 말씀을 듣는 중에 성령이 강림하여 고넬료를 비롯하여 가족
들이 심령에 뜨거움을 체험하고 방언을 하게 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우리는 이 사건 속에서 말씀과 성령의 깊은 관계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말씀을 통한 성령의 역사와 운동이 바람직하다는 것도 발견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말씀을 외면하거나 말씀을 소홀히 취급하는 성령운동은 탈선하기 쉽다는
것과 그리고 그날 두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성령을 받아 심령이
변했다는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3) 행동이 변했습니다.
33절을 보면 "곧 그시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보니"라고 했습니다.
행동이 없는 변화는 참 변화가 아닙니다. 만일 그들이 예수님인 줄 알고 마음이 뜨거워진 뒤에도 그냥 엠마오로 내려갔다면 부활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곧 그시로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이것이 신앙의 결단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성도의 신앙이 떨어지면 예루살렘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신앙이 회복되면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참 회개는 미룰 필요도 없고 늦출 필요도 없고 즉시 해야 합니다. 예루살렘을 떠났던 그들이 곧 그시로 돌아온 것은 회개의 신속성을 의미합니다. 여기 예루살렘은 부활의 현장, 선교의 현장, 사명의 현장입니다. 두 제자는 돌아와 길에서 만난 예수님을 증거했습니다. 36절을 보면 "그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다시 사신 예수님을 증거하고 있을 때 예수님은 다시 나타나 그들에게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돌아온 사람들, 회개한 사람들, 부활의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께
서는 평강을 주십니다. 우리 성도님들도 주님과 교제하며말씀을 듣고 배움으로 불처럼 뜨거운 성령을 체험하시고 신령한 눈이 열려 즉각적이고 능동적인 행동으로 부활의 현장, 사명의 현장으로 돌아와 부활하신 예수님을 힘있게 증거하시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부활이라는 것은 단순한 상징이 아닙니다.
부활은 죽음이라는 실제적인 세력을 깨버린 능력입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부활을 능력으로 생각하기 보다는 단순히 기념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부활을 기념할 것이 아니라 체험해야 할 내용이라고 말합니다. 과거에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만이 아니라 부활하신 그 예수님이 지금도 나와 함께 역사하신다는 것과 내 속에서 지금도 일하고 계신다는 체험이 있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에서 소개하는 부활의 능력이 임한 제자들의 삶을 보면 우선적으로 능력의 삶이었으며 죽어가는 영혼들을 변화시키는 삶이었고 많은 영혼들에게 생명을 주는 삶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부활 주일을 맞이하여 "부활하신 주님의 능력있는 증인이
됩시다"라는 제목으로 본문에서 소개하는 두 제자를 조명하여 여호와 하나님 앞에
서 성도 여러분과 함께 은혜받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1. 두 제자의 잘못은
1) 삶의 현장을 떠났습니다.
그들은 일하던 곳, 다른 제자들과 함께 어울려 살던 예루살렘을 떠났습니다.
13절을 보면 "그 날에"라고 했는데 그 뜻은 "부활하신 그 날 예루살렘을 떠나 엠마오로 내려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너무 성급하게, 조급하게 떠난 것입니다. 우리는 세 가지를 경계해야 하는데 그것은 방관주의, 회피주의, 도피주의입니다. 방관은 무관심이고 회피는 편의주의이며 도피는 적극적 외면이며 부인입니다. 이 세 가지는 모두 나쁜 것입니다.
예를 들면, 두 제자가 한 달정도 예루살렘에서 고통받다가 떠났다면 이해가 되지만 그러나 그날 더욱이 부활의 소식이 퍼져나가고 있는 예루살렘을 떠난 것은 제 아무리 미화하고 호평을 한다 해도 이해되지 않는 처사였습니다.
오늘날 성도들의 특징은 방관자 회피자 도피자가 되어 필요하면 내밀고 불리하면 움추리는데 익숙하다는 것입니다. 고현의 성도 여러분! 떠나면 안됩니다.
왜냐하면 부활의 현장을 떠난다는 것은 믿음이 떠났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2)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16절을 보면 "저희의 눈이 가리워져서 그 인줄 알아보지 못하거늘"이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충격을 받거나 손상을 입으면 기억 상실증에 걸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의 경우는 사흘 전까지 곁에 있었던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한마디로 비극입니다. "눈이 가리워졌다"는 것은 신령한 것과 신령한 세계를 보는 눈이 어두워졌다는 것입니다. 안과 의사들에 의하면 사람의 눈에 발생할 수 있는 질환이 수 십가지라고 말합니다. 그 가운데 가장 심각한 질환은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보지 못하는 질환 중에 가장 큰 질환은 신령한 것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네 개의 눈이 필요합니다. 사물을 보는 눈, 이웃을 보는 눈, 세계를 보는 눈, 여호와 하나님을 바라보는 눈입니다. 그 중에 여호와 하나님을 바라보는 눈은 믿음이라는 보조수단이 없는 한 보이지 않는 눈으로서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아야 하는 눈입니다. 그런데 현대인은 그 눈이 점점 어두워져 가고 있습니다. 중세기는 천주교의 교리와 성물숭배가 믿음의 눈을 어둡게 했습니다.
그래서 교회사적으로 그때를 암흑기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오늘날 현대인들은 인간의 지식과 과학문명이 여호와 하나님을 바라보는
눈을 가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분명히 주목해야 할 것은 여기 두 제자의 경우 신령한 눈이 어두워졌기 때문에 곁에 계시는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3) 말씀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길을 가면서 그들은 예수님과 이야기를 주고 받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성경을 풀어주는데도 깨닫지 못했습니다.
정상적인 인격을 가진 사람이라면 네가지 단계의 결단이 필요합니다.
첫째는 듣는 것이요
둘째는 느끼는 것이요
셋째는, 깨닫는 것이요
넷째는 실천하는 것입니다.
듣기는 듣는데 느낌이 없다든지, 느끼긴 하지만 깨달음이 없다든지, 깨닫긴
깨닫는데 실천이 없다면 인격을 갖춘 사람이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두 제자가 말씀을 깨닫지 못한 원인을 25절이 밝혀주고 있는데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라고 했습니다. 여기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이란 예수님의 부활을 예언한 선지자들의 예언을 의미합니다. 그 예언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도 믿지 못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구약을 믿지 못하는 사람은 신약도 믿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믿는 일에 익숙한 사람은 무엇이나 잘 믿습니다.
그러나 안믿고 의심하는데 길들여져 있는 사람은 무엇이나 안믿고 믿지 못
합니다. 때문에 안믿기로 작정한 사람은 예수님이 직접 말씀을 하셔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4)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남의 이야기처럼 말했습니다.
그들은 길을 걸어가면서 예수님과 예수님 자신의 부활이야기를 주고 받으
면서 마치 남의 이야기처럼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만일 두 제자가 부활 신앙이 확실했더라면 이렇게 말했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직접 다시 사신 예수님을 만나지는 못했지만 그 분은 반드시 사흘만에 살아나셨고 우리는 그것을 믿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속담에 "남의 얘기하듯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자기 부모나 처자를 그리고 남편을 남처럼 여기거나 말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그리고 내가 믿는 예수님을 남처럼 여기는 것은 더 큰 잘못입니다.
그리고 내가 다니고 은혜받는 내 교회를 남의 교회처럼 생각하는 것도 큰
잘못입니다.
2. 이러한 두 제자들이 변화된 이유는
두 제자의 이야기는 부정적으로 끝나지 않고 그들의 삶에 놀랍고도 새로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1) 시각이 변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눈이 밝아졌습니다.
그들은 밝아진 눈으로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눈이 밝아져 허물과 자신들의 벌거벗은 수치를 보았습니다.
그러나 신령한 눈이 밝아지면 예수님이 보이고 천국이 보이고 영원한 세계
가 보입니다. 반대로 죄의 눈이 밝아지면 세상 것들이 보이고, 쾌락이 보이고, 죄 짓는 법이 보이고, 불의한 길이 보입니다.
중요한 것은 두 제자의 눈이 언제 어떻게 밝아졌느냐 하는 것인데 30절을 보면 "저희와 함께 음식잡수실 때"라고 했고 31절을 보면 "저희 눈이 밝아져 그 인줄 알아 보더니"라고 했습니다. 함께 음식을 먹었다는 것은 예수님과의 격의 없는 교제를 의미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과 만나고 교제하는 사람은 눈과 마음이 열려있지만 그러나 악한 사
람과 교제하고 먹고 마시면 금방 악을 닮는 것입니다. 때문에 내가 신령한 눈을 떠서 예수님을 보려면 그분과 만나고 늘 교제해야 하며 함께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2) 심령이 변했습니다.
32절을 보면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
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라고 했습니다. 마음이 뜨겁다는 것은 성령체험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그날 거기서 성령을 받고 모든 것이 변했습니다. 냉소적인 신앙이 불처럼 뜨거운 신앙으로 침체되었던 신앙이 되살아나는 신앙으로 탕진되었던 신앙이 활기찬 신앙으로 의심하던 신앙이 확신하는 신앙으로 회복되었습니다.
언제 뜨거워졌습니까
32절을 보면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라고
했습니다. 즉 그들은 길에서 성경 말씀을 듣다가 성령을 받은 것입니다.
행 10장을 보면 고넬료가 베드로를 자기 집으로 초청하여 예수님의 십자가
와 부활에 대한 말씀을 듣는 중에 성령이 강림하여 고넬료를 비롯하여 가족
들이 심령에 뜨거움을 체험하고 방언을 하게 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우리는 이 사건 속에서 말씀과 성령의 깊은 관계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말씀을 통한 성령의 역사와 운동이 바람직하다는 것도 발견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말씀을 외면하거나 말씀을 소홀히 취급하는 성령운동은 탈선하기 쉽다는
것과 그리고 그날 두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성령을 받아 심령이
변했다는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3) 행동이 변했습니다.
33절을 보면 "곧 그시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보니"라고 했습니다.
행동이 없는 변화는 참 변화가 아닙니다. 만일 그들이 예수님인 줄 알고 마음이 뜨거워진 뒤에도 그냥 엠마오로 내려갔다면 부활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곧 그시로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이것이 신앙의 결단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성도의 신앙이 떨어지면 예루살렘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신앙이 회복되면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참 회개는 미룰 필요도 없고 늦출 필요도 없고 즉시 해야 합니다. 예루살렘을 떠났던 그들이 곧 그시로 돌아온 것은 회개의 신속성을 의미합니다. 여기 예루살렘은 부활의 현장, 선교의 현장, 사명의 현장입니다. 두 제자는 돌아와 길에서 만난 예수님을 증거했습니다. 36절을 보면 "그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다시 사신 예수님을 증거하고 있을 때 예수님은 다시 나타나 그들에게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돌아온 사람들, 회개한 사람들, 부활의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께
서는 평강을 주십니다. 우리 성도님들도 주님과 교제하며말씀을 듣고 배움으로 불처럼 뜨거운 성령을 체험하시고 신령한 눈이 열려 즉각적이고 능동적인 행동으로 부활의 현장, 사명의 현장으로 돌아와 부활하신 예수님을 힘있게 증거하시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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